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뽕 등소평

[스크랩] 숨겨진 역사의 진실 (임진왜란)

그리운 오공 2017. 11. 22. 19:36



임진왜란을 일으킨 천주교 예수회(Jesuite)


우리나라 천주교인들은 영화 '명량'(鳴梁)을 감상할 자격이 과연 있는가?

  

 

임진왜란의 배후에 있었던 예수회 소속 첫 교황 프란치스코


한국과 로마 카톨릭의 첫 만남은 참으로 불행했다. 임진왜란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군단의 병사들은 대부분 로마 카톨릭 교회 신자들이었다.


조선 침략 군단의 이름은 ‘그리스도단’이고, 그 침략 군단 앞에는 십자가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고, 검정색 사제복에 ‘로만 칼라’를 한 로마 카톨릭 교회 사제들이 뒤따랐다. 세스페데스가 이끄는 예수회 소속 사제들이었다.


예수회 사제들은 조선인을 잔혹하게 살육한 자들의 고백성사를 받아주고, 이른바 ‘성수’를 뿌리면서 조선침략 행렬에 가담했다. 이순신 장군이 없었더라면 우리나라와 민족은 큰일 날 뻔했다.

 

예수회(Society of Jesus)는 현재 카톨릭 수도회 중 가장 많은 신도와 사제수를 자랑하는 최대의 분파다. 제수이트(Jesuit) 또는 한자음을 따 '야소회(교)'로도 불린다. 남미 출신으로 첫 카톨릭 수장이 된 교황 프란치스코는 예수회 출신 최초의 교황이기도 하다.

 

휘날리는 십자가 군기를 앞세우고 조선을 침략한 왜군들

 

작전회의를 진행중인 임진왜란 장수 고니시.

그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KBS에서 방송됐던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 등장했던 극중 고니시 장군의 캡처 사진)

 

↑ 작전회의 중인 고니시 장군의 뒷편 엠블럼.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 마크 중 하나로 십자가와 천사의 나팔을 형상화했다.

 


진왜란 장수 고시니가 사용한 십자가들


1549년 7월, 일본 큐우슈우(九州)에 상륙한 예수회 신부 프란시스 사비에르(Francis Xavier)의 전도를 받고 천주교를 허용한 일본 최고 지배자였던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로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예수회 신부들을 만나 명과 조선을 정복하여 전역에 교회당을 세우고 그들 백성들을 천주교인으로 만들겠다고 호언하며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당시 천주교가 포교에 열을 올린 것은 새로 생긴 개신교가 새로운 나라나 대륙에서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먼저 들어가서 선점하기 위한 것으로서, 일본에 조총(鳥銃)을 전수한 예수회의 프란시스 사비에르 신부는 카톨릭 사제로 예수회 창립 멤버 6인 중 1인이다.

 

그리고 천주교가 뒤에서 적극적으로 후원한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천주교는 막강한 자본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실제로 세스페데스 신부(예수회)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군에 종군하여 조선에 전도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들 가운데에는 천주교에 개종한 자들이 다수 있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후, 1611년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天家康)의 천주교 박해 때에는 무려 21명의 조선인 천주교 신자가 순교하였다.

 

콘스탄틴이 바빌론 종교와 그리스도교를 혼합해 만든 거짓 그리스도교인 로마 카톨릭(천주교)은 마틴 루터 같은 개혁자들의 종교개혁으로 인해 무너져버렸다.

 

개혁교회의 등장으로 인해 교황은 불안했고 종교재판으로 그리스도교를 뿌리뽑아 없애려 하던 도미니크 수도회도 좌절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군사적인 지식에 해박하고 정치적 식견이 풍부한 뛰어난 전략가 이그나티우스 로욜라는 교황을 알현하여서 세계의 정치와 경제를 장악하고 세상의 종교를 교황청을 중심으로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곧 루시퍼를 숭배하는 일루미나티 지부를 설립하고 ‘예수회(Jesuite)’를 창설했다.

 

로욜라는 천주교에선 <성 이냐시오>로 불린다. 그가 창립한 예수회의 지부는 바다를 건너고 산맥을 넘고 대항해를 하며 어디든지 못간 곳이 없었다. 그들은 곳곳에 지부를 설립하고 거짓 그리스도교 신앙을 알리며 정치인들이나 상인들과 거래했다. 우리나라 서강대학교도 예수회가 설립한 대학이다.

