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닉스 저널의 번역본중 일부 인용-
http://blog.daum.net/truthinlight/12783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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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김일성--조지아주/카터
만약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면, 미국인들이여, 당신들은 장님에 다를 바 없으며, 어쩌면 당신들 역시 그저 죽게 되고 말 것입니다.(1994년 7월 8일 구술--역주)
클린턴 갱단(당시 클린턴 행정부는 록펠러(주도)-볼셰비키-시오니스트 연립 내각, 클린턴은 록펠러 가문의 서자 출신--역주)은 북한 내 쿠데타와 전쟁을 기획했었습니다. 지금 조지아주는 그들이 행한 “부주의”의 대가로 혹독한 물난리를 겪고 있는 중입니다.(미국과 러시아는 70년대 후반부터 지오피지컬 무기(날씨조작 무기)를 사용--역주)--그리고--김일성은 어젯밤 살해되었습니다!
김일성이 “명백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발표는 초기에 언급된 내용 가운데 하나였습니다.--이제 카터(그 해 평양을 방문했던 카터는 복제인간, 원래의 지미 카터는 대통령으로 재임 중이던 1979년 4월 21일, 양미간 사이에 총격을 받고 사망(피닉스 저널 제 98권 p.30), 이후 수차에 걸쳐 복제, 클린턴 역시 대통령으로 취임한 지 채 1년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경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 이후 힐러리와 함께 복제, 복제 인간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로보토이드 & 씬테틱’ 참조--역주)와 맺었던 모든 약정들은 “없었던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한 진술은 오늘 새벽 이후로는 더 이상 반복되지 않고 있습니다.--그렇더라도 내 생각에 당신들이 어쩌면 큰 그림을 알아 볼 수는 있을 것이라고 보는데, 어떻습니까?
Gyeorgos Ceres Hatonn, 게오르고스 세레스 하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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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 자료 인용-
김일성 주석 진짜 사망 원인은? 번호 26878 글쓴이 1994 조회 426 누리 5 (5, 3:1:1) 등록일 2011-3-2 18:55 대문 1
김일성 주석 진짜 사망 원인은?
본문으로 안가저서 댓글로 함
원문 주소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global_2&uid=26878
[1/1] 1994 122.153.252.66 작성일 2011년3월2일 18시55분 [삭제] [수정] -퍼온 글임-
밑에 글과 김일성 주석의 사망 원인을 달리 생각함. 지미 카터가 암살 했다고 생각함
김대중(박지원)은 프리메이슨이 확실함. 어디 까지나 국정원 사건 및 기타 반미행위는
쑈 입니다.. 클린턴 부부, 부시, 오바마, 김대중, 이명박 전부 텔런트 들입니다.
우리는 SHOW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꼭두각시 들은 재처 두고 조선과 미-유대의의 싸움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글의 부정확한 것은 알아서 판단 하시고 심심하시면 읽어 보십시오
北 김일성 사망의 진짜 원인은?
<김일성 사망을 둘러싼 풀리지 않은 의혹>
<마오쩌둥의 비서들>의 작가로, 주로 중국 정치인들의 인물 전기를 저술해 온 것으로 알려진 상하이 작가협회의 예융리에(葉永烈) 씨가 최근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기 직전까지 매일 10여 시간의 과중한 업무를 감당하다 급성 심장병으로 사망했다고 밝혀 주목을 끌고 있다. 지난 2006년부터 북한을 방문해 김주석의 사망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 것으로 알려진 그는 톈진교육출판사가 출간한 <진실의 북한(眞實的朝鮮)>이란 책에서 김일성 주석이 계속된 격무로 인한 과로와 전우의 부고로 인한 충격 등으로 인한 심근경색으로 1994년 7월 8일 새벽 2시에 심장 박동이 멈춰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이 책에 따르면, 당시 피로가 누적된 김주석(82)은 묘향산 특각에 머물면서 전날까지 준비가 한창 진행 중이던 YS와의 정상회담 관련 문건을 검토했었다고 한다. 김주석은 문건을 검토한 뒤 ‘1994.7.7’이라는 일자와 함께 서명했으며, 김일성의 살아 생전 마지막 서명이 된 이 문건은 현재 판문점의 기념비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예씨에 따르면, 김주석이 7월 8일 새벽 갑자기 쓰러지자 의사가 달려와 급성 심장병으로 진단했지만, 김주석이 평소 심장병을 앓은 적이 없는 관계로 주치의가 미처 응급약을 구비하고 있지 못했었다고 한다.
게다가 김주석이 쓰러진 후 북측은 긴급히 헬기를 출동시켰지만, 날이 어두운데다 짙은 안개와 거센 폭풍우로 헬기가 묘향산 위에서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윽고 두 번째 헬기가 간신히 묘향산 특각 앞마당에 착륙해 김주석을 평양의 봉화 의원으로 후송했지만, 손을 쓰기엔 이미 늦었다고 한다. 급작스런 부친의 사망 소식을 접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7월 17일 추도 대회를 개최하려고 했지만, 비통에 잠긴 나머지 감정을 추스리지 못해 7월 20일로 연기해야만 했다고 한다. 실제로 추도 대회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은 김위원장은 이후 한동안 공식석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김주석의 서거 후 김정일 위원장이 보여준 이같은 행동은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강대국들로 하여금 온갖 억측을 불러 일으키도록 만들었다. 특히나 제네바에서 북미간 기본 합의서를 준비하고 있던 미국과 반세기전 김주석을 북한의 지도자로 추대한 러시아, 그리고 한국전에서 마오쩌둥의 맏아들을 희생시킬 정도로 끈끈한 혈맹 관계를 보여준 중국과 북한과 껄끄러운 관계에 있던 일본의 정치 평론가 사이에서는 김일성의 급작스런 사망을 둘러싸고 수많은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논란의 대상이 된 것은 다름아닌 김정일 위원장의 김일성 제거 시나리오였다.
이같은 상황에서 전세계 언론이 주목한 것은 김주석의 사망 후, 미국 정부가 북한과의 협상에서 보여준 일련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1993년 5월말 김일성이 노동 1호를 발사할 때만 해도 북폭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작전계획 5027’의 시뮬레이션까지 지시했던 클린턴이 김주석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변화없이 카터의 방북으로 급진전된 북미 협상을 지속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주석이 사망한지 한달이 지난 1994년 8월부터 제네바에서 제3차 북미 회담을 개최한 미국은 10월 21일, 마침내 극적으로 북한과 제네바합의에 서명한다. 이것이 그로부터 무려 13년이 지난 오늘까지 북미 협상의 근간이 되고 있는 제네바 기본합의서다.
그렇다면 미국은 대체 어떤 이유에서 김주석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제네바 기본합의서에 선뜻 서명했던 것일까? 게다가 제네바합의에 서명하고서도 무려 4년간이나 북한에 대해 아무런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 더불어 남한이 IMF 체제 하에서 신음하던 1998년 무렵, 북한에서는 대체 어떤 이유에서 수백만 인민들이 기아로 사망해야 했으며, 그들은 왜 목숨을 걸고 중국 국경으로 엑소더스를 시도했던 것일까? 뿐만 아니라 자국 인민 수백만이 기아로 굶어 죽어가는 상황에서조차 식량난 해결을 위해 힘쓰기보다 장거리 미사일 개발에 전력을 쏟으며 대포동 1호를 발사한 김정일 위원장의 기이한 행보는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만 할까?
