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와 나찌에 대한 왜곡

[스크랩] 히틀러는 왜 유태인을 학살했는가?

그리운 오공 2015. 2. 20. 20:23

히틀러는 왜 유태인을 학살했는가?

 

 

"일을 하는자는 자유롭다"  히틀러가 유태인을 학살한 소위 "홀로코스트". 홀로코스트 못지 않은 학살 사건이 역사적으로 수도 없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대량학살의 대명사로 남아 있는 것은 짧은 기간 동안에 전쟁의 와중에서도 거의 모든 국가기관을 총동원하여 과학적인 방법으로 수많은 사람을 학살하였기 때문이다. 숫자는 600만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600만이 죽은 것은 아니다. 600만 중 400만이 죽은 것으로 알려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실제로 죽은 사람은 150만 ~ 200만이며, 그들 모두가 유태인도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숫자조작이 이루어진 것은 전후(戰後)의 이야기로서 숫자야 어떻든 수백만의 유태인이 학살당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왜 이렇게 많은 유태인을 히틀러와 NSDAP가 학살했는지에 대해서는 단지 히틀러가 내세운 "반유태주의"때문이라고만 사람들은 알고 있다. 히틀러가 반유태주의자가 된 이유에는 참 다양한 요인들이 설명된다. 프로이드의 심리학까지 동원되고, 어머니가 어느 유태인의 정부였다는 이야기도 공공연히 회자된다.

 

 

그러나 히틀러는 현실적인 권력을 지향하는 정치인이다. 1차대전 참호전의 경험은 단순한 몽상이나 이상주의보다 현실적인 생존에 대한 욕구와 그럴 수 있는 능력을 요구했다. 그런 사람이 단지 어머니의 정부에 대한 어린 시절의 기억떄문에 반유태주의자가 되었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히틀러의 반유태주의와 극우 민족주의는 청년 시절에 실업자로 빈(Wien)을 헤메던 시절에 형성된 것이다.여기서는 히틀러가 왜 홀로코스트를 했는지,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에 대해 개괄적으로 알아보고자 한다.

 

히틀러와 NSDAP가 반유태주의를 내세운 것은 정당 창립때부터였다. 반사회주의, 반공산주의, 반유태주의를 기치로 NSDSAP는 지지자들을 보수적인 바이에른의 주도 뮌헨에서 시작했다. 지지자들을 긁어모으고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서 독일 국민들의 관심을 NSDAP로 모아야 할 필요가 있었고, 정권 장악 후에는 그 연장 선상에서 독재 정권의 기반을 든든히 다져야 했다.

 

흔히 히틀러의 권력 장악이 가능했던 이유로, 1차대전의 패배와 굴욕적인 베르사이유 조약에 대한 분노, 그리고 경제공황이 제시되곤 한다. 중요한 것은 히틀러가 그 충격과 굴욕감을 결집시켜 구체적인 권력으로 바꿔나갔다는 것이다.  

 

1차대전 패배의 충격과, 굴욕적인 베르사이유 조약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는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분노를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야 했다.분노를 결집하여 새로운 목표를 제시하고 그 목표를 이루어 분노와 굴욕의 대상을 제거하자는 논리와 행동이 필요한데, 히틀러는 그것을 제시한 셈이었다(다른 대부분의 정당들은 실패했었다).

 

 

우선 먼저 필요한 것은 그런 굴욕을 왜 겪어야 했는가, 였다. 원인을 알아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동원된 논리가 "등 뒤의 비수"이다. 이 논리는 우익세력이 만들어낸 신화로, 1차대전에서 패배하고 베르사이유조약의 굴욕을 겪은 것은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이이 전선에서 영웅적으로 싸우고 있는 군부를 배신한 결과라는 것이다. 실제로 연합군은 휴전 당일까지도 독일 영토에는 거의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있었다.

