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뽕 등소평

[스크랩] <히틀러가 과연 600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했을까?>교황 성하께 삼가 드리는 편지/레옹 디그렐(Leon Degrelle)

그리운 오공 2014. 2. 5. 13:39

교황 성하께 삼가 드리는 편지

  다음 소개할 글은 레옹 디그렐(Leon Degrelle)이라는 사람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보낸 공개편지이다.

  1906년 벨기에에서 태어났으며, 철학자, 작가, 기자, 정치인, 군인이었다. 디그렐은 조국 벨기에와 유럽 기독교의 악마화를 막기 위하여 싸웠으며, 알려지지 않은 20세기의 비사를 많이 쓴 사람이다.

  레옹 디그렐은 1944년 스페인의 말라가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1993년 87세로 눈을 감았다. 많은 책을 쓰기도 했지만 청중을 도취하게 만드는 명연설가로도 유명했던 그는 <조국의 현실(Le Pays reel)>이란 자신의 신문을 가지고 있었다.

  약관 29세의 나이로 카톨릭교 렉스운동(카톨릭 사상을 기본으로 한 사회주의를 주창하는 사상. 국민이 단결하고 정부가 사회정의에 입각하여 산업제도와 정치를 개혁하자고 주창하는 사상으로서, 디그렐은 이 사상을 창시하고 카톨릭교 렉스운동이라는 사회운동을 일으켜 친파시즘의 노선을 밟았다)에 가담하여, 국가는 단합되고 사리에 맞는 사회주의 정책을 펴는 정부가 필요하다는 극단적인 정견을 가지고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1936년 처음으로 제도 정치에 참여한 선거에서 디그렐은 29세의 약관의 나이에 벨기에 사상 최고의 득표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그의 당은 21개의 의석을 획득하여 11.5퍼센트의 국회의석을 차지하였다.

  그는 유럽이 공동으로 단합하여 공산세력에 대항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서 히틀러의 공감을 얻었고, 프랑스어를 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발룬(Walloons)이라는 의용부대를 만들었다. 이 부대는 후에 발로니아 SS 28사단(28th SS Division Wallonia)이라는 독일 정예사단으로 바뀌었으며, 디그렐은 그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나중에 철십자 기사훈장을 받은 유일한 비독일계 사람이었다.

  그는 전쟁 능력도 탁월하여 미 육군의 존 빈슨 준장은 미 육군성의 잡지에 쓴 글에서 디그렐의 <전술학>을 “전쟁의 예술로서, 군인은 누구나 읽어야 하는 책”이라고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노르웨이 근처에서 벌어진 연합군과의 전투에서 사단 병력 2,500명을 모두 잃고, 그를 포함하여 3명만 살아남았다.

  그는 경비행기로 가까스로 탈출하여 스페인으로 넘어가 정치 망명허가를 받은 뒤에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고국 벨기에에서 이미 1944년에 ‘부재자 사형 선고’를 언도받았기 때문이다.

  이 편지는 1979년 5월 교황 바오로 2세에게 보낸 공개편지인데, 바티칸의 교황이 이 편지를 받았다는 수락 번호는 ‘951’이며, 교황의 서명 위에는 ‘CITTA DEL VATICANO P II 26.5.79'라고 씌어 있다.

  이 편지는 1979년 6월 나치 독일이 6백만 명의 유대인들을 독가스로 대량 학살했다고 알려진 아우슈비츠(폴란드의 남부에 있는 오슈비엥침이라는 도시를 독일말로 아우슈비츠(Auschwitz)라고 부르며, 2차 세계대전중 유대인들을 감금하고 독가스로 대량 학살했다는 수용소가 이곳에 있어 보통 ‘아우슈비츠’라고 하면 그 수용소를 생각하게 된다.) 수용소에 교황이 찾아가, 폴란드의 전체 주교들과 함께 직접 미사를 드린다는 소식을 듣고, ‘나치의 6백만 유대인 학살설’이 조작임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과 야합하고 동조하는 교황의 처사를 탄원하는 글이다. 부연하자면, 이 편지는 벨기에 당국이 형법에 저촉된다고 하여 내용공개가 불법화되어 있다.



교황 성하, 아우슈비츠에 가신다고요?

1979년 5월 20일 망명지에서
바티칸 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께

  성하(聖下)께 삼가 드립니다.

  저는 레옹 디그렐이라고 하는 사람이여, 2차 세계대전 전에는 벨기에에서 렉스운동의 지도자였습니다. 세계대전 중에는 의용군 사령관으로서 독일의 28사단과 함께 동부전선에서 싸운 사람입니다.

