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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전쟁영웅 7편] 나치의 영웅, 세계전차의 아버지 `하인츠 구데리안`

그리운 오공 2012. 6. 1. 17:12

 

 

[전쟁영웅 7편] 나치의 영웅, 세계전차의 아버지 '하인츠 구데리안'

 

 


 

 

하인츠 빌헬름 구데리안(1888.06.17~1954.05.14) 은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군사 이론

가이자 혁신적인 성격을 가진 장군이었습니다.

 

독일의 전차부대는 그의 노고에 의하여 창설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그는 기갑군단장, 기갑부대장, 기갑부대 감사관 등을 역임하였으며 육군 참모총장

의 직위에까지 올랐습니다. 비록 원수의 자리는 오르지 못했지만 위대한 장군의

반열에 오른 하인츠 구데리안에 대해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구데리안은 프러시아 서부 쿨름(Kulm)에서 태어났습니다. 1901년부터 1907년까지

다양한 군사학교들을 전전한 그는 1907년 하노버 엽병 대대에 입대하였으며, 1911

년 제3 무선통신 대대로 배속된 그는 1913년 마르가레테 괴르네와 결혼하여 두 아들

낳았습니다. 1차 대전 당시 그는 통신장교로써 복무하였으며, 전후 베르사이유

조약에 의해 10만으로 감축된 독일군에 남아 제10 엽병 대대의 대대장으로써 당시

조약이 금지하고 있던 참모부의 멤버가 됩니다.

 

1927년 소령으로 승진한 구데리안은 베를린에서 기동 전술 연구를 시작하였고 훗날 전격전으로 알려진 독일군 기동 전술의

토대를 마련하게 됩니다.

 

▲ 2차대전 당시 하노마그사에서 제작한 반트랙의 걸작 장갑차 Sdkfz (Sonderkrafahrzung) 251

 

1931년 중령으로 승진한 구데리안은 1933년 대령으로 진급하였으며, 워 게임을 통하여 기동전술 연구를 지속하게 됩니다.

1935년 구데리안은 신설된 3개 기갑사단 중 제2기갑사단의 사단장으로 임명되고, 1936년 8월 1일 준장으로, 1938년 2월 4일 소장

으로 승진하여 제16군단의 군단장이 됩니다.

 

그가 1936년에서 1937년 사이에 집필한 저서 '전차 앞으로!' 는 근대 전차 및 항공기 전술을 이론적으로 설명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구데리안 자신뿐 아니라 다른 참모들의 이론도 취합된 것이었지만 저작권은 그에게 귀속되었습니다. 그가 창조한 독일

전차부대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 육상 전력의 핵심이 되었으며, 전격전 전술로 무장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그가 완성한

부대 합동 전술은 미국 웨스트 포인트 사관학교와 영국 샌드허스트 사관학교에서도 강의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초반 구데리안의 임무는 제19군단을 이끌고 폴란드와 프랑스를 침공하는 것이었습니다.

구데리안은 아르덴 숲을 지나 뮤즈 강을 도하, 연합군을 양분하였으며 프랑스 북부와 벨기에의 연합군 보급을 차단하였습니다.

 

▲ Sdkfz251/3형 장갑차속에서 에니그마를 다루는 독일 통신병을 바라보는 구데리안장군. 1940년 5월 프랑스

(* Sdkfz251/3형 :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대표적인 장갑차량)

 

1941년 구데리안은 구데리안 기갑군을 이끌고 소련을 침공하는 바바롯사 작전에 참여하였습니다. 이 해 7월 구데리안은 백엽

검기사 십자장을 받았으며 10월 5일부터 제2의 기갑군 창설을 이끌게 됩니다. 그는 동부 전선에서도 전격전 전술을 이용하여

'재빠른 하인츠' 라는 별명을 얻었는데요. 그는 놀라울 정도로 빠른 시일내에 스몰렌스크를 점령하였으며, 모스크바 침공을

시작하려던 찰나 남쪽 키에프 방면으로 진주하라는 명령을 받게 됩니다. 이후 구데리안은 클루게의 고발로 지휘권을 박탈

당하게 됩니다. 1954년 5월 구데리안은 미국에 항복하였으며 무혐의 석방될때까지 수감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후 재판에서

소련과 폴란드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구데리안은 아무런 혐의가 없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는데요. 그의 전쟁기간동안의 행위

들은 모두 정당한 군인의 자세에 입각하였던 것으로 판정된 것입니다.

 

▲ 독일군의 MG-34 경기관총이 장착된 Sdkfz 251/3 장갑차 속에서 밖을 응시하는 하인츠 구데리안. 1940년 5월

 

1954년 5월 14일 그는 바바리아 남부에서 사망하였으며, 그의 뒤를 이은 아들 역시 전후 독일 연방군과 NATO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 구데리안의 전술이론

구데리안의 전술이론

집단적인 기갑부대의 운용등과 같은 전술이론은 구데리안이 최초로 고안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상적 동지들이라 할 수있는

만슈타인, 클라이스트, 롬멜, 호트, 만토이펠 같은 뛰어난 야전 지휘관들이 있었기에 독일군의 전술로 자리 잡을 수 있었

습니다. 여기에 더해 구데리안을 기갑부대의 아버지로 평하는 이유는 전차의 개발에 있어 그가 지대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입니다.

 


 

 

▲ 부하들의 신망이 높았던 구데리안 장군

 

 

▲ 확장이 가능하여 다양한 버라이언트로 전차 개조

 

첫째, 차후 확장성에 대한 고려입니다. 주포의 개량들이 이루어져 전차의 성능을 업그레이드 할 경우 차후 개조가 용이

하도록 넉넉하게 공간을 확보하여 전차를 개발했습니다.

 

둘째, 전차의 3대요소가 화력, 방어력, 기동력인데 그 중 방어력과 기동력은 서로 반비례 하는 요소입니다.

때문에 이런 모순 관계를 극복하고자 전체의 무게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교량을 통과할 수 있는 무게까지

전차를 개발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셋째, 전차 승무원에 관한 최적의 인원을 산출하였는데 그것은 전차장, 장전수, 포수, 조종수, 통신수의 5명이 가장 이상적인

조합이라고 결론 내립니다.

 


 

 

▲ 승무원에 대한 최적의 인원 산출

 

 

▲ 하인츠 구데리안 장군

 

넷째, 모든 전차에 무전기와 내부 통신용 마이크를 장비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전차는 지휘관 차량외는 무전기가 없었고

전차부대는 깃발을 이용한 수신호로 통제하였습니다.

 

다섯째, 타렛에 360도의 시계 확보가 가능한 전차장 전용 큐포라를 설치하여 전차장이 안전하고도 쉽게 전후방 상황

파악하여 전차를 통제하며 일사분란한 작전이 가능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러한 구데리안의 전차개발 사상은 너무나 당연하고 상식적으로도 생각할 수 있는 측면이 많은 부분도 있었지만 K-1A1전차

처럼 K-1 전차의 개량에 많은 애를 썼던 예를 보아도 미리 조건을 염두에 두고 전차 개발에 나선다는 것은 얼마나 뛰어난 혜안

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미지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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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팔방미인" 방위사업청 대표 블로그
글쓴이 : 방위사업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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