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각하

[스크랩] 어느 대학생의 각하에 대한 분석....인터넷 발췌

그리운 오공 2006. 9. 6. 08:41

전두환 | 人物探求 2006/08/29 11:11
http://blog.naver.com/slycat2021/20027803185
출생 : 1931년 1월 18일
출생지 : 경상남도 합천
직업 : 대통령
소속 :  대한민국 대통령 (제11.12대)

 

경상남도 합천에서 태어났다. 1951년 대구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5년 육군사관학교를 제11기로 졸업하였다. 1961년 5·16군사정변 직후 박정희에게 발탁되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민원비서관, 1963년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1969년 육군본부 수석부관을 지냈다.

1970년 백마부대 제29연대장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였고, 1971년 제1공수특전단 단장을 지냈다. 1976년 대통령 경호실 차장보, 1978년 제1사단장을 지낸 후 1979년 초 국군보안사령관이 되었다. 그해 10월 26일 대통령 박정희가 사망하자 12월 12일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체포하고, 신군부가 12·12군사정변을 일으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80년 중장으로 진급하고, 이어 중앙정보부장 서리가 되었다.

5·17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와 함께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하고 정권을 장악한 뒤 그해 6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고 상임위원장이 되었다. 이어 8월 5일 대장으로 진급하고, 22일 예편하였으며,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선으로 제11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81년 1월 창당된 민주정의당의 총재가 되어 2월 개정된 새헌법에 따라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재임기간 중 물가안정, 서울올림픽 유치, 무역흑자 등을 이루었으나, 군부독재라는 비판을 받았다. 1987년 6월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고, 대통령 단임제를 실천하였다. 물러난 뒤 광주민주화운동과 5공비리문제로 책임추궁을 당하다가 1988년 11월부터 1990년 말까지 백담사에서 은둔생활을 하기도 했다. 1996년 12·12 및 5·18사건, 비자금사건과 관련하여 사법처리되었다.

 

 

 

긍정적인 쪽에서 본 전두환                            출처: 전사모ㅡ 박문수

저는 비판자들께 '인간 전두환' 님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대권을 잡기 이전의 그분의 "평상시 인간성"을 들여다 보다보면, 대권을 잡게 된 사연을 조금은 이해하실수 있다.
귀하가 무조건적 비난과 매도로 정치인들처럼 이해득실을 따라간다면 무슨 도움이 될까 싶다. 우리 모두 아주 단순하게
그분의 군인 시절 평상의 모습을 보자. 결코 미화하지 말고!
그분은 당신이 근무한 곳에 후임자로 노태우 전임을 꼭 추천해 배려한 것은 이미 알려져 있다. 또 '하나회' 동료,후배들에게도 발벗고 도와주었다. 평상시 그저 주변을 도운것이다.
YS는 취임 한참후 에야 궁지에 몰린 상황 회피용으로 칼을 댄것은 분명히 정치적이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처음 YS는 처벌불가의 논리로 "쿠테타가 아니라 쿠테타적인 사건이라고 명명했었다" 그러다가 돌변해 버린것은 역사가 알고 있다.
박정희 전임께서는 이'하나회'의 존재를 몰라서 그냥 두었겠는가?
군은 뭉치면 쿠테타의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알면서도 주변 사람들이 한달에 한번씩 모임으로 의기 투합을 하듯 양해하셨고, 그들은 돕는 차원의 모임을 가지며 서로 도우며,쿠테타없이 국가를 잘 지켰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0.26 시해사건'이 터졌다. 지금 Mbc가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12.12를
왜곡하고 있듯이 12,12 부분만 떼어놓고 보면 분명히 불법이다. 그러나 10.26 밤의 잘못된 수습과정을 읽을수만 있다면
12.12는 당연한 귀결로 이해할수 있다.
그간의 인터넷상의 자료와 증언으로 밝혀진것만을 종합해 보자. 독설품은 마음은 한수 접어두시고..........