  이 글을 쓰는 것은 누가 종용해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며, 저는 성하와 마찬가지로 카톨릭 신자고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하나의 형제로서 이러한 글을 올릴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저는 성하께서 1979년 6월 2일부터 12일까지 폴란드를 방문하셔서 강제수용소였던 아우슈비츠에서 성찬 미사를 드리신다 하기에 염려되는 점이 있어 이 글을 드리는 것입니다.

  솔직히 직언하겠습니다. 죽은 자가 누구였든 간에 또는 어디서 죽었든 간에, 불에 그을린 자국도 아직 없는 새 화장로 앞에서 죽은 자를 위하여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노여움을 불러일으킬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백보를 양보해서, 당신도 인간이기에 교황으로서의 일거수일동작에서 폴란드인이라는 사실이 끊임없이 드러나고 있다는 점을 이해합니다. 당신은 젊은 시절에 젊은 혈기로 애국 운동에 참여한 애국자입니다. 당신에게 그때의 혈기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지금은 교황이 되었으니 역사 속에서 아직도 분명하게 해결되지 않은 문제에 대하여 무엇인가 해야 되겠다고 느끼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된 악행에 대하여 누가, 어떠한 책임이 있으며, 그 주모자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 당시 누구라도 당신네 폴란드 총리였던 베크(Beck) 대령이 사리에 어긋나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1939년에 그는 맡은 바 일을 과연 양식 있고 성실하게 처리했습니까? 그는 그때 독일 정부와 평화를 이룰 수 있는 분명한 기회를 거만한 태도로 거절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후에는 또 어떻게 했습니까?

  전쟁의 내용이 정말 보도된 그대로였습니까? 실제로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까? 양쪽 다 범죄적인 행위를 저질렀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그들이 실제로 원하는 것들이 언제나 객관적으로 반영되었습니까? 혹시 적국의 문서를 왜곡하여 발표하고, 선전 목적 때문에 제대로 검토하지도 않고 고의적으로 악화시켜 발표하지는 않았습니까? 상대가 적이라고 해서, 없는 사실을 뒤집어씌운 허튼소리를 확인도 하지 않고 기정사실인 양 행동한 일은 없습니까?

  교회는 항상 누구보다도 사실을 잘 알게 됩니다. 그러나 교회는 지난 2천 년간 다칠까 봐 늘 조심하고 과감한 일을 피하는 안일주의로 일관하여 왔습니다. 그래서 항상 풍파가 지나고 파도가 가라앉고 찢어질 것은 다 찢어진 다음에, 그리고 모든 것이 알려진 다음에야 증거를 수집하여 판단을 내리는 버릇을 가지고 있습니다.

  좀도 자세히 말씀드리자면, 교회가 2차 세계대전 중에 극도로 자제하고 있었다는 혐의를 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당시 미치광이 놀음에 끼지 않으려고, 거슬러 올라가는 쪽으로 노를 잡았던 것 아닙니까?

  성하께서 당신의 고향에, 특히 아우슈비츠에 가시면 아마도 과거의 기억이 조금이라도 떠오를 것입니다. 그러면 성하께서는 정말 단지 기도만 하러 그곳에 간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염려하는 것은, 단순히 성하가 그곳에 가셨다는 사실, 그리고 거시서 성하가 기도를 올렸다는 사실만으로도 아주 중요한 의미가 부여될 것이며, 사악한 선전광들의 연막으로 사용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들은 성하의 등뒤에서 증오의 악선전을 더욱 가열차게 해댈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과거 25년간 아우슈비츠 문제에 대해 악독한 마음으로 거짓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예! ‘거짓말’이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중에 감금되었던 수많은 사람들을 아우슈비츠에서 대량으로 학살했다는 전설적인 그 이야기, 헛소리들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1945년부터 이 전설은 수천 종류의 책에 기술되었고, 이로 인하여 전 세계가 이것을 믿도록 강요당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들은 말세를 연상시키는 총천연색 영화를 만들어 사실을 조작할 뿐 아니라 기본적인 산술이나 상식에 맞지도 않는 말을 믿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성하

  저는 성하께서 2차 세계대전 중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저항운동에 참여하여 전투도 하셨고, 심지어는 잠시 아우슈비츠에 잡혀 있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곳을 거쳐간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성하께서도 그 독가스를 마시지 않았기 때문에 교황이 되지 않았습니까?

