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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2월에 예전 홈페이지로 글을 퍼오던 당시에도 오래된 글이라고 언급한 기억이 있지만...
이런 일들은 여전히 멀지 않은 곳에서 발생하고 있다.
새해, 그리고 새 생명.
한 번쯤 생각해볼 만한 화두들이 아닐까.
재미있는 글이라기엔 거리가 너무도 먼 글이다.
읽어보면 무척이나 당황스럽고 충격적인 상황이 많으니
읽어보면 무척이나 당황스럽고 충격적인 상황이 많으니
낙태와 관련하여 예상될만한 내용들이 글 조차도 거부스럽다면 살포시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해주심이.
* 낙태 살인 백서
<한 산부인과 간호사의 고백>
아무도 쓰지 않았던 낙태 살인 백서(殺人 白書)
임신 9개월 짜리 태아를 끄집어내 방치살인!
方愛心 산업장 간호사 - 라브리 제공
- 나의 죄값
1990년 11월. 나는 자궁 내에 생긴 혹 제거 수술을 받았다. 1980년, 출산을 하고 난 직후에 생긴 혹이었는데 그동안 수술을 하지 않아도 크게 무리가 없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미루어 왔다가 갑자기 커지는 바람에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막상 개복을 하고 보니 상태가 심해 난소를 떼내는 대수술을 해야 했다. 수술을 하고 나서 좀 쉬다가 출근을 했는데 3개월 후에 느닷없이 하혈이 시작됐다. 아무리 약을 먹고 주사를 맞아도 멈추지 않아 무려 40일 동안 하혈이 계속됐다. 10여 년 동안 앞만 보고 달려온 내 인생에 갑자가 브레이크가 걸린 것이다.
나는 치료를 하는 한편, 부지런히 성당에 기도하러 나갔다.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는데 자꾸만 억울하고 서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토록 열심히 살아왔건만, 이제는 수입도 안정되고 지위도 올라가고 모든 것이 잘되고 있는데 왜 내게 이런 시련이 닥친 것인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병을 낫게 해달라는 기도보다는 원망섞인 내 마음을 털어놓기 일쑤였다.
그 날도 예외없이 원망만 잔뜩 늘어놓은 후 성수(聖水) 옆을 지나는데 갑자기 이런 말이 들려왔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소린지 직접 귀로 들려온 소린지 잘 분간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내가 그 소리를 들었다는 점이다. “너의 죄값이지!” 나는 그 순간 깜짝 놀라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내 죄값이라니, 나는 열심히 산 일 밖에 없는데 어떻게 그게 내 죄값이야. 그 순간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적의에 찬 눈초리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친구들이나 주변 친지들에게 극성맞게도 열심히 산다는 얘기를 수도 없이 들었고 대부분의 경우 즐겁게 내게 주어진 일을 했다. 그 대부분에서 제외되는 시간은 바로 내 손으로 낙태를 할 때였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어째서 그게 잘못된 일인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아니 납득하기를 거부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가는 내가 견딜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스스로 위안을 했던 것이다.
- 낙태로부터의 탈출
“낙태를 원하는 사람이 있는 한 누군가는 반드시 그 일을 해야 하고, 내가 낙태를 주관하는 주체도 아니다. 조산사인 내가 간호사보다 월급을 많이 받는 이상 그 일을 하는 것은 마땅하고 또 어린 간호사에게 맡기는 게 안쓰러워 기혼인 내가 도맡아 처리한 일이 어째서 잘못됐다는 말인가. 나는 남보다 열심히 일한 거밖에는 없다.”
나는 늘 이런 생각으로 나를 달래왔던 것이다. 하지만 나의 죄값이라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그 길로 신부님께 달려갔다. “신부님, 저는 성당에 다니면서 너무도 큰 피해를 입었어요. 예전에는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는데 하느님을 믿고부터 원인 모를 죄의식에 시달려야 했단 말이에요. 나는 열심히 산 것밖에 없는데 정말 내가 죄를 지은 건가요? 전 정말 억울해요.”
나의 울부짖음을 신부님은 따스한 시선으로 감싸주셨다. 나는 실컷 울면서 신부님께 내 두려운 마음과 억울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신부님은 묵묵히 내 말을 다 들어주셨다. 실컷 울고 나자 속이 후련해지는 것 같았으나 역시 마음은 편치 못했다.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제서야 정말로 내 죄값이라는 생각이 나를 휩쌌다. 내가 의사를 도와 낙태시킨 수 많은 아이들, 그 아이들이 눈앞에 어른거려 걸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오래 전부터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을 말리시던 어머니는 하혈이 계속되자 결사적으로 말리셨다. “네가 이 죄 값을 어떻게 다 받으려고 계속 그 일을 하느냐. 생명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거늘, 어떻게 함부로 생명을 죽인단 말이냐. 낙태는 살인행위다. 그 일을 도와주는 너는 결국 살인을 도와준 것이다.”
어머니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남편은 나의 의사를 존중하겠다며 신중하게 생각해서 결정하라는 말만 했다.
수없이 그 일을 하면서도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을 내가 대신하고 있을 뿐이라고 나를 달랬건만 나는 결국 내가 살인을 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나는 당시 병원에서 안정된 위치에 올라 있었고 월급도 일반 간호사들보다 훨씬 많았지만 과감히 사표를 내기로 했다. 더 이상 생명이 있는 아이를 죽이는 일에 나를 투자할 수는 없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신부님께서는 용감한 결정을 하였다며 격려해 주셨고 누구보다도 어머니가 기뻐하셨다. 그래서 1991년 4월에 퇴직을 하게 되었다. 날마다 피비린내 나는 사태아를 처리하던 내가 드디어 그곳에서 빠져 나오게 된 것이다.
요즘 낙태반대운동연합이 결성되고 활발한 활동을 벌이자 새삼 여러 가지 생각에 잠기게 된다. 작년 말 전세계 낙태 건수가 5천5백만 건으로 추정되며 우리나라에만도 1백50만 건이나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한해 출산의 2.5배에 해당하는 수치이며 20초당 한 명, 매일 4천명 이상의 태아가 살해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이러한 참혹한 현실 앞에서 나는 내가 경험한 일을 많은 사람에게 들려줌으로써 낙태가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얼마나 큰 죄악인지 알리고 싶어 이 얘기를 시작한다.
