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4편입니다.) (본 내용은 거짓이 없으며, 보다 사실적임을 앞서 말씀드립니다.)
(2편, 총 4부작)
1933년 1월 31일, 히틀러의 제3제국 출범
총선 승리로 집권에 성공한 히틀러는 서구 근대사에서 독점 자본주의와 맑스-레닌주의로 대변되는 유태인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권력에 국가적 차원의 제동을 가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집권 초기부터 NSDAP 정부의 일관된 목표는 일련의 차별적인 법적장치들을 통해 독일사회에 대한 유태인의 영향력을 점진적으로 감소시키는 한편 독일 유태인 인구의 국외이민을 최대한 유도하는 것이었다.
유태인에 대한 일부 폭행사건들과 1938년 유태인 청년에 의한 파리주재 독일 외교관의 암살로 촉발된 ‘Kristallnacht' 사건을 제외하고 1933년부터 2차대전 발발전까지 독일정부의 유태인 정책은 별무리 없이 진행되었다. 국가사회당 집권 직후 개설된 집단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은 바이마르 시대에 급증했던 공산주의자와 변태성욕자, 음란물제작자, 그리고 예외적인 중범죄자들로 국한되어 있었고 단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수용소에 감금되는 일은 2차대전 발발 후인 1942년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유태인의 팔레스타인 이민을 촉진하기 위해 독일정부는 일부 시온주의 단체들과 긴밀하게 협력하기도 했으며 1938년에는 유태인국가 건국을 위해 아프리카 동남부의 마다가스카르 섬을 세계시온주의의회에 공식제안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전쟁 발발 전 국가사회당 정부의 유태인 정책 주안점은 격리와 국외이민이었고 전쟁 발발 후에는 게토수용(1939-1943)과 1943년 이후로는 집단수용소에서 강제노동력으로 활용하는 것이었을 뿐 유태인의 인종적 말살이 아니었다. 공교롭게도 '600만' 희생자를 주장했던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는 이런 사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유태인 지식인들의 선전과는 달리 제3제국은 전체주의 국가(totalitarian state)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유신체제와 흡사한 권위주의-민족국가(authoritarian-national state)였다.
(세계최초의 고속도로 '아우토반'의 첫 삽을 뜨는 히틀러)
Rabbi Manfred Reifer 유대교 지도자 (獨)
“혁명은 우리의 소행이었다. 우리는 영원한 신의 선민을 자처하며 항상 민중의 선봉에 서서 그들을 이끌어 왔다. 우리는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들에게 그들의 성경책인 ‘자본론’을 선사했으며 민중의 열정을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독일에서 태어난 유태인 칼 맑스는 전 세계 자본주의*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고 또 다른 유태인 라쌀은 독일의 민중을 조직했다.
유태인 에두아르 번스타인은 공산주의 이념을 대중에게 유행시켰고 칼 리쁘끄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는 스팔타쿠스단의 폭력혁명을 주동했다. 유태인 쿠르트 아이스너는 바이에른에서 독일 최초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선포했고 그 정부의 처음이자 마지막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독일민족은 이 모든 것에 대항하여 떨쳐 일어났다. 독일인들은 단지 그들 민족과 후세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이는 비난의 대상이 될 이유가 없다.” - Czernowitz Allgemeine, September 2, 1933)
"유태인 상점에서 사지맙시다!"
DAILY EXPRESS 영국 일간지
"유대는 독일에 전쟁을 선포한다 - 전 세계의 유태인이 단결하다"
(우드로 윌슨과 하우스: 돈과 협박으로 '민주주의' 국가의 정치인들을 부리는 청사진 'Philip Dru: The Administrator'의 저자 유태인 에드워드 만델 하우스; Council on Foreign Relations 창설)
유태인 금융재벌 버나드 바룩
“월스트릿 투자은행가 버나드 바룩은 1차대전 당시 미국의 산업계를 조율하고 통제할 목적으로 윌슨 행정부 산하에 설치된 전시산업위원회의 총수였다...
바룩은 단 한 번도 선거에 의해 임용되는 공직에 선출된 바가 없었음에도 거의 반세기 동안 미국의 대통령들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행사했다. 바룩은 여섯 명의 미국 대통령 뿐만 아니라, 정부각료, 상하원의원, 군장성, 외교관, 정당인사들에 대한 ‘고문’의 역할로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다... 전시산업위원회 위원장으로서 그는 미국의 산업계를 사실상 통치했다.” (Margaret L. Coit, Mr. Baruch, 1957)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의 건강상태는 사우스 캐롤라이나 호브카우에 있는 버니 바룩의 농장에서 휴식을 취해야 할 만큼 좋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바룩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도로시(Dorothy Schiff, 야콥 쉬프의 손녀로 뉴욕포스트 사주)는 루즈벨트와 그의 아내 엘레노어는 바룩이 너무 보수적이라고 여겼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룩은 루즈벨트가 치른 선거전들에 대한 든든한 자금줄이었다... 도로시 쉬프 역시 루즈벨트의 영향력있는 측근이었다... 그녀는 1938년 크리스마스를 몇 주 앞두고 조지아주 웜스프링스에서 휴양중이던 루즈벨트를 방문했다... 도로시 쉬프의 회상에 의하면, 루즈벨트는 바룩이 자신을 불렀을 때만 그와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주변에서 알게될까봐 매우 두려워 했다고 한다.” (Jeffrey Potter, Biography of Dorothy Schiff, 1976)
(미국의 국익보다는 국제유태인을 위해 일했던 FDR;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날짜와 시간까지 알고 있었으나 현지 군 책임자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 (1933-1945)
루즈벨트 행정부는 시작부터 유태인 용공세력의 온상이었다. 1950년, 조셉 맥카시 상원의원의 '맥카시선풍'으로 비화된 공산주의자들의 미국 연방정부 침투는 루즈벨트 재임시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의회의 비미국적행위 조사위원회를 이끌었던 텍사스의 마틴 다이스(Martin Dies) 민주당 하원의원은 1940년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고위직급을 포함하여 정부공직에 수천명에 달하는 공산주의자들과 용공분자들이 채용되어 있음을 알리고 문제의 심각성을 경고했다.
