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각하

[스크랩] 평화의 댐 반성

그리운 오공 2006. 8. 28. 00:06
평화의 댐 반성

허 문 도


금년 중반 들어 신문에 북한의 금강산댐에 함몰 흔적이 보인다는 보도가 있더니, 이내 〈「평화의 댐」존재가치 다시 부각〉이란 기사가 잇달았다. 7월 들어서는, 북한이 금강산댐 증축을 개시했음을 확인한 DJ정부가, 14년간이나 방치돼 온 평화의 댐을 45미터 더 높이기로 결정했다. 9월에 착공하여 2004년 12월까지 총 공사비 1천 950억원을 들일 것이라 한다.

그동안 DJ와 YS가 이끌었던 정치세력들 그리고 주축 언론들이 「정권안보용 댐」, 「독재정권 유지를 위한 전시용 댐」,「국민을 기만한 사기극」(김운환의원.민자당) 「우스개 된 평화의 댐」(93.6.17 조선일보 사설)이라 떠들고, 단죄해마지 않다가, 코페르닉스적 발상전환을 가져온 그간의 경위에 대한 이렇다 할 설명 없이, 「평화의 댐」에 거액의 세금을 쓰겠다 한다면, 국민들에게 어떻게 비춰질까. 혹시 현정권이 이미 없어진 5공의 「정권안보」를 위해 거액의 자금을 투입하러든다는 기상천외한 의혹은 안 생길까. 이 정권이 갖가지 실정을 거듭하더니 드디어 「사기극」과「우스개」에 2,000억 가까운 돈을 얹어 준다고 오해받지 않을까.

국민들은 놀랄 겨를도 없을 것이다. 정치인들의 정략적 발상이나 주축 언론의 감각보다는 국민들의 평상심이 보다 지혜롭다는 것을 이 경우에 다시 한번 느낀다.

국민들은 5공 말기 코흘리개의 저금통까지 깨서 모금에 응했던 것이 헛돈은 아니었다고 우선 안도할 것이다.

정부가 지금 갑자기 놀란 듯이 북의 금강산댐에 대응하러 드는 일련의 과정을 보면 우스꽝스럽고 비열해 보이기까지 하다. 그렇게 그동안 정권담당자를 포함한 정치권과 언론이 「수공 조작설」을 떠들어 놓고 그 수공(水攻)에 대응하느라 만들어진 평화의 댐의 실체를 행동으로 인정하여 그 위에 댐을 더 쌓겠다면, 水攻을 두고 가타부타 한마디 말은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정부가 어떤 경우에도, 설사 평화의 댐이 무너진다 해도, 놓쳐서는 안 될 국민을 향한 신(信)을 붙들어 두는 최소한의 행위일 것이다.

보도를 보면 정부는 결함이 있는 금강산댐이 홍수기에 무너져 내릴 자연재해에만 관심을 쏟고 있는 모양을 취하고 있다. 이게 우스꽝스런 대목이다. 그동안 이 정권이 햇볕정책으로 그렇게 끌어안으러 들었던 북한 당국을 댐 하나 제대로 간수 못하는 집단으로 치부한다는 말인가. 화해.협력의 대상이라며 그렇게 퍼다 줘놓고, 온 세상 사람들이 다하는 상.하류 수계의 공동이용 하나 서로 못할 사이임을 세상에 인정해 보이는 행위는 또 뭔가. 수공위협이 있다든지 없다든지 말 한마디 않고, 햇볕정책 파탄의 실증적 계기를 앞에 하여서도 햇볕정책을 폐기치 아니하고, 드러내지 못하고 내심으로 인정하여 국민의 세금만 쓰려고 드는 것은 비열하다 해야 할 것이다.

철학자 헤겔을 들먹일 것도 없이, 나라를 지키고자, 방어하고자 자기를 바칠 것을 각오하는 자가 하나도 없는 나라는 나라로서 성립되지 않는다.(병역의무에 대한 자세가 최고지도자의 검증조건이 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코흘리개 저금통 깬 것을 작은 희생이라 할 것인가. 국민들이 그같은 희생을 모아 쌓아 올린 것은 「평화의 댐」이기 보다는, 나라를 지키려는「국민 의지의 댐」이었고 「안보의지의 댐」이었다.