나는 간호전문대학을 졸업하고 6년 간 보건소에서 일했다. 1978년부터 1984년까지 서울에 있는 두 곳의 보건소에 근무했는데 그때는 직접 낙태를 하기보다 낙태를 권하는 일을 주로 했다. 그때는 국가적으로 가족계획에 심혈을 기울이던 시절이다. 그래서 나는 유산수술을 하면 루프나 복강경 수술을 해준다고 사람들을 꼬드겨야 했다. “건수”라고 부르는 실적을 올리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낙태를 권하던 내가 실제로 낙태 현장으로 옮겨간 것은 85년의 일이었다. 오랜 보건소 생활이 지루해진 나는 병원으로 옮기기로 결심했다. 좀더 좋은 조건을 획득하기 위해 1년간 조산사(助産士) 트레이닝 과정을 거쳤다. 조산사는 따로 조산원을 개업할 수 있는 자격증이 주어진다. 하지만 의료보험이 실시되고 난 후에 많은 사람들이 병원을 선호하는 바람에 대부분의 조산원이 문을 닫은 상태였다. 아이를 직접 받을 수 있는 조산사들을 산부인과에서는 매우 환영한다. 자연히 일반 간호사보다 월급이 훨씬 많은 편이다.
- 조산사(助産士) 자격증을 획득하고
조산사 자격을 획득한 후 1985년에 경기도 내에 있는 종합병원에 들어가 1년 5개월간 근무했다. 그 다음에는 좀더 좋은 조건을 제시한 개인 병원으로 옮겨가 1년간 근무했으며 그후에 準종합병원으로 옮겨가 3년을 근무했다. 그러니까 내가 산부인과에서 근무한 기간은 총 5년 5개월에 이른다. 이 기간 동안 나는 수없이 많은 낙태를 접했다.
종합병원에서는 비교적 낙태율이 낮았음에도 매일 몇 건의 낙태가 이루어졌다. 개인병원에 있을 때 특히 낙태가 많았는데 하루에 20-30건씩 이루어졌다. 임신 초기단계는 수술로 간단히 끝나기 때문에 링거병을 들고 들어가 간단한 보조일만 하면 됐지만 6개월 이상된 경우에는 분만실로 옮겨지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본격적으로 내가 직접 낙태를 도와야 했다. 젊은 의사들의 경우 대강의 수술만 해놓고 뒷처리를 부탁하는 바람에 내가 주도적으로 일을 진행한 경우도 종종 있었다.
주로 16주 이전에는 흡입기를 이용해 비교적 간단히 수술 할 수 있다. 16-20주가 가장 위험하므로 산부인과 의사들은 그 기간의 낙태를 꺼리는 편이다. 20주가 넘으면 이미 아이가 많이 자란 상태이므로 흡착기로는 불가능해 유도분만을 해야한다.
분만을 위해서는 우선 인위적으로 자궁구가 열리게 해야 한다. 5개월일 때는 헤파린 종류인 라미나리아를 자궁 입구에 밀어 넣는다. 그러면 그게 점점 불어나면서 자궁이 열리게 한다. 몇 개 넣지 않아도 자궁이 열리는 경우가 있으나 17개까지 집어넣은 경우도 있었다.
자궁을 열리게 하는 방법으로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것이 바로 골프백을 집어넣는 일이다. 부지백이라고도 부르는데 풍선처럼 생긴 것을 돌돌말아 자궁 안에 밀어 넣은 다음 그 픙선안으로 셀라인(생리 식염수)을 집어넣는다. 갑자기 자궁 안에 풍선이 들어온 데다 점점 부풀어오르니 산모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불안해진 태아가 자궁 안을 마구 돌아다니게 된다. 자궁이 충분히 열리면 골프백을 힘껏 잡아당긴다. 그때 태아가 함께 딸려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태아가 딸려 나오지 않으면 손을 집어넣어 끄집어내야 한다. 손을 집어넣으면 태아가 필사적으로 도망다니기 때문에 그 일도 쉽지가 않다.
겨우 발을 찾아 손가락을 두 발에 걸면 생명의 위협을 직감한 가련한 태아는 마구 요동치면서 빠져나가려고 기를 쓴다. 하지만 다시 한 번 꽉 잡아 힘껏 잡아당길 수밖에 없다. 대개 6-7개월 된 태아들의 발은 어른 손가락 두 마디 만한데 그 발을 잡아당기는 기분을 한 마디로 표현하기란 참으로 힘든 일이다. 묘하다고 해야 할까.
- 머리를 으깨 끄집어내는 경우도
하지만 그 순간은 어떻게 해서든지 끄집어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별다른 기분을 느끼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막상 끄집어낸 태아를 보면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하게 마련이다. 아이들은 대부분 이물질이 들어오면 살기 위해 자궁 안을 필사적으로 헤집고 다니기 때문에 여기 저기 충격이 가해져 온몸이 시퍼렇게 멍들어 있다. 특히 다리 부분은 시커멓게 죽어있다.
그런 태아들을 보면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측은함이나 생명의 존엄성 따위보다는 몹시 기분이 나빠진다는 것이 올바른 표현일 것이다.
그 당시 우리 병원 분만실에는 미혼에다 나이 어린 간호사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사(死)태아 처리를 모든 꺼려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 애들을 다그치기 보다 차라리 내가 처리 하는게 낫지 하는 생각으로 끝까지 일 처리를 담당했다. 그렇게 꺼낸 태아들은 바로 한지에 싸서 냉동창고에 넣어두면 死태아 처리를 하는 인부들이 와서 거두어 간다.
골프백과 함께 딸려 나온 태아는 대부분 죽은 상태이기 때문에 처리하기가 쉽지만 손가락으로 끄집어내면 태아가 가끔 살아 있는 경우도 있다. 곧 죽을 것이 뻔한 그 태아들은 자신을 원하지 않는 세상에서 잠시 숨을 쉰다. 그러나 아무런 배려도 받지 못한 채 곧 숨이 끊어지고 死태아 처리반으로 직행하게 된다.
골프백으로도 처리가 안되고 손으로 끄집어낼 수도 없는 경우가 가끔 생긴다. 발이 아니라 머리 쪽이 자궁을 향하고 있으면 잡아당기기가 힘들기 때문에 링펄셉을 이용해 끄집어 내야한다. 하지만 그것도 안되면 자궁 안에서 분쇄를 해야 한다. 특히 머리를 분쇄하여 흡입기로 빨아 당긴다. 얼굴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된 아이를 끄집어 내놓고 보면 그 참혹함에 온몸이 부르르 떨린다.
