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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버킹엄셔에 위치한 로스차일드가 저택.1874~1889년 건축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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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통화 공급권을 통제할수 있는 권한을 달라.그러면 누가 법률을 만들든 상관없다."
로스차일드 가문(Rothschild)의 시조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가 한 말입니다.현재 세계 금융을 움직이는 핵심세력이자 록펠러가와 함께 세계 단일정부 수립을 목표로 '빌더버그 그룹'을 비롯한 각종 단체들을 배후에서 움직이는 이 가문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지요.
로스차일드하면 사람들은 '유대계 재벌'을 가장 먼저 떠올립니다. 시온 의정서도 떠올립니다.그리고 이것을 근거로 유대인들이 세계 지배를 목적으로 이러한 일들을 꾸민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만.. 이건 중세 유럽에서 부터 써왔던 아주 오래된 수법에 불과합니다.
히틀러는 자신의 책 나의 투쟁(Mein Kampt)에서 시온 의정서를 언급하였고,유대인 대학살의 근거로써 이것을 철저히 이용합니다. 히틀러는 '일루미나티'였습니다.현재 세계정부 수립세력과 같은 편이라는 말이고 그것이 유대인에 대한 그들의 생각이란 말이죠.
일루미나티는 인종차별주의자들 입니다. 아이들은 포로수용소 놀이를 하면서 자라고, 유대인은 그들에게 '증오의 대상'입니다. 유대인들이 일루미나티에서 높은 지위에 오르려면,희생 제사때 스스로 유대인임을 부정하고 배신하는 맹세를 해야만 합니다.
20세기초에 이미 시온의정서가 거짓이라는 많은 증거가 폭로되었 으며 증인들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2차 대전 전까지 유럽의 많은 나라에서 시온 의정서는 고의적으로 퍼뜨려졌고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을 정당화하는데 온 유럽의 암묵적 동의를 이끌어 냈습니다.
전직 예수회 사제와 일루미나티들은 증언에서 세계 단일정부수립 을 위해 자행하는 일들의 모든 책임을 유대인에게 돌리고 자신들 의 실제를 숨기기 위해서 일부러 공개한 것이라 밝히고 있습니다. '시온의정서'가 일루미나티의 활동 내용과 같은 이유를 알수있죠.
로스차일드 가문(Rothschild)은 의외로 사람들에게 생소합니다. 금융업을 기본으로 석유,다이아몬드,금,우라늄,레저산업,백화점 을 비롯해 최고급 프랑스 와인에 이르기까지 우리 생활 곳곳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물론 잘 들어나지 않은채로 말이죠.
그 중에서도 미국 FRB(연방준비은행)과 각 나라의 중앙은행들이 그들의 소유이며,화폐발행권을 쥐고 있어서 화폐를 발행하거나 채권을 매입할때 그 나라 국민들의 세금으로 천문학적인 이자를 벌어들이고 있다는 사실은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국 FRB(연방준비은행)의 생성 과정과 역할,소유주 관련 글과 일루미나티이자 마인드컨트롤 담당자였던 Svali의 증언들 그리고 경제저격수 관련 동영상 링크합니다.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미국 중앙은행 FRB- 국제 금융세력의 개인 사설은행 일루미나티 Svali 증언 2가지 모음-마인드컨트롤 담당자
경제 저격수와 세계정부 필수 동영상 모음,자료,서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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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이후 약 250년간 '유럽과 전세계의 돈'을 장악해 왔던 로스차일드가. 나폴레옹전쟁,워털루전쟁,미국 남북전쟁,러일전쟁,제1차 세계대전,제2차 세계대전,모든 전쟁을 비롯해 수에즈운하 건설,산업혁명, 각국 중앙은행 설립에 이르기까지 로스차일드가는 인류 역사의 주요 사건과 전쟁에 개입해 왔습니다.
전쟁시 양쪽 정부에 모두 돈을 빌려주어 더 많은 돈을 버는 수법으로 유명했던 그들에 대해 당시 유럽에서는 '로스차일드가의 지원이 없으면 유럽의 어떤 왕도 전쟁을 일으킬 수 없다'는 말이 떠돌았고, 이미 엄청난 부를 소유하고 있던 나탄 로스차일드는 자신이 전쟁과 평화의 중재자라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M.A. 로스차일드의 부인이자 그의 다섯 아들의 어머니였던 '구틀 슈내퍼'는 세상을 뜨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아들들이 전쟁을 바라지 않는다면, 전쟁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도 없어질 것이다.'
각국 왕가와 밀접한 관계를 멪으며 전쟁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은 그들은 유럽 국가들의 재정까지 마음대로 움직했으며, 막대한 부를 통해 유럽 경제를 움켜쥔 후에는 미국에도 손을 뻗치기 시작합니다.'야콥 시프'라는 청년을 로스차일드가의 대리인으로 보내어 미국경제도 모두 자신들이 장악합니다.
미국의 대표적인 은행가 JP모건, 절강의 카네기, 철도의 해리먼, 석유의 록펠러 등은 모두 로스차일드의 자금을 받아서 사업을 하고 거부가 된 사람들입니다.뿐만 아니라 1913년 미국 연방준비은행(FRB)을 설립하도록 함으로써 미국의 화폐발행권까지 손에 넣게 되며,그 결과 막대한 이자를 벌어들이게 됩니다.
그들은 유럽국가들의 식민지정책에도 돈을 지원하여. 아프리카의 다이아몬드 광산,석탄 및 각종 지하자원등을 개발하여 부를 축적했고 1917년 러시아의 공산혁명에도 돈을 대 마지막 남은 유럽의 독립 왕조까지 결국 무너뜨립니다.
또한 영국정부의 수에즈운하 주식 매입자금을 공급하여 식민지 기반을 조성하고, 당시 오일로드 확보를 위해 영국이 점령했던 팔레스타인에 대해서는 ‘벨푸어 선언’ 즉.영국이 팔레스타인 땅을 유대인에게 양도하여 유대국가를 건설하도록 한 약속을 통해서 향후 이스라엘 독립의 단초를 제공하도록 합니다.
실제 이스라엘 건국시에 로스차일드가에서는 막대한 자금을 건국자금으로 지원하기도 하였으며,현재까지도 많은 돈을 대고 있고 정보조직 '모사드'를 개인조직처럼 활용하고 있기도 합니다.물론 이스라엘의 독립은 세계정부 수립과정 에서 미리 계획된 '치명적인 분쟁'을 위한 필요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역사
현재의 로스차일드 가를 만든 장본인은 메이어 암셸 바우어(Mayer Amschel Bauer)입니다. 그는 1744년에 독일 프랑크 푸르트의 유대인 거주지역인 게토 에서 태어났습니다. 골동품업자였던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가게 앞에 붉은 방패(rot schild 독일어로 로트쉴트, rot 붉은색, schild 방패)를 내걸었습니다.
후에 메이어 암셸 바우어는 자신의 성씨를 아버지 골동품 가게의 이름을 따서 로스차일드(Rothschild)라고 바꾸게 됩니다. 메이어는 어린 시절부터 두뇌가 명석하였으며 아버지에 의해 여러 교육을 받게 됩니다. 특히 상업적인 부분에 대해서 많은 교육을 받고 실제 아버지를 도와 가게에서 일하기도 합니다.
아버지가 몇년 후 사망하자 마이어는 13살의 나이에 오펜하이머 가문 은행에 견습생으로 들어가게 됩니다.얼마지 않아 정식 직원이 된 그는 당시의 새로운 금융 시스템에 눈을 뜨게 됩니다. 20세가 되어 프랑크 푸르트로 돌아온 그는 아버지처럼 옛날 화폐를 취급하는 골동품점과 대부업을 시작하게 됩니다.
희귀 금화등을 수집하는 취미를 가진 프리드리히 대왕의 아들 '빌헬름 황태자' 에게 금화등을 싸게 공급하며 인연을 맺게 되고,1769년에는 왕실의 정식 대리인인 어용상인이 됩니다.
또한 화폐 수집상뿐만 아니라 환전상도 겸했던 메이어는 빌헬름의 런던에서 보내오는 환어음을 현금화하는 사업을 시작하였으며,당시 왕실의 재정과 함께 국제적인 자금조달,그리고 비밀자금 관리에도 깊이 개입하고 있었습니다.
황태자가 빌헬름 9세로 즉위한지 얼마되지 않아, 나폴레옹이 독일을 침공하자 빌헬름 왕은 덴마크로 망명하면서 메이어에게 300만 달러의 돈을 맡기게 되고 메이어 암셸 로스차일드는 이 돈을 다섯 아들에게 주어 유럽의 주요 국가들에 파견, 나눠준 사업자금을 발판으로 시장을 개척하며 사업을 하도록 했습니다.
암셸 로스차일드 Amschel Mayer Rothschild (1773–1855): Frankfurt 살로몬 로스차일드 Salomon Mayer Rothschild (1774–1855): Vienna 나탄 로스차일드 Nathan Mayer Rothschild (1777–1836): London 카를 로스차일드 Calmann Mayer Rothschild (1788–1855): Naples 야곱 로스차일드 Jakob Mayer Rothschild (1792–1868): Paris
메이어 암셸 로스차일드에게는 다섯 아들이 있었습니다. 빌헬름 왕의 자금을 받은 그는 장남 암셸을 프랑크 푸르트에 남게 하고, 살로몬을 오스트리아 빈에 삼남 나탄(네이선)을 영국 런던,카를을 이탈리아 나폴리,야곱(제임스)를 프랑스로 보내게 됩니다.
그의 다섯 아들들은 유럽의 전역에 은행을 설립하고, 협력하며 유럽의 금융기관으로 성장해 나갔습니다. 그들은 통신과 마차들을 비롯해 각종 수송수단들을 이용하여 나라간 '정보 네트웍'을 만든 다음 사업에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1806년 나폴레옹이 영국에 대륙 봉쇄령을 내리자 유럽의 공산품 가격은 폭등했는데, 값싸고 품질이 좋은 영국 상품을 살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영국으로 진출한 나탄(네이선)은 프랑스에 있는 동생 야콥(제임스)와 손잡고 밀수형태로 영국 상품을 유럽에 파는 사업을 통해서 많은 돈을 벌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 프랑스로 진격하려던 영국 웰링턴 장군의 군대가 군비부족으로 곤경을 처하게 된 것을 알고는,빌헬름 왕이 맡긴 돈 300만 달러와 자신이 영국과의 밀수로 벌어들인 돈을 합해서 동인도 회사의 금을 사들입니다. 금값은 치 솟았고 결국 영국 정부는 어쩔수 없이 비싼 가격에 황금을 매입하게 됩니다.
나탄(네이선)은 거기에다 자신이 판 금의 수송까지 제안하며 수수료를 챙기게 됩니다. 동생 제임스를 통해 프랑스 정부에 공식 통지하게 한후,프랑스군이 봉쇄하고 있던 길로 금을 운송하고 금화로 환전했습니다.그리고 로스차일드가의 운반 통로를 통해 스페인의 영국군 월링턴 장군에게로 전달했습니다.
이후 나탄(네이선)은 영국 로스차일드 은행을 세우고 금융사업에 뛰어들게 됩니다. 1815년 6월 벨기에 워털루에서 벌인 전투에서 영국군이, 엘바섬에서 돌아온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에게 승리한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한 그는.. 곧바로 주식거래소로 향합니다. 그리고 영국 채권을 통해 큰 재산을 벌어들입니다.
이미 그의 정보력과 재력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그의 움직임을 주의깊게 보게 됩니다.전쟁에서 지면 국채가격이 폭락하기 때문입니다. 나탄(네이선)은 거래소로 가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영국 국채를 모두 팔아 치웁니다. 이를 본 사람들은 '영국이 전쟁에서 패한 줄'로 알고 정신없이 국채를 팔기 시작합니다.
시장은 일시에 패닉 상태에 빠지고 영국 국채는 헐값이 됩니다.이틈을 노려서 나탄(네이선) 로스차일드는 싼 값에 국채를 모두 다시 사들이고, 영국의 승전보가 전해진 후에 폭등한 영국 국채를 되팔아 엄청난 차익을 얻게 됩니다.
막내인 제임스 로스차일드 역시 비슷한 형태로 '프랑스 국채'를 사들여서 폭락 시키고 되사는 방법으로, 자신의 지위상승은 물론 재산도 함께 불리게 됩니다. 이후 이들 형제들은 왕실과의 관계,산업혁명과 식민지개척 이권사업을 통해서 재산을 증식해 갔으며 유럽에서 그들의 경제 장악력도 커져갔습니다.
전쟁을 통해서 양쪽에 돈을 빌려주어 부를 축척한 그들은 그러한 수법을 계속 되풀이하며, 세계를 뒤흔든 거의 모든 전쟁에 개입하여 재산을 늘려 갔습니다.또한 화폐발행과 중앙은행 설립을 통해서 국민의 세금으로 천문학적인 이자를 벌어들이며, 각 국가를 그들의 '영원한' 채무국 상태로 몰아갔습니다.
로스차일드와 조지 소로스
거기에 인위적인 경제위기와 세계 대공황등을 일으켜 앞서 영국의 '국채매입' 과 비슷한 형태로 헐값이 된 기업과 자산을 인수하고 주식,채권등을 매입하므로써 자신들의 부를 축척해 나갔습니다. IMF나 세계은행처럼 브랜트우즈 협정에 의해 만들어진 기관의 고금리 대출과 이들의 역할 또한 물론 중요했습니다. 1997년 하반기 아시아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때에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수상은 아시아 경제위기의 주역으로 '조지 소로스'를 꼽았습니다. 금융파생상품 헤지펀드 등을 앞세워 세계 금융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그는 태국 바트화를 폭락 시켜 당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금융위기를 일으킨 장본인 입니다.
아시아 각국의 통화가치가 급격히 떨어져 환율이 급등하고,외국 자본 유출이 한꺼번에 일어나면서 한국은 당시 결국 IMF의 구제금융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특히 소로스는 이 방면으로 아주 유명합니다. 1992년 그의 퀸덤 펀드는 영국 파운드화에 대대적인 매도를 하며 런던 외환시장을 공격했습니다. 파운드화는 폭락했고,소로스는 10억달러를 벌었습니다.
1993년에는 프랑스 프랑화, 벨기에 프랑스화, 덴마크 크로네화 등 유럽 전역의 중앙은행들을 상대로 환투기 공세를 전개해서 독일 마르크화에 대해 폭락하게함으로써 2차 유럽통화 위기를 발발시켰습니다. 전년에 영국은행으로부터 벌어들인 액수보다 더 많은 11억 달러를 벌어드리게 됩니다.
