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이야기들

[스크랩] 아일랜드어의 몰락

그리운 오공 2012. 2. 1.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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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잡담
아일랜드어의 몰락...
2009/02/03 오 전 3:58 | 역사적 잡담

아일랜드가 처음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은 1172년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2세 때부터였다. 당시 아일랜드는 노르만의 침략에 무척 시달리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약해진 틈을 타 헨리 2세가 아일랜드를 정복한 것이다. 그러나 아일랜드인 특유의 강인한 기질은 무려 400년간에 걸쳐 잉글랜드인들을 서서히 몰아내고 있었고, 결국 1534년 역시나 헨리 8세에 의해 다시 정복당함으로써 1922년 아일랜드 공화국이 정부가 수립되기까지 긴긴 400년간의 식민통치를 받게 된다.

원래 언어라는 것이 권력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터라, 기본적으로 언어란 지배계급의 언어에 수렴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말만 하더라도 그 근간은 신라어다. 백제의 지배층과 고구려인의 경우는 부여계로서 그 언어가 사뭇 달랐었는데,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병합하면서 이들 지역의 언어 역시 신라의 언어에 수렴되어 지금의 한국어의 근간을 이루게 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완전히 동화된 것은 아니어서 사투리라는 것이 바로 여기서 나오게 되었다. 제주도 사투리의 경우는 지리적인 특성으로 말미암아 그 이질성이 상당히 오래 유지된 경우라 할 수 있다.(제주도 사투리 아무 사전정보 없이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 있다면 내가 밥 사준다.)

마찬가지로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기 시작하면서 피지배민족으로 전락한 아일랜드인들은 필요에 의해서라도 잉글랜드어 - 즉 영어를 배울 필요가 생겼다. 어차피 잉글랜드인들이야 아일랜드어를 모른다고 별 불편할 게 없었지만, 아일랜드인 입장에서는 잉글랜드인 - 혹은 스코틀랜드인과 협상하여 뭔가 얻어내려 한다면 그들의 언어를 모르면 안 되었으니까. 그래서 이미 19세기에 이르면 상당수의 아일랜드인들이 영어를 쓰기 시작하고 있었는데...

그러나 그렇다 해도 당시까지만 해도 특히 농촌 등에서 아일랜드어는 아일랜드인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의 언어로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지식인이나 상공인, 자본가, 정치인 등이야 필요에 의해 영어를 배우더라도 노동자와 농민 등 사회 하층부를 이루는 아일랜드인의 공동체에서는 여전히 아일랜드어가 일상어로서 그 지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아마 그대로 계속되었다면 최소한 수십년은 영어의 영향은 있었을지언정 아일랜드어의 일상어로서의 지위는 유지되고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1845년 아일랜드를 강타한 대기근이었다. 감자잎마름병으로 인해 촉발된 대기근은 무려 110 여 만 명에 이르는 아일랜드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는데, 죽은 사람도 죽은 사람이지만 산 사람도 살기 위해 향촌사회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기에 그로써 아일랜드인의 공동체가 심각하게 해체되기 시작한 때문이었다.

죽은 사람이야 말할 것도 없다. 죽은 사람이 아일랜드어를 쓰겠는가? 죽은 사람은 죽어서 아일랜드어와 함께 죽어갔다. 그리고 산 사람들은 일자리와 먹을 것을 얻으려 도시로 나가 돈과 먹을 것을 움켜쥔 잉글랜드인 자본가와 관리와 소통하기 위해 아일랜드어 대신 영어를 배워야 했다. 더구나 그렇게 죽고 떠나간 사람들이란 대부분 아일랜드어를 쓰던 아일랜드 사회의 하층부를 이루던 아일랜드인 공동체의 구성원이었다. 대기근은 언제나 그렇듯 가장 가난하고 가장 취약한 자에게 더욱 잔혹한 재앙으로 다가온 때문이었다.

