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시장에 관한 자료들 입니다.
박원순 시장이 당선되고 그에 대해 나온 기사 중 일부입니다.
(생략)
삶의 전환기 ‘긴급조치 9호’
박 당선자는 1975년 한 번의 재수 끝에 서울대학교 사회계열에 입학했다. 그러나 입학한지 3개월 만에 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 9호를 반대하는 교내시위에 나섰다가 투옥되면서 일생의 중요한 전기를 맞게 된다. 열아홉살의 양심수로 감옥에 갇힌 4개월여의 기간은 청년 박원순에게 사회를 보는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었다. 다양한 이유로 갇힌 수인들과 접하면서 ‘사회를 보는 눈’과 ‘죄를 짓는 환경’에 대해 고민하게 됐고, 의문을 풀기 위해 독서에 몰두했다. 그를 법조인으로 이끈 독일 법철학자 예링의 <권력을 위한 투쟁>과 사회를 보는 따뜻한 눈을 갖게 해준 <성경>도 이때 독파했다. 방대한 독서로부터 삶의 지혜를 얻는 그의 오랜 습관도 이때 형성된 것이다.
(생략)- 성경 뿐 기사에는 불교의 불자도 없습니다..
박원순 시장의 종교에 대해서 클안기와 함께
비개독화에 매진하는 모 단체에서는 박원순의 종교가
이슈화 되었습니다.
(박원순이 당선되어 축하기념으로 한턱 낸다까지 나옵니다.개독인 당선이 축하할만 것인지는..)
위의 내용처럼
저도 예전에 박원순의 종교에 대해서 개독임을
확인한 바 있지만 현재는 불교로 바꿔 있습니다.
이 단체에서는 종교에 대한 논란이 약간 있었던 바,
박원순이 만해 상을 수상했다는 사실(2006년)만으로 불교도라고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왜 사전 등재가 갑자기 불교로 바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기사는 별로 없지만 박원순은 개독과 아주 끈끈한 인연을 자랑합니다.
아래는 국민일보에서 보도된 개독청년 소명찾기 공개 강좌에 관한 기사입니다.
이 강좌의 목적은 "반개독교운동의 흐름속에서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있는
개독청년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소명을 심어주기 위한 것"입니다.
주최는 성서연구원입니다.
여기에서 박원순 시장은 강의를 합니다.
2007년 먹사들 앞에서 박원순 시장이 한 말입니다.
교회의 정치개입 가능하다는 내용이지요.
기사를 보면 언뜻 올바른 소리인 것 같습니다.
교회가 공익을 위해서라면 정치개입을 해도 된다는 것은 아주 그럴듯합니다.
하지만
이런 발언은 헌법상의 정교분리에 배치됩니다.
헌법에서 말하는 정교 분리는
원래 정치가 종교를 관여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에서 나왔지만
또한 정치의 종교 개입 뿐 아니라, 종교가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 발언은 상당히 위험한 발언입니다. 다만 먹사님들은 좋아할 내용이지요.
2008년 개독 예배모임에 참가한 박원순 시장에 관한 기사입니다.
이 모임은 4대강사업을 항의한다는 예배였는데...
박원순 시장은 김용옥교수와 이 모임에도 살짝 얼굴을 들이내밉니다.
(김용옥 교수는 개독을 까지만 사실 개독인입니다.)
그리고 2011년 10월 23일
박원순 시장은 종교 교회라는 곳에 가서 예배를 봅니다.
박원순 시장에 대해서는 얼마전 어느 대형교회 먹사님이 사탄운운 발언을 해서
그와 관련된 기사가 너무 넘쳐서 참 찾기가 어렵습니다.
박원순 시장 뒤에는 과연 개독이 없을까요?
아래는 어느 개독인이 개독 카페에 올린 글 중 하나입니다.
대충 내용은
교회협은 박원순을
한기총은 나경원을 지지한다는 것이죠.
몰랐는데 현재 개독은 교회협과 한기총으로 양분되어 있습니다.
교회협은 좌파계열이고
한기총은 꼴통계열이라고 보면 됩니다.
일찍이 통합운동도 시도한 적이 있죠.
