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뽕 등소평

[스크랩] 5.18광주사태,전두환.그리고 지역감정

그리운 오공 2012. 2. 8. 21:37

5.18광주사태, 전두환, 그리고 지역감정
5.18 광주사태 발생 5년이 지난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당시 전두환이 총재였던 민정당이 전라도 유권자들로부터 다른 당보다 훨씬 많은 지지를 얻었다. 이는 두 가지를 시사해 준다. 하나는 5.18 광주사태가 전두환과 관련이 없다는 확실한 증거이고, 또 하나는 지역감정이 크게 문제화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12대국회의원총선거 / 1985. 02. 12>

그로부터 2년 뒤인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사상 최초로 전라도 몰표가 등장했다. 김대중은 당시 야권의 대권후보 단일화 협상을 깨고 정통 야당인 민주당에서 전라도 정치인들을 이끌고 탈당해 버렸다. 그리고는 평민당을 창당하고 독자 출마를 선언했다. 그의 계산은 경상도 표는 노태우와 김영삼이 갈라먹고, 충청도 표는 김종필이 가져가고 전라도 표는 자기가 싹쓸이 하면 당선될 수 있다는 이른바 "4자필승론"이었다. "4자필승론" 이 결국 망국의 지역감정에 불을 지른 불쏘시개였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물론 경상도 몰표도 등장했지만 전라도처럼 심하지는 않았고, 그 원인 또한 김대중에 의한 지역감정 선동의 반사적 영향이었으며 그의 계산대로 노태우와 김영삼이 갈라 먹은 것이다.




<제13대대통령선거 / 1987. 12. 16>

검찰조사에서도 명백히 드러나 있지만 위 선거 결과에서 나타나듯 당시 전라도 민심에 비추어봐도 전두환이 광주학살의 원흉이라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는 억지주장이다. 5.18 광주사태후 이에 동조한 전라인들은 자신들이 사태 가담자인 이른바 폭도의 가족이나 친지라는 사실을 숨기고 살았다. 그러다가 김영삼이 대통령에 올라 특별법을 만들어 5.18 폭동을 민주화 운동으로 둔갑시키며 이를 합리화 하가 위해 희생물을 찾은게 바로 전두환이었다. 비겁한 김영삼이 자신은 수십년 정치자금을 주물러 왔으면서 전두환 노태우의 정치비자금을 폭로시키는 방법으로 의도적으로 민심의 분노를 폭발시키고는 12.12 사태를 내란으로 몰고, 5.18 사태까지 뒤집어 씌우려 했던 것이다.

5.18폭동이 일어났던 당시 전두환은 별 두개인 육군 소장(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의 합동수사본부장)에 불과했다. 대통령 최규화, 국무총리 신현확,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정승화, 전남북계엄분소장 육군중장 소준열, 진압책임자는 지역육군사단장인 정웅소장이었다. 이렇듯 어디를 어떻게 들여다 봐도 전두환이 5.18 광주사태에 연루된 흔적이나 정황을 찾을수가 없는 것이다. 대법원 판결에서도 그렇게 난 것이다. 그런데 김영삼이 이것저것 엮어서 전두환을 재물로 삼아 몽땅 뒤집어 씌우고는 자신의 정치적 화풀이를 했다. 이에 전라인들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면서 이를 기정사실화 하기 위해 지금까지도 낙인 찍기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5.18 사태를 전두환에게 뒤집어 씌우기전까지는 전라도 민심이 전두환에게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지금도 나이 많고 양심적인 전라인들 중에는 "전두환이 잘했다"는 사람들 더러 있다.

아래는 1995년 11월 25일 발 연합뉴스 보도 중 일부다.

「검찰은 지난해(1994년) 5월 13일 광주민주화운동연합 상임의장 정동년씨 등 광주지역 피해당사자 3백22명이 전두환, 노태우 전대통령등 35명을 내란및 내란목적 살인혐의로 고소한 이후 최종수사발표까지 고소고발인 18명과 피고소고발인 58명을 비롯,참고인 등 모두 2백69명에 대한 소환 또는 서면조사를 벌였었다.

검찰수사과정에서 고소인과 피고인측이 팽팽히 맞섰던 주장과 이에 대한 검찰의 수사결론을 쟁점별로 보면 5.18이후 일련의 사건의 사전모의 주장에 대해 검찰은 "집권시나리오는 발견하지 못했다"며 "따라서 정권탈취를 위한 사전모의가 있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또 지난 80년 5월 21일 전남도청앞에서 있었던 계엄군의 집단발포는 신군부측의 발포명령이었다는 고소인측의 주장에 대해서는 "계엄군의 탄약관리에 상당한 문제점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집단발포는 자위권차원에서 이뤄진 것으로 확인됐다"는 것이 검찰의 최종결론이었다.(그리고 여기서 계엄군은 전두환과는 상관이 없음)」

이렇게 하여 5.18 광주사태 진압에 대해서 전두환이 책임없음을 분명히 하고 검찰이 불기소 처분 한 사건을 김영삼이 역사 바로세우기란 해괴한 발상으로 국회를 동원하여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1995. 12. 21)"과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1997. 12. 17)"을 만들어 폭동을 국가유공 운동으로 둔갑시키고는 검찰에서 불기소 처분된 사건을 이렇듯 특별법까지 만들어 억지 기소를 한 것이다. 이러한 억지 정치재판을 벌였으나 최종심인 대법원에서도 1997년 4월 17일, 12.12사태는 유죄로 인정하였으나 5.18 사태는 전두환과 상관없는 일로 선고한 것이다. 그럼에도 전두환이 "광주학살의 원흉"이란 억지는 지금도 진실인양 회자되고 있다.

그야말로 거짓이 판 치는 나라다.

덧붙임)
음지에서 서식하던 좌익들이 양지로 올라와 지금처럼 번성하게 된 계기는 김영삼이 5.18 폭동을 민주화운동으로 둔갑시킨 데 있고, 지역감정이 망국의 현상으로 문제화 된 배경에는 김대중의 정치야망을 이루고자 고안해낸 "4자필승(四者必勝) 전략"이 있다. 이 두 정치건달과 사기꾼이 결국 대한민국을 지금 이 난장판으로 만든 장본인들이다.
기사입력시간 : 2012년 02월03일 [10:52] ⓒ 올인코리아

출처 : 오공사랑
글쓴이 : 백담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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