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쿡기자 - 전정희의 스몰토크]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 생존 외교문서 발견’
경향신문이 1일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되지 않고 피신해 생존했었다는 내용을 담은 독일과 영국의 외교문서가 발견됐다고 1, 2면에 걸쳐 보도했다. ‘명성황후’는 1895년 10월 8일 새벽 경복궁 건청궁에서 살해됐다는 게 그간 역사학계의 정설이다.
보도에 따르면, 정상수 한국방통대 통합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가 독일 비밀외교문서와 영국 문서를 각각 독일 외교부 정치문서보관소와 영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찾았다고 한다. 의미 있는 발굴이다. 왕비의 죽음은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조선 및 극동의 상황을 보여주는 단초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얘기하려는 것은 ‘외교문서 발견’이 아니다. 척족권력을 휘두르며 나라 말아먹은 민씨 왕후가 어떻게 ‘명성황후’라는 계관을 쓸 정도로 역사가 왜곡 되느냐를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다.
척족 정치로 나라 말아먹은 왕비가 ‘국모’라니…
“나는 조선의 국모다”
카피로 남은 이 문장은 누구로부터 시작된 건지 모르겠으나 그저 척족 정치로 나라 말아먹은 고종의 비(왕비)를 황후로 격상 시켜 ‘신화’를 만들어 낸 계기가 됐다. 청소년을 비롯한 많은 국민은 ‘명성황후’가 조선 개항기 일본, 중국, 러시아 등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 여걸로 안다.
그래서 심하게는 ‘철의 여인’이라는 수사까지 붙인다. 물론 을미사변과 같은 정변에 일본 낭인에 의해 희생되었으니 기구한 여인임에는 분명하다. 또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과 권력투쟁에서 이겨낸 독한 며느리의 요소는 드라마 요소로 작용한다.
그런데 ‘명성황후’ 계관은 대중문화 유통이 갖는 역사 왜곡이다. 거기서 형성된 대중의 이미지 추수주의이다. 마치 ‘서부의 총잡이’ 영화배우 존 웨인을, 작품에서 형성된 이미지 때문에 미국 서부의 역사가 존 웨인에서 비롯됐다는 착각과 같다.
고종의 비, 민씨 왕후는 열강의 서세동점을 읽어내지 못하고 척족의 사리사욕 채우기에 급급한 민씨권력의 상징적 인물일 뿐이다.
허구헌날 굿으로 군대재정 축내
무엇보다 척족을 요직에 앉혀 일가의 부정부패 행위를 후원하고 방치했다. 민승호 민규호 민태호 등의 부정부패야 역사가 말해준다. 민씨권력은 수령자리는 물론 감역, 호군, 참봉 같은 직함까지도 팔았다. 팔게 부족하면 명분 붙여 아무 때곤 과거 시험을 치러 매관매직의 방편으로 삼았다.
굿청에서 허구헌날 굿판을 벌여 군대 재정을 축내고, 무당에게 진령군이란 품계도 주었다. 또 매일 궁궐에서 기생, 배우 불러다 파티를 벌였다. 그 덕에 판소리와 신연극이 발전했다고 할까?
여기서 그쳤으면 나라 꼴 모양새라도 잡혀 나갈텐데 개혁가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이 권력 유지에 방해가 되니 반대파인 척족을 규합해 밀어냈다. 시아버지를 몰아낸 후 신진 청년 개혁파를 좌천 시켜 인재의 씨를 말렸다.
그는 ‘수구꼴통’의 정신으로 똘똘 뭉쳐진, 권모술수에 능한 여인이었을 뿐이다. 일본으로부터 백성을 구하기 위해 저항하거나 힘을 기른 것이 아니라 그저 척족 권력 유지를 위해 일본, 러시아 등에 붙어 나라를 농단했다. 고종은 왕후 보다 머리가 좀 맹한 데가 있어 허수아비였다.
사가들은 안동권씨와 여흥민씨 권력 기간 동안 조선이 급속히 쇠락했다고 평한다. 이 두 집안의 부패 세도정치는 정조 이후 조선 100년 중 80년에 달했다.
민씨왕후는 명종의 모친 문정왕후, 영조비 정순왕후와 함께 조선을 늪에 빠뜨린 '여인 3대 악'이다.
부패한 수구 꼴통의 상징적 인물일 뿐
그런데도 유독 민씨 왕후는 ‘황후’로 칭송 받는다. 소설, 드라마, 뮤지컬 등에서 그녀의 드라마적 삶을 미화했기 때문이다. 2001년 방영된 KBS TV드라마 ‘명성황후’ 개요를 보면 ‘화려한 외교술과 지략으로 조선 역사를 승리의 역사로 이끈 철의 여인’이라고 밝히고 있다. 역사 공부를 좀만 했더라도 이런 헌사는 안나온다.
한 나라의 왕후가 침략국 양아치들에게 죽었다는 사실은 분개할 일이다. 그러나 이 하나의 사실(史實)이 신화가 되어 대중문화의 힘에 의해 ‘역사를 승리로 이끈 여인’으로 둔갑시킨다면 낯부끄러운 일이다.
참고로 ‘명성황후’라고 칭하게 된 것은 대한제국(1879) 선포와 함께 ‘명성(明成)’이란 시호가 내려졌고, 고종 황제 즉위를 계기로 이장하면서 ‘황후’라는 칭호를 붙였다.
‘나는 조선의 국모다’는 드라마라지 역사가 아니다. '명성황후'보다 ‘고종의 비’ ‘왕후’가 적합한 표현이다. 그녀는 국모가 아니고 부패 정당 ‘보수꼴통’의 일선이었을 뿐이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전정희 기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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