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가 유대인을 600만명 학살했다??
셤기간도 끝났으니 활동 재개 합니다 ^^
우리는 여태까지 나치에 의해 600만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다고 알고있다..
그러나 과연 그것들이 진실일까??
나는 유대인이 나치에 의해 600만명이 학살당했다고 보지 않는다. 그 근거와 증거들을 제시하겠다.
2차대전 당시 유대인 박해및 학살의 진상
첫째 - 1차대전직후까지 독일은 유대인에 대해 관대했다
유태인 박해는 다른 유럽국가들이 심했으며 독일은 오히려 관대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유태인들이 2차대전 전에는 독일에 가장 많이 거주 했습니다 그리고 독일계 유태인 금융제벌인 막스바르부르크는 히틀러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한걸로 유명합니다
둘째 - 독일은 유태인들에 대해 차별을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독일 유태인들은 다른 유럽국에 비해 출세나 사업을 하기 쉬웠고 이들은 학계, 법조계, 의학계, 금융계, 언론계등 독일사회 전분야를 장악할수 있었지만 유태인들은 독일사회와 화합하려 하지 않았고 나중에 독일 국민들의 반감을 사게 되는 원인이된다(1992년 LA폭동때 빈민폭도들이 자수성가한 한인교포들에게 적개심을 품고 약탈한것과, 인도네시아 폭동때 짱골라교포들이 원주민들에게 당한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셋째 - 독일은 유태인의 독립국가 형성에 신경을 썼다
1933~1941년 까지 독일은 유태인들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고(독일의 밀텐슈타인이 유대인이주를 하인리히 히믈러 SS사령관은 시온주의자의 대아랍 지하군사 조직인 '하가나'의 활동을 도왔다), 1942년 요제프 괴밸스의 본격적인 유태인박해 주장이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히틀러는 유태인 학살 보다는 그들을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섬으로 보내 그들만의 국가를 형성시키고 나중에 독일의 우방으로 삶으려 했다. 그리고 미국에 제안가지 했다.
(그러나 국제 유대인 협회의 강력한 압력으로 미국의 루즈벨트는 거부하게 된다..)
넷째 - 독일의 등뒤에 칼을 꽃은 유태인
독일이 친영국 성향의 유태인들을 국외로 추방하려하자 당시 독일의 경제를 잡고 있던 유태인들은 독일을 굴복시키기위해 독일의 수출을 분쇄시키고 전세계적인 독일상품 불매운동을 벌인다 그리고 이 활동을 신성한 전쟁이라고 하면서 세계 유태인경제 연합회 회장인 운터마이어가 앞장을 선다 뿐만아니라 전쟁중에 일부 유태인이 연합군과 결탁하여 연합군의 폭격을 유도하는 신호등을 장착하는 등의 밀정행위를 하자 히틀러는 모든 유태인을 소용소에 강금 시킨다
이쯤되면 유대인의 행위는 국가 반역죄에 해당되며 국가반역죄는 어느나라에서나 사형에 해당 됩니다
다섯째 - 그러나 결국 사고가 터지고 만다.
시온의 칙훈서(유태인의 세계경영지침서)가 발견되어 알려지고, 공산당활동에 유태인들의 간접협조한 혐의와, 1936년 프랑스주체 독일 외교관을 암살하자 반유대감정으로 독일이 들끓기 시작했고 크리스탈학살 사건으로 유태인의 인명피해가 발생하자 더이상의 피해를 막기위해 유태인이 학살당하지 않도록 2만명의 유태인을 강제로 수용소에서 수용하게 된다
좀더 덧붙여서 말하자면 독일을 패하게 만든 세계 1차대전의 배후에는 바질 자하로프라는 유대인 전쟁무기상인이 있었는데 이 사람의 영국의 군수제벌인 빅커스사의 영업이사로써 친독적인 그리스 국왕을 추방하여 세계대전의 장기화를 획책했다고 합니다
특히 독일의 군사기밀을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으로 빼돌린 사실 하나 만으로도 독일이 유대인을 증오할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영국군이 사용한 수류탄은 독일의 기술로 만들어진 수류탄으로써 이 성능좋은 독일제 수류탄이 독일군을 죽이는 촌극까지 벌어지게 됩니다.
여섯째 - 유태인 600만 학살은 조작 확대된 것이다.