1995년엔 일본은행과 엔화를 공격해 일본정부에 엄청난 환손실을 입게하고는 '일본정부의 금리인하'라는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도 했습니다.일본에서는 당시 '요카이','검은 유대 마피아'란 별명이 붙었고 영국에서는 '파운드화를 망가뜨린 악마의 손', '갱'이라는 원색적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소로스의 배후에 '로스차일드 가문'이 있습니다.그는 나폴레옹 전쟁이후로 줄곧 사용되어 온 시장조작 전략(?)을 실행하는 대리인에 불과합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재산
현재 로스차일드가의 재산은 베일 속에 감춰져 있으며 제대로 된 접근 자체도 불가능합니다. 미국 FRB(연방준비은행)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중앙은행들은 그들의 소유이고, 국채나 화폐발행으로 인한 이자 수입은 천문학적입니다.
그외에도 로스차일드 가문은 금융업을 기본으로 석유, 다이아몬드, 금, 우라늄, 레저산업, 백화점 등의 분야에서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런던의 로스차일드 은행은 잉글랜드 은행의 대리점으로서 '국제 금가격'을 결정하는 역할까지 맡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최고급 포도주 가운데 하나인 보르도의 샤토 무통, 샤토 라피트 등을 생산하는 포도원도 이 가문이 소유하고 있으며, 이 와인의 라벨에선 지금도 가문의 표식인 다섯 개의 화살을 발견할수 있습니다.
2007년 3월 8일 뉴욕타임스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차기 후계자로 영국 지부의 4대 후계자인 제이콥 로스차일드의 아들 '나탄(너대니얼) 로스차일드' 회장이 떠올랐다고 보도했습니다. 헤지펀드 운영업체인 아티커스캐피털 공동 회장인 그는 과거 어느 후계자보다도 많은 부를 소유할것이라고 신문은 전망했습니다
로스차일드라는 가문이 빌게이츠나 워렌버핏,'포브스의 100대부자' 리스트에 있는 CEO들에 비해, 일반인들에게 덜 알려지고 생소한 느낌을 주고 있다거나 마치 비중없거나 쇠락한 가문처럼 비춰지고 있는 것은 철저한 전략입니다.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뉴 월드 오더’.. 주요 국가 대통령들이 TV 인터뷰에서 입만 열면 말하는 신세계질서와 세계 정부수립을 위해서 유럽 각국의 왕실과 각 나라 대통령과 정치인, 로스차일드와 록펠러를 비롯한 국제 금융세력들은 매스컴을 차단한 채 인류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한 비밀화의를 합니다.
매년 1년에 한번씩 절대로 비밀을 발설하지 않는다는 서약을 하고 참석하는 '빌더버그 회의'를 통해 향후 세계지배 전략과 세계 단일국가 수립을 위한 계획을 논의합니다.그 외에 삼각위원회,CFR 등을 각종 기구와 UN을 비롯한 IMF,세계은행등 세계정부수립 단체들의 맨 위에 로스차일드가가 있습니다.
미국 CFR이 16년간 연구하여 나온 '세계통합전략'에서 그들은 세계를 10개로 구분하여 각 분야별로 책임 국가를 설정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교육질서'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 교육을 과도하게 칭찬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또한 빌더버그 그룹 회원이며 프리메이슨입니다.
더이상 음모론..이라는 말도 안되는 '음모'에 엮이지 마십시요. 소설이나 영화처럼 픽션(fiction)임을 의도하여 일부러 퍼뜨린 말이지만 이 상황이 심각한 논픽션이라는 것을 이쯤되면 모두 다 알수 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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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차일드가(家)의 붉은 방패
▲ Rothschild shop ' Two-headed eagle red shield'
1743년 프랑크 푸르트에 골동품 가게를 연 '메이어 암셸 로스차일드'의 아버지가 그의 문앞에 사인으로 걸어 놓았던 붉은 방패(red shield)입니다. 로스차일드가 이후 자신의 성씨에 사용하기도 했던 것으로 붉은 방패에는 '두개의 머리'를 가진 독수리 즉,로만 이글이 그 가운데 그려져 있었습니다.
머리가 두개 달린 위 독수리는 과거 '비잔틴 제국'의 상징으로 사용되었고 오늘날 이것은 러시아의 국가 문장(Coat of Arms)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 Double Headed Eagle Byzantine Empire Coat Of Arms '비잔틴 제국'이 사용했던 두개의 머리가 달린 독수리 문장
▲ Russian Coat of Arms 현재 러시아의 국가 문장으로 사용되는 모습
▲ emblem for Scottish Rite Freemasonry Scottish Rite 프리메이슨 엠블럼으로 사용되는 그림
로스차일드가의 문장(Coat of Arms)
▲ Rothschild Coat of Arms
로스차일드가의 공식 문장(Coat of Arms)입니다. 좌우에 사자와 유니콘이 방패를 들고 있고 맨 위쪽에는 독수리가 날개를 펴고 있습니다.방패의 화살을 손에 쥐고 있는 한쪽 팔이 대각선의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고 중앙에는 작은 방패가 또한 그려져 있습니다.
▲ Prince Charles Coat of Arms
위 그림은 영국 찰스 황태자의 공식 문장입니다. 방패,투구,투구장식 투구 깃, 모토가 쓰여진 리본등 모든 장식이 갖춰진 문장 형태입니다. 방패 그림의 좌우에는, 왕관을 쓴 사자와 유니콘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중앙 방패와 사자와 유니콘의 목에는 3개의 짧은 리본을 가로 줄 아래에 늘어뜨린 흰 리본들이 있습니다.그리고 사자의 발아래에는 '타조깃털 3개'가 유니콘의 발 아래에는 '붉은 용'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맨 아래 리본에 적혀 있는 글자는"'Ich Dien"인데, 독일어로 그 의미는 "I Serve"입니다.그리고 그 가운데 있는 검은 방패에 안에 금빛의 15개의 동전이 있는 문장은 콘월 공작의 문장입니다.
▲ Queen Elizabeth II Coat of Arms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문장입니다.영국 찰스 황태자의 문장과 거의 비슷합니다.중앙에 방패를 둘러싼 벨트에는 가터 훈장의 내용이 쓰여있습니다.'Hon Y Soit Qui Mal Y Pense'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그 의미는 프랑스어로 '악(惡)을 생각하는 자에게 수치를'이라는 뜻으로 에드워드 3세가 창시하여 가터 기사단에 수여했던 훈장의 내용입니다. 훈장수여는 가터기사단(Kights of the Garter)의 일원이 된다는 것인데, 실제 훈장엔 블루 벨벳리본에 금실로 위의 문자가 수놓여져 있습니다.
그리고 맨 아래의 리본에 적힌 글자는 "Dieu et Mon Droit"입니다. 역시 프랑스어인데 그 뜻은 "신과 나의 권리" 입니다.
시티 오브 런던(City of London)
▲ Coat of Arms of The City of London
영국 시티 오브 런던(City of London)의 공식 문장입니다. 방패, 투구, 투구장식, 투구 깃, 모토가 쓰여진 리본등의 모든 장식들이 갖춰진 완전문장 형태입니다.방패 양쪽에는 용 두 마리가 있고 가운데 레드 크로스(red crosses)가 그려진 방패를 함께 들고 있습니다.
맨 아래 리본에 쓰여진 글자는 라틴어로 'Domine dirige nos'입니다. 그 뜻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신이여, 우리를 인도하소서' 란 내용입니다.
시티 오브 런던(City of London)은 런던 내에 있는 금융중심지를 말합니다. 잉글랜드 은행을 비롯해 많은 금융기관이 밀집해 했으며 자본시장, 상품시장, 보험시장 등이 모두 집중되어 있습니다. 1.12 제곱마일(2.90 ㎢) 정도의 좁은 지역으로 런던타워~성바오로 성당까지,테임즈강~ 런던 월까지 지역입니다.
뉴욕의 월가와 함께 시티 오브 런던은 '세계금융의 중심지'입니다.중앙은행인 영국은행과 증권거래소,왕립어음교환소등을 포함, 각국의 금융회사 본사들과 지사가 밀집되어 있습니다.약 1평방 마일 면적으로 스퀘어마일로도 불립니다.
▲ Coat of Arms of The City of London
실제 시티 오브 런던(City of London)의 공식 문장이 부착되어 거리 곳곳에서 사용되고 있는 사진으로, 측면에서 본 모습입니다.
▲ Coat of Arms of The City of London
시티 오브 런던(City of London)의 공식 문장을 정면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많은 건물에서 문장을 볼수 있습니다.가운데 방패 안에 있는 흰 바탕에 레드 크로스는 시티 오브 런던의 'flag' 모양이기도 합니다.
로스차일드가(家) 다섯개의 화살
▲ 역시 로스차일드 가문의 문장(紋章).
다섯 개의 화살은 이후 유럽 각지로 흩어져 은행을 차린,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의 다섯 아들을 의미합니다. 화살을 한 데 묶은 것은 '함께 뭉치면 쉽게 부러지지 않는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 LCF Rothschild Group insignia.
LCF 로스차일드 그룹 휘장.LCF 로스차일드 그룹은 1953년 프랑스 로스차일드 'Edmond de Rothschild'가 세운 회사로 주로 PB부분을 담당하는 뱅킹 그룹으로 본사는 스위스 제네바에 있고, 프랑스 파리,룩셈부르크에도 위치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회사명을 'Edmond de Rothschild Group'로 바뀌었습니다.
▲ Edmond de Rothschild Group Logo 현재 Edmond 로스차일드 그룹의 로고
▲ Edmond de Rothschild Group Logo enlargement 현재 Edmond 로스차일드 그룹의 로고를 확대한 모습
로스차일드가(家)의 와이너리-샤토 무통 로쉴드
▲ Château Mouton Rothschild logo
'샤토 무통 로쉴드'의 로고.샤토 무통 로쉴드는 네이선 로스차일드의 아들 나다니엘 로스차일드가 만든 와인 제조업체입니다. 같은 이름의 와인또한 프랑스 보르도 1등급 와인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국내외에서 유명합니다.
<떼루아>라는 한국 드라마에서..주인공 김주혁이 프랑스로 직접 찾아갔었던 그 와인의 실제 모델이 된 것이, 바로 샤토 무통 로쉴드1945년산 와인입니다.
프랑스의 제임스 로스차일드 역시 '샤토 라피트 로쉴드'라는 보드도 1등급으로 분류되는 포도주와 양조장을 매입하게 되는데 현재는 프랑스 로스차일드 금융 그룹이 소유하고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비싼 적포도주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샤토 무통 로쉴드'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오퍼스 원(Opus One), 칠레에서 콘차이토로와 알마비바를 생산하면서 전세계로 와인 사업을 확장나갔습니다. 프랑스 로스차일드의 '샤토 라피트 로쉴드' 역시 칠레에서 로스바스코스, 아르헨티나에서 보데가스 카로를 생산하며 와인 사업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현재 로스차일드(Rothschild) 가문이 생산하는 모든 와인들은 메이어의 다섯 아들을 상징하는 다섯 개의 화살을 로고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샤토 무통 로쉴드'의 와인 레이블(label)
▲ 1973 피카소(Picasso)가 그린 '샤토 무통 로쉴드' 레이블
1973년에 파블로 피카소가 그렸던 와인 레이블 그림입니다.세계적인 화가인 피카소,샤갈,달리,앤디 워홀,후안 미로등은 모두 '샤토 무통 로쉴드'의 레이블 에 자신의 그림을 그렸습니다.이 레이블 때문에 와인 가격에도 영향을 받으며, 샤토 무통 로쉴드의 와인 그림 레이블 자체도 수집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최근 발표 '샤토 무통 로쉴드' 레이블(label)
▲ Chinese Artist Xu Lei the label for the 2008 vintage
2010년 11월에 발표된 '2008년 와인 레이블'의 디자인은 중국인 화가가 맡았습니다.슈레이(Xu Lei)라는 중국 현대 미술가로서 샤토 무통 로쉴드의 레이블에 회사의 상징 동물인 양과 블루톤의 색감을 넣어서 표현했습니다.
무통 로쉴드의 경우, 레이블 디자인을 발표한 2010년 11월 중순 이후 열흘 만에 2008년 산 와인 가격이 34%나 올라, 병 당 약 6000파운드(약 1070만원) 선에 거래되었으며 샤토 라피트 로쉴드는 1만 파운드(1700만원)었습니다.
▲ Bernar Venet the label for the 2007 vintage
2010년 1월에 공개한 '2007년 빈티지 와인 레이블'. 디자인은 프랑스의 미술가인 베르나르 브네다(Bernar Venet)가 습니다.그는 현재 프랑스에서 주목 받고 있는데 라벨에 자신의 대표작 '철로 그린 거대한 곡선'의 드로잉을 넣었습니다.개념주의 미술가인 그는 철 조각의 마술사로 불리고 있습니다.
▲ Lucian Freud the label for the 2006 vintage
2009년 2월 에 공개된 '2006년 빈티지 와인 레이블'. 세계적 심리학자인 프로이드의 손자인 루시앙 프로이드(Lucian Freud)가 직접 디자인했습니다. 그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Benefits Supervisor Sleeping' 이란 누드화가 3360만 달러에 팔리는 등 생존 화가중에 그림값이 가장 비싼 화가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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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차일드의 첫 번째 뭉칫돈
메이어 암셀 바우어(Mayer Amschel Bauer)는 1744년 2월 23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 지역에서 태어났다.그의 아버지 암셀 모세 바우어(Amschel Moses Bauer)는 유럽 일대를 떠도는 골동품상이자 대금업자였다. 메이어가 태어나자 모세는 프랑크푸르트에 정착하기로 결심한다.
어릴 때부터 총명한 메이어를 위해 그의 아버지는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돈과 대출에 관한 상업적 지식도 체계적으로 가르쳤다. 몇 년 후 아버지가 죽자 메이어는 겨우 열세 살의 나이로 친척들의 격려를 받으며 하노버로 가서 오펜하이머 가문의 은행 수습생으로 일했다. 오펜하이머(Oppenheimer)가문 세계 최고의 다이아몬드 업체 드비어스를 설립해 100년 동안 세계 다이아몬드 시장의 90%를 장악하고 있는 가문 메이어는 뛰어난 감각과 부지런함으로 은행의 온갖 전문 기능을 빠르게 습득했다. 7년이라는 세월 동안 그는 마치 해면이 물을 빨아들이듯 영국에서 전해진 각종 금융업의 기상천외한 부분까지 모두 소화했다. 탁월한 업무 능력을 인정받은 메이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식 직원이 되었다.