 

"등뒤의 비수"는 완전히 날조된 논리다. 이는 1918년 여름 이후에 루덴도르프를 위시한 군부 실세가 황제에게 휴전-사실상의 항복-을 제의한 사실은 일체 알려지지 않았고, 군부가 자진해서 독일사회민주당(SPD)에게 권력을 내준 것도 알려지지 않았다. 사실 SPD는 군부가 휴지버리듯이 버리는 권력을 받아 휴전조약(사실상 항복이죠)에 서명하여 국내의 엄청난 반발을 사느냐, 아니면 어떻게든 권력을 잡아 그들의 이상을 실현하는 호기로 삼냐는 의견 사이에서 갈등을 하던 끝에 후자를 선택하였던 것이다(이는 이후 SPD가 어쩡쩡한 행보를 하게 되고, 좌익 세력이 분열된 배경이기도 하다). SPD로서는 그 댓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다.

 

절대 다수 일반 국민들이 아는 것은 좌익인 SPD가 베르사이유 조약에 서명했다는 것 뿐이다. 히틀러가 진실을 알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의 진실에는 관심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등 뒤의 비수", 즉, 후방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조약에 서명했다는 부인할 수 없는 공개된 사실이며, 많은 독일인들에게도 그랬다. 알았다고 한들, 히틀러가 그 사실을 공표할 것이라는 환상은 갖지 말자. 히틀러는 현실적인 정치가다.

 

 

히틀러가 구술하여 집필한 "나의 투쟁"등을 살펴보면 반유태주의나 러시아 등 동유럽에서 생활권(Lebensraum) 확보에 대한 언급은 끊이지 않고 나온다. 물론 이것말고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맹렬한 공격적 태도 또한 여실히 드러난다(물론 이 책은 NSDAP 정권 장악이전에는 거의 읽혀지지 않았고, 읽은 사람들도 몽상가의 생각이라고 대부분 무시했다. 그러나, 그는 그 이야기들을 하나 둘씩 실천에 옮겼다).

 

정권장악을 위해 히틀러는 반유태주의보다 좌익에 대한 공격을 우선시할 것을 선택한다. SPD와 KPD는 전후의 혼란 와중에서도 강력한 정치적 입지를 다지고 국회를 장악한 세력이다. 특히 SPD는 1919년부터 1933년까지 거의 모든 연립정권에 참여했을 정도로 원내 제1당이기도 했다. 1923년 11월에 시도했던 뮌헨쿠테타에서 처참한 좌절을 맛보고 합법적 절차를 통한 정권장악을 모색하기로 한히틀러에게 급한 문제는 반유태주의가 아니라, 국회를 공고히 장악한 좌익세력과 투쟁에서 승리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NSDAP의 모든 노력은 좌익과 투쟁에 몰두한다. 그렇다고 유태인을 잊은 것은 절대 아니었다. 숨기지도 않았다.

 

좌익만을 공격하는 것으로 부족한 NSDAP는 좌익세력이 1차 타겟이라면, 2차 타겟을 유태인으로 삼게 된다. 이미 독일의 경제를 유태인 대자본가들이 장악하여 독일인 실업자들이 취직을 못하고 있다는 식으로 몰아붙이던 NSDAP이다. 보유자원의 대부분을 좌익과 투쟁에 돌리면서도 반유태주의 선전은 결코 줄어들지는 않았다. 고리대금업자, 자본가, 돈으로 게르만 처녀를 사는 돼지(원조교제의 원조 쯤이 되겠다) 등등으로 선전은 계속되었다.

