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eemason and Illuminati

[스크랩] 연산군

그리운 오공 2009. 6. 3. 01:02

연산군 묘.... 광해군과 더불어 조선의 폭군으로 알려진 연산군(燕山君)

입구 주위는  660여년 전, 파평 尹씨 일가의 집성촌이었던 원당마을.. 그 생활 용수가 되어왔던 샘물이 있다.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았고,혹한에도 얼지 않았다고 하나..요즘 기준으로는 수질 불합격이라  마시지 못한다.

 

  

 수령 860년...서울시에서 가장 나이 많은 나무 1호로 지정되어있는 은행나무이다.   연산군 묘가 강화도에서 이 곳으로 이장(移葬)되어 오는 모습 등을 지켜 본 역사의 산 증인이다. 권력의 영욕과 무상함을...그리고 인생의 덧없음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 지금도.....

 

 

 

 

王은 王이로되  王이 아닌 王이 바로 燕山君이다. 조선의 역대 왕 중에서 연산군만큼 소설,연극,영화 그리고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 동안 수많은 작품에 등장한 연산군은 한결같이 폭군으로 그려졌지만, 얼마전 "왕의 남자"란 영화에서는 엄마컴플렉스에 힘들어 하는 또는 동성애자로 그려져 있다.

 

연산군은 폭군이었을까? 그의 재위기간 12년은 실록이라는 이름을 얻지 못하고, "연산군일기"로 남아있다. 그 내용 또한 패악으로 가득 차있다. 그 기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교과서로 공부하고, 그것을 자료로 만들어진 소설을 읽고, 연극,영화,드라마에 접한 나 역시 그를 폭군으로 기억한다. 이는 연산군일기를 무비판적으로 인용한데 따른 폐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실록은 그 記錄性에 있어서 세계에 유례를 찾아 볼수 없으리만큼 훌륭한 문화유산이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객관성에 있어서는 미흡한 점을 부인하지 못한다. 적자(嫡者)후손 또는 방계혈통으로 이어지는 王統의 연결고리 그리고 실록 기록당시의 집권세력 (당쟁에 의한)에 따라서 냉정한 객관성을 유지하는데 한계가 많았다.

 

더욱이 연산군일기와 광해군일기처럼 반정(反政)시 前王에 대한 기록은 반정을 기정사실화해서 반정의 시각에서 기록하여야 했다. 즉 성공한 쿠데타이었기에 그 쿠데타를 정당화하여야 했고, 성공자의 눈높이에 맞춘 맞춤형 기록일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실록 자체의 정당성을 검증할 기회를 원천봉쇄하였고, 後代에 修正補完을 금기시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술 더하여 후대의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에 흥미 본위의 긴장감을 극대화하고, 극적인 완성도를 높이기 위하여 그를 폭군으로 과장하여 그렸다. 작가의 상상력이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10년대 이후에 발표된 소설에 등장하기 시작한 연산군은 그저 폭군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가 일본 제국주의가 발호하던 시기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이라는 국가를 이조(李朝)라 폄하하고,사색당쟁에 패망할 수 밖에 없는 국가로 매도하여 자신들의 한반도침략을 정당화하려 했다. 자의든,타의든 황국사관(皇國史觀)에 일조한 셈이었다. 우리는 반복되는 학습에 익숙해진 것이다.

 

 

 

 

 

그렇다면 "燕山君日記"는 누가 썼을까? 그를 권력의 자리에서 밀어낸 반정공신(反政功臣)들의 입김이 서린 자들이 썼다. 때문에 그를 폭악무도한 폭군으로 깎아내리고 人倫을 파괴한 패륜아로 낙인찍어야 자신들의 쿠데타명분을 얻을 수 있기에, 과장하여 기록되어 잇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역대 조선실록 중에서 연산군일기만큼 역사적 사실을 작의적으로 기록한 실록도 없다고 한다.

 

실록의 생명은 객관성이다. 사관(史官)이 기초한 사초(史草), 승정원일기, 의정부 등록, 일성록, 비변사등록 등 사료(史料)를 바탕으로 엄선된 인물들이 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연산군 일기"는 그가 반정군(反政軍)에 의하여 왕위에서 ?겨나, 강화도 교동에서 숨을 거둔 후에 편찬되었다는 점에서 승자의 기록이다. 연산군은 철저한 패배자이었다.