지난 93년 갓 집권했던 YS정권이 DJ세력과 주축언론의 가세 속에 감사(당시 원장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후보)다 청문회다 하면서 거창한 정치극을 벌려 내린 결론은, 평화의 댐이 「정권안보용」「국면전환용」이라는 것이었고, 이 결론 위에 전 정치권과 언론은 「평화의 댐」을 「사기극」,「우스개」로 몰아 부쳤다. 국민들도 그렇게 알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용감한 YS일지라도 「평화의 댐」을 총독부 건물처럼 다이나마이트로 폭파하지는 못했다. YS정권의 治國 행위로 무너져 내린 것은 「평화의 댐」이 아니고 그와 함께 쌓아 올려졌던 「국민의지의 댐」「안보의지의 댐」일 수밖에 없다. 현정권이 별 말 없이 평화의 댐을 조용히 증축한다고 국민의 허물어져 내린 「안보의지의 댐」이 복원되는 것은 아니다.

『「평화의 댐」존재 가치가 다시 부각』된 작금, YS정권의 청문회에 불려 나간 적이 있는 필자가 지금 느끼는 것은 「그것 봐라」가 아니다. 우리 국가사회 시스템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시스템인가에 대한 심각한 불안감이다.

대중민주주의의 세상이 되고 보면 실질에 관계없이 포퓨리즘(대중영합)에 발빠른 자들이 곧잘 권좌를 차지하곤 한다. 그렇다 해도 포퓨리즘의 챔피언들에게 손발을 제공하는 입장인 주축언론의 담지자(擔持者)들이 양식과 균형감각을 잃지 않는 한, 한 사회가 크게 잘못되기는 어렵다. 포퓨리스트란 주축언론의 향방을 끊임없이 눈대중하고 맞추는 것이 그들의 본령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화의 댐을 두고는 주축언론과 포퓨리스트의 관계에 이변이 일어났다. 안보사안을 정치적 한풀이의 재료로 삼으려는 포퓨리스트의 위험하기 짝이 없는 철부지성과 구제할 길 없는 경박성에 주축 언론의 담지자들이 끌려가고 만 현상이 벌어졌다.

취임한지 넉 달 정도 된 YS가 평화의 댐을 도마에 올려놓겠다는 의지를 보이자 이내 감사원이 나섰다. 당시(93.6.17)의 조선일보 사설은 감사원의 감사결정을 『시의 적절한 일』이라고 두둔하면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스스로와 언론전체를 싸잡은 것 같은 반성을 해 보이고 있다.

『먼저 언급해야 할 것은 그 당시 언론들의 부끄러운 행태다. 언론도 정부의 시나리오에 무비판적으로 동조하지 않을 수 없던 저간의 사정이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을 스스로 믿지도 않으면서 국민을 오도케 하고 게다가 성금모금에 앞장선 책임은 지워질 수 없으며 이점 깊이 반성할 일이다.』

이 사설의 제목이 『우스개 된 평화의 댐』이었다. 그때로부터 만 9년이 흘러 같은 신문 지면에 『「평화의 댐」존재가치 다시 부각』이라고 제목을 올리게 되었으니 이번엔 주축언론 담지자들의 체통이 「우스개」될까 두렵다. 9년 전의 반성을 두고 뭔가 한마디쯤은 있어야 체통이라는 것이 견뎌 날 것이다. 그래야 스스로가 쌓는데 일조하고, 허무는데 일조한 국민의 「안보의지의 댐」을 복원하는데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

북의 금강산댐 보강공사가 확인된 시점에 쓴 사설(02.7.5) 『금강산댐 그냥 방치할 일인가』는 『태풍과 장마와 홍수의 계절을 맞아 금강산댐은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위험이 있고 그 피해는 상상하기 어렵다』는 전문가의 경고를 원용하고 있다. 끝맺으면서 『이 문제에서 마저 북한정권의 눈치를 보고 있다가 ‘서해도발’ 같은 기습사태를 맞을까 걱정이다 』고 해놓았다. 이는 우회적으로나마 북의 수공(水攻)위협을 인정한 것 아닌가. 군자표변(君子豹變)이라더니 놀라운 인식발전이다.

