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프로이센 귀족 가문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 에리히 폰 르윈스키(Fritz Erich von Lewinski)는 프로이센의 포병대장이었고, 어머니 헬레나 폰 슈펠링(Helene von Sperling)도 군인 가문 출신이었다. 군인 가문에서 자라난 만슈타인도 자연스럽게 직업군인을 길을 걷게 된다.
그는 1906년 제3 근위보병연대 소위를 시작으로 1차 세계대전 에 참전하여 유명한 베르덩(Verdun)전투와 캄파뉴(Champagne)전투에 참가하고, 동부 전선에서는 북폴란드, 세르비아, 에스토니아에서 복무했다. 폴란드에서 심각한 부상을 얻은 이후에는 종전까지 참모장교(staff officer)로 근무한다.
1차대전 종전 후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독일은 10만명 규모로 축소되어야 했으나 만슈타인은 군에 남을 수 있었다.
바이마르(Weimar)공화국 육군에서, 1920년에 중대장(company commander)이 되고, 1922년에 대대장(battalion commander)으로 임명되고, 1927년에 소령으로 승진된다.
1933년 NSDAP가 정권을 잡은 이후, 독일 육군 최고사령부(Army High Command:OKH) 참모본부(參謀本部) 내 작전국장으로 임명된다. 작전국장 재임 시절 그는 독일의 재군비(再軍備) 업무를 담당했고. 특히 2차 대전중 톡톡히 효과를 입증하는 돌격포(Sturmgeschütz)의 개발에 깊숙히 관여하게 된다.
Karl Rudolf Gerd von Rundstedt
- 아르덴 돌파 -
1939년 폴란드 침공을 준비하던 국방군은, 만슈타인을 남부집단군(Heeresgruppe Sued) 사령관인 룬트슈타트의 참모장으로 임명한다. 그는 남부집단군의 기갑부대를 집중 운용하여 폴란드 방어방을 돌파하고 비스툴라 강 서쪽으로 풀란드군을 포위 섬멸하는 작전을 수립한다.
결과적으로 폴란드 침공은 새로 선보인 독일의 전격전에 힘입어 대 성공을 거두게된다. 폴란드 점령에 성공하자 프랑스와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이제 독일은 세계대전 속으로 빠져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유럽 대륙 최강국 프랑스'와 '세계 최강국 영국'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독일의 부담은 엄청난 것이었고, 독일의 서유럽 침공은 그야말로 도박(gamble)이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1939년 10월 프랑스 침공을 위한 작전수립을 지시한다.
서유럽침공 작전은 당시 육군 참모총장 프란츠 할더(Franz Halder)장군 주도로 OKH(Army High Command: 육군 최고사령부)에서 수립되었는데 그 작전이라는 것이 일명 슐리펜 계획(Schlieffen Plan)이라고 잘 알려진 1차세계대전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슐리펜 장군이 수립한 작전과 거의 유사한 것이었다.
Schlieffen Plan
슐리펜 계획은 독일군을 크게 셋으로 나눠 전선 남쪽 프랑스 국경과 벨기에 남부지방에 소수의 병력으로 적을 공격하는 척하면서, 주력병력을 벨기에 북부지방에 집중 배치하여 북쪽에서 남쪽으로 낫질하듯이 적을 포위하여 섬멸한다는 계획이었으나 결국 실패했다.
할더 장군의 계획은 황색작전(Fall Gelb)이라고 이름지어졌는데, 슐리펜 계획의 복사판이라 이미 적군도 미리 대비했을 것이라는 것과, 병력활용도 면에서도 비효율적이라는 이유로 반대가 심했다. 만슈타인 또한 당시 많은 젊은 장교들처럼 이 작전을 반대했다.
그러나 OKH의 노련(老鍊)한 장성(將星)들은 대부분 1차 세계대전 당시 부대 지휘관으로 참전했던 경험이 있어 실패한 슐리펜 계획에 대한 미련이 있었고, 폴란드 침공 당시 그 진가를 발휘했던 구데리안(Heinz Guderian) 장군이 개발한 전격전(blitzkrieg) 개념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인해 시대에 뒤떨어진 1차대전 방식의 전쟁계획을 고집했던 것이다.
만슈타인은 군사전략에 대한 깊은 성찰(省察), 대담(大膽)함, 직관력(直觀力) 그리고 아무나 따라할 수 없는 역발상(逆發想)의 혁신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자신 만에 작전계획을 홀로 수립하게 된다. 독일이 맞대고 있는 서부전선(West flont) 은 북쪽으로는 영국, 벨기에, 프랑스 등 강력한 연합군의 방어선이 있었고, 중앙에는 아르덴 구릉지대(Ardennes高地), 그 남쪽에는 프랑스의 마지노선이 있었다.
