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와 나찌에 대한 왜곡

만슈타인 ( 펌 )

그리운 오공 2012. 6. 1. 16:52

Erich von Manstein (1887~1973)

 

독일육군원수.

베를린 출생. 1906년 제2근위연대에 들어가 제1차대전때에는 대위로 참전. 1939년 남방군집단 참모장으로 폴란드침공에 참가한데 이어 40년에는 제38구난 사령관을 맡아 프랑스에 진격, 세느강을 도하했다. 이때에는 구데리안과 같이 총통을 설득하여 아르덴느 숲을 관통하는 작전을 제안하여 주목을 받았다. 41년 소련침공때에는 기갑부대를 지휘했으며 9월에 제2군 사령관이 되었다. 42년에는 크리미아반도의 첨단도시인 세바스토폴을 함락시키고 이 공적으로 일약 원수로 승진하였다. 같은해 12월 스탈린그라드 공략전에서는 포위된 제6군을 구출하기위해 히틀러의 긴급명령을 받고 스탈린그라드로 돌진했으나 강력한 소련군의 포위망을 끝내 돌파하지 못했다. 이때 우군 구출의 불가능한 전황을 역설하고 철수하겠다고 주장하다가 44년 3월 해임당했다. 1945년 영국군의 포로가 되었다.

 

지인들에 따르면 만슈타인은 사령관으로서 매우 유능한 사람이지만 보신을 중요시하는 경향을 보일때가 많으며 스탈린그라드에서 제6군을 구출하는 작전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있기 때문에 시간만 끌며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했다고 하는 평도 존재한다.

 

또한 자신에게도 사실 유태인의 피가 흐르고있다고 믿을만한 측근에게 털어놓았다는 일담도 있다.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1887년 11월 24일 대대로 군인을 배출한 프로이센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에두아르트 폰 레빈스키(1829년 ~ 1906년)도 독일 제국의 군인으로서 포병대장으로 퇴역하였다. 이런 가정환경속에 만슈타인은 어릴적부터 직업군인의 길을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원래 이름은 프리츠 에리히 폰 레빈스키였으나 어머니 헬레네 폰 슈베린크(1847~1910)의 누이 헤드비히 폰 슈베린크가 게오르그 폰 만슈타인 중장과 결혼했으나 슬하에 자식이 없어 그녀에게 에리히 폰 레빈스키가 태어나면 양자로 달라고 해서 양자로 보내지게 되었다. 그래서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폰 레빈스키-폰 만슈타인이라는 양쪽의 성을 갖게 되었다.

 

 

부친이 프로이센의 장군이었으며, 그전에 2명의 조부도 장군이었다. 어머니측의 숙부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혼인 관계에 있었다. 만슈타인은 이미 태어날때부터 출세가 보장되었던 것이다. 만슈타인은 당시 독일제국령이었던 프랑스의 슈트라스부르크의 중학교를 1894년에 입학해 1900년 프로엔과 그로스 리히터펠데(베를린)의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1906년 3월 3근위보병연대에 사관후보생으로 입대하여 1907년 1월 소위에 임명되었다. 사관학교시절 빌헬름 황태자의 결혼식에 참석하여 러시아 황녀의 시중을 들기도 했다.

 

여기서 만슈타인은 뛰어난 상관의 참모로 일하게 되었다. 그 상관의 이름은 폰 로스베르크장군이었다. 1917년 새로운 종심방어진형을 제출한 인물이었다. 만슈타인에게는 아주 즐거운 경험이었다고 한다. 만슈타인은 참모를 경험한 후 1913년 10월 베를린의 육군 대학에 입학했다. 동기생으로는 독일 기갑사단을 육성했던 하인츠 구데리안이 있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예비근위연대의 연대부관이 되어 출정하여, 그후 참모장교로 근무했다. 처음에는 서부전선에 있다가 후에 동부 전선에 종군하게 되었고, 1914년 11월에 폴란드에서 중상을 입었다. 1915년 5월 1군 사령부의 연락장교로 복귀하고, 다시 2군 사령부 참모장교가 되었다. 여름의 폴란드 북부공세, 가을부터 다음해까지 이어진 세르비아 전투에도 참가했었다.

