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이야기들

세기의 연인, 세기의 로맨스 조 디마지오와 마를린 먼로 (펌)

그리운 오공 2011. 6. 13. 17:29

야구타임스 | 위클리 이닝 유진] 군복무 시절, 직책상 높으신 분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면, 연대장이나 대대장 사모님들도 많이 뵐 수 있기 마련이다. 그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군인이라는 직책이 얼마나 고충이 많은지를 알 수 있다.

특히 가정문제와 군무가 겹쳤을 때 생기는 상처는 때때로 정말로 문제가 된다. 가령 자식을 낳을 때 남편이 옆에 없다면? 군인이라면 당연히 그럴 수 있겠지만, 그 순간만큼 사모님이 서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고 입을 모아 말 한다.

그래서 가정을 지킨다는 것이 나라를 지키는 것만큼이나 힘든 것이 아닐까. 자신의 아내가 출산의 고통으로 아파할 때 그 옆에만 있어준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를 남자들은 되새길 필요가 있다.

그러고 보면 여기 지금 소개할 이 남자는 자신의 아내를 너무나도 사랑해서 죽어서도 잊지 못하는 순정파다. 대부분의 빅리거들이 은퇴를 선언하며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것은 이 남자를 본받아서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메이저리그와 미국 대륙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순정파로 알려진 그 사람, 바로 마릴린 먼로의 연인이자 뉴욕 양키스의 전설적인 스타플레이어인 조셉 폴 디마지오다.

▷ 마릴린 먼로의 일생

백치미, 3번의 결혼과 이혼, 20세기 최고의 섹스 심벌, 케네디 대통령 형제와의 염문, 36세라는 젊은 나이의 의문스러운 자살...

마릴린 먼로라는 이름에 따라 붙는 많은 수식어들 중 일부만 나열해 본 것이다. 마릴린 먼로는 짧지만 굵게 살다가 여성이라고 할 수 있다. 1926년에 태어나 1962년 만 36세로 일기를 마감하기까지 모두 30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50년대 중반부터 60년대 초반까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일생 동안 3번의 결혼과 이혼을 한 그녀를 두고 ‘팔자가 기구한 여자’라고 판단하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든다. 매 결혼마다 남편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으니, 행운이라면 행운이고 능력이라면 능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녀의 나이 불과 16세. 당시 공장 노동자였던 제임스 도어티를 첫 번째 남편으로 맞은 먼로는 20살이 될 때까지 4년간 결혼생활을 지속했다. 두 번째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뉴욕 양키즈의 전설적인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와의 결혼이다. 그러나 이 결혼도 오래 가지 못했다. 불과 274일 만에 이혼한 그녀의 당시 나이는 겨우 29세!

마지막 결혼 대상자는 ‘세일즈맨의 죽음'(Death of Salesman)으로 유명한 극작가 아서 밀러. 조 디마지오와 이혼하자마자 바로 그 다음해에 결혼했는데 3년 반 동안 부부관계를 유지했다. 이 결혼은 1961년 1월에 파경을 맞았고, 먼로는 다음해인 1962년 8월에 의문의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결국 먼로는 세 남자와 더불어 8년 안팎에 불과한 결혼 생활을 지속한 셈이다.

▷ 디마지오와 먼로, 그들의 사랑과 이별

그녀 일생의 세 번의 결혼 중 제일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락내리락한 것은 위대한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와의 두 번째 결혼이다. 겨우 9개월간 지속된 결혼생활이었지만, 결혼 자체보다 마릴린 먼로가 외롭게 죽은 후 평생 동안 그녀의 무덤에 장미꽃을 바쳤다는 조 디마지오의 로맨틱한 행동이 먼 훗날까지 오래도록 사람들에 의해 회자되곤 했다.

겉으로만 보면 지나치게 개방적인 아내로 인해 결혼생활이 일찌감치 파탄 났음에도, 순정파인 남편이 죽은 전처를 평생 한 결 같이 그리워한 아름다운 이야기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막상 내막을 알고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마릴린 먼로와 조 디마지오가 운명적인 조우를 하게 된 사연은 다음과 같다.