실제로는 60만정도이며 그것도 연합군의 무차별 폭격과 전염병(더이상의 전염병 확산 방지를 위해 시체들을 소각하게 된다)으로 사망한 사람이 대다수이다 25(7.6평)평방미터 되는 곳에 7~800명을 집어넣고 독가스로 죽였다는데, 실제론 그런 계산이 안나옴니다, 그리고 관광객들에게 전시되는 아우슈비츠 가스실과 소각로는 1946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스탈린의 소련군 또한 폴란드 유태인을 많이 죽였으며 나중에 이것마저 독일의 만행으로 뒤집어 쓰게 된다
일곱째 - 나치 독일에는 과연 살인공장이 활성화 되있었을까??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간수들의 증언은 대부분 살인공장이 그정도로 활성화 되지 않았다고 한다..
여덟째 - 과연 나치의 독가스실은 사용이 되었을까??
독가스로 사용된 체클론 B는 실제로 투여 이후 독이 빠지고 중화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독가스실은 1946년에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아홉째 - 식량도 주지 않았다고 알고 있다.. 그렇다면 식량보다 비싼 연료를 공급해 화장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독일이 발지 전투나 부다베스트 포위전 같은 막판 뒤집기 작전에서 연료 부족으로 작전이 실패하였다..
나치가 식량을 유대인에게 안줬다면, 왜 식량보다 비싸고 그 당시 전쟁에 쓰기도 부족한 연료를 왜 유대인의
시체를 태우는데 사용했을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하지만 600만이라고 과장된걸 그대로 밀여붙이는 사람들은 유대인들이겠지요.
실제로 유대인 대학살이 과장되었다는 건 독일이 아니라 다른 국가들에게서 쏟아지는 말이니까..
희생자 수
기존에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당한 사람은 약 400만명이며 이 중에서 약 250만명이 유대인이라고 알려져왔다. 처음에 이 수용소를 해방한 옛 소련군의 발표였다. 그러나 이 숫자에 대한 반론도 있다. "과장되고 꾸며낸 얘기가 많다"는 제목으로 씌여진 뉴스위크지 1995년 1월 18일 자의 기사[1] 에 의하면,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사람은 유대인을 포함하여 110만 ~ 150만명으로 추산했으며, 가장 많은 희생자가 유태인인 것은 분명하지만, 정확하게 몇 명이나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유태인 외에 나머지 희생자들은 폴란드 정치범, 옛 소련군 포로(주로 정치장교), 집시 등이었다. 이어 2005년 아우슈비츠 해방 60주년 행사를 알리는 기사에서는 유태인 희생자 수를 100만명으로 쓰고 있다.
1950년 대 유대인의 주장과 증언 - 1000만명
1960년 대 유대인의 주장과 증언 - 800만명
1970년 대 유대인의 주장과 증언 - 700만명
1960년 대 유대인의 주장과 증언 - 600만명
1970년 대 유대인의 주장과 증언 - 500만명
1980년 대 유대인의 주장과 증언 - 450만명
1990년 대 유대인의 주장과 증언 - 400만명
2000년 대 유대인의 주장과 증언 - 100만명
이걸 봅시다. 아우슈비츠에서 죽었던 숫자가
400만에서 110-150만으로 고쳐졌습니다.
그뿐만 아니죠. 그중에 유대인들이 얼마나 죽었는지는 정확히 알수가 없지요.
기존에서는 유대인들이 250만이 죽었는데 100만명으로 고쳐졌지요.
결국 600만에서 150만을 뺍시다. 그러면 450만명으로 줄어들겠지요?
그리고 아우슈비츠 외 다른 유대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과장된것은 100% 사실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전후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희생자를 800만으로 주장했다가 800만은 무리이다 싶어서 600만으로 수정했지요.
이제는 600만명에서 450만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결정적 증거..
다음 소개할 글은 레옹 디그렐(Leon Degrelle)이라는 사람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보낸 공개편지이다.
Name 레옹 디그렐
Subject 교황 성하께 삼가 드리는 편지
교황 성하께 삼가 드리는 편지
[이리유카바 최의 레옹 디그렐 소개]
다음 소개할 글은 레옹 디그렐(Leon Degrelle)이라는 사람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보낸 공개편지이다.
1906년 벨기에에서 태어났으며, 철학자, 작가, 기자, 정치인, 군인이었다. 디그렐은 조국 벨기에와 유럽 기독교의 악마화를 막기 위하여 싸웠으며, 알려지지 않은 20세기의 비사를 많이 쓴 사람이다.