은행에서 일하는 동안 그는 배경이 탄탄한 고객들과 친분 관계를 쌓았다. 그 중에는 훗날 그의 운명을 바꿔줄 에스토르프 장군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메이어는 정부와 국왕을 상대로 대출해주는 것이 개인을 상대로 한 대출보다 훨씬 수익도 크고 안전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출 금액이 많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정부의 세금 수입을 담보로 잡을 수 있다는 점이 큰 매력이었다. 영국에서 들어온 낯선 금융 이념은 메이어에게 완전히 새로운 충격이었다.
몇 년 후, 젊은 메이어는 프랑크푸르트로 돌아가 아버지의 대부업을 계승한다. 그는 자신의 성씨를 로스차일드(Rothschild : 독일어로 ‘rot’는 ‘붉은색’, ‘schild’는 ‘방패’를 의미함)로 바꾸었다. 그는 에스토르프 장군도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왔으며 윌리엄 왕자를 보필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 관계를 잘 이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메이어를 다시 만난 에스토르프 장군은 몹시 기뻐했다. 장군 본인도 화폐 수집가였다. 메이어는 집안 대대로 골동품상을 해왔으므로 이 분야라면 훤했다. 고대의 화폐를 화제로 이야기할라치면 장군은 얼굴이 상기되어 듣곤 했다. 더 신나는 일은 메이어가 희귀한 금화를 장군에게 아주 싼 가격으로 팔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졌으며, 에스토르프 장군은 메이어를 진정한 친구로 생각했다. 메이어는 왕실 사람들과도 얼굴을 익히면서 관계를 쌓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에스토르프 장군의 소개로 윌리엄 왕자를 알현했다. 왕자도 금화 수집가였기 때문에 메이어는 에스토르프 장군에게 하던 식으로 왕자의 환심을 살 수 있었다.
메이어가 희귀한 금화를 싼 가격으로 계속 공급해주자, 윌리엄 왕자는 고마운 마음에 자기가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하라고 했다. 이때다 싶은 메이어가 왕실의 정식 대리인이 되게 해달라고 청했고, 마침내 그의 뜻은 이루어졌다.
1769년 9월 21일, 메이어는 자신의 명패에 왕실의 엠블럼을 새기고 그 곁에 ‘M.A.로스차일드, 윌리엄 왕자 전하의 지정 대리인’이라고 써 넣었다. 그때부터 메이어의 신용은 더 좋아지고, 사업은 날이 갈수록 번창했다.
역사적으로 윌리엄 왕자는 부를 축적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18세기 유럽에서는 ‘평화 수호’라는 명목으로 다른 나라에 군대를 빌려주는 ‘용병’이 성행했다. 윌리엄 왕자는 유럽의 왕실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특히 영국 왕실과 곧잘 사업을 벌였다.
빚이 많은 영국 정부는 외국에서 돈을 벌어들이려고 늘 용병을 파견했다. 그런데 영국 병력만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에 윌리엄 왕자와 의기투합한 것이다. 훗날 미국에서 독립전쟁이 일어났을 때도 워싱턴 측이 상대해야 할 독일 병사 수가 영국 병사보다 많을 정도였다.
▲ 빌헬름 9세- 윌리암 왕자
윌리엄 왕자는 이 사업을 통해 유럽 왕실 사상 최고로 많은 2억 달러를 벌어들였다. 윌리엄 왕자를 가리켜 ‘유럽에서 가장 냉혹한 대부업자’라고 부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윌리엄 왕자의 측근이 된 메이어는 모든 일을 완벽하게 처리해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얼마 후 프랑스혁명(1789~1799년)이 일어났는데, 그 영향은 점차 주변 군주제 국가에까지 미쳤다. 이에 윌리엄 왕자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혁명이 독일에도 영향을 미쳐 폭도에게 재산을 약탈당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왕자의 우려와는 다르게 메이어는 프랑스혁명을 반겼다. 사회가 불안해질수록 그의 금화 유통량이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혁명의 창끝이 신성로마제국을 겨누자, 독일과 영국의 무역 중단으로 수입품 가격이 폭등했다. 그러자 메이어는 영국에서 물건을 들여다 독일에 판매함으로써 거액의 차익을 챙겼다.
메이어는 유대 사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지도층 인물이었다. 매주 토요일 밤, 교회의 예배가 끝난 후 메이어는 유대인 학자들을 그의 집에 초대해 밤늦도록 포도주를 마시며 환담을 나누었다.메이어는 “함께 기도하는 가족은 단결이 잘된다.”라는 말을 남겼다.
로스차일드 가문으로 하여금 그토록 정복욕과 권력욕에 집착하게 만든 힘은 과연 무엇일까?
1800년에 이르러 로스차일드 가문은 프랑크푸르트에서 제일가는 유대인 갑부가 되어 있었다. 메이어는 그 해에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수여하는 ‘제국 왕실 대리인’ 칭호를 부여 받기도 했다. 이 칭호 덕분에 그는 제국의 각 지역을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었으며, 유대인들에게 부과되는 각종 세금을 면제받았다.
그의 회사 직원들은 무기를 소지할 수도 있었다.1803년에는 메이어와 윌리엄 왕자의 관계를 더 돈독케 하는 계기가 있었다. 그 내용인즉 윌리엄 왕자의 사촌형 중 덴마크 국왕이 있었는데, 그가 윌리엄 왕자에게 돈을 빌리고자 했다. 윌리엄 왕자는 자신의 재산이 노출될까봐 빌려주기를 꺼렸다.
메이어가 이 사실을 알고 왕자에게 해결 방안을 제시했다.즉 왕자가 돈을 내놓되 메이어가 나서서 로스차일드의 명의로 덴마크 국왕에게 대출을 해주고, 이자는 메이어가 공제하는 방식이었다. 왕자는 그럴듯한 아이디어라며 좋아했다. 그렇게 하면 자신의 부를 드러내지 않고도 돈을 빌려줄 수 있는 데다 원금을 떼일 걱정도 없었다.
메이어로서는 꿈에도 그리던 일이었다. 국왕을 상대로 한 대출은 안정적 수익뿐 아니라 명성을 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대출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곧이어 덴마크 왕실에서 신청한 여섯 건의 대출이 메이어를 통해 성사되었다. 로스차일드라는 이름은 삽시간에 유명해졌다.
특히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은 정치에 몸담은 후로 윌리엄 왕자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는데, 윌리엄 왕자는 분명하지 않은 형세에서 섣불리 태도를 정하지 못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윌리엄 왕자의 가족인 헤스와 캐더를 유럽 통치자 명단에서 빼버리고, 프랑스군을 보내 국경을 위협했다.
이에 윌리엄 왕자는 황급히 덴마크로 망명했다. 떠나기 전에 그는 300만 달러에 달하는 현금을 메이어에게 보관시켰다. 이 돈이 바로 메이어에게 막대한 권력과 재산을 가져다주고 금융제국을 세우게 한 첫 번째 뭉칫돈이다.메이어는 잉글랜드은행보다 더 큰 은행을 설립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윌리엄 왕자에게 거액을 받자마자 그는 행동을 개시했다. 그의 다섯 아들은 마치 다섯 발의 화살처럼 유럽의 심장이나 다름없는 중요한 다섯 개 지역에 파견되었다. 큰아들 암셀은 프랑크푸르트 본점을 지키고, 둘째 살로몬은 빈으로 보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도록 했다.
셋째 아들 네이선은 영국으로 보내 대국을 주도하도록 했으며, 넷째 칼은 나폴리로 보내 근거지를 세우게 했다. 형제들은 늘 긴밀한 연락을 주고 받았으며, 이들 사이의 연락을 담당한 다섯째 제임스는 파리의 업무를 관장했다. 역사적으로 전무후무한 금융제국은 이렇게 막을 열었다. 워털루전투와 로스차일드 가
네이선 로스차일드(Nathan Rothschild)는 로스차일드의 셋째 아들로, 다섯 형제 가운데 식견과 담력이 가장 뛰어났다. 1798년, 그는 아버지로부터 프랑크푸르트에서 영국으로 건너가 로스차일드 가의 은행 업무를 개척하라는 명을 받는다.
네이선은 학식이 깊고 성격이 과감한 은행가였는데, 그의 내면세계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금융에 천부적 소질을 갖춘 네이선은 1815년 신출귀몰한 수단으로 런던에서 손꼽히는 은행의 거두로 성장한다.
네이선의 큰형 암셀 로스차일드는 프랑크푸르트에 로스차일드은행 본점을 창립했다. 로스차일드의 둘째 아들 살로몬은 오스트리아 빈에 지점을 세웠고, 넷째 아들 칼은 이탈리아 나폴리에, 다섯째 아들 제임스는 프랑스 파리에 지점을 세웠다. 이렇게 해서 로스차일드 가문이 세운 은행은 세계 최초의 국제은행 그룹이 되었다.
다섯 형제는 1815년 유럽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이때 유럽에서는 대륙의 운명을 결정할 워털루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만약 나폴레옹이 최후의 승리를 거머쥔다면 프랑스는 의심할 바 없이 유럽의 주인이 되고, 웰링턴 장군이 프랑스군을 무찌르면 영국이 유럽의 형세를 주도할 것이었다.
전쟁이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로스차일드 가는 멀리 내다보는 눈으로 필요한 전략 정보를 수집할 정보망을 구축해놓았다. 이 방대한 비밀 정보망은 산업 스파이들로 구성되었다.
유럽 각 나라의 수도와 주요 도시뿐 아니라 중요한 교역과 상업 요지에 파견된 그들은 갖가지 상업과 정치 정보를 수집해 런던, 파리, 프랑크푸르트, 빈, 나폴리를 오가며 전달했다. 이 정보망은 효율과 속도 및 정확성에서 웬만한 정부의 정보 조직보다 훨씬 뛰어났고, 다른 상업적 경쟁자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리하여 로스차일드은행은 거의 모든 국제 경쟁에서 뚜렷한 우위를 선점하게 되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마차와 배가 유럽 각지와 해협을 누볐으며, 거리마다 로스차일드은행의 스파이들이 배치되었다. 로스차일드 가는 어마어마한 현금과 채권, 정보를 주무르는 금융가의 큰손으로 군림했다.
그들이 독점한 최신 정보는 순식간에 증권시장과 상품시장으로 전파되었다. 당시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는 단연 워털루전투의 결과였다. 1815년 6월 18일, 벨기에 브뤼셀 근교에서 전개된 워털루전투는 웰링턴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과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국가의 운명을 걸고 벌이는 한 판 승부였다. 또한 수많은 투자자가 거액을 놓고 벌이는 도박의 대상이기도 했다. 이 도박에서 이기면 천문학적인 돈을 움켜쥐지만, 지는 날에는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될 수도 있었다.
사람들은 이 전쟁의 결과를 궁금해했다. 런던 증권거래소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모두가 초조하게 워털루전투의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영국이 패할 경우 영국의 국채(consols) 가격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승리한다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을 터였다. 전쟁이 한창일 무렵 로스차일드의 스파이들은 양측 군대 내부에서 최대한 정확한 정보를 수집하느라 민첩하게 움직였다. 이들 중에는 최신의 전황을 가까운 로스차일드 중계 지점으로 전달하는 사람도 있었다.
저녁이 되어 나폴레옹의 패색이 짙어지자, 로스차일드 측의 정보 전달원은 즉시 브뤼셀로 말을 달려 오스탕드 항에서 배로 갈아탔다. 그가 특별 통행증이 있는 로스차일드 가의 쾌속선에 뛰어올랐을 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다. 이때 영국해협은 풍랑이 무척 거셌다.
2,000프랑의 비용을 치르고서야 위험을 무릅쓰고 해협을 건네주겠다는 선원을 찾을 수 있었다. 정보 전달원이 6월 19일 새벽 영국 포크스턴의 해변에 도착했을 때,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직접 부두까지 나와 맞아주었다. 네이선은 급히 편지 봉투를 뜯고 제목만 대충 훑어보고 나서 즉시 런던의 주식거래소로 달려갔다.
네이선이 빠른 걸음으로 주식거래소로 들어서자 초조하게 전쟁의 결과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숨을 죽였다. 모든 사람의 눈은 네이선의 무심한 듯 전혀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을 주시했다. 네이선은 갑자기 걸음을 늦춰 ‘로스차일드의 기둥’이라고 불리는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그의 얼굴은 마치 석고상처럼 감정의 변화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 거래소를 가득 메우던 소란스러움은 이미 온데간데 없었다. 모두가 네이선의 눈초리에서 뭔가 읽어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윽고 네이선이 주변에 있던 로스차일드 가문의 거래원들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거래원들은 묵묵히 거래 창구로 가서 조용히 영국의 국채를 팔아 치우기 시작했다.
홀 안은 술렁거렸다.귓속말로 대화를 주고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쩔 줄 몰라 그 자리에 꼼짝없이 서 있는 사람도 있었다. 수십만 달러어치의 영국 국채가 맹렬한 기세로 시장에 쏟아져 나왔다.
국채 가격은 눈깜짝할 새 바닥으로 뚝 떨어졌고, 이에 자극을 받은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국채를 팔아댔다. 그때까지도 네이선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자기 자리에 기대어 있었다.
이때 누군가 외쳤다. “로스차일드가 알아냈다! 웰링턴이 전쟁에서 패했다!”
이 소리에 마치 감전이라도 된 듯 놀란 사람들은 앞다투어 투매에 나섰다. 투매 열기는 순식간에 사람들을 패닉 상태로 몰아넣었다. 모두가 따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값도 안 나가는 영국 국채를 당장 팔아야 조금이라도 손해를 덜 볼 것 같았다. 몇 시간에 걸친 투매 광풍이 휩쓸고 지난 후 영국 국채는 액면가의 5%도 안 되는 휴지 조각으로 변해 있었다.
네이선은 이 모든 과정을 시종일관 태연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의 눈빛이 한 번 번뜩였다. 오랫동안 훈련받지 않으면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미세한 움직임이었지만,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신호였다. 거래요원들이 이번에는 영국 국채를 닥치는 대로 사들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6월 21일 밤 11시, 웰링턴 장군의 특사 헨리 퍼시(Henry Percy)가 런던에 당도했다. 그리고 나폴레옹 대군이 여덟 시간의 고전 끝에 무려 3분의 1의 병력을 잃고 무참히 패배했다는 소식을 알렸다. 프랑스는 이제 끝장난 것이다!
이 소식이 런던에 도착한 시간은 네이선의 정보보다 무려 하루나 늦은 후였다. 그 하루 동안 네이선은 20배나 되는 차익을 챙겼다. 나폴레옹과 웰링턴이 전쟁으로 얻은 재산을 합친 금액보다 훨씬 많았다.
워털루전투로 네이선은 영국 정부 최고의 채권자로 등극했으며, 그때부터 공채 발행을 주도하고 잉글랜드은행(Bank of England)의 실권을 장악했다. 영국 국채는 정부가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근거다.