또한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리무진 안에서 남·북 정상이 나누었다는 밀담 내용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대체 무엇이 타결 직전에 이르렀던 북미 미사일 협상을 좌초시켰으며, 임기말 역사적인 평양 방문을 앞두고 있던 클린턴 대통령의 일정을 변경시켰던 것일까? 더불어 2001년 3월 “this man” 논쟁을 불러 일으킨 부시와의 한미 정상회담 이후, DJ는 어떤 이유에서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과 합의한 ABM 조약의 지지를 철회해야만 했던 것일까? 그리고 이처럼 급격한 DJ의 태도 변화의 계기가 된 2001년 3월의 방미와, 한·미간 긴장 관계를 조성한 국정원의 안기부 문건 유출 사건은 대체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 새천년 평양에서 펼쳐진 세기의 드라마
지난 2000년 6월 13일, 전세계 모든 언론의 관심은 김대중 대통령이 도착하는 평양 순안 공항에 쏠려 있었다. 그럴만도 한 것이 당시 DJ의 평양 방문은 남북 분단 이후 최초로 이루어진 남한 지도자의 북한 방문이자, 새천년을 맞아 지구촌 유일의 분단 국가로 남아 있는 한반도 남북 정상의 만남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새천년을 맞아 한반도에서 준비된 세기의 드라마의 시작에 불과했다. 당시 김정일 위원장은 평양 순안 공항에 직접 마중나와 김대중 대통령을 맞이한데 이어, 김대통령의 리무진에 함께 동승한 채 주석궁으로 향하는 ‘깜작 이벤트’를 연출한 것이다. 이는 미국과 전세계 언론이 예상한 남북 정상간의 만남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이처럼 화기애한 분위기는 회담 기간 내내 이어졌다. 마치 반세기 동안 외세의 압박에 의해 제대로 만나지 못했던 형제가 그간 마음에 담아두었던 회포를 풀기라도 하려는 듯이. 특히나 이튿날 저녁 만찬에서 남북 정상과 수행원들이 다함께 손을 맞잡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이 연출한 세기의 드라마였다. 그리고 마침내 6월 15일,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 위원장과 함께 역사적인 6·15 공동선언을 발표한 뒤 거리에 늘어선 조선 인민의 열화와 같은 환호를 받으며 아쉬운 2박3일의 일정을 마치고 순안 공항을 통해 서울로 귀국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귀국 후 전세계 모든 언론의 관심은 남북 정상의 리무진에서의 대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DJ는 이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한 채 이정빈 외무장관을 베이징으로, 지금은 UN 사무총장이 된 반기문 차관을 워싱턴으로 보내 자신의 방문 결과를 브리핑했다. 하지만 미국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한국이 자신들보다 먼저 중국에 이정빈 외무장관을 보낸 것도 이례적인 일이었거니와, 무엇보다 미국은 남북 정상이 리무진 안에서 주고받은 대화의 내용에 대해 알고자 했기 때문이다. 반기문 차관의 브리핑으로 만족하지 못한 클린턴이 유럽에 머물던 울브라이트 국무장관을 다급히 서울로 파견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이처럼 드라마틱한 남북 정상회담과 그에 따른 6·15 남북 공동선언은 1998년 8월 31일, 북한에서 발사된 대포동 1호를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대포동 1호의 발사 이후 ‘페리보고서’로 대변되는 미국의 대북 정책의 변화와 DJ의 역사적인 평양 방문은, 1993년 노동 1호의 발사와 1994년 한반도 전쟁 위기 상황에서 갑작스런 카터의 방북 및 제네바 합의라는 드라마틱한 상황과 기묘한 알레고리를 보인다. 지난 1994년 클린턴 정부에서 북한 공습 시뮬레이션을 직접 지휘한 국방장관이자, 1998년 대포동 1호 발사 후 클린턴의 요청으로 미국 대북 정책의 전면 수정을 담당한 대북정책 조정관 윌리엄 페리가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듯이.
- 김일성의 노동1호 발사와 지미 카터의 방북
실제로 지난 1993년 5월 29일, 사정거리 1,300km의 노동 1호가 북한에서 발사되었을 때, 일본과 미국은 일순간 경악했다. 특히나 당시 노동 1호의 발사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느닺없는 2개 지역에 대한 특별사찰 요구에 대한 반발로 북한이 NPT(핵확산방지조약) 탈퇴를 선언(1993.3.12)한 뒤 나온 것이어서 더욱 그러했다. 더군다나 IAEA가 예정에 없던 북한 사찰을 요구한 날은 클린턴이 중단되었던 팀스피리트 훈련의 재개를 선언한 날이었고, 북한의 NPT 탈퇴는 클린턴의 지시로 한반도에서 팀스피리트 훈련이 한창 진행중인 상황에서 이루어졌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당시 김일성 주석은 자신의 심정을 캄보디아의 시아누크에게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그들(미국)은 내게 코트를 벗으라고 해요. 다음은 저고리를, 다음은 바지를 말입니다. 우리를 벌거벗길 생각인거죠. 그들은 방위에 관해서 우리가 모든 것을 드러내 보이고, 무방비 상태의 나라가 되라고 합니다만, 그 요구에 굴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들이 전쟁을 원한다면 받아들여 싸워야지요.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주석의 도발적인 대응에 충격을 받은 워싱턴은 화전 양면으로 북한을 압박해갔다. 먼저 미국은 북한에 대화를 제의하며 노동 1호를 발사한지 나흘만에 뉴욕에서 제1차 북미 회담을 개최한데 이어, 다시 장소를 제네바로 옮겨 제2차 북미 회담을 진행했다. 하지만 협상 결과가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하자, 클린턴 대통령은 1994년 5월,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인 게리 럭에게 한반도 전쟁 시나리오인 ‘작전계획 5027’
(Operation 5027 plan)의 재검토를 지시하기에 이른다.
1994년 5월 18일, 펜타곤에서는 윌리엄 페리 국방장관과 샐리 카슈빌리 합참의장, 게리 럭 주한미군 총사령관을 비롯해 4성 장군 이상의 모든 미군 수뇌부가 모여 군사회의를 개최했다. 이날 군사회의에서는 항공모함과 육상 항공기를 포함해, 미군이 보유한 총 전력의 50% 이상을 동원한다는 가정하에, ‘작전계획 5027’의 실행 결과를 시뮬레이션했다. 시뮬레이션 결과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당시 시뮬레이션을 준비한 총책임자인 해군 대령 플래니건의 표현을 빌리자면, “냉수를 뒤집어쓴 듯한 느낌”이었다고 할 정도로.
실제로 ‘작전계획 5027’ 시뮬레이션 결과, 한반도에서 전쟁 발발 후 처음 90일 동안 예상되는 미군의 사상자 수는 5만2천명에 달했다. 이는 10년 동안 베트남전에 참여한 미군 피해와 맞먹는 규모였다. 더불어 한국군 사상자는 전군의 80%에 해당하는 49만명으로 이는 한국군의 실질적인 소멸을 뜻했다. 여기에 한국의 민간인 피해 규모는 사망자만 무려 100만명으로 추산되었다. 실제로 당시 북미간의 전쟁을 부추기던 김영삼 전대통령이 이 보고를 접하고(6.16) 전쟁을 단념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물론 여기엔 북한이 입을 피해 규모에 대해서는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이는 독자들의 상상에 맡긴다).
게다가 미국이 지출할 전쟁의 직접 비용도 610억 달러로 추산됐는데, 이로 인해 한국이 입을 피해를 포함하면, 실제 전쟁 비용은 1조 달러에 달할 것이라는 게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이던 게리 럭의 견해였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문제는 한국과 일본에 있는 원자력 발전소였다. 만일 이것들이 북한의 미사일이나 폭격에 의해 파괴된다면, 그 참화는 트리마일섬이나 체르노빌 사태와는 비교할 수 없는 정도의 가공할 피해였기 때문이다.
이튿날. 윌리엄 페리 당시 국방장관은 백악관을 방문해 전날 펜타곤에서 있었던 전쟁 시뮬레이션 결과를 보고했다. 그러자 이같은 결과에 충격을 받은 클린턴은 마침내 북한에 대한 무력 공격의 포기를 결정하고, 북한의 핵 연료봉 제거에도 불구하고 제3차 북미 고위급 협상을 제안하는 등 이전과는 다른 외교적 방안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클린턴의 갑작스런 대북 정책의 방향 선회는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전쟁 시뮬레이션 결과를 모르는 까닭에 북한 공습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던 대다수 미국 언론과 군사 전문가들에게 의외의 일로 받아들여졌다. 이같은 상황에서 나온 것이 다름아닌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 드라마였다.
- 미국의 제네바 합의를 이행하지 않은 까닭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1994년 6월, 카터 전 대통령은 전세계 언론이 주목하는 가운데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두차례의 선상 회담을 통해 북한이 미국과의 전쟁 위기 상황에서 벗어나는데 극적인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 김주석의 급작스런 서거(1994.7.8)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제네바 회의의 속행을 결정하고, 1994년 8월부터 제네바에서 제3차 북미 회담을 개최한 것도 외교적 해결 이외는 딱히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아슬아슬한 위기를 수차례 넘기면서 마침내 10월 21일, 제네바에서 극적으로 타결된 것이 다름아닌 1994년 북미 기본합의서다.
그런데 미국은 제네바에서 북한과 체결한 기본합의서의 이행에 성실하지 않았다. 1994년 체결된 제네바 기본합의서에 따르면, 미국은 2003년까지 모두 200만kW 규모의 경수로 발전소를 건설해 북한에 인도하고, 공사가 끝날 때까지 매년 중유 50만 톤을 북한에 공급하는 것을 규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이같은 약속을 제대로 이행한 적이 거의 없었다. 게다가 북한에 공급할 경수로 건설을 위한 한반도 에너지 개발기구(KEDO)의 46억 달러 가운데 약 70%인 32억 달러는 한국의 몫이었고, 10억 달러는 일본 몫이었다.