그러나 위험이 코앞에 닥쳐지지 않으면 그 실재를 감지할 수 없는 시스템은 비싸게 먹혀서 결국은 적응에 실패하고 마는 시스템이 된다. 우리사회 시스템이 그렇지 않나 싶다. 평화의 댐을 둘러싼 우리 정치권과 주축언론의 대응을 보면서 깊은 불안에 빠지는 이유는 이상의 것이다.






수공(水攻)의 역사




中國史에서 공성(攻城)법으로서 水攻을 생각하여 실행에 옮긴 최초의 인물은 춘추시대 말기 진(晋)나라의 필두 귀족이었던 智伯(지백)이다. 史記와 資治通鑑(자치통감)에 간략하지만 기록이 있다.

지백은 유력 귀족인 魏(위)씨와 韓씨와 함께 또 하나의 유력 귀족인 趙(조)씨를 공격했다. 趙씨는 晋陽(진양)에 농성하여, 시간을 끌었다. 이때에 지백이 水攻을 생각해 냈다. 晋陽성 둘레에 제방을 쌓고 晋水(진수)의 물을 끌어넣었다. 성벽이 물에 잠기지 않은 것이 3판(版)-약 1미터 80센티-뿐이었고, 성내 백성들의 부엌에 개구리가 생겨났다.

막바지에 몰린 趙씨가 지백 편이었던 韓.魏씨와 내통하고 제방을 터 물을 지백의 군사편으로 쏠리게 하자 승부가 났다.

智씨가 멸망하고, 晋나라가 魏.趙.韓의 3나라로 분립하는 이 水攻戰이 끝난 BC 453년을 중국사에서는 전국시대의 시작으로 삼는다. 시대의 전환점에 水攻이 있었던 것이다.

한국사람들이 일본을 싫어하는 원점에 임진왜란의 豊臣秀吉(풍신수길)이 있다. 秀吉은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 역사 있고서 처음으로 북해도를 제외한 전 일본열도를 명실공히 통일한 지배자였다. 역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 몇 번씩 총리대신이 되고 한국 병탄의 문을 연 伊藤博文(이등박문)의 경우, 그 소년시절의 꿈은 秀吉이었다 한다. 수길은 일본사람들 역사에서는 최고의 영웅으로 꼽힌다.

수길이 戰國의 열도를 휘어잡기 전야, 수길은 패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휘하의 서열 세.네째 정도의 부장(部將)으로 中國지방(兵庫현 이서의 섬 전역)을 평정하는 원정군 사령관이었다.

수길의 주군인 오다가 수길과 동급인 아께치(明智光秀)의 반역으로 죽었다는 정보를 손에 넣었을 때, 수길은 지금 오까야마(岡山)지방의 한 성에 水攻을 가하고 있었다.

평지에 있는 적방의 성을 함락시키는데 수길은 애를 먹고 있었다. 서쪽으로부터는 적의 원군이 접근하고 있었다. 성 주위에 제방을 쌓아 인근의 두 강으로부터 물을 끌어 성을 완전 고립시키는 계책을 낸 것은 조선에도 쳐들어 왔던 구로다(黑田長政)의 선대였다. 수길의 참모였던 그는 중국 역사에서 힌트를 얻었다 한다. 물에 잠긴 성에서는 병사와 인민들이 모두 성벽 꼭대기나 지붕 위에 올라와 아사를 기다렸다 한다.

主君 급사의 정보를 손에 쥔 수길은 서방으로의 정보차단 조치를 취하고, 하룻밤 사이에 수공으로 함락 직전에 있었던 성주와 화의를 성립시키고는, 거성인 히메지성으로 돌아와 비축해 놨던 전비와 군량미를 병사와 백성들에게 모두 나눠줬다. 두 번 다시 이 성에 돌아오지 않겠다는 의지 표시이기도 했다. 이내 신속한 전략기동으로 중앙으로 복귀, 주군의 원수를 갚는 對明智 보족전으로 나아갔다. 각지에 흩어져 있는 여러 부장들을 제쳐놓고 수길이 주도할 수 있었다. 天下가 수길이 앞에 문을 열었다. 水攻 마무리에서 明智 군세의 섬멸까지 불과 열흘간이었다. 이 시간 각 전선의 사령관들은 오다 죽음 이후의 정세전망도 채 세울 수가 없었다. 전사가(戰史家)들은 水攻 종결에서 아께치토벌까지의 10일간의 전략판단을 수길의 일? ?중 가장 빼어난 것으로 꼽는다.

