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와 나찌에 대한 왜곡

[스크랩] 유태인 학살의 조작

그리운 오공 2014. 2. 5. 13:42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거의 80%이상은 맞는 말이죠~ ㅋㅋ  
여기 또 하나의 승자의 기록~  즉, 조작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유태인 대학살로 유명한
아우슈비츠가 조작이라고 합니다. ㅋㅋ  믿기 어렵겠죠 ?  너무 세뇌가 되어 있어서~ ㅋㅋ
저도 좀 충격 중입니다~ 

 
독일 제3제국(나치 독일)에 의해 죽은 유태인은 60만 정도가 정설이라고 합니다.
그것도 독가스로 살해한 것이 아니라 발진티푸스,이질,기아 등의 질병에 의한 병으로
사망한 것과 미국/영국/소련의 무차별 폭격으로 사망한 것이 대다수라고 합니다.
실제로 독일 드레스덴 시는 전세가 거의 끝난 1945년 초에 소련의 요구에 의한
미국-영국의 4일간의 무차별 폭격으로 무려 무고한 20만명의 시민들
(부녀자,아이들 포함)이 몰살당했으며, 이 당시 드레스덴 시는 군사도시가 아닌,
그저 일반 평범한 도시였다. 즉, 가스실은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ㅋㅋ 현재의 가스실은 1946년에 가짜로 만든 것이라 합니다. ㅋㅋ 
/ 이는 책, ' 그림자 정부 정치편'/해냄 출판 에 나온 부분을 정리한 것입니다.
 
 
아래 글은 다음에서 (펌) 한 것입니다~
좋은 글이 벌써 있었군요~
 
원글 보기 : http://k.daum.net/qna/member/info.html?userid=XAI7c6RELtA0


 





2차대전 당시 유대인 박해및 학살의 진상
 
첫째 - 1차대전직후까지 독일은 유대인에 대해 관대했다
유태인 박해는 다른 유럽국가들이 심했으며 독일은 오히려 관대했다. 그래서 많은 유태인들이
 2차대전 전에는 독일에 가장 많이 거주 했다. 그리고 독일계 유태인 금융제벌인 막스바르부르크는
 히틀러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한걸로 유명하다.
 
둘째 - 독일은 유태인들에 대해 차별을 별로 하지 않았다
독일 유태인들은 다른 유럽국에 비해 출세나 사업을 하기 쉬웠고 이들은 학계, 법조계,
의학계, 금융계, 언론계등 독일사회 전분야를 장악할수 있었지만 유태인들은 독일사회와 화합하려
 하지 않았고 나중에 독일 국민들의 반감을 사게 되는 원인이된다(1992년 LA폭동때 빈민폭도들이
자수성가한 한인교포들에게 적개심을 품고 약탈한것과, 인도네시아 폭동때 짱골라교포들이
원주민들에게 당한것과 같은 이치이다)
 
셋째 - 독일은 유태인의 독립국가 형성에 신경을 썼다
1933~1941년 까지 독일은 유태인들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고
(독일의 밀텐슈타인이 유대인이주를 하인리히 히믈러 SS사령관은 시온주의자의 대아랍 지하군사
조직인 '하가나'의 활동을 도왔다.), 1942년 요제프 괴밸스의 본격적인 유태인박해 주장이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히틀러는 유태인 학살 보다는 그들을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섬으로 보내 그들만의
국가를 형성시키고 나중에 독일의 우방으로 삶으려 했다.
 
넷째 - 독일의 등뒤에 칼을 꽃은 유태인
독일이 친영국 성향의 유태인들을 국외로 추방하려하자 당시 독일의 경제를 잡고 있던
유태인들은 독일을 굴복시키기위해 독일의 수출을 분쇄시키고 전세계적인 독일상품 불매운동을 벌인다.
그리고 이 활동을 신성한 전쟁이라고 하면서 세계 유태인경제 연합회 회장인 운터마이어가 앞장을
선다 뿐만아니라 전쟁중에 일부 유태인이 연합군과 결탁하여 연합군의 폭격을 유도하는 신호등을
장착하는 등의 밀정행위를 하자  히틀러는 모든 유태인을 소용소에 강금 시킨다.
이쯤되면 유대인의 행위는 국가 반역죄에 해당되며 국가반역죄는 어느나라에서나 사형에 해당 된다.
 
