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uenther von Blumentritt 독일 육군소장
영국군과 프랑스 잔여 병력을 생포할 수 있었으나 이들 병력의 영국 탈출을 허락했던 히틀러의 덩케르크 정지명령에 대해 영국의 저명한 역사가 Liddell Hart는 독일군 장성 블루멘트리트의 다음과 같은 증언을 인용했다: “영국군의 궤멸이 눈앞에 있는 시점에서 총통은 대영제국의 위대함을 칭송하는 말로 우리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는 대영제국의 존재는 세계질서를 위해 필수적이며 영국이 이 세계에 가져온 문명에 대해 얘기했다. 그는 어깨를 움츠리며 대영제국은 대게 잔혹한 군사적 정복의 결과로 만들어졌으나 인류의 역사 속에서 그러한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영제국을 카톨릭 교회와 비교하며 세계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양자의 존재는 꼭 필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가 영국에게서 바라는 것은 오직 영국이 대륙에서의 독일의 입장을 인정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이 독일의 舊식민지들을 반환해주면 좋은 일이나 그렇지 않다해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으며, 만약 영국이 지구 어디서 곤경에 처해있다면 독일이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도울 것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 Basil Liddell Hart, The Other Side of the Hill, 1948
30년대 내내 스포트라이트에서 밀려나 있었던 처칠은 1940년 5월 전시수상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처칠과 버나드 바룩과의 관계에 대해 영국 역사가 윌리엄 맨체스터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 이는 윈스턴이 바룩에게 지녔던 큰 호감을 부분적으로 설명해준다. 바룩은 미국인이었고 또한 유태인이었으며 강대한 독일을 원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공유했다.
또한 처칠은 바룩이 베푼 각별하면서도 매우 계산적인 호의에 큰 빛을 진 일이 있었다. 윈스턴은 30년대 초의 대공황과 월가의 주가폭락으로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만약 바룩이 아니었다면 그는 경제적으로 최악의 상황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평생을 빛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보내야 할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그는 도박에 있어 타고난 승리자라기보다는 타고난 호구였다. 뉴욕을 방문할 때마다 바룩의 5번가 맨션에 머물렀던 윈스턴은 대공황이 닥치기 몇 년전 바룩의 조언에 따라 주식에 손을 대게 되었다. 그가 리비에라 도박장의 룰렛바퀴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주가의 등락 앞에서 노심초사하며 값이 떨어질때마다 그는 점점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들었다.
결국 몬테카를로에서처럼 그는 월가에서도 실패했다. 최악의 상황에 이르러 바룩과 대면했을 때 그는 울고 있었다. 그는 자신은 이제 빈털터리가 되었으며 차트웰의 저택은 물론, 그가 가진 모든 재산을 처분해도 빛을 갚지 못할 것이라고 울먹였다. 그는 빛을 청산하기 위해서는 정계를 떠나 사업을 시작해야 할 지경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거물 투자은행가는 그가 정계를 떠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윈스턴이 아무런 손해도 입지 않을 것이라고 다감하게 위로해주었다. 바룩은 처칠이 파는 주식은 무조건 사들이고, 그가 사려는 주식은 무조건 팔라는 지시를 그의 비서들에게 남겼다. 결국 윈스턴은 대공황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손실도 입지 않은채 월가에서 고스란히 본전을 건져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이는 바룩이 그의 수수료까지 대신 지불해주었기 때문이었다.” (William Manchester, The Last Lion: Winston Spencer Churchill; Alone 1932-1940, 1988)
Lothrop Stoddard 미국 언론인