그러나 루즈벨트는 사석에서 이렇게 대꾸하며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공산주의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당신이나 나나 마찬가지오. 허나 이 나라에 공산주의자들이 있다는 것은 문제될 것이 없소. 사실 나와 가장 가까운 친구들 중에는 공산주의자들도 있어요... 나는 공산주의자들이 지금이나 향후 이 나라에 위험한 존재가 될 거라고는 믿지 않아요. 사실 난 소련이 앞으로 이 나라의 훌륭한 맹방이 될 것으로 믿고있소. 전에도 얘기했지만, 공산주의자들을 쫓아다닐 시간이 있으면 이 나라에 있는 나치주의자들이나 파시스트들을 조사하시오. 세계평화는 짜르정권 보다 지금의 소련 치하에서 더욱 안전해졌소. 그리고 러시아 사람들은 짜르시대보다 지금 공산주의 밑에서 더 잘 살고 있어요.” - U. S. Congressional Record, September 22, 1950, pg. A6832
“사무엘 로센만, 벤자민 코헨, 필릭스 프랑크푸터, 데이빗 릴리엔탈, 버나드 버룩, 앤 로센버그, 시드니 힐먼, 데이빗 나일스, 루이스 브랜다이스와 헨리 모겐소 2세(미국 재무장관, 1933-1945), 그리고 허버트 리먼(뉴욕주지사) 등 루즈벨트는 누가봐도 유태인임이 분명한 인사와 참모들로 스스로를 둘러쌓다. 이 때문에 미국의 보수우익은 루즈벨트가 주창한 ‘뉴딜' 정책을 ’쥬딜(Jew Deal, 유태인의 책략)'로 공격했다.” - Barbara Matusow, Washingtonian, May 2000
(운터마이어의 윌슨 대통령 협박으로 유태인 최초 미국 연방대법원 판사가 된 시온주의자 루이스 뎀니츠 브랜다이스; 브랜다이스는 한국전쟁 발발시 미국 국무장관이었으며 맥카시선풍 당시 용공주의자로 지목되었던 딘 애치슨의 후원자였다.)
(허버트 리먼, 유태인 금융재벌 리먼가문(리먼브라더스) 일족, 뉴욕주지사, 상원의원, 1950년대초 '맥카시선풍' 당시 용공세력 비호로 유명)
“확실한 출처에 의하면 72인의 루즈벨트 대통령의 고문들 가운데 52명이 유태인이며,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들의 대다수가 외국에서 태어난 자들이란 사실이다. 통계에 의하면 유태인들은 현재 미합중국 부동산과 천연자원의 80퍼센트를 점유하고 있으며 워싱턴 관료층의 85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 William Dudley Pelley, The Hidden Empire, 1937
(영국 언론재벌, 로더미어 卿과 히틀러; 그의 동생 노스클립 卿은 '시온의정서'를 영국에서 최초로 출간한 뒤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죽음을 맞았다)
Lord Rothemere
“나는 영국의 모든 젊은이들에게 독일의 나치정권이 지금까지 이룩한 성과를 주의깊게 연구할 것을 권한다. 이에 있어 나치독일을 증오하는 자들의 거짓말과 흑색선전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될 것이다. 독일의 나치정권을 가장 격렬하게 공격하는 일부 언론은 실제로 러시아의 소비에트정권에 대해서는 침이 마르도록 찬사를 아끼지 않는 집단임을 알아야 한다.
그들이 떠들썩하게 시작한 “나치스의 만행” 선전캠페인을 통해 알려진 사례들이 허무맹랑한 날조극이라는 것은 독일을 방문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아는 사실이다. 우리 나라의 배가 더 되는 독일과 같은 나라에서 유태인에 대한 그러한 폭력사건은 몇차례 일어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선동가들은 고립된 몇몇 사건을 일반적인 것으로 침소봉대하여 마치 나치정권이 피비린내나는 폭정을 자행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퍼뜨리려 한다.
나치스가 집권하기 전까지 독일민족은 빠른 속도로 그들 국가내부에 존재하는 이질적인 요소에게 종속되어 가고 있었다. 바이마르 정권 말기 독일의 관료층에는 1차대전 전보다 20배나 많은 유태인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독일에 대한 애국심과 책임감보다는 국제적으로 다른 국가의 유태인들과 더욱 공고하게 연대되어 있었던 이들 유태인은 독일정부의 모든 요직에 파고들었다. 장관은 독일인이었는지 모르나 그들 뒤에서 정책을 결정하고 국민에게 뉴스를 전달했던 사람들은 모두 유태인이었다.” - The Daily Mail, London, July 10, 1933
Samuel Untermeyer 유태인 월스트릿 변호사, 정계 거물
“유태인과 비유태인을 떠나 여러분 모두는 對 독일 聖戰에 지금 당장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 Radio Broadcast, New York City, August 6, 1933
(루즈벨트 주변의 유태인 거물들: 운터마이어, 뒷줄 가운데; 자칭 "인터내셔널 소셜리스트" 엘레노어 루즈벨트, 영부인, 앞줄 왼쪽)
"다른 민족들은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한다. 그러나 유대민족만은 오늘날까지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 그 어떤 박해도 우리를 무너뜨릴 수는 없다. 유태인이야말로 이 세상의 귀족이다.” - London Investigator, June, 1935
Emil Ludwig 유태인 역사가 (佛)
“히틀러는 그 어떤 전쟁도 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대신 그는 강요된 전쟁에 휘말리게 될 것이다. 올해는 아니더라도 오래 지나지 않아...” - Les Annales, June, 1934
(이스라엘 리쿠드 운동의 거목 야보틴스키)
Vladimir Jabotinsky 시온주의 지도자 (팔레스타인)
“지난 수개월 동안 이념과 국적을 초월한 전세계의 유태인들은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對 독일 항전을 전개해왔다. 우리 개개인이 이 싸움에서 감당해야 할 몫은 막중한 것이다. 우리는 독일을 상대로 전세계에 걸쳐 정신적, 물질적 전쟁을 시작할 것이다. 독일은 그들이 잃었던 영토와 식민지를 회복하여 다시 한번 위대한 국가로 발돋움하려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유대민족의 국익은 독일의 절멸을 부르짖는다!” - Mascha Rjetsch, January, 1934
Julius Streicher Der Sturmer(돌격병) 발행인
“유태인은 언젠가 이 곳에 사는 민족들을 말살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유럽에 왔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들은 그들의 자유를 제약하는 제도적, 윤리적인 장치들을 제거하기 위해 온갖 책략을 동원했다. 그들은 먼저 기만적인 사상들을 퍼뜨리고 다녔다. 그들은 그들을 받아준 주인민족들에게 유태인도 그들 민족의 일원이 될 수 있다고 속삭였다.
마침내 사람들은 프랑스의 유태인은 프랑스인이, 영국의 유태인은 영국인이, 스페인의 유태인은 스페인인이, 그리고 이탈리아의 유태인은 이탈리아인이 될 수 있다는 거짓말을 믿게 되었다. 이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겐 수구반동 야만인이라느니 인류의 적이니 하는 공격들이 쏟아졌다.
18세기 말 그들이 사주한 프랑스혁명으로 유태인은 프랑스에서 그들의 권리를 제한했던 제도들을 제거했다. 그리고 19세기 동안 그들이 주동한 혁명들로 유럽의 많은 국가들에서는 그들을 견제했던 법들이 차차 사라지게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유태인 해방은 점차 현실로 다가왔다. 그리고 세계대전의 결과로 마침내 유태인은 러시아와 독일의 주인노릇을 하기에 이르렀다.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전쟁으로 산같이 쌓인 시체더미 앞에서 국제유태인은 마침내 지난 수백년 동안 그들이 꿈꾸왔던 유럽인들에 대한 복수와 승리를 자축하며 희희낙락했던 것이다... 세계대전 이후 여러 나라들에서 그 나라와 민족을 이끌겠다고 나선 유태인들에게 감히 대항하는 사람은 없었다. 얼마나 자신감에 충천했던지 그들은 뻔뻔스럽게도 유태인을 독일 지방정부 지도자와 제국정부 각료직에 앉혔다. 유태인 발터 라테나우는 독일이 배신당하고 굴종해야 했던 그 어두웠던 시절 독일을 발아래 누르고 나아가 세계를 정복하겠다는 국제유태인이 품은 야심의 표상이었다...