三國志 연의(演義)에도 水攻이 있다. 正史 삼국지의 關羽(관우)전과 于禁(우금)전에 의하면 AD219에 蜀 지역에서 한중왕이 된 유비는 관우를 魏와 吳와의 인접지역인 荊州(형주)지역의 군정사령관으로 하였다. 조조가 동생 曹仁(조인)을 시켜 관우를 공격케 했는데, 역부족하여 樊城(번성)에 포위되자, 고위 幕將인 于禁(우금)과 친위대인 七軍을 원군으로 보냈다. 조조의 원군은 협곡에 포진했는데 큰비를 만났다. 正史에는 『가을에 큰비가 억수같이 내려 한수가 험람하여 평지의 물이 몇 길이나 되고, 우금 등 칠군은 모두 물에 잠겼다. 우금은 여러 장수들과 높은 곳으로 올라가 물의 기세를 바라보았는데, 돌아가 피할만한 곳이 없었다. 관우는 이 기회를 틈타 큰배를 타고 우금 등을 공격하였으며 우금은 결국에는 투항하였다. 』(김원중 ! 옮김, 신원문화사 간) 『연의』에는 가을철의 오랜비로 양강(襄江)과 白河가 하나되기를 기다렸던 관우가 양자 관평을 시켜 미리 막아 두었던 양강 상류의 둑을 터 증구천(罾口川) 일대에 포진했던 조조의 원군을 일거에 그물에 걸린 고기떼가 되게 하였다.(罾口의 「증」이란 네 변에 손잡이가 달린 그물을 말함.)

풍신수길이 水攻을 할 때도 우기(雨期)였다. 水攻이 곧잘 홍수기에 감행된다는 것을 하나 염두에 두고 싶다.

국방부의 국방군사연구소가 94년 발간한 「한민족전쟁통사」Ⅰ에는 수양제의 백만을 넘는 대군이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패퇴하는 역사가 기술되어 있다. 이 책에는 평양까지 왔다가 기갈을 이기지 못해 퇴각하는 수군이 살수(청천강)를 건널 때에 을지문덕장군은 살수의 상류를 막았다가 터서 水攻을 가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水攻은 그 출전이 불분명하지만, 국토의 종심(縱深)을 최대한 전략.전술에 활용한 을지문덕 같으면 능히 구사할 만한 전법이라 할 것이다.

굳이 水攻의 역사를 들먹인 것은, 피아간에 군사적 대치가 있고, 그를 관류하는 물이 있으면 水攻이란 거의 상식에 가까운 발상이라는 것을 분명히 해두기 위해서였다.




청문회 회상




93년 9월의 평화의 댐에 관한 국회청문회 분위기는 5공때 평화의 댐 건설과정에 관여했던 사람들을 YS와 DJ의 동료의원들이 인민 재판하는 그런 분위기였다. 증인인 5공 인사들의 증언을 통해 알려지지 않은 진실을 알아내겠다는 분위기는 최소한 아니었다.

의원들이 청문회에서 증인들을 죄인 다루듯 심문한 확신에 찬 고자세를 가능케 한 사실적 근거가 무엇이었을가를 생각해 본다. 93년 현재로서 그것은 무엇보다도 물도 차지 않은 80미터 「평화의 댐」은 덩그렇게 서 있는데, 86년 10월에 시작했다는 북의 금강산댐은 기초공사 정도에서 정지되어 버렸다는 사실이다.

북한의 금강산댐은 계획은 있었는지 모르나 쌓아지지 않았으므로 수공 위협설은 조작되고, 과장된 것 아니냐는 것이었고, 그래서 조작과 과장을 근거로 한 전국민적 모금운동과 올림픽 이전으로 당긴 1차 완공은 5공의 정권안보용이고 국면전환용이라는 것이, 의원들의 질문형태를 취한 공박의 핵심이었다.

93년 9월8일 영등포구치소 회의실로 국회건설위원회를 옮겨 실시한 청문회에서 증인인 장세동 전 안기부장이 되풀이하여 강조한 핵심증언은 『건설된 평화의 댐은 적의 기도(企圖)를 말살했다.』였다.