한 마디로 한기총보다는 주목 받지는 않지만 대규모 개독집단입니다.
박원순 시장 배후에는 대형 개독 집단이 있습니다.
같은 개독인으로 보이는 박원순 시장을
어느 대형 교회 먹사가 깐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서로 다른 소속이니깐요. 그 먹사님은 한기총 소속이지요.
선거 전일 박원순이 출석한 종교교회는 어떤 곳일까요?
구한말 시작된 아주 오랜 전통을 지닌 교회입니다.
아주 낯익은 이름을 접하게 됩니다.
좌옹 윤치호~
윤치호가 누굴까요?
네이버 사전에서 가져 왔습니다.
윤치호 [尹致昊, 1865~1945]
친일파 중에서도 아주 악질인 친일파입니다. 너무 업적이 뛰어나서 본인 뿐 아니라 아버지한테 작위를 받게 했을 정도죠. 이 정도면 이완용 만큼은 아니지만 김활란 보다는 급수가 위인 것 이죠. 개독화=문명화라고 생각했던 독실한 광신적 개독인이죠. 박원순시장이 예배를 봤던 종교교회는 바로 이른바 극악의 친일 개독인이 만들고 이를 따르는 교회입니다. ...좌옹 윤치호 적극적 선교의지를 유산으로 이어받아... 미개한 대한민국을 개독화 시켜서 빨리 문명화 시켜야 하는데 말이죠. ㅡㅡ;; 박원순이 만해상 등을 받았다고 해서 개독이 아니고 불교라고 하는데... 이상은 불교인에게만 수여하는 상이 아닙니다. 포교상을 제외하고는 전부 종교와 상관 없이 주는 상입니다. 이상을 받은 사람중에는 이란 사람도 있고 ㅡㅡ;; 더구나 김대중 대통령(천주교인데 흔히들 개독들이 하나님으로 바꿔서 간증문을 냅니다.) 신용하 교수(개독입니다.) 등과 같이 불교가 아닌 예수쟁이들한테도 부여합니다. 그러니 이것이 박원순 =불교를 말할 수 없는 것이죠. 더욱이 박원순이 받았던 한국불교인권상은 말만 불교인권상이지 아주 기가 막힙니다. <한국불교인권상> 한국불교인권상은 한 해동안 △민주화 및 인권신장 기여 △국가기관 기업 운영 투명화 △기부문화 확산 △언론 자유 보호 등에 공로를 세운 사회, 불교계 인사를 대상으로 매년 시상되는 불교계 최고 인권상이다 영예의 수상자 명단 (1회~15회) 1992년 제 1회 박정기(박종철 열사 부친) 1993년 제 2회 윤석양 이병(군 양심선언자) 1994년 제 3회 정해숙(전국교직원노동조합 위원장), 서준식(인권운동사랑방) 1995년 제 4회 단체(미군범죄근절을위한운동본부) 1996년 제 5회 김창한(전국지하철협회 의장) 1997년~1999년(3년)은 내부 사정으로 인하여 시상식 없었음 2000년 제 6회 라창순(범민련 고문), 이성호(부산연합의장) 2001년 제 7회 박정숙, 김선분(통일인사 공동수상) 2002년 제 8회 차수련(보건의료노조위원장) 2003년 제 9회 무함마르 알 카다피(리비아 혁명지도자), 단병호(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2004년 제 10회 정수일(전 단국대학교 교수, 무하마드 깐슈), 허원근(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2005년 제 11회 김지태(미군기지확장반대팽성대책위원회 위원장) 2006년 제 12회 단체(한국불교대학생연합회) 2007년 제 13회 박석운(사회진보연대 상임운영위원장) 2008년 제 14회 각현스님(연꽃마을 이사장) 2009년 제 15회 박원순(희망제작소 상임이사), 최상재(전국언론노동조합 위원장 역임 얼마 전 피살된 카다피국가원수가 받았던 상이죠. 받은 사람들의 성향을 보니 지네끼리 나눠 먹는 모양인데... 좀 그렇죠? 더구나 정수일은 아랍인으로 분장했고, 마누라도 정수일이 간첩이고 북한출신(북한에 귀화한 조선족)이었다는 걸 몰랐을 만큼 철두철미했습니다. (2000년 김대중 정권에서 특별사면을 받아 5년 복역하고 나왔습니다. 다만 중세 교류사 분야로 특화된 이분의 학문적 업적은 꽤 있습니다. 원래 학자 출신도 아닌데 우리학자들은 죄다 등신들인지...위장 학자보다 못한 것은 뭔지..) [출처] 카다피에게 불교인권상을 불교인권위원회 ( 펌)|작성자 비탈로즈 독재자 중에 꽤 유명한 카다피나 간첩 정수일이 이 상을 받은 이유가 뭘까요? 이 상을 보면 박원순 시장의 위상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아주 기가 막힌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정치가. 서재필 ·이상재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였으며, 1910년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을 조직한 후 대성학교 교장으로 있다가 11년 105인사건으로 6년형을 선고받았다. 출소 후 친일파로 변절하였고, 일본제국의회의 칙선 귀족원의원을 지냈다. 본관 해평(海平) 호 좌옹(佐翁) 활동분야 정치 출생지 충남 아산(牙山) 주요저서 《우스운 소리》,《영어문법첩경(捷徑)》 본문
