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이야기들

[스크랩] 향기품은 군사우편

그리운 오공 2011. 12. 13. 21:46

향기품은 군사우편 / 유춘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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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행주 치마 씻은 손에 받은 님소식은

능선의 향기 품고 그대의 향기 품어

군사우편 적혀 있는 전선 편지에

전해주는 배달부가 싸리문도 못가서

복받히는 기쁨에 나는 울었소

 

 

2. 돌아가는 방앗간에 받은 님소식은

충성의 향기 품고 그대의 향기 품어

군사우편 적혀 있는 전선 편지에

옛추억도 돌아갔소 얼룩진 한자두자

방앗간의 수레도 같이 울었소

 

 

3. 밤이 늦은 공장에서 받은 님소식은

고지의 향기 품고 그대의 향기 품어

군사우편 적혀 있는 전선 편지에

늦은 가을 창너머로 떠오는 저 달속에

그대 얼굴 비치어 방긋 웃었소

 

 

남인수와 비슷한 목소리지만 좀 더 부드럽고 따뜻한 미성(美聲)의

유춘산(柳春山)이 부른 안개낀 목포항'과 함께 그의 히트곡인

'향기 품은 군사우편'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6,25 동란 속에 맺힌 온갖 설움과 가지가지 한(恨) 중에

사랑하는 애인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선으로 떠나고, 여인(女人)은

뒤에 남아, 지금은 그 어디메서 총뿌리를 잡고 나를 생각할까 하는

이별의 슬픔을 그려 이제나 저제나 무사히 군복무를 마치고 돌이

오기만을 학수고대하는 여인네의 가슴을 울리고 두드렸다.

 

이 노래를 부르신 "유춘산"선생님은  "남인수"선생님과 音色이 비슷 하시지만 좀 더 부드럽고 따듯한  美聲이 셨다고 합니다

선생님은 1950년대에 이 노래와 함께  "안개낀 목포항"을 부르시어 당시 국민으로 부터 많은 사랑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행주치마’는 여자들이 일할 때 치마(옛적의 새하얀 ‘롱스커트’를 말한다)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 그 위에 덧입는 작은 치마를 말한다. 그리고 ‘행주’란 그릇을 훔치거나 씻을 때 쓰는 헝겊을 말하는데, ‘행주치마’는 이러한 용도(用度)를 겸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행주치마’는 ‘앞치마’라고도 하는데, 주로 흰색 무명류를 사용하여 치마의 반폭 정도로 만들어 뒤가 휩싸이지 않게 하였고, 길이는 치마보다 짧게 만들었다. 걸을 때나 일할 때에는 치마가 늘어지는 불편(不便)을 덜기 위해 치마의 위쪽을 걷어 올리고 허리띠로 매어 ‘거들치마’를 했는데, 그 위에 ‘행주치마’를 둘렀다.


 

 


옛적 우리들 어머니의 행주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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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치마´의 어원(語源)에 관련된 전설로 행주대첩(幸州大捷) 이야기가 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난 다음 해인 1593년에 당시 전라감사 ‘권율’이 서울을 수복하려고 병력을 행주산성(幸州山城)에 집결시키고 있을 때, 평양(平壤)에서 후퇴한 왜군(倭軍) 3만 여명이 그해 2월 12일 행주산성을 공격했으나, 권율 장군의 지휘아래 군관민(軍官民)이 결사 항전하여 왜군을 물리친 것이 행주대첩이다.


그리고 이때의 공로로 권율 장군은 도원수(都元帥)가 되었는데, 당시 항전(抗戰) 시 부녀자들이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만들어 입고, 돌을 날라 적에게 큰 피해를 입힌 데서 이때의 앞치마를 ´행주치마´라 했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행주산성(幸州山城)의 ‘행주’와 행주치마의 ‘행주’가 음(音)이 같은 데 근거하여 만든 이야기에 불과하다. ´행주치마´는 행(·)자(·)쵸마´ 또는 행(·)자(·)치마´라 불리어 오던 것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말이고 물건이다.


