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수이트

[스크랩] 로마카톨릭의 제수이트(예수회)와 사탄을 숭배하는 일루미나티

그리운 오공 2011. 6. 30. 10:07


로마카톨릭의  제수이트(예수회)와 사탄을 숭배하는 일루미나티

            

역사적으로 아주 유명한 살인마가 성자로 숭배되고 있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로마카톨릭(천주교)의 제수이트(Jesuit, 예수회)의 수장이었던 이그나티우스입니다. 그는 1492년 스페인의 바스크(Basqus) 지방 로욜라 성에서 13남매중 제일 나중에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이니고 레폐르 레갈레라였습니다.


로마 카톨릭의 세례명은 이니고(Inigo), 나중에는 이그나티우스라고 개명하였습니다. 로마 카톨릭(천주교) 측에서 발행하는 책에서는 이냐시오로 되어 있습니다. 이냐시오(Ignasio)라는 이름은 라틴어식의 이름이며, 이그나티우스는 이탈리아식의 변형된 이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태어난 지역의 이름을 붙여 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Loyla)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이름은 ‘타는 불’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도박과 여자와 결투로 방종 하는 자였습니다.


당시 유럽은 종교개혁의 불씨가 강하게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로마 가톨릭의 신부였던 마틴 루터는 자신이 소속되어 있던 로마 카톨릭의 허구성의 더러운 위선, 그리고 무서운 실체를 깨닫고 1517년 10월 31일, 자신의 소신을 밝히는 95개 조항을 발표함으로써 로마 카톨릭과 공개적으로 싸우는 종교개혁을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기 전에도 이미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로마 카톨릭의 신부였던 루터가 자신이 속한 로마 카톨릭(천주교)의 허구성과 비도덕성 그리고 잔인성, 진실을 왜곡하는 것 등의 많은 것을 공개적으로 폭로하게 되자 로마 카톨릭은 1537년 곤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로마 교황 바오로 3세(Pauls Ⅲ, 1534-1549)는 이그나티우스에게 제수이트(예수회)를 조직하도록 명령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그나티우스가 이끄는 로마카톨릭의 제수이트(예수회)의 군대와 도미니칸 수도승들을 투입하여 1572년 8월 24일 성바돌로메 축일에 참가했던 무고한 시민들을 아무런 선전포고도 없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 대학살시켰습니다.


대학살 때 살해된 사람들은 4천여 명이 넘었으며, 8월말에서 9월 중순까지 그 짧은 기간에 살해된 사람들은 5만 명이 넘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이런 잔인한 살인극은 극히 드문 현상으로 세계 잔혹 대사건에 포함이 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이런 살인마를 로마 카톨릭(천주교)에서는 성자로 숭배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제수이트가 세운 서강대학교에서는 이그나티우스를 뜻을 기르고 있을 정도입니다. 이 살인극은 파리의 시청에 보관되어 있는 장부에서 나타나 있으니 부인 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바로 이 제수이트(예수회)의 수장이었던 이그나티우스가 일루미나티를 만들었습니다. 그 후 제수이트(예수회)의 정회원이었던 아담바이스 하우프트가 그 뒤를 계승하여 사탄을 공식적으로 숭배하는 더욱 강력한 일루미나티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보편적으로 인터넷이나 책에서는 일루미나티를 아담 바이스 하우프트가 만든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아담 바이스 하우프트가 주도하는 일루미나티 회원들은 당시 독일에 진출해 있던 프리메이슨 데오돌 지부에 매력을 느끼고 가입을 합니다. 가입 목적은 프리메이슨 조직들을 장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의 목적은 달성이 되고 마침내 일루미나티 조직과 프리메이슨 조직이 하나로 합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장수만님이 설명을 잘 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일루미나티 프리메이슨 조직은 프리메이슨 내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사탄숭배주의자들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이 세상을 사탄의 세상으로 만드는 일에 최전선에서 일하는 핵심 조직들입니다.  



제수이트와 시온프로토콜





예수회와 시온프로토콜

예수회와 시온프로토콜

(The Jesuits and The Protocals of Zion)


고 레오 H. 레히만


소위 "시온의 현자들의 의정서(Protocols of the Wise men of Zion)"라고 불리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거짓문서이며, 결코 유대인들이나 프리메이슨그룹들에 의해서 쓰여지지 않은 것들임이 모든 지식인들에게 공인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저자는 여전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것의 놀라운 부분은 이 마술적인 속임이 그것의 계획된 목적 - 토크마다의 뺨에 솔질을 할 수 있는 방법들로 중부 유럽에 유대-메이슨 영향을 축출하는 하는 것-에 있어서는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이다.(프리메이슨 역시 현재 제수이트가 장악하였음-역자주)


이 의심스러운 프로토콜의 내용들은 충분히 잘 알려져있으며, 보이지 않는 세계 정부의 형성을 위한 계획들을 어떤 유대 지도자들이 세웠다는 비밀 회의들에 대한 정교한 보고서들--proces verbaux--로 각 나라들에서 방송되었다. 프리메이슨 지부들과 자유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자 그리고 공산주의당들의 도움으로, 이러한 "시온의 장로들"이 유대주의와 다른 모든 종교들을 파괴시키고, 모든 비-유대인 정부들을 전복시키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회자되고 있다. 크리스쳔 연구소들을 약화시키려는 모든 비열한 방법들이 이 엄청난 음모의 가공의 지도자들에의해 수립되어졌다.


세계 정부 수립 전략서


이 모든 것은 온 세상을 통한 유대인 초제국주의의 자발적인 도구들과 맹목적인 하수인들인냥 메이슨 조직들을 이용하여 주도적으로 실행되어질 것이다. 종교개혁으로부터 우리의 경제 불황의 원인인 경제 조건들까지--여러 나라들에 걸쳐서 일어나는 모든 대격변들과, 시민전쟁, 인종전쟁과 각국의 전쟁들, 국가 통치자들과 수반들의 암살들, 과거 수세기동안의 모든 혁명 운동들을 실제적으로 유대인들이 선동해왔다고 간주되어왔다. 그 모든 것 배후에 시온의 장로들의 차가운 계산, 비양심적인 교활함과 살인적인 광신이 있었다고 그려졌다. 프로토콜 1은 모든 나라들에서 구멍을 뚫고 혁명과 내분을 일으키는, 재력있는 스파이들과 비밀요원들의 대부대에 관하여 말해주고 있다. 크리스쳔 사회를 파괴시키려는 무정부주의, 공산주의 그리고 사회주의 운동들에대한 원조는 프로토콜 3에 개괄적으로 쓰여져있다; 세계적인 경제 위기를 초래하는, 통화시스템의 하락과 붕괴 역시 그렇다. 어느 국가 혹은 국가 그룹들에 반대하는 그들이 응수할 수 없는 국제적인 전쟁을 벌이는 것은 프로토콜 7에 계획되어 있다. 프로토콜 10은 특히 어떻게 모든 도덕성이 파괴되어 가는지, 유력한 정치가들이 협박받고, 타협되고, 또 그들이 음모자들의 목적을 위해 봉사하도록 하기 위해 그들이 중상되는 지가 수록되어 있다.


이 기괴한 계획들이 세워지도록 의도된, 비밀 회합은 "프리메이슨의 가장 영향력있고 최고위 선도자의 한 사람"의 주최로 열렸다고 한다; 그것들은 또한 "33계급의 시온의 대표자들에 의해 서명"되었다고 한다.


조직의 어떤 그룹도 이 그림속에 나타난 시온의 유대-프리메이슨 장로들처럼 사악하고 사탄적인 것은 결코 없었다. 그들은 적-그리스도의 찬양자들이고, 오직 적-그리스도의 궁극적인 출현에대한 두려운 기대감이라는 주술에 걸린 자들이다.


이 혁명적 행동 계획과 러시아 황제 짜르의 암살과 케렌스키 정권의 전복에 뒤이은 볼셰비키 프로그램 사이에는 한가지 확실한 유사한 점이 있다고 인정되어야한다. 당시 소비에트 정부의 인민 위원회의 17회원들중, 오직 한 사람, 트로츠키만 유대인이였다. 황제나 소비에트 치하에서도 러시아에는 메이슨들은 결코 최소한의 영향력도 없었다. 세계경제공황이 또한 도래된 이래로, 시온의 이 장로들에의해 교묘하게 계획된 그것과 다소 유사하다. 그러나 결코, 어쨌든, 유대인들과 메이슨들은 그토록 완벽하게 세계 재정들을 통제하지 못했다. 그들은 경제 붕괴의 결과로 다른 사람들과 같이 고통받았다.


자기들에게 유리하도록 성공적으로 이 프로토콜들을 이용하고, 그들의 주요 목적을 획득하기 위해 이 교활한 위조문서들을 사용했던, 나치-파시스트들은 그것들의 작가로 비난받을 법 하다. 그러나 그들의 출판은 사반세기정도 파시즘의 생성보다 빨랐다 즉 당시는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학교에서 구구단을 배울 때였고, 프랑코는 그의 어머니 무릎에서 "아베 마리아"를 재잘거릴 때였다.


이제, 한 익명의 서류의 작가는 그 서류 자체에서 - 그것이 옹호하는 주체와 그것이 서술하고 있는 적에의해- 가장 잘 발견될 수 있다. 이것들은 심지어 그 반대편에 자리매김해서 나타날 수도 있다. 이것의 명확한 견본이 내가 내 앞에 가지고 있는 시온 프로토콜의 일부를 분석한 것으로부터 볼 수 있다. 그것은 카톨릭 카제트, 1936년 2월호를 복사한 것으로, 영국 런던의 카톨릭 선교회의 월간 출판물이다. 공간의 제약상 이 극악한 문서의 일부만 인용하겠다.


시온의정서 내용요약


유대-메이슨 음모자들은 말한다:


"이방인들사이에 사회 질서에대한 어떠한 도덕 논리가 존재한다면, 모든 믿음, 애국심, 그리고 위엄이 근절될 때까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배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주요 대적자: 카톨릭 교회를 타도시키기까지 가야할 먼길이 있다...."


"카톨릭 교회는 우리 길을 방해해왔고, 또 그것이 존재하는 동안 우리를 방해할 유일한 기구라는 것을 우리는 항상 명심해야한다. 카톨릭 교회는 그녀의 조직적인 사역과 그녀의 정선되고 도덕적인 가르침들로써, 그녀의 아이들로하여금 자중(自重)하여 우리의 지배에 복종하지 않고, 또한 우리의 미래의 이스라엘 왕 앞에 무릎꿇지 않도록 그러한 마음 상태로 그녀의 아이들을 항상 대비시킬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카톨릭 교회를 그 뿌리부터 흔들어놓는 최상의 방법을 발견하고자 노력해왔다."