 

빌미는 레닌이 제공했다. 레닌은 유태인이며, 러시아혁명의 많은 지도자들이 유태인이었다. 이 점에 착안하여 히틀러는 공산주의 = 유태인이라는 공식을 내세운다. 독일 사회주의자들 중에서도 유태인이 있는데, 1919년 스파르타쿠스단의 봉기때 주동자인 로자 룩셈부크르그 그러한 경우였다. 유태인은 러시아 사회에서도 엄청난 반유태주의에 시달렸고, 실제로 우크라이나 등지에서 학살을 겪은 바 있다. 그래서 이들이 러시아 혁명에 적극 가담한 것인데, 히틀러는 이를 유태인 = 좌익이라는 공식으로 내재화한 것이다(전쟁 중 우크라이나인들이 유태인학살에 SS의 보조병으로 참가한 데에는 이런 사정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아주 아이러니하게까지 보이는 공식이 성립된다. 유태인 = 자본가, 유태인 = 좌익, 자본가 = 좌익. 지금 우리 눈으로 보기엔 무지하게 이상하지만, 히틀러에게는 별 문제없는 공식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감없이 필요와 장소, 시기에 따라 적절하게 내세운다.

 

정권 장악 이전에는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 세력과 투쟁에 비중을 맞춘 관계로 반유태선전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이것으로 보수 우익 집단(융커, 군부), 몰락한 중산층, 자본가(부자, 기업가), 관료, 사법세력 등의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고, 실업자들은 SA로 흡수한다. SA는 적당히 폭력을 휘두르면 월급을 주었기에 좋은 직장이었다. 백색 테러집단으로 활동하던 수많은 제대군인들도 SA와 SS로 합류하고, 전쟁을 직접 겪지는 않았지만 희망을 잃은 청년들도 SA나 SS에 합류한다(SS는 본래 SA의 한 부서로서 1934년 룀숙청이후 SA로부터 조직편제상으로도 완전히 독립하게 됨).

 

 

독일 경제가 회복되어가던 중에는 거의 지지를 얻지 못했던 NSDAP는 1929년의 대공황으로 다시금 일어설 수 있었고, 히틀러 자신도 깜짝 놀랄 정도의 지지세력의 급상승을 밑바탕 삼아 1933년 1월 30일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정권을 장악하면서 좌익은 처절하게 분쇄당한다. 너무나 빠른 속도와 행동력으로 그들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요. 절정에 달한 것은 1933년 2월에 있었던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으로 NSDAP의 자작극이라는 설이 유력한 사건이다. 마지막 마무리는 5월 1일이었다. 좌익계 노동조합을 일제히 해체하면서 새벽에 그들을 급습하며 노조 지도자들을 모조리 잡아가고 로베르트 라이를 지도자로 하는 새로운 독일노동전선의 설립을 발표한다. 이로써 독일 내부에서 좌익 세력은 정치세력으로서는 씨가 말라버리게 된다(좌익 세력들이 이전에는 겪어보지 못한 속도와 폭력으로 한꺼번에 도려진 것이다).

 

정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는 국회에서 의석을 갖고 있는 좌익세력을 척결해야 했던 NSDAP지만 이제 그 과정이 끝났다. 이로써 완전한 독재정권을 수립한다. 수립한 이후에는 새로운 희생거리가 필요했다. SA와 SS로 대표되는 NSDAP의 폭력을 독일 국민들이 언제까지나 용인해줄 것이라는 환상은 아무도 갖고 있지 않았다. 더 새로운 희생양이 필요했다. 1934년, NSDAP의 내부 골치거리를 해결하여 당내에서 권위를 확립한 히틀러는 유태인에게로 독일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게 된다. 뉘른베르크법과 같은 악랄한 인종차별법이 등장한 것이 1935년 이후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물론 괴벨스가 주도한 NSDAP의 선전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다양한 연구와 평가가 엇갈리지만). 좌익과 우익내 반 히틀러 세력을 처리한 후에 본격적으로 유태인에게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이다.