이제 영국인들은 그동안 정부에 내던 세금을 로스차일드은행에 내야 했다.
이 같은 징수 형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영국 정부는 국채를 발행해서 재정 지출에 필요한 자금을 충당한다. 다시 말해서 영국 정부는 화폐 발행 권한이 없기 때문에 반드시 민간은행에서 돈을 빌려 쓰는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8%의 이자를 내야 했다. 원금과 이자는 모두 금화로 계산했다.
네이선이 영국 국채 대부분을 손에 넣었다는 것은 국채 가격이나 영국 전체의 통화 공급량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는 의미다. 이제 영국의 경제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손아귀 안에 들어와 있었다.야심가 네이선이 오만한 대영제국을 보기 좋게 정복한 것이다. "나는 해가 지니 않는 잉글랜드제국을 통치하는 왕이 누군지 상관하지 않는다. 대영제국의 통화 공급을 통제하는 사람이 곧 대영제국의 통치자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나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등장한 시대 배경
"수표나 신용화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는 극소수의 사람은 그 시스템이 형성하는 이윤에 큰 관심을 두거나, 그 시혜자인 정치가와 결탁해 자기편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러나 대부분은 이 시스템으로 파생되는 자본이 가져오는 거대한 이익에 대해 알 도리가 없다. 그들은 압박을 받으면서도 전혀 불만을 품지 않는다. 심지어 이 시스템이 자신의 이익을 해치지 않을까 의심하지도 않는다."
-로스차일드 형제 1863년 로스차일드는 유럽에서 산업혁명이 불길처럼 퍼지고 금융업이 전에 없이 번성하던 시대에 성장했다. 과거와는 전혀 다른 금융의 실체와 개념이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유럽 전역으로 퍼져갔다. 새로운 금전의 실체와 개념은 1694년 잉글랜드은행이 설립되면서 모험 정신이 충만한 은행가들에 의해 형성되기 시작했다.
17세기 전반에 걸쳐 금전의 개념과 형식에는 커다란 변화가 발생했다. 1694~1776년에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선보인 것을 계기로 은행이 발행하는 지폐가 유통 중인 금속화폐의 총액을 사상 처음으로 넘어섰다. 산업혁명은 철도, 광산, 조선, 기게, 방직, 방위산업, 에너지 등 신흥 업종에 거대한 융자 수요를 창출했다.
그 규모는 금이나 귀금속을 전문으로 다루던 장인들로부터 시작된 골드스미스 은행사(Goldsmith Banker)의 해묵은 저효율과 극히 제한된 융자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로스차일드 가문을 비롯한 신흥 은행가들은 이렇게 중요한 기회를 포착해 자신들에게 가장 유리한 방식으로 현대 금융업의 역사적 흐름을 주도했다.
사람들의 운명은 어쩔 수 없이, 또는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런 제도에 의해 결정되었다.1625년 이후 두 차례에 걸친 내전과 정국의 혼란으로 영국의 국고는 바닥이 난 상태였다. 1689년 제임스 2세의 딸 메리와 결혼한 윌리엄 1세가 왕위에 올랐을 때는 가장 심각했다.
설상가상으로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전쟁까지 치르느라 윌리엄 1세가 이끄는 영국 정부는 기진맥진해 있었다. 이때 윌리엄 패터슨(William Paterson)을 비롯한 은행가들은 네덜란드에서 배워온 새로운 개념을 소개했다. 즉 민영 중앙은행인 잉글랜드은행을 설립해 국왕의 방대한 지출을 위한 융자를 시행하자는 것이었다.
이 민영은행이 정부에 제공한 120만 파운드의 현금은 정부의 ‘영구적 채무(perpetual loan)’가 되었다. 금리는 연 8%에 4,000파운드의 관리비를 책정했다. 이렇게 하면 정부는 매년 10만 파운드만 내고 그 자리에서 120만 파운드의 현금을 쓸 수 있었으며, 원금을 영원히 갚지 않아도 되었다.
정부는 물론 더 많은 ‘특혜’를 제공해서 잉글랜드은행이 국가가 승인한 은행권을 독자적으로 발행할 수 있게 했다.그동안 골드스미스 은행가에게 가장 유리한 부분은 은행권 발행에 있었다. 은행권은 골드스미스은행에 금화를 보관했다는 영수증이었다.
많은 양의 금화를 휴대하기가 매우 불편했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금화 보관증으로 거래를 하고, 골드스미스은행에서 이 보관증을 금화로 바꿨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굳이 은행에 가서 금화로 바꾸는 대신 보관증을 화폐로 삼아 사용하기 시작했다.
머리 회전이 빠른 골드스미스 은행가들은 매일 금화를 찾아가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눈여겨보다가, 실제의 금보다 많은 보관증을 발행해 은밀히 대출을 해주고 이자를 챙겼다. 대출받은 사람이 원금과 이자를 갚고 나면 차용증을 회수해 폐기해버림으로써 아무 일 없는 양 시치미를 뗐다.
그러나 이자는 그들의 호주머니에 이미 들어온 후였다. 골드스미스은행의 금 보관증은 유동 범위가 점차 넓어지고 받아주는 곳이 많아지면서 이윤도 점점 커졌다. 잉글랜드은행이 발행한 은행권의 유통 범위는 다른 은행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국가가 인정한 이 은행권이 곧 국가의 화폐였다.
잉글랜드은행은 주식을 공모하기 시작했다. 2,000파운드 이상을 구매한 사람은 잉글랜드은행의 이사 자격을 부여받았다. 공모를 통해 1,330명이 잉글랜드은행의 주주가 되었고, 14명은 은행 이사가 되었다. 여기에는 윌리엄 패터슨도 끼어 있었다.
1694년에 윌리엄 1세는 잉글랜드은행에 왕실 특별허가증(Royal Charter)을 내주었고, 최초의 현대적 은행은 이렇게 탄생했다.잉글랜드은행의 핵심은 국왕과 왕실 가족의 개인 채무를 국가의 영구적 채무로 변환하는 것이었다. 전 국민의 세금을 담보로 잉글랜드은행이 채무에 기반을 둔 국가화폐를 발행했다.
이렇게 해서 국왕은 전쟁에 필요한 돈을 확보했으며, 정부도 뜻대로 정책을 펼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은행가들은 그동안 꿈꿔오던 거액의 대출을 해주고 짭짤한 이자 수입을 챙기게 되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셈이었다.
다만 국민의 세금을 담보로 했다는 점이 옥에 티였다. 이렇게 강력한 새로운 금융 수단이 생기면서 영국 정부의 적자는 수직으로 상승했다. 1670~1685년에 영국 정부의 재정 수입은 2,480만 파운드였고, 1685~1700년의 정부 수입은 두 배 넘게 증가한 5,570만 파운드였다.
그런데 같은 기간 영국 정부가 잉글랜드은행에서 대출한 액수는 17배나 급증해 80만 파운드에서 1,380만 파운드가 되었다.아이러니적 국채를 묶어놓는하게도 이 제도는 국가화폐의 발행과 영구 구조였다. 그래서 화폐를 신규 발행하면 국채가 늘어나게 되어 있었다.
국채를 상환하면 국가의 화폐를 폐기하는 셈이 되므로 시중에 유통할 화폐가 없게 된다. 따라서 정부는 영원히 채무를 상환할 수 없다. 이자를 갚고 경제도 발전시켜야 하므로 화폐 수요는 필연적으로 늘어날 테고, 그 돈은 다시 은행에서 빌려와야 했기 때문에 국채는 계속해서 불어날 수밖에 없다.
이 채무에 대한 이자 수입은 고스란히 은행가의 지갑으로 들어갔으며, 이자는 국민의 세금으로 부담해야 했다.과연 영국 정부는 그때부터 다시는 채무를 갚지 않았다. 2005년 말 현재, 영국 정부의 채무는 1694년의 120만 파운드에서 5,259억 파운드로 늘어나 영국 GDP의 42.8%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이토록 거액의 돈을 위해서라면, 국왕이나 대통령이라도 민영화한 국립은행의 길을 막는 사람은 제거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네이선 로스차일드, 런던 금융시티를 장악하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세계 금융시장을 주도하면서 다른 분야도 거의 장악했다. 그들은 이탈리아 남부 지역 전체의 재정 수입을 담보로 한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유럽 모든 국가의 국왕과 정부 각료가 이들의 영향력 안에 있었다.
-벤저민 디즈레일리. 영국 수상. 1844년 런던 금융시티는 그레이터 런던 지역 중심에 있는 약 2.6제곱 킬로미터 면적의 지역이다. 18세기 이래 줄곧 영국 및 세계의 금융 중심으로 군림하고 있는 이곳은 독립적인 사법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 바티칸공화국과 유사한 ‘국가 속의 국가’라 할 수 있다.
비좁은 이 지역에는 잉글랜드은행 본점을 포함한 세계의 주요 금융기관들이 운집해 있으며, 현재 영국 GDP의 6분의 1을 창출한다. 이러한 런던 금융시티를 주도하는 사람은 영국을 주도하는 셈이다.
네이선이 영국에 도착할 무렵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대치하면서 양국의 무역이 단절된 상태였으므로 영국 상품이 유럽에서 비싸게 팔렸다. 네이선은 프랑스에 있는 동생 제임스와 손을 잡고 화물을 영국에서 프랑스로 되팔아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
그 후 네이선은 영국 재무부 관리 존 해리스로부터 영국군이 스페인에서 곤경에 처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웰링턴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은 프랑스로 진격할 준비를 끝낸 상태였으나, 유일한 문제는 군비 부족이었다. 물론 영국 정부의 담보가 있었지만 스페인과 포르투갈 은행은 웰링턴이 내미는 은행권을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장군의 군대에는 금이 절실하게 필요했다.상황을 지켜보던 네이선은 큰돈을 벌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는 사방으로 금을 알아보았다. 때마침 동인도회사가 인도에서 실어온 금을 팔려고 했다. 영국 정부도 이를 구매하려 했으나, 금 가격이 너무 비싸 내리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상황을 파악한 네이선은 윌리엄 왕자의 현금 300만 달러와 영국과의 밀수로 벌어들인 거액을 들여 동인도회사에서 80만 파운드의 금을 사들였다. 그러자 금 가격이 순식간에 치솟았다. 금 가격은 내릴 기미도 안 보이는데 군대에서는 화급을 다투는지라 영국 정부는 울며 겨자 먹기로 네이선에게 비싼 가격에 황금을 사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 거래로 네이선의 금고는 더욱 두둑해졌다. 네이선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다음 행동에 나섰다. 자신이 판 황금을 웰링턴 장군의 군대로 직접 호송하겠다는 제안을 한 것이다. 당시 프랑스는 삼엄한 경계로 영국을 봉쇄하고 있었기 때문에 호송 길에는 큰 위험이 따랐다.
영국 정부는 비싼 값을 치르고라도 황금을 옮기기를 원했다. 네이선은 겨우 열아홉 살 난 동생 제임스를 시켜 황금을 프랑스로 운반하겠다는 사실을 프랑스 정부에 통지했다. 영국 정부가 알면 난리가 날 일이었다. 자칫해서 프랑스로 금이 흘러 들어가면 영국의 재정은 큰 타격을 입기 때문이었다.
프랑스는 구미가 당기는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정부가 경찰을 보내 호송대 보호까지 자청할 정도였다. 내로라하는 프랑스 관리들도 뇌물을 받고 모르는 척 눈감아주었다.
네이선 일행이 운반하는 황금은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 정부의 지원을 받아 당당하게 프랑스의 은행에 도착했다. 그는 프랑스 정부의 환영 만찬에 참석하는 한편으로 황금을 웰링턴 장군이 쓸 수 있도록 은밀히 보내 금화로 환전했다. 그리고 쥐도 새도 모르게 로스차일드의 운반 통로를 통해 스페인의 영국군 수중에 전달했다.
그 수법이 얼마나 치밀했던지 할리우드 영화 뺨칠 정도였다.
프로이센에 주재하는 한 영국 외교관은 이렇게 말했다. “런던 금융사무에 대한 로스차일드의 입김은 놀랄 만큼 세다. 그들은 런던 금융시티의 외환 거래 가격을 완전히 쥐고 흔든다. 은행가인 그들의 권력은 상상 이상이어서 네이선이 화가 나면 잉글랜드은행도 벌벌 떨 정도다.”
어느 날 네이선이 형 암셀이 경영하는 프랑크푸르트의 로스차일드은행에서 발행한 수표를 잉글랜드은행에 제시하고 현금으로 바꿔달라고 요구했는데, 잉글랜드은행은 자기 은행 수표만 환전된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이를 괘씸히 여긴 네이선은 이튿날 아침 일찍 아홉 명의 은행 직원을 대동하고 잉글랜드은행으로 갔다.
그리고 이 은행이 발행한 수표를 제시하고 현금을 요구했다. 그 결과, 단 하루 만에 잉글랜드은행의 금 보유액이 반으로 줄어버렸다. 네이선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튿날 더 많은 수표를 가지고 갔다. 걱정이 된 잉글랜드은행의 고위급 책임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앞으로 며칠이나 더 수표를 교환하러 오실 겁니까?” 네이선이 차갑게 대답했다. “잉글랜드은행이 내 수표를 거절했는데, 내가 당신네들 수표를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소?” 그의 말에 놀란 잉글랜드은행은 즉시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공손한 태도로 네이선의 앞에 선 고위급 책임자는 앞으로 로스차일드은행의 모든 수표를 현금으로 바꿔주는 것은 물론이고 이 일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겠다고 알렸다.
네이선은 워털루전투를 통해 런던 금융시티의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영국의 경제 명맥을 한 손에 쥐게 되었다. 이때부터 화폐 발행과 황금 가격을 포함한 중요한 결정권은 로스차일드 가문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제임스 로스차일드, 프랑스를 정복하다
한 나라의 정부가 은행가의 돈에 의존하면, 정국도 정부 지도자가 아닌 은행가가 장악하기 마련이다. 돈주머니를 쥔 쪽이 아무래도 돈을 쓰는 쪽보다는 유리하기 때문이다. 돈에는 조국이 없다. 금융재벌은 무엇이 애국이고 고상함인지 따지지 않는다. 그들의 목적은 오로지 이익을 얻는 것이다.
-나폴레옹. 1815년 로스차일드 가의 다섯째 아들 제임스는 나폴레옹 집권 시기에 주로 런던과 파리를 오가며 가족 운송 네트워크를 세워 영국의 상품을 파리로 밀반입했다. 웰링턴을 도와 금을 운반하고 영국 국채를 수매한 후로 제임스는 프랑스에서 그 명성이 높아졌다. 그 후 로스차일드 파리은행을 설립하고 스페인의 혁명 자금을 암암리에 공급했다.