  성하께서는 바로 그 안에 갇혀 있었던 증인으로서, 그들이 독가스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실 것 아닙니까? 성하께서는 속세의 선전광들이 이 거대한 학살사건을 조작해 냈다는 것을 알면서도 쳐다만 보고 계시는 가장 중요한 증인이 아닙니까?



6백만이 아니라 60만 명

  물론 아우슈비츠에 있었던 사람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들만이 그런 고생을 한 것은 아닙니다. 전쟁이란 전쟁은 모두 처참합니다. 연합국 수뇌들이 직접 명령을 내려 수만 명의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무참하게 재가 되었습니다. 제3제국(나치독일)의 강제수용소에서 희생당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비슷한 수의 사람들이 드레스덴(독일의 수도 베를린에서 약 160킬로미터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1945년 당시 인구 65만의 도시로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였으며 군사적으로는 야전병원의 집결지일뿐, 군대 시설이나 부대가 없는 도시였다. 그런데 당시에 영국, 미국의 연합군 공군은 스탈인의 요구에 의해 소련군이 입성하기 직전인 1945년 2월 13~15일과 3월 2일에 무려 3천 톤 이상의 폭탄과 소이탄을 퍼부어 무고한 시민이 20~35만 명이나 몰살당했다. 이러한 사살이 스웨덴에서 처음 발표되고, 뒤이어 영국의 BBC와 미국의 AP통신이 잠깐 취급하여 연합국의 명분 없는 고의적인 학살이라는 비난을 받았으며, 일본의 남경대학살에 견줄 만한 사건으로 취급되어 많은 지성인들의 지탄을 받았다. 그러나 승자인 연합국의 은폐공작으로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진 사건이다.)에서, 함부르크에서, 히로시마 또는 나가사키에서 희생을 치렀습니다.

  제3제국 시절에 수용소에 수감된 사람들은 25퍼센트는 정치범이나 저항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고, 75퍼센트는 양심범과 일반잡범 또는 변태 성욕자들이었습니다.

  허약한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포기해도 죽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탈진 상태 속에서 희생되었습니다. 또 어떠한 감옥에서도 간수들 중에는 잔인한 사람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당한 사람들은 개인적인 수모를 잊을 수 없을 겁니다. 동료 죄수들 중에서 뽑힌 카포스(Kapos. 나치 독일의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는 독일인, 유대인, 헝가리인, 우크라이나인, 폴란드인 중에서 젊은 사람들을 뽑아서 시킨 조장 또는 반장을 가리킨다. 군인처럼 제복을 입힌 그들에게는 같은 수감인들의 동향을 감시하고 보고하도록 한 일종의 간수 같은 직책이 주어졌는데, 너무 악독하게 굴어서 수감자들이 가장 무서워했던 사람들이다.) 같은 자들이 죄수들에게 더 잔악한 행동을 한 예가 허다합니다. 이들 중에 독일 사람도 있었습니다만 대부분은 독일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수용소마다 원래 인성이 간악한 사람들도 있어서, 마치 악마처럼 고문을 하고 죽이고 괴물처럼 징그러운 짓도 하며 아주 간단하게 살인을 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모두 감안한다해도, 종전될 무렵 발진티푸스가 돌지 않았다면 평화를 찾은 그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환성을 터드리며 새 생활을 시작했을 것입니다. 전쟁이 끝날 무렵 발진티푸스 때문에 수용소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했던 것입니다.

  폭격으로 철도와 도로가 파괴되어 교통이 마비되었고, 전기시설, 수도시설, 저수지 등이 파괴되어 식수나 식량 보급도 제대로 되지 못했던데다가 통신까지 장애가 심한 바람에 2차 세계대전 중 수감 생활을 하던 사람들의 3분의 2가 종전 무렵에 발진티푸스, 이질, 기아 등으로 희생당했습니다.
  이러한 통계는 이미 공식적으로 추산된 숫자여서, 예를 들면 국제조사위원회가 다하우(Dachau. 독일 뮌헨에서 북서쪽으로 16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작은 도시로 2차 세계대전때 유대인들을 수용했던 강제수용소가 있던 곳이다.)에서 조사한 다음에도 마찬가지의 통계 결과를 얻었습니다. 1944년 1월에 54명, 2월에 101명이 사망했으나, 1945년 1월에는 2,888명, 2월에는 3,977명이 사망했습니다. 1940~1945년에 죽은 수용소 전체 사망자 25,613명 중 19,296명이 마지막 7개월 사이에 죽은 것입니다.