 

SA, 유태인 상점을 보이코트하다  인종주의와 민족주의를 내세워 정권을 유지한 히틀러에게 그에 대한 지지를 계속 끌어내기 위해서는 유태인의 "위협"을 강조해야 했다. 약빨이 떨어지면 지지가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여 그 강도를 높여갈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이 내세운 이론을 믿고 따르는 부하들의 충성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전쟁 발발 이후에 유태인 탄압이 더욱 강화되는 것도, 학살이 전쟁 중에 시작된 것도 점점 강도를 높여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기에 자연스런 귀결이라 생각된다. 자신이 내세운 논리에 대한 지지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계속 그 논리를 확대해나갈 수 밖에 없는 것이고, 끝내 최종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순간에 직면하게 되는 법이다. 게토로 분리, 특정 지역으로 이주, 강제수용소 수감 등의 방법으로는 유태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믿은 그들에게 최종적으로 남은 해결책은 학살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럼 반유태주의가 히틀러만 가진 것일까? 히틀러가 처음으로 내세운 것일까? 그런 것은 아니다. 유럽에서 반유태주의의 전통은 유구하다.그 전통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왜 독일 국민들과 히틀러의 부하들이 겉으로 드러난 탄압과 숨겨진 학살에 동조했는지는 설명이 된다. 유럽인들의 반유태주의 전통은 세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도 잘 표출된다. 거기서 악덕 고리대금업자로는 나오는 샤일록이 바로 유태인이다.

 

유럽에서 반유태주의의 전통이 생긴 이유는 크게 2가지이다. 먼저 언급할 것은, 종교상의 문제이다. 이는 크게 2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유태교와 기독교 간의 교리 상의 차이이다. 유태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다(이 점은 이슬람교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이슬람교와 기독교는 화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유태교 신자들은 유태인만이 그 신자가 되며, 구세주는 아직 오지 않았고 자신들이 구원을 받는다고 믿었고, 지금도 그들은 그렇게 믿고 있다. 유태교 입장에서는 극단적으로 말해 예수 그리스도는 유태인을 배신하고 개나 소나 신자로 다 받아들인 배신자이며(인종적 순수성을 따지는 것은 유태인도 히틀러 못지 않다). 유태인은 그리스도를 다만 여러 예언자 중의 하나로 밖에는 인정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삼위일체의 신으로 모신다. 기독교 입장에서는 그들의 신을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한 유태인을 증오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흔히 로마가 예수를 죽였다고 하지만, 예수를 죽이라고 로마 총독을 부추기고 요구한 것은 바로 유태인이었다. 당시 로마 총독은 유태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그들의 요구대로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했을 뿐이다. 로마제국 입장에서는 예수와 다른 유태인 및 유태교 보수파 간에 갈등은 이해하기 힘든 그들만의 갈등일 뿐이었다. 다신교이며 정복지의 신도 자신들의 신으로 편입시키는 전통을 지닌 로마로서는 예수가 신이냐, 예언자냐 같은 교리 논쟁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여간 만일 로마가 예수를 죽였다면 반유태주의가 아니라 반이탈리아주의가 성행했을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둘러싼 양 종교 간의 교리 차이 및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에 죽게한 원죄에 대한 갈등이 1차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고작 그런 정도로 가지고 그러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476년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 유럽은 기독교가 모든 것을 지배해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심지어 19세기 중반까지도 진화론을 놓고 종교계와 과학계가 과학논리로 논쟁을 한 것이 아니라 진화론이 성경말씀에 위배되느냐는 문제로 논쟁을 하던 사회가 유럽사회이다. 다른 어느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이 성행하던 곳이기도 하다(이 종교재판으로 숱한 유태인이 죽기도 했다).

