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 테슬라

니콜라스 테슬라

그리운 오공 2010. 1. 18. 15:55

니콜라 테슬라 [Tesla, Nikola, 1856.7.9~1943.1.7]

출생설[1] :세르비아 크로아티아구 리카시 스밀리얀이란 작은 마을 목사의 다섯째 막내로 태어났다. 그라츠공과대학과 프라하대학에서 수학·물리학·기계학 등을 공부하였다. 비상한 암기력과 6개 국어를 능통하게 구사했다.

출생설[2]:1857년 7월, 구 유고 슬라비아의 세르비아에서 태어났다. 테슬라의 아버지는 집안의 오랜 전통 대로 그리스 정교 성직자가 되어 마을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서 지역을 위해 많은 공헌을 했다. 한편 테슬라의 어머니는 발명가로서의 재능을 갖고 있었으며 집안의 가구 등을 비롯한 여러 발명품을 고안하였다. 또한 기억력도 월등하게 뛰어나서 상당히 긴 책의 내용을 암기 했다고 한다.

그리고 12살 때 불의의 사고로 죽은 테슬라의 형도 자타가 공인하는 뛰어난 천재였다. 이처럼 집안의 천재성을 물려받은 테슬라는 다섯 살 때 처음으로 수(水)차를 발명하였고, 친척들에게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에너지를 얻는 계획을 설명했다고 한다.

테슬라의 아버지가 그리스정교성직자인지 아니면 목사인지는 모르겠다,

크로아티아 출생. 그라츠의 공업학교와 프라하대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오스트리아 정부의 전신국에 근무하다가, 후에 부다페스트 및 파리에서 전기기사로 일하였다. 1884년 미국으로 건너가 에디슨 회사에서 수년간 발전기와 전동기(電動機)를 연구, 뉴욕에서 테슬라 연구소를 설립하고, 1888년 최초의 교류유도전동기(交流誘導電動機), 1891년 테슬라 변압기 등을 만들었다.


1895년 그가 개발한 2상교류방식은 웨스팅하우스사(社)에 의하여 나이아가라 수력발전소에 이용되었다. 자기력선속밀도(磁氣力線束密度)의 단위인 테슬라는 이 이름에서 딴 것이다.
과학문명을 1백년 앞당긴 천재과학자, 우주에서 길을 잃어 지구에 잘못 태어난 외계인. 미국의 전설적인 과학자 니콜라 테슬라1856~1943)를 일컫는 말이다.

 옛 유고슬라비아 태생인 테슬라는 28세 때인 1884년 미국으로 이주해 수많은 중요한 발명과 선구적 업적을 이뤄냈다. 교류전압 송신, 다상교류 시스템, 무선통신, 고압전원을 만드는 케슬라 코일, 형광등, 라디오 등의 발명자로 그는 기록되고 있다. 자기장의 세기를 나타네는 기본 단위 T는 그의 이름을 따서 제정된 것이다. 그는 에디슨에 필적할 혁혁한 업적을 남겼음에도 생전에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불운한 생애을 살았다.


영국 BBC방송의 인터넷 온라인 이용자들은 지난 1천년간 가장 위대한 발명가로 에디슨, 구텐베르크,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이어 테슬라를 4위로 꼽았다. 테슬라의 꿈은 세계 곳곳으로 통신을 가능하게 하며, 기상을 조절하고, 무한한 에너지를 공급하고, 꺼지지 않는 빛을 만들고, 다른 행성에 존재한다고 믿는 생명체와 소통하는 것이었다.


그는 시대를 너무 앞서갔기에 사람들로부터 몽상가, 미치광이란 오래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연구했던 무선에너지 전송기술, 테슬라 터빈, 테슬라 엔진, 입자빔 무기, 공간 자체에서 무한한 에너지를 뽑아쓰는 실험 등은 현재까지도 많은 과학자들이 뒤를 이어 탐구를 계속하고 있다. 테슬라의 연구자료 중 상당 부분은 그의 사후 미국의 국방 정보기관에서 입수해 현재까지도 비밀문서로 분류돼 있다.


그의 연구 중에 현대 과학자들이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분야가 많기 때문이다. 예컨대 그는 작은 공 모양의 전기덩어리(구형 번개라고도 불린다)를 마음대로 만들고 다루는 시범을 여러차례 보였다.이 현상은 핵융합 플라즈마 연구의 혁신적인 돌파구로 밝혀졌지만 아직도 과학자들은 재현 못하고 있다. 1915년 11월 6일자 뉴욕타임스는 에디슨과 테슬라가 노벨물리학상의 공동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는 기사를 내보냈지만 정작 수상의 영예는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다. 스웨덴 한림원이 막판에 수상자를 바꾼 이유는 아직도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니콜라 테슬라는 1857년 7월, 구 유고 슬라비아의 세르비아에서 태어났다. 테슬라의 아버지는 집안의 오랜 전통 대로 그리스 정교 성직자가 되어 마을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서 지역을 위해 많은 공헌을 했다. 한편 테슬라의 어머니는 발명가로서의 재능을 갖고 있었으며 집안의 가구 등을 비롯한 여러 발명품을 고안하였다. 또한 기억력도 월등하게 뛰어나서 상당히 긴 책의 내용을 암기 했다고 한다. 그리고 12살 때 불의의 사고로 죽은 테슬라의 형도 자타가 공인하는 뛰어난 천재였다.