나는 그런 수술이 있는 날 밤이면 꼭 기분나쁜 꿈을 꾸곤 했다. 크고 검은 드럼통 옆에 서서 끝없이 아이들을 그 속으로 던지는 꿈이었다. 그런 꿈을 꾸다가 벌떡 일어나 한밤중에 식은땀을 흘리곤 했다.
하지만 내가 분만실에 근무하는 조산사인 이상 그런 일을 피해갈 수는 없는지라 나는 대부분 무감각하게 그 일을 하려고 애썼다. 좀 더 신속히, 좀 더 깨끗이 일 처리를 하는 것으로 나를 달랬다. 그리고 남을 대신해 내가 희생한다는 생각으로 그 시절을 견뎠다.
6개월 이상이 되어 유도분만을 하는 경우 분만 때와 똑같은 고통을 느끼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제왕절개를 원하는 사람도 있다. 20대 후반인 임신 8개월의 이혼녀는 이제 아이가 필요 없게 되었으니 낙태를 해달라고 망설임없이 얘기했다. 그러면서 고통을 느끼기 싫으니 아예 제왕절개로 해달라는 것이다. 8개월인 경우 제왕절개를 하면 아이가 살아 있을 확률이 대부분이므로 마취를 심하게 하여 아이를 죽게 한 후 수술한다.
-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참히 살해되는 아이들
개인병원에 있을 때는 보통 이틀에 한 번은 이런 수술을 했다. 내가 5년 5개월 동안 산부인과에 근무하면서 평균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유도분만을 통한 낙태아 처리를 했으니 얼마나 많은 아이가 무참하게 죽어가는 일에 힘을 보탰는지 모르겠다.
보통 3개월 이전에 낙태를 하는 사람들은 그래도 性에 대한 지식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임신을 한 것을 속히 알아차리고 깨끗이 처리하기를 원한다. 6개월이 넘어서 유도 분만을 통해 낙태를 하려는 사람들은 세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이미 딸을 둔 부부가 다시 딸을 임신한 사실을 알고 난 후 낙태를 하는 경우이고 둘째는 청소년들이 임신한 사실을 몰랐다가 나중에 알게되어 뒤늦게 병원을 찾는 경우이다. 어느 날 딸들을 가진 부부가 만삭의 몸으로 병원을 찾아와 낙태수술을 해 달라고 말했다. 그들은 생활이 그다지 어려워 보이지도 않았고 또 공부를 많이 한 사람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딸은 둘이면 충분하니 낙태를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때 그 부인은 9개월이 가까워 오는 시점이어서 배가 남산만했다. 유도분만을 한 후 산모는 회복실로 옮겨갔다. 태어난 아기의 얼굴을 한번도 보지 않은 채. 그렇게 해서 태어나는 아기들은 대부분 여러 가지 충격에 의해서 죽게 마련이나 그 아기는 살아 있었다.
죽어야 할 아기이므로 태어나면 누구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간호사들이 약이나 주사기를 담는 스테인레스 통을 바트라고 부르는데 거기다 담아서 한쪽에다 밀어 놓는다. 그날 유도분만으로 태어난 아기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그대로 밀어 놓았다. 우유도 안주고 목욕도 시키지 않았다. 그렇게 방치하면 대부분의 아기들은 곧 죽게 마련이다. 그런데 다른 병실을 둘러보고 돌아와 보니 어린 간호사들이 난리가 났다. 세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기가 살아 있다는 것이다. 아주 드문 경우였다.
나는 곧바로 아기에게 달려가 보았다. 쌕쌕 숨소리를 내는 그 아기는 분명 살아 있었다. 순간 이 아기를 살려 입양기관에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기를 더운물에 씻기고 배꼽처리를 한 다음 인큐베이터에다 넣었다.
세 시간 동안 방치되어 있었던지라 아기의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래서 따듯한 물주머니를 만들어 발치와 몸 위에 올려놓았다. 그 아기가 살아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집으로 돌아왔는데 밤 10시쯤 전화가 왔다. 아기가 죽었다는 것이다.
그 아기를 처리하기가 무서운 간호사들이 내게 전화를 한 것이다. 부랴부랴 달려가 보니 아기는 가련하게도 죽어 있었다. 나는 그 아기를 정상적으로 태어났다가 죽은 아기와 마찬가지로 솜으로 여기저기 막고 잘 싸서 냉동창고에 넣어 주었다.
- 너무나 쉽게 아기를 죽이는 부모
간혹 살아서 나오는 아기들을 보면 주로 여자 아기들이다. 여자들의 생명력이 질기다더니 정말 그런 모양이다. 간혹 미숙아들이 태어나면 인큐베이터에다 넣는데 그럴 경우에도 여자아기들이 죽는 경우는 드물다. 간혹 살아서 나온 아기들 때문에 일을 치르고 나면 가슴은 아프지만 직업이 직업인지라 그에 대해 깊이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단지 그런 아기들을 처리하면서 다시 세상에 온다면 좋은 부모에게서 태어나 행복하게 살라고 마음속으로 빌어준다.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 기억들이 몇 개 있는데 난쟁이 아기가 태어났을 때의 일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남편은 아내에게 아기가 죽었다고 말한 후 우리에게 아기를 없애달라고 하였다. 당시만 해도 나는 입양기관이 어디 있는지 잘 몰랐고 내가 주도적으로 일 처리를 하는 입장이 아닌지라 의사의 지시에 그대로 따르는 편이었다. 갓 태어난 난쟁이 아기는 한 모금의 우유도 먹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부모가 원하지 않는 아기이므로 병원에서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트에 넣어 그냥 두면 그 아기는 그대로 죽어버리고 만다. 입양기관에서도 기형아들은 데려 가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런 아기들을 입양시키기도 사실은 힘든 일이었다.
또 한 번은 항문이 없는 아기가 태어났다. 그 아기는 몇 번에 걸쳐 수술을 해야만 정상적인 아이로 자랄 수 있다고 했다. 수술비만 해도 3천만원이 든다는 얘기였다.
그 아기의 부모는 그 정도 돈을 들일 수 없다면서 아기를 포기하겠다고 말했다. 그 아기에게는 아주 조금씩 우유를 주었다. 많이 먹을수록 일찍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그 아기는 더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결국 그 아기는 사흘만에 얼굴이 노랗게 되어서 죽고 말았다.