 

그 "燕山君日記"를 한마디로 압축하는 첫장 총서(總書)에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연산군은 성종강정대왕(成宗康靖大王)의 맏아들이며, 어머니 폐비(廢妃) 윤씨가 병신년 11월7일 낳았다. 계묘년 2월6일 세자로 책봉하고, 영중추부사(嶺中樞府事) 한명회(韓明澮) 등을 북경(北京)에 보내어 고명(誥命)을 청하니, 5월6일에 황제가 정동(鄭同)등을 버내어 칙봉(勅封)을 내렸다.   

 

소시(少時)에, 학문을 좋아하지 않아서 동궁(東宮)에 딸린 벼슬아치로서 공부하기를 권계(勸戒)하는 이가 있으면, 이를 매우 못마땅해 하였다. 즉위하여서는 궁안에서의 행실이 흔히 좋지 못했으나, 외정(外庭)에서는 오히려 몰랐다.

 

만년(晩年)에는 주색에 빠지고 도리에 어긋나며, 포악한 정치를 극도로 하여, 대신(大臣), 대간(臺諫), 시종(侍從)을 거의 주살(誅殺)하되, 불로 지지고 가슴을 쪼개고 마디마디 끊고 백골을 부수어 바람에 날리는 형벌까지도 있었다. 드디어 폐위하고 강화도 교동(喬棟)에 옮기고 연산군으로 봉하였는데, 두어달 살다가 병으로 죽으니, 나이 31세이며, 재위 12년이었다.........

   

 

 

 

 

 

 연산군묘...燕山君, 조선의 제10대 임금이다. 1476년 출생하여 1506년 31세의 나이로 귀양간   강화도에서 병으로 죽는다.    그는 성종의 장남으로 19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나, 그의 생모(生母) 윤씨가 죽게 된  사연을 알게 된 후 폭군으로 변한다. 광해군과 함께 조선의 2대 폭군....

연산군 당시의 기록은 "실록" 취급도 받지 못하고 "연산군 일기"형식으로 남아 전해온다.

하지만 모두 승자(勝者)의 기록인것을....

 

 

 

그는 결국 신하들에 의하여 왕위가 박탈되고(중종반정), 강화도 교동으로 귀양가서 두달만에 죽는다. 그는 두 부인에게서 4남2녀의 자식을 두었지만, 네 아들은 모두 사약을 받고 죽었고,  딸과 그 사위와 함께 이 곳에 묻혀있다. 원래 연산군의 묘는 강화도에 있었으나, 그의 사후(死後) 7년째 되는 해에 그의 부인 신씨의 탄원에 의하여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폐위되어 왕릉으로서의 규모는 아니고, 왕자의 예를 갖추었다. 즉 왕릉에 있는 정자각, 홍살문도 없고, 묘 주위에 석호(石虎), 석양(石羊), 무인석도 없다. 

 

 

 

 페비 윤씨 사건의 전말을 기억해 보자.  폐비 윤씨는 남편 성종보다 12살이 위였고, 시어머니인 소혜왕후와는 불과 8살 차이이었다 하나 정확한 생년월일은 모른다.  1474년 성종의 첫번째 부인인 공혜왕후가 승하함에 따라 당시 후궁인 숙의(淑儀)의 위치에 있던 윤씨가 왕비가 되었고, 그 해 연산군을 낳았다. 

 

평소에 질투심이 많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여자관계가 복잡한 남편 성종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겠다.  성종이 자신의 처소에는 들르지 않고, 다른 후궁에게만 출입하던 성종 얼굴에  윤씨는 손툽자국을 남긴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1479년 6월2일 페비가 된다.

 

조정에서는 그녀가 폐비가 된 이후 뉘우치는 모습을 보고, 또 세자의 생모인 점을 고려하여 살려주고자 하였지만  성종의 어머니인 소혜왕후(인수대비)와 성종의 세번째 부인인 정현왕후 등의 사주로 인한 궁녀들의 허위 보고로 인하여 1482년 드디어 사약을 받고 죽는다.