 이처럼 집안의 천재성을 물려받은 테슬라는 다섯 살 때 처음으로 수(水)차를 발명하였고, 친척들에게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에너지를 얻는 계획을 설명했다고 한다. 결국 테슬라의 이 계획은, 1895년에 테슬라의 특허를 이용하여 웨스팅 하우스사가 나이아가라 폭포에 교류 발전소를 만듦으로써 실행에 옮겨지게 되었다.

그 후 전기 공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헝가리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교류 모터에 대한 아이디어를 개발하였으며 친척의 소개로 파리에 있는 에디슨의 유럽 지사에서 전기 기술자로 근무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교류 모터에 대한 생각을 계속 발전시키던 중, 자신이 가지고 있던 교류 기술에 대한 가능성을 인정 받기 위해서 1884년 6월 미국으로 이주하여 에디슨의 조수로 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테슬라의 기대와는 달리 에디슨은 자신이 발명한 전구의 수요를 늘리기 위해서 직류 방식을 주장하였다. 결국 테슬라는 에디슨과 결별하고 독립된 연구소를 운영하며 교류 발전기와 교류 모터 등 교류 송, 발전 시스템을 완성하였다. 그 후 계속해서 무선 전신과 각종 터빈 등 많은 중요한 발명과 연구를 하여 과학 기술 발전에 큰 업적을 남겼다. 그의 발명에 대한 열정은 만년까지 식지 않았으나 자금 부족으로 매우 불우한 노년을 보냈으며 빈곤과 고독함 속에서 마지막 생애를 마쳤다.


 다른 대부분의 천재들과 마찬가지로 테슬라도 사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업적을 인정받게 되었으며 1943년 그가 죽은 후에 미국은 무선 전신에 대한 테슬라의 특허가 마르코니의 특허에 우선함을 인정했다. 그때서야 비로소 웨스팅 하우스 등이 가지고 있던 많은 기술들이 테슬라의 업적으로 평가받게 되면서 인류 역사상 최고의 발명가로서의 지위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테슬라의 뛰어난 재능과 낭만적인 생애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지금 현재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무선 에너지 전송 기술, 테슬라 터빈, 테슬라 엔진, 그리고 죽음의 광선


딱딱하고 고정된 필라멘트를 쓰지 않는 네온등은 길이와 모양에 관계없이 제작할 수 있다.
무한 동력 장치, 번개 충전용 코일, 무선 전기전송, 지진 발생기 등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연구를 하여 그의 이름이 붙은 여러 가지 장치를 만 들기도 하였다.

노년에는 전자기파 등을 이용하여 지진을 일으키는 지진병기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기도 하였는데, 현재 미국 국방성에서 그에 대한 연구를 비밀리에 진행하고 있다고 전한다.
당시에 그의 많은 연구가 일반에 공개 되었다면 원자력에너지 보다 엄청난 에너지를 이용할 수 있었거나, 원자탄 보다 더 무서운 파괴력을 지닌 무기를 만들었을 수도 있었다.


테슬라는 자연계에 존재하는 우주 에너지를 동력화 해서 움직이는 자동차를 만들기도 하였는데, 속력이 시속 90마일(약 144 km)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미 1900년대 초에 연료가 전혀 필요없는 자동차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말년에 이렇게 편리한 문명의 이기를 스스로 없애버렸다. 그는 자신의 전 생애에 걸쳐 이뤄낸 발명들의 대부분을 자신의 손으로 없애 버려야 했다.

인류에게 신기술을 공개할 수 없었던 테슬라. 그는 당시의 인류의 인식 수준 으로는 그의 연구가 당초 의도와는 달리 많은 사람들의 살상에 사용되거나, 소수 사람들의 치부에 사용되어지는 것을 우려했었다.

그러나 그전에 라디오를 발명하는 등 이미 그가 이뤄 놓은 연구와 업적들은 이후 모국 유고슬라비아의 화폐에 자신의 초상이 실릴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에 이르렀다.
니콜라 테슬라는 1856년 크로아티아(Croatia)의 스미즈란(Smijlan)에서 태어났다. 그는 놀랄만한 기억력을 가졌으며 6개 국어를 말할 수 있었다. 그는 그라츠(Gratz)에 위치한 폴리테크닉 공대(Polytechnic Institute)에서 수학, 물리학, 기계공학을 공부하며 4년을 보냈다.


마지막 순간까지 지적 탐험을 계속하던 그는 1943년에 갑작스런 심장병으로 여든일곱해의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