그는 벨기에 방면과 마지노 방어선은 최소한의 병력으로 공격하되, 주전력(主戰力)은 중앙의 아르덴 숲을 과감히 통과하여 적의 허점을 파고들어가는 계획을 수립했다. 이른바 낫질(Sickel schnitt)이었다. 이 주장은 기존의 슐리펜 계획이나 황색작전과는 정반대의 계획이었고 누구도 예상치 못 했던 혁신적인 생각이었다.
프랑스군 수뇌부는 독일이 침공해 온다면 1차대전 때와 마찬가지로 틀림 없이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경유해 크게 반원을 그리며 북프랑스로 공격해 올 것이라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1 번 화살표)
이를 막기 위해 프랑스는 북부에 주력을 대거 배치하게 된다.(2번 화살표)
그러나 만슈타인의 계획을 따른다면, 먼저 프랑스의 예상대로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기습 공격해, 프랑스로 하여금 자신의 예상이 적중했다고 안심하게 만든후, 예상 못한 방향인 아르덴느 삼림지대를 뚫고, 주력 기갑부대를 집중시켜 프랑스를 단시간내 반으로 잘라 버린다는 것이다.
결국 북프랑스에 밀집하여 포위된 연합군의 대규모 병력은 섬멸될 수밖에 없다. 어마어마한 작전이 아닐 수 없다. 그 작전계획 "낫질작전"이라는 말에서도 알수 있듯, 이들은 마치 수확기의 벼를 그 밑둥에서 낫으로 잘라, 그 아래 작은 뿌리 부분(프랑스 남부)은 남겨두더라도, 그 윗쪽에 열린 풍성한 곡물(연합국의 주력부대)을 손쉽게 취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래쪽에 있는 것들은 보너스로 줍는 이삭에 불과하다.
어쨌든 만슈타인의 작전계획을 승인받으려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첫째 당시 기갑부대가 울창한 아르덴 숲속을 헤집고 나갈 수 있느냐 하는 기술적인 문제와
둘째, 야전군 참모장에 불과한 자신이 최고사령부의 참모들과 참모총장을 설득시켜야 한다는 문제였다.
첫 번째 문제는 당시 기갑부대 운용의 최고 전문가로 꼽히던 하인츠 구데리안(Heinz Guderian) 장군으로부터 가능하다는 대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두 번째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계획을 육군 참모총장 프란츠 할더(Franz Halder)장군에게 보고했으나 허무맹랑한 계획이라고 채택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여러 참모들에게 자신의 작성한 계획의 정당성을 설득시키려 했고 이에 화가난 할더 장군은 그를 집단군 참모장에서 후방 보병군단장으로 전출 시켜버린다.
더 이상 작전계획수립에 관여할 수도 접근할 수도 없게 된 만슈타인은 한 가지 묘안을 내게 되는데....
서부유럽 침공시 후방을 담당할 예비사단들에 대한 방어계획 설명을 위한 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히틀러의 수석부관에게 회의를 마친 후 히틀러와의 독대를 부탁한다. 다행이 그 부관은 예전에 만슈타인과 같은 부대에서 근무했던 장교로 비교적 친분이 있는 사이였고 그의 중재로 1940년 2월 17일 히틀러와의 운명적 만남이 성사된다.
단 30분정도의 시간을 허락받은 만슈타인은 작전계획서와 지도를 들고 히틀러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고 두 사람의 대화는 30분을 지나 몇 시간에 걸쳐 진행된다. 서유럽 침공 작전이 혹시나 1차대전에서와 같이 전선에 고착되어 패전하지 않을까 내심 걱정하던 히틀러는 그의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생각을 지지하게 되고 OKH (Army High Command: 육군 최고사령부)의 참모들과의 격론 끝에 당초 계획을 대대적으로 수정한 만슈타인 계획을 프랑스 침공계획 최종안으로 확정하게 된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1차대전 당시 4년여 동안 수백만명의 병력을 희생하고도 달성하지 못했던 서부전선 돌파와 프랑스 점령을 단 4주만에 이뤄낸 것이다.