그렇다면, 북한은 당시 미국의 이같은 태도를 예상치 못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제네바 합의서에 서명한 까닭은 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제네바 북미 기본합의서 제2조 1항에 규정되어 있는 “쌍방은 이 합의문에 서명한 후, 3개월 안에 통신 서비스와 금융 결제에 대한 제한 조치 등을 포함해 무역과 투자 장벽을 완화한다”는 문구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북한이 제네바합의를 통해 실질적으로 기대한 것은 대북 경수로 지원과 중유 제공보다는 미국의 대북 경제제재의 완화였던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통신서비스에 대한 제한’을 완화했을 뿐, 경제제재의 완화에 대한 의무는 아무 것도 이행하지 않았다. 한 때 우리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북한의 나진·선봉 지구의 개발이 실패로 돌아간 것도 바로 이같은 미국의 무역제재 때문이었다. 이처럼 미국은 김일성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북한과 북미 기본합의서를 체결했지만, 그 이면엔 제네바 합의를 통해 일단 북한 핵을 동결시킨 후 김주석의 사망을 계기로 흔들리는 북한 정권의 내부 붕괴를 노렸던 것이다. 1993년 노동 1호가 발사된지 5년이 지난 1998년 8월, 북한에서 발사된 대포동 1호의 의미는 바로 이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1994년 당시 클린턴 정부는 김주석의 사망 후, 북한의 붕괴에 대해 나름대로 실질적인 근거를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워싱턴은 김주석의 급작스런 사망 배후에 김정일 위원장이 있던 것으로 파악했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오진우 인민무력부장으로 상징되는 김일성 추종 세력이 김정일의 모반에 대해 좌시하지 않을 것이고, 이는 결국 양측의 피튀기는 권력 투쟁으로 이어질 것으로 본 것이다. 바로 이것이 김주석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북한과의 제네바 합의에 순순히 서명한 실질적인 이유였다. 상하이 작가협회의 예융리에 역시, 당시 미국은 북한이 3년 안에 붕괴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이는 김정일을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이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 리펑 총리와의 갈등으로 좌천된 김정일 위원장
숙부인 김영주(金英柱)와 더불어 김일성의 유력한 후계자로 지목된 김정일은 1980년대 초부터 부친의 지지 세력과 치열한 권력 투쟁을 벌여 왔다. 일명 ‘김일성 곁가지 치기 운동’으로 알려진 권력 투쟁을 통해 그는 부친을 등에 업고 권세를 휘두르는 세력을 하나 둘, 제거해 나갔다. 여기엔 김정일의 계모인 김성애와 그녀의 동생으로서 평양시당위원장으로 있던 김성갑, 심지어 자신의 정치적 라이벌인 김영주도 예외가 아니었다. 김정일이 김영주와의 후계 구도 경쟁에서 주도권을 장악한 결정적 계기는 1986년 여름, 김주석에게 갑자기 찾아온 건강 악화였다. 당시 혼수 상태에 빠진 김일성은 거의 사망 직전의 상태였는데, 김정일은 이를 자신이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기회로 이용하지 않고 오히려 사력을 다해 부친의 생명을 구함으로써 김주석으로부터 확고한 신뢰를 받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1990년대 초반부터 김위원장 주변에는 이상한 기운이 감지되기 시작한다. 특히나 덩샤오핑의 결정에 따라 자본주의 시장 경제 제체를 수용한 중국이 1992년 한국과 정식 외교 관계를 수립하면서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권력의 중심부에서 사라지는 듯했던 김정일의 계모 김성애와 김위원장의 정치적 라이벌이던 김영주가 1992년을 전후해 다시금 서서히 북한 권력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한·중 수교를 계기로 남·북한 사이에 등거리 외교를 펼치는 중국에 대한 지나친 감정적 대응으로 지난 반세기 동안 혈맹으로 맺어진 북·중 관계를 필요 이상으로 악화시킨 김정일에 대한 김일성의 견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실제로 1992년 8월 24일 베이징에서 체결된 한·중 수교 이후, 북·중 관계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북한이 중국에 대해 노골적인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한 것은 1992년 말부터였다. 1993년 3월 홍콩의 시사지 <鏡報>에 따르면, 김정일 위원장은 12월 중국에 250억 위안(당시 국내 환율로 대략 3조6천억원)의 채무를 탕감해 줄 것을 요구하는 한편, 조중(朝中) 우호협력 조약의 파기를 검토할 수 있다는 항의 서한을 보낸 것이다. 당시 한·중 수교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리펑(李鵬) 총리로서는 김정일의 이같은 태도가 달가울 리 없었다. 그런 까닭에 그는 새로운 대북 정치·군사협의의 중단이라는 초강수를 검토할 수 있음을 북측에 내비친다.
1993년 들어서 김정일 위원장은 한걸음 더 나아가 시장 경제로 전환한 중국 자체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1993년 3월 4일 발표된 자신의 교서를 통해 김정일은 비록 국호를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실질적인 자본주의 체제를 수용한 중국의 시장 경제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이다. 북한 중앙통신을 통해 발표된 이 교서에서 그는 “사회주의 이념 교육이 사회주의 경제 구축을 위해 물질적 동기를 유발하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는 “사회주의 경제를 위해 당과 국가, 노동자 계급의 주도를 부인하고, 대신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선택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개탄하며,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자본주의 시장 경제로 전환한 중국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후계자로 지목한 김정일이 리펑 총리와의 갈등에 이어 중국에 대해서조차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자, 김일성 주석으로서는 모종의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나 1993년 5월 노동 1호 발사 후, 미국과의 일전을 앞두고 중국의 지원이 절실한 상황에서는 더더욱. 이것이 1994년 6월, 한반도 전쟁위기 상황에서 김일성의 등장과 더불어 김정일이 권력의 전면에서 갑자기 사라져야만 했던 실질적인 이유다. 반면 김정일의 계모 김성애는 6월 16일, 지미 카터가 부부 동반으로 평양을 방문하자 로잘린 여사를 상대할 북한의 퍼스트 레이디로 CNN을 비롯한 전세계 외신과 북한 인민들이 지켜보는 TV를 통해 당당히 자신의 위상을 과시하고 있었다. 당시 북한 언론에 김성애의 사진조자 싣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있던 김정일로서는 자신의 권위에 치명적인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 김일성 사망을 둘러싼 풀리지 않는 몇가지 의혹
그로부터 한달이 조금 못되는 1994년 7월 9일 정오, 북한의 평양방송에서는 사전에 예고한 대로 중대 발표를 했다. 다름아닌 묘향산 특각에서 YS와의 정상회담을 준비하던 김일성 주석이 7월 8일 새벽에 급성 심장병으로 사망했다는 매우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이는 사건이 발생한지 34시간만에 이루어진 북한 당국의 공식 발표로서, 사안의 중대성에 비추어볼 때 이례적으로 매우 신속한 조치였다. 실제로 북한과 인접한 단둥(丹東)시에서는 김주석 신변에 이상이 발생한 것으로 보도된 날부터 이상한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었다. 8일부터 중국의 차량 진입을 통제하기 시작한 북한 당국이 9일부터는 이미 들어간 차량이 나오는 것조차 엄격히 차단하는 등 국경 통제를 강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북한 당국의 발표 후, 국내외 언론에서도 후속 보도를 통해 김주석이 사고 당일 새벽까지 과로하다 쓰러졌으며, 부검 결과 사인은 급작스런 심근 경색에 따른 심장 마비로 보도하였다. 그런데 스탈린이나 마오쩌둥의 죽음에서 보듯이, 사회주의 국가의 지도자가 자연사한 경우 이를 부검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더구나 1967년 이후 북한은 김일성 유일체제 상황이었고,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기 힘든 유교식 사회주의의 특성상 자연사한 국부에게 칼을 들이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김주석을 부검한 것으로 알려진 독일인 의사는 그로부터 무려 13년이란 세월이 흘렀음에도 아직까지 어디에서도 그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다.