다섯째 - 그러나 결국 사고가 터지고 만다
시온의 칙훈서(유태인의 세계경영지침서)가 발견되어 알려지고, 공산당활동에 유태인들의
간접협조한 혐의와, 1936년 프랑스주체 독일 외교관을 암살하자 반유대감정으로 독일이 들끓기
시작했고 크리스탈학살 사건으로 유태인의 인명피해가 발생하자 더이상의 피해를 막기위해 유태인이
학살당하지 않도록 2만명의 유태인을 강제로 수용소에서 수용하게 된다.
좀더 덧붙여서 말하자면 독일을 패하게 만든 세계 1차대전의 배후에는 바질 자하로프라는
 유대인 전쟁무기상인이 있었는데 이 사람의 영국의 군수제벌인 빅커스사의 영업이사로써 친독적인
 그리스 국왕을 추방하여 세계대전의 장기화를 획책했다고 한다.
특히 독일의 군사기밀을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으로 빼돌린 사실 하나 만으로도
 독일이 유대인을 증오할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영국군이
사용한 수류탄은 독일의 기술로 만들어진 수류탄으로써
이 성능좋은 독일제 수류탄이 독일군을 죽이는 촌극까지 벌어지게 된다.
 
여섯째 - 유태인 600만 학살은 조작 확대된 것이다 (대표적으로 발진티푸스와 장티푸스)
실제로는 60만정도이며 그것도 연합군의 무차별 폭격과 전염병(더이상의 전염병 확산 방지를 위해
 시체들을 소각하게 된다)으로 사망한 사람이 대다수이다 25(7.6평)평방미터 되는 곳에 7~800명을
집어넣고 독가스로 죽였다는데, 실제론 그런 계산이 안나옴니다, 그리고 관광객들에게 전시되는
아우슈비츠 가스실과 소각로는 1946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스탈린의 소련군 또한 폴란드 유태인을
 많이 죽였으며 나중에 이것마저 독일의 만행으로 뒤집어 쓰게 된다.
 
 
유태인 홀로코스트,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내가 알기로 이 세상에서 유대인만큼 그들이 겪었다는 수모와 고난과 순교에 대해 우는 소리를
하는 족속도 없을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들이야말로 유럽의 정치와 경제, 주식시장,
그리고 국가의 도덕성을 좌우하는 실질적 군주들이란 사실을 알 수 없을 정도이다..."
                                                                                     - 도스토예프스키
 

 
1919년에 유태인 희생자가 600만명?
1차대전 직후 미국과 유럽에서는 그 진위를 떠나 이 전쟁에 대한 유태인 국제은행가들의 배후 음모설이

무성했다. 서구의 유태계 언론은 이러한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런 맥락에서
 1919년 미국의 유태계 유력지 American Hebrew 에 실렸던 한 기사의 다음과 같은 구절은 눈길을 끈다:
 
유태인 남자와 여자 600만 명 생필품의 부족으로 죽어가고 있으며 80만 명의 어린 아이들이 주린 배를
안고 울부짖고 있다. 이러한 비참한 운명은 이들이 신의 계명이나 인간의 법을 어겨서가 아니라 전쟁의 참상과
 유태인의 피를 원하는 가혹한 인종차별주의 때문이다. 인간의 생명을 앗아가려는 이와 같은 홀로코스트는...”
 (The Crucifixion of Jews Must Stop!, October 11, 1919)
 
유태인 희생자 600만 명이라는 수치는 2차대전과 관련하여 또 다시 등장하게 된다. 뉴욕의 유태교 랍비 이스라엘
골드슈타인은 1942년 12월13일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당시까지 독일 점령지의 유태인 600만 명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했으며, 1943년 3월2일 뉴욕 메디슨 스퀘어가든에서 열린 유태인들의 독일규탄집회에 대한 1943년 3월 2일자
 뉴욕타임스 기사에서 랍비 헤르츠(Rabbi Hertz)는 히틀러 정권에 희생된 유태인의 수가 600만 명이라고
거듭 주장했다.
 
*2세기 로마 치하의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났던 바코크바 항쟁에 관해 탈무드(Gittin. 57b-58a)는 로마군이
 베타르에서 40억명의 유태인을 학살했으며 1천6백만 명의 유태인 어린이들을 두루마리에 감아 불태워
죽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 당시에 40억 명의 유태인은 고사하고 1천6백만 명의 유태인 유아들이
 지구상에 존재했는지 의문이다.
 
 

Holocaust revisionism의 선구자 뽈 라시니에; 그 자신이 전쟁 중 독일 강제수용소
수감자였다.
 
