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일요일 저녁, 저녁 식사를 하면서 뉴스를 보다가 놀라운 소식을 접했다. 놀라운 소식이라고 하기보다는 안타까운 소식이라고 해야 더 맞겠지만. 그것은 바로 미국 영화계의 큰 별, 폴 뉴먼의
타계소식이었다. 폐암 말기로 투병 중이라는 소식은 접했지만, 너무 빨리 타계 소식을 접하는 것 같아 가슴이 먹먹했다. 더군다나 그
해는 미국의 명감독 시드니 폴락도 별세(2008년 5월 26일)했기 때문에 유난히 마음이 허전해지는 듯했다.
그런 폴 뉴먼이 세상을 뜬 지도 벌써 1년이 지났다. 작년부터 올해까지 유난히 죽음의 비보가 많아서 그런지 더 서글프다.
폴 뉴먼, 향년 83세의 나이로 눈을 감은 이 대 배우의 족적은 너무나도 컸다. 3번의 아카데미 상 수상을 필두로, 수많은 영화제
수상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식품제조회사 ‘뉴먼스 오운Newman’s Own’의 설립자로서, 1982년 설립 이후로
거둬들인 순이익 2억 2천 만 달러를 전액 기부해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그밖에 카레이서, 정치가로도 다양한 공적을 남겼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는 영화에서 가장 빛났다. 1950년 이후 반세기 동안 그는 제일선에서 활약해왔던 말 그대로 ‘배우’였다.
폴 뉴먼의 최근작을 본 적은 없다. 그래서 내가 기억하는 폴 뉴먼의 모습은 언제나 깨끗하고 선명한 화질의 영화가 아니라 흑백이거나
흐릿해진 옛날 영화들뿐이다. 어렸을 때 우리 집이 비디오가게를 했던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머릿속에 고인이 된 폴 뉴먼이
출연작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숱한 작품이 지나갔지만, 그 중에서도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5편의 영화가 남았다.
이제는 영화 속에서만 생생히 살아 있을 폴 뉴먼의 주옥 같은 영화 5편을 소개한다.
1.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Cat on A Hot Tin Roof
이
영화를 처음 봤던 건 중학교 때였다. 솔직히 그때는 영화 자체보다 19금이라는 유혹이 더 컸던 것도 사실이다. 보고 나서야 이
영화가 얼마나 소중한 것을 전해주려 했는지 알았지만 말이다. 폴 뉴먼이 주연으로 나오는 이 영화에서 그는 샤프하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를 선보인다. 마치 일상의 대화처럼 자연스러운 연기로 폴 뉴먼이라는 이름을 세인에 각인한 영화가 아닐까 싶다.
폴 뉴먼이 연기한 브릭이라는 인물은 한때 유명한 미식축구 선수로 이름을 날렸지만 불의의 사고로 다리를 다치고 또 친한 친구의
죽음으로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한 사람이다. 자신의 문제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할 텐데 브릭 주변에는 늘 문제가 끊이질 않는다.
브릭의 아내 매기(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젊고 아름다우며 정열적인 남부 아가씨다. 그녀는 여전히 남편을 사랑하며 남편에게 사랑을
갈구하지만 브릭은 부인과의 부부생활을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뜨겁게 갈구하는 부인과 이를 거부하는 남편, 마치 ’사랑과 전쟁’ 같은
데서나 볼 수 있는 테마로 영화는 이런 가정사의 은밀한 부분까지 세밀하게 그려낸다.
브릭의 문제는 이뿐만 아니다. 시한부를 선고 받은 아버지의 막대한 유산을 둘러싸고 브릭의 형은 가족까지 동원해 아버지의 환심을
얻기 위해 고심한다.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애정에서가 아니라 오로지 유산을 차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형을 보며 브릭은 인간에의
환멸을 느끼게 된다. 사실 브릭의 아버지는 뻔한 수작을 부리는 첫째보다는 문제투성이지만 마음은 따뜻한 브릭에게 더 애정이 간다.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지하실에서 나누는 부자간의 대화다. 아버지는 브릭에게 자신의 아버지, 그러니까 브릭의 할아버지와의 일을
이야기해주며 브릭이 하루빨리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주기를 바란다. 깊은 대화를 나누면서 브릭은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재산이
아니라 아버지의 애정이었음을 고백하고 아버지와 화해하게 된다.
