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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위선의 가면 .정의의 진실

그리운 오공 2013. 11. 20. 16:14

 

나찌의 홀로코스트에서 유대인을 구하기 위해 카톨릭교도가 개인적으로 생명의 위험을 무릅썼다는 것이 사실일지 몰라도, 전체적인 카톨릭 자체는 그와 정반대이다. 로마 카톨릭의 정보 조직자들은 아돌프 아이히만(Adolph Eichmann), 트레블린카(Treblinka)의 사령관 프랜츠 스탱글(Franz Stangle), 이동 가스실의 발명자 발터 라우프(Walter Rauf), 리용(Lyons)의 도살자 클라우스 바비에(Klaus Barbie)와 크로아티아의 피의 독재자 안트 파벨릭(Ante Pavelic)등 수천의 나치 전범들이 심판을 피해 도망치도록 도와주었다. 피우스(Pius)는 개인적으로 나찌 전범들의 밀수를 승인했고, 그것은 후에 바오로 6세로 알려진 그의 정치적 고문, 지오반니 몬티니(Giovanni Montini)에 의해 지시되었다. 1차 대전 직후,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만들기 위해 로마 카톨릭국가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가 동방정교 세르비아국과 연합되었다.

즉시, 크로아티아인들은 정교회 세르비아족을 겨냥한 테러조직, 우스타쉬(카톨릭군대)를 만들었다. 무솔리니(Mussolini)에 의해 후원되고 지지받은 안트 파벨릭(Ante Pavelic)이 그 수장이었다. 유고슬라비아 왕 알렉산더1세가 1934년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그는 파벨릭에 의해 마르세이유(Marseilles)에서 암살되었다. 프랑스와 유고슬라비아 법정에서 둘 다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파벨릭은 무솔리니가 보호하고, 그의 인도를 거부한 이탈리아로 도망쳤다. 1941년 나찌가 유고슬라비아를 침략하고 파벨릭도 거기 동참했다.

히틀러는 그를 새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수장으로 만듦으로 그에게 보상했다. 뵈트너(Boettner)는 그의 로마 카톨릭주의 국가들에서 ‘파벨릭의 종교장관은 또다른 로마 카톨릭 교도인 안드리야 아르투코비치(Andrya Artukovic)였다고 밝혔다.’ 모든 세르비아인과 유대인 학살과 핍박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재산이 몰수된 채 7-8만의 유대인들이 그 새 국가에서 학살, 추방되었다. 공식기록과 사진들은 파벨릭과 대주교 스테피낙(Stepinac)이 정부, 사회, 종교적 사무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스테피낙은 파벨릭에 의해 지도된 우스타쉬군대의 최고 군사 사도적 교황대리로 지명되었다. 따라서 그는 끊임없이 발생하는 극악무도한 일을 알만한 위치에 있었다. 1941년 5월 수많은 대학살이 자행된 후, 파벨릭은 로마 바티칸으로 갔고 교황 피우스 12세가 그를 맞은 후, 동시에 무솔리니와 협정을 맺었다. 잔 로프투스(John Loftus: 나찌의 추적기관인 ‘정의부’에서 변호사로 활동한-의회 앞에서 전문가 증인이기도한)와 마크 아론(Mark Aarons: 오스트리아 방송협회와 같이 일한 국제 시상 승리 조사 기록관)은 그들의 저서 ‘불경건한 3위일체’ 70-87 페이지에서 뵈트너의 역사적 사실들을 확증해준다.

파벨릭을 주목해야할 많은 이유가 있다. 세르비아족, 유대인, 집시에 대한 4년간의 가공할 대학살들, 50만 무고한 민간인들이 그의 개인적 명령으로 학살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극단적 중세적 방법들(눈알이 도려내지고, 사지절단, 창자와 장기들이 살아있는 몸 밖으로 찢어져 흘러나오는)로서 살해되었다.