  1945년 초에는 이미 연합국의 승리가 확실해졌기 때문에 그렇게 잔인한 파괴 작전은 필요치 않았습니다. 그때의 폭격은 아무런 군사적 가치가 없었던 것입니다.



연합군 폭격과 전염병으로 사망한 60만 유대인

  만일 이렇게 무차별적이고 잔인한 파괴 작전을 펼치지 않았더라면 수천 명의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만, 그들은 오히려 1945년 4~5월에 신문기자와 촬영팀들을 총동원시켜 불러모은 뒤 최대의 선전과 전시 효과를 낼 수 있도록 참상을 묘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그치지 않고 그후에도 계속, 보는 이로 하여금 증오감이 생기게 전시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사진들을 조작해 낸 것입니다.

  이러한 조작의 예술가들은, 만일 그들이 하려고만 들었다면 훨씬 더 많은 독일의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희생당한 참상을 더욱 참혹하게 그려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도 나치의 희생자들과 똑같이 참담하게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고 전투기 기총소사 세례를 받고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 도시에서 무고한 독일 시민 30만 명이 개죽음을 당했지만 그러한 사진은 조심스러운 배려 때문에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러한 사진들도 함께 공개되었더라면 나치에 대한 증오의 열기는 가라앉았을 것이고 오히려 연합국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졌을 것입니다.

  그들은 1945년의 발진티푸스, 이질 , 기아 등의 질병, 그리고 독일 시민과 수용소 수감자 등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습 때문에 희생된 것입니다. 양쪽 다 말세가 되었을 때나 볼 수 있는 증오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7백~8백 명을 넣을 수 있는 침실이 있습니까?

  성하, 그런 다음 아우슈비츠의 독가스실에서 가공할 지클론 B 가스를 사용하여 수백만의 유대인을 학살함으로써 계획적으로 인종을 말살시키려고 했다는 전대미문의 이야기가 생겨났습니다. 종전 후 수십 년 동안 세계 인류의 뇌리를 때리고 있기에 과학적인 조사를 하자고 하는데도 아무도 동조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 학살을 증명할 수 있는 과학적인 수사 보고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400평방미터 되는 아우슈비츠의 독가스실에 한 번에 3천 명씩 넣어, 하루에 2만 4천 명을 죽였으며, 벨제크(Belzec)에서는 넓이 25평방미터(7.6평), 천장이 1.9미터 되는 방에 한 번에 7백~8백 명을 집어넣었다고 합니다. 25평방미터라고 하는 넓이는 조금 큰 침실 크기입니다. 성하께서는 그런 침실에 7백~8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1평방미터에 30명을 넣었다는 이야기인데, 1평방미터라면 일반 공중전화 부스와 비슷한 크기입니다. 성하, 성베드로 광장이나 바르샤바 신학교에 있는 공중전화 부스나 개인 캐비넷 속에 30명이란 사람을 쌓아넣는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공중전화 부스나 금붕어 어항에 아스파라거스나 콩나물처럼 30명을 쌓아넣거나 성하의 침실에 8백 명이란 인원을 수용한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또 군병력 2개 연대에 해당하는 3천 명을 아우슈비츠 독가스실에 집어넣거나 벨제크의 방에 7백~8백 명 되는 사람들을 집어넣었다면 독가스를 사용하지 않았어도 산소 부족으로 모두 질식사했을 것입니다. 그런 방에 마지막 한 사람까지 집어넣고 문을 잠그려고 할 때쯤이면 이미 거의 다 죽어버린 시체가 되었을 것이며, 지클론 B라는 독가스는 죽은 송장 위에나 뿌려졌을 것입니다.

  이 가스는 아마도 문틈 또는 굴뚝 따위의 구멍이나 마룻바닥을 통해 뜨거운 공기나 증기의 형태로 투입되었을 것입니다. 과학적 상식이 있다면 누구나 알 수 있지만, 지클론 B 라는 가스는 발화성이 강하고 접착성이 강하여 취급하기가 여간 조심스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살포한 후 실내 공기를 모두 뽑아낸 다음에도 21시간쯤 지난 후에 들어가야 안전합니다. 즉 가스 살포 후 21시간이 지나야 시체를 처리하는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의 주장대로 아우슈비츠에서 하루에 2만 4천 명을 죽였고, 시체들의 입을 벌려 금이빨이나 입 속에 감춘 다이아몬드를 뽑아냈다면, 위아래 턱을 합하여 모두 4만 8천 짝의 턱뼈의 이빨을 검사했다는 얘깁니다.

