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이야기들

노모 히데오 ( 펌 )

그리운 오공 2015. 5. 21. 14:04


제목 오뚜기인생...노모히데오 
작성 날짜 2003-03-20 IP:61.74.126.30 
작성자 bluesox 님 
우 리나라 사람들은 역사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왜놈들이라면 치부터 떠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아무리 세상이 변하고 한일간의 관계가 좋아진다고 해도 좋지 않은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된다. 최근 수년간 많은 한일선수들이 큰 꿈을 이루기 위해 메이저리그로 향했다. 이상훈이나 이라부처럼 실패한 선수들도 있고 이치로나 박찬호처럼 성공한 선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성공에 앞서서 동양인도 메이저리그에서 통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선수가 있다. 그의 이름은 노모다 




노 모는 학창시절에 특이한 투구폼으로 그다지 큰 주목을 받지 못하며 고교졸업후 프로가 아닌 실업팀으로 선수생활을 이어간다. 하지만 그는 시련을 기회로 삼아 그때부터 포크볼을 연마하기 시작한다. 포크볼을 완전히 몸에 익힌 노모는 실업리그에서 이름은 날리며 서울올림픽 대표로 은메달을 목에 겁니다. 

그 후 노모는 1989년 긴테쓰 버팔로스에 1차지명을 받으며 화려하게 프로에 입문한다. 1990년 프로 첫 해 노모는 다승. 방어율. 삼진부문을 모두 손에 넣으며 일본열도에 그의 이름을 강렬하게 심어 놓는다. 
1990년 W18 L8 ERA2.91 IP235 SO287 

91년에 한일슈퍼게임에도 잠깐 모습을 보여줬던 노모는 93년까지 4년연속 다승왕과 삼진왕을 차지하며 명실상부한 일본최고의 투수로 자리를 잡는다. 

1991년 W17 L11 ERA 3.05 IP242.1 SO287 
1992년 W18 L 8 ERA 2.66 IP216.2 SO228 
1993년 W17 L12 ERA 3.70 IP243.1 SO276 

승 승장구하던 노모는 94년에 어깨부상과 감독과의 불화설로 많은 경기에 나서지 못하며 프로진출이후 처음으로 슬럼프에 빠진다. 그리고 그는 시즌종료후 돌연 메이저리그 진출을 선언한다. 당시만해도 대부분의 일본야구전문가들은 무모한 도전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의 도전은 보였다. 



1994년 W8 L7 ERA3.63 IP114 SO126 






메이저리그 진출을 선언한 노모는 이듬해 다저스와 200만달러를 받고 푸른색 유니폼을 입는다. 








그 가 아무리 일본최고의 투수였지만 그의 성공을 예상한 전문가들은 아마도 별로 없었을 것이다. 수많은 비관론 속에 빅리그 첫 무대에 섰던 노모는 특이한 투구폼과 생각보다 많은 삼진을 잡아내며 이목을 집중시키는데는 성공한다. 하지만 제구력의 난조를 보이며 한달동안 승리를 거두지 못한다. 



그는 1995년 6월 2일 메츠와의 홈경기에서 완벽한 피칭을 선보이며 그토록 바라던 빅리그 첫승을 신고한다. 그 이후 노모는 폭포수와 같은 포크볼과 보다 안정된 제구력을 앞세워 연승행진을 하며 꿈의 무대인 올스타 선발까지 나서게 된다. 그리고 그 해 토네이도 열풍을 일으켰던 노모는 방어율 2위와 삼진왕을 손에 넣으며 동양인 최초로 신인왕까지 차지한다. 



1995년 W13 L6 ERA2.54 IP191.1 SO236 





노 모의 토네이도열풍은 96년에도 계속해서 이어져갔다. 그는 96년 홈개막전에서 깔끔한 피칭으로 완봉승을 거두며 기분 좋게 스타트를 끊는다. 시즌내내 타자들을 괴롭혔던 포크볼은 날이 갈수록 위력은 더해 갔으며 마침내 노히트노런이라는 대기록을 세운다. 그것도 투수들의 무덤이라는 쿠어스필드에서 말이다. 

