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히틀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편)
2008.01.16 14:22 조회 1668신고
Charles Fourier (1772-1837) Pierre Proudhon (1809-1865) "유태인은 본질적으로 反생산자이다. 그는 농부도 산업 노동자도 아니며 진정한 의미의 상인도 아니다. 그는 언제나 기만적이며 기생적인 중개인으로서 날조와 위조, 부당한 갈취로 먹고 산다. 가격의 변동과 수송에 따르는 위험, 농작물의 작황에 대한 근심, 공급과 수요의 맹점은 그와는 상관없는 일들이다. 그의 경제 정책이란 항상 마이너스적인 것, 전적으로 고리대금업적인 것들이다. 이 것은 바로 셈족 유태인을 통해 부활한 사탄 아리만의 원칙이다." - Cesarisme et christianisme George Sand (1804-1876) Pierre Leroux (1797-1871) Alphonse Toussanel (1823-1881) Mikhail Bakunin (1814-1876) "유태인 맑스는 음흉하고 시류에 민감한, 그렇고 그런 약삭빠른 유태놈들에 둘러쌓여 있다. 모든 곳에서 상업, 은행업에 종사하는 유태인이 금융브로커인 것처럼 문필, 학계, 정계, 또는 각종 색깔의 언론에 있는 유태인은 문학과 지식, 정보의 중개인들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이 금융브로커인 것처럼 유태인은 한 발은 사회주의 운동에, 또 한발은 자본주의에 담고 있으며 독일 언론을 엉덩이로 깔고 앉아 있다. 놈들은 모든 신문사들을 소유하고 있다. 거기서 그 어떤 메스꺼운 쓰레기들이 쏟아져 나올런지는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다. 하나의 거대한 착취적 종파, 거머리의 민족, 왕성한 식욕을 가진 기생충 집단을 형성하고 있으며 그 어떤 민족보다 강력하게 결속되어 있는 이 유태인 세계는 오늘날 전체적으로 맑스와 로스차일드의 손끝에 놓여 있다. 나는 로스차일드는 맑스에게, 그리고 맑스는 로스차일드에게 본능적인 경외심을 품고 있을거라 확신하다. 어떤 이에겐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공산주의와 국제금융자본 사이에 무슨 공통분모가 있단 말인가? 호 호! 맑스의 공산주의는 강력한 중앙독점적 정부를 원한다. 그리고 그러한 형태의 정부가 있는 곳에 중앙은행이 있으며 또한 유대 기생충들이 있다. 정부와 중앙은행을 장악한 유태인들은 인민을 더욱 악착같이 착취할 수 있으며 스스로를 살찌울 것이다. 실로 맑스가 주창하는 사회는 진짜 프롤레타리아들에겐 노예수용소 이외엔 아무것도 아니다. 제복을 입은 노동자 남녀는 북소리에 맞춰 일어나고 잠들고, 또 일할 것이다. 이들 위에 군림하는 특권은 영리한 유태인 소수에게 돌아갈 것이며 이들은 각국 중앙은행들의 국제적 연결망을 통한 가렴주구로 만국 민중의 노동을 착취할 것이다.” Jose Eca de Queiros (1845-1900) “독일의 큰 은행이나 주요 언론은 거의 유태인이 소유하고 있다. 그러기에 유태인을 공격하기란 너무 힘든 일이다. 유태인은 사회인문계의 요직에서 진정한 독일인들을 몰아냈을 뿐만 아니라 그들 특유의 사치방탕과 돈으로 독일국민을 인질로 잡고 있다. 그러나 이 보다 더 큰 모욕은 유태인이 그들 소유의 언론을 통해 독일인들에게 무슨 일을 해야하며 어떤 생각을 어떻게 하고 어떻게 나라가 다스려질지를, 또는 누구와 전쟁을 벌여야 할 지를 감히 가르치려 든다는 점이다. 이 유태인 부자들의 오만과 겉치례는 조용하고 검소한 취향을 가진 독일인들의 입맛을 쓰게 한다. 그들은 언제나 큰 목소리로 떠드는데 흥에겨워 재잘거리는 유태인 만큼 견디기 힘든 것도 없다. 그들은 온갖 보석으로 몸을 치장하고 그들의 마차는 한결같이 금으로 장식이 되어있다... 독일인들과는 분리되어 존재하는 이 유태인 세계는 단단히 결속되어 있으며 외부인의 침입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들은 내키는대로 독일사회에 끼어들고 점령하여 광채를 내지만 그 어떤 독일인도 유태인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 그들은 오직 자신들의 사회 안에서만 혼인하고 자신들의 이익이 관련된 일에는 거액의 기부금을 희사하지만 배고픈 독일인들에게는 빵 한조각 던져주지 않는다. 이 유태인들이 더 큰 재산을 모으고 더욱 밝은 빛을 발하는 꼴을 선량한 독일인들은 차마 눈뜨고 지켜볼 수가 없다. 