행주대첩 때 화살이 떨어져 여자들이 치마로 돌을 운반해줬다는 이야기도 근거가 없는 얘기다. 이것 역시 행주산성(幸州山城)과 행주치마가 발음이 비슷한데 착안(着眼)해 후대에 지어낸 말일뿐 기록상으로는 전혀 그런 기록이 없다. 행주산성전투에서 화살이 떨어졌을 때는 충청병사(忠淸兵使) 정걸이 화살을 운반해줬고, 애초에 행주대첩은 권율이 수원독성에서 나와 깊숙이 들어갔다 갑자기 터진 전투라 백성들이 참전(參戰)할 틈도 없었다.


따라서 행주치마가 권율(權慄) 장군의 행주대첩(幸州大捷)에서 나왔다는 설은 행주(幸州)라는 고장 이름에 연관지어 후세 사람들이 지어낸 민간어원(民間語源)에 불과하다 할 것이다.


행주치마의 유래에 대해서는 불교계의 동승(童僧)과 관련하여 전해지는 얘기도 있다. 아이들이 불법(佛法)에 귀의하기 위해 절로 출가(出家)를 하면 계(戒)를 받기 전까지는 '행자(行者)'라는 호칭으로 불린다. 그리고 수행승인 행자가 주로 하는 일이 아궁이에 불을 때고 밥을 짓는 부엌일이었다. 행자가 부엌일을 할 때 작업용(作業用)으로 치마 같은 천을 허리에 두르고 일을 했는데, 그것을 '행자치마'라 했다. 여기서 나온 말이 바로 오늘날의 '행주치마'라는 얘기다.


지난 1950년대의 우리나라 여인들의 행주치마에는 민족의 비극 6.25의 전흔(戰痕)이 올올이 배어있기도 했었다. 그래서 지금의 50대 이상의 장년층(壯年層)에서는 당시에 유행하던 ‘향기 품은 군사우편’이라는 대중가요(大衆歌謠)가 무던히도 불리어지곤 했었다. 1952년 6.25가 한창일 때 ‘유춘산’이 불러 공전의 히트를 한 ‘향기품은 군사우편’의 가사를 소개한다.

이 노래는 이후 많은 가수(歌手)들이 다시 불러 아직까지도 사랑을 받고 있다. 가사내용 때문에 50대 이상의 기성세대(旣成世代)에게는 야릇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행주치마로 씻은 손', '그대의 향기 품은 군사우편(軍事郵便)', '편지를 전해주던 우편배달부', '북받치는 기쁨에 울었다'는 내용들이 그렇게 만든다. 그래서인지 나이가 좀 든 사람들 가운데는 이 노래를 '애창곡(愛唱曲)'으로 삼은 경우가 많았다.


특히 ‘향기 품은 군사우편’은 6.25동란(動亂) 속에 맺힌 그 시절 여인들의 가지가지 한(恨) 중에, 사랑하는 낭군을 전선(戰線)으로 보내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면서 사랑하는 낭군이 지금은 어느 전선(戰線 어느 곳에서 생사(生死)의 갈림길을 헤매고 있을까 하는 이별과 통한(痛恨)의 슬픔을 그려 모든 이들의 가슴을 두드렸다.



군사우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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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방학 때마다 외동읍(外東邑) 활성리에 사시던 고모님의 집을 방문할 때면, 숨을 헐떡이며 뛰어드는 고종사촌(姑從四寸) 형들의 통기를 받은 고모님께서 새하얀 무명베 앞치마 차림으로 사립문까지 나오셔서 마중을 해 주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그토록 앞치마가 잘 어울리시던 그 고모(姑母)님께서 93세를 일기로 꼬챙이 같이 말라 돌아가신 지도 5년이 지나가고 있다.


지금은 맞벌이 부부들이 많아 남자들도 앞치마를 입고 요리(料理)를 하고 있지만, 우리들의 어머니 시대에는 오직 여자들만의 전유물(專有物)이었다. 가장 여성적(女性的)이고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신(變身) 시켜주는 행주치마는 그 당시 주부(主婦)들의 패션이기도 했다.