1996년 W16 L11 ERA3.19 IP228.1 SO234 



빅 리그 데뷔이후에 통산 방어율이 2점대였던 노모는 포크볼의 위력이 점점 약해지면서 4점대 중반의 방어율을 기록하며 시즌을 마감한다. 한편 또 다른 동양인 투수였던 박찬호는 96년 적응시기를 거쳐 그 해 14승과 3점대 초반의 방어율을 기록하며 확실하게 다저스 선발의 한 축으로 자리잡게 된다. 아마도 97년부터 둘의 비교는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노모는 시즌 후 팔꿈치 수술을 받으며 다음 시즌의 불안감을 드리운다. 

1997년 W14 L12 ERA4.25 IP207.1 SO233 



수 술후유증으로 포크볼의 위력은 예전 같지 않았으며 직구의 스피드 또한 현저하게 떨어진 모습을 보여준다. 노모는 5회를 버티지 못하고 강판되는 경기가 계속해서 이어졌으며 마침내 다저스는 그를 메츠로 트레이드 시킨다. 메츠로 적을 옮긴 노모는 제 컨디션을 찾지 못하고 계속해서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며 시즌을 마감한다. 



1998년 
다저스 W2 L7 ERA5.05 IP67.2 SO73 
메츠 W4 L5 ERA4.82 IP89.2 SO94 



메 츠에서 기대이하의 플레이를 보여줬던 그는 다시 컵스로 트레이드 되지만 단 한경기도 나서지 못하고 다시 브르워스 유니폼으로 갈아입는다. 브르워스에서 선발자리를 다시 잡은 노모는 예전보다는 못하지만 위력적인 모습으로 돌아온 포크볼을 앞세워 재기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1999년 W12 L8 ERA4.54 IP176.1 SO161 





2 년만에 두자리승을 올린 노모는 다시 필리즈로 트레이드 되지만 또 다시 단 한 경기도 나서지 못하고 트레이드된다. 약체 타이거즈로 트레이드된 노모는 제 1선발이라는 막중한 보직을 맡지만 제구력난조와 손부상으로 기대이하의 성적을 기록하며 전반기를 마무리한다. 부상에서 다시 돌아온 노모는 시즌막판에 다소 안정된 모습을 보여주며 종료한다. 



2000년 W8 L12 ERA4.74 IP190.0 SO181 





시 즌막판에 괜찮은 모습을 보여줬던 노모는 또 다시 레드삭스로 트레이드된다. 레드삭스유니폼으로 갈아입은 노모는 작년시즌 새로 연마한 슬라이더를 선보이며 재기의 가능성을 한층 높인다. 마침내 그 가능성은 현실로 나타난다. 시즌초 오리올스를 상대로 자신의 2번째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며 부활의 신호탄을 알린다. 시즌내내 레드삭스의 선발자리를 단 한번도 거르지 않았던 노모는 AL삼진왕을 손에 넣으며 재기의 성공한다. 



2001년 W13 L10 ERA4.50 IP198.0 SO220 

재 기의 성공한 노모는 푸른색 유니폼을 다시 입는다. 다저스는 그 해 자유계약으로 풀리는 박찬호대신 노모를 선택한다. 노모는 한층 안정된 제구력과 뛰어난 경기운영능력을 앞세워 시즌내내 브라운의 빈자리를 완벽하게 메꾸며 팀의 에이스로 올라선다. 팀은 아쉽게도 막판 와일드카드 싸움에서 밀리며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지만 노모는 96년이후 개인최다승 타이를 기록하며 최고의 한해를 보낸다. 


올해도 변함 없는 그의 활약을 기대하며... 

고 등학교졸업하고 그가 뛸 수 있는 프로팀이 없었을 때도 잘 나가던 일본시절을 접고 빅리그 선언을 했었을 때도 그리고 어깨부상과 수많은 팀들을 옮겨 다녔을 때도 그는 시련을 기회로 삼아 다시 마운드에 섰다. 그가 일본사람이든 아니든 그의 불굴의 투지와 야구의 대한 사랑은 야구팬의 한 사람으로써 존경스럽다는 말밖에 나오지가 않는다. 