“국가사회주의와 파시즘은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유태인의 지배를 종식시켰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에서 유태인은 민주주의라는 가면 뒤에 숨어 이들 나라를 통치한다. 오늘날 소위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은 유태인의 지배를 은폐하기 위한 사탕발림에 지나지 않는다.
유태인은 민주주의 국가들의 만사를 결정한다. 그리고 이들 국가의 유태인 은행가 하이에나들과 이들이 던져주는 돈으로 부와 명예를 누리는 정상배들은 독일과 이탈리아를 다시 한번,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들에게 굴복시키기 위한 전쟁을 획책하고 있다.
지금 영국에서는 유태인 국방상 호어 벨리샤(Hore Belisha)가 영국의 청년들을 유럽의 전장으로 내몰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유태인의 야심을 채우기 위해서 전쟁은 필수적이다. 그들의 야심은 국가사회주의와 파시즘이 이끄는 민족들을 국제유태인이라는 세계적 범죄집단의 돌이킬 수 없는 노예들로 종속시키는 것이다.
객관적인 차원에서 유태인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동일한 것이다. 셀수 없이 입증된 바와 같이 코민테른은 신디컬리즘 등의 파괴적인 운동들과 마찬가지로 생산의 무정부상태, 인플레이션, 빈곤, 그리고 민중의 절망을 조장한다. 단합된 유대 금융자본이 조성하는 경제환경에 영합할 수 밖에 없는 개별적 산업자본은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코민테른이 주창하는 똑같은 모순들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국제금융자본의 의도하에 그 모순의 범위와 파괴력은 비할나위 없이 방대한 것으로 증폭된다... 그렇다면 유태인 맑스는 왜 금융자본이 만들어내는 모순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가? 여러분은 그 정답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실로 맑시즘은 유대 국제금융자본의 가장 유용하며 파괴적인 도구인 것이다.” - Weg zur Versklavung, Der Sturmer, No. 34
Stephen S. Wise 미국 수석랍비
“미국의 유태인은 유태인이 아니라 독일인 행세를 하려했던 독일 유태인의 실수를 되풀이 해서는 안될 것이다. 나는 유대교를 믿는 미국인이 아니다. 나는 그저 유태인일 뿐이다. 나를 미국인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60년간 미국인이었다면 나는 4천년 동안 유태인이었다. 히틀러는 이점 한가지에 대해서만큼은 옳은 소리를 했다. 그는 유태인을 하나의 민족이라 부른다. 맞는 얘기다.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다!” - Address to American Jewish Congress, June 12, 1938
Pierre Creange 유태인 언론인 (佛)
“독일은 必殺의 증오로 싸워야할 유대교의 적이다. 오늘날 유대교의 목표는 全독일국민에 대한 무자비한 군사행동이며 독일국가의 절멸이다. 우리는 독일과의 무역중단, 독일의 해역봉쇄, 그리고 남녀노소를 막론한 모든 독일인들에 대한 보복을 전세계에 요구한다... 독일과의 싸움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릴 필요도 없다. 이스라엘이 공격받았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수호하자! 깨어난 독일 앞에 우리는 깨어난 이스라엘을 제시한다. 그리고 세계는 우리를 지켜줄 것이다.” - Epitres aux Juifs, 1938
Joseph Trimble 유태인 변호사 (美)
“영국, 소련, 프랑스의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요직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바로 이스라엘의 아들들이다. 이스라엘의 세 아들은 곧 나치 독재자를 지옥으로 보낼 것이다.” - American Hebrew, June 3, 1938
Karl Baumbock 독일 언론인
“유태인의 세계권력에 대해서는 이미 얘기한 바와 같다. 그들의 일관된 목표는 명백하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대두된다. 각국에 흩어져 있는 유태인 인구를 통괄하여 그들 민족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모종의 지도부는 이 세계 어딘가에 과연 존재하는가? 우리가 이미 아는대로 세계에는 이스라엘만국협회(L'Alliance Israelite Universelle), 브나이브리스(Independent Order of B'nai B'rith), 유태인 에이젼시(Jewish Agency)를 비롯한 각종 시온주의 단체들, 대독일 국제보이콧 기구, 미국 유태인연합 자문회의(American Jewish Joint Consultative Council) 등의 많은 국제적 유태인 기구들이 존재한다.
이 모든 조직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국제유태인의 세계적 의제를 진흥하고 실천한다. 그들이 서로 어떻게 연계되어있으며 공조하는지, 또한 이 모든 조직들을 통제하는 중앙적인 핵심 지도세력이 존재하는지, 또한 그렇다면 그들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는 부차적인 질문이다. 전세계 모든 유태인에 의해 인정받는 하나의 유태인 정부가 존재하는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분명한 것은 세계적 권력을 지향하는 국제유태인의 의식적인 야심이 하나의 통합된 형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오늘날 국제정치 무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만 주의깊게 관찰하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오늘날 국제유태인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국제유태인의 근본적인 목표에 대해서는 이미 얘기한 바와 같다. 그들의 행보는 현재의 전술적인 상황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면 오늘날 이 전술적인 상황은 어떠한가? 국가사회주의 정부의 지도하에 독일국민은 유대세계권력의 3대 거점(미국, 소련, 독일)들 중에 하나를 제거했다.
다른 많은 국가들에서도 그 나라의 국민들은 차차 유태인의 지배야심에 대해 눈을 뜨고 있다. 그러므로 국제유태인은 그들이 가진 모든 자원과 수단을 동원하여 그들의 숨겨진 지배를 직시하고 저항하기 시작한 국가들을 무릎 꿇리고 그들의 민족주의적 정책들을 포기할 것을 강요하려 한다.
지금 국제유태인은 역사속의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결속되어 있다. 그들은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깨어나는 민족들을 향한 증오의 공세를 고조시키고 있다. 국제볼셰비즘과 민주주의는 그들이 가장 애용하는 두 가지 무기이다. 악마의 냉혈적인 계산으로 그들은 권위주의-민족국가들을 타도하기 위한 새로운 세계대전을 터뜨릴 것이다.
전 세계에 대한 그들의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해서 이들 국가의 절멸은 필수적인 것이다. 국제유태인의 정신나간 꿈은 주요 국가들의 요소에 침투하여 그들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그들의 계획에 맞도록 조종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 Juden machen Weltpolitik, 1938
Sir Oswald Mosely
“오직 영국인의 노동으로 창출되는 영국인의 富와 여신은 영국 중앙은행(Bank of England)을 통해 유태인들에 의해 독점되고 있으며 또한 국제고리대금업으로 착취한 돈으로 그들은 지금 우리 조국을 비롯한 서구문명을 파괴하고 있다. 영국국민, 영국의 산업가들, 영국의 노동자들, 그리고 대영제국 전체는 국제유태인의 득세와 권력을 위해 끊임없이 희생되어 왔으며, 우리 나라의 국제무역시스템, 양당정치제도, 그리고 외교정책이 오늘날과 같은 체제로 유지되는 까닭도 오직 유대인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국제 유대자본은 대영제국을 지배하고 대영제국을 통해 세계를 지배한다.”