레옹 디그렐은 1944년 스페인의 말라가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1993년 87세로 눈을 감았다. 많은 책을 쓰기도 했지만 청중을 도취하게 만드는 명연설가로도 유명했던 그는 <조국의 현실(Le Pays reel)>이란 자신의 신문을 가지고 있었다.
29살의 젊은 나이로 카톨릭교 렉스운동(카톨릭 사상을 기본으로 한 사회주의를 주창하는 사상. 국민이 단결하고 정부가 사회정의 편에 서서 산업제도와 정치를 개혁하자고 주창하는 사상으로서, 디그렐은 이 사상을 창시하고 카톨릭교 렉스운동이라는 사회운동을 일으켜 친파시즘의 노선을 밟았다)에 가담하여, 국가는 단합되고 사리에 맞는 사회주의 정책을 펴는 정부가 필요하다는 극단적인 정견을 가지고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1936년 처음으로 제도 정치에 참여한 선거에서 디그렐은 29살의 젊은 나이에 벨기에 사상 최고의 득표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그의 당은 21개의 의석을 차지하여 11.5퍼센트의 국회의석을 차지하였다.
그는 유럽이 공동으로 단합하여 공산세력에 대항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서 히틀러의 공감을 얻었고, 프랑스어를 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발룬(Walloons)이라는 의용부대를 만들었다. 이 부대는 후에 발로니아 SS 28사단(28th SS Division Wallonia)이라는 독일 정예사단으로 바뀌었으며, 디그렐은 그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나중에 철십자 기사훈장을 받은 유일한 비독일계 사람이었다.
그는 전쟁 능력도 뛰어나 미 육군의 존 빈슨 준장은 미 육군성의 잡지에 쓴 글에서 디그렐의 <전술학>을 “전쟁의 예술로서, 군인은 누구나 읽어야 하는 책”이라고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노르웨이 근처에서 벌어진 연합군과의 전투에서 사단 병력 2,500명을 모두 잃고, 그를 비롯하여 3명만 살아남았다.
그는 경비행기로 가까스로 탈출하여 스페인으로 넘어가 정치 망명허가를 받은 뒤에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고국 벨기에에서 이미 1944년에 ‘부재자 사형 선고’를 언도받았기 때문이다.
이 편지는 1979년 5월 교황 바오로 2세에게 보낸 공개편지인데, 바티칸의 교황이 이 편지를 받았다는 수락 번호는 ‘951’이며, 교황의 서명 위에는 ‘CITTA DEL VATICANO P II 26.5.79'라고 씌어 있다.
이 편지는 1979년 6월 나치 독일이 6백만 명의 유대인들을 독가스로 대량 학살했다고 알려진 아우슈비츠(폴란드의 남부에 있는 오슈비엥침이라는 도시를 독일말로 아우슈비츠(Auschwitz)라고 부르며, 2차 세계대전중 유대인들을 감금하고 독가스로 대량 학살했다는 수용소가 이곳에 있어 보통 ‘아우슈비츠’라고 하면 그 수용소를 생각하게 된다.) 수용소에 교황이 찾아가, 폴란드의 전체 주교들과 함께 직접 미사를 드린다는 소식을 듣고, ‘나치의 6백만 유대인 학살설’이 조작임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과 야합하고 동조하는 교황의 처사를 탄원하는 글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편지는 벨기에 당국이 형법에 저촉된다고 하여 내용의 공개가 금지되어 있다.
[레옹 디그렐씨의 요한바오로 2세에게 보내는 편지]
제목 : 교황 성하, 아우슈비츠에 가신다고요?
1979년 5월 20일 망명지에서
바티칸 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께
성하(聖下)께 삼가 드립니다.
저는 레옹 디그렐이라고 하는 사람이여, 2차 세계대전 전에는 벨기에에서 렉스운동의 지도자였습니다. 세계대전 중에는 의용군 사령관으로서 독일의 28사단과 함께 동부전선에서 싸운 사람입니다.
