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정복한 카톨릭 예수회(제수이트)
일본에 가장 먼저 들어간 3명의 예수회 수사는 프란시스 자비에르 (Francis Xavier),
알레싼드로 발리그나노 (Alessandro Valignano),
그리고 프란시스코 카브랄(Francisco Cabral)이다.
프란시스 자비에르 (1506 ~1552 )
알레싼드로 발리그나노 (1539-1606)
1549년경 일본에 처음으로 들어간 예수회 수사들로서 일본 황제의 환영을 받았다.
예수회는 스스로를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부르며 “그리스도교”를 전파하기 위해 왔다고 말한다.
섬 제국에 고립되어 있었던 일본인들은 세계 역사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그들은 로마황제 콘스탄틴(Constantine)이 지금도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하는
모조 혹은 대용 “그리스도교”를 만들었다는 것을 몰랐다.
예수회는 초기에 서구 세계와 접촉하기를 열망했던 일본 황제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다이묘 노부나가 (Daimyo Nobunaga) 황제는 그들을 환영하면서
그들에게 교토(Kyoto)에 있는 땅을 하사했다.
다이묘 노부나가 (Daimyo Nobunaga)
“16세기 일본의 군사 독재자였던 다이묘 노부나가는 서구의 무역업자들과 함께 온 예수회의 선교사들을 환영했다. 일반적인 믿음과는 달리 일본은 서구와 처음으로 접촉하게 되었을 때 사상과 상품의 교환을 열망하고 있었다. 노부나가는 로마 가톨릭 교인들에게 포교의 자유를 주었고, 교토에 있는 땅을 기부했으며, 연차 수당을 돈으로 주겠다고 약속했다. 곧 전국적인 포교 시작되었으며 개종자는 수천 명씩 나왔다.”
[베트남, 왜 우리가 갔었는가? (Vietnam, Why Did We Go?), p. 146].
일본인들은 자신을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면서
“그리스도교”를 확산시키기 위해 왔다고 말하는 예수회를 환영했다.
일본인들은 “선교인들”이 일본을 스페인 제국에 복종시키고 합병하려는
정복 군대의 첫 번째 부대일 뿐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그러나 “선교인들”이 일본을 정복하려는 침략군의 선봉일 뿐이라는 것을
기민한 일본인들이 알게 되었을 때 그들에 대한 사랑은 증오로 바뀌었다:
“1596년에 스페인의 범선, 산 펠리페(San Felipe)가 토사 (Tosa) 지방 연안에서 난파를 당했다. 히데요시(Hideyoshi)는 그 배와 상품을 몰수하라고 명령했다. 화가 난 스페인 선장은 일본 관리들에게 인상을 주거나 위협할 목적으로 스페인이 세계 제국이 된 방법을 자랑스럽게 늘어놓았다. 그 증거로 선장은 일본 관리들에게 스페인의 영토 모두가 그려져 있는 지도를 보여주었다. 깜작 놀란 일본 관리들은 한 나라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나라를 복종시킬 수 있었느냐고 질문했다. 스페인 선장은 일본인들은 결코 스페인을 모방할 수 없을 것이라고 자랑하면서, 그 이유는 일본에 가톨릭 선교인들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스페인의 모든 영토는 사람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먼저 선교인들을 보내고,
그 다음에 군대가 최종 정복을 함으로써 얻어졌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와 같은 대화 내용이 보고되었을 때 히데요시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선교인들을 정복을 위한 초기 디딤돌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그의 의심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그는 자신의 제국 내에서 그와 같은 유형의 간교한 정복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베트남, 왜 우리가 갔었는가?, pp. 151-152).
다이묘 히데요시는 예수회 “선교인들”에 대해 엄격한 제한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의 계승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Tokugawa Ieyasu)는 외국인들이 일본에 들어오는 것을 금지했으며,
1854년에 페리(Perry) 제독이 올 때까지 일본의 문을 닫아서 은둔국으로 만들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Tokugawa Ieyasu)
1639년의 배척 칙령으로 예수회가 일본에서 금지되었다!
가톨릭교로 개종한 사람들의 일본에 대한 충성이 의문시되었으며,
1597년에 히데요시는 9명의 예수회 선교인들과 17명의 일본인 개종자들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명령했다.
이 일은 유럽의 영향과 작용에 대한 적대감의 시작일 뿐이었다:
다음 수십 년 동안의 박해와 참수 및 강제 탈퇴는 로마 가톨릭교를 멸절시켰다.
