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뽕 등소평

김정일이 김일성 암살했다는 소문이 무성했는데 (펌)

그리운 오공 2011. 12. 19. 21:16

올해는 북한이라는 사회에서 '신(神)과 같은 절대적 카리스마와 권위'를 가졌던 김일성이 사망한 지 17돌이 되는 해이다. 바로 이런 시점과 관련해 지금 북한내에서는 김정은으로의 권력세습이 김정일의 건강회복 때문인지 '속도조절론'이 제기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모든 미제(未濟)의 사건이 그러하듯이 '김일성의 사망'에 관련된 원인에 대해서도 북한 당국의 공식발표와는 달리 지금까지 국내외에서 수많은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이런 여러 가지 설(說)은 북한당국의 발표를 그대로 따르는 경우를 예외로 할 경우, 크게 '김정일에 의한 모해설', '김정일과의 언쟁(言爭)에 의한 심장마비설', '격무(激務)' 및 '전우(戰友) 사망에 의한 충격설' 등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우선, 평소 협심증 증세가 있었던 김일성 곁에는 언제나 심장담당 주치의가 동행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김정일은 의도적으로 묘향산 행사 명단에서 심장담당 주치의를 빼버렸다고 한다. 이는 김정일이 평소 "수령님의 호위사업에는 천만번 중 단 한번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된다"는 지시와 정면으로 상반된 것으로 김정일의 암살설을 제기하는 첫 번째 근거로 들 수 있다.

특히 이 점에 대해서는 봉화진료소의 의사들조차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고 의혹을 제기하고 있으며, 김일성의 딸이자 김정일의 여동생인 김경희까지도 상당한 의구심을 표명하고 있을 정도라고 한다.

 

또한 '기상악화로 인한 헬기 추락설과 의료진과 의약품을 실은 구급차의 복귀설'이다. 김정일의 긴급명령에도 불구하고 헬기는 한 치 앞도 가려볼 수 없는 기상악화로 추락되었고, 구급차량은 산사태 때문에 평양으로 되돌아 갔다는 것이 요체인데, 신(神)과 같은 '인민의 어버이'인 김일성의 명운(命運)이 촌각에 놓였는데, 이를 무시하였다는 것은 '김정일의 지시'때문일 것이라는 주장이다.

결국 이 설(說)은 '지도자 동지의 지극한 효성과 인민들의 행복에 도취되어있던 김일성을 새벽에 심장마비를 일으키게 한 주범'은 바로 김정일밖에 없다는 전제 하에서 제기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조총련 의장이었던 한덕수는 조총련 간부들을 대상으로 한 '북한방문 보고대회'에서 "심장병을 일으킨 김일성은 화장실에서 돌연 호랑이가 포효하는 듯한 큰소리를 내고 쓰러졌으며, 이 소식을 전해들은 평양에 있던 의료진이 급히 묘향산별장으로 가다가 교통사고로 전원 사망하여 김일성은 아무런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사망했다"는 요지로 되어 있다.

이어 김일성의 중국인 은사(恩師) 가족이 증언한 내용으로는, 김일성이 사망 전일인 7월 7일 묘향산별장에서 열린 농촌공작회의에 참석하여 심야까지 업무보고를 받던 중 갑자기 "피곤하다. 좀 쉬자"고 말한 뒤 쓰러져 7월 8일 오전 1시쯤 집무실 책상에서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김일성 사망과 관련된 의혹은 북한 무기체계에 밝은 장령급 군관이 작성한 문건에서도 나타나는데, 이곳에서는 '김일성이 묘향산에 있는 별장에서 사업일군 회보를 청취하다가 강건종합군관학교 교장 출신이 항일빨치산 출신 조명선의 부고(訃告)를 받고 쓰러졌으나, 구급헬기의 추락으로 인해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사망했다'는 것이 요지이다.

이런 김일성의 돌연한 죽음과 관련한 의문설에서 우리가 또 하나 유념해 볼 사실은 당시 분단사상 최초의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남북경호 대표 실무접촉'에 참석한 북측 인원들의 행태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경호를 담당하고 있는 김일성의 사망에 대한 공식발표가 이루어진 7월 9일 정오보다 2시간 빠른 오전 10시 판문점에서 개최된 제2차 회담에서 아무런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한 채 밝은 표정으로 임했으니, 이미 8시간 전에 사망한 자신의 주군(主君)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다는 점에서, 김일성 경호책임자로서 납득키 어려운 점이다.

 

결국 김일성의 사망원인에 대한 의혹은 그 주인공이 '불귀의 객'이 된 지 17년이 지나도록 해소되기는커녕 점점 증폭되고만 있으며, 사망 당시 김정일이 곧바로 김일성의 공식적인 직책을 승계받을 것이라는 관측과는 달리 김정일은 이후 3년이 넘는 기간동안 최고사령관 명의의 김일성유훈을 내세우며 북한을 실질적으로 통치하였을 뿐이었다.

이후 그는 김일성이 가졌던 '수령'의 지위와 역할을 그대로 승계받았으며, 몇 년전부터는 자신의 3남인 김정은에게로의 3대 세습체계 구축에 진력하고 있다.

 

김일성이 사망한 지 무려 17년이 지난 지금 북한전역에서는 '김정은'을 중심으로 한 3대 세습체제 구축이 공식화되면서 '청년대장, 김대장, 샛별장군'의 별칭(別稱)을 사용하는 가운데 3대 세습토대가 하나씩 가시화되고 있다.

그러나 김일성은 김정일을 굳게 믿고 20여년간의 기간동안 단계적, 점진적으로 후계자로서의 자질과 능력을 향상,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김정일은 자신의 실정(失政)이 드러나는 두려움과 이로 인한 권력의 약화를 우려하여 결코 저질러서는 안될 범죄인 부친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는 의혹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이런 김정일은 자신의 아들인 김정은이 행한 전과(?)가 기대 이하의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에 김정은에의 성급한 권력이양이 '큰 문제'가 될 수 있음을 뒤늦게 인지한 탓일까?

즉 가슴 속 저편 한 구석에는 자신이 아버지인 김일성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김정은도 자신에게 똑같은 일을 저지를 개연성이 있다는 일종의 공포감을 가지면서, 그 사전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을지 모른다.

특히 지난 2008년 8월 돌연하게 찾아온 뇌졸중이 언제, 어디서 재발할 지 모른다는 의구심을 가진 채 건강이 허락하는 한 권력의 승계를 유예하면서 최대한 자신만의 통치력을 과시하려 할 것이다.

 

특히 벌써 몇 년전부터 호언장담해 오고 있는 '2012년 = 강성대국의 문패를 다는 해'라는 등식(等式)을 현재화할 가능성이 점점 희박해 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나마 기대했던 남북교류-협력이나 한국의 대북지원 문제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는 정황이기 때문에 김정일로서는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입장에 처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바로 이런 가운데 김정일이 택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대안(代案)은 국제사회의 보편적 흐름과 요구에 순응하는 것밖에 없는데, 이 역시 정권이나 체제유지, 보존에 직결된 것이기 때문에 그리 쉬운 결정은 아닐 것이다. 앞으로의 귀추가 예의 주목되는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