그 후에도 단지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분만일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막무가내로 낙태를 시켜달라는 부인들을 수없이 만났다. 8개월이 지나 명백히 딸이라고 판정이 되면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낙태를 하는 것이다.
보통 3개월 이전에는 간단히 흡입기로 수술이 되기 때문에 살인이라는 생각을 별로 가지지 않지만 6개월 이상되는 태아를 유도분만하는 행위는 명백한 살인행위임을 부인할 수가 없다.
나는 눈코입이 선명한데다 손발이 버젓이 있는 그 아기들을 끄집어낼 때마다 아기를 살인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조금 작을 뿐인 그 아기들은 갓 태어난 신생아와 다를 바가 별로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들 선호사상과 인명경시풍조로 인해 불과 서너 달 후면 태어날 아기들이 무참히 죽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 산부인과 간호사의 고백>
아무도 쓰지 않았던 낙태 살인 백서(殺人 白書)
임신 9개월 짜리 태아를 끄집어내 방치살인!
方愛心 산업장 간호사 - 라브리 제공
- 나의 죄값
1990년 11월. 나는 자궁 내에 생긴 혹 제거 수술을 받았다. 1980년, 출산을 하고 난 직후에 생긴 혹이었는데 그동안 수술을 하지 않아도 크게 무리가 없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미루어 왔다가 갑자기 커지는 바람에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막상 개복을 하고 보니 상태가 심해 난소를 떼내는 대수술을 해야 했다. 수술을 하고 나서 좀 쉬다가 출근을 했는데 3개월 후에 느닷없이 하혈이 시작됐다. 아무리 약을 먹고 주사를 맞아도 멈추지 않아 무려 40일 동안 하혈이 계속됐다. 10여 년 동안 앞만 보고 달려온 내 인생에 갑자가 브레이크가 걸린 것이다.
나는 치료를 하는 한편, 부지런히 성당에 기도하러 나갔다.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는데 자꾸만 억울하고 서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토록 열심히 살아왔건만, 이제는 수입도 안정되고 지위도 올라가고 모든 것이 잘되고 있는데 왜 내게 이런 시련이 닥친 것인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병을 낫게 해달라는 기도보다는 원망섞인 내 마음을 털어놓기 일쑤였다.
그 날도 예외없이 원망만 잔뜩 늘어놓은 후 성수(聖水) 옆을 지나는데 갑자기 이런 말이 들려왔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소린지 직접 귀로 들려온 소린지 잘 분간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내가 그 소리를 들었다는 점이다. “너의 죄값이지!” 나는 그 순간 깜짝 놀라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내 죄값이라니, 나는 열심히 산 일 밖에 없는데 어떻게 그게 내 죄값이야. 그 순간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적의에 찬 눈초리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친구들이나 주변 친지들에게 극성맞게도 열심히 산다는 얘기를 수도 없이 들었고 대부분의 경우 즐겁게 내게 주어진 일을 했다. 그 대부분에서 제외되는 시간은 바로 내 손으로 낙태를 할 때였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어째서 그게 잘못된 일인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아니 납득하기를 거부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가는 내가 견딜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스스로 위안을 했던 것이다.
- 낙태로부터의 탈출
“낙태를 원하는 사람이 있는 한 누군가는 반드시 그 일을 해야 하고, 내가 낙태를 주관하는 주체도 아니다. 조산사인 내가 간호사보다 월급을 많이 받는 이상 그 일을 하는 것은 마땅하고 또 어린 간호사에게 맡기는 게 안쓰러워 기혼인 내가 도맡아 처리한 일이 어째서 잘못됐다는 말인가. 나는 남보다 열심히 일한 거밖에는 없다.”
나는 늘 이런 생각으로 나를 달래왔던 것이다. 하지만 나의 죄값이라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그 길로 신부님께 달려갔다. “신부님, 저는 성당에 다니면서 너무도 큰 피해를 입었어요. 예전에는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는데 하느님을 믿고부터 원인 모를 죄의식에 시달려야 했단 말이에요. 나는 열심히 산 것밖에 없는데 정말 내가 죄를 지은 건가요? 전 정말 억울해요.”
나의 울부짖음을 신부님은 따스한 시선으로 감싸주셨다. 나는 실컷 울면서 신부님께 내 두려운 마음과 억울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신부님은 묵묵히 내 말을 다 들어주셨다. 실컷 울고 나자 속이 후련해지는 것 같았으나 역시 마음은 편치 못했다.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제서야 정말로 내 죄값이라는 생각이 나를 휩쌌다. 내가 의사를 도와 낙태시킨 수 많은 아이들, 그 아이들이 눈앞에 어른거려 걸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오래 전부터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을 말리시던 어머니는 하혈이 계속되자 결사적으로 말리셨다. “네가 이 죄 값을 어떻게 다 받으려고 계속 그 일을 하느냐. 생명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거늘, 어떻게 함부로 생명을 죽인단 말이냐. 낙태는 살인행위다. 그 일을 도와주는 너는 결국 살인을 도와준 것이다.”
어머니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남편은 나의 의사를 존중하겠다며 신중하게 생각해서 결정하라는 말만 했다.
수없이 그 일을 하면서도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을 내가 대신하고 있을 뿐이라고 나를 달랬건만 나는 결국 내가 살인을 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나는 당시 병원에서 안정된 위치에 올라 있었고 월급도 일반 간호사들보다 훨씬 많았지만 과감히 사표를 내기로 했다. 더 이상 생명이 있는 아이를 죽이는 일에 나를 투자할 수는 없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신부님께서는 용감한 결정을 하였다며 격려해 주셨고 누구보다도 어머니가 기뻐하셨다. 그래서 1991년 4월에 퇴직을 하게 되었다. 날마다 피비린내 나는 사태아를 처리하던 내가 드디어 그곳에서 빠져 나오게 된 것이다.
요즘 낙태반대운동연합이 결성되고 활발한 활동을 벌이자 새삼 여러 가지 생각에 잠기게 된다. 작년 말 전세계 낙태 건수가 5천5백만 건으로 추정되며 우리나라에만도 1백50만 건이나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한해 출산의 2.5배에 해당하는 수치이며 20초당 한 명, 매일 4천명 이상의 태아가 살해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이러한 참혹한 현실 앞에서 나는 내가 경험한 일을 많은 사람에게 들려줌으로써 낙태가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얼마나 큰 죄악인지 알리고 싶어 이 얘기를 시작한다.