 

1916년 서부전선의 베르됭 전투와 솜므 전투에 참가했다. 1917년 봄의 에느 강 전투에 참가후 가을에 4기병사단 사령부의 작전주임참모가 되었고, 다음 해 서부 전선에 돌아와 213보병사단 작전주임참모로 여름 공세에 참가했다가 종전을 맞이했다.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후 다수의 직업군인이 실직하는 동안 만슈타인은 다행히 군에 남을 수 있었다. 대폭 축소된 국방군속에서 직업군인으로서 승진을 거듭한 만슈타인은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당이 대두하여 독일의 재군비를 진행한 1935년 7월 육군참모본부 제1과장에 임명되어 작전부분의 책임자가 되었다. 만슈타인은 이곳에서 능력을 발휘해 서서히 두각을 나타냈다. 1936년 보병소장으로 승진해 육군참모본부 제1참모차장이 되었다. 하지만 상관인 베르너 폰 프리치 상급대장의 스캔들 사건의 여파로 슐레스비히에 있던 제18보병사단장으로 좌천되었다. 그의 딸은 '아버지는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를 존경했으나 괴로움에 베를린의 저택을 처분했다.'고 회상했다

 

1939년 9월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마자 남부집단군 사령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상급대장의 곁에서 집단군 참모장으로서 폴란드 침공작전에서 활약하기 시작했다. 폴란드 전역이 독일의 승리로 종결된 후 만슈타인은 룬트슈테트 휘하에 있다가 서부전선으로 옮겼다. 독일 참모본부는 1940년 프랑스 침공을 위해 제1차 세계 대전의 슐리펜 계획을 답습한 작전안을 작성하자, 만슈타인은 이 작전의 문제점을 간파하고 대신 기갑전력에 의한 돌파를 기본으로 한 작전안을 제출했다.

 

 

만슈타인의 작전안은 대다수 독일 장군 뿐만 아니라 참모본부 상층부에서 거부하여, 결국 만슈타인은 동부전선으로 좌천되게 되었다.

 

이 때 우연찮게 만슈타인이 이 작전안을 알게 된 히틀러는 만슈타인의 작전안에 제시된 지역인 스당에 집중하게 되었다. 스당은 1870년 보불전쟁 때 거의 완벽한 3면포위가 이루어진 곳이고, 1차 대전때도 히틀러 그 자신이 병으로 돌파했던 지역이었다. 그는 작전의 핵심을 알기보다는 자신의 취향에 맞아보이는 이 작전안을 한번 들어보자는 심정에, 곧 자신에게 신고하고 동부전선으로 만슈타인 전출되어갈 때, 만슈타인으로부터 이 작전에 대해 물어나 보기로 한다. 이때 만슈타인은 훗날 지헬슈니트라 불리는 이 작전을 히틀러 마음에 심었고, 감명받은 히틀러는 이 작전을 정식 채용한다. 무엇보다 만슈타인은 작전 개시 이전에 서부 전선의 부대에서 구데리안과 지속적인 접촉을 하고 있어서, 자신이 작성한 작전계획이 실행으로 옮겨질 수 있는 가장 든든한 동지와 히틀러를 설득시키고, 일정 수준 참모본부 중 일부 장군들의 이해를 구할 수 있었다.

 

 

자신의 작전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단, 12군에 의한 제2차 지헬슈니트를 위한 남부 프랑스 타격에는 한계) 서부전역에서 만슈타인은 스당에서 결정적인 돌파가 이루어진 다음 전선에 복귀하여, 38보병군단장으로서 1940년 5월에 시작한 서쪽으로 진격에서도 급진격했던에르빈 롬멜의 7 기갑사단에 근접해서 보병을 전진시키는 훌륭한 전투를 지휘해 보였다. 실전지휘관으로서 만슈타인의 뛰어난 능력을 히틀러가 인정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독소전쟁 바르바로사 작전

 

1941년 6월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와 더불어 만슈타인은 북부집단군의 56기갑군단장으로서 공격의 선두에 섰다. 이리메니 강변의 전투에서 전차에 의한 기습으로 전공을 세워 전장에서도 그 진가를 발휘했다. 이 전쟁은 장기화되면 독일에게 불리하다는것을 확신한 만슈타인은 휘하의 기갑군단을 한순간도 쉬게 하지 않고 전진시켰다.