 

왕위에 오른 연산군은 그 사건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죽이거나 유배시켰는데, 이를 갑자사화라고 한다. 그 후  연산군은  페비 윤씨를 제헌왕후에 추존하고, 그녀의 묘를 회릉이라고 하였으나,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면서 그녀의 관직도 모두 취소된다.

 

 

 

 

 

연산군 이해하기...

 

연산군이 즉위하던 당시 조정에는 훈구파(勳舊派)와 사림파(士林派) 두 세력이 있었다. 훈구파는 世祖 때 책봉된 공신(功臣)들이 그 뿌리로, 조카인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세조를 도운 대가로 대(代)를 이어 부와 명예를 누리던 이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세금이 없고, 세습이 허용되는 거대한 토지(功臣田)이 제공되었으며, 과거시험을 거치지 않고 관직에 오를수 있었다. 반면 사림파는 지방에서 유학을 공부하던 학자들로 초야에 묻혀 후학을 키우던 사림파가 관직에 등장한 것은..성종이 훈구파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하여 사림파를 중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로 삼사(三司)인 사헌부(司憲部), 사간원(司諫院), 홍문관(弘文館)에 등용되면서 훈구파의 부패상을 집중 공격하고, 王에 대한 강력한 견제 기능도 갖고 있었다. 이들은 연산군 즉위 초부터 심각한 대립을 시작한다. 사림파는 훈구파를 공격할 뿐만 아니라 왕인 연산군에게도 엄격한 유교의 잣대를 요구하였던 것이다.

 

연산군은 자신의 정통성을 근거로 강력한 왕권 강화를 위하여 노력한다.  조선은 장자(長子)승계의 원칙이 있었지만, 문종,단종을 제외하고는 큰아들이 왕위를 물려받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정종,태종,세종,세조 그리고 연산군의 아버지인 成宗도 훈구파의 대표인 한명회의 딸과 결혼하여 그의 힘으로 왕이 될수 있었다. 長子로서, 정식 世子로서 왕에 오른 연산군의 정통성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였다 한다.

 

왕권 강화를 위하여 연산군은 훈구파의 도움이 절실하였으나, 그들 훈구파도 부패정치로 인한 사림의 공격으로 운신의 폭이 좁았다. 그리하여 연산군은 외척을 총동원하여 훈구,사림 두 세력을 모두 제거하려 한다. 결국 즉위 4년 뒤..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문제삼아 사림파를 일거에 제거하는데..이 것이 무오사화이다.

 

무오사화 2년 후, 연산군은 다시 갑자사화를 일으킨다. 사림파를 제거한 후 연산군을 견제할 세력은 없었고, 방탕한 생활은 극에 달해 국고를 탕진하였다. 흥청망청이란 말이 여기서 생겨난다.

"흥청(興靑)은 연산군의 여인들을 관리하는 관청"이었다.  국고가 고갈된 상태에서 연산군은 훈구파의 재산을 몰수할 의도로, 새삼스럽게 자신의 생모인 페비윤씨 사건을 들춰내어 훈구파를 모두 제거하였다. 갑자사화(甲子史禍)이다.  연산군이 생모(生母) 사건을 왕위에 오른 후, 6년만에 처음 알았다는 것은 정황상 이해하기 힘들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좁은 궁궐에서, 장래 권력의 핵심인 세자가  그 사실을 모를 리도 없을 것이고, 연산군은 왕위에 오르자 바로 생모에 관한 기록을 제출하라 지시하였고, 이듬해에는 生母의 오빠 윤구는 이미 입궐하여 관직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연산군의 폭정을 이해함에 있어서, 생모인 페비 윤씨 사건과 관련지어 볼 것 만은 아니고, 즉위 초부터 왕권을 강화하려는 연산군과 그것을 견제하려는 사림파와의 대립이,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계기로  결국 무오사화를 일으켜 士林派를 제거하고...그 이후 더욱 방탕해진 결과 국고가 고갈되어 훈구파의 재산을 몰수코져 훈구파를 제거하려 갑자사화를 일으켰다.