Louis-Ferdinand Celine
“그 무엇보다 전쟁은 피해야 한다. 우리에게 전쟁은 역사의 종말, 유대인의 도살장으로 향하는 마지막 관문이다. 우리를 전쟁으로 끌고가는데 유대인들이 보이는 집요함 만큼이나 완강하게 우리는 전쟁에 반대해야 한다. 젠타일에 대한 공포와 적개심, 이론(異論)을 불허하는 탈무드적인 강팍함, 악마적인 냉혹함으로 무장한 유대인들에게 우리는 고작 몇마디 신음소리로 대항한다... 나는 히틀러를 위해 전쟁을 치를 생각은 없다.
나는 그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유대인을 위해 히틀러와 싸우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히틀러는 유대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프랑스인이여, 당신들은 당신들의 절대군주인 로스차일드 남작과, 런던, 뉴욕, 그리고 모스크바에 있는 그의 제왕같은 사촌들이 정해놓은 시각에 전쟁터로 끌려나가게 될 것이다.”
에즈라 파운드
“그나저나 당신네 미국인들에게 무슨 자유가 있나? 미국은 데모크래시(democracy)의 수호자인가 아니면 쥬데오크래시(judeocracy)의 수호자인가? 당신들의 통치자를 통치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국민의 책임은 어디서 시작하고 어디서 끝나는가? 미국이 인종적으로 더럽혀지고 지적으로 무기력해지는데 대한 책임은? 통치자를 선택함에 있어 과연 당신들은 얼마나 큰 권한을 가지고 있는가? 또한 정책을 결정하는 일은?... 전쟁이 계속되는 날 매일 하루는 죽은날이요 또한 죽는 날이다. 유대인이 일으킨 전쟁에서 더 많은 피를 뿌릴수록 앞으로 그들에 더욱 굴종할 수 밖에 없으며 자유는 갈수록 희귀한 것이 되어 갈 것이다.” (Italian National Radio broadcast, July 21, 1942)
“유대인에 대한 편견과, 유대인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나는 묻는다. 고리대금업(usury)의 메커니즘으로 다른 사람의 재산을 계속 강탈하면서도 스스로를 ‘이웃’으로 생각해 달라는 유대인들의 요구가 가당하기나 한 것인가? 고리대금업은 이 세상의 암적종양이다. 오직 파시즘이라는 외과의사의 칼만이 그 종양을 모든 국가들의 몸체에서 도려낼 수 있을 것이다.” (What Is Money For?)
히틀러의 제국의회 연설 (1939년 1월30일)
"유태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유럽의 평화는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계는 원만한 합의에 이를 도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의 선민이라면서 다른 민족들의 몸체에 기생하면서 그들의 생산적인 노동을 착취하는 행태는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습니다... 다른 민족들처럼 유태인도 정직하고 생산적인 노동으로 그들의 삶을 꾸려가는 방법을 터득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 이상 그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재앙이 닥칠 것입니다... 만약 유태 국제금융자본이 다시 한번 유럽의 국가들을 세계대전으로 내모든데 성공한다면 그 전쟁의 결과는 유대인의 승리가 아니라 유럽 유대인의 전멸이 될 것입니다!"
조셉 케네디 駐英 미국대사 (JFK 부친)
“신임 미국대사로 1938년 초 런던에 부임한 조셉 케네디는 곧 미국태생의 낸시 비처 랭혼 애스터 자작부인과 친근한 사이가 되었다... 그녀와 가까웠던 G.K. 체스터튼과 함께 그들이 공유하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면 그것은 유대민족에 대한 뿌리깊은 증오심이었다... 열렬한 반공주의자였던 것만큼 반유대주의자였던 그들은 히틀러를 유태인 문제라는, 애스터 부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계적 골칫거리”에 대한 해결책으로 환영했다.
사실 “클리이브덴 세트(Cliveden Set)” (애스터 부인의 저택에 자주 모였던 명사들의 모임)의 그 누구도 제3제국 치하에서 유태인이 당면하고 있었던 딜레마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았다. 애스터 부인은 케네디에게 보낸 편지에서 히틀러는 이 “그리스도의 살인자들에게 단지 뜨거운 맛을 보여주는데 그쳐서는 안될 것”이라고 쓰기도 했다. 이에 케네디는 답장에서 독일과의 전쟁을 부추기는 미국의 “쥬 미디어(Jew media, 유태인 소유의 대중매체)”가 문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뉴욕과 로스앤젤레스의 소위 국제정치 전문가라는 유태인들이 벌써부터 유럽에 둘러붙은 화약통에 불을 붙이기 위해 목청을 높이고 있습니다.”
(유태인이 대부분인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선동을 차단했다는 이유로 히틀러가 독일국민의 "자유"를 억압했다고 주장한 미국 유태인 언론인 월터 리프먼)
“1938년 5월 케네디는 헤르베르트 폰 더크센 駐英 독일대사와 집중적으로 현안을 논의했다. 미국 국무성의 승낙없이 이루어진 이러한 회동들을 통해 케네디는 폰 더크센에게 루즈벨트 대통령은 “유대적 영향력의 희생자”이며 히틀러 정권의 본질이나 독일국민의 염원에 대해서 아는게 거의 없다고 말했다.
(나치대사는 그후 케네디를 “런던에 있는 독일의 가장 좋은 친구”로 보고했다.)... 한편 미국의 칼럼니스트들은 독일에 우호적인 케네디의 행태를 비난했다. 후일 케네디는 그가 주영대사로 재임할 때 받았던 공격의 75퍼센트는 “특정집단의 유대계 발행인과 언론인들”에게서 나왔다고 말했다, “이들은 그들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나에 대한 중상모략도 서슴치 않았다.
” 그는 그의 장남인 죠 케네디 2세에게 마땅한 이유도 없이 “유태인 칼럼니스트들”에게 시달리는 일이 지긋지긋하다고 말했다... 그와 절친했던 찰스 코글린(카톨릭 신부로 반유대주의적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인물)과 함께 케네디는 유태인이 미국의 문화와 정치에 악성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믿음을 바꾸지 않았다. 1939년 말 그는 한 영국기자에게 “미국의 정부정책은 유태인들의 프로덕션”이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루즈벨트 대통령에 대해 대단한 반감을 지니고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2차대전 후 케네디는 FDR을 가리켜 “내 아들 조를 죽인 불구자 개자식”으로 불렀다고 한다.” - Edward Renehan, The Kennedys at War, 1937-1945, 2002
제임스 포레스탈 미국 해군성 장관
“오늘 조 케네디와 골프를 쳤다. 나는 1938년 이후 루즈벨트와 네빌 체임벌린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는지를 그에게 물었다. 그는 1938년 체임벌린의 입장은 모든 면에서 영국은 전쟁을 치를 능력이 없으며 영국은 히틀러와의 전쟁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고 대답했다.