마지막으로 허접한 글에다 반말로 글을 쓰게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덧붙인 글입니다 


노모는 진정한 스포츠인의 전형을 보는듯 하다고나 할까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을 주는 선수인 것 같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노모의 사생활에 있어서 야구와 관련된 것 이외에는 거의 들어보질 못했는데요. 노모는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 대부분에게도 일치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진정한 야구 선수라는 것이죠. 

노 모는 대단히 검소한 사람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차도 일본산 중고차를 예전부터 그대로 쓰고 있으며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에서 뛸 적에는 근교의 조그만 아파트에서 생활했었다고 하네요. 대부분 성공한 스포츠 스타들과는 달리 노모는 그다지 광고분야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일본산 나이키 광고모델과 일본의 미즈노 스포츠 광고모델 이외에는... 어쨌든 노모는 메이져 진출후 거의 cf분야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고 보는 편이 옳을듯 싶습니다. (물론 일본에 있었을땐 이치로나 마츠자카처럼 온 광고판이 노모의 얼굴로 도배가 되다시피 했었죠.) 

그가 얼마나 돈에 초연한 사람이었나 하는 것은 다음의 일화에서도 쉽게 볼수가 있습니다. 1997년 일본의 한 언론사에서 노모의 사진을 동의 없이 게제하여 잡지를 판적이 있었는데 이는 명백한 초상권 침해입니다. 하지만 노모는 그냥 씩 웃고 넘겨버렸답니다. (비교해서 미안합니다만 박찬호와는 대조적이죠.) 

또한 노모는 아직까지도 통역원과 함께 생활하기도 하는데요. 이 문제를 가지고 좀처럼 주위에 적응하길 싫어하는 폐쇄아라고까지 국내 언론이 매도를 한 적이 있죠. 하지만 노모는 상당한 영어 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진출이 9년째이니깐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죠. 감독과의 대화는 물론 경기중 포수와의 대화에서도 모두 영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나 각종 행사에서는 어김없이 통역원을 대동하는데 노모는 자신이 야구선수라는 것과 일본인이라는 사실에 대해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단순히 동양인이라는 사실보다는 일본어를 사용함으로써 미국인들에게 자신이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주지시키고자 했던게 아니었나 싶군요. 노모의 야구선수로서의 근성 또한 일반인의 상상을 넘어서는 대요. 그가 메이져에 진출할 때 기자들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기자들이 왜 국내의 화려한 선수생활을 접고 굳이 힘든 길을 선택했냐구 물으니깐... 

“메이저리그는 모든 야구 선수들이 꿈꾸는 곳이다. 야구는 내 인생의 전부이며 그 외에 내가 선택할 건 없다.” (예전에 이상훈의 모습을 보는듯 하군요.) 

어 쨌든 노모의 자존심과 자부심은 제가 알아온 어떠한 스포츠 선수보다도 훨씬 강합니다. 아마 영화로 만들어도 조금도 손색이 없을만큼 감동적이죠. 노모는 '93년 긴테츠 버펄로스 시절 일본 프로야구 초유의 4년 연속 다승왕에 도전 합니다. 그러나 그만 노모는 타자가 친공에 머리를 맞아 두개골 골절이라는 심한 부상을 입게 되죠. 잠시 락커에서 치료를 받는 노모는 기어이 출전을 강행하는데요. 그 경기에서 노모는 무려 사사구 9개에 144개의 공을 던져 기어이 승리를 따냅니다. 4일뒤엔 무려 182개의 공을 던지구 다시 승리 투수가 되고요. 다시 4일뒤 마지막 시합에선 역시 연장 11회까지 177개의 공을 던집니다. 자신의 투수생명 따윈 고려치 않는 엄청난 고집이죠. 제가 알기론 이미 두 번째 경기 때부터 노모의 팔은 치유 불능상태이었고 또 머리에 입은 타박상도 다 낳지 않은 상태였다고 합니다. 팀 관계자들은 물론 언론들까지도 난리가 아니었죠. 모두들 미친 짓이라고까지 생각했을 정도니까요.(노모의 초인간적인 행태는 93시즌 후반에 국내언론으로도 소개돼 화제가 됐었습니다. 인간이 아니다~~ 미친 놈이다~~ 오사카 출신답게 외고집의 도꾸다이인감?) 