1635년의 배척 칙령의 3대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일본인들은 일본 자체의 국경 내에 있어야 한다.
국가를 떠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엄격한 법이 제정되었으며, 떠나려는 시도를 하는 사람은 사형을 당할 것이다. 일본에 불법적으로 들어오는 유럽인들도 사형을 당하게 될 것이다.
2. 가톨릭교는 엄격히 금지된다.
그리스도교를 실천하는 사람이 발견되면 조사를 받게 되고, 가톨릭교와 연관이 있으면 처벌을 받는다. 그리스도교를 여전히 추구하고 있는 사람들을 색출하는 일을 돕기 위해 자발적 밀고자에게 보상을 한다. 카톨릭 선교 활동 금지 역시 그 칙령에 의해 강조되었으며, 카톨릭 선교인들은 입국을 할 수 없었고, 정부에 의해 체포되면 가혹한 형을 선고받았다.
3. 교역 제한 및 상품에 대한 엄격한 제한은 교역을 위해 개방하는 항구와 교역에 종사하도록 허가를 받는 상인들을 제한하였다.
포르투갈과의 관계는 완전히 단절되었고, 중국 상인들과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East India Company)의 상인들은 나가사키(Nagasaki)에 한정되는 제한을 받았다. 중국과의 교역은 반독립의 류큐 (Ryukyus) 예속 왕국에 의해, 한국과의 교역은 쓰시마 (Tsushima) 영지를 통해, 그리고 아이누 (Ainu) 사람들과의 교역은 마쓰마에 (Matsumae) 영지를 통해 이루어졌다.
메슈 페리 (Matthew Perry) 제독이 1853년에 일본의 문호를 강제로 열었다.
메슈 페리 (Matthew Perry)
1852년에, 페리는 미시시피 (Mississippi), 플리머스 (Plymouth), 사라토가 (Saratoga), 그리고 서스키하나 (Susquehanna) 등 4척으로 된 함대를 거느리고 버지니아(Virginia)의 노퍽(Norfolk)을 출항하여 일본으로 향했다.
그는 1853년 7월 18일에 일본에 상륙하여 도쿠가와 막부의 대표자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페리에게 나가사키로 가라고 했다. 당시 나가사키는 네덜란드 사람들과 제한된 교역을 하고 있었고 외국인들에게 개방된 일본의 유일한 항구였다.
매슈 페리 제독은 1853년에 일본으로 하여금 외부 세계에 문호를 개방하도록 했다.
그의 아내인 제인 슬라이델(Jane Slidell)은 영국과 전쟁을 거의 시작하게 한 트렌트 사건에 연루된 악명 높은 반도인 존 슬라이델(John Slidell)과 자매간이었다.
1854년 3월 31일에, 가나가와 협약(The Convention of Kanagawa)이라고 하는
미국과 일본 사이의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 조약의 몇 가지 조항은 다음과 같다:
1조.
미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그리고 양국 국민들 사이에, 사람과 장소의 예외 없이, 온전하고 영구적이며 보편적인 평화와, 신실하고 충심에서 나오는 우호 관계가 있다.
II조.
일본은 이드주(Idzu) 공국의 [예도 (Yedo) 항에 있는] 시모다 (Simoda) 항구와, [홋카이도 (Hokkaido)]의 마스마이 (Matsmai) 공국에 있는 하코다데 (Hakodade) 항구를 미국의 선박들이 입항하도록 허가하는데, 그 항구에서 미국 선박들은 일본인이 가지고 있을 경우 목재와 물과 식량과 석탄과 다른 물품을 필요에 따라 공급받을 수 있다. 먼저 거명된 항구의 개방 시기는 본 조약의 서명 직후이고, 마지막으로 거명된 항구는 일본 달력에 의해 다음 해 같은 날짜 이후에 즉시 개방된다.
유의 사항. 그들이 공급받는 물품의 가격표는 일본의 관리들이 줄 것이며, 그에 대한 지불은 금화와 은화로 한다.
III조
미국의 선박이 일본 해안에서 좌초되거나 파선되면 일본 선박은 그들을 도울 것이며, 선원들을 시모다(Simoda)나 하코다데(Hakodade)로 데리고 가서, 그들을 받아들이도록 임명된 자국 사람들에게 인계하며; 파선된 선박의 선원이 보존해야할 모든 물품을 동일하게 복구시키고, 양국의 해안에서 좌초되는 미국인과 일본인의 구조와 지원에 들어가는 비용은 상환하지 않는다.