그 동안 쌓였던 난제들이 풀어지는 순간. 브릭은 매기에게 그동안 소홀했던 것을 사과하고 원만한 부부생활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마음을
전한다. 재산을 둘러싼 암투, 부부간의 말 못한 고민들, 가정이라는 작은 사회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통해 사회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보여줬던 이 영화는 새로운 반항아 ‘폴 뉴먼’의 면모를 새삼 발굴해낸 명작이라 하겠다. 가족 간에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야 그들의 선함과 악함을 볼 수 있다는 브릭의 말처럼 우리는 진정 난관에 부딪쳤을 때야 비로소 상대의 진가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족이라는 작은 무대, 유난히 많은 독백, 비교적 적은 수의 출연진들, 이 모두가 마치 한 편의 연극과도 같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 영화의 원작은 연극으로도 여러 번 상연된 적이 있는 희곡이라고 한다.
2. 허슬러 The Hustler
나
이 들어서도 그렇지만 젊은 시절의 폴 뉴먼은 반항적인 이미지와 카리스마는 제임스 딘 못지않았다(물론 영화에서의 모습으로 본
거지만). 내면적인 고독을 표출하는 깊이 있는 연기로 유명했던 폴 뉴먼이었기에 유독 사회적인 문제와 기로에 선 주인공의 모습을
많이 선보였다. 당구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에디(폴 뉴먼)는 내기 경기를 찾아다니는 떠돌이 도박꾼이다. 자신의 실력이 최강이라
생각한 에디는 진정한 최고가 되고 싶어 미네소타 팻을 찾아가 겨루지만, 결국 참패를 당하고 만다. ‘토끼와 거북이’ 같은 자만이
그를 패배로 이끈 것이다.
좌절한 에디는 방황하다가 소아마비 환자인 사라를 만나게 된다. 알코올 중독을 앓고 있는 사라(파이퍼 로리)는 비록 소아마비에
가족에게도 버림받았지만 영혼만은 누구보다 맑고 깨끗하다. 에디에게 사랑을 느낀 사라는 그의 방황을 말리기 위해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여기에 전문 도박꾼 버트가 끼어들면서 비극이 시작된다. 에디의 도박본능을 일깨우려는 버트는 가장 걸림돌이 되는 사라를
떼어놓는다. 결국 에디는 도박계의 최고수가 되었지만, 자살한 사라에 대한 죄책감과 자신 역시 사라를 사랑했음을 깨닫고는 도박계를
떠나게 된다.
당구를 소재로 방황하는 사람들의 소외된 삶을 그린 이 영화는 무거운 주제와는 달리 긴장감 넘치는 내기 당구의 장면이 잘 어우러진
영화다. 절망과 탄식, 환호와 좌절의 모습을 세밀하게 묘사한 영화로, 배경에 깔린 재즈의 선율이 계속해서 귓가에 맴도는 영화기도
하다. 연기력과 구성력 면에서 완벽에 가깝다는 찬사를 받으며 개봉한 당시 <뉴욕타임스>와 <타임스> 선정
10대 영화에 선정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ESPN에서 뽑은 ‘스포츠 영화 Best 10’에 선정되기도 했다.
3. 내일을 향해 쏴라 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
'Rain Drops Keep Falling on My Head'라는 주제곡으로 먼저 기억나는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
는 1890년대 미국 서부에서 이름 날린 갱, 부치 캐시디와 선댄스 키드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영화에 나오는 내용
대부분이 실화라고 한다. 그래서 일까, 두 배우의 연기는 무엇보다 생생하며 실감 넘친다. 폴 뉴먼의 단짝 로버트 레드포드와 함께
출연했으며, 폴 뉴먼이라는 이름을 전 세계적으로 알린 명작 중의 명작이라 할 수 있다.
은행만 전문적으로 터는 강도지만 사람들을 헤지지 않는 양심적인 갱 부치와 선댄스는 마치 쌍둥이라 할 만큼 환상의 호흡을 보인다.
머리회전이 빠르고 놀라운 화술을 지닌 부치(폴 뉴먼)와 어눌하지만 최고의 사격솜씨를 지닌 선댄스(로버트 레드포드)는 서로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가며 은행 강도를 일삼는다. 미래나 희망이라는 말과는 거리가 먼 이들은 돈이 생기면 써버리고 없으면 은행을 털지만,
낙천적이며 낭만적이다. 그리고 부치와 선댄스, 선댄스의 여자친구인 에타는 나름대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던 중, 몇 건의 열차 강도
사건으로 인해 볼리비아로 도망가게 된다.
볼리비아에서는 본업을 살려 은행 강도를 계속한다.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합법적인 일도 하며, 산적도 소탕하는 등 과거와는 조금
다른 삶을 살게 된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경찰의 추격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볼리비아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호주로 떠날 계획을
세우지만, 경찰과 군인의 포위망은 점점 좁혀진다.
영화의 마지막이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권총을 치켜들고 경찰이 에워싼 밖으로 뛰쳐나온 두 사람. 그리고 화면
위로 쏟아지는 무수한 총탄소리. 주윤발의 쌍권총과 이쑤시개가 동양의 정서를 대변한다면 카우보이모자와 울려 퍼지는 총소리는 서양의
갱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보고 나면 가슴 짠해지는 갱들의 이야기. 분명 불법이나 일삼는 갱이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우정과 의리는 은행에 넘쳐나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다.