10.26밤 정승화씨의 결정적인 실수는, 엄청나게 중요한 사건발생 직후, 지휘 계통상 명령권자가 아니면서 대통령을 수호해야만하는 경호실 차장에게 경호실 직원들의 출입금지를 명령했다. 이것은 아주 중대한 실수라는게 학자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이날 밤8시경, 이러한 불법명령만 없었다면, 이미 궁정동 안가로 출동했던 경호팀에 의해
현장이 수습되었고 사실규명이 빨랐을것 이나, 잘못된 명령으로 출동한 경호팀은 그냥 철수해야 했고, 비서실장은 총리에게 범인을 보고했으나, 이때 정총장은 현장에 있은 사실을 숨긴 가운데 계엄사령관이 되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밤8시에

경호팀에 의해 박통및 차실장의 사망확인 및 김재규-정총장의 현장체류, 육본 동행사실이 밝혀지는게 정도였다는 것.
이후 흥분한 경호실에 의해, 즉각 정총장은 체포되어 연행조사후 예편조치는 불보듯 뻔한 일이라고들 한다.
즉,이때 정총장은 연행이 되어서, 국무회의에서는 '총장대행'이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됐어야 하는것이 순리였다고한다.
결백유무를 떠나서, 정총장은 시해현장 초대라는 도덕적인 결격사유를 갖고 있었다.
이어,청와대에서 국무회의가 열려 정상적인 수습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정직하지를 못했었다.
서술드린것 처럼 애시당초에 잘못 된것을, 육사 영관급들이 의기투합 바로 잡은것이었다.하나뿐인 목숨을 걸고서!

수사과정에서 그분이,심수봉 등에게 놀란 가슴 달래라고 150만원씩 보약값을 준것으로 증언이 나왔다.이거 쉬운일이 아니다.또한 영애 박근혜씨께 박통이 남긴돈중 6억의 돈을 3형제의 생계비로 갖다 주었다. 수령여부는 중요치 않다. 6공이후의 일부 대통령들 같았으면 김재규를 국가유공자로 검토하듯이, 박통을 '유신독재'운운하며 배신하고 무덤위에 올라앉아 영웅이 되려고 했을것이다.그분은 그렇게 배신하지 않았고 유자녀들을 챙기고 있었다.
평상시에 이런식으로 남을 배려한 것이 훗날 대권을 쥐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보시면 좋겠다.뿌린만큼 거둔다 하지않았던가!
평상시의 조건없는 베품. 좋게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12.12로 잘못된 것이 바로 잡히고나서, 다음해에 육사 지휘관들의 평소 존경심이 합쳐져서 추대에 가깝게 대권을 잡게됐다고 보시면 정확 할것임. MBC가 아무리 생매장하려해도, 연10%대 경제성장,88올림픽 유치, 단임 실천--6.29극본으로
국민뜻에 복종,등등 잘하신 업적이 더 많았다.
출처: 전사모 게시판 글.

 

부정적 시점

3S 정책

요약
3S, 즉 스크린(screen:영화), 스포츠(sport), 섹스(sex) 또는 스피드(speed)에 의한 우민(愚民)정책.

본문
대중을 이와 같이 3S로 유도함으로써 우민화하여, 대중의 정치적 자기 소외, 정치적 무관심을 유도함으로써 지배자가 마음대로 대중을 조작할 수 있게 하는 정책을 말한다. 식민지정책에 있어서 순치(馴致)정책의 한 전형이다.

배경
전두환 정권시절.. 12.12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정권은
민심을 수습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였습니다..
그시절을 사셨다면 몸소 느낄 수 있었을 텐데..
물론 저도 그때 겨우 울음소리를 냈으니까..나중에 들은 얘김다..^^
그러한 국민적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대중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만든것이 야구였죠..(스포츠)
당시 가슴에 맺힌 것이 많았던 우리 아버님들은 야구를 즐기며 그 한(?)을 푸셨죠..
영화와 섹스는 말할 것도 없겠죠?