먼로를 만나기 전의 디마지오는 부상으로 선수생활 일선에서 물러나 은퇴한 상태였다. 때마침 그는 한 시범경기에 게스트 자격으로 출전했는데, 먼로가 그 경기에 초대되어 다른 선수들과 화보촬영 하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된 것이다. 한 눈에 먼로에게 반한 디마지오는 사람들을 통해서 데이트 신청을 했는데, 첫 데이트에 마릴린 먼로가 2시간이나 늦게 나타났다. 아무리 잘 나가는 여배우였지만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디마지오를 2시간씩이나 기다리게 만들었으니 분위기가 영 어색한 것은 당연.

하지만 마침 데이트 장소인 식당 안에 있던 한 남자 배우가 두 사람이 있던 테이블로 와서 분위기를 돋워준 탓에 무난하게 첫 데이트가 마무리 되었다고 한다. 이에 먼로는 사과도 할 겸 자신이 직접 운전해서 조 디마지오를 집까지 바래다주게 된다.

먼로에게 온 정신을 뺏긴 디마지오는 첫 데이트 다음 날부터 매일 전화를 해서 애프터를 신청했지만 먼로는 거절했다. 2주 동안 매일 전화했는데, 계속해서 거절당하자 디마지오는 결국 포기를 선언했다.

그런데 얼마 후 먼로가 디마지오에게 먼저 전화를 해서 데이트를 하자고 다가온다. 그 이후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져서 1954년 1월에 결혼에 이른다. 결혼식은 세간의 이목을 피해 샌프란시스코 시청의 작은 홀에서 절친한 친구 부부만 참석한 가운데 간단하게 올려졌다. 주례는 판사가 섰고 결혼식은 약식으로 치러졌다. 비록 결혼식은 간단했지만 두 슈퍼스타의 결혼을 취재하려는 미디어의 열기는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여러모로 대칭적인 캐릭터인 두 사람의 결혼은 완벽한 결합으로 비춰졌다. 서로 상대방이 갖지 못한 것을 갖고 있기 때문에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개성이 강한 두 사람이 융합되기에는 서로가 살아온 환경의 차이가 너무나도 컸던 것이다.

디마지오는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사람이었다. 따라서 집안에서 조용히 자신을 챙겨줄 수 있는 스타일의 아내를 원한 반면, 먼로는 자신이 영화배우로써 더 성공할 수 있도록 외조해주는 남편을 기대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상대방의 일에 관심이 부족했다는 것이었다. 디마지오에게는 야구가 인생의 전부였는데, 먼로는 스포츠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반대로 디마지오는 영화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부족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두 사람의 파경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은 뉴욕에서 촬영 중이던 영화 <7년만의 외출(the Seven Year Itch)>이다. 지하철 송풍구에서 올라온 바람이 마릴린 먼로의 하늘거리는 드레스를 날려 올리고, 그녀가 섹시한 모습으로 치마를 누르는 문제의 그 장면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영화사의 명장면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지만, 마릴린 먼로가 그러고 있으니 별 상관이 없는 것이지 내 아내가 그러고 있었다면 심기가 편치만은 않았을 것이다. 문제의 장면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보수적인 디마지오는 불편한 심경을 아내에게 숨기지 않았다고 한다. 더구나 디마지오는 마릴린의 해당 영화 출연 자체를 반대했고, 먼로는 그런 남편의 반대에 아랑곳하지 않고 영화출연을 강행했다.

다음 날 모든 신문에 자기 아내의 치마가 들춰지는 사진이 크게 실렸고, 그 사진을 보면서 사람들이 수근 댈 말이 뻔히 짐작되었기에 디마지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여기에 먼로는 한 수 더 떠 디마지오의 속을 뒤집어 놓는 결정타로 누드 촬영까지 강행하였다.

그날 밤 둘은 크게 싸웠고, 이 싸움의 불씨는 좀처럼 꺼지지 않았다. 기분전환을 위해서 뉴욕을 떠나 캘리포니아로 갔지만, 부부싸움은 계속 되었다. 게다가 분을 참지 못한 디마지오는 손찌검까지 하고 말았다. 이에 먼로는 당장 이혼소송을 제기했고, 이후 디마지오와의 모든 연락을 끊어버렸다. 디마지오는 뒤늦게 후회를 했지만, 한 번 돌아선 그녀의 마음은 돌아오지 않았다.