 

그러나 연산군의 치적도 있다. 전국의 모든 도(道)에 암행어살르 파견하여 백성의 소리를 들었으며, 인재의 확충을 위하여 별시문과 (別試文科...수시로 과거시험을 실시)를 실시하였으며, 귀화한 여진족을 잘 활용하여 변방 지역의 안정을 도모하였고, 문신(文臣)의  사가독서(賜暇讀書... 유능한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케 하는 제도...요즈음의 안식년(安息年)이다 )를 시행한다.

 

 

 

 

 "연산군일기" 기록된 그의 죄목(罪目) 중, 대표적인 것만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1. 주색(酒色)에 빠져 제사 지내는 일을 폐한 것.

2. 생모인 폐비 윤씨를 제헌왕후로 추승하며, 두번에 걸친 史禍를 일으켜 수 많은 대신을 죽인 것.

3. 생모의 폐출에 관여했다 하여, 성종의 후궁인 귀인 정씨와 그 아들들을 죽인 것. 특히 귀인

    정씨를 직접 죽인 것.

4. 날마다 기생들과 더불어 음탕한 짓을 일삼고, 남의 부인들까지 거리낌없이 간통한 것. ( 특히

    숙모인 원산대군 부인 박씨도 포함된다)

5. 흥청(興淸)과 운평(雲平)을 만들어 국고를 탕진한 것. 흥청과 운평은 연산군이 유흥을 즐기기

    위하여 뽑은 여인들의 조직을 말한다.

6. 도성   사방 100리 이내에 금표(禁標)를 세우고 민가(民家)를 철거하여 사냥터를 만든 것.

7. 무리한 건설공사로 백성들을 가혹하게 착취한 것.

8. 낙신(烙訊)- 단근질로 신문함. 촌참(寸斬)- 마디마디 잘라 죽임. 부관참시(剖관斬弑)- 이미 죽은

    사람의 관을 열고 시체의 목을 벰.  쇄골표풍(碎骨飄風)- 뼈를 빻아 바람에 날려보냄...등등

    잔인무도한 형벌을 시행한 것.

9. 할머니인 소혜왕후(인수대비)가 생모 폐출을 주도했다 하여 욱박지르다가, 머리로 들이 받아

    그 충격으로 끝내 죽음에 이르게 한 것.

10. 즉위 이후의 사초(史草- 실록이 정식으로 편찬되기 전, 사관들에 의해 작성된 기록 초고)에

    직언당론(直言當論)이 있으면 모두 도려 내고 삭제하게 한 것...

 

 

 

 

본래 조선 궁궐에는 "양기"라고 하는 기생들이 있었다. 연회때마다 춤과 노래를 맡아하는 전문 예술인들로 3년에 한번씩 선발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은 여기에서 한술 더 떠, 조선팔도에 채홍사,채청사라는 벼슬을 만들어 기생 2,000명을 뽑아 "흥청(興靑"이라는 별도의 조직을 만들어 관리하게 하였다.  계급에 따른 칭호도 흥청, 운평, 지과 계평 등 135가지나 되었다.  제1이 천과흥청(天科興靑)이었으며, 그 다음이 지과흥청(地科興靑)이었다.

 

조선은 왕의 나라이므로 백성이든, 풀 한포기이든 모든 것은 왕의 것이다...라는 군주론을 펼치며,

엄청난 수의 여인들을 관리하느라 창덕궁 안에 여러 채의 건물을 지었으며(7원3각), 흥청들이 사용할 그릇이 부족하다고 상점에서 강탈하게 하기도 하였다.  흥청들에게는 막대한 재물이 하사되었고, 여기서 흥청거리다..라는 말이 생겨났다.  또한 "흥청망청" 이란 가마를 만들어 봄이 되면 뚝섬으로 나아가 온갖 여흥을 즐겼다고 한다. 흥청망청의 유래도 여기서 시작된다.

 

 

 정자각, 홍살문도 없고, 석호(石虎), 석양(石羊), 무인석도 없다.