KV-1 중전차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소련 전차부대가 전선에 나타나 독일군에게 반격을 가했다.만슈타인은 Flak18 88mm 대공포의 수평사격과 기동력이 우세한 아군 전차 집단에 의한 포위사격을 명령했다. 이에 더해서 보병의 육탄공격과 합쳐 싸운 결과 만슈타인의 부대는 29대의 KV-1을 합해 전차 200대를 격파하고 소련군의 방위선을 돌파했다. 정신부대가 퇴각하는 소련군을 쫓아넘어간 도비나강에 있던 교량을 확보한 후에 계속해서 만슈타인의 본대가 도하하여 맞은편 교두보를 확보하는것에 성공한다.

 

세바스토폴 포위전

만슈타인은 이미 포위한 레닌그라드에 돌입하려고 했으나, 히틀러는 전선정리를 해야한다는 이유로 정지를 명령했다. 만슈타인의 부대는 6일간 다리에 묶여있게 되었다. 1941년 9월 만슈타인은 남부집단군 11군 사령관으로 전출하여 크리미아 반도의 세바스토폴 공방전을 지휘했다. 이 전장에서 소련군이 독일군 배후에 역으로 상륙하여 일시적으로 고전을 면치못했으나 만슈타인은 전선을 일단 축소하여 전력을 집중시킨뒤 반격으로 전환해 이것을 일거에 격멸시키는것에 성공해 뛰어난 전술능력을 보여주었다. 견고한 요새를 공격하기 위해 각 방면군에서 80cm 열차포 구스타프를 포함한 1,300문의 화포를 모두 모아 집중사격을 퍼부어 요새의 방어망을 분쇄해서 소련 해군이 흑해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기지를 점령했다.

 

1942년 7월 만슈타인은 원수로 승진하고 히틀러의 신임을 얻었다. 그러는 동안 쾌조의 출발을 보이던 바르바로사 작전도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해 겨울에 이르러 모스크바 바로 앞에서 진흙탕에 빠진듯 공세는 둔화되었다. 침공작전이 교착상태가 된 책임을 묻게되면서 육군최고사령관이었던 블라우히취 장군이 사임하자, 히틀러는 만슈타인을 후임 육군최고사령관으로 앉힐것을 생각했다. 그 당시 독일 젊은장군들은 만슈타인의 육군최고사령관 취임을 바라고 있으나 히틀러는 강직한 만슈타인을 끝내 취임시키지 않았다.

겨울천둥작전과 제3차 하르코프 전투

1942년 8월 레닌그라드 공방전을 지휘한 만슈타인은 공략에는 실패했으나 소련의 1개 야전군을 괴멸시키는 데 성공했다. 북부에서 전투가 지속되는 도중에 만슈타인은 급히 편성된 돈집단군 사령관으로 전출되었다. 이번 임무는 스탈린그라드에서 소련군에 포위된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대장(후에 원수)의 6군 구출작전이었다. 호트의 제 4기갑군을 선두로하는 이 구출작전은 시기를 잃어 버린데다가 투입된 병력도 부족했기 때문에 짧은 기회가 있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독일 6군은 괴멸되고 파울루스는 소련군에게 항복해 포로가 되었다. 그때까지 이어지던 독일의 무적신화가 무너지게 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만약에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대장(후에 원수)가 현지사수라는 히틀러의 명령을 금과옥조로 여기지 않고 돈집단군과 연결을 시도했다면 탈출이 가능했을 것이다.

 

 

스탈린그라드을 탈환한 소련군은 압도적인 대병력으로 반격에 나섰다. 동부 전선의 독일군은 완전히 무너질 위기에 빠졌다. 이때 만슈타인의 전략가로서 진가가 유감없이 발휘되었던 시기가 이때였다. 만슈타인의 지휘로 독일군은 눈이 번쩍뜨일 정도의 적극적인 기동 방어로 전환해 승승장구하던 소련군을 전선에서 상당히 먼 후방까지 몰아내어 1943년 3월 한번 빼앗겼던 하리코프를 소련군의 손에서 탈환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마치 그림을 그린듯한 공세 방어의 표본을 보여주었다.

 

쿠르스크 전투

만슈타인의 교묘한 작전은 동부 전선의 독일군을 붕괴위기에서 구해주었다. 이때쯤 급히 만들어졌던 돈 집단군이 스탈린그라드와 코카서스에서 패주한 부대를 포함해 남방집단군으로 개편되어 만슈타인 자신도 집단군사령관으로 승진했다. 하리코프를 탈환한 독일군의 전선에 1곳 소련군의 전선이 돌출된 부분이 있었다. 히틀러는 이 돌출부에 포진한 소련군을 남북에서 협공하여 격멸시킨다는 "성채작전"(독일어:Unternehmen Zitadelle)을 계획한다.