여담 한마디. 로버트 레드포드는 폴 뉴먼보다 어리지만(띠동갑이다) 누구보다 친한 친구로, 동료로 진한 우정을 과시해왔다. 폴
뉴먼의 부고를 전해들은 레드포드는 슬픔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고 한다. 고인의 빈자리가 더 가슴 아픈 순간이다.
4. 스팅 The Sting
반전의 묘미가 가장 큰 영화 두 편을 꼽으라면 주저 않고 고르는 영화가 있다. <유주얼서스펙트>와 <스팅>
이다. 환상의 콤비 폴 뉴먼과 로버트 레드포드가 주연을 맡은 <스팅>은 흥겨운 스윙리듬이 일품이기도 하다. 뉴욕의 갱
두목 로네건의 눈 밖에 나 쫓기는 신세가 된 후커(로버트 레드퍼드)는 곤돌프(폴 뉴먼)를 찾아가 도움을 청한다. 곤돌프는 친구의
죽음으로 로네건에게 복수할 날만 기다리고 있던 차였다. 곤돌프와 후커는 금세 의기투합하여 복수계획을 짠다.
로네건이 포커와 도박에 관심이 많다는 정보를 입수한 두 사람은 로네건이 탄 열차에 승객으로 가장해 합승한다. 로네건이 벌인 열차
안의 도박판에서 후커는 로네건의 신임을 얻는데 성공하고 이를 계기로 로네건 밑으로 들어간다. 이들은 처음의 계획대로 부패 경찰과
FBI까지 끌어들이며 로네건을 상대로 엄청난 사기극을 준비한다.
드디어 사기극의 막이 오르고 후커의 말만 듣고 경마에 거금을 걸었던 로네건은 돈을 몽땅 날리고 만다. 로네건이 후커를 죽이려는
순간 FBI가 들이닥치고 후커가 배신했다고 믿은 곤돌프는 그를 총으로 쏜다. 이어 곤돌프 역시 후커가 쏜 총에 맞아 쓰러진다.
로네건이 경찰에 압송되어 끌려나가며 영화가 끝나는가 싶었다. 모든 상황이 종료되고 정적이 흐르자 죽은 줄로만 알았던 곤돌프와
후커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일어나 통쾌하게 웃는다.
이 모두가 그들이 계획한 사기극의 일부였던 것이다. 이들은 서로의 소원을 이루었으며 거금을 손에 든 채 유유히 사라진다. 보는
내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영화, 어두운 갱의 세계를 다루고 있지만 시종일관 즐겁고 유쾌한 영화였다. <스팅>은
1974년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비롯해 감독상, 각본상, 미술상, 편집상, 의상디자인상, 편곡상 등 7개 부문을 수상했다.
5. 타워링 The Towering Inferno
<타워링>
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즐거운 가족극장, 주말의 명화를 통해서였다. TV편성표에 ‘타워링’이라는 타이틀을 보자마자 부모님께서는
흥분하시며 주말의 영화 시간이 되기만을 기다리셨다. 재해 영화의 효시를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특수효과도 미비했을 70대에
놀라운 연출력을 보여준 영화가 바로 <타워링>이다.
폴 뉴먼은 이 영화에서 건축가로 나온다. 자신이 설계한 140층짜리 세계 최대의 고층 빌딩 오픈파티에서 설계보다 규격미달의
전기배선이 사용됐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과전압으로 인해 합선이 일어날 수 있음을 경고하는 카리스마 넘치는 아저씨다.
그러나 그의 경고가 무색하게 화재는 시작되고, 빌딩 관리 책임자 마이클(스티브 맥퀸)은 불을 끄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초고층 빌딩인 만큼 지상에서의 효과적인 진화가 불가능하고 설상가상으로 바람이 심하게 불어 사람들이 목숨마저 위태로운 상황이
벌어진다. 극한 상황에서 보여지는 인간 군상의 다양한 모습을 실감나게 그렸으며, 무엇보다 두 주연배우의 호연이 불꽃 튀는
영화다.
실제로 폴 뉴먼과 스티브 맥퀸은 엄청난 라이벌 관계였으며 영화를 촬영하는 내내 신경전이 대단했다고 한다. 이 영화에는 두 주연배우
외에도 화려한 출연진이 등장하는데, 지금은 재판으로 더 유명해진 O. J. 심슨이나 윌리암 홀든, 페이 다나웨이, 리처드
챔벌레인과 같은 배우들이 열연을 펼친다. 우리나라에는 1977년에 개봉되어 흥행 1위를 기록하는 등 놀라운 흥행성과를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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