어쩔 수 없이 이들은 짐을 꾸려 가족을 데리고 빵을 찾아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 것이다.” - Cartas de Inglaterra Count Helmuth Graf von Moltke (1800-1891) Maurice Barres (1862-1923) Georges Sorel (1847-1922) "만약 유태인이 정직한 생업에 종사하면서 사회와 문화에 나름대로 기여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평범한 이웃이었다면 종교와는 상관없이 우리는 유태인을 우리 조국의 敵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불행히도 유태인 識者들은 스스로를 무슨 메시아로 착각하고 보통 유태인들은 이들의 숭고한 사명에 동참하고 성원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변혁의 기수요 건축가로 인정받고 싶어하는 유태인 지식인들은 단지 이민이라는 우연으로 그들이 거처하게 된 나라의 정신적 유산을 집요하게 공격하고 음해한다. 그와 같은 행태는 당연히 그 나라 국민의 정당한 분노를 불러일으키게 마련이다." Walther Rathenau (1867-1922), 바이마르 공화국 외무상, 유태인 Samuel Roth (1893-1974), 유태인 음란물 출판인 (美) 히틀러의 정신적 스승들 Adolf Stoecker (1835-1909), 독일 기독교 사회주의 노동당 창설 "나는 유태인을 증오하지 않으며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좋지 않은 일이 있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종인 루터교의 목회자로서, 또한 제국의회 의원으로서 나는 유태인들이 나의 조국 독일에 야기하는 병폐와 끊임없는 사회불안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제국의 富를 거머쥐고 있는 그들은 부패한 정치인들을 매게로 이 나라의 국정을 농단하며 온갖 종류의 부당행위로 민중을 착취하고 있습니다. 유태인에 대한 나의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정치와 경제, 그리고 신앙적 차원에서 유태인은 독일을 흑암의 구렁텅이로 끌고 들어가고 있습니다."
Karl Lueger (1844-1910), 오스트리아 기독교 사회주의 노동당 창설 "유태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평화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세계는 원만한 합의에 이를 도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의 선민이라면서 다른 민족들의 몸체에 기생하면서 그들의 생산적인 노동을 착취하는 행태는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습니다... 다른 민족들처럼 유태인도 정직하고 생산적인 노동으로 그들의 삶을 꾸려가는 방법을 터득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 이상 그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재앙이 닥칠 것입니다..." 바이마르 독일 "정치, 경제에서와 마찬가지로 유태인은 바이마르 공화국 문화예술계와 연예산업에서도 두드러진 활약상을 보였다. 예를 들어 1920년대 베를린 극장의 80퍼센트가 유태인 소유였으며 모든 연극작품의 75퍼센트가 유태인들에 의해 제작되거나 집필된 것이었다. 이들의 노력으로 게르만인은 그들 역사에서는 최초로 진정한 근대성(modernity)의 은총(blessings)을 체험하게 되었다." - Joshua Halberstam, Schmoozing: the Private Conversations of American Jews, 1997 2004년 브로드웨이서 리바이벌 된 '캬바레', 유태인 샘 맨데스 연출 "지금 돌아보면 역사적인 노력을 하지 않으면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20년대의 도전적인 연극 무대에서는 부친살해, 근친상간, 범죄, 시대의 저급한 취향 등이 시대를 비웃고 있었다. 브레히트(Brecht)와 바일(Weill)의 오페라 ‘마하고니’에서 배우들은 무대 앞쪽 가장자리로 나와서 다음과 같은 말이 적힌 플래카드를 보여주었다. ‘우리 도시들의 혼란상황을 위해서!’ ‘사랑을 사고팔기 위해서!’ ‘살인자의 명예를 위해서!’ ‘비열함이 영원히 계속되도록!’... 미술에서의 혁명적인 시작은 이미 1차 세계대전 이전에 완성되었다... 체제전복, 혁명, 해체의 의지를 담은 그림들의 홍수는 전통적인 유럽의 인간상에 대한 선전포고로 여겨지게 되었다. 야수파, 푸른기사파, 다리파 혹은 다다주의 등은 혁명만큼이나 과격한 위협으로 여겨졌다. 인기있는 용어였던 ‘문화 볼셰비즘’이란 말은 이러한 내면적인 맥락의 의식을 보여준다. 