또한 부검 결과 급성 심근경색으로 인한 심장 마비로 판명됐는데, 대부분의 심장병 환자들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상비약을 구비하고 다니는 것이 보통이다(급성 심근 경색의 경우, 환자의 60%가 사전 징후를 보인다고 한다). 이에 대해 상하이 작가협회의 예융리에는 김주석이 평소 심장병을 앓은 적이 없는 관계로 주치의가 미처 응급약을 구비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1986년 여름 갑자기 혼수 상태에 빠져 사망 직전에 이르렀던 김주석의 병력에 비추어볼 때 그의 심장은 이전부터 이상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일성 유일 체제 상황에서 최고 지도자의 주치의가 응급약조차 구비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얼마전 새롭게 교체된 주치의였다. 한마디로 남북 정상회담을 위해 김일성 주석이 마련한 묘향산 특각의 의료 시스템이 우리나라 보건소만도 못한 수준이었다는 얘기다.
의혹은 그뿐만이 아니다. 북한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은 1994년 7월 6일 묘향산 특각에서 YS와의 남북 정상회담을 준비하며 전원회의를 소집했다. 그리고 이튿날인 7일 오전 회의에서 정상회담 관련 문건을 검토하며 자신이 직접 서명한 뒤, 오후엔 휴식을 취했다고 한다. 휴식을 취하면서도 김주석은 현지 지도를 했는데, 심지어 사고 직전인 8일 새벽 1시까지 평양에 있던 서관히 농업상을 불러 북한의 농업 정책에 대해 질타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시 말해 82세라는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매우 정력적으로 자신의 업무를 수행했다는 얘기다. 그런데 그로부터 불과 1시간 뒤인 새벽 2시, 갑자기 심장에 이상이 생겨 평양에 긴급 도움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김주석의 급작스런 건강 악화 소식을 접한 평양에서는 긴급히 묘향산으로 헬기를 출동시켰다. 그런데 한밤중인 관계로 시계가 불량한 상황에서 묘향산으로 가던 헬기가 예기치 못한 짙은 안개와 거센 폭풍우에 휘말려 산 위에서 추락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두 번째 헬기가 가까스로 묘향산 특각 앞마당에 착륙하는데 성공해 김주석을 평양에 있는 봉화 의원으로 신속히 후송했지만, 손을 쓰기에는 이미 늦었다고 한다. 묘향산은 평양에서 자동차로 2시간 남짓한 거리인데, 불과 몇시간 전까지만 하더라도 평양에서 호출받은 서관히 농업상이 도착하는데 아무런 이상이 없던 날씨가 급작스런 변화를 보인 것이다.
그렇다면 김일성 주석의 신변 안전을 책임져야 할 호위총국장(우리나라 청와대 경호실장에 해당하지만, 보유 인력과 위상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은 당시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던 것일까? 김주석의 호위총국장은 7월 25~27일까지 묘향산 특각에서 개최될 남북 정상회담을 위해 판문점에서 남측 대표를 만나 YS의 경호 문제를 협의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김주석의 사망 소식을 통보받은 것은 놀랍게도 사건이 발생한지 무려 34시간이나 지난 뒤였다. 그것도 북한 당국의 공식 발표를 통해서. 상황이 이쯤 되고 보면, 누구라도 국가 지도자에 대한 정상적인 위기관리 시스템이 작동했다고 도저히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나 김일성 유일 체제라는 북한의 특수한 정치 상황을 감안한다면 더더욱.
- 대포동 1호 발사와 미국의 신속한 대북 중유 공급
그런데 이같은 이유에서 북한 내부의 붕괴를 기대한 클린턴의 예상과 달리 김정일 정권은 의외로 강했다. 김정일은 김주석 사후 ‘유훈 통치’라는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기 힘든 유교식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3년 동안 자신의 반대파를 축출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값비싼 대가를 요구했다. 북한 내부의 권력 투쟁은 심각한 경제난을 초래했고,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수년간 지속된 흉년까지 겹치면서 북한은 최악의 식량난에 직면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아사 상태에 처한 수백만 북한 인민들의 중국 국경을 넘는 엑소더스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것이 바로 남한이 IMF 체제에서 허덕이던 1998년 무렵, 전세계 언론으로부터 주목받은 북한 기아 사태의 실상이다.
실제로 권력 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1994~98년 사이, 북한 경제는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급격한 위축을 보였다. 국가 예산은 416억원에서 198억원으로 반토막났으며, 국민총소득(GNI) 역시 213억 달러에서 126억 달러로 곤두박질쳤다. 에너지 공급도 석유로 환산해 1990년 2,400만 톤에서 1998년에는 1,400만 톤으로 급감했다. 화력발전에 쓰이는 석탄 공급 역시 석유로 환산해 1990년 1,660만 톤에서 1998년에는 930만 톤으로 급감했다. 또한 원유 수입도 1990년 1,850만 배럴에서 1999년에는 230만 배럴로 무려 8배나 감소했다(참고로 2000년 당시 남한의 원유 수입량은 8억9,400만 배럴이었다). 또한 UN의 통계 자료에 따르면, 북한의 무역 수입은 1990년 28억 달러에서 1998년 9억 달러로 3배나 떨어졌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북한 인민의 생활과 직결된 농작물 수확량은 1995년 400만 톤에서 1996년과 1997년에는 무려 30%나 축소된 280만 톤으로 급격히 감소한다.
이쯤되고 보면, 1998년 당시 기아로 사망한 북한 인민이 300만을 넘는다는 소문이 빈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김정일 정권에 대한 클린턴 정부의 예상이 빗나간 것은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수백만 북한 인민이 기아로 굶어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김위원장은 일반적인 상식을 깨고 미국의 군사적 위협에 대처할 자국의 안보 역량을 강화한다는 차원에서 장거리 미사일 개발에 국가의 모든 에너지를 결집시킨 것이다. 수백만 인민을 아사 상태로 몰아가는 식량 문제를 국제 사회의 원조에 의존하면서까지(실제로 김위원장은 대포동 1호의 발사에 성공한 뒤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인민들의 피값으로 이룬 성과라고 표현한 바 있다). 이처럼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각고의 노력 끝에 김정일이 클린턴에게 내놓은 카드가 다름아닌 대포동 1호였다.
1998년 8월 31일, 함경북도 무수단리 기지에서 발사된 대포동 1호가 일본 상공을 지나 태평양 한 가운데 떨어졌을 때, 미국과 일본은 1993년 노동 1호의 발사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위협을 느꼈다. 더군다나 이 날은 일본에서 TMD(전역미사일방위)를 위한 미·일 공동연구 예산의 포기를 결정하는 마지막 날이었으며, 뉴욕에서는 북·미 협상이 재개되기 전날이자, KEDO의 분담금을 결정하는 문서에 서명하기 직전이었다. 1993년 IAEA의 특별사찰 요구와 미국의 팀스피리트 재개라는 최악의 상황에서 김일성 주석이 노동 1호를 통해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였듯이, 김정일 위원장은 제네바 합의의 이행을 미루는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이기 위해 다시 한번 대포동 1호를 발사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미국이 대포동 1호의 발사를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북한의 대포동 1호의 발사에 대해 사전 경고하지 않은 까닭은 TMD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일본을 설득하기 위한 측면이 강했다. 실제로 대포동 1호가 발사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미국과의 TMD 공동 연구를 위한 예산을 포기하려던 일본은 이 사건을 계기로 예산을 승인했다. 하지만 미국의 예측을 벗어난 것도 있었다. 그것은 대포동 1호의 2단에서 분리된 3단 발사체가 ICBM에서나 볼 수 있는 고체 연료를 이용한 장거리 로켓이었다는 점이었다. 이는 북한의 미사일 사정거리가 조만간 미국 본토를 포함하게 되는 것을 의미했다.