 

 

두번째는 생활사 관점에서 보았을때 유태인들의 폐쇄적인 생활 태도에 있다. 그들은 탈무드만을 읽으며 그들의 고유 생활방식을 지독스레 고집한다.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를 봐도 전쟁의 그 와중에서도 그들은 유태교를 상징하는 촛대를 항상 챙기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의 도시에 살면서 그들만의 공간(게토)에 모여 살고 기독교와 교류보다는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고집하며 어울리지 않았다(유명한 바르샤바 게토는 천년이 넘는 전통을 자랑하는 유태인 거주 구역을 뜻하는 말이었다. 지금은 그 의미가 바뀌었고, 의미를 바꾼 사람이 바로 히틀러임). 중세에 흑사병이 유행했을때도 유태인들의 피해는 상대적으로 적었다고 한다. 이는 다른 이유때문이 아니라 유태인들의 주변을 청결하게 하는 그들의 생활습관 덕분이라고 하는데, "위생"에 대한 개념이 없던 유럽인들에게는 그런 유태인들이 두려움과 저주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화장과 향수의 유래를 생각해보라).

 

 

기독교인들과 어울리지 않는 배타적인 공동생활. 여기에 마지막 원인이 더해진다. 샤일록의 이미지에서 연상되듯 유태인들은 지역마다 경제를 장악해왔다.  마치 중국계 화교처럼( 화교가 경제권을 장악하지 못한 극소수 국가 중의 하나가 한국과 일본이다). 이것에는 몇 가지 원인이 있다. 일단 나라를 잃고 떠돌이 생활을 하게된 유태인 입장에서는 돈 외에는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없었다. 오로지 돈만 보게 된다. 당시 열악한 경제 활동 여건에서 돈을 벌기 위해서는 다른 방도가 없다. 샤일록처럼 악랄하게 되가는 것이다.  

 

게다가 중세 유럽에서는 돈을 천한 것이라 여겨 직접 손을 대지 않는 전통이 있었다. 토지에 기반한 봉건제 하에서 귀족이나 사제집단은 상업을 천한 것으로 생각하여 직접 손을 대지 않았다. 상업 자체가 로마제국 시대에 비해 낙후되어 있었고, 농민은 무조건 농사를 지어야 했다. 귀족은 전투와 지배, 무력으로 질서 유지를 하는 고귀한 신분이었고, 승려계급은 신에게 봉사하는 집단이었다. 시민계급이 형성되기 전에 돈을 다루는 일을 할 사람이 유태인 말고는 없었기 때문에 유태인들이 경제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사실 이런 문화적 전통은 후대에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귀족계급이 부르죠와에게 밀리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돈을 다루는 일을 하지 않았던 귀족계급이 돈이 딸리자 부르죠와들에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팔게 되거나, 부르죠와들에게 자신들과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면서 신분상승을 꾀하던 부르죠와 계급과 손을 잡게 되는 것으로, 가장 손쉬운 방법이 결혼이었다).

 

 

각설하고, 중세 이후로 유태인들이 지역 상권을 장악한 것은 사실이다(물론 중세 유럽의 사회가 그러한 것을 허용하고 조장한 측면도 없지 않아 있지만). 물론 16~18세기에 들어와 소위 말하는 proto-capitalism이 태동하고 자본주의가 확산되면서 비유태계 부르죠와들이 성장하게 되지만, 유태인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 모든 유태인들이 그런 생활을 한 것도 아니고 평범한 농부들이나 장인들도 많았지만(홀로코스트에 그려지는 유태인은 모두 이런 순박한 유태인들로만 그려졌다. 학살을 감행하는 독일인과 강렬한 대조를 이루게 하려는 목적도 있을 것이지만, 반드시 그런 목적만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마치 모든 유태인이 샤일록과 같은 자로만 머리 속에 남아있게 된 것이다. 마치 모든 이슬람교도가 과격테러분자라고 주장하는 미국내 보수우익세력과 럼즈펠드처럼 말이다.