"우리는 가장 불명예스러운 비방으로 카톨릭 교회를 더럽혀왔고, 우리는 그녀의 역사에 얼룩을 남겨왔으며 심지어 그녀의 최고의 고상한 업적들을 훼손시켜왔다. 우리는 그녀의 적들의 잘못들을 그녀에게 전가시켰고, 그럼으로써 그녀의 적들을 우리편에 보다 가까이 서게 하였다... 우리는 그녀의 사제들을 증오와 조롱의 대상으로 바꾸었고, 우리는 그들을 대중들의 멸시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카톨릭 종교의 실행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며, 단순한 시간낭비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우리 프리메이슨의 많은 승리중 하나는 우리 지부들의 회원들이 된 이방인들이 우리가 자신들의 감옥을 짓는데 그들을 사용하고있다는데 결코 의심을 품지않을 것이라는 점이며, 그들의 테라스 위에 우리는 세계를 지배하는 이스라엘 왕의 보좌를 세울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카톨릭 교회에 대한 우리의 외부공격에대한 전략을 숙고하였다...이제 어떻게 카톨릭 교회의 멸망을 재촉하기 위해 우리 작업을 진행시키는 지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심지어 그녀의 사제들중 일부를 우리 목적의 선봉장이 되게하는지 설명해보자..."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중 몇몇을 카톨릭 내부에 연합하도록 유도하며, 그들이 카톨릭 교회의 붕괴를 위해 보다 효과적인 방법으로 일해야한다는 분명한 암시를 준다... "


"우리는 모든 혁명의 아버지들이다--그것들중 어떤 것은 때때로 우리에 대항하기도 한다. 우리는 평화와 전쟁의 최고 주권자들이다. 우리는 종교개혁의 창조자들임을 자랑할 수 있다! 칼빈은 우리의 자녀들중 하나였다; 그는 유대인 후손이였고, 유대인 권력에 의해 위임되었고, 유대인 재정으로 고무되어, 종교개혁에대한 자신의 계획을 세웠다."


"마틴 루터는 그의 유대인 친구들 의 영향에 순종하였고, 그리고 또 유대인 권력과 유대인 재정으로, 카톨릭에 반대하는 그의 계획이 성공을 거두었다..."


"우리의 선동과, 자유주의에대한 우리의 이론과, 자유에대한 우리의 왜곡된 오전(誤傳)에 힘입어, 이방인들 사이의 많은 사람들이 종교개혁을 환영할 준비가 되었다. 그들은 교회에서 분리되어 우리의 덫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이렇게 카톨릭 교회는 상당히 약화되었고, 이방인들의 왕들에 대한 그녀의 권위는 거의 전무할 정도로 떨어졌다..."


"우리는 프로테스탄드들이 우리의 바라는 바에 충성해준 점에 대하여 그들에게 감사한다--비록 그들중 대부분이 자기들의 믿음에 충실하여 우리에대한 자기들의 충성에 대해 무지하더라도..."


"프랑스는, 프리메이슨 정부(政府)로써, 우리 손아래 있다. 우리의 재정에 의존하는 영국은 우리의 발아래 있다; 그리고 그녀의 프로테스탄트주의에 카톨릭 교회의 파괴라는 우리의 소망이 들어있다. 스페인과 멕시코는 우리 손 안의 장난감에 불과하다. 그리고 미국을 포함한 다른 많은 국가들이 이미 우리 계획 속으로 들어왔다..."


" 우리의 외교 계획들과 우리의 비밀 조직들의 권력을 살펴볼 때, 우리와 동등한 조직은 없다. 예수회가 우리와 비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의 신용을 떨어뜨리는 데 성공해왔다. .. 왜냐하면 그것은 가시적인 기관이고, 우리는 우리 비밀조직들이라는 뚜껑 아래 안전하게 숨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톨릭 교회는 아직 존재한다..."


"우리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일말의 자비도 보이지 않고, 그녀(카톨릭)를 파괴시켜야 한다...이방인들의 윤리를 파괴시키는 우리의 활동을 강화하자. 혁명정신을 사람들의 사람들의 마음 속에 퍼뜨리자. 그들은 애국심과 가족에대한 사랑을 경멸하고, 자기들의 신앙을 엉터리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카톨릭 교회 밖에 있는 크리스쳔들이 그 교회로 재연합하는 일이 불가능하게 만들자, 그렇지않으면 우리가 지배하는데 있어서 가장 커다란 장애물이 점점 강화되어 우리의 모든 일이 실현되지않을 것이다..."


"카톨릭 교회의 실질적인 적들이 여전히 존재하는한, 우리는 세계의 주권자가 될 것을 희망할 수 있음을 기억하자...그리고 로마의 교황이 폐위되기 전에, 미래의 유대인 왕은 결코 세상에서 통치할 수 없을 것이다..."


"시간이 되어 교황의 권력이 마침내 파괴된다면, 보이지 않는 손의 손가락들이 대중들의 주의를 최고 성직회의 궁정으로 이끌어서, 그들에게 우리가 교황청 권력을 완전히 허물었음을 알게할 것이다... 유대인의 왕이 그 때 실질적인 교황이 되고 유대인 세계-교회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을 역으로 놓으면, 다음과 같다:


카톨릭 교회는 유일하게 도덕성, 사회 질서, 믿음, 애국심과 위엄을 고수하는 자이다....

카톨릭 교회는 적그리스도의 길을 방해해왔고, 또 항상 방해할 유일한 기관이다.

카톨릭 교회는 조직적인 사역과, 정선되고 도덕적인 가르침의 훌륭한 모범이다: 그녀는 항상 그녀의 아이들에게 自重하도록 하며, 그들이 결코 사탄적 유혹에 무릎꿇지 않게 할 것이다.

카톨릭교도들이 교회의 가르침을 고백하는 것과 그 명령에 순종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게 될 때만, 우리는 폭동과 거짓 자유주의의 확산을 보게될 것이다.

카톨릭 교회는 가장 불명예스런 비방들로 명예가 실추되어왔고, 그녀의 역사는 얼룩져왔으며, 그리고 그녀의 가장 고상한 활동들도 더럽혀져왔다. 카톨릭 교회의 실천의식들은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았으며, 단순한 시간낭비도 아니다.

프리메이슨은 카톨릭 교회와 반대하여 사탄과 연합한다. 모든 사제들이 신실한 것은 아니다; 자유주의 카톨릭 사제들은 오직 마귀의 일에 봉사한다.

종교개혁은 악한 음모자들의 사역이다. 칼빈과 루터는 카톨릭 교회를 전복시키기 위해 그들로부터 재정을 지원받았다.

자유와 해방은 단순히 허울좋은 왜곡된 오전(誤傳)에 불과하다. 프로테스탄트들은 무의식적으로 모든 악마적인 것들이 우리 현실 세계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도왔다. 카톨릭 교회를 파괴시키는 것이 프로테스탄트 영국의 목표이다. 스페인과 멕시코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들이 카톨릭 종교에 반대하는 음모의 일부분이다.

예수회는 은밀한 조직이 아니며,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은 솔직하고 정당한 것이다. 예수회는 세상에서 사악한 힘을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조직이다.

결국: 교황이 로마에 있는 그의 왕좌에 앉아있는 동안, 세상은 안전하다...


카톨릭 예수회가 작성한 음모


이것은 모든 카톨릭 학교들에서 교육되는 것과 일치한다. 사제들과 평신도들에게 주어지는 모든 피정이나 사역은 이그나티우스의 "The Two Camps(두 진영)"--카톨릭 교회는 하나님에의해 한 언덕으로 인도되고, 다른 프로테스탄트, 유대인들, 프레메이슨, 공산주의자들, 사회주의자들과 무신론자들은 사탄에 의해서 다른 언덕으로 인도된다--이라는 그림과 함께 시작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다시 신부 코우클린(Coughlin)의 사회 정의(Social Justice)잡지에서 발견된다. 1940년 2월 5일 발간호에서, 예를들면, 그는 카톨릭 교회가 "이상적인 크리스쳔 진영"이라고 장황하게 설명하며, 모든 반대자들 혹은 그와 함께 하지 않는 자들은 비-크리스쳔 그룹에 속한 것으로써, 곧 "적그리스도의 육신속에 체화되어" 나타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사회문제들에 대한 평신도 크리스쳔 리더십은 정죄되어야한다."고 말했다. 그 잡지의 한 로마 특파원은 "로마에 있는 크리스쳔 유럽의 유일한 희망"이라는 기사를 쓰면서, 유럽이 신성 로마 제국의 복원에 의해서만 유일하게 구원될 수 있고; '현재 다른 어느 나라들 보다도 신-유태인적인, 반-카톨릭 정신을 대변하고있는' 영국이 독일과 이태리에 의해 멸망될 것이라고 했다. 이 잡지의 또다른 부분에서, John A. Ryan와 같은 자유주의 카톨릭 신부들이 좌익 혁명 그룹들에 의해 고용된 "고용 사제"라고 부르고 있다. 민주주의에대한 비난이라고 그 독자들로부터 표를 얻으려는 목적으로 20개의 질문들이 들어있는 교묘한 앙케트가 있다 끝부분에 있다.


비록 1903년 러시아에서 최초로 출판되었지만, 시온 프로토콜은 프랑스에 그들의 시초를 두고 있고, 예수회원들이 중요한 선동자들이였던, 드레이퍼스 사건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프랑스 공화국의 "유대-메이슨" 정부의 타도로써, 그들은 프랑스에서 최초로 실행되고자 계획되었다. 그러나 예수회에의해 공개적으로 지지를 받았던 레오 택실(Leo Taxil)의 거대한 배신의 발각, 당시 프랑스 정부와 바티칸의 불화들과 아울러 프랑코-러시아 동맹 체결등이 보다 적절한 시기에 러시아에서 최초로 그것들이 나타나게 만들었다.


유대인 지도자들로 가정되는 이들의 이 프로토콜이 예수회에 의해 조작된 최초의 문서들은 아니다.





이 프로토콜이 나타나기 전 수백년동안, 예수회는 계속해서 교구사제들 사이의 자유로운 프랑스 카톨릭 운동이였던 얀센주의(Jansenism)에 반대하는 "Bourg-Fontaine의 장로들의 비밀들"이라고 불리는 비슷한 위조문서들을 이용하였다. 이 두 위조문건들은 완벽하게 일치한다--Bourg-Fontaine의 숲에서의 비밀 회합, 교황청을 파괴시키고 모든 국가들 사이에 종교적 관용을 정립시키려는 "음모가들"의 계획, 보좌와 제단에 반대하는 의심스러운 음모, 그리고 카톨릭 교회에 반대하는 세계-정부의 건설. 거기에서는 세상의 역사적 진화의 부정적인 쪽이 동일하게 각색되어 있는데, 이는 반대로, 모든 보수적인 세력들--전제군주들, 귀족계급, 군부, 사제계층--이 사탄의 맹공격으로부터 세계를 구하기위해 ,긍정적인 크리스쳔(카톨릭) 쪽으로 모여들도록, 그것을 드러나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따라서, 이 시온 프로토콜로 성취될 목적들과, 사용되어질 방법들, 선한 것으로 간주되어지는 사람들과 악한 것으로 묘사된 세력들을 분석해보면, 이 위조문서들이 분명하게 추종하도록 의도된 대상들의 소유자들만이 그들의 작가라는 결론에 우리는 도달하게 된다.