어떤 이들은 짐승처럼 도살되었다. 더 많은 이들이 간단히 산채로 화형 되었다. 스콧(Scott)과 존 리 앤더슨(John Lee Anderson)은 그들 저서 ‘동맹의 내부’-Dodd Mead & Co.1986년판-에서 그들의 잔학상을 고발한다. ‘우스타쉬는 그들의 적을 얼마나 많이 죽일 수 있는지를 서로 경쟁하였다. 포글라브닉(Poglavnik) 파벨릭(Pavelic)을 감동시키고, 승진 혹 영웅주의를 보이기 위해 그 무리들은 그들의 희생자들과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곤 했다. 너무도 소름끼치는 그 찍힌 사진들은 우스타쉬가 세르비아족을 도끼로 목을 자르는 것, 목을 톱으로 써는 것, 자그레브(Zagreb)의 시내로 목을 들고 다니는 것을 보여준다. 그 모든 사진 속에서 우스타쉬 대원은 웃고 있고, 그들의 극악무도함을 증명키 위한 듯 사진 속에서 환호하고 있다. 우스타쉬들은 그들이 죽인 세르비아인의 눈알을 엄청나게 모아서 포글라브닉(Poglavnik)에게 보내 조사하게 하고, 눈알과 인간의 내부 장기들을 자그레브의 카페에 자랑스럽게 전시시켰다. 그럼에도 이 모든 행동과 파벨릭 자신은, 카톨릭과 영국 지도자들에 의해, 무신론적 볼세비즘에 대항한 걸출한 카톨릭으로서 지지를 받았다.

파벨릭은 또한 피우스 12세와 그의 고위 고문단이 그의 군사적 카톨릭주의에 대해 지대한 애정을 가진 것도 알았다. 교황은 파벨릭을 받아들였고, 영국 외무성은 교황 피우스 12세를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도덕적 겁쟁이’라 불렀다. 불법 극악 무도 행위속에서 행동하는 파벨릭이, 교황과 만난 그 해에 10만 이상의 세르비아 정교의 남녀와 아이들이 우스타쉬에 학살당했다. 250개 정교회 회당이 파괴되고 로마 카톨릭의 교구신부들과 수녀들에 의해 전복되었다. 대주교 스테피낙의 서명을 받은, 자그레브와 사라예보(Sarajevo)의 국가 핍박자들 사무소에 기록과 그러한 폭력의 승인서들이 보관되어 있다. 1942년 2월 파벨릭에 대해 특별한 경의를 표하면서,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의 스테피낙 성당에서 TE DEUM이 연주되었다. 목회론적 편지에서 스테피낙은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크로아티아에서 본 것은 주님의 일이며, 그의 사제들에게 파벨릭을 지지하라고 명령했다.(로마 카톨릭주의, 뵈트너, 436p) 지지해야할 이유는 전쟁 중 파벨릭이 수만의 세르비안 정교회 신자들에 죽음의 형벌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로프터스와 아론) 독일의 죽음의 강제수용소가 해체 될 때도, 파벨릭은 죽음의 수용소를 운영할 수 있었으나, 마침내 그와 로마 카톨릭 사제들은 목숨을 건지기 위해 도망쳐야했다. 5년간 나찌-파시스트에 협조한 죄로, 유고슬라비아 법정은 스테피낙에게 16년형을 선고했다. 발터 몬태노(Walter Montano)는 그의 책, ‘자주색 커튼 뒤에서’에서 그 책임 등을 상세히 설명했다.

1946년 10월 5일 자그레브에서 검찰측 증인들의 퍼레이드가 증명했는데, 카톨릭 신부들이 총으로 무장하고 세르비아 정교신자들을 개종시키러나가 그들을 학살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증인들은 카톨릭 크로아티아 농부들과 노동자들이었다. 한 증인의 증언에 의하면, 650명의 세르비아 정교회신도들이 거짓 흉계에 속아서 그들의 교회로 끌려나가 문이 닫힌 후, 우스타쉬 대원들에 의해 죽도록 맞고 칼에 찔려 죽었다. 대주교 스테피낙은 카톨릭 출판, 성직자 편지, 연설로서 테러조직 우스타쉬를 찬양하고, 추축국과 안트 파벨릭의 꼭두각시 크로아티아 체제에 협력한 죄로 모두 주요법정에서 유죄판결 되었다.(237-238) 바티칸의 오서루아토레 로마노(Osseruatore Romano)는 그것을 수치스러운 불명예라 비난하면서, 스테피낙에 대한 선고에 반발했다.