큰 개념으로보면 영화가 맞겠습니다마는 1980년 전두환의 국민정치의식을 환기하려는 정책을 살펴보면
섹스,스포츠,스크린 인데요.구체적으로 명시하면 다음과 같겠습니다.
첫째,컬러TV 방영과 VTR 보급입니다. 이른바 비디오는 섹스산업과 매우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었지요.
둘째, 80년대 급속히 퍼져나간 포르노테잎은 전두환이 노린 국민정치성향을 희석시키기에 충분했죠.
셋째, 80년10월에 우리나라 프로야구단이 창단됩니다. 당시 프로야구는 지역을 기반으로한 창단으로 자연스럽게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역할까지 하게됩니다. 해태-전라도,삼성-경상도,삼미슈퍼스타-경기(인천)
엠비씨청룡-서울 등등 말이죠.

전두환때...

전두환이 정치를 상당히 거칠게 했었죠. 군사독재하고 막 그랬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국민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겠죠?
이런 불만들을 최소화 하기 위해서 전두한은 국민들의 관심을 정치가 아닌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서 3S 정책이라는것을 실시합니다

그것은 바로 Sports, Sex, Screen sex
영어로 시작하면 다 S로 시작하는 이 3S 사업을 실시하면서 우리나라에
프로 축구단과 프로야구단 등이 생겨났습니다.
원래 인간은 근본적으로 본능을 추구 하기 때문에 격렬한 몸싸움을
주로하는 스포츠나 섹스(인간의 기본욕구가 성욕입니다)..그리고
에로영화같은 영화들이 붐을 이루며 이 정책은 결국 먹히게 되죠
국민들은 정치에 대한 불만을 이러한 3S로 해소하곤 했습니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집단적이고 조직적인 스포츠 붐은 이때부터 일어난
것으로 학자들이 대부분 분류하고 있습니다

첫째, 스크린....
스크린 자체의 뜻은 영화를 뜻합니다만.. 여기에서 말하는 스크린 정책은...
컬러TV 방영과 VTR 보급입니다.
이는 두번째에 얘기할 섹스 정책;; ( 뉘앙스가 참......;; ) 과도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둘째, 섹스....
이 무렵, 포르노 테입은 무지하게 판쳤습니다. 여기에 기본적으로 일조한 것이 앞서 말한
VTR보급입니다. 이것이 전제가 되었기에 섹스 정책도 큰 빛을 발휘하게 되고.. 이는 국민들의
정치성향을 희석시키기에 충분했죠.
마지막으로 스포츠입니다.
아시다시피 우리나라 프로야구는 전두환 정권 때 ..생겼습니다.
정확히는 80년 10월??
프로야구 출범당시 각 팀은 지역연고제를 실시하였으므로 자연스레 지역감정도 알게모르게
조장하게되었습니다.
해태-전라도, 삼성-경상도, 삼미슈퍼스타-경기(인천), 엠비씨청룡-서울 등등 말이죠

삼S를 Sports,Screen,Sex라고 합니다.
80년 당시 군부가 다시 정권을 잡기 위해 국민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못하게 다른 곳으로 신경을 쓰도록 스포츠 부분에서는 프로야구를 출범시켰다고 합니다.
스크린은 연예인들을 이용한 대단한 구경거리를 마련해서 국민들의 정신을 빼놓는 것인데 거기에 해당할만한 것이 "국풍81"이라고 하여 무슨 잔치같은 것을 떠들석하게 했었습니다. 일종의 노래자랑같은 것이었는데 거기서 배출된 가수가 이 용으로 "바람이려오"라는 노래를 불러서 조용필의 독주를 견제하며 인기가수의 대열에 서게 되었습니다.

'영화(screen)'은 끊임없이 개봉되는 영화를 통해 다른 것에 관심을 갖지 않도록 하고, 영화를 통해 현재를 달래고 체념적으로 만들어 현실에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게 만든다.


Sex, Sports, Screen이 그것인데 이 세 가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그러한 속성의 것들로서 한 마디로 오락을 나타낸다고도 할 수 있지요.