 
홀로코스트 (Holocaust)



 
a. 美-英의 프로파간다

- 이미 근거 없는 낭설로 밝혀진 유태인의 기름으로 만든 비누
(Haaretz, Nazi Soap Stories Termed 'Invention', February 11, 2005)나 멩겔레 박사의
생체실험에 대한 얘기는 고사하더라도 2차대전 중 미국과 영국에서는 주요언론의 反독일
흑색선전이 난무했다. 한때 미국에서는 아우슈비츠에 수용된 유태인들이 조직적으로
감전사(感電死) 당하고 있다는 구체적인 증거들까지 가미된 기사가 유포되기도 했다.
(이 기사에는 가스실에 대한 언급이 없다.) 1945년 2월 미국의 주요 일간지들은 아우슈비츠를 
해방시킨 소련 병사들의 증언을 토대로 독일군이 “일시에 수백 명을 전기 처형할 수 있는 특수
콘베어 벨트를 가동했고 시신들은 벨트에 의해 소각로에 옮겨져 몇 초 내에 화장된 뒤 그
 재는 근처 양배추 밭의 비료로 쓰였다...”고 보도했다. (United Press dispatch from Moscow; Washington D.C. Daily News, February 2, 1945)
 
- 당시 현직 미국 대법원 판사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의 연합국측 수석검사로 활약했던
Robert Jackson은 독일군이 일시에 2만 명의 유태인을 자취도 없이 “증발”시킬 수 있는
“새로 발명된” 기계를 아우슈비츠에서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blue series, Vol. 16, June 21, 1946)
 
b. 유태인 희생자 600만 명 (아우슈비츠 사망자 400만 명에 근거)

- 1990년까지 폴란드 아우슈비츠 기념관에 있었던 추모석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1940년에서 1945년까지 이곳에서 수감자 400만 명이 나치 살인마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舊추모석판
 
그러나 교체된 새 추모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 곳이 영원히 인류에 대한 절망의
울부짖음과 경종의 장소가 되기를 바란다. 이 곳에서 나치스는 150만 명의 남자, 여자,
그리고 어린이를 살해했다. 희생자의 대부분은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 끌려온
유태인들이었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1940-1945.”
 

새로 교체된 석판
 
1991년 10월 20일자 벨기에 일간지 Le Soir 에 따르면, “국제 아우슈비츠 보존위원회는
1990년 11월 400만 명의 희생자를 명시했던 아우슈비츠의 추모석판을 “150만 이상의
희생자”로 표기되어 있는 새 석판과 교체하기로 결정했다.”
 
- 1989년 이스라엘의 홀로코스트 역사가 예후다 바우어(Yehuda Bauer) 교수는 이제까지
아무 이의 없이 수용되어 왔던 아우슈비츠의 유태인 희생자 400만 명設이 의도적인
허구임을 인정할 때가 왔다고 밝혔다. 1990년 7월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기념관은
이스라엘의 야드바셈 홀로코스트 박물관과 공동으로 유태인과 비유태인을 도합해
약 100만 명이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두 기관은 이들 가운데 몇 명이
 의도적으로 처형되었으며, 몇 명이 다른 원인으로 사망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Y. Bauer, Fighting the Distortions, Jerusalem Post - Israel, September 22, 1989)
 
- 1998년 9월 8일자 워싱턴포스트는 아우슈비츠에서 400만 명의 유태인이 독가스로
살해되었다는 주장은 거짓말이라는 월터 라이히(Walter Reich) 前워싱턴 홀로코스트
 박물관장의 말을 인용 보도했다. 라이히는 보다 사실에 가까운 숫자는 110만에서
150만일 것이라고 밝혔다.
 

Former Sorbonne literature professor Robert Faurisson: "The alleged Hitlerite gas chambers and the alleged genocide of the Jews constitute one and the same historical lie, which has made possible a gigantic financial-political swindle, the principal beneficiaries of which are the State of Israel and international Zionism, and whose principal victims are the German people and the entire Palestinian people."
 
- 유명한 홀로코스트 역사가 제랄드 라이트링어(Gerald Reitlinger)는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유태인의 숫자를 약 70만으로 추정했다. 좀더 근래에 들어서, 프랑스 홀로코스트 역사가 장-끌로드 프레삭(Jean-Claude Pressac)은 아우슈비츠의 총사망자 80만 가운데 63만 명을 유태계로 추정했다. (G. Reitlinger, The Final Solution, 1971; J. C. Pressac, Le Crematoires d'Auschwitz: La Machinerie du meurtre de mass, 1993)
 
- 1990년 5월 31일 프랑스의 보수성향 시사지 National Hebdo 는 아우슈비츠 사망자 수(비유태인 포함)가 세월의 흐름과 함께 어떻게 수정되어 왔는가를 보도했다:
 
“8백만(프랑스 전범조사국) - 5백만(르몽드, 1978년 4월20일자) - 4백만(1990년까지의 아우슈비츠 기념관 추모비) - 3백만(아우슈비츠 소장 Rudolf Hoess의 자백) - 160만 (예후다 바우어 교수) - 125만(Raul Hilberg 교수) - 85만(제럴드 라이트링어, The Final Solution) - 7만5천(소련 국립문서보관소가 소장하고 있는 아우슈비츠 관련문서들).”
 
(Source: National Journal, 2003)


 

 

 

 

 

 

 

 

출처 : 달콤 씁쓸
글쓴이 : 데미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