역자주 - '시온 프로토콜'은 스물네가지 '세계 정복 강령'으로써 현재 세계는 정치, 경제, 문화, 종교, 군사면에서 정확하게 진행되고 있다. 특별히 3-S정책중 스포츠, 스크린, 섹스는 성공적이며 유엔, 유럽연합, 연방준비은행, I.M.F. 등 모든 면에서 거의 95%가 성취되었다. 그런데 이 프로토콜을 유대인들이 작성한 것처럼 세상에 알려진 이유는 로마 카톨릭이 이스라엘 예루살렘을 정복하기 위해 펼쳤던 모슬렘의 예루살렘 정복, 십자군 정복, 나치 히틀러 유대인 학살과 같은 과정에 불과하다. 즉 이스라엘 민족들이 세계 정부 건설을 위해 비밀 전략을 수립한 것 같이 '시온의정서'라고 표현하면서도 사실은 로마 카톨릭의 세계정복음모를 유대인들에게 뒤집어 씌우는 지상 최대의 위조문서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시온의정서'는 유대인이 쓰거나 실행한 것이 아니라 로마 카톨릭 예수회(제수이트)가 작성하였고, 그대로 실행하여 머지않아 세계정부로 돌입할 것이다. 아니 이미 돌입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리스도인들은 깨어 있어야 할 것이다.  



로마 카톨릭 예수회(Jesuit) 미래주의의 악한 제국

                                                                                                        

기독교인에게 루시퍼(Lucifer)의 종말기 최대 기만을 즉시 볼 수 있도록 해 줄 수 있는 초자연적이고 천국의 영감을 받은 최첨단 안경을 상상해 보라. 그런 X레이 안경이 존재한다. 이 장의 목적은 그런 안경을 찾아 써 보는 것이다. 그러면 상상하기 어려운 예수회(Jesuit) 미래주의의 악한 제국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의 기독교는 1500년대에 발생한 프로테스탄트 개혁의 중요성을 거의 잊어버렸다. "16세기에는 음침한 밤 뒤에 다가오는 날씨 험악한 일출 광경과 같은 모습을 제시해 준다. 유럽은 오랜 미신의 잠에서 깨어났다. 죽은 자는 일어섰다. 침묵을 지킨 채 살해되었던 진리의 증인들이 다시 한 번 일어서서 그 증거를 새로 제시하고 있다. 순교한 신도들이 종교 개혁가로 다시 나타났다. 영적 성전을 정화한 일도 있었다. 시민권과 종교의 자유가 도입되었다. 인쇄술의 발전과 학문의 부흥에 따라 그 운동이 가속화되었다. 어느 영역에서나 진보가 이루어졌다. 콜롬버스는 대양을 횡단하여 신대륙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로마는 그 기반이 흔들려 자치령의 절반을 잃었다. 프로테스탄트 국가가 형성되고 근대 세계가 탄생했다." (H. Grattan Guinness, 가톨릭교와 개혁, p. 122)


1천년 동안 유럽은 로마의 철권 통치를 받았다. 그 당시에는 성경이 거의 없었으며 기독교에는 대체로 미신이 침투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마음에서 우러난 감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사실에 대한 단순한 믿음 등을 거의 알지 못했다. 은혜에 대한 신약의 진실, 완전한 용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이들에게 영생을 자유롭게 은혜로 주시는 일(로마서 6:23)이 여러 가지 유전 하에 사장되었다. 이어서 독일에서 마르틴 루터가 사자와 같이 일어섰다. 어마어마한 개인적 투쟁을 거쳐 마르틴 루터는 '생명의 장점'에 대한 믿음이나 인간의 사역을 통해서라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 안의 이신의인(以信義認)(하나님의 '정의')을 가르치기 시작했다(하나님의 '정의') (로마서 1:16, 3:26, 28, 5:1).

결국 마르틴 루터는 예언가가 되었다. 루터는 '어린 뿔', '죄악의 인간', '짐승'에 관한 내용을 촛불에 비추어 가며 읽었고, 성령이 자신의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자 큰 충격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루터는 진실을 발견하고 혼자 말했다. "어째서 이 예언이 로마 카톨릭 교회에 적용되는가?" 루터가 이 새로운 통찰력과 씨름하고 있을 때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딤후 4:2)"라고 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마음 속에 메아리쳤다. 따라서 마르틴 루터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교황의 로마카톨릭은 성경 예언의 적그리스도라고 어리둥절해 있는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또는 서면으로 설교했다. 이 사역과 동떨어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통한 구원이라는 이중 메시지, 또한 교황의 로마카톨릭이 적그리스도라는 가르침 때문에 역사의 강이 그야말로 물줄기가 바뀌었다. 유럽과 영국에 있는 수십 만명의 사람들이 카톨릭 교회를 떠났다.

"미국의 성경 논평가 랄프 우드로우(Ralph Woodrow)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신교 개혁을 가르침에서는 두 가지 큰 진리가 돋보인다. 곧 의로워지는 것은 로마카톨릭의 사역이 아닌 믿음과 공존해야 한다는 사실과 교황이 성경의 적그리스도라는 사실이다' 이는 그리스도를 위한 메시지이자 적그리스도에 반대하는 메시지였다. 종교개혁 전반은 이 이중의 증거에 바탕을 두고 있다." (Michael de Semlyen,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종교개혁에서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했고, 다음으로 그리스도의 비추어 적그리스도를 발견했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위하고 적그리스도에 반대하는 강력하면서도 성령이 충만한 운동에 따라 세계가 깜짝 놀라게 되었다.


H. Grattan Guinness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처음부터 그 운동(종교개혁)은 예언적 말에 따라 인도되고 힘을 얻었다. 루터는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인식하기 전까지는 전혀 강력하지도 않았으며, 교황의 이단성에 대해 싸우려고도 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루터는 교황의 교서를 불태워 버렸다. 녹스(Knox)의 첫 설교(Knox에게 개혁가의 임무를 주게 했던 설교)는 교황에 관한 예언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개혁가들은 신앙의 고백에서 그 예언의 해석을 구체화했으며, 캘빈은 연구소에서 그렇게 했다. 개혁가들은 모두 그 문제에 찬동했으며, 온화하고 주의 깊은 멜랑히톤(Melanchthon)도 루터처럼 이 예언의 반교황적 의미를 확신하고 있었다. 또한 이 예언의 해석에 따라 그 개혁 행동이 결정되었다. 그래서 비상한 힘과 불굴의 용기로 로마카톨릭에 대항할 수 있었다. 그런 힘을 바탕으로 이단 교회에 극단적으로 저항했다. 순교자가 되기도 하고 위기 상황에서 버티어 나가기도 했다. 또한 개혁가들의 견해는 여러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었다. 군주들이나 여러 사람들이 개혁가들을 채용했다. 그런 영향 하에서 여러 국가들이 로마카톨릭의 거짓 제사장에 대한 충성을 포기했다. 이어 따라 지옥의 열강들은 종교개혁 신봉자들에 대한 억압을 늦추는 듯했다. 그러나 전쟁에 이어 전쟁이 계속되고, 고문, 불태움, 대량 학살이 크게 증가했다. 그래도 종교개혁 운동은 패배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과 전지전능한 성령의 에너지로 지탱해 나갔다. 그것은 18세기 전의 교회의 기초와 마찬가지로 진실한 그리스도의 사역이었다. 천국에서 받은 미래의 계시록(성경 마지막 부분의 그 예언서)은 그 일을 수행하는 데 동원된 가장 강력한 수단이었다. (H. Grattan Guinness, 로마카톨릭과 종교개혁, pp. 136-137).


1545년 카톨릭교회는 역사상 가장 유명했던 공의회를 개최했다. 이 회의는 트렌트(Trent)라는 로마 북부 도시에서 열렸다. 트렌트 공의회는 실제로 3기 동안 계속되어 1563년에 폐막했다. 주요 목적은 카톨릭이 마르틴 루터와 프로테스탄트에 대해 반격 계획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트렌트 공의회는 로마카톡릭의 반종교개혁 센터가 되었다. 이 때가지 로마카톨릭의 주요 공격 방식은 대체로 정면 대항 방식이었다. 곧 성경이나 이교도들을 공개적으로 불에 태웠다. 그렇지만 이 전투 결과, 프로테스탄트의 마음 속에서는 로마 교황청이 '성도들과 전쟁'(요한계시록 13:7)을 하고 있는 짐승이라는 확신만 들었다. 따라서 너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어떤 새로운 전술이 필요했다. 그래서 제수이트가 탄생하게 된다.


1534년 8월 15일 이그나티우스 로욜라는 제수이트교, 또는 제수이트라는 비밀 카톨릭 조직을 세웠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조직은 '스타워즈' 영화에 나오는 Darth Vader의 악한 제국에 비유해 볼 수 있다. 제수이트는 분명히 음모와 난동이라는 어두운 역사를 만들어냈다. 그래서 포르투갈(1759), 프랑스(1764), 스페인(1767), 네팔(1767), 러시아(1820)에서 추방되어야 했다. "제수이트 제사장은 로마카톨릭 교회 가운데 가장 사악한 정치 지부라고 이름이 났다. Edmond Paris는 '제수이트의 사악한 역사'라는 논문에서 이런 정보를 상당히 많이 문서로 정리해 폭로해 놓았다"(70주: 역사적 대안, Robert Caringola 저). 트렌트 공의회에서 카톨릭교는 제수이트에게 프로테스탄티즘을 파괴하고 사람들을 어머니교회(로마 카톨릭)로 다시 불러들이라는 특별 임무를 주었다. 그 임무는 종교재판과 고문뿐만 아니라 신학 논쟁을 통해서도 진행되었다.


이제 그 엑스레이 안경을 발견할 때가 왔다. 트렌트 공의회에서 제수이트는 프로테스탄트가 로마카톨릭에 대해 성경의 적그리스도 예언을 적용하고 있는 데 대항하여 새로운 성경 해석 방법을 개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유명한 제수이트의 사제이자 스페인의 신학 박사인 프란시스코 리베라(1537-1591)의 기본적인 말은 "내가 여기 있으니 나를 보내 주십시오"라고 것이었다. 마르틴 투터와 마찬가지로 프란시스코 리베라도 촛불에 비추어 가며 적그리스도, 어린 뿔, 죄악의 인간, 짐승에 관한 구절을 읽었다. 그러나 교황을 모시고 있었으므로 프로테스탄트의 해석과는 상반되게 "어째서 이 예언이 카톨릭에는 전혀 적용되지 않는가!"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면 누구에 대해 적용되는가? 리베라는 "종말기에 일어설 불길한 사람에게만!"이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로마카톨릭은 "멋지다!"라고 응답하며, 이 관점을 적그리스도에 대한 로마카톨릭의 공식 입장으로 재빨리 채택했다.