“독일인들은 이 전쟁을 혐오한다. 이런 인상은 제 3제국에 머무는 동안 날이 갈수록 깊어졌다. 어디를 가든 사람들의 얘기는 한결 같았다. 전쟁에 대하여 내가 접한 베를린 시민들의 생각은 라인란트에 이르는 중서부 독일과 북해연안의 도시들, 그리고 남쪽으로는 비엔나를 여행하면서 만났던 사람들에게서 들었던 것들과 다르지 않았다. 이러한 생각은 나치당원이든 아니든 상관이 없었다. 이 전쟁을 혐오하는 감정은 정치적 신념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어느날 갑자기 그들 자신이 서방국가들과의, 그들의 운명을 결정지을 싸움에 휘말려 있음을 발견한 독일인들이 느낀 감정은 대게 두가지였다. 하나는 이 전쟁에 대한 철저한 혐오감과 이 전쟁이 전혀 필요가 없는, 매우 어리석은 전쟁이라는 생각이었고, 두 번째는 이 전쟁이 초래할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내가 만났던 각계각층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 전쟁을 비극적인 실책으로 낙인을 찍었고 일부는 그들 정부의 섣부른 대응을 비난하기도 했다. 그들은 좀더 능숙한 외교로 전쟁을 피할 수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독일이 성취하려는 궁극적인 목표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다. 비록 그 방법에는 동의하지 않았다고 해도 말이다. 히틀러도 그에게 열려 있었던 유일한 길을 선택한 것이며, 결국에는 독일이 승리할 것이라는 믿음을 고백했던 열렬한 나치당원들조차도 다른 사람들에게서 느낄 수 있었던 이 전쟁에 대한 침울한 감정을 드러냈다. 그들은 이렇게 설명했다,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한창 새 나라를 만드는 일로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전쟁 때문에 우리가 구상했던 계획들을 모두 옆으로 밀쳐두고 저 빌어먹을 영국놈들과 싸우러 가게 되었으니 그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이런 면에서, 독일인들의 지금 심정은 이제 막 포커게임에서 큰 돈을 따기 시작했는데 누군가가 들어와 테이블을 겆어차버리는 일을 당한 사람의 그것과 견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일상에서 겪어야 하는 가장 큰 어려움은 그들의 권리를 지속적으로 제한하는 법적장치들과 차별에서 생겨나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상점과 레스토랑의 출입구에는 ‘유대인 사절’, 혹은 ‘유대인 입장불가’라고 적힌 표지판들이 붙어있었다. 이러한 유대인 금지조치는 독일 전역에서 시행되고 있다. 따라서 유대인들에게 쇼핑을 하거나 집 밖에서 외식을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도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의 직능조합에 등록을 하면 일정시간 동안 이들 상점이나 레스토랑을 이용할 수 있다. 유대인들에게는 독일인들에게 지급되는 것과 똑같은 식료품 구매권이 지급되지만 내가 베를린에 머물고 있는 동안에는 유대인들에게 의류품 구매권은 지급되지 않았다... 보통 독일인들은 억압받는 이 소수민족에 대해 외국인과 얘기를 나누는 것이 내키지 않는 표정들이었다. 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대다수의 독일인들은 유대인에 대한 가혹행위나 폭력에 반대한다. 그러나 그런 행동을 강한 어조로 비판하는 것만큼 그들은 유태인들이 그들의 나라를 떠나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이 필자가 받은 인상이었다.” (Lothrop Stoddard, Into the Darkness, 1939)
찰스 린드버그 미국 비행사
“우리는 라디오, 영화, 신문 등, 우리 나라의 대중매체들에 유태인들이 끼치는 영향에 대해 우려를 금할 수가 없다. 그들의 그러한 영향력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 풀턴 루이스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한 유대계 광고회사는 뮤츄얼 방송국이 독일에 호의적인 어떤 프로그램을 방송할 경우 모든 광고를 철회하겠다고 위협했다 한다. 그들의 압력에 결국 그 프로그램은 전파를 타지 못했다.” - August 23, 1939
"유럽의 전쟁에 참전해야 한다는 언론의 선동이 고조되고 있다. 물론 국민들은 반대한다. 그러나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이려는 FDR 정부의 의도는 날이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다. 이 나라에 있는 대부분의 유태인 이익단체들은 막후에서 미국의 참전을 부추기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 나라 언론과 라디오, 대부분의 영화사들을 소유하고 있다.” - May 1, 1941, The Wartime Journals