1845년 아일랜드어를 쓰는 인구는 대략 400만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아일랜드의 전체 인구는 900만명 정도, 그러나 1852년 대기근이 끝났을 때 아일랜드의 인구는 660만으로 줄어 있었고, 아일랜드어를 사용하는 인구도 200만으로 절반이나 줄어들고 있었다. 대략 240만 정도가 대기근으로 죽거나 아일랜드를 떠난 것인데, 그리고 바로 아일랜드어 사용인구가 200만이 줄어든 것이다. 당시 대기근 상황이 어떠했으며 그것이 아일랜드어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물론 재앙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대기근의 참혹함은 대기근의 희생자 상당수가 아일랜드어 사용자였다는 점과 맞물려 아일랜드어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가난과 기근, 낙후되고 소외된 군상들, 영국인들이 감자를 두고 더럽고 게으르고 부도덕한 식품이라 꺼려했던 이유 그대로, 아일랜드인들이 당했던 그 처참한 상황은 아일랜드어에 대해 그 처참했던 당시의 모습을 이미지로서 덧씌워버린 것이다. 쓰는 사람이 죽거나 떠난 것도 문제지만 그것은 남은 사람들마저 아일랜드어를 꺼리고, 새로이 배우는 사람이 줄어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일단 대세가 그렇게 정해지고 나자 결국에는 기존의 아일랜드어를 쓰던 사람들마저 일상을 위해서라도 영어를 배우고 쓰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으니 아일랜드어의 몰락은 더욱 가속화될 수밖에 없었다. 당장 소작을 지으려 해도 영어를 쓰는 지주를 상대해야 하고, 일자리를 얻으려 해도 영어를 쓰는 고용주를 통해야 하는데, 아일랜드어가 일상어로 통용되던 공동체마저 대부분 죽고 떠나고 해체되거나 약화되고 나니 아일랜드어의 사멸은 이제 하나의 결정된 흐름에 다름 아니었다. 그것은 심지어 아일랜드가 아일랜드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뒤로도 마찬가지였다.

1922년 아일랜드가 마침내 독립했을 때 아일랜드어 사용인구가 전체의 15%정도였다던가? 1852년 660만 가운데 200만이었으니 대략 30% 정도였던 것에서 다시 절반으로 줄어든 것이다. 독립하고 나서도 민족주의적인 의도에서 아일랜드어를 공용어로써 가르치고 보급하려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2004년 현재 아일랜드어를 쓸 줄 아는 인구는 160만 정도로 전체의 40% 정도로, 그나마 매일 쓰는 인구는 35만 정도, 아니 그조차도 과장된 것으로 제 1언어로서 일상에서 쓰는 인구는 8만 정도로 채 2%가 안 된다고 하니 지금에 이르러서는 거의 일상어로서의 지위는 잃었다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렇게 가르치고 보급하려 애를 써도 워낙 쓸 일이 없다 보니 미분적분 잊듯 졸업하고 나면 깡그리 잊어버리고 마는 탓이다. 그래서 정작 유럽연합에서 공식어의 하나로서 인정받은 아일랜드어 - 게일타흐트Gaeltacht는 정작 아일랜드 안에서도 사멸의 과정을 밟고 있는 도중에 있는 것이다.

하긴 이미 1845년에 아일랜드인의 과반수가 영어를 쓰고 있었다. 아마 그대로 계속 이어졌더라도 그 상태대로 영국의 식민지로 남아 있었다면 아일랜드어는 언젠가는 그런 식으로 사멸되었을 것이다. 다른 여러 피지배민족의 언어처럼. 다만 대기근이라는 재앙이 있어 그 과정을 한 순간에 압축해 버렸다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일 것이다. 아니 800년을 넘게 버티고 사멸했으면 그것만으로도 대단하다 해야 할까? 고구려어가 완전히 신라어에 수렴된 것도 그렇게는 안 걸렸으니.

1945년 해방이 되지 않았다면 가정할 때 가장 끔찍한 가정 가운데 하나가 이것이다. 그 상태로 계속 되었다면 지금쯤 조선어 - 한국어는 일본어의 한 방언으로서 아일랜드어와 같이 보호대상으로서 사멸되는 과정을 밟고 있지 않았었을까 하는. 설사 나중에 해방이 되고 독립이 되었어도 오랜 식민지배와 일본정부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말미암아 조선어를 대신해 일본어가 우리의 모국어가 되고, 해방된 조국에서 일본어로서 말하고 사유하고 소통하게 되지는 않았을까? 일본어를 쓰는 조선인이라니...

아무튼 참 기구한 아일랜드어의 운명이라 할 수 있겠다. 800년을 그렇게 버티고 한 순간 감자잎마름병이라는 재앙으로 말미암아 한 순간에 사멸되는 운명을 걷게 되었으니. 침략자의 언어이던 영어로 아일랜드와 아일랜드인과 아일랜드의 역사와 아일랜드어를 말하는 느낌이란 어떤 것일까? 그나마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있었어도 우리의 말과 글을 지켜낸 것만으로도 우리는 정말 대단하다 할 것이다. 역사란 결국 우연과 필연의 반복이라지만... 어쩐지 안쓰러우면서도 뭔가 다행스럽달까? 그렇다. 

출처 : 백두산족 역사
글쓴이 : 관리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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