케네디의 시각은 독일이 소련과의 일전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었으나, 만약 1939년 여름 폴란드 문제와 관련하여 미국의 강경한 대응을 재촉한 뷸리트(William C. Bullit, 주프랑스 미국대사)만 아니었더라도 영국이 독일과 개전할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만약 워싱턴으로부터의 끊임없는 간섭과 압력만 아니었다면 프랑스나 영국이 폴란드의 국경문제로 독일과 전쟁에 돌입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 그의 얘기였다. 케네디는 또한 뷸릿이 자신에게는 독일이 곧 유럽을 유린할 것이라고 주장했던 반면 루즈벨트에게는 독일이 그들의 생각처럼 싸움에 응해주지 않고 있다고 계속 불평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체임벌린은 미국과 국제유태인이 영국을 독일과의 전쟁에 몰아넣었다는 심정을 피력했다고 한다. 1939년 여름 루즈벨트와의 전화통화에서 대통령은 케네디에게 영국이 좀더 강경하게 폴란드 문제에 대처하도록 체임벌린에게 압력을 가할 것을 집요하게 재촉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영국이 싸울 여력이 없는 상황에서 체임벌린에게 압력을 가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도 없을 것’이라는게 케네디의 일관된 대답이었다. 실제로 그 당시 영국은 전쟁을 벌일 상황이 아니었다.” - December 27, 1945; The Forrestal Diaries: Foretaste of the Cold War
(영국과 전쟁을 원하지 않았던 독일과의 전쟁을 피하려 했다는 이유로 오늘날 안일한 정치인으로 매도되는 네빌 체임벌린)
William C. Bullitt 프랑스 미국대사
“단치히 문제와 관련하여 립스키를 비롯한 폴란드 외무성 관료들이 내린 결정은 포톡키 백작이 1938년 11월21일 텔레그램으로 보낸 보고서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포톡키 駐美 폴란드 대사는 당시 본국에 잠시 귀국해 있었던 윌리엄 C. 뷸릿 駐佛 미국대사로부터 루즈벨트 대통령은 곧 일어날 유럽의 전쟁에 기필코 미국을 참전시킬 것이라는 언질을 받았다.
뷸릿은 특히 그가 루즈벨트 대통령으로부터 각별한 신임을 받고 있다는 점을 포톡키에게 주지시키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뷸릿은 이제 곧 유럽에서는 장기간의 전쟁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으며 특히 “독일과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감정과 격렬한 증오심을 표출했다.
” 그는 이번 전쟁에 6년이 소요될 것이며, 독일이 재기불능의 치명상을 입는 시점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포톡키는 전쟁과 파괴에 대한 뷸릿과 루즈벨트의 열정에 공감할 수 없었다. 포톡키는 독일에게는 영국과 프랑스를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지적하며 그러한 전쟁이 어떻게 시작될 수 있는가를 물었다. 이에 뷸릿은 먼저 독일과 다른 국가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면 서방열강들(영국, 프랑스, 미국)이 反독일 전선에 개입하는 형태로 전쟁은 전개될 것이라고 대답했다.
소련과 독일의 전쟁을 시간문제로 받아들였던 뷸릿은 일단 소련과의 전쟁에서 힘을 소진한 독일은 결국 서방열강들에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을 것으로 예견했다. 그는 만약 영국과 프랑스가 먼저 움직여준다면 미합중국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들에 편에서 이 전쟁에 참전할 것이라는 의사를 포톡키에게 확인시켜 주었다.
뷸릿은 폴란드의 對 독일 대응방안에 대해 질문했고 포톡키는 폴란드는 자국의 서부국경 문제에 독일이 간섭하도록 허용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전쟁을 택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폴란드에 대해 강한 친근감을 표시하면서 뷸릿은 폴란드가 독일에 굳건하게 맞서줄 것을 의심치 않는다고 말했다.” (David L. Hoggan, President Roosevelt and The Origins of the 1939 War, 1983)
히틀러의 제국의회 연설 (1939년 4월28일)
“독일-폴란드 관계에 대해서는 긴 말이 필요없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도 역시 베르사이유 평화조약은 독일에 가장 고통스런 상처를 남겨놓았습니다. 물론 의도적으로 말입니다.
폴란드에 해상접근로를 제공하기 위해 매우 기이한 형태로 조성된 ‘단치히 통로’는 그 무엇보다 폴란드와 독일 사이에 우호선린 관계가 수립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미 말했지만 이 ‘단치히 통로’는 우리 독일이 해결해야만 하는 가장 고통스러운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폴란드 역시 해상접근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적이 없으며 두 나라가 서로의 이웃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도록 운명지어진 이상 불필요한 갈등을 최소화하고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기본원칙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같은 생각을 가졌던 이 전의 필수드스키 원수(Marshal Pilsudski)는 그러므로 두 나라의 이익이 관련된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전쟁을 배제하자는 독일과 폴란드의 불가침 조약에 참여했던 것입니다. 이 협정에는 폴란드에 대한 독일의 양보라고 할 수 있는 한 가지 예외조항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에 폴란드가 프랑스와 맺은 전시 상호지원조약에만 해당될 뿐 이 협정이 조인된 이 후에 폴란드와 프랑스가 맺을 수도 있는 조약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명백합니다. 독일과 폴란드의 합의가 유럽의 긴장을 괄목할 수준으로 완화시켰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과 폴란드 사이에는 언젠가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독일도시 단치히(Danzig) 문제 말입니다. 단치히는 독일의 도시이며 독일에 속하길 원합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이 도시는 폴란드와 계약을 맺고 있습니다. 그들도 인정하듯이 이 계약은 베르사이유 조약의 실세들이 단치히 시(市)에 강요한 것입니다.
더욱이 분쟁을 심화시키는데 혈안이 되어있는 국제연맹에 해법을 기대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국제연맹의 그 고등판무관이란 인물은 참으로 대단한 술수의 소유자였습니다. 본인은 이 문제에 대한 평화적인 해결이 유럽의 긴장을 최종적으로 해소하는데 기여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는 이 문제의 해결은 일부 정신나간 전쟁광들의 선동이 아니라 실제적인 위험 요소들을 제거함으로서 성취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개월 전 단치히 문제와 관련하여 수 차례의 논의를 거친 뒤 본인은 폴란드 정부에 구체적인 제안을 내놓았습니다. 본인은 이 제안이 무엇이었는지를 여러분께 알리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이 제안이 유럽의 평화를 위한 최대한의 양보인지, 아닌지는 여러분께서 직접 판단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언급했던대로 본인은 폴란드도 해상접근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잊은 적이 없으며 항상 이러한 사실을 신중하게 고려했습니다. 나는 민주주의 국가의 정치인이 아니라 국가사회주의자요 현실주의자입니다.