무정부주의, 멋대로 구는 것, 형식 없음 등에 대한 두려움과 거부반응이 나타났다.” - 히틀러 평전, 요아힘 페스트, 안인희 역 바이마르 시대를 풍미했던 유태인 대중지식인 Kurt Tucholsky, "애국심은 가장 멍청한 관념이므로 가장 명예로운 것은 반역이다!" 독일인들은 유태인이 독일에서 나가주기를 바랬다. 그러나 서방매체들은 도대체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는다. 이들은 그저 정신병적인 히틀러가 자신의 정권욕을 위해 반유태주의로 독일국민을 선동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당시 독일을 비롯한 서구의 지각있는 사람들은 소위 '소비에트 민주주의'라는 연막 뒤에서 유태인들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독일인들은 독일의 좌경 공산화를 획책하는 유태인들에게 그런 기회를 허락할 생각이 없었다. 1차대전 말기, 정치, 경제, 언론에 포진하고 있었던 유태인들과 역시 이들이 주도했던 좌익의 책동(그 후로 '등뒤에서 비수꽃기'로 알려짐)으로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국이 선포된 1918년부터 국가사회주의 노동당(NSDAP)이 집권했던 1933년까지 사실상 독일은 좌익과 우익의 내전 상태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주요도시의 거리와 집회장에서는 좌익행동대와 국가사회당 돌격대 사이의 유혈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비록 1919년 1월 로자 룩셈부르크와 아이스너가 주동한 독일판 볼셰비키 혁명은 실패로 끝났지만 독일이 내부로부터 적화될 위험은 히틀러가 집권하기 전까지 계속 상존했다. 이에 더불어, 전체인구의 1퍼센트에도 못미쳤던 유태인은 1차대전 직후 독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방면에서 이미 괄목할만 했던 전쟁 전의 상황을 더 한층 뛰어넘는 활약상을 보이며 사실상 독일의 새로운 지배층으로 등극했다. 유태인들은 이러한 위치를 이용해 독일인들의 전통적인 가치관과 생활양식을 '수구'적인 것으로 배척하는 한편 좌파적인 세계관과 문화예술의 모더니즘을 확산시켰다. 국가사회주의자들이 '유태인 맹독'으로 낙인찍었던 배금주의, 맑스주의, 맑스적 사민주의, 성해방주의, 동성애, 포르노그라피, 정신분석학, 프랑크푸르트 학파, 소비향락주의, 마약상용, 조직범죄, 현대미술, 현대음악, 재즈, 오컬트, 허무주의, 캬바레가 번성했던 바이마르 공화국은 오늘날 서구 유태인들이나 이들에 부화뇌동하는 좌파식자들에겐 '해방'과 '자유'를 상징하는 매우 '진보'적이고 아주 '쿨'한 시대였지만 당시의 보통 독일인들에겐 빈곤과 인간소외, 사회분열, 그리고 부패와 타락의 온상이었다.
"유태인은 진정한 애국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정말 달라요. 무슨 해충들처럼 말이오. 간교한 짓거리를 꾸밀 수 없도록 그 자들은 어딘가에 격리시켜 놓아야 할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포그롬을 일으키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오.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독일의 볼셰비즘 역시 그들이 주동하고 있소. 재위시 나는 유태인들에게 너무 호의적이었소. 나는 지금 내가 그 때 유태인 은행가들에게 베푼 호의에 대해 마음속 깊이 후회하고 있습니다." - Chicago Tribune, July 2, 1922 Louis-Ferdinand Celine (1804-1961) L'Ecole des Cadavres에서 모든 전쟁과 혁명을 일컬어, "유태인이 젠타일(Gentile, 비유태인)을 죽이기 위해 조직한 포그롬"이라고 썼던 프랑스 작가 셀린은 초창기 국가사회주의 운동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이것은 버터의 반란이다... 영원히 벗겨먹여지는 자들의 봉기!... 이것이 무슨 일인가! 이것이 무슨 일인가! 무례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토록 유순했으며 유태인 마음대로였던 버터-브레인들, 언제나 유태인의 의지에 순종했던 아리안들이 말이다. 유태인의 칼은 버터-브레인 아리안을 버터처럼 바르고 자르고 영원히 으깰 것만 같았다. 전쟁과 평화시 상업의 천재, 그 음침한 유대놈들은 언제든 아리안들을 나누고 자르고 투기하고 장사하고 끓이고 모략하고 그들 위에 느긋하게 똥을 지리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런 아리안들이 지금 그들끼리 뭉쳐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버터의 반란이다!... 