조선에서 개혁정책이 번번히 반대파에 의해 가로막히자 개화파는 급진적인 정변을 꾀하였다. 윤치호는 이에 반대하였지만 1884년 김옥균 등 개화파가 주도한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나고 윤웅렬은 형조판사, 윤치호는 외아문(外衙門) 참의(參議)로 임명되었다. 개화파 인사라는 이유로 위기에 몰리게 되자 청나라 상하이[上海]로 유학, 중서서원(中西書院)에서 3년 동안 공부하며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감리교 신자가 되었다. 선교사 A.J.앨런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가서 밴더빌트대학과 에모리대학에서 5년간 머물면서 영어·신학·인문사회과학 등을 공부하였다. 그는 서구의 문명을 신봉하였고 특히 조선은 기독교를 통해 문명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나아가 조선과 청국은 미개한 문명으로 서구화된 문명에 의해 개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상하이에서 중서서원에서 교사로 근무하다 1895년 귀국, 총리대신 비서관을 거쳐 학부협판(學部協辦)이 되었으나, 친미파 세력들이 주도한 춘생문(春生門)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하였다. 1896년에는 민영환(閔泳煥)을 수행하여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2세 대관식에 참석하였다. 1897년 서재필(徐載弼)·이상재(李商在) 등과 독립협회에 가입하였으며, 1898년 2월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서재필이 미국으로 추방되자 독립협회를 이끌며 국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같은해 8월 독립협회 회장에 취임하여 자주국권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중추원(中樞院)을 개편한 서구식 의회설립운동을 펼쳤다. 고종을 설득하여 만민공동회의를 개최하기로 허락받고 헌의6조(獻議六條)를 발표하였는데 이는 최초의 국민참정권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윤치호를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공화국을 설립한다는 설이 퍼지자 위기를 느낀 고종은 독립협회 임원을 체포하고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강제 해산하였다. 이로써 윤치호가 주도한 독립협회의 개화운동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는 법무대신이었던 부친의 권유로 함경도 덕원부윤(德源府尹), 천안군수 등을 지냈는데 이를두고 많은 비판을 받았다.
1906년 장지연(張志淵) 등과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 회장이 되었으며 교육사업에 힘썼다. 1907년 안창호, 양기탁, 이동휘 등과 함께 신민회(新民會)를 설립하여 국민 계몽운동에 헌신하였다. 1910년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을 조직한 후 안창호가 설립한 대성학교(大成學校) 교장으로 재직하던 중 1911년 105인사건으로 6년형을 선고받았다가 3년 만에 출소하였다. 하지만 출소한 이후 친일파로 변절하여 조선총독부 일간지인 매일신보(每日申報)에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하고 중일전쟁에 청년들이 자원입대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는 이 공로로 일본제국의회의 칙선 귀족원의원을 지냈으며 그의 부친은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저서에 《우스운 소리》, 《영어문법첩경(捷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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