이 글을 쓰는 것은 누가 종용해서가 아니라는 지난 사실을 밝히며, 저는 성하와 마찬가지로 카톨릭 신자이고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하나의 형제로서 이러한 글을 올릴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저는 성하께서 1979년 6월 2일부터 12일까지 폴란드를 방문하셔서 강제수용소였던 아우슈비츠에서 성찬 미사를 드리신다 하기에 염려되는 점이 있어 이 글을 드리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죽은 이가 누구였든 또는 어디서 죽었든 간에, 불에 그을린 자국도 아직 없는 새 화장로 앞에서 죽은 이를 위하여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노여움을 불러일으킬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백보를 양보해서, 당신도 인간이기에 교황으로서의 일거수일동작에서 폴란드인이라는 사실이 끊임없이 드러나고 있다는 점을 이해합니다. 당신은 젊은 시절에 젊은 혈기로 운동에 참여한 애국자입니다.
당신에게 그때의 혈기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지금은 교황이 되었으니 역사 속에서 아직도 분명하게 해결되지 않은 문제에 대하여 무엇인가 해야 되겠다고 느끼지 않습니까?
보기를 들어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게 된 악행에 대하여 누가, 어떠한 책임이 있으며, 그 주모자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 당시 누구라도 당신네 폴란드 총리였던 베크(Beck) 대령이 사리에 어긋나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1939년에 그는 맡은 바 일을 과연 양식 있고 성실하게 처리했습니까? 그는 그때 독일 정부와 평화를 이룰 수 있는 분명한 기회를 거만한 태도로 거절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후에는 또 어떻게 했습니까?
전쟁의 내용이 정말 보도된 그대로였습니까? 실제로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까? 양쪽 다 범죄적인 행위를 저질렀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그들이 실제로 원하는 것들이 언제나 객관적으로 반영되었습니까? 혹시 적국의 문서를 거짓꾸미어 발표하고, 선전 목적 때문에 제대로 검토하지도 않고 일부러 나쁘게 발표하지는 않았습니까? 상대가 적이라고 해서, 없는 사실을 뒤집어씌운 허튼소리를 확인도 하지 않고 기정사실인 양 행동한 일은 없습니까?
교회는 항상 누구보다도 사실을 잘 알게 됩니다. 그러나 교회는 지난 2천 년동안 다칠까 봐 늘 조심하고 과감한 일을 피하는 안일주의로 일관하여 왔습니다. 그래서 항상 풍파가 지나고 파도가 가라앉고 찢어질 것은 다 찢어진 다음에, 그리고 모든 것이 알려진 다음에야 증거를 수집하여 판단을 내리는 버릇을 가지고 있습니다.
좀더 자세히 말씀드리자면, 교회가 2차 세계대전 도중에 극도로 자제하고 있었다는 혐의를 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당시 미치광이 놀음에 끼지 않으려고, 거슬러 올라가는 쪽으로 노를 잡았던 것 아닙니까?
성하께서 당신의 고향에, 특히 아우슈비츠에 가시면 아마도 과거의 기억이 조금이라도 떠오를 것입니다. 그러면 성하께서는 정말 기도만 하러 그곳에 간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염려하는 것은, 단순히 성하가 그곳에 가셨다는 사실, 그리고 거시서 성하가 기도를 올렸다는 사실만으로도 아주 중요한 의미가 부여될 것이며, 사악한 선전광들의 연막으로 사용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들은 성하의 등뒤에서 미움에 가득찬 악선전을 더욱 열나게 해댈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과거 25년간 아우슈비츠 문제에 대해 악독한 마음으로 거짓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예! ‘거짓말’이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중에 갇힌 수많은 사람들을 아우슈비츠에서 무더기로 학살했다는 전설적인 그 이야기, 헛소리들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1945년부터 이 전설은 수천 가지의 책에 씌였고, 온 세계가 이것을 믿도록 강요당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들은 말세를 연상시키는 총천연색 영화를 만들어 사실을 조작할 뿐 아니라 기본적인 산술이나 상식에 맞지도 않는 말을 믿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존경하는 성하
저는 성하께서 2차 세계대전 중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저항운동에 참여하여 전투도 하셨고, 심지어는 잠시 아우슈비츠에 잡혀가 계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곳을 거쳐간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성하께서도 그 독가스를 마시지 않았기 때문에 교황이 되지 않았습니까?
성하께서는 바로 그 안에 갇혀 있었던 증인으로서, 그들이 독가스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실 것 아닙니까? 성하께서는 속세의 선전광들이 이 엄청난 학살사건을 조작해 냈다는 것을 알면서도 쳐다만 보고 계시는 가장 중요한 증인이 아닙니까?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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