그런 일은 본 적도, 들어본 적도, 기대해 본 적도 없었다, 단 한 순간도!... "박해"받고 "순교"당한다는 유태인의 속임수에 마누라가 바람피는 것도 모르는 멍청한 아리안들이 넘어가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우리를 박해하는 자들은 유태인이다... 우리는 순교자들의 희생양이다." "11월(1918년), 트럭에 탄 水兵들이 몰려와 우리에게 폭동에 가담할 것을 요구했다. 소위 '우리 조국의 자유와 아름다움, 그리고 존엄성'을 위한 이 투쟁에 나설 것을 선동한 자들은 유태인 청년들이었다. 이들 중에서 전선에 나가 싸웠던 이는 한 명도 없었다... 독일혁명을 교사하고 배후에서 끈을 잡아당기는 자들은 다름 아닌 국제유태인이었다... 혁명은 안정과 질서를 원하는 세력이 아니라 폭동과 강도, 약탈을 꿈꾸는 세력에 의해 주도되었다... 나는 차차 사민주의 계열의 언론사들이 대부분 유태인이 조종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되었다... 유태인들이 만드는 신문 중에 진정 애국적이라 할 만한 신문은 단 하나도 없었다... 나는 손에 닿는 대로 사민주의 팜플렛들을 모아 저자들의 이름을 올려다보았다. 그들은 모두 유태인이었다... 대중의 무지함과 우리 지도층의 안일함 탓으로 사람들은 유태인의 거짓말 공세에 쉽사리 농락당한다... 나는 1919년에 이르러 유태인 칼 맑스의 이론과 그의 진정한 의도를 깨닫게 되었다. 그 때가 되서야 나는 그의 '자본론'과 함께 사민주의가 어떻게 국가의 경제를 파괴하는지를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다. 사민주의의 궁극적인 목표는 국제자본의 독점과 지배를 불러올 토양을 마련하는데 있는 것이다... 실제로 국가의 은인이 될 수도 있는 노동조합을 이용하여 유태인은 국가의 경제를 파괴한다... 러시아를 손아귀에 넣은 국제유태인은 독일을 친구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독일은 러시아와 비슷한 전철을 밟게 될 포식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서방의 소위 민주주의란 것은 맑시즘의 바로 전 단계에 불과하다. 민주주의 없이 맑스주의적 세계의 도래는 불가능한 것이다... 맑시즘이란 신흥종교의 도움으로 유태인이 세상의 만국을 정복한다면 그들의 왕관은 인류의 무덤 앞에 바쳐지는 조화가 될 것이다." - Mein Kampf 1차대전 후 나라의 주인이 유태인으로 바뀐 조국에서 '국가반역' 혐의로 투옥된 히틀러, 1924년
(Judaic Serpent - Marxism / High-Finance) "기독교인으로서 나는 나의 주님이요 구원자는 투사였음을 확신합니다. 무지한 이들의 외면과 고독 속에서 그는 이 유태인들의 정체를 알아보았고 이들에 맞선 투쟁을 이끄셨습니다. 신의 진리는 고통 받는 자가 아니라 투사로서 가장 위대했습니다. 사랑으로 충만한 기독교인으로서 나는 그 성경 구절들에서 어떻게 주님이 그의 몸을 일으켜 신전으로부터 독사의 자식들과 환전꾼들을 내치셨는지를 읽었습니다. 유태인의 맹독에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그의 투쟁은 얼마나 창대했던 것입니까. 2천년이 지난 오늘 나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셔야 했던 까닭이 바로 이 때문이었음을 내 마음속의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깨닫습니다. 나는 내 자신을 기만과 거짓말의 희생자가 되도록 내버려두길 거부하며, 또한 기독교인으로서 내게는 진실과 정의, 그리고 우리민족을 위한 투사가 되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大義가 옳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는 독일민족의 비참한 현실입니다. 아침마다 빵을 얻기 위해 거리에 늘어서 있는 사람들의 패인 얼굴을 보면서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리고 또한 이 불쌍한 사람들을 착취하고 약탈하는 자들에 맞서 싸우지 않는다면 그는 기독교인도 아닌 마귀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 1922.4.12. 뮌헨 연설
바이마르 시대, 돌격병이 없었다면 NSDAP는 좌익의 테러 때문에 집회조차 갖지 못했을 것이다. 집권 전까지 좌익과의 충돌에서 500명 이상의 대원이 목숨을 잃었다.