  성하께서는 성스러운 분이니 아시겠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이발을 몽땅 조사하고 뽑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렸을 것 같습니까? 아마 상당한 치과 기공술을 가지 사람들이 한다고 해도 엄청난 시간을 소비 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실 것입니다.

  전해듣기로는, 사람이 죽으며 뻣뻣해져서 입을 벌리는 것조차 그리 쉽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공식 발표에 따르면, 불도 없는 시멘트로 만들어진 방에서, 거의 원시적인 연장만을 가지고 8명이 작업을 했다 합니다. 아마도 세계 그 어느 기술자보다도 빠른 속도로 위아래 치아를 검사하고 작업을 했겠지요. 한 번 연필을 들고 계산해 보십시오.

  그뿐이 아닙니다. 화장로 속에 넣기 전에 그 많은 시체들의 항문과 여자들의 질 속에 다이아몬드나 보석 따위가 있는지 모두 조사했다는 것이 아우슈비츠 역사가들이 이구동성으로 주장하는 공식화된 역사 이야기입니다.

  6백만 명을 독가스로 살해했으면 인분이 흘러나오고 피가 범벅이 된 상태였을 텐데, 성하께서는 그러 속에서 6백만 개의 항문과, 4백~5백만 개의 질과 자궁들을 샅샅이 더듬을 수 있으리라고 상상할 수 있습니까? 숨겨놓은 귀금속을 찾겠다고 냄새 나고 지저분한 구멍 속 끝까지 손을 집어넣어 하루에 2만 4천 개의 항문과 1만 5천~2만 개의 질을 후벼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 전부가 정신이 돌아버린 사람들이나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폴리아코프 교수 같은 사람은 눈 하나 깜짝 않고, 그 시체로 비료를 만들고 비누를 만들었다고 열변을 토합니다.

  독가스 학살이며 시체로 상품을 제조했다는 주장이며 시체 속에 손을 넣어서 귀금속을 찾았다는 이야기뿐만 아니라, 학살당한 유대인 숫자도 조작입니다. 리쿠에 신부는 1천 5백만 명, 라루스 사전에는 2천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을 당했다고 하는데, 2천만 명이던 당시 전세계 유대인 인구보다 더 많은 숫자입니다. 이렇게 조작해 낸 아우슈비츠의 역사 이야기를 기정사실로 믿도록 강요당하고 있으며, 지금도 그 작업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성하께서는 성찬 미사를 드리러 아우슈비츠를 방문하는 동안 독가스실에 코를 대고 직접 냄새를 맡을 수 있으며, 화장로의 열기를 느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만일 사실을 10배, 20배 정도 과장해서 이야기한다면 그럴 법한 일이라고 믿어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침실만 한 방에 7백~8백 명을 집어넣었다는 식의 이야기는 너무 어처구니없어서 말문이 막힐 지경입니다. 그런 말은 머리가 텅 빈 먹통들이나 믿고 떠들고 다니며 억지 영화를 만들어 돌리고 또 이를 보고 믿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홀로코스트(Holocaust<원래‘광범위한 파괴’라는 뜻이었으나, 2차 세계대전 이후로는 나치스가 유대인들의 인종 말살을 기도하여 조직적으로 그들을 대량 학살한 일을 뜻한다.>)를 믿어요! 내가 들은 이야기를 모두 믿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입니까?

  성하께서 아우슈비츠에서 성찬 미사를 드릴 때,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며 예수님의 희생을 되새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인 교황께서 하늘을 향하여 성찬을 높이 든 그 소배로 이런 어처구니없는 거짓말과 증오의 씨를 덮어준다고 어느 누가 감히 상상인들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증오와 거짓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완전히 반대되는 일입니다. 있을 수 없습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우슈비츠의 가짜 독사스실에서 겨우 1백 보 떨어진 곳에서 당신이 하시는 말씀은, 어느 누구와도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진실한 말이어야 하며, 그 말은 자비를 행하고 평등과 형제간의 사랑을 베푸는 말이어야 합니다. 당신은 인간의 가장 큰 수난 중의 하나를 덜어주기 위하여 아우슈비츠에 가시는 것입니다.

  시간이 감에 따라 역사의 진실 앞에 그 수난의 원인과 책임자들이 명백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진실은 거짓 증인이나 강요에 의한 진술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황 성하께서는 이러한 아수라장 위에 계신 분입니다. 교황께서는 수난을 겪고 있는 자나 수난을 받고도 영적으로는 깨어 있는 영혼들과 가까우신 분입니다. 보통 때에는 평범한 사람도, 심신이 고통과 번뇌에 휩싸이게 되면 영혼이 돋보이게 됩니다.