작전계획의 존재는 이미 소련측 첩보기관에 의해 이미 알려졌으나, 독일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만슈타인은 이 작전에 대해 군사적측면에서 보더라도 별 이익이 없다고 판단했다. 쿠르스크 공격에서 좌우 협공부분을 맡고 있던 만슈타인과 클루게 장군은 "독일군의 현 상황에서는 소련군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어도 우리쪽에서 대규모 공세에 나설 전력적 여유는 없다"라는 점에서 의견일치를 보여 이 상황을 토대로 만슈타인은 2가지의 작전안을 히틀러에게 제시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만슈타인의 작전안을 무시하고, 1943년 5월초에 공격에 나서 쿠르스크 돌출부를 협공한다는 안건을 채택했으나, 여기서 또 히틀러가 작전에 간섭해 만슈타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전력을 갖춘다는 이유로 작전개시를 7월까지 연기했다. 그 결과 독일군의 전력은 상당한 정도로 증강했으나 소련측의 병력은 그것을 상회할 정도로 증가하였고, 더해서 독일군 작전의도를 모두 알아차린 소련군은 대규모의 종심진지를 강화하는 시간적인 여유까지 얻게 되었다.

 

쿠르스크전선에서 작전 중인 그로스도이칠란트 기갑척탄병사단

 

4일 개시한 쿠르스크 전투는 완벽한 방어선을 구축한 소련군에 의해 공격은 실패하고 말았고, 7월 13일 히틀러는 만슈타인과 귄터 폰 클루게를 불러 작전중지 명령을 내렸다. 쿠르스크 전투의 패전이후, 독일군은 동부전선에서 후퇴를 거듭했다. 만슈타인이 이끄는 독일군은 폴란드 국경까지 한걸음, 한걸음 교묘한 후퇴작전을 개시했다.

 

만슈타인은 히틀러에게 서서히 후퇴하기보다는 일단 크게 후퇴하여 소련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전선을 정리, 축소한 뒤 병력을 재편성하는것이 유리하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사고가 경직된 히틀러는 이 제안을 거부했다. 노여움을 사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는 만슈타인은 완강하게 자신의 제안을 주장했으나 히틀러는 크게 화내고 그를 사령관직에서 해임시켰다. 사실상 만슈타인은 지휘권을 잃어버렸고, 후임 지휘관으로 발터 모델 장군이 임명되었다.

 

오토 모리츠 발터 모델(1891.1.24~1945.4.21)

 
퇴역과 전후생활

1944년 3월을 끝으로 만슈타인은 일선에서 물러났다. 히틀러 정권의 전복 계획에 참가할것을 타진받았으나 참여하지는 않았다. 그때 만슈타인은 "프로이센 원수는 반역하지 않는다"란 유명한 말을 했다. 1945년 5월 히틀러 자살이후 총통으로 지명된 카를 되니츠 제독은 그를 재기용하려 했으나 연락이 되지 않아 성사되지 못했다. 종전 후 영국군에게 체포되었다. 소련은 신병을 인도 받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실패하고 그는 결국 뉘른베르크 재판에 서게 된다.영국 군사법정은 1949년에 금고형 18년형을 선고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4년후 석방되었다. 그후 만슈타인은 새로 탄생한 독일 연방군의 창설에 주력하여 당시 서독 정부의 국가방어위원회의 고문역을 맡았다. 만년에 전쟁터에서 사망한 아들 게로의 기억에 애착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자녀로는 뢰데게르 폰 만슈타인,기셀라 린겐탈이 있다. 1973년 회고록 《잃어버린 승리》(원제:독일어: Verlorene Siege)를 남기고 6월 10일 향년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escia&logNo=70100562389

'히틀러와 나찌에 대한 왜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히틀러의 몰락과 만슈타인  (0) 2012.06.01
만슈타인 ( 펌 )   (0) 2012.06.01
[스크랩] 아돌프 히틀러  (0) 2012.06.01
레옹 디그렐 ( 펌 )   (0) 2012.06.01
레옹 디그렐 ( 펌 )   (0) 2012.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