1590년 리베라는 교황의 권한을 적그리스도라고 간주하고 있는 프로테스탄트의 견해에 대항하여 계시록에 관한 논평을 발표했다. 리베라는 초반의 몇 장을 제외한 계시록 전체를 교회 역사에 대해서라기보다는 종말기에 대해 적용했다. 적그리스도는 유대인에게 영접받아 예루살렘을 건설할 단일 악인이다(George Eldon Ladd, 축복받은 희망: 재림과 휴거에 관한 성경 연구). 리베라는 프로테스탄트의 성경에 바탕을 둔 주장, 곧 적그리스도(살후 2)가 하나님 교회 안의 인치심이라는 주장(어거스틴, 제롬, 루터 등의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을 부인했다. 리베라는 하나님 교회 밖의 이단 적그리스도라는 개념을 제시했다(Ralph Thompson, 진리를 추구하는 기독교의 챔피온). "리베라의 해석은 예언적 진리를 왜곡시키며 헐뜯고 있다"(Robert Caringola, 70주: 역사적 대안).

리베라의 뒤를 이은 유명한 제수이트 학자는 벨라민 추기경(Cardinal Robert Bellarmine,

1542-1621)이었다. 1581-1593년 사이에 벨라민 추기경은 "이 시대의 이교도에 대한 기독교적 믿음의 논쟁점에 관한 강론"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대체로 리베라의 견해에 동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리베라의 미래주의 가르침은 이탈리아 추기경과 저명한 제수이트 논객들 덕택에 더욱 유명해졌다. 리베라는 저서에서 바울, 다니엘, 요한이 교황권에 대해 할 말이 없다고 했다. 미래주의 학파는 카톨릭에 광범위하게 수용되었다. 그리고 적그리스도가 종말기가 되어야 통치할 단일 개인이라고 가르쳤다."(성경의 위대한 예언, Ralph Woodrow 저). 이 유명한 제수이트 학자 두 명의 견해를 통해 보면 아주 새로운 아기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프로테스탄트 역사가라면 이 아이에게 제수이트 미래주의라는 이름을 주었을 것이다. 사실 프란시스코 리베라는 미래주의의 아버지란 칭호를 얻었다.


더 깊이 논의하기 앞서 일부 용어를 정의해 보자. 역사주의란 요한계시록 17장에 나오는 어린 뿔, 죄악의 인간, 적그리스도, 짐승, 바빌론의 음녀에 관한 성경의 예언이 모두 기독교의 발전하는 역사와 기독교 내의 예수 그리스도와 사탄에 계속되는 투쟁에 적용되어 종말기에 절정을 이룬다는 믿음이다. 역사주의에서는 사역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만을 통해 은혜로 자유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신약 메시지를 실제로 부정하고 있는 체제와 같이 이 예언이 교황의 로마카톨릭에 직접 적용된다고 본다. 역사주의는 프로테스탄트 개혁가가 일차적으로 중점을 두었던 예언적인 관점이었다. 역사주의에 직접 대행해서 프로테스탄트에 대해 예리하게 반격을 가한 종파는 미래주의라는 관점을 지닌 제수이트의 악한 제국이었다. 미래주의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적그리스도 예언은 로마카톨릭과 아무 관련이 없다. 오히려 종말기에 나타날 불길한 사람 하나에게만 적용된다."

따라서 제수이트 미래주의는 그 악명 높은 공백기 이론을 들어 1500년 예언의 역사를 감춘다. 공백기 이론에서는 로마가 멸망할 때 예언이 종말을 거두고 휴거의 시대에 다시 계속된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뿔 10개, 어린 뿔, 짐승, 적그리스도는 오늘날의 기독교와 관련이 없다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암흑기에 이루어질 예언이 얼마나 되겠는가? 없다. 전혀 없다.


트렌트 공의회 이후 거의 300년 동안 이 카톨릭의 아기(제수이트 미래주의)는 대체로 카톨릭의 구유 안에 남아 있었지만, 제수이트는 이 아이가 자라나 결국 프로테스탄트의 양자가 될 것이라는 계획을 세웠다. 이 채택 과정은 실제로 1800년대 초반 영국에서 시작되어 미국으로 전파되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들어보면 매력적이기도 하고 비극적이기도 하다. 일부 하이라이트를 간략히 살펴보면서 내가 언급할 사람들은 대부분 순수한 기독교인이란 점을 분명히 밝혀 두겠다. 그라나 기독교인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오류의 경로가 될 수 있을까? 바꾸어 말하면 진실한 기독교인을 제수이트 그리스도와 악마가 동시에 활용할 수 있을까? 처음에는 "그렇지 않다!"고 하겠지만, 이 점을 고려해 보라.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지니고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축복을 주셨다고 하셨다(마16:15-17). 이어서 얼마 지나 베드로는 유혹에 빠졌으며 사탄이 베드로를 통해 말했다(16:21-23). 이 이야기는 기독교인이 짧은 시간 간격을 두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도 하고 사탄의 유혹에 빠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필자는 이를 '베드로 원리'라고 한다.


"리베라의 미래주의는 3세기 동안이나 프로테스탄트에 대해 적극적인 위협이 되지 못했다. 실제로는 로마카톨릭에 제한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초에 격렬하게 일어나 영국 국교회의 프로테스탄트에 매달렸다."(Ralph Thompson, 진리를 찾는 기독교 챔피언). 법률가이자 성서 연구가인 사무엘 미틀란드(Samuel Roffey Maitland)는 캔터베리 대주교의 사서가 되었다. 그러다가 아마 어느 날 도서관에서 리베라의 논평을 발견했음에 틀림없다. 어떻든 1826년에는 종교개혁에 대해 공격하며 미래에 출현할 한 사람의 적그리스도란 리베라의 사상을 옹호하는 도서를 출판하였다. 이 도서는 널리 보급되었다. 다음 10년 동안에는 종교개혁 사상을 한 구절 한 구절 추적하며 반종교개혁의 수사학을 펼쳤다. 그런 정열과 영국 종교개혁에 대한 강한 공격의 결과로 킹 제임스 성경(King James Bible)을 탄생시킨 바로 그 영국이라는 나라의 프로테스탄티즘은 심한 타격을 받았다.


미틀란드 박사에 이어 출현한 이는 Dublin 대학교의 히브리어 교수였던 James H. Todd 박사였다. Todd 박사는 미틀란드의 미래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자기 옹호적인 팸플릿과 서적을 출판했다. 이어서 영국 교회의 신도이자 유명한 옥스퍼드 운동(1833-1845)의 지도자였던 뉴만(John Henry Newman,1801-1890)이 출현했다. 1850년 뉴만은 '영국 국교의 고난에 관한 서한'이란 글을 써서, 옥스퍼드 운동의 목적은 '여러 영국 종파'를 로마 교회로 다시 흡수시키는 일이라고 밝혔다. 한 사람의 적그리스도에 관한 토드의 미래주의를 승인하는 소책자를 출판한 뒤, 뉴만은 곧 완전한 로마카톨릭 교도가 되었으며, 나중에는 명예 추기경으로 서품을 받기도 했다. 미틀랜드, 토드, 뉴만 등의 영향으로 '로마로 향한 운동이 이미 일어나 홍수와 같이 옛 프로테스탄트의 영역을 휩쓸고 있다'란 말이 나오게 되었다(H. Grattan Guinness, 해석자로서 예언이나 시대의 베일을 벗기는 역사).

다음으로 출현한 이는 상당히 존경받는 스코틀랜드 장로교 목사 에드워드 어빙(Edward Irving,1792-1834)으로서 오순절 교회파와 카리스마 운동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어빙(Irving)은 신도가 1천 명이 넘는 런던 Chalcedonian 예배당에서 목사 임무를 수행했다. 어빙(Irving)은 예언에 의지하면서 결국 토드, 미틀란드, 벨라민, 리베라가 주장한 한 사람의 적그리스도란 사상을 받아들였지만,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1830년경에는 그리스도의 '2국면에 걸친 돌아옴'이라는 독특한 사상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첫 국면은 적그리스도의 부흥에 앞선 비밀 휴거였다. 여기서 어빙은 이 사상이 큰 논란이 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저널리스트 데이브 맥퍼슨(Dave MacPherson)은 어빙이 마가렛 맥도날드(Margaret McDonald)라는 젊은 스코틀랜드 여성에게 주어진 예언적인 계시록의 결과라고 받아들였다(믿을 수 없는 숨김: 휴거 이론의 기원을 노출시킴). 어떻든 어빙이 가르친 것은 사실이다.


영국에서 이처럼 반프로테스탄트 분위기가 성장하고 있을 때 존 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1800-1882)라는 사람이 나타났다. 다비는 유명한 법률가이자 목사이며 신학자로서 성경 주제에 관해 53권이 넘는 저서를 저술했다. 또한 존경받는 기독교인이자 깊은 경건심의 소유자로서 그 시대의 자유주의에 대해 성경의 무오류성을 옹호했다. 그 뒤 폴리머스 형제단(Plymouth Brethren)이라는 영국 폴리머스 어느 그룹의 목사가 되었다. 다비가 복음주의 신학 발전에 기여한 바는 너무 커서 현대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의 아버지가 되었다.

세대주의란 하나님이 주요 세대나 주요 기간 동안 인류를 다룬다는 이론이다. 다비에 따르면 우리는 현재 '교회의 시대', 휴거기가 시작되기 이전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한다. 휴거기 이후에는 다니엘 9:27의 7년 기간이 시작될 것이며, 그 기간에 적그리스도가 유대인에 대항하여 일어설 것이다. 사실 존 넬슨 다비는 휴거기 이후 미래의 환란기에 적용할 수 있도록 현재 인기를 누리고 있는 대로 다니엘의 70주를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제거할 기반을 많이 닦아 놓았다. 그러므로 자신의 목회에 긍정적인 점이 많은데도 미틀란드, 토드, 벨라민, 리베라를 따라 미래주의 가르침을 자신의 신학 속으로 통합시켰다. 이에 따라 세대주의의 아버지인 존 넬슨 다비와 미래주의의 아버지인 제수이트 프란시스코 리베라가 연계될 수 있었다. 다비는 1859-1874년 사이에 미국을 여섯 차례나 방문하여 주요 도시에서 설교했다. 그 기간 동안에 미국 풍토에 미래주의의 씨앗을 확고히 뿌릴 수 있었다. 이렇게 제수이트의 어린이가 성장하게 되었다.