1817년 워털루전투에서 패한 프랑스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점령한 많은 영토를 잃고 정치적으로도 곤경에 처했다. 국민 경제 또한 갈수록 피폐해졌다. 사방에 빚이 깔려 있던 루이 18세의 정부는 재정적인 안정을 간절히 원했다.
이때 프랑스 은행 한 곳과 영국의 베어링스은행(Barings Bank)에서 프랑스 정부에 대규모의 융자를 지원했다. 로스차일드은행이 융자 프로젝트에서 외면을 당한 것이다. 제임스는 그 일로 마음이 편치 않았다.
1818년이 되자 전년도에 발행한 프랑스 정부 채권은 파리와 유럽의 도시에서 가격이 올랐다. 큰 이득을 본 프랑스 정부는 융자를 받은 그들 두 은행에서 다시 융자를 받으려고 했다. 로스차일드 형제도 그 틈에서 융자 건을 유치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오만한 프랑스 귀족들이 고귀한 혈통을 내세워 시골 출신의 벼락부자에 불과한 로스차일드 가문과의 거래를 꺼렸던 것이다. 제임스는 파리에서 큰돈을 벌고 호화로운 집과 옷으로 치장했지만, 사회적 지위는 높지 않았다. 모든 사정을 짐작한 제임스는 프랑스 귀족들의 오만함에 치를 떨었다.
제임스는 곧바로 형제들과 함께 프랑스 귀족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줄 계획을 세웠다. 프랑스 귀족들은 오만하기만 했지 머리가 아둔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을 업신여기던 귀족들은 그들의 금융 실력이 나폴레옹의 군사적 업적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1818년 11월 5일, 그동안 줄곧 안정적으로 오르던 프랑스 국채 가격이 갑자기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정부의 다른 채권도 그 영향을 받아 하락세를 보였다. 전에 없던 이상 징후에 투자자들은 의견이 분분했다. 이 현상은 호전될 기미가 보이기는커녕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더 심해졌다.
거래소 안에 떠돌던 소문들은 유언비어로 변해 사방으로 퍼져갔다. 나폴레옹이 다시 집권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부의 세수 부족으로 이자 상환이 어렵다고 점치거나 새로운 전쟁이 터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루이 18세의 왕실에도 긴장감이 감돌았다. 채권이 이런 기세로 급락하면 정부의 지출은 장차 어떻게 감당한단 말인가! 거만한 귀족들의 얼굴에도 수심이 그득했다. 모두가 이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느라 여념이 없는데, 오직 두 사람만이 차가운 눈빛으로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제임스와 그의 형 칼이었다.
영국에서의 악몽을 되새긴 사람들은 로스차일드 가문이 채권시장을 조작하지 않았나 의혹을 갖기 시작했고, 의혹은 곧 사실로 드러났다. 1818년 10월부터 로스차일드 가문은 탄탄한 재력을 기반으로 유럽의 각 도시에서 프랑스 국채를 은밀히 사들이기 시작했다. 프랑스 국채는 조금씩 가격이 올랐다.
그 후 11월 5일부터 그들은 유럽 각지에서 프랑스 국채를 대량 투매하여 시장을 공황에 빠뜨렸다.자기가 보유한 채권 가격이 끝 모를 바닥으로 추락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루이 18세는 자신의 왕관도 그렇게 추락하는 느낌이었다.
이때 황실에 있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대리인이 국왕에게 진언했다. “천하의 거부 로스차일드은행에게 이 국면을 타개해보라고 하심이 어떠할까요?” 어찌할 바를 모르던 루이 18세는 왕실의 자존심을 따질 때가 아니었으므로 당장 제임스 형제를 접견했다.
이날 엘리제 궁의 분위기는 여느 때와 사뭇 달랐다. 오랫동안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던 제임스 형제는 어느새 존경해 마지않는 표정으로 미소를 머금은 귀족들에 둘러싸여 있었다.과연 제임스 형제가 손을 쓰자마자 채권의 붕괴 국면이 진정되었다.
그들은 프랑스 전국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프랑스군이 전쟁에 패한 이후 그들은 경제위기에서 프랑스를 구해준 영웅이 된 것이다. 온 국민의 찬양과 환호에 제임스 형제는 마음껏 취했다. 형제가 입은 옷도 가장 인기 있는 디자인으로 유행할 정도였다. 사람들은 앞 다투어 로스차일드은행으로 대출을 받으러 갔다.
이때부터 로스차일드 가문은 프랑스의 금융가를 한 손에 쥐고 흔들게 된다. 제임스 로스차일드의 재산은 6억 프랑에 육박했다. 프랑스에서 개인 재산이 그보다 많은 사람은 8억 프랑을 보유한 국왕 한 사람뿐이었다. 프랑스에 있는 다른 은행가들의 재산을 모두 합쳐도 제임스보다 1억 5,000만 프랑이나 적었다.
이런 재산은 자연 그에게 막강한 권력을 부여했으며, 심지어 언제라도 정부 내각을 쓰러뜨릴 정도였다. 그 유명한 티에르(Thiers)정부도 그들 손에 실각했다. 살로몬 로스차일드, 오스트리아의 제위를 노리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눈에는 전쟁도 평화도 없으며 구호와 선언도, 희생과 영예도 없다. 그들은 사람들의 눈을 미혹하는 것들을 철저히 무시했다. 그들의 눈에는 오로지 딛고 일어설 디딤돌만 있을 뿐이다. 윌리엄 왕자가 그중 하나요, 또 하나의 디딤돌은 메테르니히(Metternich)다.
-프레더릭 머튼(Frederic Morton) 살로몬은 로스차일드 가문의 둘째 아들로서, 유럽의 대도시를 돌며 각 은행을 조율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그는 형제 중 외교 능력이 가장 뛰어났다. 말을 할 때도 단어를 가려 쓸 줄 알았으며, 대단히 예의 바른 태도를 갖추었다. 살로몬과 가깝게 지내던 한 은행가는 그를 이렇게 평가한다.
“그와 만나서 불쾌해하는 사람은 한 번도 본 적 없다.” 그래서 형제들은 그에게 유럽의 심장인 빈의 은행 업무를 맡겼다.
빈은 유럽 정치의 중심이다.
거의 모든 유럽 왕실이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와복잡한 혈연관계로 맺어져 있었다. 합스부르크 왕조는 신성로마제국의 왕실을 위해 오늘날의 오스트리아, 독일, 이탈리아 북부, 스위스,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체코, 슬로바키아와 프랑스 동부 지역을 400여 년이나 통치한 유럽 정통의 왕실 혈통이었다.
나폴레옹이 비록 신성로마제국을 무너뜨렸다고는 하지만, 그의 계승자인 오스트리아는 여전히 중부 유럽의 거두로 군림하면서 다른 왕실들을 오만하게 대하고 있었다. 게다가 정통 천주교 교리까지 더해 영국과 프랑스 등 신흥 기독교가 성행하는 국가에 비해 많은 부분에서 경직되어 있었다.
이런 귀족 가문과 트고 지낸다는 것은 윌리엄 왕자와 맺은 교제와는 비교도 안 되는 신분 상승을 의미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과거 합스부르크 왕조와 거래를 트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한 경험이 있었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후 살로몬이 다시 빈의 문을 두드렸을 때는 판도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이제 유럽에서 알아주는 집안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를 차례로 굴복시킨 전력을 등에 업고 기세가 등등했다. 그러나 살로몬은 합스부르크 왕조와 직접 거래를 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찾아낸 ‘디딤돌’이 바로 19세기 유럽 정계를 풍미한 오스트리아의 외무장관 메테르니히였다.나폴레옹이 전쟁에서 패한 후 메테르니히가 주도하는 빈 체계는 19세기 유럽에서 가장 긴 평화를 구가했다. 메테르니히는 오스트리아가 점점 쇠락하고 강적으로 둘러싸인 불리한 상황에서도 교묘한 줄타기로 평형을 유지했다.
그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유럽에 잔존하는 황실의 정통이라는 점을 강하게 호소하며 이웃 나라 프로이센과 러시아를 끌어들여 신성동맹을 맺음으로써 프랑스의 재기를 막고 러시아의 확장을 견제했다.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꿈틀거리는 민족주의와 자유주의의 물결을 억제해 오스트리아 국내의 다민족 분열 세력이 힘을 쓰지 못하게 했다.
1818년에 열린 아헨열국회의(Congress of Aix-la-chapelle)는 나폴레옹이 전쟁에 패한 후 유럽의 장래를 의논하는 가장 중요한 자리였다. 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프랑스 등에서 온 대표들이 프랑스의 전쟁 보상과 동맹국의 철수 문제를 결정했다.
살로몬과 그의 동생 칼도 이 회의에 참석했고, 살로몬은 메테르니히의 오른팔 겐츠(Gentz)의 추천으로 메테르니히를 만났다. 그 후 두 사람은 모든 것을 터놓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그렇게 된 데는 무엇보다 상대를 기분 좋게 하는 살로몬 특유의 부드러운 화법과 적절한 칭찬이 크게 기여했다.
메테르니히 역시 로스차일드 가문의 탄탄한 재력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쉽게 의기투합했다. 살로몬은 물론 겐츠와도 더욱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메테르니히와 겐츠의 적극적인 추천에다 로스차일드와 윌리엄 왕자의 관계, 그리고 덴마크 왕실과의 긴밀한 비즈니스 관계에 힘입어 살로몬은 드디어 합스부르크의 높은 문턱을 넘었다. 왕실은 고정적으로 살로몬의 은행에서 융자를 받았으며, 살로몬은 빠르게 그들과 한울타리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1822년 합스부르크 왕조는 네이선을 제외한 로스차일드 가의 4형제에게 남작의 칭호를 수여했다.살로몬의 대규모 자금 지원을 등에 업은 메테르니히는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그가 여러 분쟁 지역에 ‘평화 수호’라는 명목으로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안 그래도 국력이 날로 쇠약해지는 오스트리아는 더 깊은 채무의 늪에 빠졌고, 살로몬의 금고에 대한 의존도는 더욱 높아졌다. 1814~1848년의 유럽은 ‘메테르니히의 시대’로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 메테르니히를 움직이는 막후에는 로스차일드은행이 있었다.
1822년에 메테르니히와 겐츠, 그리고 살로몬, 제임스, 칼의 3형제는 베로나회의(Verona Congress)에 참석했다. 회의가 끝난 후 로스차일드은행은 수익성이 높은 중유럽 철도 프로젝트의 자금 융자 은행으로 지정되었고, 이로써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로스차일드의 영향력을 새삼 실감했다.
“오스트리아에는 페르디난트 황제와 살로몬 국왕이 있다.”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1843년에 살로몬은 비트코비체 연합 광업회사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련회사를 인수했다. 이들 두 회사는 당시 세계 10대 중공업기업으로 손꼽히는 큰 기업이었다. 1848년, 살로몬은 오스트리아의 금융과 경제를 주무르는 거물로 성장했다. 로스차일드 휘하의 독일과 이탈리아 나폴레옹이 철수한 후부터 독일은 그동안 흩어져 있던 300여 개의 작은 봉건국가를 합병해 30여 개의 큰 봉건국가로 구성된 도이칠란트연방으로 거듭났다. 프랑크푸르트에 남아 있던 로스차일드 가의 큰아들 암셀은 도이치연방의 초대 재무장관으로 임명되었고, 1822년 오스트리아 황제로부터 남작에 봉해졌다.
프랑크푸르트의 로스차일드은행은 독일 금융의 중심이 되었다. 유감스럽게도 슬하에 자식이 없던 암셀은 후계자를 키우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 중 암셀의 전폭적 신임을 받는 한 젊은이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훗날 현대사에 빛나는 발자취를 남긴 독일의 철혈 수상 비스마르크다.
암셀과 비스마르크는 진짜 부자지간처럼 가까웠다. 암셀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비스마르크는 로스차일드 가문과 여전히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비스마르크 배후의 은행가 새뮤얼 블라이흐뢰더도 로스차일드 가의 대리인이다.
한편 넷째 칼은 로스차일드의 다섯 형제 중 가장 평범한 인물이다.
그는 가족 간의 연락을 도맡아 유럽 각지를 오가면서 소식을 전하고 다른 형제들을 도왔다. 1818년 다섯째 제임스가 국채를 둘러싼 경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는 데 일조한 후로, 칼은 가문을 대표하고 있던 셋째 형 네이선으로부터 이탈리아 나폴리로 가서 은행을 세우라는 명을 받는다.
이탈리아에서 그는 형제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훌륭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메테르니히에게 이탈리아의 혁명을 진압할 군대를 보낼 자금을 대주는가 하면, 탁월한 정치 수완으로 이탈리아 정부에 손을 써서 점령군의 경비를 담당하기도 했다.
또한 친구 메디치가 나폴리 재정장관 자리를 되찾도록 돕기도 했다. 이탈리아 왕실의 재정적 기둥이 되어가던 칼의 영향력은 이탈리아 반도 전역에 미쳤다. 그는 바티칸 교황과 상업적으로 왕래하기도 했는데,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는 칼을 만났을 당시 발을 내미는 관례를 깨고 이례적으로 손을 내밀어 입을 맞추도록 했다. 로스차일드 금융제국 너희 형제들이 단결하기만 하면 세상의 어떤 은행도 너희와 경쟁이 안되며, 너희를 해치거나 너희로부터 이익을 취할 수도 없을 것이다. 너희가 함께 있으면 세상의 어떤 은행보다 큰 위력을 거머쥐게 될 것이다.
-데이비슨이 네이선에게 보낸 편지에서. 1814년 6월 24일 M.A. 로스차일드는 1812년 세상을 떠나기 전 다음과 같이 엄격한 유언을 남겼다. 1. 가문 은행의 모든 요직은 반드시 가문 내부에서 맡아야 하며, 외부인을 써서는 안 된다. 가족 가운데 남자만이 상업 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
2. 사촌끼리 결혼함으로써 재산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막는다 (이 규정은 초기에는 엄격히 지켜졌으나, 나중에 완화되어 다른 유대인 은행가 집안과의 통혼까지로 범위가 확대됨).
3. 재산 상황을 절대로 외부에 공개해서는 안 된다.
4. 재산 상속 시 변호사의 개입을 절대 금지한다.
5. 집안의 모든 장자는 각 집안의 우두머리이며, 가족이 만장일치로 동의할 경우 에만 차남을 후계자로 할 수 있다.