본인은 폴란드가 해상접근로를 원하는 것만큼 독일 역시 독일의 동부영토에 대한 접근로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바르샤바 정부에 분명히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 모두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들입니다. 그리고 폴란드 정부가 알아야 할 것은 독일이 이런 문제들을 만들어 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들은 베르사이유의 농간꾼들에게 그 책임이 있습니다. 악의적인 의도에서였건, 생각없음에서였건 그들은 유럽에 꺼뜨리기 힘든 도화선이 달린 100개의 화약통들을 설치해 놓았습니다. 이 문제들은 과거의 사고방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본인은 새로운 방법을 시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단치히 통로’라는 폴란드의 해상접근로와 이 통로를 가로지르는 독일의 단치히 접근로는 그 어떤 군사적인 중요성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 통로의 중요성은 오직 상징적이며 경제적인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교통로에 군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군사문제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본인은 다음과 같은 제안을 폴란드 정부에 전달했습니다:
(1) 단치히는 자치도시로서 독일제국에 귀속된다
(2) 독일은 독일과 단치히를 연결하는 도로와 철도부설권을 얻으며, 이들 시설에 대해서는
폴란드 정부가 단치히 통로에 대해 행사하는 것과 동등한 치외법권적 권한을 누린다.
이에 대해 독일은;
(1) 단치히에 대한 폴란드의 모든 경제적 권리를 인정한다.
(2) 폴란드가 원하는 목적과 규모의 자유항구를 단치히에 보장한다.
(3) 독일과 폴란드의 현재 국경을 받아들이며 최종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4) 본인의 생애를 초월할 유효기간 25년의 불가침 조약을 폴란드와 체결한다.
(5) 독일은 폴란드, 헝가리와 공동으로 슬로바키아의 독립을 보장하며 이 지역에 대한
독일의 일방적 헤게모니를 포기한다.
폴란드 정부는 나의 제안을 거부한 반면 첫 번째로, 국제연맹의 분쟁중재 고등판무관을 다른 인물로 교체하는 방안에 대해 논의하는 것과, 두 번째로 독일의 단치히 도로 및 철로 부설에 대한 타당성 여부를 검토해 볼 의사가 있다는 답변을 전달해 왔습니다.
본인은 폴란드 정부의 이러한 납득할 수 없는 태도에 유감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 자체는 그리 결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가장 우려스러운 일은 1년 전 체코슬로바키아 사태 때와 마찬가지로 국제적 전쟁선동꾼들의 대대적인 거짓말 공세 하에 폴란드가 군대동원령을 내렸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독일은 단 한명의 병사도 징집하지 않았으며 폴란드에 무력으로 대응할 생각조차 않고 있었던 상황에서 말입니다. 이미 말한 것과 같이 폴란드의 이러한 행동은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유감스러운 일임에 후세의 사람들은 본인의 제안을 그들이 거절했던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이었는가를 판단할 것입니다.
본인이 그러한 제안을 했던 것은 독일 국민에 민감하게 작용하는 문제를 독일과 폴란드 양국 모두의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해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본인의 믿음에 의하면 단치히 문제에 대한 해법에 있어 폴란드는 주는 쪽이 아닌 받는 쪽에 서 있습니다. 왜냐하면 단치히는 결코 폴란드의 일부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려한다는 국제언론의 망동은 영국과 프랑스의 소위 폴란드 국경보장 선언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에 의해 폴란드 정부는 프랑스나 영국이 독일과 전쟁에 돌입할 경우 폴란드 역시 독일에 대해 군사적 행동을 취해야 할 의무를 지게 되었습니다. 폴란드가 받아들인 이러한 의무조항은 본인이 수년전 필수드스키 원수와 맺은 불가침조약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이 협정에는 당시 폴란드와 프랑스 사이에 존재했던 상호간의 의무사항이 명시되어 있는 바, 이 의무사항들을 자의적으로 연장확대하는 것은 독일-폴란드 사이에 체결된 불가침조약의 의무조항들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만약 당시 상황이 지금과 같았더라면 본인은 그 조약을 체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어느 한 쪽에 그토록 많은 예외조항을 허락하는 불가침조약은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입니다. 당사국들의 무력사용을 근원적으로 배제하는 명백한 합의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오직 집단적 안보, 아니 집단적 안보불안과 끊임없는 전쟁의 위험만이 상존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인은 필수드스키 원수와 체결했던 조약을 다시 검토한 바, 이 조약은 폴란드의 일방적인 위반에 의해 파기된 것으로 간주해야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본인은 이러한 뜻을 반영하는 전문을 폴란드 정부에 전달했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이러한 대응방침 수정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언급한 문제들의 해법에 대한 본인의 원칙적인 시각에는 변함이 없음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본인은 두 나라의 선린관계를 위해 폴란드의 새로안 제안에 언제든 귀를 기울일 것이며, 또한 독일은 동등한 조건 하에서 합의된 의무사항들을 철저하게 이행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자 합니다.”
제르지 포톡키 백작 駐美 폴란드 대사
“오늘밤 본인은 저의 사저(私邸)에서 미국 대통령의 측근인 왓슨(Watson) 장군을 영접했습니다. 장군은 대통령의 지시로 방문하였으며 저를 통해 바르샤바 본국 외무성에 전달할 사항을 가지고 왔다고 밝혔습니다.
대통령은 히틀러 총통의 4월28일 제국의회 연설에 대단히 분노한 것으로 보이며 장군에 의하면 대통령은 히틀러 총통의 연설을 자신에 대한 노골적인 모욕과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합니다. 이 표현은 왓슨 장군이 사용한 표현 그대로 입니다.
장군은 또한 대통령의 가문이 친가와 외가 쪽으로 모두 유대계 혈통이 섞여있기 때문에 대통령은 히틀러 총통과 독일인들을 증오할 추가적인 이유가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살피건데 대통령은 올해 1월에 있었던 독일 외무상 리벤트로프의 바르샤바 방문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으며, 또한 이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는듯 합니다.
대통령은 독일이 이전부터 그랬듯이 현재까지도 폴란드를 방공협정에 가입하도록 설득하려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본인은 비록 폴란드가 프랑스에 대해 호감은 갖고 있지 않더라도 히틀러 총통과 동맹을 맺을 생각은 없다는 점을 장군에게 확답해 주었습니다. 지금 미국에는 유럽의 전쟁에 또 다시 참전하는 것에 대한 강한 국민적인 반대여론이 존재하는바, 미국의 대통령은 유럽의 전쟁을 부채질을 하기 위한 또 다른 방법을 찾아내야 합니다.