필자는 당시 국토통일원장관으로 86년 11월26일 네 관계장관 공동담화에 참여한 바 있었다. 『북한측이 강행하고 있는 금강산댐 축조의 가공할 위협으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지켜내는 정당한 국가보위적 자위조치로서 그들의 수공을 예방할 수 있는 대응댐을 건설하기로 결정했다.』가 주 내용이었다.

건설위원회의 9월7일 청문회에 필자는 증인으로 불려 나갔다. 평화의 댐에 관한 주견을 털어놓을 기회는 좀처럼 없었다. 당시 민자당의 신경식의원이 문을 열이 주었다. 국회 속기록을 들춰보니 필자는 『손자병법....』하며 말을 고르는데 야당의원에 차단 당했다. 신경식의원의 채근을 받고 필자는 『평화의 댐의 진정한 의미는..... 우리의 안보를 위협하는 상대에 대해서 그 의도를 사전에 분쇄한, 그러니까 벌모(伐謀)적인 차원에서 한 일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고 말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이 속기록에 보인다.

구치소에 있었던 장세동부장과 사전에 말을 맞출 기회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속기록에 있는 장부장의 『적의 기도를 말살했다』와 필자가 증언한 『벌모』가 같은 얘기인 것을 알고 놀라웠다. 영어로 번역한(SunTzu, R.D.Sawyer, West View Press,1994) 「손자」 모공편의 「伐謀」는 to attack the enemy's plan(적의 계획을 공파하는 것)이다. 「벌모」와 「적의 기도 말살」은 같은 뜻인 것이다.

손자병법 속의 벌모의 맥락을 짚어본다. 「孫子」가 위대한 것은 그가 살상을 최대한 기피하는 전쟁철학의 소유자라는 데 있다 하겠다. 「벌모」의 바로 앞 단락은 유명한 百戰百勝, 非善之善者也, 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백 번 싸워 백번 이기는 것은 최선의 것이 아니다. 싸우지 않고 적군을 굴복시키는 것이 최선의 것이다.)이다. 그 다음이 「벌모」귀절이다. 故上兵伐謀, 其次伐交, 其次伐兵, 其下攻城.(그러므로 최상의 전기(戰技)는 적의 모계(謀計)를 깨는 것이고, 그 다음이 적의 외교관계를 깨는 것, 그 다음다음이 적병을 공격하는 것이며, 최하가 성을 공격하는 것이다.)

벌모(伐謀), 伐交(벌교)는 궁시(弓矢)를 마주 하지 않고, 요새로 치면 총칼을 마주하는 전투를 치르지 않고 전쟁에 이기는 수단으로 제시되어 있다. 정책이나 전략의 당로자들은 이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평화의 댐 이력은 이렇다.

북이 기도를 감춘 채 금강산댐을 상류에 착공했고, 우리가 북의 수공계략을 감지하여, 국민의지의 댐을 쌓으면서(모금운동) 하류에 평화의 댐을 선공해 버렸고, 북은 감추었던 수공기도가 평화의 댐과 국민의지의 댐에 막혀 성취 불가능함을 알자, 금강산댐 공사를 중지함으로써 수공 모계(謀計)를 버렸다.

한국이 북의 水攻모계(謀計)에 벌모(伐謀)를 가하여 성공한 것이다. 이것이 86년 10월 북의 금강산댐 착공에서 93년 YS정권의 평화의 댐 감사와 청문회까지의 사이에 있은 것의 전부다.

북의 공사중지는 벌모의 성공을 즉각적으로 일러주지만, 수공계략이 실재했음을 증명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처음부터 평화의 댐을 水攻 대응으로 지었기 때문이다.



이회창의 감사




감사원 법에는 그 임무가 회계감사와 직무감찰로 한정되어 있지만, 평화의 댐 감사에서는 정책감사를 했음을 당시의 이회창 감사원장은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이회창 당시 감사원장은 그해 9월4일 국회건설위에 감사결과를 보고했다. 건설위원들은 『「불요불급한 대응댐을 착공했다든지, 붕괴시 하류 피해 정도를 과대평가 했다든지, 국민에게 불안감을 조성했다든지」이렇게 여러 가지 정부가 평화의 댐을 건설한데 대해서 부정적인 면을 강조』(그날의 국회 속기록)한 것으로 받아 들였다.