"나는 독일을 시궁창에서 구해내 다시 한번 유럽의 정상에 우뚝 세운 그의 정치적 명민함과 과단성에 경의를 표한다." - 버나드 쇼 로이드 조지 前 영국수상 "나는 막 독일방문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와 같이 짧은 시간 동안 경험한 것을 모든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동안 먼거리에서 언론의 망원경을 통해서, 그리고 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직접 목격한 사람들의 얘기를 접하여 만들어진 인상보다는 좀더 정확한 것일 거라고 나는 믿는다. 나는 그 유명한 독일의 지도자를 만났으며 또한 그가 이끌어낸 대변화를 목격했다. 이를 위해 그가 사용한 방법에 대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 물론 그의 방법은 당연히 의회민주주의 국가의 그것은 아니다 - 독일국민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서로에 대한 국민들의 태도, 그리고 그들 모두의 사회적, 경제적 전망에 있어 그는 실로 경이로운 변화를 이룩해냈다는데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에서 4년만에 그들의 운동이 새로운 독일을 만들어냈다는 그의 주장은 허언(虛言)이 아니었다. 내가 보고 돌아온 독일은 망가지고 실의에 빠진채 미래에 대한 불안과 절망감에 잠겨있었던 세계대전 후 10년 동안의 독일이 아니었다. 오늘의 독일은 희망과 자신감으로 가득차 있으며, 국경밖에 있는 그 어떤 세력의 간섭도 받지 않고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겠다는 결의로 충만해 있다. 오늘 독일에는 전쟁이 끝난 이후 처음으로 국민들 사이에 안정감이 찾아들었다. 사람들은 전보다 쾌활해졌고 독일 전역을 통해 이러한 명랑한 기운은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오늘의 독일은 이전보다 행복해진 독일이다. 나는 모든 곳에서 이러한 모습을 목격했으며 방문 중에 만났던 독일을 잘 아는 영국인들 또한 이러한 변화에 대해 감탄을 표시했다. 한 남자가 이 기적을 일으켰다. 강력한 카리스마와 흡인력, 오직 하나의 목표를 향해 초지일관하는 자세, 강철같은 의지, 그리고 담대한 마음을 지닌 그는 타고난 국민의 지도자이다. 그는 단지 직함에서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국민의 지도자이다. 그는 독일을 둘러싸고 있는 잠재적인 적들로부터 국가의 안보를 확립했다. 그는 또한 항상 독일국민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굶주림의 공포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켰다. 실로 굶주림은 지난 전쟁의 마지막 해와 평화의 첫 번째 해 독일국민의 심신에 각인된 고통이었다. 그 어두웠던 시절 70만명 이상의 독일인들이 굶어죽었다. 이러한 비극이 남긴 영향은 당시에 태어났던 사람들의 체형에서도 알아 볼 수 있다. 히틀러는 그와 같은 절망과 빈곤, 그리고 오욕으로부터 그의 조국을 구해냈고 오늘날의 독일국민은 그에게 그 누구도 도전하지 않는 권한을 부여했다. 독일국민들 사이에서, 특히 독일의 청소년들 사이에서 그가 누리는 인기는 실로 엄청난 것이다. 나이든 세대는 그를 신뢰하고 젊은 세대는 그를 숭배한다. 이는 단지 인기있는 정치인에 대한 호감의 표시가 아니다. 그것은 굴욕과 절망으로부터 조국을 구해낸 민족적인 영웅에 대한 숭배이다. 어떤 형태로든 히틀러 총통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이 금지되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비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독일에 있을 때 나는 나치당의 고위인사들에 대해 자유로운 비판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히틀러 그 자신에 대한 불만이나 비판은 단 한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 그는 군주국가의 국왕처럼 비판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다. 사실 그는 국왕 이상이다. 그는 모든 억압자들로부터 조국을 구해낸 독일의 조지 워싱턴이다. 히틀러가 독일인의 가슴과 영혼 속에 어떻게 군림하는지를 실제로 보고 느끼지 못한 사람들은 아마도 이러한 나의 기술이 과장된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모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이 뛰어난 민족은 단지 히틀러가 요구하기 때문에 더욱 열심히 일하고 더욱 많이 희생할 것이며, 필요하다면 더욱 굳은 결의로 싸울 것이다. 