일본은 1870년에 교황령을 상실한 후에 전략적으로 중요하게 되었다
1870년에 교황령을 상실한 후에 일본은 바티칸에게 전략적으로 중요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일본이 러시아와 가깝기 때문이다.
1870년후에, 일본은 영국 해군을 모방하여 자국의 해군으로 주요 군비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일본은 또한 1870년에 프로이센이 프랑스에 대해 거둔 승리에 인상을 받아서
프로이센의 군사 제도를 연구했다.
1894년에, 일본은 한국 정복을 시작했으며 한국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중단시키고자 했다.
러시아는 로마에 본부를 둔 새로 연합된 이탈리아 왕국을 승인한 최초의 국가들 중 하나였다.
러시아는 또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였으며 러시아가 상실한 나라들을 다시 찾은 열쇠는 정복이었다.
1905년의 노일 전쟁
러시아는 해군과 해양 교역을 위해 태평양의 따듯한 물에 있는 항구를 얻고자 계속 노력했다.
최근에 설립된 블라디보스톡 (Vladivostok) 항구는 하절기에 상당한 정도로
운영이 가능한 유일하게 활발한 러시아 항구였다.
그러나 아서(Arthur) 항구는 연중 운영이 가능하였다.
최초의 중일 전쟁과 1903년 사이의 기간에 있었던 차르 정부와 일본 사이의 협의는 성과가 없었다.
일본은 한국에 대한 전적인 지배권을 위해 전쟁을 선택했다.
노일 전쟁은 러시아로 봐서는 재난이었으며 차르 니콜라스 (Nicholas) 2세를 거의 퇴위시키는 정도가 되었다.
삼국 동맹
1940년 9월에,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및 일본은 삼국 동맹이라고 하는 군사적 동맹을 맺었는데,
이 동맹은 공식적으로 연합국을 대항하는 제2차 세계대전의 추축국이 되었다.
진주만 폭격
진주만 폭격
삼국 동맹의 참가국으로서 일본은 동쪽의 소련을 공격할 것으로 예상되었고,
독일은 서쪽을 공격할 것이 예상되었다.
그러나 일은 그렇게 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일본이 1939년에
크할크힌 골 (Khalkhyn Gol) 전투에서 러시아 군대와 불쾌한 조우를 하였기 때문이다.
1939년 5월에, 일본의 관동군은 러시아 장군 게오르기 주코프(Georgy Zhukov)의 공격을 받아
거의 전멸되었다. 이것이 진정한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이었다.
러시아 군대와의 이 조우는 러시아를 공격하는 것에 대해 일본이 재고하도록 하였으며,
그리하여 일본은 대신에 동남아시아를 공격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루스벨트로 봐서는 적기에 시작되었는데,
그 전쟁이 그를 전례가 없는 12년 동안 대통령이 되어 8명의 대법원 판사를 임명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프리메이슨 프랭클린 루즈벨트
삼국 동맹에서 계획되고 합의된 것처럼 러시아를 공격하는 대신에 일본은 동남아시아 공격을 시작했다.
1941년 12월 7일에 그들은 진주만에 대한 “기습” 공격을 시작했지만,
그 공격은 불시의 공격이라고는 전혀 할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일본의 암호가 이미 해독되었기 때문이다.
히로시마 원자 폭탄 공격!
1945년 8월 6일, 한 대의 B-29 폭격기가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 하나를 투하했다.
150,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죽었다. 1마일 반경 내의 모든 것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 일은 거의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는 일이었다.
피폭 지점으로부터 1킬로미터가 안 되는 곳에 카톨릭 성당에 부속된 2층 집이 있었다.
그 집은 손상을 입지 않았다. 성당은 지붕만 날아가고 나머지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집에는 8명의 예수회 사제 신부들이 있었다.
사소한 찰과상을 제외하고는 그 8명의 예수회 신부들은 상처를 입지 않았다.
이 8명의 남자들이 어떻게 원자 폭탄 폭발을 살아남았는지는 설명되지 않고 있다.
그 집이 손상을 입지 않은 것도 불가사의다.
세계적으로 가장 위대한 과학자들 중 일부가 조사를 했으나,
아무도 이 주목할 만한 생존을 이론화할 수 없었다.