만약에 질문자께서 지금 컴퓨터 오락을 하고 있는데, 옆에서 자꾸
숙제라하라던가 심부름을 시키려고 짜증나고 하기가 싫지요?
정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보다 중요하고 시급하게 처리해야 할 현안이 있어서 국민들의 불만이 높아지고
있는데, 이를 잠재우기 위해서 국민들의 인기를 끌기 위한 정책을 펴는 것을
Populism이라 합니다. 역사속에서 가장 대표적인 Populism의 사례는,
영화 'Gladiator'에서도 보셨듯이, 로마의 검투 경기였습니다.
한 마디로, 우는 아이 사탕줘서 달래는 식의 정책이라 할 수 있겠지요.

screen sports sex...
그리고 스포츠에서 우리 나라 최초의 프로리그가 생기게 됩니다.
그 프로리그가 바로 야구였고
처음 생긴 프로리그니 만큼 사람들의 관심은 대단했죠.
마침 그때만해도 특별한 여가가 없던 시절에
야구와 영화는 정말 큰 인기 였습니다.
그리고 그때 인기를 끌었던 야구가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거지요.

독재정권이 들어섰을때 국민의 정권에 대한 비판을 억제하기위한 우민화의 수단으로, 혹은 감상적 민족주의를 유도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사용되어졌던 것 같습니다.
대표적으로 독일제3제국 시절 나치의 선전상인 괴벨스는 이를 활용하기위해 베를린올림픽을 유치했고, 이 올림픽은 최초로 TV전파를 타고 세계로 중계된 대회이기도 했지요. 게르만의 우월성을 강조하여 공격적인 독일민족팽창의 욕구를 국민들에게 강하게 어필할수 있었던것 같았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5공화국이 들어서자 괴벨스를 닮고싶어하던 허문도의 머리에서 3S정책이 추진되었던걸로 생각됩니다. 다들 잘 알다시피 80년대 초반엔 프로야구, 프로축구, 민속씨름, 실업배구, 실업농구..등등 각종 프로리그들이 속속 창설되어 국민들을 그쪽으로 집중시켰지요. 애마부인시리즈, 산딸기시리즈, 변강쇠....등등 소문난 에로영화들이 그 시절에 전성기를 누렸던것도 그와 무관하진 않을것입니다.

Color TV 방영도 포함됩니다.
흑백 TV시대에서 컬러TV시대로 바뀌게 된 것이지요.
덕분에 가전회사도 새로운 시장이 열리게 됨에 따라 큰 덕을 보지요.
스크린 정책의 하납니다.

출범 배경이라고하면.. 당신 전두환이 내세운 국가 운영 방책이 3S로
국민들을 열광시켜라! 라는 논리에서 출범 되었죠.
3S 란.. Sports Screen Sex.
이 세가지 인데요.
스포츠의 경우는 당시 축구를 먼저 출범 시키자는 의견이 많았으나
전두환이 야구를 더 좋아했다고 합니다.
스포츠 경기 같은 경우 많은 뉴스거리를 낳게 되는데
그것에 의한 국민들의 시선 분산을 노렸던 거죠.
역시 자기가 생각해도 정치는 아니었으니...
(출처 : '전두환시절의 3s정책에 대해서좀 알려주세요' - 네이버 지식iN)

전두환 정권의 정책!!
물가안정및경제성장.서울올림픽개최;전전대통령은 대통령이되자 정통성시비에서 벗어날려는듯한 움직임을 보였죠...그는 이미 국보위시절  김재익이라는 사람을 기용하였고.... 그의의견대로 시장개방등 여러가지정책을 추진한결과 계속되는 성장률과 흑자를 기록하였고 박대통령시절 경제개발계획을 다완성시켰습니다..참고로 당시에 삼김중 한사람이되었다면... 우리나라경제는 거덜났다고합니다..당시에 우리나라가 계속발전하느냐마느냐에 따라 필리핀같은개도국수준으로 떨어질수도있는위기에 처했기에...아무튼 그의집권기동안 한국경제는 사상최고의전성기를 구가하였고...그는 집권과정에서 저지른 과오를 어느정도 씻어냈습니다 그리고 서민들도 전통시절에 가장 살기 좋은시절이였고 물가걱정없이...과외비걱정없이...지금도 그사람시절을 그리워하는사람들이 제법많죠... 그리고 연속되는흑자기록과함께 서울올림픽이 개최됨으로써 한국의위상도 그만큼 높아지게되었죠...

