인류를 파괴한 악마적 사상들지상에서 낙원을 만든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사회를 강압적으로 개조하려했던 공산주의, 나치즘, 파시즘을 포함해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의 배후에는 악마를 숭배하는 비밀조직이 있었다. 이들의 계획은 기독교 말살과 시민정부의 전복을 목적으로 수세기에 걸쳐 하나의 맥을 이으면서 은밀하고 조직적이며 치밀하게 진행되어 왔다. 이번에는 제1차 세계대전을 배후에서 조종한 비밀조직의 실체를 밝힌다.<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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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사라예보 사건`(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사건) |
제1차 세계대전과 비밀조직 `크루나루카`“대공(오스트리아 황태자)은 자신의 생명을 노리는 위험이 다가왔음을 잘 알고 있었다. 전쟁이 있기 일년 전, 그는 내게 프리메이슨들이 자신을 제거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내게 암살이 착수된 곳으로 알려지고 있는 마을까지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는 이 사실에 대해 알고 있는 몇 몇 헝가리인과 오스트리아 정치인들의 이름을 언급했다.”(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 외무대신 ‘체르닌’著, ‘In the World War’(1919)에서)
그동안 일반역사학자들은 제1차 세계대전을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영국*프랑스*러시아 등의 연합국과 독일*오스트리아 등의 동맹국 사이에 벌어진 세계 규모의 제국주의적 전쟁이었다고 설명해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일부 역사학자들에 의해 제1차 세계대전의 배후에는 프리메이슨으로 알려진 비밀조직들이 베르사이유 평화조약과 유럽 전제왕정의 몰락, 그리고 기독교 세계의 파괴라는 자신들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세계 전쟁을 유발시켰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본지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이들이 어떤 수법으로 분쟁을 조장해 세계대전을 유발시켰는지 살펴본다.
합스부르그 왕가와 세르비아의 대립제1차 세계대전의 직접적인 원인은 ‘유럽의 화약고’인 발칸(Balkan)반도를 둘러싼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1867~1918년까지 존속)의 대립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합스부르크왕가의 영도아래 기독교 문화권에 속했던 발칸의 서북쪽에서는 현대 자본주의의 뿌리라 할 수 있는 과학혁명, 르네상스, 종교개혁이 이뤄지고 있었다. 그러나 터키제국에 속했던 세르비아*알바니아*마케도니아 등은 서구문명의 발전사와 격리된 채 아시아적 생활양식을 깊이 받아들였다.
특히 알바니아인들의 경우 대거 회교도로 개종하기도 했으며 보스니아에서도 회교도가 생겨났다. 이로 인해 이 지역은 유럽적인 국가발전이 중단되고 서유럽 역사와도 분리되고 말았다. 이런 가운데 19세기 들어서면서 슬라브 민족주의가 태동하게 된다. 이전까지만 해도 발칸반도 내에서는 민족주의의 맹아라고 할 만한 민족의식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데다 민족간 교류도 거의 없었다. 그러다 크로아티아를 중심으로 슬라브 내 모든 민족간의 공존과 동등한 권리를 전제로 한 ‘발칸통일’논리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특히 터키로부터 독립을 쟁취해 대(大)세르비아를 실현해 가려던 세르비아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왕가에 복속된 채 슬라브민족주의를 슬로건으로 이 두 세력간의 경쟁은 20세기 들면서부터 본격화 된다. 특히 190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 틈을 이용해 세르비아에서는 군부를 중심으로 대(大)세르비아주의를 실현하려는 세력들이 집결하기 시작했다.
비밀결사단체, ‘크루나루카’(黑手組)당시 군부에서 만들어진 가장 대표적인 비밀결사단체로는 1911년 육군 대령인 디미트리예비치(Dragutin Dimitrijevic*세르비아 정보부장)와 탄코시치(Voja Tankosic*소령) 그리고 시가노비치(Milan Ciganovic)가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크르나루카’(Crna Ruka*영어명-Black Hand)라는 프리메이슨 조직이 있었다.
당시 이들은 대중에게 자신들의 목적이 폭력을 통한 대(大)세르비아의 건설이라고 주장하면서 직*간접적으로 보스니아거주 세르비아인들을 선전*선동했다. 당시 이 조직의 1차 목표는 보스니아를 합병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요인암살이었다. 실제로 1911년 디미트리예비치는 크르나루카의 조직원들을 시켜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조셉 황제의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게 된다.