이 유서의 내용을 위반하는 자는 재산 상속권 일체를 박탈당한다. 중국에는 “형제가 마음을 합치면 그 날카로움이 쇠를 자른다.”라는 속담이 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가족 내부의 통혼을 통해 재산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다. 100여 년 세월 동안 가족 내부의 통혼이 18건이었으며, 그중 16건은 사촌 남매간의 결혼이었다.
1850년을 전후해서 로스차일드 가문은 총 60억 달러의 재산을 축적했으리라 짐작된다. 수익률을 6%로 계산하면, 15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이들 가족의 자산은 최소한 50조 달러 이상으로 추정된다.
가족의 엄격한 통제, 은밀한 물밑 작업, 기계처럼 정확한 협조, 빠른 시장 정보 수집 능력, 냉철한 이성, 금권에 대한 끝없는 욕망, 그리고 이 모든 것에 기반을 둔 금전과 재산에 대한 깊은 통찰과 천재적인 예지 능력 등이
로스차일드 가가 200년 동안 전 세계의 금융 및 정치와 전쟁의 냉혹한 소용돌이 속에서 활약하며 인류 역사상 가장 방대한 금융제국을 세울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20세기 초까지 로스차일드 가문이 통제한 재산은 당시 세계 총 재산의 절반 정도로 추정된다.
로스차일드은행은 유럽의 주요 도시에 분포하고 있다. 그들은 치밀한 정보 수집 및 전달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데, 심지어 유럽 국가의 왕실과 귀족들도 때로 그들의 정보망을 이용할 정도였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국제 금융 청산 시스템을 처음으로 설립해 전 세계 황금시장을 통제하는 데 이용했다.
그들은 가족 은행 체계 중 처음으로 실물 황금을 운반할 필요가 없는 계정 청산 시스템을 도입했다.
이 세상에서 로스차일드 가문만큼 황금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사람들도 없을 것이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런던 황금 정가 시스템에서 물러나겠다고 선포한 2004년, 그들은 장차 세계적으로 전례 없는 금융위기의 중심에서 슬며시 벗어나면서 자신들과 황금 가격의 관계를 떼어놓고 있었다
빚더미에 앉은 달러 경제와 사방에 위기가 도사린 세계의 법정화폐 체계나 외환보유 체계는 한바탕 청산의 폭풍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얼마 안 되는 황금을 보유한 아시아 국가들이 몇 년 동안 축적한 재산은 미래의 승리자에게 ‘재분배’될 것이다.
헤지펀드는 재공격을 감행할 것이다. 다만, 이번 대상은 파운드화나 아시아 통화가 아니라 세계경제의 기둥인 달러가 될 것이다.은행가의 입장에서 볼 때 전쟁은 큰 호재다. 평화 시기에는 감가상각이 느리게 진행되던 각종 고가의 시설과 물품이 전쟁 때는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하기 마련이다.
전쟁의 당사자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싸움에서 이기려고 하기 때문에, 전쟁이 끝난 후에는 이긴 쪽 정부든 진 쪽 정부든 은행 채무라는 함정에 빠져들고 만다. 잉글랜드은행의 설립 때부터 나폴레옹전쟁이 끝난 121년 동안(1694~1815년) 영국은 56년을 전쟁 가운데 보냈으며, 나머지 시간의 절반은 전쟁 준비에 할애했다.
전쟁을 책동하고 그 자금을 대는 것은 은행가의 이익에 들어맞는다. 로스차일드 가문도 예외는 아니었다. 프랑스혁명부터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는 거의 모든 근대 전쟁의 배후에는 그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현재 주요 서방 선진국의 최대 채권자다. M.A. 로스차일드의 부인 구틀 슈내퍼는 세상을 뜨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내 아들들이 전쟁을 바라지 않는다면, 전쟁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도 없어질 것이다.”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 유럽의 주요 공업국가의 화폐 발행 권리가 로스차일드 가문의 수중에 떨어짐으로써 신성한 군주의 권리가 ‘신성한 금권’으로 대체되었다. 이때 대서양 저쪽에서 번영을 구가하는 아메리카 대륙이 그들의 시야에 들어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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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로스 : 국제 금융재벌들의 금융 해커
오래전부터 세계 각지의 매스컴들은 조지 소로스를 독보적인 금융천재로 묘사하고 있다.그에 관한 이야기는 전설적인 색채까지 더해져서 대중에게 신비한 존재로 군림해왔다.윌리엄 엥달은 농담 삼아 앞부터읽으나 뒤부터 읽으나 똑같은 소로스(SOROS)라는 성마저 특이하다고 이야기한다.
금융가의 거장인 소로스는 '금융 해커 천재'답게 과연 혼자 힘으로 잉글랜드은행에 도전하고, 독일 마르크화를 주무르며, 아시아 금융시장을 휩쓸 수 있었을까? 그런 황당한 신화는 단순한 사람이나 믿을 것이다.
소로스는 세계 금융시장을 휩쓴 퀀텀펀드(Quantum Fund)를 카리브해에 있는 네덜란드령 앤틸리스 제도의 조세 도피처 퀴라소 섬에 등록해놓는 방법으로 주요 투자자들과 자금들의 출처를 은닉할 수 있었다.이곳은 국제적으로 각광받는 마약 거래상들의 검은돈 세탁 장소로도 유명하다.
미국 증권법에 헤지펀드의 전문 투자자를 99명 이하의 미국인으로 제한해놓았기 때문에 소로스는 99명의 슈퍼급 부호를 모두 미국인으로 채우려고 갖은 고심을 했다.이런 역외 헤지펀드 중 소로스는 심지어 이사회 명단에도 들어 있지 않고 '투자 고문' 자격으로 펀드 운용에 참여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뉴욕에 설립한 소로스펀드매니지먼트 명의로 이 고문 직무를 담당하도록 했다.미국 정부에서 이 펀드의 상세한 운용 상황을 제출하라고 요구하면 자기는 일개 투자 고문에 불과하다면서 그 책임을 미룰 수 있다.
소로스의 퀀텀펀드는 이사회 명단만 보고도 그 대단함을 짐작할 수 있다.
* 이사 리처드 카츠(Richard Katz)는 런던 로스차일드은행의 이사이자 로스차일드 가문의 이탈리아 밀라노은행 총재다.
*이사 닐스 타우버(Nils Taube)는 런던은행 그룹 세인트제임스플레이스캐피털(St. James's Place Capital)의 CEO다.이 캐피털의 주요 운용자는 로스차일드 가문이다.
*이사 윌리엄 로드 레스-모그(William Lord Ress-Mogg) 역시 로스차일드 가문이 막후에 있는 세인트제임스플레이스캐피털의 경영자다.
*이사 에드가르 드 피치오토(Edgar de Picciotto)는 스위스 민간은행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인물이며,'제네바에서 가장 똑똑한 은행가'로 꼽히기도 한다.
피치오토 쪽 사람으로는 뉴욕 리퍼블릭 뱅크의 소유자 에드먼드 사프라(Edmund Safra)가 있다.사프라는 미국법 집행 부문으로부터 멕시코의 은행 범죄 집단과 결탁한 사실이 확인되었으며, 스위스 정부로부터 터키와 콜롬비아의 마약 돈세탁 혐의를 받고 있다.
소로스의 인맥 중에는 스위스의 유명한 투기업자 마크 리치(Marc Rich)와, 텔아비브 이스라엘 정보부의 국제 거간꾼 사울 아이젠버그(Shaul Eisenberg)도 포함되어 있다. 소로스와 로스차일드 그룹과의 유착 관계에 따라 소로스는 세계적으로 가장 강하고 가장 은밀한 로스차일드 그룹의 일을 도맡아 처리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영국 런던 금융시티의 맹주, 이스라엘의 창시자, 국제 정보 네트워크의 선조, 월가 5대 은행의 막후,세계의 황금 가격을 정하는 런던 금 가격 벤치마켓을 거쳐 지금도 런던과 월가의 중추를 움직이는 핵심으로 군림하고 있다.
이들의 재산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세계인의 눈길이 빌 게이츠나 주식의 귀재 워런 버핏의 재산에 관심을 기울일 때 로스차일드를 비롯한 국제 금융재벌들은 어마어마한 재산을 스위스은행이나 카리브 해의 역외펀드에 넣어두고 적당한 시기를 엿보고 있다.
소로스와 미국 엘리트 그룹의 관계도 예사롭지 않다. 그는 미국의 유명한 방위산업 투자업체인 칼라일 그룹에 1억 달러의 개인 자금을 투입했다.이 그룹은 아버지 부시 대통령과 전 재무장관 제임스 베이커 등 중량급 인사를 포함하고 있다.
소로스는 1980년대에 브레진스키 전 재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Madeleine Albright) 등 미국 정계 요인들과민주주의재단(National Endowment for Democracy)을 설립했다.실질적으로 이 조직은 중앙정보국(CIA)과 개인 자본의 합자로 세워진 것이다.
소로스는 국제 금융재벌들의 코치를 받아 1990년대부터 세계 금융시장에서 돌풍을 일으켰다.그의 굵직한 행동마다 국제 금융재벌들의 중대한 전략적 의도가 녹아 있었다. 그 핵심은 곧 세계 각국 경제의 '통제하면서 해체하기'를 촉진해 궁극적으로는 런던과 월가를 주축으로 하는 '세계정부'와 '세계화폐'의 준비 작업을 완성하는 것이다.
1980년대 초에 국제 금융재벌들은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개발도상국 경제에 대한 통제하면서 해체하기 작업을 대부분 끝냈다.그리고 1980년대 중후반에는 일본 금융 세력의 확장을 성공적으로 억제했다.
아시아를 제패하고 나자 이제 유럽이 국제 금융재벌들의 관심으로 떠올랐다. 이들은 동유럽과 소련을 공격의 주요 대상으로 삼았다.이 중요한 사명을 완수할 책임을 맡은 소로스는 어느새 유명한 '자선가'로 변신해 동유럽과 구소련 지역에 각종 펀드를 대량으로 설립했다.
이 펀드들은 모두 소로스가 뉴욕에 설치한 '열린사회재단(Open Society Instiute)'을 모델로 하여 극단적으로 비이성적인 개인적 자유라는 이념을 제창했다.
가령 그가 자금을 지원한 센트럴유로피안대학은,
사회주의 체제에서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주권국가의 개념을 심어주는 것은 사악하며 '개인주의'에 위배되는 행위라고 주장하면서, 경제자유주의만이 만병통치약이고 사회현상에 대한 이성적 분석은 모두 '전제주의'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이 학교의 주제 강연은 '개인과 정부'를 주제로 다룬 내용이 많았는데, 이러한 교육 이념은 자연히 미국 외교협회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미국의 유명한 평론가 질즈 에머리(Gilles Aymery)는 소로스와 이들이 '흔쾌히' 자금을 지원하는 국제기구의 진정한 의도를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묘사했다.
합법성과 인도주의의 베일 뒤에는 늘 억만장자들이 '자선가'로서 존재하며, 그들이 자 금을 지원하는 각종 조직들이 있다.이런 조직에는 열린사회재단, 포드후원기금, 미국 평화협회, 전미 민주주의재단, 휴먼라이츠워치(Human Rights Watch, 인권 감시기구)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 세계위기관리기구 등이 있다.
이런 사람들 사이에서 소로스는 단연 눈에 띄었다.
그는 거대한 문어처럼 동유럽 전체와 유럽 남동부, 카프카스 지역과 구소련의 각 공화국으로 발을 뻗었다.소로스는 언론 플레이에도 강해서 뉴스를 만들어낼 뿐 아니라 사회적 어젠다와 관점을 얼마든지 조작해 세계와 자원을 통제하고 미국이 주도하는 완벽한 세계 통일의 이상을 추진할 수 있었다.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소로스는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큰 역할을 했다.
폴란드에서 소로스 펀드는 노조가 단결해서 정권을 탈취하는 데 일등공신 노릇을 했으며,세 번재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연달아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소로스는 연방준비은행의 폴 볼커 전 총재, 씨티은행 안노 루딩 부행장, 하버드 대학의 제프리 색스 교수와 함께 동유럽과 구소련을 한 방에 보낼 수 있는 '충격 요법'을 제안했다.
소로스 자신은 이 요법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는 경제 체제의 변화가 경제 개선을 가져온다는 점을 반드시 보여주고자 했다. 폴란드는 이를 시험해볼 수 있는 곳이었다.나는 광범위한 경제 개혁 조치를 준비했다. 그 내용은 통화 긴축, 구조조정, 채무 재조정이라는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나는 세 개의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려면 단독 실시해야 한다고 여겼다.그리고 거시경제인 채무와 주식 전환을 주장했다."
산업 구조조정은 거시경제의 질서에 본격적으로 수술을 진행하는 것에 해당한다. 그러나 통화 공급량을 긴축함으로써 큰 수술을 받는 환자에게 수혈을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 결과를 가져온다.결국 경제가 철저히 해체되고, 생산이 심각하게 쇠퇴하며, 국민 생활수준은 하락 일로를 걷는다.
기업은 줄줄이 도산하고, 많은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으며, 사회 불안은 가속화된다. 이 순간 국제 금융재벌들이 채무와 주식을 전환하는 수법으로 이들 국가의 핵심 자산을 쉽게 사들인다.
폴란드, 헝가리,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의 나라들이 하나같이 이런 수법에 말려들어 20년이 지나도록 경기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아프리카나 라틴아메리카처럼 반항할 힘도 없는 나라들과 달리 구소련이나 동유럽 국가들은 미국이 두 다리 뻗고 잘 수 없을 만큼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군사력이 막강한 상황에서 조직적인 강도질에 당한 경우는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다른 나라를 망하게 하는 소로스의 수법에서 그의 탁월함을 엿볼 수 있다.
한 나라를 망치기 전에 그 마음을 어지럽히는 방법은 확실히 효과가 대단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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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짜쿵님 원본출처: http://blog.daum.net/hitto/175 포스트 원제: 문어발 제국 로스차일드(rothschilds)
아래 글은 문어발 제국 로스차일드(THE ROTHSCHILD OCTOPUS)를 살짜쿵님께서 직접 번역하신 내용입니다.
로스차일드의 영국 분파는 암쉘 로스차일드의 3째 아들인 나단 로쓰차일드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19세기와 20세기 사이에 영국왕가와 이들 가문 사이의 모든 동맹이 세워진 것으로, 따라서 영국의 근대사는 이 카자르왕조(로스차일드 가문)와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이 카자르 3인조 정권은 에벌린(Evelyn), 에드먼드(Edmund), 나단(Nathan), 즉, 마이어 암쉘 로스차일드의 세 아들들 입니다.