 

프란체스코 사비에르(Francesco Xavier, 1506-1552)

   

임진왜란과 메이지 유신은 예수회 작품

 

그런 목적으로 그들은 일본으로 항해했다. 1543년 천주교 예수회 신부들이 탄 포르투갈의 상선이 일본의 바다에 도착하여서 일본의 어린 영주에게 그들은 화승총을 선물하였다. 그 화승총을 그 후 계속 보급하여서 일본으로 하여금 정복적 야욕을 뜨게 하는 첫 계획에 착수하였다.

 

조중화라는 임진왜란 전문가가 저술한 <다시 쓰는 임진왜란사>를 보면 ‘프란체스코 사비에르’라는 천주교 신부가 일본 땅에 1549년에 정식적으로 와서 포교를 시작하며 그와 함께 온 유럽인들이 화승총을 계속 보급했다고 하는데. 프란체스코 사비에르는 예수회 사제였다. 그는 포르투갈의 예수회 소속 신부였다. (26p~28p)

 

화승총을 조총으로 개량하고 삼단철포부대를 운영하여서 일본을 제패한 오다 노부나가는 천주교 예수회를 적극 후원하였다. (31p)  


조중화가 쓴 <다시 쓰는 임진왜란사>는 이후 오다 노부나가의 대를 이은 히데요시가 임진대전쟁을 일으켰다고 나온다.  


그런데 이 대전쟁을 권유한 배후의 인물이 ‘고니시 유키나가’ 였다고 한다. (61P)

 

‘고니시 유키나가’는 천주교 신자였으며 특히 예수회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인물이다.

 

예수회 신부 세스페데스를 같이 데리고 다니며 신부들과 함께 조선 땅을 밟으며 온갖 미사와 고해성사를 하게 한 이 인물은 정유재란 때 포로로 일본에 끌려간 강항의 ‘간양록’에 보면 그가 소오 요시도시와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전쟁을 할 것을 권유했다고 일본 국민들이 서로 수군수군거렸다고 말한다. (61p)


고니시가 이 전쟁을 일으킨 이유는 분명하다. 천주교는 세계의 정치와 경제를 장악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선 조선반도와 일본열도 그리고 중국 등지를 차지하여서 그곳에서 자본을 많이 얻어내야 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장수 고시니의 군대가 사용한 군기들 기록화(일본 자료).

그림 하단에 조총을 어깨에 멘 왜병 옆으로 십자가 군기도 보인다.

  

예수회 신부는 틀림없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속삭였을 것이다: “전쟁을 일으키면 우리 예수회가 중국은 물론 인도까지 정복시켜줄 것이다.”

 

그래서인지 히데요시는 인도까지 정복할 수 있다고 너무나 자신만만했고 심지어 부채의 앞과 뒷면에다가 중국어와 조선어를 써서 달달 외웠다고 조중화는 말한다.

 

여기서 독자들이 명심해야할 바는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예수회는 교황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로마 카톨릭 비밀조직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사실상 ‘다른 예수’ 즉 거짓 예수(적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다.

 

그들의 위험성을 알아차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 무모한 전쟁이 끝난 이후 천주교인들을 일본에서 씨를 말려버리고 예수회를 추방시켰다.

 

그러나 예수회는 수백 년이 흐른 뒤 함포를 단 미국 함선들을 끌고 와서 일본 땅에 쏘아대며 협박하게 하여 결국 일본을 개항시키고야 말았다.

 

그리고 예수회는 메이지 유신을 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급속도로 일본 열도를 차지하고 일본을 부추겨 조선을 점령하게 하여서 천주교인들이 거기에 합법적으로 드나들 수 있게 하였다.

 

굳이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대원군이 예수회와 천주교인들을 목을 잘라가며 개항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한국에서는 대원군 때문에 조선의 개화가 늦어져서 망했다고 대원군을 증오하게 만드는 역사교육을 시킨다. 한국의 교육체계가 예수회의 입맛에 맞게 교육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천주교인들이 성인이나 위인으로 존경하는 김대건 신부나 알퐁소 신부 조차 예수회 소속임은 알려진 상식이다.