이후 그는 메메드바시치(Muhamed Mehmedbasic)를 고용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주지사인 포티오렉(Gen. Oskar Potiorek)장군에 대한 암살을 시도했으나 이 또한 실패하게 된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에 이르러 크루나루카는 단원 수만 2500여명에 달하는 거대한 조직이 된다. 특히 크루나루카의 조직원들은 대부분이 변호사, 언론인, 대학 교수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며 이들 가운데 30여명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거주하고 있었다.
한편 크루나루카는 6번에 걸친 오스트리아 요인암살에 실패한 후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1863~1914)에 대한 암살을 모의하게 된다. 당시 페르디난트 황태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삼원화(三元化) 구상으로 인해 세르비아인들로부터 증오의 대상이 되어왔다. 당시 크루나루카의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목적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외에 체코인을 중심으로 한 제3의 반(反)독립적 국가를 만들겠다는 페르디난트 황태자의 구상이 남슬라브민족의 여러 민족들의 단결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크루나루카,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 지시페르디난트 황태자는 아내와 함께 오스트리아 육군의 훈련을 시찰차 보스니아를 방문하고 1914년 6월 28일 수도 사라예보에 도착하게 된다. 이윽고 디미트리예비치는 크루나루카의 열성분자인 프린시프(Gavrilo Pribcip*유태인)와 카브리노비치(Nedjelko Cabrinovic), 그라베즈(Trifko Grabez), 일릭(Danilo Illic)으로 하여금 페르디난트 황태자를 암살토록 지시했다. 그리고 이들에 의해 페르디난트 황태자와 황태자비는 사라예보에서 이들의 총탄에 맞아 쓰러지게 된다. 그리고 사건이 일어나자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지게 된다.
한 달 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 기회에 세르비아를 타도하고 범슬라브주의의 근거지를 완전히 없애려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동맹국 독일의 지지가 필요했으며 오스트리아 특사인 A. 호요스를 단장으로 한 사절단이 빈에서 베를린으로 파견되었다. 당시 독일재상 테오발트 폰 베트만 홀베크(프리메이슨*유대인)는 1914년 7월 5일 베를린에서 호요스 편으로 실질상의 백지위임장을 오스트리아 측에 준다는 취지의 회신을 보냈다. 이 때 베트만 홀베크는 영국과의 전쟁은 차치하더라도 프랑스*러시아 양국과의 전쟁을 계산에 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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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란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내외의 모습 |
한편 독일의 회신으로 힘을 얻은 오스트리아 정부는 세르비아정부가 암살사건에 관여한 사실을 증명할 증거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7월 24일 세르비아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담은 최후통첩을 보냈고, 7월 28일에는 세르비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 이후 각 나라 나름대로의 연쇄반응의 결과, 며칠 뒤에는 유럽의 주요국가가 관련되는 세계 전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한편 1914년 10월 12일 20명의 페르디난트 황태자의 암살 연루자들은 사라예보 군사법정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에서 암살범 가운데 한 사람인 카브리노빅은 법정의 판사들 앞에서 태연히 “프리메이슨 조직에서 암살지령을 내렸다”고 밝혔다.(James W. Von Braun著, ‘Kill The Best Gentiles’) 이에 대해 프리메이슨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당시 이들의 대부분이 황태자인 페르디난트의 강한 성격이 혁명의 길을 방해하고 있다고 느꼈으며, 때로는 서로 반대 성향을 지닌 다양한 혁명가들을 하나로 묶어준 증오심이 이들로 하여금 암살이라는 합의점에 도달하게 됐다고 설명하고 있다.
전쟁발발 2년 전부터 황태자 암살계획 세워 실제로 이러한 사실들은 당시 암살범들의 진술내용은 Mary Edith Durham의 ‘The Serajevo Crime(1925)’과 Henri Pozzi의 ‘Black Hand Over Europe(1935)’등의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은 이들의 법정진술 내용이다.
▲암살범 프린시프(Princip)의 진술내용
-프린시프 : "우리는 남부 슬라브족을 돕는 방법을 모색하는데 동의했다"
-판사 : “그 방법들은 무엇인가?”
-프린시프 : “암살이다. 범슬라브주의를 실현하는데 방해가 되는 모든자와 인민에게 불공정한 자를 모두 처단하는 것이다.”