반면에 그들은 합리적인 의문을 넘어서서 그 건물들이 반드시 파괴되고
사제들은 단지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전멸되어야 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 자료를 세상에 내놓았다.
페드로 아루페(Pedro Arrupe)는 피폭 지점으로부터 약 2마일 (3킬로미터) 떨어진
나가쓰카(Nagatsuka)에 살고 있었다.
그는 그 폭격을 살아남았으며 그 도시에 도착한 최초의 구조 팀들 중 하나를 인솔했다.
예수회 수장으로서 그는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John Paul) 2세가 저격된 데 대한 책임이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8월의 오전 8:15 1/2에 나가쓰카에 있었던 아루페의 주택의 모든 창문이 포효하는 충격파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으며, 하늘은 그가 나중에 ‘압도적이며 유해한 것’으로 묘사한 빛으로 가득 찼다. 약 30분 후 그와 그의 예수회 공동체가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왔을 때는 그슬리는 열기로 가득 찬 40mph 바람이 몰고 온 화재 폭풍이 히로시마를 둘러쌌다. 그가 자신의 첫 번째 구조대를 근교에 보냈을 때 그의 구조대는 비록 원시적이긴 했지만 진흙투성이의 끈적끈적한 방사성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대기의 열기를 기분 나쁜 냉기로 바꾸어 놓은 강타당한 도시에 나타난 최초의 의료 구조대였다.”
[마틴 (Martin), 예수회 (The Jesuits), p. 350].
일본은 소련이 전쟁에 개입했을 때 항복하기를 더 열망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포함한) 미국의 고위 장군들 대부분은 원자폭탄 공격은 불필요하다고 말했다.
그것은 침례교도인 트루먼(Truman) 대통령에게 폭격 책임이 돌려졌기 때문에
예수회를 위한 더 큰 선전 효과가 있었다.
예수회 수장 페드로 아루페는 그 폭격에 대한 책임이
“신을 공경하지 않는” 미국에 있다고 (교황에게 책임이 없다는 의미) 했다:
“그 순간부터 히로시마는 페드로 아루페에게 새로운 것이 되었다. 히로시마는 ‘신을 공경하지 않는’ 사회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유혈의 사례가 되었으며; 히로시마는 서구의 부패가 이룩할 수 있는 고통과 고난에 식각된 살아있는 극적인 장면이 되었고; 너무나 동떨어진 일본인의 정신에 대한 서구의 몰이해에 관한 애처로운 주석이 되었다.”
(마틴, 예수회, p. 350).
아루페와 그의 예수회는 사실상 일본에서 영웅과 명사가 되었다:
“운명의 장난으로, 큰 어둠을 발견하도록 보냄을 받았던 그 도시에서의 그의 직무는 그에게 세상적 각광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처음으로 맛보게 해주었다. 그와 그의 종교 단체는 일본인의 공개적 감사를 받았다. 의문의 여지없이, 강타당한 사람들을 도우려는 그들의 노력은 전후 일본에서 예수회가 성공을 거둔 수단이었다.
1945년 이후 20년 동안 페드로 아루페는 일본에 머물었으며, 전후 일본에서의 모든 예수회 수사들의 부교구장으로서의 그의 재직 기간 동안 그는 일종의 명사였다. 또한 그는 여전히 교구를 관리하고, 기금을 모으며, 설교하고, 여행을 하는 몹시 힘든 동일한 일과를 계속하고 있다.”
(마틴, 예수회, p. 350).
트루먼 대통령을 세우다!!
스코틀랜드의 메리(Mary) 여왕에 대한
사형 집행 영장에 서명을 강요당한 자비로운 여왕 엘리자베스(Elizabeth) 1세의 경우와 똑같이,
트루먼 대통령도 일본에 대한 원폭을 둘러싼 사건들에 의해서 세워지게 되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사실 그 중대한 일이 일어났을 때 국외 관광을 하고 있었다:
헨리 트루먼 프리메이슨
트루먼 대통령은 원자 폭탄 투하를 둘러싼 사건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는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순간에 국외로 보내졌다.
미국의 최고 군사 지도자인 리히(Leahy) 제독은 원자 폭탄의 사용은 야만적이라고 말했으며,
원자 폭탄의 사용을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독가스 사용과 비교했다.
http://blog.daum.net/jesus2041coming/8818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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