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뽕 등소평

가짜 김일성과 친일파 내각 (펌)

그리운 오공 2011. 6. 23. 00:25


김일성은 권력을 유지하는데 필요하다면 친일파를 등용했다. 김일성의 동생이자 현재까지 북한의 실력자인 김영주(金英柱)는 과거 일본 관동군 소속이었으며 국가부주석을 지낸 김일성의 외척 강양욱(康良煜)도 종교-문화부문의 친일파였다.

이와 함께 과거 남로당 실력자로 6.25 전쟁기간 중 서울시 인민 위원장이었던 이승엽(李承燁)의 경우 일제시대 인천양곡조합 간부였다. 남로당 간부였던 정백(鄭栢)등도 친일파였다.

마적(馬賊)두목 김일성과 ‘보천보 전투의 실체’

북한은 그동안 김일성의 ‘보천보 전투’를 역사적 사변으로 일컬으며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사 가운데 가장 큰 업적으로 여겨왔다.

일례로 북한의 중학교 교과서는 ‘김일성이 1937년 3월 서강(西崗)에서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회의를 열고 조선인민혁명군의 국내진공작전 계획을 제시하고 행동에 옮긴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교과서는 “경찰주재소, 면사무소를 비롯한 일제의 통치기관들을 습격소탕하고 보천보 일대를 해방했다. 거리에 떨쳐나선 인민들은 ‘김일성 장군 만세!’, ‘조선독립 만세!’를 소리높이 외치며 환영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교과서를 유심히 읽어보면 이상한 구석이 발견된다.

몇 명의 전투원이 참가하고 몇 명을 사살했다는 등 구체적 전과(戰果)에 대해서는 일절 설명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보천보 전투를 통해 “조선 사람은 죽지 않고 살아있으며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할 것을 외쳤고 일제의 식민통치에 치명적 타격을 주었다”는 주장만 있다.

김일성 및 북한연구가들에 따르면, 당시 보천보에는 일본인 26호에 50명, 조선인이 280호에 1,323명, 중국인이 2호에 10명 등 총 308호에 1,383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무장인원으로는 5명의 경찰이 주재소에 있었을 뿐이다.

1937년 6월 4일 김일성은 90여명을 인솔해 보천보를 습격했다고 한다.

우선 전화선을 절단한 후 주재소부터 공격했다. 먼 거리에서부터 기관총 사격을 하며 들어가는 바람에 총소리에 놀란 경찰관들은 모두 피신했다. 그 과정에서 엄마의 등 뒤로 피하던 어느 경찰관의 딸이 총탄을 맞고 숨졌다.

김일성은 총기고에서 경기관총 1자루, 소총 6자루, 권총 2자루, 탄약 수백 발을 탈취했다. 이어 농사 시험장, 삼림보호구, 면사무소와 우편소를 습격하여 불을 질렀다.

보천보 전투는 전과로 치면 미미한 전투였다. 적의 무기를 탈취한 것이 전과라면 전과지만 2명의 민간인도 희생됐다. 북한 교과서가 보천보 전투의 구체적인 전과를 설명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또한 보천보 전투는 동북항일연군 1군 2사, 4사와 2군 6사(김일성 부대)의 연합 부대의 작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 부대 단독 작전인 것처럼 조작되어 왔다.

한편, 보천보 전투에서 항일투쟁을 했던 김일성 장군을 연구하다 수년 전 타계한 이명영 전 성균관대 정치학과 교수는 ‘김일성 열전’을 통해 북한의 이 같은 역사조작을 밝힌 바 있다.

이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보천보 전투의 김일성 장군은 1887년 태어난 일본육사 출신의 본명이 김광서라는 사람”이고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항일투쟁의 김일성장군으로 둔갑한 것은, 소련정권이 해방 후 북한의 공산정권수립에 용이하게 사용될 수 있는 지명도 높은 이름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당시 소련의 지휘 하에서 훈련받았던 만주의 공산유격대 출신인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金聖柱)로 북한에 들어와서 처음엔 김영환(金英煥)이란 변명(變名)으로 행세했다.

이후 1945년 10월 11~12일, 소련군 정치사령부 로마넨코 소장의 각본으로 평양시내 ‘다미야’라는 일본 요리집 자리에서 평남인민정치위원회(위원장 조만식) 멤버들에게 가짜 김일성은 처음으로 ‘김일성 장군’으로 소개됐다.

이런 과정을 거쳐 그해 10월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이른바 ‘김일성장군 환영 평양시 군중대회’가 열렸고, 김성주로 하여금 김일성으로 행세케 해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으로 둔갑한 것.

당시 현장에 있었던 평안남도 양덕이 고향인 전 평안남도지사 박인각씨는 “연설에 앞서 스티코프 점령군사령관(대장)이 그를 김일성장군이라고 소개했으나 참석했던 사람들은 33세의 젊은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또 신의주가 고향인 전직 교장 이영훈씨는 “군중들의 술렁이는 분위기를 파악한 스티코프는 여기 있는 김일성이 항일투쟁의 김일성 장군이 맞거나 틀리거나가 중요한 게 아니라 앞으로 잘만 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말해 소련도, 김성주 자신도 보천보 전투의 김일성 장군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했다”고 증언했다.

김성주가 항일투쟁의 김일성장군이 아니라는 점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증언이 있다. 증언의 주인공은 ‘김일성 평전 속(續)’을 내며 김일성을 연구하고 있는 허동찬 고려대 교수.

재일동포로 조총련 전문가인 허 교수는 “보천보 전투 후 김일성장군을 뒤쫓던 일본군이 그해 11월 무송현에서 그가 죽었다고 공식 발표했다”며 “그 후 4개월 뒤에 김일성이라는 이름으로 행세하는 사람이 다시 나타났는데, 이 사람이 평소 우쭐대기 좋아하는 성격의 김성주였다”고 말했다. (2002년 8월 27일자 미래한국신문)

또 1945년 해방신문의 기자로 동란 후 월북, 북한 외무성의 국장까지 지냈던 박갑동(82)씨도 있다.

그는 “평양에서 있었던 김일성장군 환영식 사진을 보천보 전투에 참가했다 일본군에게 잡혀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 중이던 박달과 박금철에게 확인시켰더니, 사진 속 인물이 김일성장군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언했다”며 “박달과 박금철에 관해서는 보천보전투의 일본 측 판결문인 ‘혜산사건 판결’에 기록돼 있다”고 밝혔다.

결국 위와 같은 증언과 기록들은 모두 북한에서 주장하는 김일성의 항일투쟁이 조작임을 나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