 

이 반유태주의 전통은 독일에서만의 일이 아니다. 이미 앞서 언급했지만 우크라이나나 러시아에서도 독일 못지 않게 학살을 감행한 국가들 중 하나이다. 거의 대부분의 유럽국가에 크고 작은 반유태주의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히틀러는 본래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반유태주의전통을 국가 권력 차원에서 조직하고 활용한 것이다. 2차대전 수많은 피점령민들이 NSDAP에 부역한 것에도 이 반유태주의는 무시못할 비중을 차지한다. 가장 대표적인 국가가 우크라이나같은 경우이며, 프랑스인 수만명이 NSDAP와 운명을 같이한 것도 이 반유태주의가 큰 몫을 차지했다(피점령민들이 NSDAP에 부역한 배경은 사뭇 천차만별이다. 우크라이나나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같은 발트3국은 반러시아 감정때문에, 보스니아 회교도들과 크로아티아 기독교도들은 세르비아 정교회들에 대한 반감으로, 아직 볼세비키에 반감을 가진 백계 러시아인 등등).

 

 


 

 

<히틀러와 미국과 유태인, 2차대전의 진실>

 

 

흔히 2차대전이라고 하면 히틀러, 유태인 학살, 아우슈비츠 학살등등을 떠올리게 된다. 우리가 흔히 듣던대로 히틀러는 나쁜사람이고 사악한 살인귀였을까?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알아둬야 할 것이다.  히틀러는 유태인에게 굉장히 협조적이고 배려해준 사람이었다.

 

히틀러는 정권을 잡은지 6개월쯤 되었을때 "독일인과 유태인과의 근본적인 차이점에 대해 솔직하게 논의"를 하자고 공개적으로 유태인들에게 제안을 했으며 유태인이 유럽에서 서식하며 그들이 경제와 부를 모조리 독식하고 대공황과 인플레를 일으키는 주범의 입장으로 이미 유럽에서는 [반유대사상]이 오래전부터 뿌리깊이 자라나 있었고 유대인 역시 자신의 민족만이 오로지 여호와의 축복을 받았으며 그들은 유럽과 독일에 서식하며 돈을 벌어들이고 독일경제에 막대한 해악을 끼치고 살면서도 자신들은 유럽과 독일인이 아닌 [유대인]이라고 스스로 자부하고있었던 우월주의에 빠진 사악한 악마와도 같은 종자들이었다.

 

이런 유태인을 소련의 스탈린은 공공연히 탄압해 왔으며 후에 독일이 유태인에 대한 조치를 취할때도 유럽국가들은 암묵적인 동조를 했던 것이며 심지어 영국은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는 유태인들을 학살하기까지 했었다. 히틀러는 유태인을 학살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행동으로 일삼지도 않았다.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며 아랍인들의 영토를 침략하던 일이 한창일 때 히틀러와 나치스는 이러한 유대인들을 정부차원에서 적극 도와주기까지 했다.

 

무엇보다 독일경제의 고혈을 빨아먹는 유태인들이 어디론가 사라져 준다는것 만으로도 히틀러에겐 당장이라도 기쁜 일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부정적이었다. 이 지구상에서 가장 사악하고 비열한 유태인들은 그런 은혜를 감히 감사하기는커녕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면서 그냥 몸뚱아리만 가는게 아니라 그들의 자본과 우수한 기술까지 뽑아가는 등 독일에게서 최대한 캐낼것을 다 캐내어 갔기 때문이다.

 

 

독일은 유태인들의 유럽 최대의 거주지였으며 그로인해 독일의 경제는 치명적인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그런 와중에도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는 계속되어 이스라엘을 만들었고 참을대로 참았던 괴벨스는 일단 유대인들을 연극 예술 음악계에서 파면시키거나 해고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더이상 독일국가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독일에서 기생충마냥 더 뽑아먹을려고 남아있었던 유태인들은 그에 대한 보복으로 나치의 고위 인사들을 암살하기 시작했다.  

 

1936년 2월에는 스위스의 나치 지도자가, 1938년 11월 7일에는 프랑스 파리 주재 독일대사관의 젊은 외교관이 유태인에게 암살당했다. 하지만 반유대주의 사상이 나치에서 제일 강했던 괴벨스 조차도 유대인들이 무장하고 저항하지않는다면 절대로 피를 흘리는 폭력을 사용하지 말것. 유대인의 재산을 약탈하지 말것. 외국계 유대인들에게 절대로 피해를 주지말것을 주의시켰다. 유태인이라면 이를 갈던 괴벨스도 그랬는데 히틀러 총통의 의견 역시 말할것도 없었다.