서부 프랑스 침공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나가던 시기 이 작전이 한사람에 머리에서 나온 것이고 그 사람이 바로 만슈타인이라는 소문이 모든 전방부대와 후방에 퍼지게 되면서 그는 유명인사가 된다. 그는 육군 38군단을 이끌고 독일육군 중 최초로 센강을 도하하여 파리로 돌진하여 들어갔고, 이 공로로 중장으로 진급하게 된다. 만슈타인은 유능한 참모뿐만 아니라 뛰어난 전략적 안목을 가진 야전지휘관으로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1941년 6월 22일, 바바로사 작전(Operation Barbarossa)의 시작
- 독소전 -
독일의 소련침공이 시작되자 만슈타인은 레브 원수가 지휘하는 북부집단군 소속 56기갑군단장(56th Panzer Corps)으로 참전하여, 레닌그라드를 향하여 부대를 진격시킨다. 만슈타인은 제8기갑사단, 제3차량화 보병사단, 제290보병사단을 거느리고 개전 후 4일 만에 무려 320km를 돌파하는 대 전과를 세운다.
전쟁 초반기 소련의 전쟁대비 상태나 독일군과의 질적 능력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당시 그가 보여준 돌파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만슈타인은 1941년 9월 대장으로 진급하여 룬트슈테트가 지휘하는 남부집단군 예하 제11군 사령관에 임명된다. 히틀러는 겨울을 무사히 보내고 봄이 다가오면 독일의 주력을 소련의 남부지방에 집중시켜 카프카즈 지역의 유전과 자원을 획득하고자 했다.
독일과 소련의 전쟁기간 중 가장 치열하면서도 결정적이었던 곳이 바로 소련 남부지역에서 벌어진다. 공포의 세바스토플 봉쇄와 점령, 비극적인 스탈린그라드 공방전, 역사상 가장 거대했던 탱크전이 벌어진 쿠르스크 전투 등이 모두 소련의 남부전선에서 벌어졌다. 2차대전의 승패가 이곳 남부전선에서 결정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만슈타인 이 소련남부지역에서 종전까지 군인으로서 빛나는 승리와 참담한 패배를 모두 경험하게 된다.
1942년 여름이 오자 독일군은 다시 공격을 개시했다. 독일의 남부집단군을 둘로 나눠 A 집단군과 B집단군으로 나눠 스탈린그라드와 코사사스 지방으로 각각 진격을 개시했다.
A집단군 예하 제11군 사령관에 취임한 만슈타인은 예하 부대를 이끌고 코카사스로 가는 길목이지 전략적 요충지인 크림반도와 키르치 반도를 제압하고 난공불락의 요새인 세바스토플을 1942년 7월에 점령하여 소련군을 흑해연안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소련군을 우크라이나 지역으로 철수하게 만든다.
이 승리로 만슈타인은 그가 그토록 갈망하던 독일 육군원수 계급장과 지휘봉을 히틀러로부터 받게된다. 히틀러는 만슈타인을 동부전선의 기적의 무기라로 했다. B집단군은 코카사스 지역 위쪽에 위치한 스탈린그라드 점령을 위해 맹렬히 돌격해 들어갔다.
1942년 겨울이 다가오자 소련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소련군은 독일의 공격으로 후퇴했지만 1941년과는 달리 질서정연하게 후퇴하기 시작했고 후방에서 병력과 장비를 비축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1942년 11월경 스탈린그라드에 입성한 B집단군의 제6군은 이 도시의 완전 점령을 확신했다. 그러나 비극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자이츨러(zeitzler) 참모총장은 제6군이 스탈린그라드 점령이 주변 부대에 비해 너무 확대되어 측면공격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소련군의 공격이 시작되기 이전에 즉시 후퇴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6군의 좌우측면을 방어하는 부대가 주축국인 루마니아가 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42년 11월말 소련군의 맹렬한 반격이 시작되었다. 전선은 무너지기 시작했고 제6군은 스탈린그라드에 완전히 포위되었다. 히틀러는 A집단군과 B집단군을 돈(Don)집단군으로 통합시킨 후 집단군 사령관으로 만슈타인을 임명하고 제6군의 구출을 명령했다.
만슈타인은 호트(Hermann Hoth) 장군이 이끄는 제4기갑군을 동원해 스탈린그라드에 포위된 제6군을 구출하기위해 진격해 스탈린그라드 남서쪽 40km까지 소련의 방어군을 필사적으로 격파해가며 다 달았으나 소련군의 완강한 저항에 더 이상 전진을 하지 못하고 되돌아 갈 수밖에 없었다.