 

 

 

 

 

  

용질임신십재회   (庸質臨臣十載回)     용렬한 자질로 위에 있은지 10년이 되었건만

미부관정괴난재   (未敷寬政愧難裁)     너그러운 정사를 못하니 부끄러운 마음 금할 수 없네

조무면필사종사   (朝無勉弼思宗社)     조정에 보필하고 종사 생각하는 자 없으니

도자충오핍덕회   (都自沖吾乏德恢)     나이 어린 이 몸이 덕이 없나 보구려

 

연산군 3년 3월에 연산군이 지은 詩이다. 연산군은 이러한 詩를 지으면서 혼자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승정원에 내려 보내 답시(答詩)를 지어 올리게 하였다. 자신의 실책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신하들과 교감하고, 시적 토론을 하자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할 것이다.

 

연산군은 태어 날 때부터 폭군은 아니었다. 조선의 역대 임금 중 세종대왕에 버금가는 성군으로 추앙받는 아버지 成宗의 원자(元子)로 태어난 연산군은 성종이 죽자, 뒤이어 조선의 10대 왕에 즉위한다. 즉위 초기에는 정치에 서툴기는 했어도 할머니 인수대비의 말을 잘 따랐다.

 

심성도 여리고 감성도 풍부하였다. 詩도 130여편을 썼다. 학문의 깊이가 없으면 쓰지 못하는 것이 칠언절구(七言節句)이다. 훗날 반정군에 의하여 대부분 불태워졌지만, 다행스럽게도 연산궁일기에 100여편의 詩가 남아있다. 서모(庶母)인 장현왕후를 친모로 생각하고 깍듯이 모셨고, 훗날 중종(中宗)으로 즉위한 이복동생 진성대군도 매우 사랑하였다. 그가 진성대군을 견제하였더라면 진성대군이 중종이라는 용상에 오르지도 못하였을 것이고, 살육이 난무하는 광기의 시대에 살아남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의정궁주(義貞宮主) 조씨의 묘이다. 연산군의 후궁이라는 설.. 태종의 후궁이라는 설... 연산군을 끝까지 모셨던 궁인(宮人)이라느 설..등등 그 관계는 분명치 않다.

 

중국 황제의 정부인은 후(后)라 하였으므로, 조선의 정부인은 그 보다 격하하여 비(妃)라 불러야 했다,  조선 마지막에서 두번째  王인 高宗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민비는 비로소 명성황후가 되어 후(后)를 사용한다.

 

후궁에도 계급이 있어, 승진도 하였다.  그 으뜸으로는 빈(嬪. 정1품) .. 숙원(淑媛. 종4품)...소원(昭媛. 정4품)...숙용(淑容. 종3품)...소용(昭容. 정3품)...숙의(淑儀. 종2품)...소의(昭儀. 정2품)...

귀인(貴人. 종1품)....등등 8등급으로 구분되었다.

 

연산군과 관련하여 내시(內侍).. 김처선(金處善)이 유명하다....장녹수도..

 

영화 '왕과 나" 그리고 드라마 "왕과 비"에서도 김처선은 주연 못지 않은 비중으로 역사에 등장한다. 그리고 그의 일생에 대한 책도 읽었다.  그러나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김처선의 이야기는 실제와 많이 다른 것같다.  책과 자료에 근거하여 다시 정리해 본다. 작가 이수광에 의하면 김처선은 가난한 집을 돕고자 스스로 내시가 되기를 결심하여 내시가 된다.

 

한마디로 김처선의 생애는 다사다난하였다.  그가 처음 기록(이조실록)에 이름을 보이는 것은 단종 1년인 1453년이다.  출생일시는 명확치 않고 다만 7 (또는 5)명의 왕을 모셨다는 얘기 그리고 연산군에 의하여 1505년에 죽임을 당하는 일은 분명하다.

 

실록은 다만 김처선을 유배에서 풀어 주라는 왕명을 전할 뿐이다. 유배의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그 날이 바로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죽인 계유정란  사흘 이후인 것을 미루어...김종서 등에게 미움을 받아 유배된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그러나 이듬해에  단종복위를 주장하던 수양의 동생 금성대군에 연루되어 결국 관노(官奴)로 전락한다.  그 후 가담 정도가 가벼웠는지..또는 남다른 처세술이  있었는지 그는 세조 3년인 1457년, 관노에서 해방되고 3년후에는 3등공신이 된다. 아마 이 사이에 내시로 복귀한 것같다.