(독일 외무상 리벤트로프, 일본대사 쿠루수, 히틀러)
진주만
"진주만을 이해하기 위한 첫번째 스텝은 1941년 프랭클린 D. 루즈벨트 행정부는 미국을 전쟁이 끌어들이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당시 일본이 중국을 침공 중이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미국이 미국과의 전쟁을 원치 않았던 일본과의 전쟁을 위해 일본을 상대로 다양한 도발적 조치들을 취했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었다. 루즈벨트 정부는 미국내 일본의 자산을 동결했고 파나마 운하 사용을 금지했다. 또한 일본에 대한 점증적인 무역봉쇄는 결국 영국과의 공조하에 무제한적 봉쇄조치로 이어졌다. 이로인해 일본은 중국과의 전쟁을 계속하는데 필요한 석유 및 기타 전략자원의 수급이 불가능해졌다. 미국정부는 또한 수차례에 걸쳐 도쿄를 상대로 미국의 군사적 대응을 암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진주만 공습 11일 전인 11월26일 미국은 일본에 최후통첩을 보내기에 이른다. 최후통첩에서 미국은 무역봉쇄 해제에 대한 조건으로, 중국, 인도차이나로부터 일본군이 완전히 철수할 것과 독일 이탈리아와의 추축동맹에서 탈퇴할 것을 요구했다. 미국 前해군성장관 보좌관을 지냈던 프랭크 비티는 후일 이렇게 섰다, “1941년 12월7일(진주만 공습일) 전까지 미국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일본을 코너에 몰아붙이고 있었다는 것은 누가봐도 명백한 사실이었다... 우리가 요구한, 예를 들어 일본군의 중국 철수는 일본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이라는 것을 우리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우리는 그들이 그 요구를 수용하지 않기를 바랬다.” 전시 영국 생산성장관 올리버 리틀튼은 1944년 좀더 솔직하게 시인했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은 미국이 취한 도발적인 조치들에 연유한다. 미국이 어쩔 수 없이 2차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는 얘기는 어설픈 코미디다.”... 많은 사람들은 FDR이 일본과의 전쟁을 원했던 이유는 일본이라는 “뒷문”을 통해 미국의 지배적인 반전여론을 무력화시킨뒤 더욱 중요한 유럽전선에 미국을 참전시키기 위함이었다고 증언한다. 루즈벨트의 내무장관(Secretary of the Interior) 해롤드 아이크스의 1941일 10월 발언은 그와같은 의도를 입증한다, “오래전부터 나는 유럽의 전쟁에 미국을 참전시키는 최선의 방법은 일본을 거치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실로 미국의 대통령은 독일의 군사적대응을 촉발시키기 위한 도발행위들도 서슴치 않았다. 진주만공습으로 인한 독일과의 개전 전부터 루즈벨트 행정부는 미국 내 독일의 자산을 동결했으며 미군을 동원해 아이슬란드를 점령했다. 또한 미국의 중립법(Neutrality Act)을 위반해가면서 까지 랜드리스 법안을 통과시켜 50척의 구축함등, 막대한 전쟁물자를 영국에 지원했다. 또한 루즈벨트는 미국인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 수중폭뢰로 독일의 잠수함을 공격할 것을 비밀리에 지시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독일은 철저하게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한마디로 독일은 미끼를 물지 않았다. 독일은 미국의 참전으로 1차대전에서 패한 뼈아픈 경험을 기억하고 있었고 또한 이를 되풀이 할 생각이 없었다. 그럼에도 FDR은 만약 일본과 미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면 3국동맹의 의무사항으로 인해 독일이 미국에 선전포고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수만명의 일본계 미국인들이 전쟁기간 동안 네바다의 강제수용소에서 지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진주만공습이 일어나기 이미 수개월 전부터 미국의 인구조사국(Census Bureau)이 루즈벨트의 지시 하에 서부지역에 거주하는 일본계 미국인들의 명단과 주소를 확보해놓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 운명의 날이 오기 전 대통령은 이미 천만명의 병력동원 방안을 강구하고 있었다...