Written by: Vlada Sindjelic
문어발 제국 로스차일드(THE ROTHSCHILD OCTOPUS)
막시즘,글로벌리즘,뉴월드 오더,자유주의....이 모든 것들은 로스차일드제국에 의해서 음모된 현상의 완곡한 다른 말들인 것입니다.로스차일드는 죽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역사속으로 분리가 되어서 눈에 띄지 않게 그의 아들들과 손자들에게나누어진 것입니다. 전 대부였던 야콥 로스차일드는 무대를 떠났지만 그의 자리는 그의 아들 나단 로스차일드(Nathaniel Philip Rothschild)-영국 로스차일드의 설립자-가 차지합니다.무거운 짐이 연약한 젊은 상속자에게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나단은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제국을 운영하는데 있어서 그는 그의 삼촌인 에벌린(Evelyn)과, 에드먼드(Edmund),그리고 다른 영국가족들(캐더린,엠마,레오폴드)에게 도움을 받게 됩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거대한 계획에 따라 모든것을 실천하는 정치인,수상,장관, 총리등을 배출했습니다.유럽 연합은 로스차일드(슈만-Schumann- 카자르족)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유럽 연합은 시베리아의 짐 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하는 러시아를 이용했습니다.
이런 목적을 이루기 위한 목적으로 로스차일드는 소로스-Soros, 베레조프스키-Berezovski, 호도르프스키-Hodorkovski, 카스파로프-Kasparov, 등을 고용합니다.
이들 사건들의 배경과 원인을 벗기길 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로스차일드 카자르 왕조의 어두운 역사를 철저히 조사해야만 합니다.비밀조직, 숨은 실력자(grey eminence),탐욕의 정치인들과 아울러 그들의 행동 메커니즘을 조사해야 합니다.
그들은 윗자리에 앉은 자들입니다.
누가 오늘날의 로스차일드(rothschild)인가?
비록 2차 대전 이후 로스차일드의 여론 조작의 시작으로 사람들은 오늘날의 로스차일드는 프랑스내 포도밭과 정원들, 그리고 영국내 자선사업등으로 대수롭지 않게 기억될 것이지만, 실상은 전혀 다른 그림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들의 아버지들에 의해 설립된 기초들은 오늘날 그들 자손들에 의해 수세기 동안 지속적으로 실행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카자르 열차의 증기엔진인 로스차일드는 러시아와 그 광대한 시베리아로 향하고 있으며, 이 열차는 발칸 반도를 통과하여 최근에 고용된 나토(NATO)멤버들을 태우게 되어있고, 이 나토멤버들은 로스차일드 제국을위해 싸울것입니다.
프랑크 푸르트의 빨간 방패(The Red Schild-Rothschild)
새로운 군주와 그의 공작들을 더 잘알기 위해서는 이 왕조의 연대기와 혈통을 들여다 봐야 합니다.모든 시작은 18세기의 암쉘(모세스 바우어-Moses Bauer)로스차일드 에게로 향합니다. 로스차일드(Rothschid-영어로는 빨간방패-the Red shield-로 번역됨)는 프랑크 푸르트에서 시작됩니다.
이것은 프랑크 푸르트가 유럽연합내의 금융중심지였다는 것을 의미하는것은 아닙니다. 푸랑크 푸르트가 유럽중앙은행과 모든 주요 유럽과 미국은행들이 있는 곳이고 이들 대부분은 이 왕조에 의해서 조종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프랑크 푸르트-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증권시장중 하나인-증권시장은 로스차일드 자손들의 투자신탁회사와 애티커스증권Atticus Capital 그리고 지회사들인 메릴린치Merrill Lynch,피델러디투자Fidelity Investments등을 통하여 로스차일드가 소유한 프랑크 푸르트 증권거래소Deutsche Borse가 장악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옆의 프랑크푸르트 시의 문양은 빨간 방패입니다! 이 심볼은 카자르제국에 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작가인 데얀 루치치Dejan Lucic)는 카자르인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 오늘날 유대인의 90퍼센트는 기원이 카자르인들로서, 그들은 터키-몽골족들로서8세기 중반에 유대교로 개종한 자들입니다. 10세기에 그들의 제국이 망했을때 그들은 러시아와 유럽에 걸쳐 정착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미국대륙에도 정착합니다. 그들은 개종자들로 전혀 셈족 기원을 가진자들이 아닙니다. 셈족계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에서 나왔으며 그들의 숫자는 7-10퍼센트밖에 않됩니다.----"" 암쉘 로스차일드는 5명의 아들들이 있었고 , 그들은 모두 전 유럽에 위치합니다. 살로몬(salomon)은 비엔나로 갔고,칼(carl)은 나폴리로, 나단(nathan)은 영국으로,제임스(james)는 파리로,그리고 5번째 아들인 암쉘(amshel)이 프랑크푸르트에 머무릅니다.
200년도 못되어서 그의 아들들과 자손들이 완전히 서유럽을 정복합니다. 따라서 PAX JUDAICA(유대인의 세계지배)의 기초가 세워집니다. 이 가문의 우두머리인 나단에 의해 이끌어지는 앵글로 프렌치(Anglo-French )로스차일드팀은 야콥 로스차일드의 아들입니다.
영국팀은 나이든 에드먼드와 에벌린, 그리고 젊은 나단, 그리고 프랑스팀은 데이비드와 에두아르드(Eduard)에 의해 운영됩니다. 영국 로스차일드
▲ 메이어 로스차일드의 다섯 아들들
- Edmund Rothschild (1916)
에드먼드 로스차일드는 2차대전후 영국-카자르인 투자회사를 이끌므로 경력을 세웁니다.윈스턴 처칠과 협력하여 그는 캐나다의 브링코 코퍼레이션(BRINCO Corporation)-영국 뉴펀들랜드 개발회사-을 설립했고 에드먼드의 딸 캐더린은 바클리 국제 재정그룹(Barclay’s” global financial group)의 사장인 마커스에지우스(Marcus Egius)와 결혼합니다.
이 바클리 국제 금융그룹은 ABN-AMRO와 더치 뱅킹그룹(a Dutch banking group)을 흡수하고 ,이들 두 로스차일드 그룹은 하나가 됩니다. 마커스는 또한 BBC corpor ation의 이사 입니다.
- Evelyn Rothschild (1931) 영국과 프랑스의 금융,은행 그룹들의 통합 이후, 그리고 그들중에서 그가 지도적 위치에서내려온 이후 , 그는 거대한 나단 로스차일드와 아들들,런던의 투자은행의 우두머리로 남아있습니다. 에벌린은 또한 언론지인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와 데일리 텔레그라프 the Daliy Telegraph...)등을 조종하고 있습니다.
그는 또한 프랑크 푸르트에 있는 은행,금융그룹의 역사연구연맹(the Association for Studies of the History of Banking and Finances)을 만들었습니다.그는 다이아몬드의 이용,가공 분배의 영역에서 리더들중의 하나로서, 드비에르 국제회사(the internat ional corporation De Biers)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의 부인인 린 포레스터(Lynn Forester)와 함께 그는 FirstMark Communications International LLC 와 FieldFresh Foods 회사를 인도인(Indian) 미탈(Mital)가족과 함께 조종하고 있는데 사실은 로스차일드 금융과 자본(the great “Bharti” group)의 대표로서 행동하고 있는겁니다.
정치부분에서 에벌린의 주요 대리인들은 소로스(Soros),노먼 라몽(Norman Lamont), 피터 맨델슨Peter Mandelson-(카자르인),올리버 레트윈-Oliver Letwin(카자르인),그리고 버논 조던(Vernon Jordan)입니다.라몽은 보수당과 잠재적 수상인 마이클 하워드 -Michael Howard(카자르인)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하워드는 마가렛 대쳐시절에 재무부장관을 한 사람입니다. 그는 메시치 크로아티아 대통령과 보리스 타디치 세르비아 대통령과 함께 지역회의에 참가했습니다. 피터 맨델슨은 유럽연합내 영국 사업.기업.규제개혁부 장관으로 노동당과 토니블레어와 가깝습니다.
반면에 버논 조던(라자드 뱅크-Lazard Bank)은 미국내 민주당에 아주 영향력이 있는 사람으로 그는 빌 클린턴의 조언자이고 존 캐리의 선거운동을 2004년 이끈 사람입니다 에벌린의 부인 린(Lynn)은 빌 클린턴의 대통령 선거운동을 재정 지원했고 또한 힐러리 클린턴과 가까운 친구사이입니다.
에벌린은 또한 요크 공작과 엘리자베스 여왕의 아들인 에드워드 왕자와 아주 가깝습니다.이것은 영국왕실과 로스차일드 가문과의 오래된 커넥션의 일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Natha philip Rothschild(1971)-나단 필립 로스차일드
젊은 나단은 야콥 로스차일드의 아들로서, 그는 세계의 수많은 매니저들 대리인들 ,아주 중요한 정치,경제,언론과 군사조직, 그리고 심지어 알바니아의 고고학지역인 부트린트(Butrint)를 포함해서 물려받았습니다. “RIT Capital”, “Atticus Capital”, “JNR Limited”, “NM Rothschild”, “Vanco”, “Trigranit”, “British Petroleum”, Rio Tinto, 같은 회사와 조직들은 단지 새로운 왕인 그의 동쪽을 향한 거룩한 전쟁을 위해 이용하는 자원들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이러한 것을 달성하기 위해 그는 유럽연합, 나토, 영국같은 서방 명칭들 뿐만 아니라 전유럽과 아시아의 금융,정치 조직들(소로스,베레조프스키,듀카노비치,미탈가문(the Mitals)등을 맘대로 이용할수 있습니다.
프랑스 로스차일드 다비드는 영국과 프랑스 로스차일드로 나뉘어져 있는 NM Rothschild 그룹의 대표입니다.그는 또한 서유럽 투자은행에 영향력이 있는 Rothschild & Cie Banque 의 대표이기도 합니다.
다비드의 이복형제인 에두아르드 역시 투자은행의 임원입니다.게다가 그는 1980년이후 로스차일드가가 소유해 온 유명한 프랑스신문인 리베라치옹(Liberation)을 조종하고 있습니다. 세르비아에서의 로스차일드
세르비아에서는 새로운 왕(나단 로스차일드)은 몇 분야를 진행시켰는데 광업과 에너지생산,식량사업,언론등 입니다. 첫째분야는 로스차일드의 동쪽으로의 팽창과 세르비아에서의 로스차일드의 첫 대사로서 중요한 이용수단인 조지소로스(George (Schwartz) Soros)가 당분간 맡고 있습니다.
조지 소로스와 로스차일드의 커넥션
소로스는 카자르족 헝가리 유대인으로 1930년 부다페스트에서 György Schwartz로 태어났고 1936년 그의 부모는 그들의 성을 sorosz로 바꿉니다. 그는 런던에서 교육받고 1950년대 미국에 갑니다.그의 발전에 있어 소로스의 프로젝트를 찬성하고 그의 스승이 된 유명한 카자르인 칼 포퍼(Carl Popper)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전 세계를 통해 이 숨은 실력자는 ""컴퓨터 시대의 로빈훗(의적)""으로 불리는데 그 이유 는 부자나라로부터 돈을 취해 동유럽과 러시아에 인심좋게 그의 재단들을 통해서 주는 것같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식으로 그는 바로 로스차일드에 의해 공산주의로 갈수밖에 없었던 공산주의 기간동안에 지친 바로 그 나라들에 민주주의와 시민사회를 심고 있습니다.그는 모든 세계에 대한 금융투기로 경력을 쌓았는데 주로 그의 가족투자 펀드인 콴텀펀드(Quantum Fund)로서 운영자들이며 동시에 그들의 대리인들은 이태리와 스위스 금융가들입니다.
소로스와 로스차일드 사이의 커넥션은 펀드,신탁,사업체,은행등의 관리 위원회에 앉아 있는 믿을만한 사람들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그중에 한사람인 리차드 카츠(카자르유대인)-Richard Katz는 Quantum Fund 위원회의 임원으로,동시에 그는 Rothschild Italia S.p.A.” 의 이사이기도 하며 상업은행인 영국내 N.M. Rothschild & Sons의 임원이기도 합니다.
다른 중요한 인물은 닐스 토브( Nils O. Taube)로서 역시 콴텀의 임원이고, 지금은 나다니엘 로스차일드가 가지고 있는 St .James Place Capital 투자그룹의 파트너 이기도 합니다.
커넥션은 또한 프랑스 대중은행인 소시에테 제네랄 은행과 그 운영자인 미카엘 시쿠렐(Michael Cicurel)을 통해서 알수가 있는데 그는 에드먼드 로스차일드 매니지먼트의 의장이며 Rothschild & Cie Banque board 의 의장이기도 합니다.
다른 소로스의 파트너 로서는 제임스 골드스미스(James Goldsmith-카자르유대인)는 로스차일드 가문과 관계가 있습니다.
세르비아에서의 소로스의 네트워크 세르비아에서 이 숨은 실력자 소로스는 나단 로스차일드의 기반을 준비중이고, 소로스는 세르비아 사회의 정치,법,경제,문화,언론의 중요한 이미지 창조자 입니다.그의 목적을 당성하기위한 방법으로 그는 세르비아 정교회,세르비아 언어, 키릴문자,세르비아 역사,민족주의를 조종하기 위해 열중입니다.
그는 그의 네트워크의 영향력으로 공개사회펀드-Open Society Fund,인권펀드-Hum anitarian Rights Fund,헬싱키 위원회,베오그라드 써클(NGO단체),유러피언 운동-Eur opean Movement,반전운동센터-Centre for Anti-War Action, NUN, ANEM, OTPOR 등을 통하여 1990년대로 되돌리려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모든 주도적인 NGO들은 로스차일드의 분파 사무실들이며 가능한한 엄청난 정치적 영향력을 얻기 위한 것일뿐만 아니라, 민족의 심리형성을 위한 임무가 그들에게 맡겨졌습니다.
계속해서 세르비아인들의 학살에대한 고발과 범죄정신,집약적 죄악,등을 건드림으로서 사람들에게 죄책감과 두려움을 창조하려고 의도함니다.이러한 감정들은 조국에 대한 무관심, 세르비아인들을 그들 땅에서 내몰려는..즉, 식민지화를 구체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이러한 것은 또한 자유주의의 형태로 실행이 되고 있는데 국가의 제도,가족,민족,전통,문화등에서의 급격한 전환을 달성하기위한것으로 로스차일드 제국의 일방통행을 달성 하기 위한 것으로 또한 여겨집니다.
위에 언급된 조직외에도 이러한 공격에 아주 활동적으로 참여하는 단체는 유콤(Yuco m),베오그라드 인권센터(the Belgrade Centre for Human Rights),시민참여(the Civil Initiative),문화정화센터(the Centre for Cultural Decontamination), 우먼인블랙(Wom en in Black),청년참여(the Youth Initiative)...