이 드라마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다비의 저작물의 영향을 크게 받은 Kansas 주 변호사 스코필드(Cyris Ingerson Scofield, 1843-

1921)였다. 1909년 스코필드는 유명한 스코필드 참고 성경(Scofield Reference Bible)을 출판했다. 1900년대 초 이 성경은 미국 프로테스탄트 성경 학교에서 아주 인기가 높아져 수백 만 부를 인쇄해야 했다. 그러나 스코필드는 인기를 누리고 있던 이 성경의 주석에 다비, 미틀란드, 벨라민, 리베라의 저술에서도 발견된 미래주의를 비중있게 실었다. 이 스코필드 성경을 통해 제수이트라는 어린이는 젊은 성인이 되었다. 따라서 아직 오지 않은 적그리스도라는 교리는 20세기 미국 프로테스탄티즘 내에서 확고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무디(Moody) 성경 연구소와 달라스(Dallas) 신학교는 존 다비의 가르침을 강하게 지지했으며, 이에 따라 미래주의의 성장이 계속되었다. 이어서 1970년대에는 Dallas 신학교의 졸업생 할 린세이(Hal Lindsey) 목사가 '작고한 대행성 지구(The Late Great Planet Earth)'라는 베스트셀러를 출판했다. 이 읽기 편한 177쪽짜리 책이 보급됨에 따라 미래주의가 미국 기독교도들에게 보급되었다. 뉴욕타임스지는 '이 10년 동안 가장 우수한 베스트셀러'라고 논평했다. 3천만 부가 판매되었으며, 30여개 외국어로 번역되었다. 이 저서를 통해 제수이트 미래주의라는 어린이는 어른이 되었다.

이어서 출판된 책은 '뒤에 남기다(Left Behind)'이다. 1990년대에 팀 라하이(Tim Lahaye)와 제리 젠킨스(Jerry Jenkins)는 할 린세이, 스코필드, 다비, 어빙, 뉴만, 토드, 미틀란드, 벨라민, 리베라가 주장한 미래 출현할 한 사람의 적그리스도란 사상을 받아들여 '지금까지 가장 성공적인 크리스찬 픽션 시리즈'라고 해석했다. 할 린세이의 저서 '작고한 대행성 지구'는 대체로 신학적인 내용이어서 매력이 별로 없었지만, '뒤에 남기다'는 풍부한 상상력이 담긴 소설 시리즈로서 '서스펜스, 액션, 어드벤처가 넘치는' '크리스찬에게 스릴을 제공하는 책'이었으므로 '저자들이 베스트셀러로 성공을 거둘 수 있을지는 예측하지 못했던 책'이었다. 존경받던 TV 목사 잭 반 임프(Jack Van Impe), 레이놀드, 피터, 폴 라롱드, 존 학가이(John Hagee) 목사는 공동으로 '뒤에 남기다'라는 영화를 제작했다. 이 영화는 뉴욕타임스와 월스트리트저널지의 주목을 받았으며, 라하이와 젠킨스는 Larry King Live의 인터뷰를 받기도 했다. '뒤에 남기다'라는 도서는 WalMart, Fry's Electronics를 비롯해 여러 서점에 전시되었다.


또한 필자는 '뒤에 남기다'의 제작자들과 이 TV 목회의 목사들이 진정한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의 왕국에 대해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려 최선을 다했다고 믿는다. 하나님 아버지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확고히 표명한 베드로를 통해 이야기한 것과 마찬가지로(마태복음 16:15-17) 하나님은 그 기독교인들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 베드로 원리를 기억하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때 활용할 수 있는 '뒤에 남기다'에는 장점이 많다. 그러나 성경, 예언, 프로테스탄트 개혁에 비추어 보면 분명히 잘못된 점이 있다. '뒤에 남기다'는 이제 적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진실을 숨기는 프란시스코 리베라(Fransisco Ribera)의 바로 그 제수이트 미래주의의 가르침이 되었다. '뒤에 남기다'를 통해 미래주의의 수문이 열리고, 현재 미국을 휩쓸고 있는 거짓 예언의 거대한 조류가 방출되었다. 애석하게도 거짓 사상의 시대가 왔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뒤에 남기다' 전체 시리즈의 신학적 기반은 다니엘 9:27의 '7년'이 미래 환란의 시대에 적용된 것이었다. 그 시대에 대비가 되었는가? 어떤 학자가 처음으로 다니엘의 70번째 주를 그 나머지 69주에서 떼어 종말기로 떨어뜨릴 수 있는지 상상해 보라. 그것은 악한 제국의 바로 그 프란시스코 리베라였다.

"프란시스코 리베라의 첫 번째 도구는 70주였다. 리베라는 다니엘의 70번째 주가 아직 미래에 있다고 가르쳤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 메시아적 시간 측정 장치에 거대한 고무 밴드를 설치해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 전제가 낯익게 들리는가? 이는 할 린세이와 기타 여러 현재의 예언 교사들이 사용하고 있는 바로 그 시나리오이다." (Robert Caringola, 70주: 역사적 대안).  




예수회(Jesuits)의 잔학행위와 세계지배  



                                                                                                    A.I.C



종교 개혁을 박멸시키기 위해 원래 바티칸이 제정(포르투갈/스페인, 1534)



1773년 7월 21일 교황 클레먼트 4세 교단 억압(이 때문에 즉시 독살)



1814년 그 칙령을 수행할 목적으로 'Verona 비밀 조약'으로 개명



1822년 10월 이 칙령에 대해 계약 당사자 최종 비준. 이에 따라 제임스 몬로 대통령은 토마스 제퍼슨의 도움을 받아 그 존재를 확인하고 몬로 독트린 제정. (상원 의회 기록: 1916년 4월 25일 1차 회기 64차 의회 기록 Vol. 53, Part 7, Page 6781)



전 예수회(제수이트) 사제 알베르토 리베라 박사님(Dr. Alberto Romero Rivera)에게 이 글을 바친다(이 글은 그의 생애에서 영감을 받음).


*(알베르토 씨리즈 참조 - 생명의 서신 출판, 인터넷 참조)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마태복음 7:15)



필자는 몇 해 전에 어떤 책을 읽고 탐구를 시작해서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내가 얻은 정보를 심판에 부친다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너무나 확실해서 바티칸의 범죄자 자신들도 부정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전에는 과거 잔학 행위에 대한 말이 나오면 그 사람들은 "우리는 이제 그렇게 하지 않는다"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고 비웃거나 글쓴이에 대해 편협하고 관용스럽지 못하다고 몹시 비난하면서 그 추종자들에게 "우리는 그런 입장을 절대로 바꾸지 못하겠다"고 말했었다.



독자들이 필자를 '극단주의자'라고 생각하기 앞서 먼저 이 정보를 얻은 사람일 뿐이란 점을 말해 두겠다. 조금만 시간을 들여 조사해 보면 이 정보는 누구나 얻을 수 있다(인터넷에서 바로 손 끝에 수 있기 때문). 정부 부서가 수행하거나 범하고 있는 사건들은 대부분(전부는 아님) 미국 국민들의 권리와 자유에 전적으로 부정적이다. 정부는 전세계에서 수백만 인명을 대량 학살한 데 대해 책임이 있다. 이 미국이란 나라의 건국으로 이어지게 된 '암흑 시대(종교 재판)' 시기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








교황청과 영토확장





15세기는 새로운 영토 발견이란 열풍이 휩쓴 시기였다. 이를 처음 주도한 인물은 헨리(Henry) 왕자였다. 헨리는 1394년 포르투갈 국왕 요한 1세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1415년 아프리카의 쿼타(Ceuta) 도시를 포위 공격함으로써 용맹을 떨쳤으며, 그 이후 명성을 얻게 되었다. 따라서 그 시기 이후로는 미지의 나라를 찾아 해군 원정을 떠나는 일에 전념하게 된다. 헨리가 이끄는 군함들은 아프리카 연해와 인근 섬들을 정복하여 포르투갈 영토에 귀속시켰다. Bojadoy봉을 정복한 다음에는 자신이 발견한 땅과 발견 예정인 땅을 모두 부왕과 그 계승자들에게 바치고 교황 마틴(Martin) 5세에게 그 헌사를 비준해 달라고 했다. 또한 포르투갈은 원정할 때마다 로마 카톨릭과 교황 권위의 확장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교황 마틴(Martin) 5세는 헨리 왕자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따라서 1430년경의 교황 비준 교서에서는 'Bojadoy봉에서 인도 전역에 이르는 땅 가운데 앞으로 발견되는 영토는 모두 포르투갈 영토에 속한다'라고 기술해 놓았다. 1433년 요한 1세가 서거하자 헨리 왕자의 형 에드워드가 포르투갈 왕위를 계승했다. 교황 에우게네(Eugene) 4세는 1438년 에드워드에게 내린 교서에서 마틴 5세가 승인한 내용을 비준했다. 1454년 1월 8일 교황 니콜라스 5세는 전임 교황 마틴과 에우게네의 교서에 대해 언급하면서 헨리 왕자의 업적을 다음과 같이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25년 동안 매년 포르투갈 군대를 끊임없이 파병했다. 가장 신속히 이동하는 군함들을 이끌고 온갖 위험을 무릅쓰며 남반부와 남극 방향의 해양과 해상 영토를 찾기에 공을 들였다. 그 군함들은 마침내 기니아 지방에 이르러 일부 도서와 부속 영공 및 해양을 차지했다. 그 이후 그 지역 주민들과 몇 년 동안 전쟁을 수행하여 많은 도서를 정복하거나 평화적으로 소유함으로써 지금까지도 인근 해역으로 귀속되어 있다. 또한 기니아 인과 그 밖의 니그로족을 강제로 데려오기도 했으며, 일부는 교환 형식으로 데려오기도 했다."




이 교서에서는 헨리에 대해 '진정한 그리스도(교황권) 병사임과 동시에 가장 용기 있는 신앙 수호자이자 불굴의 챔피언으로서, 전세계에 공포되어 격찬과 존경을 받고 있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지니게 해 달라고 젊은 시절부터 온힘을 다해 열망했다'고 기술했다. 이 교서에서는 위에서 말한 영토의 획득과 소유에 대해 포르투갈의 독점권을 인정했는데, 이는 교황 Martin과 Eugene의 여러 서한 덕분이었다.