(타일러 켄트)
“루즈벨트의 의도는 1940년 거의 국민들에게 공개될 뻔 하기도 했다. 런던의 미국대사관에서 암호해독요원으로 근무했던 타일러 켄트(Tyler Kent)는 루즈벨트와 처칠 사이에 오간 비밀교신문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문서들에는, 미국은 결코 이번 전쟁에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대국민 선전과는 달리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이려는 루즈벨트의 의도가 명백하게 드러나 있었다. 대통령의 거짓말에 속고있는 국민들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이들 문서의 일부를 대사관 밖으로 유출한 켄트는 그러나 곧 체포되고 말았다. 워싱턴의 동의 하에 켄트는 영국의 비공개 법정에 회부되었고 전쟁이 끝날 때 까지 영국의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정당한 사유없이 전쟁에 돌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뚜렷한 명분도 없이 그들의 아들들을 외국의 전쟁터에 보낼 생각이 없었던 보통 미국인들 사이에서 반전여론은 압도적인 것이었다. 1941년 10월16일, 대통령이 주재한 회의에 참석했던 국방장관 헨리 스팀슨은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지금 섬세한 기술을 요하는 외교적 펜싱게임을 진행중이다. 우리의 목적은 이러한 게임을 통해 일본으로 하여금 먼저 惡手를 두도록 몰아가는 것이다.” 일본에 대한 최후통첩이 駐美 일본대사에 전달되기 하루 전인 11월 25일 대통령은 스팀슨을 비롯한 각료들과 회의를 가졌다. 스팀슨은 이날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이날 논의된 주제는 어떻게 일본을, 그들이 우리에게 먼저 총을 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고가느냐에 관한 것이었다.”... 알려진바와 같이 미국과 영국은 이미 1941년 초반부터 각각 독일과 일본의 암호코드에 대한 해독시스템인 ‘Enigma'와 ’Magic'을 가동중이었다. 따라서 1941년 12월 7일 아침, 진주만 상공 위에 날아든 일본해군의 폭격기들이 미국의 항공모함들을 비롯한 신형 전함들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죽느냐 사느냐... 다이니뽄제국의 절망적 도박)
(일본은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일시에 무력화시킴으로서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려했다)
(침몰하는 1차대전 드레드넛형 고물전함 아리조나호)
AMERICAN HEBREW 미국 유대계 유력지
“맥아더의 지휘 하에 바탄이나 코레히도르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에서 수많은 미국인 장병과 필리핀인들이 죽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독일에서 히틀러의 반유대주의 운동이 성공했기 때문이다.” - July 24, 1942
CENTRAL BLAD VOOR ISRAELITEN 네덜란드 유대계 일간지
“물론 팔레스타인을 포함하여, 아메리카 대륙과 유럽, 영국, 프랑스, 러시아, 북아프리카, 남아프리카에 살고 있는 우리 유태인은 최후의 그날까지 對 독일 절멸 전쟁을 전개해나갈 것이다.” - September 13, 1939
Schalom Asch 유태인 작가 (佛)
“비록 유태인들이 참호에서 육체적으로 여러분과 함께 싸우고 있지는 않지만 정신적으로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 전쟁은 우리의 전쟁이며 여러분은 우리와 함께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 Les Nouvelles Litterairres, February 10, 1940
Rabbi Felix Mendlesohn 유대교 지도자 (美)
“2차세계대전은 유대교의 근본을 수호하기 위한 전쟁이다.” - Chicago Sentinel, October 8, 1942