나는 간호전문대학을 졸업하고 6년 간 보건소에서 일했다. 1978년부터 1984년까지 서울에 있는 두 곳의 보건소에 근무했는데 그때는 직접 낙태를 하기보다 낙태를 권하는 일을 주로 했다. 그때는 국가적으로 가족계획에 심혈을 기울이던 시절이다. 그래서 나는 유산수술을 하면 루프나 복강경 수술을 해준다고 사람들을 꼬드겨야 했다. “건수”라고 부르는 실적을 올리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낙태를 권하던 내가 실제로 낙태 현장으로 옮겨간 것은 85년의 일이었다. 오랜 보건소 생활이 지루해진 나는 병원으로 옮기기로 결심했다. 좀더 좋은 조건을 획득하기 위해 1년간 조산사(助産士) 트레이닝 과정을 거쳤다. 조산사는 따로 조산원을 개업할 수 있는 자격증이 주어진다. 하지만 의료보험이 실시되고 난 후에 많은 사람들이 병원을 선호하는 바람에 대부분의 조산원이 문을 닫은 상태였다. 아이를 직접 받을 수 있는 조산사들을 산부인과에서는 매우 환영한다. 자연히 일반 간호사보다 월급이 훨씬 많은 편이다.
- 조산사(助産士) 자격증을 획득하고
조산사 자격을 획득한 후 1985년에 경기도 내에 있는 종합병원에 들어가 1년 5개월간 근무했다. 그 다음에는 좀더 좋은 조건을 제시한 개인 병원으로 옮겨가 1년간 근무했으며 그후에 準종합병원으로 옮겨가 3년을 근무했다. 그러니까 내가 산부인과에서 근무한 기간은 총 5년 5개월에 이른다. 이 기간 동안 나는 수없이 많은 낙태를 접했다.
종합병원에서는 비교적 낙태율이 낮았음에도 매일 몇 건의 낙태가 이루어졌다. 개인병원에 있을 때 특히 낙태가 많았는데 하루에 20-30건씩 이루어졌다. 임신 초기단계는 수술로 간단히 끝나기 때문에 링거병을 들고 들어가 간단한 보조일만 하면 됐지만 6개월 이상된 경우에는 분만실로 옮겨지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본격적으로 내가 직접 낙태를 도와야 했다. 젊은 의사들의 경우 대강의 수술만 해놓고 뒷처리를 부탁하는 바람에 내가 주도적으로 일을 진행한 경우도 종종 있었다.
주로 16주 이전에는 흡입기를 이용해 비교적 간단히 수술 할 수 있다. 16-20주가 가장 위험하므로 산부인과 의사들은 그 기간의 낙태를 꺼리는 편이다. 20주가 넘으면 이미 아이가 많이 자란 상태이므로 흡착기로는 불가능해 유도분만을 해야한다.
분만을 위해서는 우선 인위적으로 자궁구가 열리게 해야 한다. 5개월일 때는 헤파린 종류인 라미나리아를 자궁 입구에 밀어 넣는다. 그러면 그게 점점 불어나면서 자궁이 열리게 한다. 몇 개 넣지 않아도 자궁이 열리는 경우가 있으나 17개까지 집어넣은 경우도 있었다.
자궁을 열리게 하는 방법으로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것이 바로 골프백을 집어넣는 일이다. 부지백이라고도 부르는데 풍선처럼 생긴 것을 돌돌말아 자궁 안에 밀어 넣은 다음 그 픙선안으로 셀라인(생리 식염수)을 집어넣는다. 갑자기 자궁 안에 풍선이 들어온 데다 점점 부풀어오르니 산모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불안해진 태아가 자궁 안을 마구 돌아다니게 된다. 자궁이 충분히 열리면 골프백을 힘껏 잡아당긴다. 그때 태아가 함께 딸려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태아가 딸려 나오지 않으면 손을 집어넣어 끄집어내야 한다. 손을 집어넣으면 태아가 필사적으로 도망다니기 때문에 그 일도 쉽지가 않다.
겨우 발을 찾아 손가락을 두 발에 걸면 생명의 위협을 직감한 가련한 태아는 마구 요동치면서 빠져나가려고 기를 쓴다. 하지만 다시 한 번 꽉 잡아 힘껏 잡아당길 수밖에 없다. 대개 6-7개월 된 태아들의 발은 어른 손가락 두 마디 만한데 그 발을 잡아당기는 기분을 한 마디로 표현하기란 참으로 힘든 일이다. 묘하다고 해야 할까.
- 머리를 으깨 끄집어내는 경우도
하지만 그 순간은 어떻게 해서든지 끄집어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별다른 기분을 느끼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막상 끄집어낸 태아를 보면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하게 마련이다. 아이들은 대부분 이물질이 들어오면 살기 위해 자궁 안을 필사적으로 헤집고 다니기 때문에 여기 저기 충격이 가해져 온몸이 시퍼렇게 멍들어 있다. 특히 다리 부분은 시커멓게 죽어있다.
그런 태아들을 보면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측은함이나 생명의 존엄성 따위보다는 몹시 기분이 나빠진다는 것이 올바른 표현일 것이다.
그 당시 우리 병원 분만실에는 미혼에다 나이 어린 간호사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사(死)태아 처리를 모든 꺼려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 애들을 다그치기 보다 차라리 내가 처리 하는게 낫지 하는 생각으로 끝까지 일 처리를 담당했다. 그렇게 꺼낸 태아들은 바로 한지에 싸서 냉동창고에 넣어두면 死태아 처리를 하는 인부들이 와서 거두어 간다.
골프백과 함께 딸려 나온 태아는 대부분 죽은 상태이기 때문에 처리하기가 쉽지만 손가락으로 끄집어내면 태아가 가끔 살아 있는 경우도 있다. 곧 죽을 것이 뻔한 그 태아들은 자신을 원하지 않는 세상에서 잠시 숨을 쉰다. 그러나 아무런 배려도 받지 못한 채 곧 숨이 끊어지고 死태아 처리반으로 직행하게 된다.