북한이 발사한 대포동 1호의 예상치 못한 로켓 기술에 충격을 받은 미국은 1993년 노동 1호 발사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금 북한에 대화를 제의했다. 여기에 지금까지 중유 공급의 예산 처리를 미루던 미 의회도 1998년 10월, 북한의 미사일과 금창리 해결을 조건으로 중유 공급 예산을 전격적으로 승인하는 이례적으로 신속한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마침내 1998년 11월 23일, 클린턴은 윌리엄 J 페리 전 국방장관에게 지금까지의 대북 정책을 전면 수정해 새로운 대북 정책을 수립할 것을 지시하기에 이른다. 클린턴의 이같은 태도는 지난 1994년 페리에게 한반도 전쟁 시뮬레이션을 지시했던 때와는 사뭇 대조가 되는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 페리보고서와 6.15 남북 공동선언
클린턴의 지시를 받은 윌리엄 페리 전국방장관은 그로부터 9개월에 걸친 우방국들과의 긴밀한 협의를 바탕으로 미국의 새로운 대북 정책을 담은 일명 ‘페리보고서’를 작성한다. 이 보고서에 나타난 미국의 대북 정책이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북한을 미국이 희망하는 모습이 아닌, 현재의 있는 모습 그대로 다룰 것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그동안 북한에 대해 주술적 사고를 유지하던 미국이 대포동 미사일 사정거리에 자국 본토가 놓일 수 있다는 현실을 깨달으면서, 비로소 북한에 대해 이성적 사고를 시작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위협을 현실로 인식한 미국의 태도는 명확했다. 그것은 대포동 1호를 발사한 김정일 위원장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북한을 국제 미사일기술 통제시스템인 MTCR에 가입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페리는 1999년 5월말, 평양을 방문해 북한의 고위 관리들과 접촉한다. 이 자리에서 그는 평양 당국이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지대한 관심이 있고, 대미 관계의 정상화를 위해서는 장거리 미사일 개발을 포기해야 한다는 점도 명확히 이해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북한은 미국의 위협에 대한 안보 억지력과 미사일 수출을 통한 확실한 현금 확보라는 차원에서 미사일 프로그램에 상당한 가치를 두고 있음이 명백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북한의 미사일 개발 중단을 요구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에 상응하는 안보 및 경제적 보상을 제안해야만 했다. 페리가 대미 관계의 정상화를 위해 사정거리 180마일(300km), 탑재중량 500kg 이상의 미사일과 무인비행체, 미사일기술, 생산설비, 재료 이전 등을 통제하는 MTCR 가입을 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고위 관리들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 것도 바로 이같은 이유에서였다.
이처럼 양국의 인식 차이로 북·미 협상이 지지부진한 사이, 1999년 6월 15일 서해에서는 소위 ‘연평 해전’이라 불리는 남·북한 해군 사이의 교전으로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긴급 사태가 벌어진다. 게다가 북한은 추가 미사일 발사를 공언하고 있었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미국은 다시 북미 고위급회담을 제의하는 등 북미 관계는 살얼음판을 걷는 분위기였다. 우리가 앞서 살핀 2000년 6월 DJ의 역사적인 평양 방문은 이처럼 지지부진한 북미 미사일 협상의 물꼬를 틈으로써 북미 관계의 정상화를 통한 남북한 평화 공존을 모색해보려는 고육지책에서 나온 것이었다. 마치 1994년 한반도 전쟁위기 상황에서 카터의 방북이 그랬듯이.
- 조명록 차수의 방미로 급진전된 북미 미사일 협상
아니나 다를까.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 후, 북한에는 상당한 태도 변화가 감지되었다. 2000년 10월, 북한 인민군을 대표하는 조명록 차수가 백악관의 클린턴을 방문한 것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실제로 당시 클린턴의 참모들은 조명록 차수의 방미를 김정일 위원장이 자신의 개혁·개방 정책에 회의적인 군부 강경파를 설득하기 위한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했다. 게다가 조명록 차수는 클린턴의 평양 방문을 요청하는 김정일 위원장의 친서와 더불어, 만약 서방이 북한을 위해 민간 인공위성 발사에 협력해준다면, 장거리 미사일을 기꺼이 포기할 의사가 있음을 내비쳤다.
북한의 태도 변화를 감지한 미국은 곧장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을 평양으로 파견했다. 올브라이트를 맞은 김정일은 6시간에 걸친 회담에서 몇가지 중요한 양보안을 내놓았다. 그는 미국이 인공위성 발사를 북한에 제공하는 조건으로 사정거리 300마일 이상의 미사일을 포기하겠다고 제안했다. 또한 김위원장은 미사일 부속품, 기술적 조언, 미사일 거래 중개를 비롯해 모든 미사일 수출을 기꺼이 중단할 용의가 있음을 내비쳤다. 게다가 그는 미사일을 포기하는 대가로 이전까지 요구했던 10억 달러의 현금 대신, 경제난으로 인해 부족한 식량, 석탄, 물품 등 10억 달러 상당의 현물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제안을 내놓았다.
이는 미국이 기대한 수준(장거리 미사일 포기)을 훨씬 뛰어넘는 것으로, 북한의 김정일이 클린턴의 방북이 가져올 국제 사회에서의 엄청난 정치적 효과를 기대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북한은 클린턴의 방북을 그동안의 상호 적대 관계에 종지부를 찍고 국제 사회로 진입할 좋은 기회로 여긴 것이다. 실제로 김정일이 올브라이트에게 내놓은 사정거리 300마일(480km) 안은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에서 DJ가 김정일을 설득시킬 수 있는 마지노선이자, 김정일이 군부 강경파를 설득할 수 있는 마지노선이었다. 더불어 북한이 중국과 같은 개혁·개방 정책으로 선회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사건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검증 문제에 관해서는 진전이 거의 없었다. 김정일 위원장은 미국은 인공위성과 다른 기술적 수단을 통해 북한의 협정 내용 준수 여부를 얼마든지 감시할 수 있으므로 강제적인 조사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북한이 기존에 보유하고 있는 미사일도 큰 쟁점이었다. ‘장거리 미사일 포기’라는 김정일 위원장의 제안은 북한이 기존에 생산해놓은 무기에는 적용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 윌리엄 코언 국방장관과 미 합참의장은 주한 미군과 일본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북한이 보유중인 기존의 미사일까지 폐기하길 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양에서의 회담 분위기는 좋았다. 김정일 위원장은 올브라이트 장관을 거대한 공산주의식 축하연에 초청했다. 축하연장에는 북한의 노동자들이 대포동 미사일 모양의 플래카드를 잡고 있었다. 김위원장은 올브라이트 박사를 향해 이번이 인공위성의 첫 번째 발사이자 마지막이라고 말했다. 이제 남은 건 북한이 보유한 기존의 미사일 폐기와 사찰 문제였다. 그런 까닭에 클린턴 정부는 북미간의 남은 입장 차이를 해소하고, 북미 정상회담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말레이시아의 수도인 쿠알라룸푸르에서 전문가급 회담을 준비했다.
- 미국의 180마일 요구로 무산된 클린턴의 방북
당시 미국은 협상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북측에 두 가지 문서를 전달했다. 하나는 공식적으로 작성돼 정상회담에서 서명할 수 있는 협정 초안이었고, 다른 하나는 북미 양측의 의무를 개략적으로 밝힌 비밀 문건이었다. 그런데 비밀 문건에 담긴 미측의 요구는 김정일이 평양에서 제안한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미국은 북한이 MTCR이 요구하는 500kg 이상의 핵탄두를 장착해 발사할 수 있는 사정거리 180마일 이상의 모든 미사일의 생산·시험·배치를 금지하기를 원했다. 게다가 북한이 보유한 미사일의 수와 유형을 스스로 발표하는 것을 비롯해 검증 규정을 둘 것과, 보유중인 기존 미사일의 폐기도 요구했다. 반면, 북한에 제공할 원조 규모는 정하지도 않고, 1년에 고작 몇백만 달러의 식량 지원만 제공할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
미국 협상단의 이같은 고압적 태도는 북한 협상단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북한 협상단은 김정일 위원장이 평양을 방문한 올브라이트 장관에게 사정거리 300마일이라는 선물을 내놓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미국은 북한이 자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위해 클린턴의 방북을 간절히 바라고 있음을 간파하고, 사정거리 180마일이라는 무리한 요구를 해온 것이다. 사정거리 180마일은 북한의 북경 지대에 배치된 미사일 기지에서 남한에도 못미치는 거리로, 이는 북한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치욕에 가까운 요구였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그들에겐 협상 권한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미국에서는 북측 협상 담당자들이 그들의 최고 결정권자인 김정일 위원장에게 조언을 구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워싱턴은 2000년 11월, 셔먼 대북정책 조정관과 펜타곤, NSC, 국무부 관리들을 평양으로 파견할 계획을 수립했다. 미 관리들에 따르면, 당시 셔먼 대북정책 조정관은 김정일 위원장이 180마일에 동의할 경우 클린턴의 방북 일자를 북측 협상 담당자에게 알려줄 권한이 부여되어 있었고, 클린턴 역시 개략적으로 작성된 합의안에 서명했을 것이라고 한다. 물론 검증 문제와 기타 기술적 쟁점은 추후에 다뤄졌겠지만.
그런데 한반도의 명운을 가를 이처럼 중요한 시기에 전혀 예기치 못한 악재가 발생한다. 2000년 미 대선에서 플로리다 재검표라는 초유의 사태에 직면한 클린턴이 북한에 대한 특사 파견을 미루는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고 만 것이다. 당시 NSC 고문이던 사무엘 버거에 따르면, 클린턴 정부는 잠재적 ‘헌정위기’ 상황에서 대통령이 미국을 떠나는 것이 현명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했다고 한다. 실제로 미국의 정치 비평가들은 클린턴이 대선 결과가 나오기 전에 부시 캠프와 협의할 수 있었지만, 그같은 행위가 대통령 당선을 주장하는 부시에게 정당성을 부여할 위험성 때문에 꺼렸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부시는 다름아닌 클린턴이 누르고 당선된 조지 부시 시니어의 맏아들이었다.