의원들 중에는 뒷날 평화의 댐의 필요성이 인정되거나 水攻 기도가 인정되면 그때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를 묻는 질의도 있었다.

이회창 감사원장은 이번 감사는 어디까지나 정책결정과 집행의 시점에 있어서의 결정과 집행의 온당성 여부를 따진 것이라고 피해갔다.

『그 시점에 있어서는 지금 밝혀드린 바와 같은 규모의 평화의 댐 축조라는 것은 필요가 없었다. 타당성이 결여되었다 이렇게 본 것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그러한 장래의 사항에 따라서 금강산댐의 수공 목적이 더 강화될 수도 있고 또는 더 없어질 수도 있기 때문에 그 점에 대해서는 감사의 판단사항에 포함시키지를 않았습니다.』(그날의 국회 속기록)

이회창 감사원장은 거대한 논리 모순에 빠지는 답변을 하고 있다. 보통의 정책결정은 대부분이 예측성을 내포하고 있다. 평화의 댐만 해도 반항구적인 건조물을 축조하면서 지금은 있지 않지만 장차는 있게 될 어떤 사항을 예측치 않고는, 댐 축조의 정책결정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정책결정 시점에서는 정책이 내포하는 예측성에 대한 완벽한 검증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엄격한 실증주의를 요구하는 감사는, 그 법에 정책감사를 배제해 놓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경력으로 봐서 모르지 않을 텐데, 이회창 감사원장은 정책감사를 단행하고 말았다. 당시의 보도를 보면 그는 취임사에서 『감사원은 직무상 대통령으로부터도 독립한 지위에 있으므로 어느 누구의 부당한 간섭도 받지 않을 것』이라 했다 한다. 그러나 그는 YS의 지시와 여론몰이에 편승했던지 누구도 안 하는 정책감사에 손을 대고 말았다.

이회창 감사원장의 평화의 댐 특감발표의 신문 제목은 『水攻 과장 정권안보 이용』였는데(조선일보 93.9.1) 발표를 인용한 부호가 붙어 있었다.

이 발표 이후 평화의 댐이 「정권안보용」「국면전환용」이라는 정치권의 인식에 권위가 부여되고, 말은 세간에 정착하여 국회 청문회로 이어지는 「평화의 댐 소동」의 추진동력 역할을 한다.

「국면전환용」이 발전하여 평화의 댐은 「사기극」이 되고 「우스개」가 되면서, 동시에 모처럼 높이 쌓아 올려진 국민들의 「안보의지의 댐」은 무너져 내렸다.

「평화의 댐」을 햇볕정책의 정부가 더 높이기로 한 결정을 앞에 하여, 지금은 나라 안보의 최고 책임자를 지향하는 이회창 전 감사원장은 감회가 없지 않을 것이다.

평화의 댐 정책감사를 두고는 한마디 더 있다. 그 댐에 쓰여진 비용은 국민성금에 보태진 국방예산이었다. 그렇다면 정책감사는 당연히 국방정책, 전쟁정책의 감사여야 했을 것이고, 전쟁정책 감사라면 전략사고를 결하고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세계의 a.b.c인 伐謀 같은 것 한번 생각도 안해보고 너무 겁없는 짓을 저질렀다 해야겠다.

마지막으로 水攻 총량이 200억t일 것이라고 했던 것이 두고두고 정보과장.위협조작의 근거로 들어졌다.

당시 감사원 감사에 맞추어 전두환대통령이 발표한 담화에는 『정부가 금강산댐에 관해 처음 발표할 때 200억톤이라고 한 것은 정보입수 초기에 건설현장으로 추정되는 위치의 지형자료 등을 토대로 계측한 그 지역의 용적의 최대치로 이해』했다 했다. 감사원이 이 지적을 보고 납득이 안간 것이 이해가 안된다.

그리고 실질이 그럴 뿐 더러, 인간세상의 일상적인 홍보기법으로, 위험이 닥칠 때는, 나중에 고양이 밖에 안 나타날지 몰라도 “호랑이 온다”고 하지 않는가.

그것은 깨어 있는 자의 평상심이다.

2002. 8. 13
출처 : 평화의 댐 반성
글쓴이 : 조타꾸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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