▲암살범 카브리노비치(Cabrinovic)의 진술내용
-카브리노비치 : “그(카지미로비치*Radoslav Kazimirovitch)는 프리메이슨이다. 그것도 어느 정도 그들 우두머리중의 한 명이다. 암살을 지시한 뒤 그는 곧 해외로 여행했다. 그는 러시아, 프랑스, 헝가리를 돌아다녔다. 내가 시가노비치(‘크루나루카’의 핵심단원*프리메이슨)에게 우리 계획이 얼마나 진척됐는지 물을 때마다 그는 내게 카시미로비치가 돌아올 때를 알아야만 한다고 대답했다. 시가노비치는 내게 프리메이슨들이 이미 2년 전에 황태자에 대한 제거 결정을 내렸지만 이를 실행할 인물들을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훗날 그는 나에게 총과 카트리지(탄창)를 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사람(카지미로비치)이 지난 밤 부다페스트에서 돌아왔소. 나는 그가 우리가 떠맡은 일(암살)과 관련해 여행을 했으며 해외에 있는 어떤 단체와 협의한 것으로 알고 있소”
당시 암살범들에 대한 재판은 전쟁 중 벌어졌기 때문에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공판기록을 통해 페르디난트 황태자에 대한 프리메이슨들의 제거 결정이 이미 오래전부터 내려졌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황태자에게 치명적인 사격을 가한 프린시프는 시가노비치와 암살수단에 대해 말하고 있을 때 시가노비치 스스로 프리메이슨이라는 말을 들었으며, 곧 모 인사와 접촉하여 필요한 모든 수단(무기)을 받을 것이지만 암살이 실패할 경우 황태자를 메이슨의 랏지(Lodge*프리메이슨의 회합장소)에서 죽일 거라는 말을 들었다고 진술했다.
프리메이슨, 세계적 사건 배후 조종제1차 세계대전의 성격은 개전의 경위가 매우 복잡해 어느 한 나라의 특정행위가 대전을 초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암살범들의 진술을 통해 제1차 세계대전의 직접적인 단초를 제공한 것은 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방대한 조직을 확보하고 있는 프리메이슨단(團)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프리메이슨단(團)은 나폴레옹 전쟁, 러시아혁명, 프랑스혁명, 남북전쟁, 제2차 세계대전 등 세계적인 사건을 배후조종하거나 사건에 개입하면서 경제뿐 아니라 정계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집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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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범 가운데 한명인 프린시프의 모습 |
이 조직이 역사 속에서 늘 내세우는 모토(Motto)는 자유*평등*박애, 그리고 형제애(brethren)를 강조하지만 상급으로 올라갈수록 사탄 숭배를 드러낸다. 실제로 프리메이슨 최고 계급인 33도까지 올라갔던 마리 P. 홀(Manly P. Hall*1990년 사망)은 그의 저서인 `The Lost Keys of Freemasonry`를 통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일단 프리메이슨의 신비한 의식에 참여한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세뇌되어 참된 신은 ‘루시퍼’(Lucifer)라고 믿게 된다. 프리메이슨의 입회의식 후 탈퇴할 경우는 살해를 당하고, 프리메이슨이 아니고서는 사탄의 교회 일원이 될 수 없으며, 사탄의 교회 일원이 됨은 사탄과 영매로서 접촉이 일어나는 것을 의미 한다.”
실제로 페르디난트 황태자의 암살을 모의한 ‘크루나루카’ 조직의 우두머리인 디미트리예비치는 ‘아피스’(Apis)라는 암호명을 사용했는데 ‘아피스’는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황소의 신’을 뜻한다.
제1차 세계대전, 역사상 최초의 총력전한편 이들에 의해 발발한 제1차 세계 대전 후 전승국은 패전국인 독일에게 일방적으로 전쟁을 전가시켜 독일국민의 불만을 품게 되었고 이것은 후에 히틀러의 나치즘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 전쟁이 역사상 최초의 총력전(total war)이었다는 사실도 매우 중요한 특징이다.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은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참가했을 뿐만 아니라 일반국민생활에도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또한 독가스*전차*항공기 등의 신무기가 투입된 것도 이 전쟁의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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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의 비밀조직 크루나루카의 상징문양, 해골과 뼈(Skull & Bones)는 대표적인 프리메이슨의 상징이다. |
이 때문에 전사자의 수도 그 때까지의 전쟁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많았다. 1차대전 중의 정확한 사상자를 통계로 나타내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유는 전쟁전과 전쟁후의 정부가 같았던 대부분의 연합국에서는 비교적 정확한 통계가 이루어졌으나 정부가 뒤바뀐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 등의 정확한 통계가 산출되지 못했기 때문에 현재도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
총 3천7백 5십만 명의 사상자를 낳은 이 전쟁에서 독일과 러시아가 각각 170만 명으로 가장 많았으며, 프랑스가 136만, 오스트리아가 120만, 영국이 90만, 미국은 12만 6000여 명이었다. 한편 전쟁 기간 중 2500만 명의 사람들이 인플루엔자(스페인독감)로 사망했다.
김필재 기자 spooner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