마침내 2000년 12월 중순 미 대선 결과가 발표되자, 대북정책 조정관 셔먼과 백악관의 아시아 전문가인 잭 프리처드는 부시 캠프의 외교 책임자인 콜린 파웰과 콘돌리사 라이스에게 브리핑을 했다. 클린턴의 전임 보좌관에 따르면, 당시 부시 측은 클린턴의 대북 정책을 뒤엎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승계하지도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고 한다. 부시 측의 이같은 태도는 클린턴이 셔먼을 북한에 파견하지 않도록 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는 자신이 공들여온 북한과의 협상을 부시가 지지하지 않거나 이행하지 않을 가능성을 염려했던 것이다. 그 결과 2000년 12월 29일, 마침내 클린턴은 더이상 북한과 회담할 충분한 시간이 없다고 선언함으로써, 안타깝게도 그의 평양 방문은 물건너가고 만다.
- 부시의 MD 전략에 정면 대응한 DJ
한편, 쿠알라룸프르 회담 결과가 알려지면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북한내 군부 강경파로부터 상당한 압박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럴만도 한 것이 1993년 IAEA의 특별사찰 요구와 팀스피리트 재개라는 최악의 상황에서 김주석이 노동 1호의 발사를 통해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였듯이, 김정일은 제네바합의의 이행을 미루는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이기 위해 대포동 1호를 발사했다. 그리고 그가 올브라이트에게 제안한 300마일은 무엇보다 국가 안보와 자존심을 중시하는 북한내 군부 강경파를 어렵게 설득해서 얻은 마지노선이었다. 그럼에도 클린턴 정부는 오히려 이같은 김정일의 의도를 파악하고, 180마일이라는 무리한 요구를 해온 것이다.
하지만 대북 강경론자인 조지 부시에 비하면 클린턴은 양반에 가까웠다. 군산복합체의 강력한 지원을 받아 미국의 제43대 대통령에 당선된 부시는 2001년 1월 20일, 취임하자마자 자신의 본업인 MD(당시 NMD) 세일즈를 자처하고 나섰다. 그런데 MD의 필요성을 역설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가상의 적이 필요했고, 부시는 이를 ‘대포동 1호’라는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 위협으로 몰아 갔다. 그런 까닭에 부시로서는 남·북한과 북·미간의 적절한 긴장 관계가 필요했고, 이는 역사적인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 해밍 무드를 맞고 있던 남북 관계에는 치명적인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새로 출범한 부시 정부와의 한·미 정상회담을 불과 1주일 앞두고, 한·러 정상회담에서 나온 DJ의 AMB 조약 지지 선언은 이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당시 MD 문제로 미국과 치열한 외교전을 벌이던 푸틴 대통령은 2001년 2월 27일, 서울을 방문해 DJ와 한·러 정상회담을 갖는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푸틴은 DJ로부터 뜻밖에 ABM 조약에 대한 지지 선언을 이끌어 내는데 성공한다. 1972년 미·소간에 체결된 ABM 조약은 MD 정책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국제 조약으로, 부시는 이를 개정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던 상황이었다. 실제로 이 사건은 당시 푸틴을 수행 중인던 <뉴욕타임즈>의 러시아 특파원 패트릭 타일러(Patrick E. Tyler)에 의해 다음과 같이 보도되면서 미국 내에서 부시의 무능한 외교 능력을 드러내는 예상치못한 파급 효과를 불러 일으켰다. “방미를 1주일도 남기지 않은 상황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미국이 추진 중인 NMD(MD) 논쟁에서 공개적으로 러시아 편을 들었다”
2001년 3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나온 부시의 “this man” 논쟁과 방미 후 DJ가 보인 외교 정책의 변화는 이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부시는 한·러 정상회담에서 나온 DJ의 AMB 조약 지지 표명을 단순한 외교적 실수가 아닌, 자신이 구상하는 MD 정책에 정면 도전하는 것으로 파악한 것이다. 그것도 자신이 대통령으로 취임한지 불과 한달 여밖에 되지 않는 상황에서. 부시에게 이제 남은 것은 DJ에게 미국의 완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런 까닭에 부시는 2000년 6월 평양에서 있었던 DJ와 김정일의 비밀 협상에 대해 알고자 했고, 사실 이같은 미국의 태도는 6․15 공동선언 직후부터 계속된 것이었다. 2001년 8월, 한반도를 뜨겁게 달군 국정원의 안기부 문건 유출 사건은 이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 방미중 발생한 “this man” 논쟁과 안기부 문건 유출 사건
2001년 7월말, 연합통신에 따르면, 국정원에서 대북 정책의 핵심 요직을 맡고 있는 대북전략국의 종합전략 과장인 안모 씨(40·부이사관)가 CIA 요원인 윤모 씨에게 대북 관련 정보를 제공했으며, 국정원 감찰실에서는 이를 적발해 7월 23일 징계위원회를 열어 파면한 것으로 알려졌다(필자는 개인적으로 신뢰할만한 다른 경로를 통해 대북 관련 정보를 미국에 제공한 인물이 안모 씨가 아닌 다른 인물이라는 정보를 갖고 있다). 하지만 이 사건이 언론의 도마 위에 오르며 한·미 관계의 불신으로까지 비화될 조짐을 보이자, 국정원은 서둘러 유출된 정보가 언론에 보도된 것처럼 그렇게 중요한 정보가 아니라고 해명했다.
그런데 국정원의 이같은 주장은 이후 그들이 보여준 행동과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먼저 국정원이 CIA 요원에게 정보를 누설한 혐의로 직원을 파면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국정원은 이 사건과 관련해 안씨와 접촉한 CIA에 유감을 표명하고 재발방지를 요구했다. 이에 대해 미국은 사건의 당사자인 윤모 씨를 출국시키고 재발방지를 약속함과 더불어, 한국에 파견된 CIA 요원들에게 “국정원 요원과 공식 업무 외에는 접촉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리는 이례적인 조치를 취한다. 한·미 정보기관이 이처럼 서로를 불신하고 접촉불가 지침을 내리는 사태가 벌어진 것은 1977년 코리아 게이트 이후 처음이었다.
그런데 당시 국정원 대북전략국 안모 과장이 한국계 CIA 요원 윤모 씨에게 넘긴 것으로 알려진 대북 관련 문건은 지난 2000년 6월 평양에서 있었던 DJ와 김정일 사이의 비밀 협상 내용으로 핵심적인 사안은 남북한 사이의 ‘평화선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DJ가 방미한지 얼마되지 않은 2001년 3월 14일, 일본 최대 일간지 <요미우리>는 미정보기관의 소식통을 인용해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이 5월에 이루어지며, 이때 남·북한은 평화선언을 발표하기로 합의하고, 이미 수차례에 걸쳐 초안을 작성해 서로 교환해왔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보도했다. <요미우리>의 이같은 보도는 당시 남북협상 관계자들과 국정원 관계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실제로 국정원의 정보 유출 사건으로 출국당한 CIA 요원 윤모씨를 만난 것으로 알려진 워싱턴의 한 소식통은 “평화선언은 평화협정과 달리 휴전 상태가 종전 상태로 바뀌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휴전협정을 아예 휴지조각으로 만들 가능성이 크다”고 언급했다. 다시 말해 2000년 6월, 평양을 방문한 DJ는 현재의 휴전 체제를 종전 체제로 전환해 향후 남북 관계에서 미국이 아닌 남·북 당사자가 협상의 주도권을 갖기로 김정일과 합의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 워싱턴이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을 다급히 서울로 파견한 까닭이자, 김정일 위원장의 리무진에서 남북 정상이 주고받은 밀담 내용에 대해 전세계 언론이 그토록 궁금해 한 이유였다.