곧 그 서한들에서는 포르투갈 국왕과 헨리 왕자에 대해 '기독교(로마 카톨릭)의 적이나 이교도에 대해서는 언제라도 침략하고 색출하고 말살하고 정복할 수 있으며, 그 주민들을 영원한 노예 상태로 만들 수 있으며, 그 왕궁과 소유 재산을 모두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자유롭고 충분한 권리가 있다'고 인정해 주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교황 니콜라스(Nicholas)도 역시 서한을 통해 '이미 획득한 영토이거나 획득할 영토에 대해서 공포하는 바, 영토가 일단 획득되어 귀속되었다면 위에서 말한 국왕과 그 계승자에게 영원히 귀속되며 그 밖의 다른 사람에게는 귀속되지 않게 할 권한이 있다'고 했다. 또한 포르투갈이 발견한 영토에 기독교(로마 카톨릭) 국가가 정착하거나 포르투갈이 미지의 나라를 발견하고 정복하려는 데 방해를 한다면 가장 엄한 벌을 내린다고 했다. 이는 헨리 왕자의 계획과 실행이 '가장 경건하고 영원히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으며, 보편적 교회 공동체의 이해 관계가 관련된 하나님의 영광이 깃들어 있는 일'이었음을 말해 준다.





교황청 정복자와 노예들





이처럼 헨리 왕자의 계획과 작전은 당시 로마 카톨릭 왕국에서 최고로 인정받은 권위의 재가를 받고 있었다. 너무나 경건한 곳에서 받은 권리였기에 논란의 대상도 되지 않았다. 로마 교황은 왕자들을 마음대로 구속할 수 있었으며,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지상의 왕국을 마음대로 허용해 줄 수 있었다. 교황 니콜라스가 승인한 내용은 1458년 8월 그 후계자 셀릭투스(Calixtus) 3세가 뒤이어 확정하게 되었다.



에드워드가 사망하자 당시 미성년이었던 아들 알폰수스(Alphonsus)가 1438년 왕위를 계승했다가 1481년 사망했다. 헨리 왕자는 1460-63년에 사망했다. 헨리가 사망하자 영토 발견의 열기가 쇠퇴했지만 알폰수스의 아들 요한 2세가 즉위함과 함께 그 정신이 다시 살아났다. 헨리 2세는 즉위 다음 해(1482년) 영국의 에드워드 4세에게 대사를 파견하여 기니아 정복에 대해 교황의 교서에서 얻은 자격이 있음을 알리면서 당시 일부 영국 상인들이 기니아 무역(노예 무역)용으로 준비하고 있던 함대를 해체해 달라고 요구했다. 영국 국왕은 대사에게 존경을 표하면서 요청한 내용을 모두 받아들였다. 포르투갈 국왕과 영국 국왕은 아프리카 최대 해역 내의 포르투갈 지위(Portugalie et Algarbiorum citra at ultra mare in Africa)에 대해 인정했다. 교황 식스투스(Sixtus) 4세는 사망하기 얼마 전(1484년 8월 12일) 포르투갈 국왕과 그 계승 국왕들에 대해 전임 교황들이 인정한 내용을 모두 받아들였다.



1481년 요한 2세는 기술공 100명과 병사 500명을 기니아에 파견하고 필요한 물자를 모두 지원해 요새를 축조했다. 거대한 베닌(Benin) 및 콩고(Congo) 왕국은 1484-1485년에 발견되었고 희망봉은 1486년 발견되었다. 포르투갈은 아프리카에 요새를 축조하고 식민지로 만들었다. 또한 유력한 왕국들과 통상을 시작했으며 어린 왕자들을 무력으로 강압하여 자신들이 속국에 처해 있음을 인정하도록 했다.



아프리카 내 포르투갈의 권력과 통상권은 모두 이 시기에 확립된 것이다. 이 시기 5대에 걸친 로마 교황들의 칙령에서는 언제나 그 신앙이 가장 두터운 국왕에게 어느 곳에서라도 이교도(참된 그리스도인들)가 발견되면 그 왕국과 재산을 마음대로 다스릴 수 있으며 '그 백성들을 영원한 노예 상태에 두거나 지상에서 추방시킬'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주님의 어린 양들을 보편적 성직자(교황권) 한 명이 다스리는 주님(교황)의 요새에 두기 위함이었다. 그 이후의 포르투갈 국왕들은 주님께 불경스러운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 크나큰 은전을 몰수당하는 일이 없었다. 따라서 포르투갈은 유럽 열강들이 간섭하지 않는 상태에서 오랫동안 아프리카 및 동인도 제국과 통상을 계속할 수 있었다. 또한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수출하지 전에도 50년 이상 동안 본국에 노예들을 유지시킬 수 있었다.



포르투갈은 1508년 처음으로 히스파니올라(Hispaniola) 섬으로 노예를 수입했으며, 1517년에는 브라질 식민지로 수입했다. 1580년에는 처음으로 설탕 재배를 시작했다. 그 당시 스페인과 연합해야 했던 일은 가장 불행했다고 볼 수 있다. 네덜란드가 적국이 되어 동인도 및 브라질 식민지와 아프리카 식민지 일부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1640년에는 브라질 및 아프리가 영토를 되찾았지만, 동인도 제국의 식민지는 되찾지 못했다.



네덜란드가 브라질을 포기하고 황금 광산이 발견되자 포르투갈은 무역이 성행했으며, 노예의 대량 수입이 이루어져 해마다 2만 5천명씩 로안그로(Loangro)에서 브라질로 노예를 수입했으며 고앙고(Goango)와 케이프 로포스(Cape Lopos)에서 수천명씩 수입하기도 했다. 포르투갈 당국의 기록에 따르면 해마다 5만명 이상씩 모잠비크 연안의 멜린다(Melinda)에서 브라질로 수입했다고 한다. 브라질과 아프리카 식민지는 1세기 동안 이처럼 확장되었으므로 1700년 이전에는 해마다 영국과 교역함으로써 얻은 재화가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재화를 합친 것보다 더 많았다.


스페인령 아메리카는 제노바, 포르투갈, 프랑스, 영국에서 노예를 수입했다. 스페인이 구입한 영토는 처음으로 연방에서 탈퇴하게 되었다(1861년). 아프리카 노예 무역이 종료되기 전후에 걸쳐 스페인 및 포르투갈 주의 수장에 대해 다른 주의 수장들은 공식적으로 '카톨릭 폐하(His/Her Catholic Majesty)'란 칭호를 사용했다(미국 국무성 기록). 그 수장들만이 교황의 사자임을 인정한 것이다.



카톨릭 사제가 아프리카 노예 무역에 개입한 사실은 19세기의 유명한 시인 J. G. Whittier의 다음 시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뉴올리언스(New Orleans)의 흑인 거주지에 관한 시



크리스천 노예(The Christian Slave)



J. G. Whittier 지음                          







크리스천 한 명이 가고 있다. 가버렸다!


누가 하나님의 이미지를 갈구하는가? 하나님의 은혜를


이 시장 바닥의 불쌍한 희생자여


고통 속에서 참고 있는가?



아! 그런 일이?


그대는 어떤 일이 있어도 말하지 않았다


그대와 같이 가장 약하고 천한 자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 불쌍한 희생자 속에


그대가 동정하는 사랑의 아기가 있음이 서 있는 그대에게서 보이네


또 다시 조롱하는 무리의 희롱 소리


묶여서 팔리고 다시 학대당하네!



팔릴 운명의 크리스천!


채찍에는 혹사당한 노예의 피가 묻어 있고


그대의 잘못과 체면 때문에 노예의 일생은 지겹게 되네


그러나 인내심은 그치지 않으리!



악덕한 튀니스의


두건을 두른 고관에게 갈채를!


어두운 노예 감방이 열리고


수감자들이 밖으로 나오네



그러나 이 불쌍한 노예는 부질없이


날카로운 눈빛을 크리스천 성당으로 돌리네


예배를 드릴수록 몸값은 높아지고


사슬에 박힌 못도 커져가네



오호라!


사제를 닮은 강도들은 타인 제단에 얼마나 서 있을까


기도를 하며 그대에게 피묻은 손을 올리고


거만하게 사악한 눈살을 찌푸린다!



오! 사탕수수 밭에서


아래쪽 논에서, 거래상들의 방에서


불결하고 역겨운 검은 노예선의 감방에서


거칠고 끔찍하며 튼튼한


노예들의 지쳐 있는 쇠사슬에서


하늘에 오르려고 절규하는 외침이


빈 하늘의 공간을 채운다


얼마 동안이나, 오 주여! 얼마 동안이나!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흑인에 대한 바티칸의 입장이 바뀌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1)미국 역사상 최대의 인종 폭동(1864년, 뉴욕시 부룩클린)은 휴게스(Hughes) 카톨릭 대주교가 선동했으며(북부군을 더 징집하려는 링컨 대통령에 대항해서) 방화뿐만 아니라 거주자 및 흑인 고아에 대한 유린 살해가 자행되었다.


(2)제이차 세계대전에서 미군이 로마를 점령하자 히틀러의 교황 피우스(Pius) 12세는 로마에 수감된 흑인 병사는 없게 될 것이라고 미군 사령관에게 분명히 약속했다.




(3)세인트루이스, 뉴욕시, 시카고 등의 경찰 가운데 95% 이상이 미국 카톨릭 비밀결사 컬러버스 기사단(the Knights of Columbus) 신도이다. 따라서 시카고 경찰이 저지른 맬콤 X 살인 사건을 검토할 때에는 이 점을 고려해 보아야 한다. 아파트에서 발사된 총기는 경찰의 완전 자동 소총이었다. 총탄 41발이 발사되어 17발이 아마도우 디알로(Amadou Diallo)의 몸에 맞았다. 당시 디알로는 총기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경찰은 사복 차림이었고 차량에는 경찰 마크가 없었으며 신원도 밝히지 않았다. 재판 뒤 경찰, 변호사, 배심원들은 파티를 열었다. 뉴욕 시에서 총기를 지니지 않은 채 살해되는(경찰에게) 흑인은 모두 이민 노동자이다. 특별 무장 그룹(저격수)은 흑인 지도자들에 관해 정보를 제공해 주는 대가로 앨라배마의 카톨릭 조직 KKK에게 무장 훈련을 시켰다(또한 불법으로 무기도 판매).



그 결과 마르틴 루터 킹 목사가 살해당했다. 그 조직은 또한 뉴올리언스 대부 Carlos Marcello(J. Edgar Hoover의 동료)의 재정 지원을 받고 있다. 포르투갈 인 라울 마오리(Raul Maori-마르틴 루터 킹의 실제 살해자)가 바로 마약과 무기를 밀수해 카를로스 마르셀로(Carlos Marcello)에게 제공해 주고 있다. 흑인들은 점차 복지 혜택에서 제외되는 반면에 카톨릭 이민자(적법 및 불법 모두 포함)는 끊임없이 복지 혜택을 받고 있다. 흑인들은 거리의 갱들보다 카톨릭 경찰을 더 무서워하고 있다. 어느 미국 도시든지 카톨릭의 영향력이 단연 우세하며, 마피아/카톨릭의 권력과 영향력의 비율 및 범죄율은 어느 도시에서나 마찬가지이다.