골프백으로도 처리가 안되고 손으로 끄집어낼 수도 없는 경우가 가끔 생긴다. 발이 아니라 머리 쪽이 자궁을 향하고 있으면 잡아당기기가 힘들기 때문에 링펄셉을 이용해 끄집어 내야한다. 하지만 그것도 안되면 자궁 안에서 분쇄를 해야 한다. 특히 머리를 분쇄하여 흡입기로 빨아 당긴다. 얼굴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된 아이를 끄집어 내놓고 보면 그 참혹함에 온몸이 부르르 떨린다.
나는 그런 수술이 있는 날 밤이면 꼭 기분나쁜 꿈을 꾸곤 했다. 크고 검은 드럼통 옆에 서서 끝없이 아이들을 그 속으로 던지는 꿈이었다. 그런 꿈을 꾸다가 벌떡 일어나 한밤중에 식은땀을 흘리곤 했다.
하지만 내가 분만실에 근무하는 조산사인 이상 그런 일을 피해갈 수는 없는지라 나는 대부분 무감각하게 그 일을 하려고 애썼다. 좀 더 신속히, 좀 더 깨끗이 일 처리를 하는 것으로 나를 달랬다. 그리고 남을 대신해 내가 희생한다는 생각으로 그 시절을 견뎠다.
6개월 이상이 되어 유도분만을 하는 경우 분만 때와 똑같은 고통을 느끼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제왕절개를 원하는 사람도 있다. 20대 후반인 임신 8개월의 이혼녀는 이제 아이가 필요 없게 되었으니 낙태를 해달라고 망설임없이 얘기했다. 그러면서 고통을 느끼기 싫으니 아예 제왕절개로 해달라는 것이다. 8개월인 경우 제왕절개를 하면 아이가 살아 있을 확률이 대부분이므로 마취를 심하게 하여 아이를 죽게 한 후 수술한다.
-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참히 살해되는 아이들
개인병원에 있을 때는 보통 이틀에 한 번은 이런 수술을 했다. 내가 5년 5개월 동안 산부인과에 근무하면서 평균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유도분만을 통한 낙태아 처리를 했으니 얼마나 많은 아이가 무참하게 죽어가는 일에 힘을 보탰는지 모르겠다.
보통 3개월 이전에 낙태를 하는 사람들은 그래도 性에 대한 지식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임신을 한 것을 속히 알아차리고 깨끗이 처리하기를 원한다. 6개월이 넘어서 유도 분만을 통해 낙태를 하려는 사람들은 세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이미 딸을 둔 부부가 다시 딸을 임신한 사실을 알고 난 후 낙태를 하는 경우이고 둘째는 청소년들이 임신한 사실을 몰랐다가 나중에 알게되어 뒤늦게 병원을 찾는 경우이다. 어느 날 딸들을 가진 부부가 만삭의 몸으로 병원을 찾아와 낙태수술을 해 달라고 말했다. 그들은 생활이 그다지 어려워 보이지도 않았고 또 공부를 많이 한 사람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딸은 둘이면 충분하니 낙태를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때 그 부인은 9개월이 가까워 오는 시점이어서 배가 남산만했다. 유도분만을 한 후 산모는 회복실로 옮겨갔다. 태어난 아기의 얼굴을 한번도 보지 않은 채. 그렇게 해서 태어나는 아기들은 대부분 여러 가지 충격에 의해서 죽게 마련이나 그 아기는 살아 있었다.
죽어야 할 아기이므로 태어나면 누구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간호사들이 약이나 주사기를 담는 스테인레스 통을 바트라고 부르는데 거기다 담아서 한쪽에다 밀어 놓는다. 그날 유도분만으로 태어난 아기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그대로 밀어 놓았다. 우유도 안주고 목욕도 시키지 않았다. 그렇게 방치하면 대부분의 아기들은 곧 죽게 마련이다. 그런데 다른 병실을 둘러보고 돌아와 보니 어린 간호사들이 난리가 났다. 세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기가 살아 있다는 것이다. 아주 드문 경우였다.
나는 곧바로 아기에게 달려가 보았다. 쌕쌕 숨소리를 내는 그 아기는 분명 살아 있었다. 순간 이 아기를 살려 입양기관에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기를 더운물에 씻기고 배꼽처리를 한 다음 인큐베이터에다 넣었다.
세 시간 동안 방치되어 있었던지라 아기의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래서 따듯한 물주머니를 만들어 발치와 몸 위에 올려놓았다. 그 아기가 살아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집으로 돌아왔는데 밤 10시쯤 전화가 왔다. 아기가 죽었다는 것이다.
그 아기를 처리하기가 무서운 간호사들이 내게 전화를 한 것이다. 부랴부랴 달려가 보니 아기는 가련하게도 죽어 있었다. 나는 그 아기를 정상적으로 태어났다가 죽은 아기와 마찬가지로 솜으로 여기저기 막고 잘 싸서 냉동창고에 넣어 주었다.
- 너무나 쉽게 아기를 죽이는 부모
간혹 살아서 나오는 아기들을 보면 주로 여자 아기들이다. 여자들의 생명력이 질기다더니 정말 그런 모양이다. 간혹 미숙아들이 태어나면 인큐베이터에다 넣는데 그럴 경우에도 여자아기들이 죽는 경우는 드물다. 간혹 살아서 나온 아기들 때문에 일을 치르고 나면 가슴은 아프지만 직업이 직업인지라 그에 대해 깊이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단지 그런 아기들을 처리하면서 다시 세상에 온다면 좋은 부모에게서 태어나 행복하게 살라고 마음속으로 빌어준다.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 기억들이 몇 개 있는데 난쟁이 아기가 태어났을 때의 일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남편은 아내에게 아기가 죽었다고 말한 후 우리에게 아기를 없애달라고 하였다. 당시만 해도 나는 입양기관이 어디 있는지 잘 몰랐고 내가 주도적으로 일 처리를 하는 입장이 아닌지라 의사의 지시에 그대로 따르는 편이었다. 갓 태어난 난쟁이 아기는 한 모금의 우유도 먹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부모가 원하지 않는 아기이므로 병원에서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트에 넣어 그냥 두면 그 아기는 그대로 죽어버리고 만다. 입양기관에서도 기형아들은 데려 가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런 아기들을 입양시키기도 사실은 힘든 일이었다.
또 한 번은 항문이 없는 아기가 태어났다. 그 아기는 몇 번에 걸쳐 수술을 해야만 정상적인 아이로 자랄 수 있다고 했다. 수술비만 해도 3천만원이 든다는 얘기였다.