카임 바이츠만 초대 이스라엘 대통령
“우리는 이 전쟁이 우리의 전쟁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으며 이 전쟁이 유대민족의 해방을 위해 치러지고 있는 것임을 고백함에 있어 아무런 두려움도 없다... 모든 나라를 합친 것 보다 더 강력한 전선을 형성하고 있는 민족은 우리 유태인이다. 우리는 단지 이 전쟁에 우리의 경제력만을 지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의 뛰어난 프로파간다 능력으로 이 전쟁을 치르는데 필요한 도덕적인 명분을 제공하는데 그치는 것도 아니다. 승리의 관건은 우리가 얼마나 적을 그들의 내부로부터 무력화 시킬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예를 들면 레지스탕스 운동 등을 통해서 말이다. 이런 면에 있어 우리야말로 적군의 요새안에 들어가있는 트로이의 목마라고 할 수 있다. 유럽에 있는 수십만의 우리 유태인 동포들은 우리의 적을 멸하는데 있어 1차적인 몫을 담당할 요소이다. 우리의 전선은 바로 그곳에 있으며 그들의 활약은 최종적 승리에 대한 가장 값진 기여가 될 것이다.” (Speech on December 3, 1942, in New York City)
(Henry Morgenthau, Jr)
헨리 모겐소 2세 유태인 미국 재무장관
“30년전쟁이 끝난 뒤 그러했듯이 독일을 다시 한번 허허벌판 황무지로 만들어 버려야 한다.” (The Morgenthau Diary)
디어도어 카우프만 유태인 작가 (美)
“그들이 반나치주의자건, 공산주의자건, 유태인에 대한 애정을 가진 자이건 간에 모든 독일인은 살려둘 가치가 없는 인간들이다. 그러므로 전쟁이 끝나면 2만명의 의사를 동원하여 하루에 25명씩 독일인들의 생식능력을 제거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3개월 이내로 독일에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남지 않게 될 것이며 독일민족은 60년 안으로 완전히 멸종될 것이다.” (Germany Must Perish, 1942)
조셉 괴벨스
"우리를 절멸하려는 연합국들 배후에 국제유대인이 있다는 진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 전쟁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유대인은 흑암의 권세로 그들에게 항거하는 국가들을 파괴하고 전 세계를 기만하여 인류를 어둠 속에 감금하려 한다. 말하자면 유대인은 계층과 이데올로기의 차이, 그리고 각국의 국익과는 상관없이 모든 연합국들을 한데 묶어두고 있는 접착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동일한 유대적 뿌리를 지니고 있으며 한 나무의 다른 두 가지처럼 결국에는 똑같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국제유대인은 많은 국가들과 민족을 그들에게 종속시켜 두기 위해 이 두 가
(총 4편입니다.) (본 내용은 거짓이 없으며, 보다 사실적임을 앞서 말씀드립니다.)
(2편, 총 4부작)
(아더 T 해리스)
그는 제 2차세계대전(1939~1945년) 당시 1942년, 영국 공군 총사령관으로 취임했다.
당시 폭격기의 공습방식은 눈에 잘 안 띄는 야간공습을 감행해 군수물자공장 등을 파괴하는
목적이었고, 민간인 밀집지역은 최대한 피하는 그나마 '인도적인 폭격'이었다.
하지만 그런 골라폭격은 영국공군 역시 만만치 않은 피해를 입었다.
(하늘아래에서 폭격기를 향해 반격해오는 고사포. 영국폭격기의 피해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1942년, 해리스가 취임한 이후 영국의 폭격 양상은 급변했다.
그가 말하기를..
"적국의 민간인도 적은 적이다. 군인이건 민간인이건,
그런 적을 위해 눈물을 흘릴 필요는 없다."
그의 작전의 근본이란,
"최단시간내로 최대량의 폭격기를 동원해,
단시간만에 최대면적을 쥐새/끼하나 남기지말고 모조리 쓸어버린다.

그렇다. 그는 전쟁의 승리보다도 독일의 멸망을 원했고, 독일을 그 누구보다도 증오했고,
그런 독일의 아이와 민간인들을 모조리 멸하는게 그가 가장 희락을 느끼는 일이었다.
그는 독일 민간인들의 대학살을 보고받고도 미동하나 없었다는 냉혈안이라고 전해진다.