 

 


지금의 행주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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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행주치마’는 단순히 집안에서 일할 때 입는 소품(小品)만은 아니었다. 때로는 이별의 아픔을 가리는 ‘가림막’이 되기도 했고, 때로는 고된 시집살이를 잠재워 주는 잔잔 바람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을 기억(記憶)해 보면 어머니의 ‘행주치마’에서는 항상 생솔가지 타는 냄새와 디딜방아 찧느라 흘린 땀 냄새가 배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1960년대 학생들의 앞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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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행주치마’ 폭에 안기면 최면술(催眠術)에 걸리듯 모든 시름이 가라앉던 기억은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이 오롯이 배어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다른 그 어떤 나라 여인들보다 더 무거웠을 우리들 어머니의 ‘행주치마’, 일제의 강압에 의한 징용(徵用)과 동족상잔의 6.25전쟁 중에 행방불명(行方不明)이 된 남편과 자식을 기다리는 애절(哀切)한 마음을 숨겨둔 그 시절 어머니들의 무명베 ‘행주치마’도 이제는 긴 역사(歷史) 속으로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요즘의 행주치마(고부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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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토록 강인(强忍)한 어머니상과 사랑스런 여성상으로 상징되던 ‘행주치마’가 사라지면서부터 어느 샌가 우리들 주변의 여자들도 여성(女性)스러움을 잃어가고 있다. 마치 주부(主婦)이기를 거부(拒否)하기라도 하듯 반바지에 티 차림이 보통이어서 우아(優雅)한 그 시절 여인들의 모습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선머슴아’의 모습들로 변해버렸다.


여자로서의 주부(主婦)라면 트레이드마크인 ‘행주치마’를 드레스 위에 입고 가족들을 위해 봉사하며, 여자로서의 행복한 꿈을 꾸는 그 이상의 행복은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없다. 그런데 지금의 청년주부(靑年主婦)들은 이렇듯 소박한 꿈마저도 갖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구멍 뚫린 청바지를 끌면서 엉덩이로 냉장고(冷藏庫) 문을 여닫는 품은 결코 우아(優雅)하고 다소곳한 ‘행주치마’의 자태와 이상(理想)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즘의 멋쟁이 앞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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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의 청년 여성들은 앞치마를 입어도 엉터리로 착용(着用)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옛적에는 기다란 장치마에 저고리를 단정하게 입고, 그 위에 다소곳이 앞치마를 두르는데 비해 요즘의 여성들 중에는 밀폐(密閉)된 아파트에서 속옷차림으로 앞치마를 두르기도 하고, 심하면 늦잠자리에서 일어나 팬티만 입은 체 앞치마를 두르고 라면을 끓여 먹는다고도 한다. 앞치마의 숭고한 의미를 모독(冒瀆)하는 행위라 아니할 수 없다.




잘못 착용한 앞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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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치마는 옷을 제대로 전부 갖추어 입은 후 그 위에 입어야 한다. 알몸에 걸치는 것이 아니다)





 

 


옛적에는 행주치마가 아낙들과 자식들에 대한 범절(凡節)의 교재도구(敎材道具)이기도 했었다. 당시의 경우 ‘행주치마’를 입고 일을 하다가도 웃어른이 부르거나 앞에 나설 때에는 반드시 이를 벗는 것이 법도(法道)였다. 남의 집 방에 들어서면 모자를 벗는 경우와 같은 것이었다. 금방 다시 두를지라도 어른 앞에서는 이유여하를 막론(莫論)하고 앞치마를 벗어 예(禮)를 갖추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행주치마’를 노래하는 ‘밀양아리랑’의 유래(由來)와 가사를 잠시 소개한다. ‘밀양아리랑’은 경상도(慶尙道) 민요로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밀양아리랑’을 설명 할 때에는 어김없이 ‘아랑’의 전설, 즉 순결(純潔)을 지키고 억울하게 죽음에 이른 ‘아랑’이라는 처녀의 이야기가 거론된다.