 

이미 예수회는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익히 알려진 존재이며 공개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니시 유키나가와 이순신

 

김훈은 ‘칼의 노래’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천주교를 잘 묘사하고 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부산에 상륙하여 동래성을 함락하고

조령을 넘어 북진했던 고니시의 부대는

줄곧 큰 깃발을 앞세우고 있었다.”


“붉은 천에 흰 글씨로 십자가가 그려진 깃발이었다.”

 

 조선군을 무찌르고 있는 고니시 장군 군대.
사진 우측의 십자가 군기를 보라. 

중앙에 보이는 깃발은 십자가와 천사의 나팔을 형상화한 고니시의 부대 마크이다.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 등장했던 장면)

 

그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유언으로 철병을 명하면서 6년에 걸친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왜군은 철수를 서둘러야만 했다.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충무공은 목에 걸린 큰 가시였다. 앞길을 막고 있는 큰 바위였던 것이다.

 

충무공이 바다의 요충을 가로막고 있어서 도저히 해상 퇴각로를 뚫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고니시는 퇴로를 찾아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면서도 조선 양민들의 목을 베어 소금창고에 옮기는 작업을 계속했다.

 

조선 양민들의 목을 벨 때에도 그의 진영에는 변함없이 비단 천에 열십자가 그려진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조선 양민들의 베어진 목들이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에게는 제사상의 돼지머리보다 훨씬 처리하기 쉬운 고깃덩어리에 불과했다.


↑ 일본 만화 '수군장~소서행장전' 표지.

독실한 천주교 신자답게 고니시는 십자가를 부착한 투구를 쓰고 있다. 

 

어느날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선 양민의 목 수백 개와 함께 전령을 명나라 수군 장수 진린에게 보냈다.

 

“조선인의 목인지 일본군의 목인지 누가 구분할 수 있겠소? 이 수급들을 전과 보고용으로 명나라 황제에게 보내시오. 남의 나라에 와서 힘들여 싸울 필요는 없는 것 아니겠소? 진린 장군께서는 이제 해상 퇴각로를 열어주시오. 우리는 이만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오.”

 

하지만 충무공은 더 많은 왜군의 목을 베어 진린에게 보냄으로 퇴로를 열어주지 못하도록 했다.

 

예수회 사제가 종군신부로 참전한 일본 십자군

 

십자가 깃발을 앞세우고 전쟁에 나가는 것은 템플기사단이나 프리메이슨들이 흔히 사용하는 전형적인 ‘과시’였다. 그처럼 십자가 깃발 나부끼며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의 왜군이 부산에 상륙했다. 임진년(1592년) 4월 13일이었다. 왜군(倭軍)의 배에는 십자가 깃발이 휘날렸다. 우리의 역사에서 가장 참혹했던 전쟁인 임진왜란의 시작이었다. 그토록 비극적인 사건이 우리나라와 천주교의 최초의 만남이 되었다.  

 

왜군 제1군 ‘고니시 유키나가’와 사위이자 쓰시마 도주 ‘소 요시토시’가

병선 수백 척에 병력 1만8700명을 이끌고 부산 영도에 상륙했다.

 군기로 십자가 깃발을 사용.

 

십자가 군기 휘날리며 돌격하는 기리시단(吉利支丹) 왜군(일본 자료)

( http://ameblo.jp/constantinvs/ )

 

십자가 군기를 들고 있는 왜병들 앞에서 조준사격을 하고 있는 조총병들(일본 자료)

( http://ameblo.jp/constantinvs/ )

 

조선 수군의 화포 공격을 받고 격침되는 고니시의 왜군 병선.

십자가 군기를 보라!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 등장했던 장면)


1592년 4월 13일(선조 25년) 침략군의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예하부대 18,700여 명을 실은 700여 대의 함선으로 부산항에 쳐들어 왔다. 펄럭이는 십자가 군기를 달고서 말이다! 이 나라에 7년간의 대환난이 시작된 것이다.

 

독실한 로마 카톨릭 교회 신도인 고니시(소서행장)는 마치 교황의 군대 말타기사단처럼 십자가 깃발을 군기로 사용했다. 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진중에는 스페인 출신의 로마 카톨릭 교회 신부인 세스페데스 신부가 사목(司牧)했다. 조선 땅을 밟은 최초의 천주교 성직자이자 조일전쟁을 목격한 유일한 서양인으로 전해지기도 하는 예수회 사제 세스페데스. 종군신부의 자격으로 와서 경상도 일대의 해안지방에 약 1년간 머물면서 조선인에 대한 선교에도 관심을 가지는 등, 당시 상황에 대한 4통의 서간문을 남기기도 하였다.