그 아기의 부모는 그 정도 돈을 들일 수 없다면서 아기를 포기하겠다고 말했다. 그 아기에게는 아주 조금씩 우유를 주었다. 많이 먹을수록 일찍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그 아기는 더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결국 그 아기는 사흘만에 얼굴이 노랗게 되어서 죽고 말았다.
그 후에도 단지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분만일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막무가내로 낙태를 시켜달라는 부인들을 수없이 만났다. 8개월이 지나 명백히 딸이라고 판정이 되면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낙태를 하는 것이다.
보통 3개월 이전에는 간단히 흡입기로 수술이 되기 때문에 살인이라는 생각을 별로 가지지 않지만 6개월 이상되는 태아를 유도분만하는 행위는 명백한 살인행위임을 부인할 수가 없다.
나는 눈코입이 선명한데다 손발이 버젓이 있는 그 아기들을 끄집어낼 때마다 아기를 살인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조금 작을 뿐인 그 아기들은 갓 태어난 신생아와 다를 바가 별로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들 선호사상과 인명경시풍조로 인해 불과 서너 달 후면 태어날 아기들이 무참히 죽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 가방을 들고 병원 찾는 여고생도
고등학생들도 유도 분만을 통해 낙태하는 경우가 많다. 청소년들이 임신을 하는 때는 주로 크리스마스와 바캉스 철이다. 임신중절 수술을 하러오는 아이들의 달수를 따져보면 대부분 그때 임신한 것을 알 수 있다. 그 아이들은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다급해지면 달려와서 울면서 낙태를 시켜 달라고 말한다. 그때는 경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주로 어머니와 함께 와서 낙태를 하게 된다.
당시만 해도 간단한 낙태수술은 6만원 선이었고 유도분만은 50만원 선이었다. 한번은 고등학교 1학년인 두 아이가 일을 벌려 여자아이가 임신을 하게 되었다. 그 아이는 주변에 알릴 생각을 하지 않고 그저 복부를 동여매는 데만 급급했다. 원래 아이가 좀 뚱뚱해 어머니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고 했다.
더 이상 숨길 처지가 되지 못한 아이가 울면서 어머니에게 일을 털어놓았고 급기야 남자쪽 어머니와 함께 병원을 찾기에 이른 것이다. 얼마나 꽁꽁 매놨던지 태어난 아기가 2.45kg밖에 되지 않았다. 아기는 입양기관에 넘기기로 하였다.
문제는 남자쪽 어머니 태도에 있었다. 두 집 다 그리 넉넉한 집안이 아니었는데 남자 쪽은 행여 수술비를 내야 할까봐 지레 발을 빼려고 안간힘이었다. 남자가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뭘 그러냐는 식이었다. 딸 간수를 잘해야지 도대체 이게 뭐냐고 오히려 큰 소리였다. 여자 쪽 어머니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못했다. 그저 수술비만 좀 보태달라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보다 못한 내가 남자 쪽 어머니를 병원 한쪽으로 데리고 갔다. “당신 아들은 아무 고통도 당하지 않는데 저 집 딸은 어떠냐, 평생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한다. 분만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아느냐. 그리고 10개월 간의 악몽이 지워지겠느냐. 돈 몇 푼이 아까워 아픈 사람을 더 아프게 해서 되겠느냐.”
내가 마구 다그치자 그제야 아주머니는 잠잠해졌다. 나는 악착같이 남자 쪽 어머니에게 수술비를 받아냈다. 단 한번의 실수라던 말대로 처녀막 잔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그 여학생이 측은하기 그지없었다.
병원에 있으면 별별 일이 다 많다. 날이 갈수록 사람들 얼굴이 두꺼워지는 걸 느낄 수 있다. 가방을 들고 친구들과 삼삼오오 떼지어 병원으로 들어오는 고등학생들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 아이들은 수술하러 들어가는 아이를 무슨 환송식 하듯 뒤에서 재잘거린다. “잘하고 와, 별거 아냐” 뭐 그런 말을 한다. 그리고는 수술이 끝나고 나면 간단한 주사라도 한 방 맞고 나온 것처럼 대단찮게 여기며 “아팠니? 밥이나 먹으러 가자” 어쩌구 하면서 수선을 떤다. 그런 아이들을 볼 때마다 분명히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병원에 올 것 같은 예감이 들어 불안해진다.
- 선생과 함께 오는 여고생
또 주변의 술집에서 일하는 아가씨들이 수술을 하러 올 때면 험상궂은 포주가 지키고 않아 있다가 수술이 끝나면 곧바로 데리고 나가는 경우도 있다. 한번은 서른도 안된 고등학교 교사가 제자를 건드려 함께 병원으로 온 일도 있었다. 그 여자아이는 “선생님 어쩌구” 하면서 병원에서도 내내 그 남자에게 매달려 있었다. 젊은 미혼 여성들은 남자 친구들과 스스럼없이 병원을 찾아와 수술을 받는다.
미혼여성의 경우 옷을 벗는 일에 스스럼이 없는 반면 기혼여성들이 오히려 많이 수줍어 한다.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겨우 옷을 벗고는 수술대에 올라가서도 부끄러워한다. 하지만 미혼여성들은 옷을 훌렁훌렁 잘도 벗고 과감하게 수술대로 올라간다.
나는 수술을 마친 사람들에게 꼭 한 마디씩 들려주었다. “딸이라고 해서 이렇게 낙태를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다시는 이런 일로 만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로 이런 말을 들려준다. 그리고 미혼 여성과 청소년에게는 좀더 장황하게 얘기를 하는 편이다. “임신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라! 혼전에 性관계를 갖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남자들이 어디 책임을 지느냐! 사랑한다는 말에 속지 말라! 육체적 관계만 사랑이 아니다! 사랑을 다른 방법으로 표현할 수도 있는 것 아니냐!”