카톨릭 컬럼버스 학살



미국 서부의 인디언 부족은 갈색 옷을 입은 백정, 곧 1519-1540년대 스페인의 탐험가 코로나도(Coronado)와 스페인 정복자들에게 전멸당했다. 멕시코의 아즈텍 및 잉카 제국, 중앙 아메리카 및 남아메리카, 쿠바, 하이티, 그레나다, 괌, 필리핀 등도 마찬가지이다.



알마그로(Almagro), 코르테스(Cortez), 피자로(Pizarro), 발베르데(Valverde), 드 메자(de Meza), 그레고리(Gregory), 세풀베다(Sepulveda), 발레가(Valega)와 같은 사람들, 특히 크리스토퍼 콜롬버스(그레나다 원주민에 대해 잔학 행위를 저지른 죄로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에게 투옥당함)는 원주민들의 재산을 모두 몰수하고 주민들을 노예로 삼았다(이 내용은 학교 역사 교과서에도 찾아볼 수 있다). 중세 말기의 지리상의 발견에서 바티칸은 아메리카 원주민을 모두 '타고난 토착 노예'로 보았다. 1960년까지만 해도 어느 공공 도서관에서든지 바티칸의 폭군 제수이트가 유럽 중세 암흑기 내내 종교재판을 통해 잔학행위를 저질렀다는 기록을 읽어볼 수 있었다. 1960년 이후에는 그런 출판물이 모두 제거되었다(이와 같은 웹페이지가 알려지자 국회도서관의 도서 수백 권이 갑자기 사라졌다. 예를 들면 「음모자들의 고백(링컨 암살에 대해)」과 같은 책). 이는 조직적으로 교육 자료를 모두 차지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1933년 베를린의 '분서' 사건을 기억해 보라).


이는 또한 멀리 떨어져 있는 마츄 피츄(Machu Picchu, 페루 중앙부 안덱스 산맥 해발 2,100m에 있는 고대 잉카의 성곽 도시 유적)에서도 증명된다. 모두 '성모', 로마 카톨릭의 이름으로 되어 있다. 우리는 독립전쟁을 영적 자유의 전쟁이라고 한다. 영국 군인은 어느 도시에서나 개신교회 건물 등이 계획적으로 파괴된 것을 보고 난 뒤에 행진해 나아갔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 성당건물들만은 예외였다. 곧 '빛과 영광(Peter Marshall과 David Manuel 씀)'이란 기록이 이를 말해 준다. 이 글을 쓴 사람들은 카톨릭 제수이트 조직이 이 잔학 행위의 자행자라고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그 밖의 기록을 보면 이 사실이 명백히 드러난다("북아메리카 사령관이었던 영국계 캐나다인 헨리 클린턴(Henry Clinton) 경의 군대는 올리버 델라니(Oliver Delaney) 및 코트랜드 스키너(Cortlandt Skinner)의 여단, 뉴욕시의 자원자, 여왕 근위대(Queens Rangers), 오렌지 근위대(Orange Rangers), 로얄 아메리칸(Loyal Americans), 펜실베니아 충성자들(Pennsylvania Loyalists), 메리랜드 충성자들(Maryland Loyalists), 로마카톨릭 자원자, 서부 저지단(West Jersey)의 자원자, 추격병들(Chasseurs), 충성스런 미국 개혁자들(Royal Americans Reformees), 아일랜드(카톨릭)의 자원자, 영국 군단, 안내자 및 선구자들(Guides and Pioneers)로 구성되었다"(칼 반 도렌(Carl Van Doren)의 「미국 혁명의 비밀 역사」).



사실 그 글쓴이들은 로마 카톨릭 제수이트 조직을 면책시켜 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미국 표준판' 성경 번역팀의 일원이었던 사람의 정보를 수용하게 되었다. 그 팀 가운데 33%는 공산주의 전선 성원이었는데, 어떻게 그 팀의 성원과 교제를 하게 되었는지 필자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다(1964년, 존 스토머(John H. Stormer)의 「아무도 그것을 배신이라 할 수 없다」). 바티칸이 주도한 잔학 행위에 대해서는 「폭스(Foxe)의 순교자의 책」에 잘 요약되어 있다. 이 책에서는 또한 사제들이나 교황의 통달 회칙에 따라 종교재판 희생자들에게 강요된 복종 요구가 1995년 5월 25일 공표된 제2차 바티칸 회의(교황을 그리스도의 대리자(그리스도의 화신)로 인정)와 직접 관련이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 회의에서는 변화되지 않는 성찬용 빵을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의 육신과 피로 간주하는 미사예식에 참가함으로써 그리스도 육신의 중요한 부분이 되는 행사가 개최되었다. 이것이 로마카톨릭 도그마의 일부가 되고 있다는 점은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로마카톨릭이 하나님의 권위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지닌 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어느 종파의 어느 사람에게나 그것을 적용하려 하고 바티칸과 세계 교회주의 운동(W.C.C)이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만 목적을 두고 있다면 바티칸이 종교재판 시작 이후로 그 도그마, 입장, 목적, 수단 등을 변경시키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속임수의 연합



다음 글을 읽어보자.


"우리는 이제 완전한 신앙 통일이 달성된 그 축복 받은 날까지 얼마나 더 여행해야 할지 물어보아야 하며, 우리 모두 평화롭게 거룩한 주님의 미사성체식을 축복할 수 있다. 상호 이해가 깊어지고 이미 우리 사이에 교리상의 통일점이 마련되어 성체식이 영향력 있게 효율적으로 성장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교회라면 단연 신성한 카톨릭뿐이라고 기독교인들이 양심적으로 고백할 수 있게 될 정도까지는 되지 않았다. 세계교회주의 운동(W.C.C)의 최종 목적은 세례받은 사람들을 가시적으로 모두 완전히 통일하는 일이다"(앞의 글 35쪽).




"이제 진정한 신앙 합의를 이루기 앞서 더 연구해 볼 필요가 있는 영역을 다음과 같이 확인해 볼 수 있다.


1)신앙 문제에서 최고의 권위를 지니고 있는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신성한 전통(Sacred Tradition 카톨릭 전통) 사이의 관계


2)성체식(하나님 아버지께 찬사를 드리는 그리스도의 육신과 피의 성례), 성례 기념물과 그리스도의 실존, 성경에서 흘러나오는 거룩하게 하는 말씀


3)전교구, 장로, 부제라는 3중 성직에 대한 성례 의식인 서품식


4)신앙을 가르치고 수호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사되는 권위이자 책임으로 인식되는 교황과 주교의 교회 관리


5)그리스도의 사제와 온 인류를 위해 중재 역할을 하고 있는 영적 성모, 곧 교회의 우상인 동정녀 마리아"(앞의 글 36쪽).


"따라서 대화의 결과를 도출하려면 결과를 분석함과 동시에 그 결과가 사도들에게서 물려받고 주교, 곧 자신들의 '합법적' 목회자 주변에 있는 신도 공동체보다 오래된 신앙 전통과 일관성이 있는지 엄밀하게 검증할 수 있는 정밀한 비평 과정이 필요하다"(앞의 글 37쪽).



이 칙령이 함축하고 있는 바는 너무 커서 이처럼 미국인의 자유와 권리를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 범위의 광범위함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 의도에 부합하는 일이라고 간주된다고는 보기 어렵다. 이에 대해 의문점이 있으면 '그 사람들은(They) 하나일지어다'란 칙령을 읽어보면 된다. 교황이 '우리(we)' 대신에 '그 사람들은(they)'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명백히 자신을 배제한 것이다. 교황은 결국 그리스도의 대리자(화신)이므로 자신을 단순한 인간으로 간주할 수 없는 것이다(권력이란 마취 작용이 있어서 논리를 완전히 왜곡시키도록 만들기도 한다). 이 칙령은 스컬 본(Skull & Bones), 700 클럽의 팻 로버트슨(Pat Robertson)의 전폭적인 승인을 받았다. 또한 '예수회 창시자 이그나티우스 로올라의 영적 권능 발휘' 둘째 주에서 첫 번째 및 두 번째 점을 읽어보라. 이그나티우스 로올라(실제 이름은 이니고 로페즈 드 레칼데- Inigio Lopez De Recalde)는 1534년 스페인에 교황군대 제수이트 조직을 설립했으며, 일루미나이티(Illuminati -빛을 쥐고 있는 자란 뜻)도 설립했다.





일루미나이티와  카톨릭




일루미나이티(Illuminati)는 훗날 1776년 5월 1일 아담 바이스하우프트(Adam Weishaupt 독일 제수이트 회원으로서 그 사진은 1달러짜리 지폐상에 새겨 있다)가 잉겔슈타트(Ingelstadt) 대학에 정식으로 설립했다. 바이스하우프트는 그 대학의 교회법 교수로서 '검은 교황(유럽 메이슨 지부의 일원이며 로드챠일드(Rothschild) 가문에서 선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의 명령을 직접 받았으며 그 가문의 재정 지원을 받고 있었다. (1777년 바이스하우프트는 그 가문에 침투해 통제할 수 있도록 뮈니치 자선 위원회(Good Council) 지부의 프리메이슨 지부를 도입했으며, 1782년 7월 윌헴스배드(Wilhemsbad)에서 열린 프리메이슨 국제 회의에서는 프리메이슨 지도자들이 일루미나이티의 교리를 주입받았다) (일루미나이티의 미국 지부는 '외교관계 위원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로서 미국 대법원 판사 루스 배데르 진스버글(Ruth Bader ginsburg, 카톨릭), 스펜판 브래이어(Stephen Breyer, 카톨릭), 산드라 데이 오코너(Sandra Day O'Conner)가 그 멤버이며, 빌 클린턴(Bill Clinton), 죠지 부시(George Bush), 뉴트 깅그리치(Newt Gingrich) 등도 그 멤버이다). 그 밖의 일루미나이티(Illuminati) 조직은 예일 대학교의 삼극위원회(Trilateral Commission) 및 스컬본(Skull & Bones).



로욜라는 십자군(중세 암흑기 종교재판 시기에 이스라엘과 유럽 대부분 지역을 침습한 바티칸 군대)이기도 했다. 일루미나이티 연합 전선으로서는 UN(Unitied Nations), 빌더버거 그룹(Bilderberg Group), 로마 클럽(Club of Rome), 로얄 국제관계연구소(Royal Institute For International Affairs,영국), 삼극위원회(Tri-Lateral Commission), 외교위원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가 있다.




카톨릭 제수이트의 신비적 영성훈련 행사가 제수이트의 일일 의식 행사였다. 그 사본은 인터넷에서 쉽사리 구할 수 있다. 그 가운데 몇 구절을 인용해 보겠다.