어쨌든 노모는 9일동안 무려 503개의 공을 던진끝에 기어이 다승 공동 1위에 오르게 됩니다. 노모의 미친듯한 고집 하나가 결국엔 4년 연속 다승 1위라는 기적을 이루어낸 셈이죠. (전 아직까지 노모의 마지막 그 경기가 기억이 나네요. 다승 1위를 달리던 상대투수가 승리를 얻지 못한 소식이 장내 아나운서를 통해 흘러나오면서... 같은팀 선수들은 물론 관중들 모두 하나가 되어 마운드의 노모를 응원하던 그 모습....) 

어쨌든 노모는 그해의 혹사로 인해 다음해에는 거의 공을 제대로 던지지 못합니다. 그리고 '95년도에 미국으로 건너가 다저스에 입단하죠. 메이저에서도 노모의 고집은 여전했습니다. '97년에는 박찬호가 한창 주가를 날리던 시절이었는데 박찬호와 노모 두 투수 모두 14승을 올리던 시즌 막판이었죠. 노모는 14승 이후 계속되는 불운으로 인해 더 이상의 승수를 쌓지 못합니다. 피츠버그와의 경기에서 그만 타자가 친공에 팔꿈치를 맞게 됩니다. 노모는 결국 마운드를 내려오게 되고 또 다시 15승의 꿈은 날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노모는 자신의 부상을 숨기게 됩니다. 주치의는 물론 팀 관계자들에게도 자신이 맞은 팔꿈치가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다고 말을 한거죠. 

이 와 같은 노모의 말을 믿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노모는 그후 1경기(2경기 였던가?)를 더 등판하게 됩니다. 물론 부진한 투구내용을 보였죠. 그러나 이 부상이 노모에게는 심각한 휴유증을 낳게 되는데 '97년 시즌이 끝나구 노모는 팔꿈치 부상으로 인해 제대로 동계훈련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결국, 노모는 자신의 야구 인생 최악의 한해인 '98년을 보내게 되죠. 다저스에서의 2승 이후... 메츠로의 이적 그리고 초반 4승으로 잘나가나 싶더니 계속 되는 부진 그리고 선발진에서의 제외.... 

이 때 노모는 팀관계자들에게는 물론 언론에게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굳이 언론을 피한 것은 아니지만... 언론이 계속 인터뷰를 요청해도 계속 묵묵부답으로만 일관했죠. 미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노모의 시대는 갔다라고하는 평가까지 나왔지만 노모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노모가 언론에 웃음을 보인건 그 후 '99년 밀워키에서 제기에 성공하고나서 입니다.) 

'98 년 시즌이 끝나고 끝내 메츠는 노모를 방출하는데 이미 한물 간 투수란 평가를 받게된 노모를 받아주는 메이저리그 팀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시카고 컵스는 노모의 자질을 그래도 어느정도 인정하여 280만 달러의 일년 계약을 원하는데 여기에는 몇가지 옵션이 붙었습니다. 시즌 중반까지 마이너에서 뛸 것을 요구한거죠. 자신에 메이저리거라는 사실에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노모는 당장이라도 선발투수로 뛸 수 있는 팀을 찾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안착하게 된 팀이 밀위키이죠. 그것두 메이져 최소연봉인 20만 달러라는 수모를 감수하면서 말이죠. 그리고 그해 노모는 보란듯이 재기에 성공합니다. 시즌 성적 12승 8패, 방어율 4.54, 중부지구 최하위를 달리는 팀에서 거둔 성적으로선 상당한 성적이죠. 

1968년생의 오사카 출신인 노모는 앞으로 4-5년은 더 뛸것 같습니다. 지금 뛰는 LA에서 어쩌면 선수생활을 마감할 지도 모르죠. 하지만 먼 훗날이 지나도 노모 히데오(野茂英雄)라는 야구 선수는 잊혀질 것 같지 않습니다. 그만큼 야구를 사랑하고 또 야구에 대한 열정이 강했던 선수는 아마 없을지도 모르니까요. 비록 일본 선수지만 이같은 멋진 선수가 있다는 사실에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