(폭탄비를 뿌리는 폭격기)
전쟁사의 '융단폭격'이라는 새로운 장을 열었고, 이 작전이 바로
'밀레니엄 작전'이라고도 불리운다. 이 작전의 목적은 사실 군수물자공장 지대 궤멸로
보이는듯 하지만, 전 도시를 폐허로 만들어 적의 사기를 꺾어버린다는 목적이었다.
그의 첫 공습은 1942년,5월 31일, '퀼른 대공습' 으로 시작되었다.
동원한 폭격기의 수는 1080대 !!
한마디로 하늘을 가리는 폭격기들이 먹구름같이
독일도시로 다가오는 모습이라고도 할수 있다.
그들이 뿌려대는 폭탄은 한마디로 '폭탄 비'로밖에 표현이 안된다.
그런 그들의 무시무시한 공습으로 한 도시가 20분만에 궤멸이 되었고,
민간인 사망은 6만에 달한다.
그에 비해 영국공군의 폭격기 격추 수는 40~60대를 밑돌았을정도로
한마디로 대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전)
(후)
그 다음으론 '함부르크 대공습'이 개시되었다.
동원된 폭격기의 수는 1000대 가량.
삽시간만에 전 도시를 폐허로 만들고,
이때 함부르크를 알아볼수있는 건물 모두가 없어졌다고 전해지며,
5만에 달하는 민간인이 사망했다


가장 크게 터진 것은 바로 고모라 작전으로 명명되어 1943년 5월 27일, "폭격대 사령관 명령문 173번 "이 공포되면서 7월 24일부터 8월 3일까지 3천 여 기의 폭격기들이 9천 톤 가량의 폭탄과 소이탄 '쿠키'(거대한 시설물 파괴에 쓰이는 고폭탄) 등으로 인해 도시는 화염폭풍에 휩싸였다.
함부르크에 무시무시한 대기류가 몰아쳐 도시의 온도는 무려 섭씨 800도까지 올랐고, 최대 풍속 시속 240km 의 엄청난 태풍이 불어닥쳤다.
대재앙이 끝난 뒤, 시민 5만 여명이 사망했고, 25만 가구, 백만명 이상의 함부르크 시민들이 집을 잃었다.
1945년 2월 14일.
직전 나치 독일의 마지막 발악인 발지대전투에서 연합군이 승리하자, 더 이상 독일에게는 저항할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이미 독일의 패배가 기정사실이 된 시점에서, 영국 공군 원수 해리스는 독일의 항복을 앞당기기 위해서 역사적인 대학살극을 지시한다.
이가 드레스텐 폭격이다.
214대의 제1진이 46만개의 폭탄을 드레스덴 상공에 흩날렸으며, 다음날 새벽 3시 제2진의 공습에서는
1진의 절반가량인 28만여개의 폭탄이 투하됐다.
그의 마지막 공습으로 꼽히는 '드레스덴 대공습' 은
한마디로 '지옥' 그 자체였다.
드레스덴은 사실 군수물자공장과도 관계가 없었고, 독일 민간인들 역시, 연합군이
드레스덴만은 폭격하지 않으리라 생각했고, 엄청난 피난민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고,
해리스는 그런점을 노려 드레스덴를 끔찍한 지옥의 무대로 만들어버렸다.
1945년, 2월 14일,미국과 합동작전을 개시, 무려 3000대 에 육박하는
대규모 폭격기들을 동원하여, 1시간만에 전 도시를 초토화는 물론,
무려 4만에 달하는 사람들을 몰살시켰다. 하지만, 이 숫자는 확인된 시신의 수지만,
시신 자체가 '소각'되어 행방불명된 수만 따지면 10만명을 초월한다.
(드레스덴 폭격의 희생자)
당시 그때의 13세 소녀의 '지옥'의 증언에 따르자면..
--엄마는 나에게 젖은 담요를 덮어주고는 내게 키스를 하시고 "어서 달려라!" 라고 소리쳤다.