 

소서행장은 세스페데스 신부더러 밤마다 미사를 올리도록 하자고 말했다. 세스페데스 신부는 물론 휘하 병사들도 좋아했다. 그들도 로마 카톨릭 교회 신도들이었던 것이다. 소서행장 봉토였던 아마쿠사 제도는 ‘그리스도의 섬’이라고 불릴 정도였으니 당연했다.

 

1584년에 영세를 받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영세명 아우구스티노로 독실한 천주교인이었다. 그의 집안도 모두 천주교로 개종했다. 아버지의 세레명은 요나단, 어머니는 막달라, 대마도 성주의 부인인 딸은 마리아였다.

 

小西行長 

 

그가 거느린 장수도 대다수가 천주교인들이었다. 흑전장정(고로다 나가마다), 오도순현(고지마 쥰겐), 천초종원(아마쿠사 다네모토), 宗義智(소 요시토시) 등이 모두 일본의 기리시단으로 잘 알려진 인물들이다. 일본에서는 천주교인을 기리시단(吉利支丹)으로 불렀다. 기리시단(吉利支丹)은 Christian의 포르투갈어를 일본어로 음역한 것이다. 조총으로 무장한 이 기리시단 부대가 십자가 군기 휘날리며 조선을 침략한 왜군의 제1군이었다.

 

천주교 군인들이 선봉이 되어 일으킨 임진왜란이 조선에 어느 정도 피해를 입혔는가를 살펴보면, 이 전쟁으로 조선인은 적게는 수십 만 명에서 최고 100만 명이 죽었고(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는 조선인 전체 인구가 940만 명 수준이었음. 즉 임진왜란으로 조선 백성 10명 가운데 1명이 죽었음), 농경지 60%가 파괴되었고, 10만 점의 문화재가 약탈되었고, 수많은 문화재와 민가와 관가와 궁궐이 불탔고, 10만 여명의 백성들이 왜국에 포로로 잡혀 갔다.

 

그들은 함선의 돛대엔 화살로 십자가를 만들어 달기도 했고 돛엔 흰 십자가를 그려 넣기도 해 천주교인임을 표시했다. 십자가를 처음 본 조선병사들은 깃발의 의미를 몰라 어리둥절했다. 어떻게 보면 이들은 일본 십자군인 셈이었다. 그 잔학상이란 중세의 십자군보다 결코 덜하지 않았다. 왜군은 조선 땅에서 전쟁사에 보기 드문 야만적 죄악을 질렀다. 십자가 깃발 아래 귀베기, 코베기도 자행되었다. 

 

 

조선 최고의 명장 신립 장군의 조선군을 조총으로 유린하는 왜군.

천주교 신부가 종군사제로 참전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왜군과

신립이 이끄는 조선 경군(중앙군) 병력이 격돌한 충주 탄금대 전투(忠州彈琴臺戰鬪) 장면.

당시 8만 명의 조선군이 전멸했다. 1592년 4월 28일.

 

예수회는 동방에서도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선교의 목적으로 항해사들을 포섭하여 배를 타고 멀리 멀리 동양으로 가서 인도 명나라 일본에도 진출 기지들을 설치하고 서양의 선진 문물들을 줌으로써 무역적 이득도 취하였다. 그런데 유독 조선만이 예수회는 물론 서양 사람들을 모조리 추방해버리니 예수회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접근해서 조선 정복의 야망을 부추긴 것이다.

 

오다 노부나가가 암살당하자 예수회는 히데요시에게 접근했다. 예수회 신부인 루이스 프로이스가 저술한 '일본사'를 보면 당시 예수회는 오다 노부나가를 매우 선호했는데 노부나가가 죽자 크게 낙담했으며 히데요시는 외모도 인물됨도 하찮아서 실망했지만 그래도 예수회 신부들은 히데요시를 ‘하나님의 칼과 채찍’이라고 극찬하면서 그들의 목적을 위해 이용했다. 임진왜란 때 제1군 선봉장인 고니시 유키나가는 예수회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예수회를 광신하는 자였던 바, 히데요시가 고니시를 제1군 선봉장으로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통틀어 계속 임명하고 신임한 것도 바로 예수회 때문이었다.