지금도 밀양(密陽)에 가보면 아랑각이 있고, 봄철에는 ‘아랑제’라는 명칭으로 민속축제(民俗祝祭)를 크게 벌이고 있어서 밀양과 ‘아랑’의 전설과 ‘밀양아리랑’은 밀접(密接)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밀양아리랑’은 세마치장단의 경쾌(輕快)한 노래로 배우기도 쉽고 부르기도 쉽지만, 노래가 씩씩해서 부르는 사람들이 흥겨워한다. 일제시대(日帝時代) 때 만주 등지에서 독립운동(獨立運動)을 하던 독립군들은 이 밀양아리랑을 군가(軍歌)로도 불렀다. 밀양아리랑 곡조에 독립군(獨立軍)들이 가사를 붙여 사기를 높이고, 사명감(使命感)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개사하여 부르면서 ‘독립군 아리랑’이라고도 불렀다. 그 만큼 ‘밀양아리랑’은 씩씩하고 힘 있는 경쾌한 민요(民謠)이다. 노랫말을 소개한다.


 

 

 

 

밀양 아리랑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후렴)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넘어 간다.

 

정든 님이 오셨는데 인사를 못해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방긋

남천강 굽이쳐서 영남루를 감돌고 벽공에 걸린 달은 아랑각을 비추네.

영남루 명승을 찾아가니 아랑의 애화가 전해 있네.

밀양의 아랑각은 아랑 넋을 위로코 진주의 의암은 논개충절 빛내네.

저 건너 대 숲은 의의한데 아랑의 설운 넋이 애달프다.

아랑의 굳은 절개 죽음으로 씻었고 고결한 높은 지조 천추에 빛난다.

 

 

 

 


순결(純潔)을 지키고 억울하게 죽음에 이른 ‘아랑’의 정절과 혼은 몇 세기를 건너 뛴 2007년, 제60회 칸국제영화제에서 주인공 전도연이 여우주연상(女優主演賞)을 수상함으로써 변모한 밀양(密陽)의 여성상을 세계에 다시 보여 주기도 했다.

 

행주치마, 즉 ‘앞치마’는 서양(西洋)에서도 서민들의 필수적 작업용(作業用) 옷감이었다. 농사를 짓고, 궂은일을 해야 하는 서민가정 여인들의 경우 우리나라에서와 같이 입은 옷을 쉬 더럽히지 않으려면 치마 앞을 가리는 앞치마의 착용(着用)이 그만큼 필요했었다. 앞치마의 착용은 그 유명한 ‘밀레의 만종’에서부터 확인(確認)할 수 있다.




중세 서양의 앞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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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7년의 프랑스, 저녁노을이 지는 들녘에서 한 가난한 농부(農夫) 부부가 고개를 숙인 채 기도(祈禱)를 하고 있다. 캐다가 만 감자가 바닥에 흩어져 있고 멀리 보이는 교회당(敎會堂)이 정지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준다. 프랑스의 자랑이자 ‘장 프랑수아 밀레’가 그린 명화 ‘만종(晩鍾)'이다.


밀레의 만종에 대한 비화를 소개한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밀레’가 그린 ‘만종’은 미국(美國)의 ‘아메리카 미술협회’에 팔렸다. 당시 프랑스 측은 국보급인 이 작품이 팔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국회(國會)와 행정부가 모두 나서 모금활동(募金活動)까지 벌여가며, 미국으로 팔려가는 것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부자나라 미국을 당할 수는 없었다.




'밀레'의 '만종'과 앞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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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프랑스가 자존심(自尊心)이 상한 채 주저앉아 있을 무렵, 당시 백화점 재벌 ‘알프레드 쇼사르’가 미국에 엄청난 대가(代價)를 지불하고 '만종' 을 다시 사들였고, ‘쇼사르’는 이 그림을 개인자격으로 소유하지 않고 ‘루브르’에 기증(寄贈)했다. 예술의 가치를 알아본 ‘쇼사르’가 없었다면 '만종'은 지금쯤 미국 어느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을 것이다.