그 후 엄마를 보지는 못했고, 내가 밖을 나섰을땐 온 도시가 불바다였다.
내가 발을 디디는 순간, 나는 순간 발을 띠어야겠다고 느꼈다. 폭격은 도로 자체를 녹였다.
주변을 보니 녹은 도로에 다리가 붙어 떨어지지않는다며 아우성인 사람들이 천지였고,
몇몇 사람은 그 상태에서 불이 붙어 죽어갔다.--
(녹아버린 시신)
![]() ![]() 드레스덴 폭격에 의해 죽은 민간인 시체들 |
한아이와 그의 부모가 서로 껴안은채 죽어간 모습..
길거리에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시체들
당시 도시는 무려 화씨 1800도에 치닫닫았고, 하늘에선 여전히 폭격비가 쏟아져내렸다.
영국 폭격기 파일럿들은 하늘 아래 불바다가 되고있는 '드레스덴'을 보며
전송기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불쌍한 개자식들..잘가라"

드레스덴 폭격후 완전히 파괴된 성모 마리아 대성당.
드레스덴 폭격전
드레스덴 폭격후
전화기로 드레스덴 폭격 명령을 내리는 아더 T 해리스
나치 독일이 V2까지 동원해가며 5년간 영국본토에 공격을 가한 결과 발생한 영국 민간인의 희생자 수가 51,909명인 것과 비교했을때,
수시간만에 20만이라는 민간인이 죽은것은 어떤 변명의 여지조차 없다.
15년전.. 영국에서는 아더 T 해리스의 동상을 세우자고 영국 시민들은 주장하였다..
그 때 한 독일인이 영국인들에게 말한 것이 생각난다.
울부짖으며.. "히틀러조차도, 한시간에 십만명을 죽이지는 못했다.."
독일인들이 이런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1992년 영국의 여왕에 의해서 동상이 세워져 지금까지 학살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드레스덴 폭격으로 인해 생겨난 것..
1. 아더 T 해리스의 폭격으로 블럭버스터(blockbuster)란 말이 생겨나게 된다.
아더 해리스의 명령으로 폭격을 했을 때 사용했던 폭탄의 이름이 바로 블럭버스터이다.
블럭버스터란 흥행에서 대 성공을 한 영화를 가르키는 말이다.. 블럭이란 말은 대도시에서 사방 도로에 의해 경계 지어지는 한 구역을 단위로 부를때 쓰는 말인데 이 전체 구역(block)을 날려 버릴(bust) 정도로 큰 폭탄이 원래 blockbuster 인데 이 정도로 대단한 파워를 가진 영화란 뜻..
2.
드레스덴 폭격에서 이름을 따온 드레스덴 돌스라는 그룹
아더 T 해리스.. 그의 작전으로 죽은 독일 민간인의 수만
50만명에 이른다.
하지만 그는 1953년, 독일이 항복한 후, 연합군 군사재판에서 처벌을 받지않았다. 결국 전쟁은
-이긴 자가 정의다-
또한
-선으로 가장한 악의 농락이다-
그가 말하기를.. "나는 사람을 죽이라고 이 자리에 얹혀졌다."
거의 6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드레스덴은 복구 중이고,
완전히 복구 하려면 앞으로도 수십년이 있어야한다고 한다..
(아직 복구되지 않은 건물 중 하나)
전세계 방문객을 대상으로 무분별한 폭격이 남긴 상처에 대한 끔찍한 다큐멘터리를 지하 교회에서 상영을 하고 있다.
무엇을 위해 도시 전부를 녹여버렸는가에 대해서 [폭격의 역사]를 쓴 스벤 린드크비스트는 '이 폭격은 상징적 의미 이외에 전략적 목표는 실존하지 않았다고 한다. 서부 전선에서 이미 독일군은 무너졌고, 연합군이 밝힌바대로 그 독일군의 동쪽으로의 진군을 막고자 했더라면, 엘베강 위의 철교를 무너뜨려야 했을텐데 부셔야할 철교는 고스란히 놔두었다고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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