 

부정 탈세 협잡 등 돈이 관련된 지저분한 사건은 유대인들이 모두 관련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소매치기나 강도 강간범의 75%가 유대인이었다. 빈민층에서부터 고위층까지 독일의 경제를 야금야금 파괴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악한 기생충 유대인들에게 나치스는 오히려 타 유럽사람들에 비해 관대했으며 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나치와 히틀러는 관대하였지만 그와는 달리 직접 그들과 한집건너 이웃으로 살고있던 독일국민들은 반유대주의 정서가 너무나도 강했다. 거리나 건물안에서 잇따라 유태인과의 무장마찰이 크게 빚어졌고 여기서 죽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독일 국민들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히틀러는 더이상 유태인 문제를 간과할수 없다고 판단하여 유태인들을 강제수용소에 수용한 것이었다.

 

물론 무고한 유태인들은 그들이 스스로 팔레스타인을 침략하여 만들어낸 이스라엘로 돌아가게 했으며 수용소는 그에 불족종하던 유태인뿐만 아니라 독일정부에 반기를 드는 정치범들과 각종 범죄자, 전쟁포로들이 전부 포함된 교도소의 역할을 했다고 보는것이 옳다.

 

전쟁말기, 사방에서 공격을 받으며 자원과 물자를 짜내며 전쟁수행에 허덕이는 와중이라 수용소의 죄수들 마저 돌볼 여력이 못되었건 것은 어쩔수 없었다. 아우슈비츠의 열악해진 위생시설과 영양부족, 과로, 전염병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그러나 독가스를 사용해 학살을 행했다는 증거는 찾아보기 힘들며 있어도 하루에도 수만명씩 가스로 죽였다는 굉장히 과장된 소문만이 떠돌 뿐이었다.

 

히틀러의 학살이라며 세상에 널리 알려진 아우슈비츠의 학살극은 이렇다. 400평방미터에서 한번에 3천명씩 하루에 2만4천명을 죽였으며 시체들의 입을 벌려 금이빨이나 입속에 감춘 다이아몬드 뽑아냈다고 한다. 그게 가능하려면 1평방미터에 최소 7명의 인간이 들어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물리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얘기다.

 

유태인 학살에 사용됐다는 지클론 B가스는 발화성이 강하고 접착성이 강하여 취급하기가 여간 조심스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살포한 후 실내 공기를 모두 뽑아낸 다음에도 21시간쯤 지난 후에 들어가야 안전하다. 즉 가스 살포 후 21시간이나 지나야 시체를 처리하는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거기다 위아래 턱을 합하여 모두 4만 8천짝의 턱뼈를 검사하려면 시간도 시간이거니와, 죽은사람은 사후경직으로 입을 벌리는 것 조차 어렵다.

 

 