향우님들께서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이 그림은 ‘밀레’의 다른 작품 '이삭줍기'와 더불어 세계적으로 명성(名聲)을 떨치고 있는 그림 중의 하나다. 그림에는 하루 일을 마치고 농부 부부(夫婦)가 교회(敎會) 종소리를 들으며 기도하는 평화로운 그림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이 그림에는 너무나 슬픈 이야기가 숨어있다. 그 사연을 소개한다.


이 작품이 처음 만들어진 1860년 당시 ‘밀레’는 물감을 살 돈조차 없는 가난 한 화가(畵家)에 불과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화상(畵商) ‘아르투르 스테반스’가 그 그림을 인수(引受)하는 조건으로 1,000프랑을 지원한다. 이 1,000프랑으로 탄생한 그림이 바로 '만종'이다.


이렇게 탄생(誕生)한 ‘만종’은 100년 만에 80만 프랑의 값어치를 얻었고, 프랑스의 자존심으로 자리를 굳히면서 전 세계 관광객(觀光客)을 끌어들이는 보물이 되었다. 화상 ‘아르투르 시테반스’가 가난한 화가 ‘밀레’에게1,000프랑을 지원한 것이 프랑스의 국부(國富)를 일구어낸 것이다.


‘알프레드 쇼사르’가 80만 프랑에 이 작품을 구입 해 ‘루브르’ 박물관(博物館)에 기증한 후 한 번도 거래된 적이 없었던 이 '만종'은 이제 값을 매긴다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귀중한 프랑스의 국보(國寶)가 되어있다. 여기에서 ‘밀레’의 ‘만종’에 얽힌 또 다른 사연 한 가지를 더 소개한다.


그림을 보면 초라한 행색(行色)의 농부와 남루한 앞치마를 두른 아내가 바구니를 발밑에 놓고 기도(祈禱)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지금까지 그 바구니가 감자 씨와 밭일도구를 담은 바구니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원래의 초벌그림에는 감자바구니가 아니고, 그들의 사랑하는 아기의 시체(屍體)를 담은 관(棺)이 놓여있었다.


양식이 떨어져 겨우내 끼니조차 제대로 때우지 못한 그들 부부는 배고픔을 참고 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들의 아기는 굶기를 밥 먹듯 하던 엄마의 젖이 말라 영양실조(營養失調)가 되었고, 그래서 그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버린 것이다.


죽은 아기를 땅속에 묻기 전에 그 영혼을 위해 마지막으로 부부가 기도(祈禱)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 원래의 '만종'이다. 농부(農夫)의 옆에 꽂혀있는 쇠스랑은 감자를 심기 위한 농기구(農器具)가 아니고, 죽은 아기를 묻기 위해 갖고 온 매장도구(埋葬道具)로서의 쇠스랑이었으며, 그들이 서 있는 곳은 감자를 심고자하는 밭이 아니고, 밭 바로 옆에 있는 평평한 야산(野山)이었다는 것이다.


얘기를 듣고 보면 그럴 듯도 한 말이다. 우선 무슨 사이비(似而非) 기독교신자가 아니라면 감자 씨를 내려다보고 그토록 간절(懇切)한 자세로 기도를 드릴 리는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들의 자태(姿態)는 그들이 응시(凝視)하고 있는 물체가 최소한 죽은 아이의 시신(屍身)이나 그 관(棺)이 놓여 있어야 조화(造化)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지금의 ‘만종’에서 죽은 아기의 관(棺)은 어디로 사라지고, 어떻게 감자 씨를 담은 바구니가 그곳에 놓여 있을까? 그 사연(事緣) 또한 애틋하기만 하다. 밀레가 ‘만종’의 초벌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였다. ‘밀레’의 친구가 찾아와 ‘밀레’가 그리는 그림을 보더니 큰 충격과 우려(憂慮)를 보이면서 죽은 아기를 넣지 말자고 간곡하게 부탁을 했다.