대강 이런 얘기를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어떤 아이는 고개를 발딱 들고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사랑하는데 못줄 게 뭐가 있어요. 참견하지 마세요.” 나는 그 아이 앞에서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상분만을 하는 사람들에게서도 해프닝이 많이 일어난다. 특히 출산경험이 있는 경산부가 초산부라고 우기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아주머니 이번이 두 번째 출산이군요.” 이렇게 물으면 펄쩍펄쩍 뛰면서 자신은 초산이라고 우기는 것이다. “아니 진행 속도가 이렇게 빠른데 초산이란 말입니까. 제가 아주머니의 과거를 묻자는 것이 아니라 다른 환자도 돌봐야 하기 때문에 이런 사실을 알아야만 속도에 맞춰 아주머니를 돌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제야 그 부인은 자신이 두 번째 출산이라며 절대로 남편에게 알리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할 뿐더러 더 우스운 사실은 그런 사람일수록 남편을 꽉 잡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병원에 근무하는 것을 천직으로 알고 생활했다. 감기를 앓다가도 병원에 들어서면 감기가 달아날 정도여서 스스로 병원 체질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막 태어나는 생명을 맨 처음 만나는 일은 얼마나 신비스럽고 보람있는 일인가. 나는 병원에서 오래오래 일하면서 새 생명과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를 원하지 않는 일부 사람들에 의해 죽어야 하는 많은 아이들을 만나면서 병원을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내가 산부인과에 근무하는 한 영원한 낙태를 도와야 한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낙태를 하지 않는 병원에 들어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런 병원을 찾기도 들어가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 성교육 상담 내용
나는 1991년 4월에 병원을 그만 두고 나서 잠시 쉬었다. 하지만 내가 그동안 지은 죄를 속죄하기 위해 사회봉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YMCA 청소년 상담실에서 1년간 상담교육을 받고 나서 성교육 상담을 했다.
70 대 30 정도로 남자아이들의 전화가 많았는데 상담 내용이 거의 비슷비슷했다. 전화를 거는 사람들은 주로 중학교 3학년에서 대학교 3학년 정도의 나이이다. “성기가 좀 이상하게 생겼다.”거나 “너무 작은데 나중에 이상이 없을지 모르겠다.” “나는 몇cm인데 너무 크지 않느냐.”며 자랑을 하려 드는 녀석들도 있다. “하루에 자위행위를 대 여섯 번이나 하는데 걱정된다. 잠들 때와 아침에 일어날 때 집에 아무도 없을 때면 영락없이 자위행위를 하게 된다.” “노출이 심한 여자들만 보면 충동이 일어난다.” “전철에서 여자들과 부딪치기만 하면 이상한 기분이 된다.” 주로 이런 얘기였다.
그러면 나는 그들에게 훈계를 하기보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기분을 갖게 해준다. 지금 한창 그럴 나이니 근심하지 말아라. 자위행위를 많이 해서 도움되는 게 뭐가 있니. 그럴 때면 밖에 나가서 뛰어라. 전철에서 이상한 생각이 들면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라. 그러면 아이들은 기분이 나아지는지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는다. 간혹 이상한 목소리로 전화를 거는 녀석들도 있다.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알아 맞춰 보라.”는 등 횡설수설한다. 전화를 하면서 자위행위를 하는 것이다. 그런 아이들에게는 화를 내지 않고 지금 전화를 계속하는 것은 무리인 것 같다고 말하며 끊는다.
- 낙태 없는 병원에서 새 생명 받고 싶다.
어떤 녀석들은 “왜 딱 붙는 옷을 입은 여자들의 옷에 팬티 라인이 보이지 않느냐”고 끈질기게 묻는다. 그러면 “특수한 란제리를 입었겠지, 그걸 아는 게 너한테 도움이 되니?”라고 물어본다. 어떤 아이는 상담을 하겠다고 해놓고 사실은 그날 학교에서 일어났던 얘기를 줄줄이 늘어놓는다. 대화 상대자가 없는 외로운 아이들이다.
여자아이들은 임신 여부를 문의하는 경우가 많다. “한 번 관계가 있었는데 처녀막이 없어지지나 않았는지 걱정된다.” “임신 반응검사에서 양성이 나왔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묻는다. 그러면 나는 가차없이 어머니에게 말하라고 일러준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친구들과 해결하겠다고 말하지만 친구들에게 말했다가는 좋지 않은 소문이 날 수 있으므로 감싸줄 수 있는 어머니를 택하라고 권한다.
부모가 이혼했다는 한 아이는 “남자를 사귀어 아이를 낳고 싶다. 그래서 그 아이에게 사랑을 듬뿍 주어 잘 길러보고 싶다.”고 하소연을 하였다. “아이는 인형이 아니다. 방학 때 아이들 돌보는 자원봉사를 한번 해 봐라. 지금은 안되니 나중에 어른이 되면 얼마든지 그런 기회가 올 것” 이라고 타이르곤 한다.
상담을 하다 보니 좀더 전문지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1992년에 서강대 평생교육원 상담과정에 입학했다. 지금 2년째 상담교육을 받고 있다. 상담을 벌이면서 불특정 다수를 위해 결과를 알 수 없는 상담을 벌이기보다 청소년들이 많이 근무하는 산업장에 들어가 구체적인 상담과 성교육을 담당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여기저기 입사지원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가는 데마다 산업장 간호사로서는 나이가 많다며 난색을 표했다. 한 회사에서는 내 나이가 간호사로서는 환갑인줄 알라며 기를 죽였다. 겨우 찾아낸 곳이 지금 다니는 회사의 양호실이다. 작년에 입사한 이 회사에는 미혼이 거의 없다. 여자들도 거의 기혼여성이어서 내가 마음먹었던 상담과 교육활동을 펼칠 수 없어 무척 아쉽다.
지금도 여러 병원에서 함께 일하자는 연락이 종종 온다. 지금이라도 병원으로 들어가면 지금 월급의 두 배 이상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또 다시 낙태를 도와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결코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가 않다. 지금 나의 소망이라면 낙태를 하지 않는 병원에 들어가거나 미혼여성이 많은 산업장에 가서 상담을 벌이는 일이다.
우리나라 형법 269조에는 낙태에 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낙태죄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이는 낙태 금지법을 실제로 시행할 의지가 없음을 보여주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낙태를 하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겠지만 좀더 중한 제재를 가해 사람들로 하여금 경각심을 갖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새 생명이 태어나는 것은 하늘로부터 선물을 받는 일이다. 사람들은 그 선물을 받아 잘 길러야 하는 의무만이 있을 뿐이다. 어떠한 사람에게도 그 선물을 함부로 버릴 수 있는 권리란 없다.
이제 더 이상 낙태아라는 이름이 들먹여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많은 산부인과 의사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새 생명의 탄생을 위해 성심껏 일하고 있다는 것도 여기에 꼭 밝혀두고 싶다.
... 슬픈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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