그런데 <요미우리>의 보도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정보 출처가 미정보기관의 소식통이라는 점이다. 이는 CIA가 적어도 3월 13일 이전에는 이같은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미국은 DJ의 방미를 앞두고 이미 입수한 안기부 문건을 통해 DJ와 김정일 사이의 비밀 협상 내용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DJ를 거세게 몰아붙였던 것이다. 1997년 대선 과정에서 DJ가 정권을 창출하는데 결정적인 역할(IMF)을 한 미국의 입장을 상기시키며. 사실 이점이야말로 DJ가 미국에 대해 갖고 있는 아킬레스건이었다. 당시 우리 언론에서는 이같은 정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이를 단순한 “this man” 논쟁으로 몰아붙이며 부시 개인의 인격을 문제삼았다. 하지만 문제의 본질은 부시의 무례에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국정원의 정보 유출로 인해 부시 앞에서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 꼴이 되고 만 DJ의 난감하기 짝이 없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 방미 중 DJ가 미 언론과 의회로부터 겪은 ‘수난’
실제로 “this man” 논쟁을 불러 일으킨 부시의 DJ에 대한 무례는 한·미 정상회담부터 시작되었다. 회담 도중 그는 자신의 아버지 뻘(23년차) 되는 DJ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불쑥 끼어들어 자신의 얘기를 꺼냄으로써, 연장자에 대한 예우뿐만 아니라 일국의 대통령에 대한 예우에 있어서도 외교적 결례를 범했다(혹자는 부시가 고이즈미에 대해서도 “this man”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을 근거로 무례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부시와 4살차인 고이즈미와 한세대 차이가 나는 DJ를 동일시할 수는 없다. 그의 아버지에게 그런 말을 사용한다면 몰라도). 하지만 그것은 DJ가 미국에서 겪게 될 수난의 시작에 불과했다. 3월 7일, DJ는 미기업연구소(AEI)와 외교협회(CFR)가 공동 주최한 오찬에 참석해 연설하고 질의 응답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토론회에 참석한 미 언론인과 외교 전문가들은 일국의 지도자에 대한 외교적 관례를 무시한 채 다음과 같이 노골적인 질문을 퍼부으며 DJ의 명확한 입장 표명을 요구한 것이다.
첫 번째 질의자로 나선 조 시스코의 질문은 역시나 방미 직전 한·러 정상회담에서 있었던 DJ의 ABM 조약 지지 선언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노골적으로 “한국은 왜 (미국의 우방임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쪽으로 기울었는가?”라며 다그쳤고, 이에 대해 DJ는 “먼저 논란을 일으키게 한 점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사과해야만 했다. 이어서 DJ는 “그 논란은 한·러 공동성명에 대한 오해와 잘못된 해석에서 나온 것이다. ABM 조약에 대한 언급은 러시아에 대한 지지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NMD(MD) 문제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며 해명하기에 급급해야만 했다.
두 번째 질문은 <뉴욕 타임즈>의 데이비드 생거가 맡았다. 그 역시 “김정일이 서울로 답방하면 김 대통령은 그와 함께 평화선언 하기를 바라는가? 평화선언을 한다면 그 의미는 무엇이라 생각하는가?”라며 노골적으로 DJ를 몰아 붙였다. 이에 대해 DJ는 “서울 평화선언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결정된 것이 없다”며 한발 뒤로 물러선 뒤, 다음과 같이 답변함으로써 성난 미국 조야를 달래야만 했다. “남·북 평화조약 체결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데, 평화조약은 남·북한과 주변 4강(미·중·러·일) 구도에서 체결되어야 한다. 또한 이는 미국과 중국이 전폭적으로 지지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제2차 남북 정상회담에서 평화조약이 체결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본다.”
세 번째 질의자인 빌 거츠는 북한의 미사일을 포함한 대량살상무기(WMD)에 대한 DJ의 입장을 물었다. 이에 대해 DJ는 부시에게 자신이 제안한 포괄적 상호주의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설명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부시 대통령 및 그 측근들과 토론할 때 나는 포괄적 상호주의를 제안했다. 포괄적 상호주의를 적용하는 대상은 세 가지다. 첫째, 제네바 합의의 철저한 준수. 둘째, 북한의 미사일 개발과 수출 중단. 셋째, 북한이 미사일 개발과 수출을 중단하는 대가로 한·미 양국은 북한에 대해 어떤 무력 공격도 하지 않겠다는 확약. 이것이 실행에 옮겨진다면, 한·미 양국은 북한에 대한 경제 지원을 제공한다. 그리고 북한을 국제 무대로 끌어들여, 국제금융 기구로부터 재정을 지원받도록 해주는 것이다”
연이어 DJ는 제시 헬름즈 미상원 외교위원장이 주최한 의원 간담회에 참석했는데, 이 자리에서도 역시 헬름스 상원의원은 회의에 참석한 의원들에게 “자유롭게 질문하라”는 말로 DJ에 대한 공격적인 질문을 유도했다. 아니나 다를까. 의원들은 이 자리에서 거의 청문회를 방불케 할 정도로 DJ에게 질문을 퍼부어댔다. 게다가 토론 중간에 표결하러 간다며 빠져나가 분위기를 어수선하게 만드는 등 일국의 대통령에 대한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무례를 보였다. 실제로 3월 8일, 워싱턴을 떠나기 직전 힐튼 호텔에서 수행원들과 조찬을 함께 하는 자리에서 DJ는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토로했다고 한다. “정상회담을 여러번 해봤지만, 이렇게까지 긴장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청문회도 이런 청문회가 없을 것이다.”
- 방미 이후 DJ의 태도 변화와 임동원 장관의 해임
2001년 3월, 방미 과정에서 미국의 거센 완력을 몸으로 체험한 DJ는 한·미 정상회담 이후,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태도를 취했다. 정상회담을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DJ는 먼저 미국측 요구대로 불과 한달전 자신이 표명한 ABM 조약에 대한 지지를 공식적으로 철회했다. 일국의 대통령으로서 이처럼 굴욕적인 태도는 국제 외교에서 중시되는 국가의 신뢰도에 치명적인 오점이었다. 게다가 DJ는 2000년 12월 북한이 제4차 남북 장관급회담에서 요청한 50만kW 전력지원 문제에 대해 긍정적인 검토를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북·미 협상 과정에서 어려움을 초래할 수 있다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이를 전격적으로 취소하고 만다.
하지만 DJ 역시,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미국에서 돌아온 DJ는 방미 과정에서 워싱턴의 심각한 분위기를 사전에 파악하지 못한 문책성 인사로 이정빈 외무장관과 반기문 차관을 전격 경질했다. 그와 더불어 국정원의 대북 관련 정보 유출에 대해서도 강도 높은 조사를 지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드러난 것이 다름아닌 국정원의 안기부 문건 유출 사건이었다. 당시 국정원이 이례적으로 CIA에 재발 방지를 요구하고, CIA 역시 재발방지 약속과 함께 신속하게 한국계 CIA 요원인 윤모 씨를 출국시킨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2001년 8월,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JP의 임동원 통일원장관 해임 요구도 이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국정원의 정보 유출 파문으로 CIA로부터 재발 방지 약속을 받아내며 다시금 재기에 성공하는 것 같던 DJ는 불과 보름도 안돼, 전혀 예기치 못한 사건에 휘말리고 만다. 2001년 8·15 평양축전 행사에 대한 우리나라 언론의 빨갱이 사냥이 그것이었다. 당시 국내 언론은 8·15 평양 축전에 참석한 몇몇 사람을 사실 확인도 거치지 않고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몰고 갔다. 그리고 이같은 분위기에 편승해 미국에서 돌아온 JP는 DJ와의 공조 파기를 선언하면서까지 임동원 장관의 해임을 요구했다. 그 결과 임동원 장관의 해임과 더불어 정치권은 자연스레 여소야대 정국으로의 돌변했고, 마침내 DJ는 민주당 총재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물론 여기에서 방미 중인 JP가 미국에서 누굴 만났는지, 그리고 그것과 JP의 임동원 장관 해임 요구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앞으로 밝혀져야 할 과제다. 다만 지금 말할 수 있는 것은 당시 미국으로서는 남한의 민간인들이 대거 평양 축전에 참가한 것에 상당히 긴장했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평양 축전에 참가한 상당수의 민간인들은 비록 잠시나마 그곳에서 통일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고, 이같은 남한 민간인들의 집단적인 통일 체험은 자칫 남한 전체를 미국의 통제가 불가능한 한반도 통일 분위기로 몰고갈 위험성이 다분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는 미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기도 하다.
- 에필로그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향후 한반도의 명운을 결정지을 6자회담이 지금까지 지지부진했던 까닭은 1994년 제네바합의 이래 무려 13년간 북미간에 자리잡은 뿌리깊은 상호 불신 때문이었다. 그 불신의 기원은 1994년 7월 8일 새벽에 발생한 김일성 주석의 급작스런 죽음에 대한 북·미 상호간 오해에서 비롯되었다.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은 김주석의 급작스런 사망 배후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있다고 확신했다. 그런 까닭에 김정일 지지 세력과 김일성 지지 세력간의 권력 투쟁으로 북한 정권이 조만간 붕괴될 것으로 기대했다. 이것이 김주석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클린턴이 1994년 10월 21일 제네바 기본합의서에 순순히 서명한 까닭이자, 서명하고서도 무려 4년간이나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까닭이다.