이러한 핵심적인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독일이 지닌 현재의 잠재력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할 것이다...” - The Daily Express, November 17, 1936 태국 국왕을 전송하는 히틀러, 1937년 독일 루터교단 NSDAP 지지 대회, 1933년 친위대 전용 교회 - 기독교인를 잡아 죽였던 곳은 소련이었지 독일이 아니었다. 히틀러가 비엔나 시절에 그린 그림, '성모와 예수' Leon Degrelle - 독일 친위대 장군 벨기에 태생으로 신앙심이 남달랐던 디그렐은 렉스당을 창설하여 벨기에의 청년 反共운동을 주도했다. 독일이 소련과 개전하자 35세의 나이로 동부전선에 자원한 그는 1944년 프랑스와 벨기에, 스페인 자원병들로 구성된 무장 친위대 28사단의 사단장이 되었다. 많은 무훈으로 기사십자장을 받은 디그렐은 전후 스페인에 망명하여 1994년 사망했다. 또 하나의 거짓말
동영상이 안나오는듯하다.. (미공개 동영상이므로 펌, 즉 복사가 불가능한듯합니다. 직접 주소 클릭하셔서 보셔야할 것 같군요.)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생중계(only 오디오) “한국 대학생(Koreanischer Student)이 세계의 건각들을 가볍게 물리쳤습니다. 그 한국인은 아시아의 힘과 에너지로 뛰었습니다. 타는 듯한 태양의 열기를 뚫고, 거리의 딱딱한 돌 위를 지나 뛰었습니다. 그가 이제 트랙의 마지막 직선코스를 달리고 있습니다. 우승자 ‘손’이 막 결승선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한국인 손기정선수 1위로 골인”…우승때 “한국 학생” 지칭 이 내용은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생중계를 하는 해설자들이 말한 일부 내용입니다. 위 내용은 손기정 선수 미공개 다큐멘터리 파일입니다. 이래도 과연 독일과 히틀러가 우리나라 사람들을 단순히 황인종 취급을 했단 말입니까? 이렇게 증거가 분명한데도 말입니다. 마지막 고 손기정 선수가 우승할 당시 오디오 연설 Hier ist das Ziel vom Hauptkampffeld, schon ist der japanische Sieger in das Marathontor eingegangen, und wir erwarten ihn, Hundertzwanzigtausend sind still, 120tausend sind von ihren Platzen aufgestanden, und warten, sehen auf das dunkle Tor, den Eingang zum Hauptkampffeld, wo der japanische Sieger Son kommen muss, der koreanische Student, er hat die Streitmacht der Welt zertrummert, mit asiatischer Fahigkeit und Energie ist der Koreaner durch den Marathonlauf geschritten, durch Sonne, und durch strassenharte Steine, in einem rasenden Endspurt jagt er heran, der kleine Mann, die rote Sonne, im weissen Feld leuchtet, jetzt stampft er einen Spurt daher, die letzte Gerade herunter als ware er frisch, wie er herausgelaufen ist, ein Naturphanomen, ein Naturlaufer mit letzter Kraft, eben geht Son, der Marathonsieger 1936 durch das Ziel, 여기는 올림픽 주 경기장의 결승선 지점입니다. 우리는 마라톤 우승자 일본선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12만 명의 관중들도 일어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승자인 일본선수 손이 들어서게 될 주경기장의 정문인 검은 문을 조용히 주시하고 있습니다. (손기정 선수가 들어오고, 우승이 확정된 듯 보이자) 그 한국 대학생은 세계의 건각들을 가볍게 물리쳤습니다. 그 한국인은 마라톤 구간 내내 아시아의 힘과 에너지로 뛰었습니다. 작열하는 태양을 뚫고, 거리의 딱딱한 돌 위를 지나 뛰었습니다. 이제 그가 엄청난 막판 스퍼트로 질주하며 들어오고 있습니다. 트랙의 마지막 직선코스를 달리고 있습니다. 대단한 선수입니다. 최고의 힘을 지닌 천부적인 마라토너입니다. 1936년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이 막 결승선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본보가 최근 입수한 독일역사박물관(DHM) 독일방송기록보관실(DRA) 자료에 따르면 조직위측은 12만 관중이 운집한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진행된 장내 마라톤 중계에서 손기정 선생을 ‘한국 대학생’(실제 양정고보 5학년) ‘한국인’으로 표현했다. *출처* 20세기의 소리. (Stimmen des 20. Jahrhunderts. XI. Olympische Sommerspiele 1.