 

결국 임진왜란은 예수회의 동방 진출 야욕에 의해 일어난 것이고 예수회 신부들이 왜군을 따라 종군하여 조선 땅을 밟고 다니며 소위 ‘성수’를 뿌리면서 일본 십자군을 축복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는 예수회 신부 루이스 프로이스(Luis Frois)가 있었다. 그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여러 번 만날 정도로 매우 높은 위치에 있었다.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인 프로이스는 30년 가까이 일본에 체재하면서 자신이 직접 체험하거나 전해 들었던 갖가지 사실을 방대한 기록으로 남겼는데 이것이 훗날 ‘일본사(Historia de Japam)’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게 되었다. 이 책은 진주박물관이 우리말로 번역하여 출판했다. (프로이스의 일본사를 통해 다시 보는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국립진주박물관).

 

포르투갈 리스본 국립도서관 발행 원본 표지

.(원본 자체가 오래 되어서 표지 색깔이 저렇게 누렇다.)

국내에는 210~360 페이지짜리 단행본 1권으로만 나왔는데,

일본판 완역 루이스 프로이스는 12권짜리 시리즈이다.


 

일본에 와서 오랜 기간 활약하였던 예수회 사제 프로이스가 쓴 ‘일본사’는 지금껏 볼 수 없었던 임진왜란에 대한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제공해 주는 문헌으로서 정독할 가치가 있다. 프로이스가 쓴 이 책을 보면 조선을 ‘이교도’라고 기술했고, 고니시 유키나가를 성모 마리아를 위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영웅,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하나님이 쓰시는 칼(“우리 주 하느님은 이 사람 곧 관백 히데요시를 일본에 있어서의 성스러운 검과 채찍으로 선택하셨던 것이다.”), 임진왜란을 하느님의 聖戰으로 적었다.


또한 예수회 신부 프로이스는 ‘일본사’ 결말부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리하여 7년에 걸친 조선 전쟁에 마침내 종지부를 찍게 되었습니다. 이 전쟁은 우리(일본인) 천주교도들의 커다란 노고와 비용 지출 위에 지속되어 왔던 것으로 천주교도 영주들에게는 자신의 영지를 안전하게 지켜낼 수 있다는 유리한 측면도 있습니다...약(略)...하느님은 진실로 선하신 분이므로 성스러운 주님의 영광을 위해...약(略)...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적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거대한 승리에 관한 가장 기쁜 소식을 이제 머지않아 접하게 될 것으로 믿습니다. 1598년 10월 3일 나가사키에서... 성스러운 주 하느님의 심부름꾼이...이처럼 임진왜란은 사실상 천주교 십자군이 조선을 침략한 전쟁이었다.

 

임진왜란 배후에는 천주교 예수회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땅에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를 사칭하는 로마 교황이 방한 중이다. 프란치스코는 예수회 출신 최초의 교황이다. 그를 위해 우리 정부는 수도 서울의 중심지인 광화문 광장을 바티칸 광장으로 바꾸어 주었다. 광화문은 대한민국의 심장이다. 더욱이 일본 십자군 장수 고니시와 혈전을 벌이고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의 동상도 서 있는 곳이다.

 

이 성스러운 장소에서 오늘 약 백만 명이 운집해 R.C 예수회 사제 교황을 알현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범정부적으로 그들의 종교행사를 적극 지원했다. 한국 정부와 언론은 프란치스코 교황을 한 종교 지도자가 아니라 全知全能(전지전능)하고 결점 없는 神처럼 대우하였다. 언론은 교황의 訪韓에 즈음하여서는 바티칸의 기관지처럼 선전과 홍보에 충실하였다. 광화문 광장에서 교황이 집전한 소위 시복식 미사는 생중계되었다. 천주교가 대한민국의 국교인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過恭非禮(과공비례)의 극치였다.


오, 왜군의 조총과 장검에 참혹하게 살육당한 조상님들이시여! 너무도 무지하고 순진한 이 시대의 후손들을 용서하지 마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자손들이 역사적 진실을 찾고 정의를 따르도록 도와주소서!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집전하는 시복식 미사에 운집한 군중

  

 


출처 : 빛과 흑암의 역사 (성경연구,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글쓴이 : 별002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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