그 재판은 카톨릭에 대한 재판이라 말했다. 뉴욕의 추기경, 프랜시스 카디널 스펠멘(Francis Cardinal Spellman)은 대주교 스테피낙이 ‘세계를 지배하고 미국을 파괴하며 인간의 자유를 말살하는, 힘에 의한 희생자’라 주장했다.(238) 그는 유고슬라비아 대주교가 전쟁 중 ‘굶주리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참 자유를 보호했다.’고 주장했다. 대주교 스테피낙의 원칙과 부하들은 폭력적이었다고 덧붙이면서, 캘리포니아 샌디에고( California, San Diego)의 주교 찰스 버디(Charles F. Buddy)는 유고슬라비아에서 카톨릭과 대주교 스테피낙의 악명 높은 박해에 담대히 맞설 것을 주장하며, 트루먼(Truman) 대통령에게 전보를 쳤다. 자유를 사랑하는 미국인들은, 그의 국민의 권리를 용감하게 지킨 이 위대한 애국자를 불신하도록 의도된, 사악한 조종에 무관심하지 않았다. ‘1960년 죽을 때까지, 그는 순교자로서, 특별히 교구설립의 고등학교가 그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로마 카톨릭주의, 뵈트너, 437) 한 남자의 이름을 따 명명된 학교를 생각해 보라. 크로아티아에서 카톨릭은 ‘국가의 운명을 지시하고 왕의 마음을 주장하는 하느님은 우리에게 안트 파벨릭을 주고, 우리의 박해자들을 흩어버릴 승리의 군대를 지휘할 아돌프 히틀러(Adolph Hitler), 동맹 국민과 우호적 지도자를 주셨다. 하느님께 영광을, 아돌프 히틀러에 감사를, 우리의 포글라브닉 (Polglavnik) 안트 파벨릭에 충성을’ 이라 외쳤다.(짐승을 탄 여자, 헌트, 301) 파벨릭, 히틀러에 의해 범죄가 자행됐음에도 불구하고.

로마교회는 종교의 자유에 대해 정책을 갖고 있다. 그들이 소수일 때 박해로부터 자유를 원한다. 그들이 다수이면, 박해할 자유를 원한다. 힘을 갖을 때, 남을 박해한다는 것을 로마는 거듭 거듭 행동으로 증명했다. 무솔리니, 모든 신부들과 그들을 도운 카톨릭은 [파벨릭, 히틀러, 무솔리니는 모두 카톨릭교도] 결코 파문되거나 그들 행동 때문에 비난받지 않았다. 사실상, 로마는 스테피낙의 행동을 옹호했다.

“내가 또한 예루살렘의 선지자들에서 어리석음을 보았나니 그들이 간음하고 거짓말들로 행하는도다. 그들이 또 행악자들의 손을 튼튼히 하며 아무도 자기의 악함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니 그들 모두가 내게는 소돔 같고 그곳 거민들은 고모라 같도다.” 렘23:14

수년전 나는 700클럽 회장 팻 로버트슨(Pat Robertson)이 말하는 걸 들었다. ‘카톨릭과 복음주의자들이 함께 하면, 세계 국가를 위해 그들은 옳은 결정을 할 것이다.’ 라고 그는 말했다.

카톨릭은 그녀 자신과 세계를 위해 결코 옳은 결정을 해오지 않았음을 역사가 증명한다. 바티칸-나찌 연합은 카톨릭의 어두움을 보여주고, 우리가 로마 카톨릭 시스템의 진정한 본심에 대해 더 잘 지혜롭게 간파해야함을 깨우쳐준다. 진리가 아닌 절대독재와 폭정이 그녀(계17-18장)의 목표이다.

“이는 너희 손들이 피로, 너희 손가락들이 죄악으로 더럽혀졌으며, 너희 입술이 거짓을 말하였고, 너희 혀가 사악함을 속삭임이라. 공의를 위하여 요청하는 사람도 없고, 진리를 위하여 변론하는 사람도 없으니 그들이 허망한 것을 의뢰하고 거짓을 말하며, 그들이 행악을 잉태하고 죄악을 낳는도다. ...그들은 화평의 길을 알지 못하고 그들이 가는 길에는 공의가 없으며, 그들이 그 길을 굽은 길로 만들었으니 그 길로 행하는 자는 누구든지 화평을 알지 못하리라.” 사 59:3-4,8