  이러한 일들은 2차 세계대전 중 전쟁터 곳곳에서 일어났습니다. 그곳에서는 수많은 군인들이 고통 속에서 죽어갔고 수용소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두 세력의 갈등에 희생되어 갔습니다. 그러한 예가 아우슈비츠이며, 1941년~1945년까지 동부 전선에서 공산주의 도살꾼들에게 고통을 받으며 희생된 수백 만의 젊은 유럽 청년들인 것입니다.

  인류 역사를 통하여 참상은 언제나 있었던 일입니다. 아우슈비츠에서 일어난 일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도 마지막 일도 아닐 것입니다. 이 순간에도 팔레스타인 수용소에서 저항할 힘조차 없는 수많은 부녀자들과 어린이들이 학살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공군기는 ‘보복’이란 미영 아래 죄없는 양민들을 처참하게 죽이고 있으며 불행하게도 이들을 위한 성찬 미사란 것은 영원히 없을 것으로 압니다.

  강한 민족이 약한 민족을 탄압하고 강탈한 예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많은 국가들이 사라져 갔고, 이러한 일은 어떤 한 곳에서만 일어났던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일은 항상 일어나고 있는 일이며 젋고 순진하고 정의감 있는 수백만의 양들은 이상주의를 믿고 값어치 없이 그들의 생명을 소모하여 버리는 것입니다.

  당연히 독인은 다른 어떤 나라와 마찬가지로 세상에 이루 말할 수 없는 폭력을 휘두른 조의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짓을 하지 않은 나라가 있단 말입니까?

  프랑스 혁명 대 ‘공포’라는 말이 창조되지 않았던가요? 그들이 ‘킬로틴’을 발명하고 사람을 루아르(Loire) 강에 빠뜨려 죽이는 법을 생각해 내지 않았던가요? 나폴레옹은 사람들을 강제수용하고 수십만의 시민들을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전쟁터에서 죽도록 만들지 않았던가요? 벨기에에서만 5만 1천 명이 끌려나가 싸웠으며, 독일 제3제국의 강제 수용소에서 죽은 숫자보다 1차 세계대전에 끌려나가 죽은 사람들의 숫자가 더욱 많습니다.

  1944년~1945년에 드골은 적에게 부역하거나 협조했다고 수만 명의 시민들을 죽이지 않았습니까? 또 근래에 와서는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와 알제리에서 수만 명의 사람들을 가학주의자들이 우글거리는 강제 수용소에 구더기처럼 몰아넣지 않았습니까? 반란 분자들뿐만 아니라 죄 없는 양민들도 함께 잡아가지 않았던가요? 프랑스의 어느 장군은 공식석상에서 ‘고문’을 찬미하기도 했지 않습니까?

  영국은 전쟁 준비도 하지 않은 코펜하겐에 대고 포탄을 퍼붓지 않았던가요? 영국이 인도인 용병들을 대포 총구에 잡아매어 놓고는 대포를 쏘아서 사형시켰고, 보어전쟁 때 트란스발 강제수용소에서 수천 명의 부녀자와 어린이를 잔혹하게 학살한 일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처칠이 독일에 대한 무차별 폭격을 명령하여 죄 없는 독일 시민들을 수없이 죽게 만들고, 양민들을 지하실에 넣어 유황으로 불태워 죽인일, 하룻밤에 20만 명 가량의 부녀자, 어린이를 불태워 온 도시를 화장터화한 드레스덴에 대한 폭격명령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기서 20만 명 가량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타고 남은 재의 무게를 추정하여 계산한 숫자입니다.

  또, 미국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은 짐승처럼 화인을 찍은 수백만 명의 노예를 부려 부강한 나라가 되었고, 원래 주인이었던 인디언들을 거의 말살(미국 역사학자들은 그 숫자를 최소 900만 명에서 최대 1,400만 명으로 추정하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하다시피 해서 자기네 땅으로 만든 나라가 아닙니까? 그리고 그들이 바로 원자탄을 투하했으며, 바로 얼마 전에 베트남에서 고문을 자행했던 사람들이 아닙니까?