지배층(支配層)으로부터의 악평과 고립을 자초할 수 있다는 우정(友情)과 걱정에서였다. ‘밀레’는 고심(苦心) 끝에 친구의 부탁을 들어 죽은 아기의 관(棺) 위에 감자 씨 바구니를 덧그려 출품하게 되었다. 그 이후 이 사실이 알려지지 않은 채 ‘만종’은 그저 농촌(農村)의 평화로움을 담고 있는 그림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 이러한 사실이 어떻게 밝혀졌을까. ‘만종’의 씨감자 바구니가 초벌그림에는 죽은 아기의 관(棺)이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은 ‘살바도로 달리’라는 어린이의 예리한 관찰력(觀察力)과 신기(神奇)에 가까운 투시력(透視力)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어린이가 성장하여 관련 논문(論文)을 발표하는 등 집요(執拗)하게 이의를 제기(提起)한 결과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러한 사실이 미술계(美術界)는 물론 관련 학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뒤 그 아이의 투시력(透視力)은 환각이 아니라 실제로 정확한 관찰(觀察)이었음이 밝혀졌다. ‘루브르’ 미술관이 자외선(紫外線) 투사작업을 통해 그 감자바구니가 초벌그림에서는 실제로 죽은 어린아이의 관(棺)이었음을 입증한 것이다. 아이의 눈으로 숨겨진 아이의 관(棺)을 찾아낸 것이다.


‘밀레’는 ‘만종’ 외에도 앞치마 입은 여인들을 그려 앞치마 그림의 시리즈를 엮고 있다. 옛적 우리나라 이발소(理髮所)마다 까맣게 파리똥을 뒤집어 쓴 채 허름한 ‘사진왁꾸’에 끼워 덩그렇게 매달려 있던 ‘이삭줍기’가 그 그림이다.


 

 


'밀레'의 ‘이삭줍기’와 앞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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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토록 값진 ‘밀레’의 작품들은 당시의 프랑스에서 거의 호평(好評)을 받지 못했다. 그림을 그린 '장 프랑수아 밀레(Jean Francois Millet)'가 소위 의식화(意識化)된 화가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가난한 무명(無名)의 화가였기 때문이었다. ‘밀레’는 당시 시대의 부조리(不條理)를 꼬집는 그림을 잘 그렸고, 때문에 비평가(批評家)들에게 그다지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


‘이삭줍기’의 경우 지평선(地平線)이 보일정도로 커다란 농장을 배경으로 저 멀리에 짚단을 싣고 있는 일꾼들과 말을 타고 이들을 부리는 지배인(支配人)인 듯한 사람이 보인다. 그리고 이들 속에 속하지도 못하고 끼니를 위해 버려진 이삭이라도 주워야 하는 세 여인(女人)들의 모습이 클로즈업되어 있다. 추수 때의 풍요(豊饒)와 평화로움을 배경(背景)으로 가난한 이들의 삶의 고단함이 묻어나오도록 한 것이다.


당연히 지배층(支配層)과 부유층의 비위를 건드릴 수밖에 없었다. 이 그림이 전시되자 보수적(保守的)인 비평가들은 이삭을 줍는 세 여인은 '누더기를 걸친 허수아비이며, 빈곤(貧困)을 관장하는 세 여신'이라는 악평(惡評)을 늘어놓았다.


비평가(批評家)들의 이러한 악평은 가난한 화가 ‘밀레’에게 경제적(經濟的)인 어려움을 더욱 가중시켰다. 결국 물감 살 돈 조차도 없을 정도로 궁핍(窮乏)하게 되었고, 싼값에 그림을 팔아야 하는 불행을 감수(甘受)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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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는 이후 많은 가수(歌手)들이 다시 불러 아직까지도 사랑을 받고 있다. 가사내용 때문에 50대 이상의 기성세대(旣成世代)에게는 야릇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행주치마로 씻은 손', '그대의 향기 품은 군사우편(軍事郵便)', '편지를 전해주던 우편배달부', '북받치는 기쁨에 울었다'는 내용들이 그렇게 만든다. 그래서인지 나이가 좀 든 사람들 가운데는 이 노래를 '애창곡(愛唱曲)'으로 삼은 경우가 많았다.