본인이 왓슨 장군에게 제기한 질문을 통해 느낀 점이지만 본인은 루즈벨트 대통령이 유럽의 현재 상황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으며 오직 보복심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왓슨 장군은 대통령이 단치히 문제와 관련하여 폴란드가 독일과의 그 어떤 협상도 거부할 것과 독일에 강경하게 대처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본인은 이 문제에 있어서 폴란드는 독일의 압력에 굴복할 생각이 없으며 현재 폴란드에 귀속되어 있는 독일의 舊영토에 대해서도 역시 한발치도 양보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실하게 말해주었습니다. 장군은 대통령도 폴란드의 이러한 입장을 알고 있으나, 이에 더해 폴란드 정부는,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불에는 불로 맞설 것”과 “히틀러 총통에 공개적으로 맞서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와 함께 왓슨 장군은 독일과 폴란드의 개전 시 소련이 폴란드의 편에서 독일을 공격한다는 요지의, 미국과 소련의 협정초안 사본을 본인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대통령은 더 나아가서 그러한 무력충돌을 유발하기 위한 빌미는 폴란드 정부에 의해 쉽사리 제공될 수 있으며, 그 뒤에 이은 독일의 공격은 폴란드군의 용맹과 소련의 강대함에 의해 반격받을 것이라는 뜻을 전했습니다. 소련에 대해 애정을 갖고 얘기한 장군은 스탈린은 폴란드 영토에 대해 욕심이 없으며 독일의 군사적 패배 직후 곧바로 폴란드 국경 밖으로 철수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를 보면 대통령은 폴란드의 현 상황에 대해 매우 무지한 듯 하며, 또한 폴란드 대사관은 소련과 미국 사이의 그러한 잠재적인 협정에 대해 들은바도 없습니다. 장군이 보여주었던 협정 사본도 초안에 불과했으며 그 지면에는 그 어떤 책임자의 서명도 없었습니다.
본인에게 이러한 시도는 미국 대통령의 일종의 허세로 보이며, 한가지 부언하자면 현 상황에 대한 왓슨 장군의 인식부족 탓으로 그와는 현안에 정통한 대화가 불가능했습니다. 대통령은 장군을 통해 그의 의사가 본국 외무성에 즉각 전달될 것을 부탁했습니다.” - Report to Warsaw, April 30, 1939: Der erzwungene Krieg: Die Ursachen und Urheber des 2. Weltkriegs, Tuebingen: Grabert Verlag
"프로파간다는 미국의 라디오, 영화, 언론, 출판의 대중매체를 100퍼센트 장악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수중에 있습니다. 그들은 독일을 극악무도한 전체주의 국가로 묘사하기 위해 매우 저속한 표현방법들까지 동원하고 있는데, 그들의 프로파간다는 유럽의 현 상황에 대해 별다른 지식이 없는 미국의 일반대중에게는 매우 큰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특히 독일과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유대계 이민자들 중에 언변이 뛰어난 자들은 수많은 강연기회를 통해 독일에 대한 각종 중상모략으로 대중을 선동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전체주의 국가의 폐악과 대비시켜 미국의 자유를 칭송합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매우 치밀하게 조직된 이 프로파간다 캠페인의 공격대상은 오직 국가사회주의 독일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소련에 대한 얘기는 완전히 배제되어 있으며 필요에 의해 어쩌다 언급되더라도 소련은 매우 진보적이며 선의로운 국가, 혹은 서방민주국 블럭의 동반자라는 인상을 주는 방향으로 언급됩니다.
교묘한 프로파간다 덕분에 지금 미국대중의 대부분은 심정적으로 스페인의 공화파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프로파간다들은 미국대중의 전쟁심리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려 하고 있습니다. 지금 미국인들에게는 유럽의 평화가 나치독일에 의해 위협받고 있으며, 전쟁이 일어날 경우 세계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미국이 나서야 한다는 프로파간다들이 매일같이 퍼부어지고 있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파시즘에 대한 증오를 공개적으로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국가사회주의 독일을 비롯하여 독일과 관련된 모든 것들에 대한 증오심과 중상모략은 독일 내 유대인에 대한 가혹한 처우와 이로인해 독일을 떠난 유대인들에 의해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류에 있어 버나드 바룩, 뉴욕주지사 리먼, 대법원판사 필릭스 프랑크푸터, 재무장관 모겐소 같은 유대계 유력인사들은 큰 몫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루즈벨트 대통령의 최측근들이자 私的으로도 대통령과 절친한 사이입니다. 이들은 미국의 대통령이 세계의 말썽꾼들을 벌주는, 인권, 종교, 언론의 자유를 위한 수호자가 되어주길 바랍니다. 그러나 소위 ‘미국적 가치관’과 ‘자유 민주주의’의 대변자로 행세하는 이 그룹을 가까이서 관찰할 때, 이들은 모두 의심의 여지없이 국제유대인과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고리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자기 민족의 이익을 최우선시 하는 이 유대 인터내셔널이 미합중국의 대통령을 인권의 수호자로 부각시킨 것은 매우 영리한 행동이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들은 서반구를 증오와 적개심의 온상으로 만들어 놓았고 세계를 두 편의 적대적 진영으로 갈라 놓았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일반인들이 감지할 수 없는 막후에서 매우 기이한 방식으로 결정되며 또 실행되고 있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지금 국제유대인이 원하는 다음 전쟁에 미국을 참전시키기 위해 미국 외교정책의 근간을 폐기하려하고 있으며, 이와동시에 막대한 전쟁물자를 비축하고 있습니다.” - Report to Warsaw, January 12, 1939: J. Fuller, Military History of the Western World, 1954
요제프 베크 폴란드 외무상
"폴란드 외무장관인 요제프 베크는 다섯 개의 공을 가지고 노는 무모한 게임을 하는, 권모술수에 능한 인물이었다. 그는 ‘제3의 유럽’을 위한 야심만만한 계획을 추진함으로서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는 동해에서 다다넬스 해협까지에 폴란드가 주도하는 중립적인 세력권을 건설하려고 하였다. 폴란드를 위해서는 히틀러의 공격적인 정책에서 이점을 얻으려고 하였다... 대외적으로 조심스러운 그의 친독일 정책은 속으로는 ‘원칙적으로 도이치 사람들의 오류를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단치히를 폴란드 영토에 조건없이 귀속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동프로이센 전체, 슐레지엔, 포메른... 그렇다, 우리의 포메른’까지 노리고 있었다. 그런 말은 점점 더 자주 공개적으로 등장하였다... 베크가 히틀러의 제안을 뜻밖에도 냉담하게 거절하고 도전적으로 몇 개 사단을 국경지역에 배치한 일은 폴란드가 가진 은밀한 대국의 꿈이 그 배경이었다. 엄격하게 사태를 바라보면 그는 독일의 요구를 불공평하다고 생각지도 않았던 것 같다. 폴란드에게 단치히는 오직 상징적인 의미만을 가진다는 점을 그는 시인하였다. 그러나 어떠한 양보도 모든 폴란드 정책의 가장 깊은 내면의 의도를 완전히 뒤집는 것과 마찬가지 작용을 할 것이다." - 히틀러 평전, 요아힘 페스트, 안인희 역
비버브룩 卿 영국 언론재벌
“지금 영국에는 히틀러의 집권 후 독일에서 건너온 유태인 2만명이 살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영국이 독일과 평화적인 합의에 이르는 일에 훼방을 놓고 있습니다. 유태인은 이 나라 언론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은 지금 우리를 전쟁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 Beaverbrook papers, House of Lords record office
Robert Ley 독일 노동연맹 총수
“만약 유태인이 싸움을 원한다면 우리도 반대하지 않는다. 우리는 오랫동안 이 싸움을 고대해 왔다.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유태인이 설 자리는 없다. 유태인이든 우리든, 하나는 사라져야 한다.” - Wir oder die Juden, Die Hoheitstrager, May 3, 1939
리츠-스미글리 폴란드 육군원수
“폴란드는 독일과의 전쟁을 원하며 독일이 원치않더라도 독일은 이 전쟁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 The Daily Mail, August 6, 1939
ZENTRALVERLAG DER NSDAP
“이러한 상황들의 전개와 함께 폴란드 문제로 인한 긴장은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총통은 1월 5일(1939년) Obersalzberg에서 베크 폴란드 외무장관을 영접했다.