  사람들은 소련 독재자들의 폭정 아래에서 희생된 수천만 명이나, 오늘날에도 존재하는 ‘강제 노동 수용소’(물론 현재는 없어졌다.)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습니다. 예전대로 다시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수십 년 동안 아무도 사용한 일이 없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성하께서 방문하실 때, 아무도 소련에 대한 이야기는 입밖에 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저는 자신있게 장담하는 바입니다

  아우슈비츠에서의 생활이 어렵고 처참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1945년 승자들의 막사에도 똑같은 양의 가학주의자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세계 전쟁에 대해 큰 쇠로 떠들던 사람들도, 승자들이 무고한 인명을 살상한 이유를 대라면 그 대답이 빈약할 것입니다.

  교황 성하, 저는 성하께서 고향을 다시 찾는 기쁨을 훼방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말은 꼭 해야겠습니다.

  성하께서는 당신의 모국이 성스타니슬라스의 정신을 본받아 윤리심이 높다고 긍지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나 공평하게 이야기하자면, 당신의 모국은 몇 세기 동안 정부가 앞장서서 유대인들을 수없이 학살했습니다. 사람들은 유대인들은 고문하고, 목을 자르고, 밧줄을 목에 걸어 매달았습니다. 그들은 카톨릭 신자들이었지만 조금도 ‘천사’다운 점이 없었습니다.

  성하, 교회는 항상 자비로웠습니까? 18세기 중엽만 해도 마드리드 한복판에서 유대인을 잡아 불태우면서 나팔을 불고 호화스런 행사를 하지 않았습니까? 사람을 산 채로 불에 태워죽이면서 말입니다. 교회는 그것도 구석진 양우리 같은 곳에서 하지 않았던가요?

  알비파(Albigenses. 12~13세기에 프랑스 남부에서 흥했던 카타리스트(Catharist)교도들을 일컫는 말로 교황 이노센트(Innocent) 3세의 칙명에 의해 모두 처형된 종교개혁자들이다.)는 성토마스 아퀴나스의 지휘 아래 학살된 것이 아닙니까? 또 ‘성바르톨로뮤 전날밤(Bartholomews eve)'의 학살은 당신의 전임 교황이 ’죽음의 밤‘에 일어나 찬미가 <테 데움(Te Deum)>을 부르며 즐기던 일이 아니었던가요?

  또, ‘마녀’라고 부르던 3만 명의 여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마녀 사냥’은 기독교 국가에서 행해졌으며, 여인들은 나무 기둥에 매달아 모두 불태워 죽이지 않았습니까? 심지어는 지난 18세기에도 로마 교황은 유대인들에게 게토(Ghetto. 고대 로마시대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도시 속에 특정 지역을 유대인들의 거주 장소로 정해놓고 그 안에서만 살도록 만들었다. 지금은 큰 도시에서 소수 민족이 모여 사는 빈민촌을 말한다.)에서만 살도록 강요하지 않았습니까?

  성하, 근본적으로 우리는 모두가 별로 잘난 것이 없습니다. 교황이든 파리 사림이든 러시아 사람이든 뉴욕 사람이든 다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도 경건했다고 말할 수 없으며, 우리 모두가 언젠가 한 번은 야수처럼 악했던 때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은 한 쪽에서 다른 쪽을 심판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며, 누가 누구를 파문한다든가 지나치게 성급하게 면죄부를 준다든가 아니면 은전을 베풀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잔혹성은 증오 대신 오로지 형제애를 베풀어야만 사라지게 할 수 있습니다. 증오라는 것은 시간이 가면 저절로 사그라지는 법입니다. 그러나 아우슈비츠의 경우처럼, 마치 미치광이가 된 듯이 거짓과 거짓 고백과 과장을 수없이 되풀이하고, 갈수록 더욱더 심한 사기를 쳐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더욱 자극시키면 영원히 끝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거짓과 과장된 날조에 대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아니다!’라고 부르짖지만, 소련과 미국은 자기들의 목적을 위하여 위협과 고문으로 그 불씨를 없애려 하고 있습니다. 흉악한 뉘른베르크(2차 세계대전 직후 1945~1946년에 있었던 연합국에 의한 나치스 전범재판. 재판정이 있던 도시 이름을 따서 ‘뉘른베르크 재판’이라고 한다.)의 시대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아우슈비츠에 설치한 탈무디스트의 음모

  이제 가짜로 만들어놓은 아우슈비츠의 무대에서 행하는 종교 예식에 성하께서 참여함으로써 새로운 막이 펼쳐질 것입니다. 텔레비전이나 신문 지상에 거대하게 장식될 화려한 예식은 ‘증오’를 조작하는 사람들에게 당신께서 의심의 여지 없는 지지를 보내는 것으로 인식될 것입니다. 첫 번째의 홀로코스트로는 불충분하여 이제 제2의 홀로코스트를 또 만들어낼 것입니다. 이번에는 그들이 돈을 들일 필요도 없이, 성하께서 자진해서 가장 고귀한 장식품을 완전히 무상으로 차려주는 셈인 것입니다.