제6군 병사들은 만슈타인 원수가 자신들을 구출해줄 거라는 희망을 가지며 멀리서 들려오는 아군의 야포소리에 들뜬 밤을 보내야 했지만 결국 구원받지 못했다. 만슈타인은 파울루스 제6군 사령관에게 서쪽으로 탈출하여 제4기갑군과 전선을 연결하고 탈출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스탈린그라드를 고수하라는 명령을 하달했고 파울루스는 히틀러의 명령 없이는 절대 탈출할 수 없다고 버티다 소련군에 항복하고 만다.
그러나 만슈타인의 스탈린그라드 구출작전 시도와 제6군이 스탈린그라드에서 1943년 2월 항복할 때까지 필사의 저항을 하고 있는 사이 코카사스 나아가 있던 독일의 A집단군이 소련의 포위 위험에서 간신히 후퇴할 수 있었다. 1943년 3월 스탈린그라드에서의 독일 6군의 처참한 패배와 만슈타인의 6군 구출작전의 실패로 독일군의 동부전선은 서서히 무너져가고 있었다.
스탈린그라드에서의 승리로 독일군에 대한 자신감을 얻은 소련군은 전 전선의 걸쳐 대반격을 가하게 된다. 소련은 스탈린그라드 동부전선의 요지인 하르코프(Kharkov)와 남쪽 로스토프(Rostov)를 탈환하는데 성공하고 독일군을 서쪽으로 강하게 밀어붙쳤다. 1943년 2월 히틀러는 독일에서 전용기인 콘돌호를 타고 독일에서 급거 자포로제로 날아왔다. 수대의 호위 전투기를 대동하고 남부 집단군 사령부로 방문했다.
히틀러는 무엇보다도 하르코프를 탈환하고 싶어했다. 히틀러는 소련 남부의 행정과 공업의 중심지이며 상징적인 대도시인 하르코프를 소련군에게 빼앗겼다는 것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고
만슈타인은 일단 하르코프에서 철수하여 독일군이 전면적인 후퇴를 하고 있다고 소련을 기만하되 각 부대를 재정비해 벌어진 전선을 기동공간으로 활용해 소련군의 전투피로가 쌓이고 보급에 문제가 생길 때 쯤 반격을 하자는 주장을 계속했다.
결국 히틀러는 만슈타인에게 작전의 전권을 부여하게 된다. 만슈타인은 혼란에 빠진 휘하 남부집단군 병사들을 다독거리고 전선을 재정비해 히틀러의 완강한 후퇴금지 명령을 설득하여 후방으로 병력을 일시적으로 후퇴시켜 기동공간을 확보하여 대 반격을 가한다.
여기서 독일은 연합군을 상대로 최후의 대규모 승리를 얻는다.
이 전투는 훗날 20세기에 벌어진 가장 인상적인 군사작전으로 평가되며 소위 만슈타인의 기적이라고 불리게 된다. 하르코프(kharkov) 3차 공방전으로 명명된 이 전투로 독일은 하르코프와 벨고르드를 재점령하고 4개 야전군 규모의 소련군을 붕괴시키는 엄청난 전과를 올린다.
하르코프 전투로 인해 독일군은 쿠르스크를 남북으로 큰 돌파구를 형성했지만 쿠르스크 지역에 쐐기처럼 불뚝 나온 돌출부를 남겨놓게 되었다. 오랜 전쟁으로 독일의 자원은 많이 소비되고, 더이상 대규모의 작전을 벌일 여력이 없게 된다. 더구나 서유럽에도 언제 영국과 미국의 공격이 벌어질지 모른다. 따라서 자이츨러 참모총장은 판이 더 커지기 이전에 소련의 힘을 꺽어놓기로 결정한다.
장소는 하르코프(kharkov) 공방전 이후 형성된 전선중 쿠르스크(kursk)지역이었다.
쿠르스크 돌출부(突出部)에 위치한 소련군을 포위(包圍) 섬멸(殲滅)하고 전선을 효율적으로 축소(縮小), 재구축(再構築)하여 잉여(剩餘)병력을 서유럽으로 돌린다는 계획이었다. 이 회심의 일격은 시타델(CITADEL)작전으로 명명된다. 여러 이유로 인하여 작전은 43년 7월이 되어서야 시작된다.
'히틀러와 나찌에 대한 왜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북아프리카군단 전사 : 1942년 (0) | 2012.06.01 |
---|---|
[스크랩] 히틀러의 몰락과 만슈타인 (0) | 2012.06.01 |
만슈타인 ( 펌 ) (0) | 2012.06.01 |
[스크랩] 아돌프 히틀러 (0) | 2012.06.01 |
레옹 디그렐 ( 펌 ) (0) | 2012.06.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