특히 ‘향기 품은 군사우편’은 6.25동란(動亂) 속에 맺힌 그 시절 여인들의 가지가지 한(恨) 중에, 사랑하는 낭군을 전선(戰線)으로 보내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면서 사랑하는 낭군이 지금은 어느 전선(戰線 어느 곳에서 생사(生死)의 갈림길을 헤매고 있을까 하는 이별과 통한(痛恨)의 슬픔을 그려 모든 이들의 가슴을 두드렸다.



군사우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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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방학 때마다 외동읍(外東邑) 활성리에 사시던 고모님의 집을 방문할 때면, 숨을 헐떡이며 뛰어드는 고종사촌(姑從四寸) 형들의 통기를 받은 고모님께서 새하얀 무명베 앞치마 차림으로 사립문까지 나오셔서 마중을 해 주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그토록 앞치마가 잘 어울리시던 그 고모(姑母)님께서 93세를 일기로 꼬챙이 같이 말라 돌아가신 지도 5년이 지나가고 있다.


지금은 맞벌이 부부들이 많아 남자들도 앞치마를 입고 요리(料理)를 하고 있지만, 우리들의 어머니 시대에는 오직 여자들만의 전유물(專有物)이었다. 가장 여성적(女性的)이고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신(變身) 시켜주는 행주치마는 그 당시 주부(主婦)들의 패션이기도 했다.


 

 


지금의 행주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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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행주치마’는 단순히 집안에서 일할 때 입는 소품(小品)만은 아니었다. 때로는 이별의 아픔을 가리는 ‘가림막’이 되기도 했고, 때로는 고된 시집살이를 잠재워 주는 잔잔 바람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을 기억(記憶)해 보면 어머니의 ‘행주치마’에서는 항상 생솔가지 타는 냄새와 디딜방아 찧느라 흘린 땀 냄새가 배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1960년대 학생들의 앞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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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행주치마’ 폭에 안기면 최면술(催眠術)에 걸리듯 모든 시름이 가라앉던 기억은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이 오롯이 배어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다른 그 어떤 나라 여인들보다 더 무거웠을 우리들 어머니의 ‘행주치마’, 일제의 강압에 의한 징용(徵用)과 동족상잔의 6.25전쟁 중에 행방불명(行方不明)이 된 남편과 자식을 기다리는 애절(哀切)한 마음을 숨겨둔 그 시절 어머니들의 무명베 ‘행주치마’도 이제는 긴 역사(歷史) 속으로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요즘의 행주치마(고부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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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토록 강인(强忍)한 어머니상과 사랑스런 여성상으로 상징되던 ‘행주치마’가 사라지면서부터 어느 샌가 우리들 주변의 여자들도 여성(女性)스러움을 잃어가고 있다. 마치 주부(主婦)이기를 거부(拒否)하기라도 하듯 반바지에 티 차림이 보통이어서 우아(優雅)한 그 시절 여인들의 모습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선머슴아’의 모습들로 변해버렸다.


여자로서의 주부(主婦)라면 트레이드마크인 ‘행주치마’를 드레스 위에 입고 가족들을 위해 봉사하며, 여자로서의 행복한 꿈을 꾸는 그 이상의 행복은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없다. 그런데 지금의 청년주부(靑年主婦)들은 이렇듯 소박한 꿈마저도 갖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구멍 뚫린 청바지를 끌면서 엉덩이로 냉장고(冷藏庫) 문을 여닫는 품은 결코 우아(優雅)하고 다소곳한 ‘행주치마’의 자태와 이상(理想)이 아니기 때문이다.


출처 : 373722
글쓴이 : kagora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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