-16. August 1936 in Berlin Herausgeber: Deutsches Historisches Museum. Deutsches Rundfunkarchiv) =========================== 故손기정 선생 미공개 다큐 (위 동영상은 베를린올림픽을 찍은 다큐멘터리로, 3분쯤에 NSDAP 국기와 행진이 이어진다. 독일 뿐만아니라 일본, 이탈리아, 미국, 영국, 핀란드, 등 수많은 국가들의 국기와 행렬이 이어진다. 하일을 외치는 독일 시민들과 그들과 다국적선수들을 맞이하는 히틀러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위 사진은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 후 선수촌에서 손기정 선수가 독일 경비병과 함께 찍은 사진. 히틀러가 본 동양인은........ 히틀러는 일본을 바보처럼깔보았다.. 동맹국이라는 취급도않하고 원숭이취급을했다.. 실제로 그는 일본을 부를때는 동쪽인들이라 부르며 깔보았다.. 그가 일본에게 바랬던것은 러시아를 맡아준거뿐이였고 가만히 있는 미국을 건드리는 것에 어쩔수없이 미국한테 전쟁을 선포한거 뿐이다... 그리고 일본이 우리나라를 점령할때 베를린 올림픽에있었던 일이다.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마라톤에 우승한것을보고 이렇게 말했다. ' 저렇게 뛰어난 민족이 미개한 일본인들에게 지배를당하다니... 오히려 히틀러는 우리민족을 게르만민족과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손기정 체육공원은 손기정 선수가 다녔던 옛 양정중학교 교정을 공원 화하였습니다. 손기정선수가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우승을 하고 당시 독일 총통이었던 히틀러에게 받았던 월계수 나무가 지금은 아주 크고 늠름하게 울창한 가지를 뻗고 자라고 있었습니다. 히틀러에게서 받은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 축하 기념품, 월계수 나무 또한 그 당시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 참가한 흑인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제시 오웬스도 마찬가지이다. 역사가 빌 헨리는 그의 저서에서 '히틀러가 오웬스와 악수할 기회조차 없었음에도 악수를 거부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고 기술했다. 어떻게 된 일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히틀러는 오웬스와 악수는 물론 마주칠 기회조차 없었다. 히틀러의 나치즘을 비판하던 외신 등이 이 사실을 과장, 왜곡한 것이었다. 첫날 육상경기가 벌어진 1936년 8월 2일 히틀러는 육상 경기장을 찾았다가 일찍 자리를 떳다. 빡빡한 스케쥴 때문이었다. 당시 높이뛰기에서 정상에 오른 미국의 흑인 코넬리우스 존스는 늦게 경기를 펼치는 바람에 히틀러의 축하를 받을 수 없었다. 히틀러의 마지막 공식사진 "나는 그의 이름을 크게 말하기에도 모자란 사람이며, 그의 생애와 행적은 어떤 감상적인 논의로 다룰 수 있는 차원의 것도 아니다. 그는 인류를 위해 싸운 투사였고 만국에 복음을 가져다준 예언자였다. 그는 가장 고귀한 순도의 정화력을 가진 인격체였고 그의 운명은 사상 초유의 야만이 세계를 휩쓸고 있었던 무렵에 솟아 올랐으며, 또 그 야만에 의해 스러져갔다. 우리 유럽인들에게 아돌프 히틀러는 그런 인물로 기억될 것이다. 그의 가장 가까운 추종자들인 우리는 지금 그의 죽음 앞에 머리를 조아린다." - 크누트 함순 "우리가 그를 사랑했던 이유는 그가 우리의 지도자이거나 영웅이어서가 아니었다. 그의 기상은 하늘에 닿았고 그의 말 한마디는 우리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의 성소를 움직였다. 그럼에도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당신이나 나와 같은 한 인간으로 남았다. 이것이 우리가 그를 사랑했던 진정한 이유였다." - Baldur von Schirach Sir Hartley Shawcross - 영국 법무장관 (前 뉘른베르크 재판 연합국 검사) "A principal reason for the failure of National Socialism to attract adherents is its lack of hypocrisy." - Carlos W. Porter Augustus Kubicek - 히틀러의 고향친구 'Gustl' Paula Hitler, 히틀러의 7년 연하 여동생 1945년까지 군병원에서 사무원으로 일했던 그녀는 전후 한 인터뷰에서 히틀러가 유태인 600만명을 죽인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도 아돌프는 저의 오빠였어요." 평생을 독신으로 산 Paula Hitler는 1960년 오스트리아에서 사망했다. 