▷ 이별 그 이후

한편 디마지오와 헤어진 후 먼로 또한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 남자, 저 남자의 품을 전전했고, 케네디 형제와 동시에 스캔들이 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뭇 남자들과 연애를 했지만, 그녀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허전함은 달래지지 않았다. 방황하던 그녀의 마음이 안식처로 다시 찾은 곳은 바로 디마지오. 순간의 실수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그녀를 사랑하던 디마지오에게 그녀의 완고하던 마음의 문도 다시 활짝 열렸던 것이다.

두 사람은 재결합을 공식화하고 함께 보내는 시간을 늘려갔다. 당시 두 사람이 데이트하는 장면을 목격했던 사람들은 주변을 전혀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서로에게 깊이 빠져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재결합을 향해가던 두 사람의 사랑은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된다. 1962년 8월 4일 먼로가 자살을 해버린 것이다. 지금도 마릴린 먼로의 죽음에 대해서는 타살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디마지오와의 재결합을 위해 들떠있던 먼로가 그런 선택을 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녀가 죽은 뉴욕의 아파트 관리자들은 마땅히 연락할 곳이 없어서 조 디마지오에게 연락을 했다. 연락을 받은 그는 모든 이들을 물리치고 혼자서 그녀의 장례를 준비한다. 장례식에는 아무도 부르지 않았다. 주변에서는 슈퍼스타의 장례식이니만큼 최소한 영화사 관계자들과 동료 배우들만이라도 참석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는 "당신들이 아니었다면 마릴린은 여전히 멀쩡하게 살아있었을 것이오"라며 단호히 거절했다고 한다.

뉴욕타임즈의 보도에 따르면 장례식이 끝나고 조 디마지오는 마릴린 먼로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오.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오”라고 몇 차례나 흐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두 사람과 관련된 이야기 중 사람들의 마음을 가장 뭉클하게 하는 대목은 조 디마지오가 죽기 직전까지 그녀의 무덤에 매주 두 번씩 장미꽃을 바쳤다는 사실이다. 나이 80이 넘어서도 여전히 자신의 아내 ‘마릴린 디마지오’를 사랑했던 그는 뭇 남성들의 교감이 되는 사내가 아니었을까.

알려진 바에 따르면 디마지오는 먼로가 살해를 당했다고 굳게 믿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이 좀 더 이해심이 넓었다면 그녀와 이혼을 했을 리도 없고, 이혼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를 죽이고자 했던 세력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할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는 남은 인생 동안 마릴린 먼로를 향한 죄책감과 그리움에 시달려야만 했다.

이제는 야구팬들에게 ‘56경기 연속 안타’라는 불멸의 기록을 남긴 주인공으로 더욱 자주 회자되는 디마지오는 1999년 3월 8일 “이제는 마릴린을 만날 수 있겠군”이라는 말을 남기고 자신이 사랑하는 아내 곁으로 떠나갔다. 그의 나이 85세였다.

이글을 읽는 분들도 언젠가는 평생 지켜주고 싶은 자신만의 연인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 때가 되면 애틋한 사랑을 품고 40년에 가까운 시간을 홀로 외롭게 지낸 디마지오를 떠올리며, ‘있을 때 잘해’라는 말을 명심하길 바란다. 그리고 아직 자녀가 없는 분들은 반드시 아내가 출산을 할 때 그 자리를 지켜주기를 권한다. 남편이 그 자리를 지켜주지 않았을 때 아내가 느끼는 한은 ‘상상하는 것 이상’이라고 한다.(웃음)

* 조 디마지오는 누구?
베이브 루스가 양키스를 떠난 1년 뒤에 등장해 미키 맨틀이라는 또 하나의 전설이 등장하기 직전(1936~51년)까지 양키스의 간판타자로 활약했다. 9번이나 팀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끌었으며, 3번의 정규시즌 MVP를 수상했고, 신인시절부터 은퇴시즌까지 한 차례도 빠지지 않고 올스타로 선정된 메이저리그 역사상 유일한 선수다. 미남인데다가 친절하기까지 해 팬들은 물론 기자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1941년에는 56경기 연속 안타의 대기록을 남겼고, 1955년 기자단 투표를 통해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통산 361홈런 1537타점을 기록했으며, 지금도 ‘양키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우타자’로 칭송받고 있다.

// 위클리 이닝(inning.co.kr) 유진
야구타임스 김홍석 편집기자(블로그 : MLBspecia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