  피해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든지 간에, 첫 번째의 홀로코스트는 거대한 헐리우드에서도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천박한 작품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이 가장 원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수천만의 관객으로부터 돈을 긁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잠깐 피해를 입었지만, 관중들은 오래지 않아 그것이 우스꽝스러운 조작극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들은 양심적인 역사가가 그 사건들을 다시 조사하라고 궐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손수 만드는 새로운 홀로코스트는 아우슈비츠에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스러운 교황께서 성복을 입고 살과 피로 참여함으로써, 교황께서 진실에 기름을 부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카톨릭교도에게는 교황이 신성모독의 사기꾼들과 함께 조작하는 ‘제2의 홀로코스트’는 가증스러운 선동자와 고리대금업자들이 조작한 모든 선전 내용을 신성한 제단에서 인정해 주는 성례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특히 미사를 지내는 마당에서는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독실한 신자들은 당신이 몬테카를로에 있는 폴란드 희생자들의 무덤 앞에서 전쟁을 상기시키는 바람에 동요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신문 기사에 났던 그때의 기억을 더듬는다면, 당신은 다만 특정한 정치 이념 때문에 죽은 자들만을 선택하여 기도를 드렸던 것으로 압니다. 성하께서 아우슈비츠에 형식적으로나마 나타나신다면 지각 있는 신자들은 더욱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일반적인 겉치레 말을 되풀이할 것이며, 그들의 장단에 맞춰 행동하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너무나도 명약관화한 일입니다.

  이번에 갖게 되는 미사는 당신 마음으로는 순수하게 인간끼리 서로 증오하는 것을 없애려 하는 노력일 뿐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언론을 주무르는 약탈꾼들은 성하에게 성복을 입힌 다음 ‘아우슈비츠’라는 깊은 함정에 빠뜨리려고 단단히 마음먹고 있는 것입니다.

  일반인들은 “인간은 늑대에서 나온 형상이다”라고 말하지만, 돈독한 기독교인들은 “인간은 모두 형제나라(Homo homini frater)"라고 말합니다.

  철망 안에 갇혀 수모를 당하고 있는 수감자나 그 철망 가장자리에서 기관단총을 잡고 서 있는 몰골 사나운 병사나, 모두 우리의 형제들입니다. 1945년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서로 용서해야 하고 사람을 베풀어야 합니다. 당신은 수모를 당한 사람으로서 교황이 되었고 저는 전사(戰士)로서 박해를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수백만의 많은 사람들이 이상과 활력과 약점과 잘못을 그대로 갖고 2차 세계대전의 깊은 비극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인생을 산다는 것은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며 신도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결국 종말에 가서 무슨 관계가 생길 것입니까?

  성하께서 역사적으로 아직 시비가 가려지지 않은 일의 한쪽에 가담하고, 증오로 가득 찬 미치광이들이 당신의 숭고함을 서슴없이 이용하도록 하는 성심(聖心)의 잘못을 저지른다 해도, 저는 망명하고 있는 멀리에서, 당신이 아우슈비츠에서 미사를 드리는 날, 당신을 위하여 또, 기원할 것입니다.


성하께 충복을 빌면서

레옹 디그렐 올림

출처 : 그림자정부  이리유카바 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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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금부도사: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는 유퉤인들을 보호할 목적으로 수용소에서 분리보호하고 있었는데 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미국유퉤인들이 독일군이 보호하는 유퉤인수용소에 전염병을 퍼트려 6만명의 유퉤인들이 전염병으로 죽도록 하였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었을 때 독일측은 유퉤인 희생자를 6만, 소련측은 7만으로 공식발표를 했습니다. 그런데 거짓과 기만과 사악의 달인인 유퉤인들은 그들의 동족(실제론 종교집단)을 비밀리에 쥑이는 만행을 저지르고는 거짓말로 히틀러가 6백만이나 되는 유퉤인들을 쥑였다고 거짓소문을 퍼트리게 되어 오늘날 대부분의 지구촌 사람들이 무지막강한 유퉤인들의 거짓말에 쇠뇌되어 있습니다.
 
 
출처 : 반달리즘(Vandalism)
글쓴이 : Vandal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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