이러한 광란의 주장자로서 소냐 비세르코(Sonja Biserko),나타사 칸티치(Natasa Kandic),푸코(Vuco),보르카 파비체비치(Borka Pavicevic- 변호사 니콜라 바로비치의 부인),조란 오스토지치(Zoran Ostojic)와 언론인들로 루코비치,테오필 판치치,와 그외 다른 모든 소로스의 베데타들이 있습니다.
소로스는 또한 반 유대주의를 밀어부치고 있는데 "세르비아 혐오 사회(xenophobic Serbian society)에 맡겨졌습니다. 필립 다비드,조반 비포르드,라스즐로 세켈등이 맡고 있으며, 다양한 사건들과 위협하는 편지들, 신성모독물,낙서(graffiti) 등이 이 계획의 전부입니다.
우리가 간과해서는 않될 사실은 공개사회펀드(Open Society Fund)는 재정적으로, 또 이념적으로 게이들의 인권을 변호하는 조직들을 지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라브리,퀴리아,게이세르비아등(Labris, Queeria, Gay Serbia)을 통해서...
마케팅과 미디어와 논리적으로 이들 체제 전복적인 계획들에 대한 지원은 B92, Studio B, TV Pink, TV Panonija, ANEM 같은 독립언론을 통하여 확실해진다.
the TV stations Devic, RTV Globus, RTV M+, RTV Kraljevo, RTV Nisava, RTV Pancevo, RTV Spektar, RTV Trstenik, the radio stations Radio 021, Bum 93, Radio Sombor, Radio Index, Radio Subotica, Radio Pirot, Radio Ozon...), the “Free Europe” radio... The cable TV network SBB and the satellite television TOTAL TV 등이 확장하고 있으며 이역시도 소로스가 소유하고 있다.
VIN and PG 네트워크 같은 프로덕션 회사들은 정보 단일화에 기여하고 있으며, 미디어 센터는 소위 NGO분파들에 추가적인 대중성을 제공하고 있다.이러한 전자 미디어 외에도 소로스의 리스트는 신문잡지출판사도 포함하고 있으며 그는 또한 세르비아에서 두개의 주도적인 정보부를 조종하고 잇는데 베타(Beta)와 포넷(Fonet)이다.
동시에 이들 정보부들은 19세기 이래로 로스차일드가 소유해온 AP와 로이터의 지부입니다.소로스는 또한 문화,교육단체들,극장,국립도서관,역사박물관,세르비아 예술과학아카데미 등에도 침투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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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한 사이트에서 로스차일드가의 1972년 파티사진이 공개되었습니다 오컬트와 헐리웃 영화,인기 팝스타 관련 분석을 주로 다루는 이 사이트에서 사진에 단 타이틀이 압권이더군요 "레이디 가가 이전에 엘리트들이 있었다"
섬뜩한 의상을 입고 심각한 얼굴로 춤추며, 즐기는 엘리트들을 거론하면서 레이디 가가 오리지널(original?) 인줄 아느냐..아니다..레이디 가가는 다만 엘리트들이 수세기동안 해온것을 트렌디하게 만들었을 뿐이라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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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s from 1972 Rothschild Party (the elite were doing it before Gaga) |
▲ Baroness Marie-Hélène de Rothschild and Baron Alexis de Redé. Marie-Hélène 로스차일드와 그녀의 친구 Alexis de Redé.
파티 내용을 살펴보니 'Marie-Hélène de Rothschild' 가 주최한 것으로 1972년 12월 12에 열렸는데 그날의 드레스코드는 남성은 블랙 타이,여성은 롱드레스를 착용하고 '초현실적인' 머리 장식을 쓰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참고로 부연설명을 하면, 파티를 주체한 Marie-Hélène de Rothschild는 프랑스 로스차일드가의 Guy de Rothschild의 부인입니다.1956년 첫번째 부인과 이혼하고 1957년 두번째로 결혼한 부인인데. 역시 첫 부인과 같이 Marie-Hélène은 남편이 될 Guy de Rothschild와 먼 친척관계 였습니다.
뉴욕에서 1957년 2월17일에 결혼했고 둘 사이에서 그해 12월에 난 아들이 바로 프랑스의 로스차일드가 'Edouard Etienne de Rothschild' 입니다. Guy de Rothschild는 두번째 결혼후에 Château de Ferrières를 개조해 1970년대 '화려한 파티'를 열기 위한 목적으로 이곳을 주로 사용하게 됩니다,
페리에르 성(Château de Ferrières)은 1855년에서 1859년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써 프랑스의 제임스 로스차일드에 의해 건축된 성입니다. 일드프랑스 센에마른의 페리에르 앙 브리에 위치해 있는데 파리 대학에 기증되기전까지 로스 차일드가 집안의 장자들에게 계속해서 유산처럼 상속되어 왔습니다.
▲ Hélène Rochas
당시 파티의 초대장에 대한 언급도 나오는데, 블루 스카이(blue sky) 에 구름이 떠있는 그림 바탕에 '거꾸로 쓰여진 글씨'로 내용을 써놓습니다.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해독할수 밖에 없는 이 날의 파티 초대 카드는 벨기에의 유명한 화가인.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에 그림들에서 영감을 받아 작성된 것으로 보입니다.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는 오늘날에도 특히 헐리웃 영화나 록스타들의 음반에 많은 영향을 미졌죠.
영화 '매트릭스'가 겨울비(1953년작)라는 그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었고,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그림 피레네의 성(1959년)과 올마이어의성 (1951년작)에서 모티브를 얻었습니다.그룹 롤링스톤즈는 르네 마그리트 그림 "강간"을 패러디해 음반재킷을 제작하였고, 비틀즈의 폴매키트니는
르네 마그리트의 열렬한 팬으로 그의 작품속 '사과'를 음반에 프린트해서 넣기도 했습니다.르네 마그리트는 '잘못된 거울'이란 그림에서 마치 전시안 처럼 한쪽 눈만을 캔버스안에 가득 그리기도 했으며 그의 또 다른 그림인, '위험에 처한 암살자'에서는..한낮에 피를 흘리며 죽어있는 여인의 시체와 시체 옆에 암살자인 남자가 아무런 죄책감 없이 축음기로 레코드를 듣고 서 있는 모습을 그림으로써 선악개념이 전혀 없는.. 섬뜩한 보여줍니다.
▲ Baron Alexis de Redé in a Dalí designed Hat 달리가 디자인한 모자를 쓴 Alexis de Redé
당시 파티에서는 계단에 잠든 '고양이 복장'을 하고 다양한 포즈를 취한 하인들이 줄지어 서있었고, 초대받은 손님들은 검은 리본으로 장식한.. 일종의 지옥의 미로를 통과해야 했습니다.가끔 고양이 복장의 하인들이 그 손님들을 구하러 왔으며 그들을 응접실로 안내했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Guy Rothschild와 Marie-Hélène de Rothschild가 환영해 주었는데 GUY는 큰 모자를 쓰고 Marie-Hélène는 다이아몬드 눈물을 흘리는.. 맨 위의 사진에서 보는 듯한 동물상을 쓰고 있었다고 합니다.
1972 Surrealiste Ball- Rothschild
1972년 로스차일드 파티와 관련해서.. 또 다른 사진 자료를 소개합니다. 당시 발송된 초대장과,페리에르 성(Château de Ferrières)의 외부 모습 Guy Rothschild 부부를 비롯한 많은 손님들의 사진과 당시 테이블 세팅 모습등 파티 당시의 여러 상황들을 스틸 사진으로 보실 수가 있습니다.
The Dîner des Têtes Surréalistes reversed writing invitation after a Magritte sky
1972 Surrealiste Ball 당시에 사용된 거꾸로 쓰여진 글씨의 초대장 입니다. 화가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에서 영감을 받은 구름과 하늘
Château de Ferrières. For the evening the château was floodlit with moving orange lights to give the impression that it was on fire.
당시 파티가 열렸던 페리에르 성(Château de Ferrières)의 모습입니다. 마치 성이 불타는 듯한 인상을 주기 위해서 오렌지색 투광조명을 밝힌 모습입니다.
Le Baron et la Baronne Guy de Rothschild
파티를 주최한 Guy Rothschild 부부 사진입니다. 왼쪽이 Guy이고 오른쪽이 부인인 Marie-Hélène입니다.
Portuguese guests: Senhora Espírito Santo and the Duke and Duchess of Cadaval
많은 게스트들이 초대가 되었는데, '오드리 햅번'과 같은 영화 배우의 모습도 보이고 에스파냐의 유명한 화가인 '살바도르 달리'도 보입니다. 그 외에 각 나라의 왕족들의 모습도 사진에서 찾아 볼수가 있습니다.
Charles de Croisset, Marisa Berenson, Paul-Louis Weille
Audrey Hepburn at the Surrealiste Ball, 1972. 파티에 참석한 영화배우 오드리 햅번
Salvador Dalí and the italian princess Maria Gabriella de 화가 '살바도르 달리'와 이태리 공주 Maria Gabriella
Baron Alexis de Redé Marie-Hélène 로스차일드의 절친한 친구 Alexis de Redé.
The Baroness Thyssen-Bornemizza and Guy Baguenault de Puchesse
Jacqueline Delubac
Claude Lebon and Charlotte Aillaud
Hugues Gall and Mrs. Rolf Libermann
Rothschild Party Table Setting
The Menu
각 테이블마다 특정 주제에 맞춰 세팅이 되어 있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닐,이 기이한 사진들을 눈여겨보십시요.
Table of the genius rhinoceros
Table of the metaphysical perspectives
Table of the insane shoes
Table of the tenderized turtles
Table of the swaying dolls
Detail of a table with a fur dish, Mae West red lips and a blue bread
A sugar made woman laying in a bed of roses deser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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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화폐전쟁(CURRENCY WAR)
쑹훙빙 저 |
화폐전쟁은 발간 당시 화제를 일으키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책입니다. 로스차일드 가에서 시작된 국제 금융재벌들이 세계 경제와 전세계를 보이 않는 곳에서 지배해 왔는지를 보여줍니다. 워털루 전쟁 이후의 세계에서.. 일어난 사건들의 배후에 이들이 있음을 밝히며,그들이 어떻게 한나라 경제와 정치 운명을 장악하고 재산의 흐름과 분배를 통제했는지를 보여줍니다.
화폐 발행권을 둘러싸고 논란을 벌였던 미국의 대통령과 미연방준비은행. 1929년 미국 경제 대공황이 일어난 이유, 황금이 국제적 기축통화일수 밖에없는 이유, 중동 석유가 미국 달러에 미친 영향, 일본 경제가 1990년대 장기 침체에 빠진 이유, 한국이 IMF위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이유, 아시아 금융 위기의 배후 조종자 등을 밝히며 세계 경제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 합니다.또 세계를 통치하는 엘리트 그룹이 정치와 경제 영역에서 끊임없이 금융 전쟁을 일으키는 수단과 그 결과를 재현합니다.
미국에서 금융 전문가로 활동하는 저자는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를 보며, 배후에 보이지 않는 손이 조종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습니다. 하지만 증거가 없었기에 방대한 정부 문헌과 법률 문서, 개인 서신과 전기, 신문 잡지에 실린 글에서 서양의 굵직한 금융 사건을 찾아냈고, 글쓰기에 돌입했으며 제작팀을 구성해 그 작업을 완료하는데 10년에 가까운 세월이 걸렸습니다.10년에 걸친 취재와 고증 끝에 비로소 [화폐전쟁]이 발간되었습니다.
시중에 화폐전쟁 3.0이란 책이 있는데..언뜻 보면 화폐전쟁 최신판으로 착각을 합니다만 저자도 틀리고 내용도 완전 다른 책이니 참고하십시요.
인터파크에서 판매되네요.링크해드립니다. 화폐전쟁(CURRENCY WA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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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세계금융을 움직이는 어둠의 세력(2권세트)
기쿠카와 세이지 저 |
저자는 미국에서 30년 이상을 거주하며 단순 추론이 아니라 철저한 자료의 입증을 바탕으로 세계정부수립 세력의 배후를 공개하고 있습니다. 지난 100년 이상의 시간동안 록펠러와 로스차일드 가가 거대자본을 가지고 어떠한 형태로 미국과 세계에 전쟁과 경제,사회적 혼란으로 발생시켜 왔는지객관적인 자료,증거들을 토대로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아주 최근까지의 미국의 상황 역시 정확하게 분석하고 있으며, CDS(Credit Default Swap)등 또 다른 경제위기를 조장하기 위해 사용될 수단들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두 권이면 과거에서 현재까지 그들이 일으켜온 대표적 사건들과 세계정부수립의 관계가 통합적으로 완벽하게 정리되실 것입니다. 머리말에 '엘고어의 지구온난화와 개구리 이야기'를 하며 호감있게 보았다고 언급하는 것은 저자의 통쾌한, 극단적인 반어법으로.. 몰라서 칭찬했다고 오해마시기를 바랍니다..탄소세에 관한 부분도 책 중간에 언급됩니다.
인터파크에서 판매되네요.링크해드립니다. 세계금융을 움직이는 어둠의 세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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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경제 저격수의 고백 2
존 퍼킨스(John Perkins) 저 |
아이슬란드 국가 부도, 에콰도르의 모라토리엄 선언, 미국의 서브 프라임 모기지로 인한 경제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과 그 해결책을 제시한 책입니다.이 책의 저자 존 퍼킨스는 과거 경제 저격수로 활동했던 경험으로.. 최근의 경제 위기는 제3세계와 세계의 자원 보유국에서도 탐욕을 못채운 미국의 거대자본 기업들이 착취와 사기를 일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거대 자본주의 지배 계층이 어떤 식으로 전 세계적 위기를 불러일으켰는지, 이를 개선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미국 내에서 가장 널리 보급된 경제 저격수의 수법 중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엄격한 환경 기준, 사회 기준, 진실을 강조하는 광고등을 비롯하여 과거 대중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도입된 기준을 준수하도록
1.기업을 압박하는 법률을 폐지하도록 압력을 행사하는 방법, 2.개인, 기업, 정부에 엄청난 금액의 부채를 떠넘기는 방법, 3.공익시설, 감옥, 기타 ‘공공’ 기관을 민영화하는 방법, 4. ‘국토방위’라는 명분 아래 경찰의 감시 권한을 강화하는 방법 5.기업의 이익을 위해 국유지를 사용하는 방법 등이 있습니다.
[경제 저격수의 고백]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던 저자 존 퍼킨스는 오늘날 우리에게 닥친 총체적인 위기가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인터파크에서 판매되네요.링크해드립니다. 경제 저격수의 고백 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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