부록 I: 전쟁에서 지는 법 Alistare Horne, To Lose A Battle: France 1940, 1969 "독일의 그것과 비교했을 때 1930년대 중반 프랑스의 사회분위기는 완연히 다른 것이었다. 1차대전 직후 잠시 일었던 국가적 우월성에 대한 환상은 라인란트 위기 때 그녀가 보였던 무기력 속에서 완전히 증발해 버렸다. 국가적인 웅대함, 유럽대륙에 대한 패권적인 야심이 실종된 자리에는 오직 아무의 간섭도 받지 않고 평화 속에 안주하고 싶다는 갈망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정서는 프랑스의 전 계층에 걸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이러한 국가적 분위기를 초래한 주된 원인은 1920년대 후반 유럽을 휩쓸었던 反戰문학의 붐이었다. 그 소설들은 한결같이 전쟁의 참상과 병사들의 생명을 경시하는 냉담한 군지도자들, 그리고 그들의 무능을 최대한 부각시킨 것들이었다. 독일에서 히틀러는 일찍이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없다'와 같은 소설들을 금지시켰으나 프랑스에서 Henri Barbusse의 소설 'Le Feu'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두 세계대전 사이의 기간 동안 프랑스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은 앙드레 지드, 폴 엘루아르, 루이 아라공, 로망 롤랑과 같은 좌파 지식인 사회의 거목들과 이들이 결성했던 각종 좌익단체들이었다. 그러나 이중에서도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Barbusse였다. 1935년 그가 사망했을 때 30만 명 이상의 추도객들이 페레 라셰즈 묘지까지 그의 관을 뒤따랐다... "이미 역사 속에서 셀 수 없이 보아 왔듯이, 어떤 불쾌한 외부적인 현실이 정서적인 혼란을 불러올 때, 사회는 허구적인 향락과 내부의 흥미 거리에 스스로를 더욱 깊숙이 파묻고자 하는 뿌리칠 수 없는 유혹에 빠져들곤 한다. 로마의 성벽을 두들기는 야만인들의 기세가 날마다 거세어질수록 로마인들은 콜로세움 경기에 더욱 열광했으며 성안에서 벌어지는 향연의 광란극은 그 도를 더해갔다.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프랑스의 일상에서 '현실도피'는 가장 두드러진 문화적 코드로 스스로를 드러냈다. 미술계의 다다주의와 초현실주의는 콕토와 지라두의 동화적인 판타지 세계와 호홉을 같이 했으며, 1920년대의 폭스트롯 댄스매니아는 디아길레브의 광상곡(狂想曲) 무대, Ballet Russe, Ballet Suedois, 조세핀 베이커의 Revue Negre와 함께 승승장구했다. 눈요기를 위해서라면 그 무엇이든 통했던 시대였다... '현실참여'라는 슬로건과는 걸맞지 않게 1930년대 후반 플로레 카페(Cafe Flore)에 진을 치고 있었던 장-뽈 사르트르와 그의 좌익 동지들의 실존주의 문학만큼 현실에 대한 반란과 도피를 상징하는 것도 없었다... 사르트르와 부보아르와 마찬가지로 프랑스 대중은 국가적인 현실도피의 한 방편으로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정치인들의 비리 스캔들에 열중했다. 이와 함께 더해갔던 것은 정부와 정치인들에 대한 대중의 뿌리 깊은 혐오감과 환멸이었고 이는 국가적 위기를 목전에 둔 프랑스에 격심한 사회분열을 초래했다. 1934년에 이르러 프랑스에서 정치인들에 대한 평판은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는 곳까지 추락해 있었고 그와 함께 정부의 위상도 곤두박질했다. 스캔들은 끊임없이 터져 나왔고 이들 모두에는 냉소적인 대중에 의해 '그들만의 공화국'으로 불렸던 정부의 고위인사들이 항상 연루되어 있었다. Pertinax 의 냉소적인 비판처럼, 프랑스의 정치인들은 그들의 조국을 '폐업을 앞두고 남은 재산분배에 들어간 개인기업'처럼 대하는 습관에 빠져있었다. 제3공화국의 일상을 떠올리며 엘리 부와는 공석이 된 장관직을 차지하기 위해 조르쥬 보네와 카밀 쇼탕이 점심식사 자리에서 벌였던 언쟁에 대해 술회했다, "이번엔 내 차례야!" "아니라고, 조르쥬, 내 차례라고..." 다가오는 엄청난 비극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소인배들의 현기증 나는 자리다툼은 그 도를 더해갔다. 해가 1934년으로 넘어가기 전 18개월 동안 내각은 모두 다섯 번 교체되었으나 매번 각료들의 면면은 똑같았다. 1932년 중반부터 1939년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프랑스에는 19개의 내각이 들어섰다 퇴진했으며, 이들 정부에서 총리를 지낸 인물은 모두 11명, 재무상은 8명, 외상은 7명, 국방상은 8명에 달했다. 파리 택시운전사들의 가장 흔한 욕설은 'Espece de depute!(국회의원 같은 놈!)'였다. 국민은 정치인을 혐오했고 정치인들은 서로를 혐오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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