단지 전쟁의 승자인 미국과 그 배후의 유태인들이 2차대전에서 철저히 유태인을 희생양으로 강조하고 히틀러와 나치를 무고한 인명을 학살한 광신도 집단으로 몰고가며 우리는 그렇게 알고있었던 것이다. 독일은 영국의 수도 런던의 무고한 시민들을 공격할 의사가 전혀 없었으나 단 한발의 잘못떨어진 폭탄을 빌미로 영국이 독일의 수도 베를린의 무고한 시민에게 폭격을 가해 25만명의 시민들을 학살하고 독일 여성들을 집단으로 강간했음에도, 미국이 6.25 전쟁에서 한국인들을 학살한 사건이나 소련의 스탈린이 유태인을 탄압하고 피의 숙청을 벌이며 중국의 모택동은 천안문 사태를 비롯 무려 수천만명의 민중을 학살한 극악한 학살자였는데 이것은 당시의 당연한 상황으로 받아들여지면서 히틀러만은 유독 히틀러라는 이름 석자만 나와도 마치 자동적으로 알레르기를 일으키듯 욕하고 비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비열한 유태인들의 돈벌이 수단으로 변질되어 유태인 생존자들은 히틀러는 극도의 유대혐오 인종주의자이며 나치가 유태인을 개만도 못한 생물체로서 여겨 학살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그 유태인 생존자들은 아랍인들을 학살하며 엄청난 돈을 벌어들여 크나큰 번영과 부를 누리고 있다는 것도, 히틀러와 독일이 전쟁을 벌일수 있도록 그들의 힘을 키워준 미국이 있었다는 것도, 그리고 그들의 추악함을 가려줄 세계 최고의 추악한 존재가 필요했기에 히틀러가 그 모든것을 뒤집어 썼다는 사실도, 주목해둬야할 진실일 것이다.

 

 

1. 유태인의 경제적 장악

기독교에서는 돈은 천한 것이라 하여 만지지 않으려 하였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상업활동을 활발히 하여 많은 돈을 벌여들었다. 경제적 성장으로 유대인은 미움을 사서 탄압의 원인이 되었다.

 

2. 기독교와 유대교간의 교리상 차이

유대교는 기독교를 유대교의 이단자로 인식함으로써 예수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예수를 예언자들 중 한 명으로 주장하였다.

 

3. 유대인들의 폐쇄적 생활태도

유대인들은 그들만의 거주지역으로 ‘게토’를 설정해 그 안에서만 생활하였다. 그래서 대대적인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도 유대인들은 상대적으로 그 피해가 적었다.

 

4. 히틀러의 권력장악과 제2차 세계대전의 정치적 배경이 된 반 유대주의

1933년, 히틀러는 일당독재체제를 구축하게 되고 나치당은 여당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히틀러는 그 후 인종차별법과 유대인이 독일인들의 소위 아리아 문명을 파괴한다는 논리를 내세워 반 유대주의를 강화하고 제2차세계대전을 일으킨다.

 

5. 유태인의 볼셰비키혁명 경제적 원조

짜르왕정(러시아의 왕정)이 무너지게 되고 레닌에 의한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그 당시, 경제적 활동을 잡고 있던 유태인들은 레닌의 혁명을 원조하게 된다. 이로 인해 독일의 반유태주의는 커지게 된다.

 

 

<Adolf Hitler 의 생애>

 

1889.04.20 태어남

1913 병역기피로 뮌헨으로 피신

1918 공산주의자 색출하는 위원의 근무

1919.09 독일노동자당 가입

1920.04 군 제대

1921 당 총서기

1923 뮌헨에서 봉기 실패, 투옥

1930.09 총선거, 나치스 제 2당

1933.01.30 독일수상

1933.07 일당 독재체제 확립

1934.08 독일 대통령 겸 수상

1939.09 제 2차 세계대전 일으킴

1944.07.20 히틀러 암살계획 → 실패

1945.04.30 자살

 

<제 3제국>

독일 역사에서 히틀러 통치기간으로 의회민주주의 질서의 일탈 이었다. 나치스 독일은 962∼1806년의 신성로마제국을 제1제국, 1871∼1918년의 독일제국을 제2제국, 1933∼1945년의 나치스 지배체제를 제3제국이라 일컬었다.

 

<제 3제국의 성립>

1933년 히틀러가 수상에 오르면서 시작됨.

히틀러는 의회에서 나치당의 지휘를 향상 시키고자 함.

의회를 해산 후 뒤따른 선거에서 승리.

개정된 법령- 의회의 실제적인 권한 부정, 수상에게 모든 입법권을 위임.

1934년 8월 대통령(힌덴부르크)이 죽자 대통령제 폐지, 자신이 총통으로 취임.

출처 : 신앙의 신비여
글쓴이 : 심재엽 파스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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