단죄를 피할 때까지, 파벨릭은 카톨릭 수도원에 수도승으로 위장해 숨었다. 이것이 카톨릭 권력자들의 정의에 대한 증거인가?
아브로 맨해튼(Avro Manhatan)의 저서 ‘바티칸 홀로코스트’에 충격적 말들이 있다. 9페이지(오차르크 서적, 1986년판)
‘독립 크로아티아 카톨릭 국가의 독특함은 정확히 여기에 있다. 그것은 카톨릭의 축소판이자 모델이다. 그녀가 힘을 가졌다면, 서방과 실제로 사방을 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은 주의 깊게 조사 되어야 한다. 그 중요성 때문에 세계의 모든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뤼벡커 섹스톤(Rebecca Sexton)


▣ 교황이 시성식을 위해 살인자를 지지하다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최근 크로아티아를 방문했고, 추기경 아이오지예 스테피낙(Aiojzije Stepinac)의 시복식으로 하일라이트를 장식했다. 시복식은 시성식이나 성인추대를 위한 중간단계이다. 그러나 그런 영예는 진리를 무시하고 그들의 정책에 맞추기 위해 역사를 왜곡하는 바티칸의 성급한 의지를 노출했다. 스테피낙은 2차 대전 중 자그레브의 대주교였다.

히틀러가 유고슬라비아를 정복했을 때, 그는 로마 카톨릭교도 안트 파벨릭이 지도하는 우스타쉬라 불리는, 크로아티아에서의 꼭두각시 정부를 세웠다. 파벨릭은 즉시 인종, 종교적으로 완벽한 카톨릭 크로아티아 국가를 세우기 시작했다. 모든 유태인, 집시, 비 카톨릭교도들은 그 나라에서 도살되었다. 가장 큰 , 환영받지 못한 그룹은 200만에 달하는 동방정교도 세르비아인들이었다.

스테피낙과 다른 카톨릭 지도자들은 ‘인종청소’에 축복을 주었다. 그 지도자들은 그들이 1/3의 세르비아인들은 학살, 1/3은 로마 카톨릭으로 강제개종, 1/3은 국외 추방시킨 것을 자랑했다.

이듬해 그들은 계획을 실시했는데, 70만이 피살, 산채로 화형, 강간, 불타는 교회에 감금, 도끼나 톱, 가정용 도구로 절단, 땅에 말뚝 박혀 온몸이 꿰뚫어지고, 강과 호수에 내던져졌다. 다른 많은 이들이 국외로 피하는 동안 수10만이 그런 고문과 죽음을 피하고자 개종을 했다. 히틀러 통치가 박살나자, 그 나라에는 유태인일 멸절 되고, 극소수의 다른 소수만이 남게 되었다.

그 전 과정동안 스테피낙은 파벨릭 정부의 행동에 축복을 내렸다. 그는 지도자의 사진에 자주 보인다. 많은 카톨릭 신부들이 우스타쉬에 군복을 기증하고, 그 도살자 그룹에 동참했다. 전후, 바티칸이 파벨릭에 도피처를 제공하고, 그는 마침내 아르헨티나로 도망쳤다.

그 후, 그는 유럽으로 돌아와 프란시스코 수도원에서 죽었다. 바티칸의 개입 덕에 그는 우스타쉬 대학살 전범으로써 처벌을 모두 면죄부 받았다. 티토(Tito) 원수하의 공산 유고슬라비아가 성립되자 파벨릭의 범죄 파트너, 스테피낙은 크로아티아를 떠나길 거부했다.

그는 결국 체포되고 16년형에 처해졌다. 후에 그는 가택연금으로 풀려나고, 1960년 죽었다. 바티칸의 이 극악무도한 위선의 행위에 개입한 자세한 정황을 주의 깊게 조사하는 그 노력들을 통해, 그 대량학살의 성인을 만드는 어떤 교회도 결코 크리스천일 수 없고 , 계시록 17-18장에서 정치적 음녀 교회에 내려지는 갑작스런 멸망을 볼 것이다.. 10억의 귀한 영혼들이 이 근대적 이교도 바벨론에 의해 사기를 당해 속고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 ‘그녀에게서 나오라!’고 경고해줘야 한다. 그들은, 결코 그들을 천국에 데려갈 수 없는, 성직자 의식, 처녀 마리아 여신숭배, 교황 숭배를 하도록 요구받고 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이 그들에게 영생의 완전한 확신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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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보수 총회 신학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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