 

그러나 김처선은 비가 온다는 이유로 왕을 수행하지 않았다는 죄로 곤장을 맞고, 왕의 여자인 궁녀를 건드리고 술에 취해 큰길에 누워 있었다는 죄로 곤장 100대를 맞는다.  그런가 하면, 세조의 후궁이 최연소 영의정 기록 보유자인 귀성군 "이준"에게 반하여 연애편지를 보내는 사건에 연루되어 화를 당한다. 세조실록에 세조가 김처선때문에 골치 아파했던 기록이 몇 군데나 있다.      하지만 세조가 죽고, 뒤를 이은 예종도 요절..성종이 즉위한 후 그의 신임을 받아 자헌대부라는 관직도 받아 다른 신하들의 반발도 불러 일으킨다. 

 

성종이 죽으면서 김처선은 성종릉을 돌보는 시능내시로 임명된다. 역시 성종의 배려이었다. 이렇게  연산군 초기에는 성종의 시릉내시(侍陵內侍)로 있으면서, 성종의 3년상이 끝난 후 궁궐로 복귀한다. 그리고 연산군 10년에 무슨 이유로 곤장 100대를 맞고 하옥 당한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505년..연산군은 김처선과 그의 養子 이공신을 죽인다.  "연산군일기"에는 그냥 죽였다는 말만 있는데...자세한 기록은 "연려실 기술"에 적혀 있다.

 

" 김처선은 관직이 정2품이었다. 연산군이 어둡고 음란하였으므로, 김처선이 매번 정성을 다하여 간(諫)하였으나 ,연산군은 노여움을 속에 감춰두고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연산군이 궁궐에서 처용(處容)놀이를 하여 음란함이 도를 지나쳤다.  어느 날 김처선은 "오늘 나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하는 말을 집에 남기고 宮으로 들어 가 거리낌없이 말 하기를 "늙은 놈이 네분 왕을 섬겼고, 책을 조금 읽었지만은, 고금에 전하처럼 행동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하였다. 연산군이 화를 못 참아 활을 당겨 쏘아서 갈비뼈에 맞히자, 김처선은 조정의 대신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늙은 내시가 어찌 죽음을 아끼겠습니까.. 다만 전하께서 오래도록 왕위에 계시지 못할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연산군은  화살 하나를 더 쏘아 김처선을 땅에 넘어트리고 ..땅에서 일어나 걸어 다니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김처선은 왕을 쳐다보며 전하께서는 다리가 부러져도 다닐 수 있습니까? 하자 또 그 혀를 자르고 몸소 그 배를 갈라 창자를 끄집어 내었는데...김처선은 죽을 때까지 말을 멈추지 않는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연산군은 김처선 가족을 전부 죽이고, 김처선의 집은 연못으로 만든다. 그것도 부족하여 김처선의 처(處)와 선(善)에 대한 사용 금지 명령을 내린다. 모든 문서에 사용하지 못 함은 물론 24절기의 하나인 처서(處署)도 조서(阻署)로 고치라는 명을 내린다.  처(處) 글자를 사용한 과거 급제도 취소되고, 또 성몽정이라는 사람은  그 글자를 사용했다 하여 연산군의 국문을 받기도 한다.

 

연산군이 ?겨나고, 일부 신하가 김처선을 포상할 것을 주장하나, 中宗은 술에 취해 한 말에 불과하다고 이를 허락치 않았다.  김처선이 술을 마신 것은 사실이지만, 연산군의 이후의 조치나 화살에 맞으면서도 끝까지 직언했다는 기록을 보면..단순히 술에 취해 한 말이기보다는 평소의 소신을 가감없이 말한 것같다.  적어도 연산군에게 아부,아첨하다가 반정(反正) 당일에 얼굴 한번 비추거나, 줄 잘서 공신이 된 대신들보다는 김처선이 더 강직하고 용기있었다.

 

그럼에도 별다른 포상을 내리지 않은 것은 내시에 대한 경계(警戒) 또는 무시(無視) ???

김처선의 직언이 공식적으로 인정 받은것은 1757년 영조 때이다.그가 죽은지  253년만이다.

 

그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 아무리 뒤져보아도 알 길이 없다.

 

출처 : 김규봉(金圭鳳)의 사는 이야기
글쓴이 : 해인사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