그는 단치히가 독일 도시임을 주지시키는 한편 독일-폴란드 관계의 개선을 위한 제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폴란드는 이러한 제안들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런던과 파리가 이날의 만남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보면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 보호령이 설치된 직후인 3월 31일, 증오로 가득찬 런던의 일부 일간지들은 독일군대가 폴란드 국경에 집결하고 있다는 거짓말을 보도했다. 체임벌린은 하원에서 영국-폴란드 관계와 관련하여 영국의 폴란드국경 보장을 선언했다.
그러므로 런던의 전쟁광 써클은 바르샤바 정부에 그들의 의지대로 도발을 감행할 수 있는 자유행동권을 선사했다. 런던의 플루토크랫(Plutocrat, 金權정치가)들이 비밀리에 노렸던 것은 그들이 오랫동안 고대해왔던 제국에 대한 군사적 제재(制裁)의 빌미를 제공해줄 독일과 폴란드의 무력충돌이었다. 바르샤바 정부는 이를 이해했다.
4월부터 폴란드 국경내에 살고 있는 독일거류민들에 대한 테러와 가혹행위들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4월 13일에는 단치히 국경부근에서 다수의 독일인들이 폭도들에게 살해되는 일이 발생했으며 이러한 테러행위는 폴란드의 다른 지역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공교롭게도 이러한 사건들은 독일이 폴란드와의 관계개선을 위한 노력을 시작한 이 후에 더욱 늘어났다. 독일 영사관은 셀 수도 없이 일어나는 이러한 사건들을 매일같이 베를린에 보고했다. 5월 8일에는 300명의 독일주민들이 뉴토미셸 郡에서 강제 추방되었다.
5월 9일에는 브롬베르크 소재 독일극장이 강제 패쇄되었으며 5월 15일에는 로드시에서 두 명의 독일주민이, 5월21일에는 칼트호프에서 단치히 시민 한 명이 폴란드인들에게 살해당했다. 이러한 추세는 5월15일 폴란드의 카스프리즈키 국방장관이 비밀회담을 위해 파리를 방문했다는 사실과, 5월 8일경부터 폴란드의 서부국경이 Beuthen, Oppeln, Breslau, Stettin, 그리고 Kolberg를 넘어 독일영토로 확대된 것으로 표시된 지도들이 폴란드 도시들에 배포되었다는 사실을 보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단치히를 둘러싼 긴장은 폴란드 정부의 압박 하에 더욱 고조되었다.
6월15일 독일대사는 총통에 대한 모욕적인 언사와 비방에 대한 공식적인 항의서한을 폴란드 정부에 전달했다. 6월과 7월을 통해 국경침범을 비롯하여 反독일주민 테러사건들이 계속 증가했다. 8월4일 폴란드 정부는 단치히에 상주하는 폴란드 세관원들과 관련된, 확인되지 않은 낭설에 근거하여 그들의 요구에 불응할시 도시 외부로부터의 식료품에 의존하는 단치히의 국경을 봉쇄하겠다는 내용의 무례하며 도발적인 최후통첩을 단치히 시정부에 전달했다. 8월7일 단치히는 이 최후통첩을 거부했고 독일정부는 8월 9일 이와 관련하여 폴란드 정부에 우려를 표시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보호막 아래서 오만해진게 분명한 폴란드 정부는 8월 10일 불성실한 답변서를 보내왔다. 이에 8월 18일 단치히 방어를 위해 친위대 방위군에 동원령이 발동되었고 일은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영국의 돈 많은 전쟁광들은 이 모든 일로부터 손을 씻고 무죄를 주장하여 그들이 원했던 전쟁에 대한 도덕적 알리바이를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눈이 먼 사람조차도 영국이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세관 문제를 둘러싼 단치히 市와 폴란드의 협상은 폴란드 정부의 무리한 요구탓으로 8월 24일 아무런 성과없이 결렬되었다.
그러자 폴란드는 예비병력에 대한 확대동원령을 발동하고 국경에 대한 도발을 가중시켰다. 8월 25일 폴란드군은 국제영공을 비행하고 있는, 제국의 각료가 탑승한 비행기에 발포했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에 대한 영국과 프랑스의 반응은 누구도 오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8월 25일 영국은 폴란드 보호동맹에 서명했고 바로 다음날 150만명의 폴란드인들이 징집되었다. 8월27일 제국의회 연설에서 총통은 양국의 평화를 보장하는 선에서 단치히, 단치히 통로, 그리고 폴란드와의 관계개선이라는 세 가지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고 천명했다.
이로인해 8월28부터 31일까지 베를린, 로마, 런던, 파리에서는 분주한 외교적 움직임이 있었다. 이에 더하여 총통은 폴란드 정부로부터 특사의 파견을 기대한다고 발표함으로서 다시 한번 평화적 해법을 시도했다. 그러나 폴란드는 이에 대한 응답으로 8월 30일 총동원령을 선포했다. 8월 31일 폴란드 국영라디오는 양국간의 문제에 대한 독일의 해결책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선언했다. 독일 영사관은 8월 25일부터 31일까지 55건의 독일주민들에 대한 테러행위를 보고했으며 폴란드군은 8월 31일 중대한 국경도발 행위를 감행했다. 이에 맞서 독일은 9월 1일 폴란드와 개전했다. 이날 총통은 제국의회 연설에서 힘에는 힘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같은날 또한 단치히는 제국과의 연합을 선포했다." (Jahreswechsel 1939/40. Sylvesteransprache an das deutsche Volk, Die Zeit ohne Beispiel, 1941)
1939년 9월 독일은 베르사이유 조약에 의해 상실한 舊영토를 둘러싼 분쟁 끝에 폴란드를 침공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의 국경을 보호하고 나치독일로부터 유럽의 평화를 수호한다는 명분 하에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과 동시에 동부로부터 폴란드를 침공한 소련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고, 1939년 11월 소련이 다시 핀란드를 침공했을 때에도 양국은 무반응으로 일관했다.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를 철회해달라는 히틀러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연합국은 독일의 서부국경에 병력을 집결시켰고 1940년 봄 독일군이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통해 英-佛 연합군에 선제공격을 가하여 영국군의 덩케르크 탈출을 끝으로 두 주만에 프랑스를 함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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