"첫 번째 점은 주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인간의 국왕(교황)이 내 앞에 있다는 것인데, 기독교인들은 누구나 그를 존경하며 순종하고 있다. 두 번째는 이 국왕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지 보라는 것이다. 곧 '비신도 국가를 모두 정복하는 것이 내 의지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나를 따르려고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나처럼 먹고 마시고 옷 입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낮에는 나처럼 일하고 밤에는 지켜보아야 한다. 그래서 나중에는 노동 일에서 그랬던 것처럼 승리해서 나와 결별할지도 모른다. 다섯 번째 점은 신성이 어떻게 숨는지, 곧 적을 어떻게 파괴하고 파괴하지 않을 수 있는지, 또한 가장 신성한 인간성을 어쩌면 그토록 잔인하게 고통받도록 내버려 둘 수 있는지 고려해 보라는 것이다."



교서 우남 생텀(Unam Sanctam, 교황 보니파체(Boniface) 8세가 1302년 11월 공포)에서는 정부 부서를 활용해 그 목적을 달성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이 로마 카톨릭과 그 권력에는 두 가지 검, 곧 영적 검과 세속의 검이 있음을 복음서를 통해 알고 있다. 사도들이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마가복음 22:38)'라고 말한 곳은 교회(로마 카톨릭) 안이다. 사도들이 이렇게 말하자 주님은 너무 많다고 하지 않고 족하다고 하셨다. 분명히 세속의 검이 베드로의 권한 내에 있음을 부인하는 사람은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마태복음 22:52)'고 한 주님의 말씀을 잘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검이 모두 교회(로마 카톨릭)의 권한 내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적 검은 교회(로마 카톨릭)를 위해서 활용되지만, 세속의 검은 교회(로마 카톨릭)가 활용한다. 영적 검은 사제들의 수중에 있다. 세속의 검은 국왕과 병사들의 수중에 있지만 사제들은 이를 마음대로 활용할 수도 있고 묵인해 줄 수도 있다."



이런 사실만 보더라도 바티칸과 일루미나이티가 군사적 방법으로 통치했음을 알 수 있다(그렇다면 이제 미국 와코(Waco) 기습 사건(그 이상의 정책을 마련하려는 파이롯트 프로그램)의 배경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이는 발칸 지역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1964년 11월 24일 교황 6세가 공포한 '교회에 관한 교리상의 구성' 3단락 20째 줄을 보면 "주교들은 사제와 부제들의 도움을 받아 공동체의 책임을 맡고 대중을 관할하는 양치기이다. 주교들은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들이고 신성한 예배를 주재하는 목회자이며 정부의 관직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 정책의 전형적은 사례는 아일랜드에서 나타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카톨릭 예수회(제수이트)를 무서워하고 가장 혐오하는 사람들은 같은 카톨릭 신부들이다(제3제국 상층부의 서열과는 달리 로마카톨릭 서열에는 내부 경쟁이 있었다).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제수이트는 '검은 교황'에게만 응답할 뿐이기 때문이다. S.S., S.D., S.A., 게슈타포가 제3제국에게 충성했던 것처럼 제수이트는 바티칸에 충성을 다한다.







예수회  제자 히틀러




제수이트의 폰 파펜(Von Papen, 히틀러의 스승이자 독일의 수상(1932년 6월-1933년 3월))은 자신의 저서 「히틀러와 나눈 대화」에서 "히틀러는 교황권의 최고 이상을 실천에 옮겼다"고 기술했다. 이 기술 내용은 죽음의 캠프(아우슈비츠 수용소)와 관련이 있다. 수상 폰 파펜이 첫 번째로 수행한 업무는 독일 제국의 의회를 해체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 업무는 히틀러의 '갈색 셔츠(SA)'에 대한 금지 명령을 철회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카톨릭의 젊은이 그룹을 '히틀러의 젊은이(Hitler Youth)'로 통합하여 히틀러와 제3제국이 권력의 무대에 서도록 했다. 「나의 투쟁(Mein Kampf)」이란 저서는 카톨릭 제수이트 스템플(Staempfle)이 히틀러를 위해 저술한 것이다. 대주교 에우게니오 파첼리(Eugenio Pacelli)는 독일 주재 로마 교황 대사(1917-1929)로서 독일의 일루미나이티 은행가들 및 산업가들(I.G. Farbin)과 함께 히틀러의 제3제국이 권력을 장악하도록 준비 작업을 했다. 또한 히틀러가 전쟁에 패배할 수도 있음을 대비해서 예방책으로 유태인 수천 명을 바티칸에서 사라지도록 했다(히틀러의 실패 시를 대비한 것으로, 바티칸은 유태인을 보호해주었다는 명분을 세우기위해).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요한복음 16:2)



바티칸이 히틀러를 비롯해 무솔리니, 프랑코, 살라자르(Salazar)와 협약을 체결했다는 사실(1933년 7월 20일 폰 파펜과 국가 담당 추기경 에우게니오 파첼리(훗날의 교황 Pius 12세)이 서명)은 비밀이 아니다. 그러나 바티칸이 히틀러가 정복했던 국가가 모두 포함되도록 협약 조항을 확장시키려고 히틀러를 부추겼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는 히틀러의 저서 「히틀러의 비밀 대화」에 자신의 말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음을 보면 알 수 있다.



"제3제국이 새로 획득한 영토가 모두 포함되도록 협약 조항을 확장하려는 바티칸의 시도에 대해 나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사아르(Saar), 슈데텐랜드(Sudetenland), 보헤미아(Bohemia), 모라비아(Moravia), 라이츠가우 단스지금-동프러시아(Reichsgau Danszig-East Prussia), 와르테가우(Warthegau), 실레지아(Silesia) 및 알사스-로렌(Alsace-Lorraine)의 대부분 지역은 사실상 공식적인 국제 조약의 지원을 받고 있는 로마카톨릭과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516쪽).


"대주교 폰 파펜의 태도를 보면 전쟁 후 협약을 종료시키려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협약을 지역 규제법으로 대체하고 현재 그 협약에 따라 보장된 재정 지원을 교회에서 철회하려 하고 있다(520쪽).


파첼리(Pacelli, 협약 조약 협상자)는 협약 조항에 따라 독일 국가가 '종교 교사에 관한 지역 주교의 제안을 모두 받아들여야 하고, 주교가 요청하면 그 교사들을 사살할 의무가 있으며, 재정 의무를 모두 이행함과 동시에 교회법이 충실하게 적용되도록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빌 베네트(Bill Bennett 또한 제수이트 조직인 동생 밥(Bob 현재 유타 주 상원 의원)는 레이건 행정부 하의 교육성 성과 기초 교육(OBE)의 포교자가 '어린이는 모두 제수이트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말을 했다고 고백했다.


따라서 요한 코트니 머레이(John Courtney Murray, 로마카톨릭 사제)가 워싱턴에 제출한 '종교 자유에 관한 조정 문서'란 조약의 내용이 몹시 의심스럽다.



일련의 사건이 히틀러의 일생을 좌우했음은 분명하다. 레오폴드 포에치(Leopold Poetsch)는 히틀러의 카톨릭 교사였으며, 스템플(Staempfle)은 히틀러를 위해 「나의 투쟁(Mein Kampf)」을 저술했다. 1919년 툴레 위원회(Thule Society)의 징병 사건은 '일루미나이티 역사 개술'(웹페이지)에 기록되어 있다. 히틀러의 '내부 그룹' 성원은 히믈러(Himmler), 괴벨스와 회스(Geobbels & Hoess), 카톨릭 신자 등이었다. 나치와 유고슬라비아 우스타쉬(Ustasha) 파시스트 전범 가운데 수천 명(일만 명 이상)이 바티칸을 통해(바티칸 비자와 훔친 적십자 여행 카드에 바티칸 직인을 찍음으로써 문서를 위조해서)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파라구아이,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미국 등으로 도피 밀입국을 했다. 구출을 위한 대량 철수(Ratlines)는 지오반니 몬티니(Giovanni Montini, 훗날 교황 6세), 허발(Hubal), 드라고노비치(Dragonovic, 교황 Pius 12세(1945-1950)의 지시 하에 미군 정보기관(CIC)과 협조하여 게슈타포 수령과 전범 클라우스 바르비에(Klaus Barbie)가 남아메리카로 도주하도록 주선) 등과 같은 바티칸 직원의 비밀 조직이 주도했다.



"대량 학살자들을 정의의 심판대에서 구해준 사람들은 페론(Peron, 아르헨티나의 유명한 독재자)과 그의 비밀 경찰이 아니라 로마 카톨릭과 그 밀사들이었다. 사제, 교회, 수도원과 더불어 위조 바티칸 여권으로 대전 후 나치 전범들의 수색을 방해한 이는 바로 로마 카톨릭이었다. 이 구출 작전은 나치 시대에 계속 추구해 온 정책과도 일관된다. 제수이트 신학자 헨리 드 루박(Henri du Lubac)은 대전이 끝나기 훨씬 전에 로마 카톨릭과 친나치 비치(Vichy) 정권의 협조 관계에 관해 보고서를 제출한 적이 있다. 이 보고서는 이번 달에야 공개되었는데, 드 루박(du Lubac)은 나치 정권 하에서 그 임무를 포기한 로마 카톨릭 주교들을 비난하고 있다. 프랑스의 추기경과 성직자들은 수십 년 동안 프랑스 최악의 전범 폴 토이비에르(Paul Touvier)가 정의의 심판대에서 벗어나도록 도움을 주었다. 카톨릭은 획일적인 통치를 받으므로 최고 권위인 바티칸의 승인 없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오랜 기간 동안 어떻게 일사불란하게 행동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째서 바티칸이 이스라엘 국가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예루살렘 포스트 지는 '최대의 과실(Maxima Cupla)'이란 1992년 2월 14일자 사설을 통해 이탈리아 바티칸 사원의 프란체스코 성직자가 홀로코스트 학살자 아돌프 아이히만(Adlof Eichmann)에게 바티칸 비자와 여권(1950년 6월 14일 리카르도 클레멘트란 이름으로)을 발급해 줌으로써 아르헨티나로 무사 통과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모사드에의해 체포되어 예루살렘에서 열린 재판에서 오른 손을 들어 진실을 말하겠다고 맹세하고 나서 손으로 교황이란 표시를 만들어 보여주었다. 히틀러는 파벤(I.G. Farben)이 고용한 아이비 리(Ivy Lee, 아마도 John D. Rockefeller의 이미지를 계속 높여 주었기에 선발된 듯하다)의 승인을 받은 뒤 런던, 뉴욕, 베를린 등지에서 일루미나이티 은행가들의 지원(따라서 루돌프 헤스(Rudolph Hess)는 로드챠일드의 고향인 스코틀랜드로 망명할 수 있었다)을 받았다.





아우슈비

출처 : 꿈으로 가득찬 아이들
글쓴이 : 熱血男兒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