반면, 김주석의 급작스런 서거로 북한 내부의 피말리는 권력 투쟁을 치르면서 김정일 위원장은 무려 4년간에 걸쳐 클린턴 정부의 잔인하리만치 합리적인 미국식 사고를 뼈저리게 경험해야만 했다. 그가 수백만 인민이 기아로 굶어 죽어가는 상황에서조차 장거리 미사일 개발에 매달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시 말해 미국이란 나라는 그 속성상 상응하는 힘을 보유하고 있을 때에만 비로소 협상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절감한 것이다. 특히나 제네바합의 이후 4년간이나 약속 이행을 미루다 대포동 1호가 발사된지 불과 2개월만에 중유를 공급한 미국의 행태는 김정일에게 워싱턴에 대한 자신의 이해가 옳다는 확신을 심어줬다. 전세계의 심각한 우려와 예상되는 미국과 UN의 대북 제재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10월 9일, 북한이 핵실험을 감행한 까닭도 이런 측면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한편, 2000년 6월 남한의 지도자로서는 최초로 평양을 방문한 DJ는 김정일 위원장과 6·15 남북 공동선언을 이끌어 냄으로써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는데 성공했다. 더불어 DJ는 김정일의 서울 답방을 통해 ‘한반도 평화선언’이 선포됨으로써, 분단 반세기만에 외세를 배제한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한 기틀이 완성되기를 간절히 바랬다. 하지만 남·북 정상간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간파한 미국과 일본 등 주변국은 이를 수수방관하지 않았다. 그 결과 지난 반세기에 걸쳐 친미 정권에 익숙하게 길들여진 국정원은 2001년 3월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남북 정상간의 비밀 협상 내용을 미국에 제공함으로써 워싱턴을 방문중인 DJ로 하여금 난감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만들었다. 이게 소위 국가 안보를 위해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한다”는 우리나라 최고 정보 기관의 수준이었다.
어쩌면 1997년 대선에서 IMF의 도움으로 정권을 창출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에 이미 친미 정권의 한계성을 갖고 있던 DJ가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외교 정책을 표방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우리나라에서 미국을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좋든 싫든 언론밖에 없다. 바로 여기에 우리나라 언론에 종사하는 언론인의 사명이 있는 게 아닐까? 한 때, “철학엔 국경이 없지만, 철학자에게는 국경이 있다”는 말이 논쟁의 대상이 된 적이 있다. 하지만 사랑조차 정보를 타고 온다는 오늘날, 적어도 “정보엔 국경이 없지만, 정보를 다루는 언론인에게는 국경이 있다”는 말이 더 이상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은 이제 명백해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 언론인에게 묻는다. “당신의 기자로서의 정체성과 국경은 대체 어디에 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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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은 여기까지...
밑에는 1994년도에 있었던 관련 내용
▲1994년
2월25일 |
김영삼대통령,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김일성 국가 주석과의 정상 회담 제의 |
6월17일 |
김일성 국가주석,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의 평양회담에서 남북 정상 회담에 동의 |
6월18일 |
지미 카터 전 미대통령, 김일성 국가주석의 `정상회담 개최를 위해 언제 어디서나 조건 없이 빠른 시일내에 만나고 싶다`는 응답을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달 |
6월20일 |
이영덕 국무총리, 북한의 강성산 정무원 총리에 남북정상회담 부총리급 예비접촉 제의 |
6월22일 |
북한, 강성산 정무원 총리 명의의 전화통지문에서 남북정상회담 예비 회담 개최에 동의 |
6월28일 |
판문점에서 남북정상회담 개최 절차문제 협의를 위한 부총리급 비공개 예비접촉 갖고 실무절차 합의서 채택 |
7월 1일 |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실무대표 접촉(판문점) |
7월 7일 |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통신실무자 접촉, 평양 체류 기간 중의 통신 문제 협의 |
7월 8일 |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경호실무자 접촉, 평양 체류기간 중의 경호 문제 협의 |
7월 9일 |
북한, 중앙방송을 통해 김일성 국가주석 사망(7.8) 공식 발표, 남북 정상회담 무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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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은 2006.11월에 있었던 러시아 적직스파이 사망사건의 뉴스관련 내용
[한겨레]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비난해온 전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대령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가 23일 밤 영국에서 숨지면서, 서방에서 러시아의 음습한 이미지가 되살아나고 있다.
사망 원인은 희귀 방사성 물질 '폴로늄 210' 중독. 영국 정부는 이 죽음에 연방보안국이 개입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정부 국가비상대책위원회인 '코브라'까지 소집했다. 영국 주재 러시아 대사도 불러 사건 규명에 협조할 것을 촉구했다.
![](http://i2.media.daumcdn.net/photo-media/200611/27/hani/20061127042605.582.0.jpg)
라듐보다 5000배 이상 강력한 알파 방사능을 내뿜는 폴로늄 210은 핵원자로 등에서만 나오고, 추출에 상당한 핵기술이 필요한 탓이다. 더구나 이 물질은 먹거나 신체에 주입하지 않는 한 생명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
의혹의 한가운데 연방보안국이 있다. 이 기구는 옛 소련의 악명 높은 국가보안위원회(KGB)가 해체된 뒤, 1995년 국내 분야를 넘겨받았다. 리트비넨코는 이 조직이 99년 300명의 목숨을 앗아간 모스크바 아파트 폭파 사건의 배후이며, 러시아 부호 보리스 베레조프스키 암살을 지시했다고 폭로했다.
신문과 방송을 뒤덮은 리트비넨코의 죽어가는 모습은 이전의 러시아에 대한 나쁜 인상을 되살려놨다. 그러잖아도 유럽은 러시아가 에너지를 무기화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해 왔다. 이에 러시아 일간 <코메르산트>는 "이번 사건이 푸틴 대통령의 서방 방문을 가려버렸다"고 평가했다. <프라우다>는 "(이 사건이) 러시아에 압력을 가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이고 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의혹을 부른 것은 푸틴 대통령 자신이기도 하다. 그는 전직 국가보안위 출신 대령이자 연방보안국 책임자였다. 2000년 연방보안국 예산을 대폭 증액시킨 것도 그였다. 그는 연방보안국 본부가 있는 루비안카에서 2000년 "지령 1, 권력 완전장악 완수"라고 농담을 할 정도였다. 그의 후계자로 거론되는 세르게이 이바노프 국방장관 역시 국가보안위 출신이다.
지난주에는 전직 국가보안위 간부가 거대 천연가스 회사 가스프롬의 부회장에 임명됐다. 2004년 우크라이나 빅토르 유셴코 대통령 후보가 다이옥신에 중독됐을 때도, 친서방 성향 유셴코의 당선을 막으려던 푸틴 대통령이 배후로 지목됐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24일 "리트비넨코 죽음에 푸틴 대통령이 책임이 있다는 주장이 끝까지 따라다닐 것"이라고 보도했다.
물론, 푸틴 대통령과 연방보안국은 이런 의혹의 눈길을 강하게 뿌리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24일 "불행하게도 그의 죽음이 정치 도발을 위해 이용되고 있다"고 반박했다. 유럽연합(EU) 주재 러시아 대사는 "러시아와 그 지도자의 명예를 더럽히려는 잘 짜인 계획이 진행되는 것 같다"고 주장했다.
<에이피>(AP) 통신 등도 러시아 정보기관이 의심받기 쉬운 폴로늄을 사용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전했다. 런던경찰청은 아직 러시아 연방보안국이 배후라는 증거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푸틴 대통령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한 자살설 및 베레조프스키 배후설 △러시아 정보요원 독자 작전설 △체첸 무장세력과 친분에 따른 제거설이 나돌고 있다. 미스터리는 악몽이 되어 푸틴 대통령을 좀체 떠나지 않을 태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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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4월에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김정일, 김정은 과 면담하기 위해 방북....
그러나 정부 고위 당국자는 "카터 전 대통령이 김 위원장과 대면하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최근의 북미 회담은 2011.12.15~16 중국 베이징에서 로버트 킹 대북인권특사와 리근 미국국장과의 면담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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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과 김정일 둘다 심근경색에 의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발표 하는 군요...
범인은 누구 일 것 같습니까...................................?
저의 둔한 추측으로는 NWO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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