 

민생치안확립;그는 5.18진압뒤 국보위의장이되고...과거 박정희시절 박정희가했던일처럼.... 삼청교육대를 설립 전국에 깡패들은 모조리 잡아들여서 그의주장이였던 "정의사회구현"을 실행시켰죠..(민주화인사등 반체제인사들이 들어간걸로확인돼 문제가되었지만...) 아무튼 아이러니컬하게 이삼청교육대로 인해 우리나라는 당시 전세계에서 범죄율이 가장낮은 나라가 되었죠 범죄율이 1%정도였다니...말다했죠...) 하지만 지금은 더 무서운세상이죠...그당시라면 꿈도꿀수없는 엽기범죄가 판치는 실정이니...

 

특전사수립;전두환대통령은 과거 미국에유학을 갔다왔죠 그는 거기서 배운 특전사기술을 대통령재임시절에 우리나라특전부대에 주입시켜 우리나라특전사부대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이끄는데 기초를 닦은 특전사부대의아버지라고 불리고있죠...

 

그이외에 그의업적이라면... it강국의기반확립.한강재정비.단임제등이있죠...


(출처 : '전두환 前대통령이 잘한일과 잘 못한일 스피드 답변 내공20' - 네이버 지식iN)

 

전두환 정책의 실패!!

핵무기및여러가지무기개발포기;전두환전대통령은 미국의지지가 필요했죠... 정통성때문에...그는 미국에 자신을 인정해주는대가로 핵무기개발을 포기하고 인센티브보상금및 한국군의현대화라는 얼토당토한 이유를 대며 핵무기개발을 포기합니다...(그런데 핵무기를 개발한다고쳐도... 실험을 과연 어디서할지도 막막하지만 포기는...) 그리고 첨단무기개발이 거의다 완료됬는데 그것도 다 공중분해시켰죠ㅡ.ㅡ

 

5.18 12.12;그는 정권을 잡기위해 부당한행동을 하였죠,,, 12.,12반란으로 정승화총장을 잡아들이고 자신의상관을...그리고 부당하게권력을 장악하는것에 항의하고 반대시위를 벌이는 광주시민들을 총칼로 무자비하게 학살했다는점은 그가 아무리 잘한점이많아도 지워지지않을듯하군요...

 

비자금조성.언론탄압; 그는 자신의측근및 이순자씨의배를 불려주기위해 기업들로부터 바반강제로(안주면 공중분해시키겠다)7000억 일해재단 기금 2500억 포함해 재임기간동안 총9500억의비자금을 거둬들이고... 95년말 이것이 뽀록나고말았죠...,그리고 1년뒤 대법원에서 2500억의 추징금선고를 받았지만 314억을 제외한 한푼도안내고 3년전에는 29만원밖에없다며 거짓말을 쳤죠ㅡ.ㅡ 그리고 언론탄압...그가 실세가되자 그에게잘보여 출세할려는 언론인들이 하나둘생기기시작했죠...이진희.하순봉등...이때 이진희mbc사장은 전두환과인터뷰를해 벼슬를 하는 영광을안았고.... 이때 뉴스들은 머리첫기사에 전두환대통령혹은 영부인이순자께서는 오늘 어쩌구저쩌구했다라는 말을 먼저해야했죠...그리고 보도지침이라는 언론통제 즉 기사하나하나도 검열을 받은뒤 썼을정도로 언론및인권탄압이 심했죠...

 

결론은 그는 잘한것보다 잘못한것이 많다는점이군요... 그이외에는 생략합니다.... 인신공격이 될수도있기에...


(출처 : '전두환 前대통령이 잘한일과 잘 못한일 스피드 답변 내공20' - 네이버 지식iN)

 

광주민주화운동

 

1980년 5월18에 전라도 광주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시민들의 민주화운동을 말합니다.

 

당시에 신군부라고 하는, 전두환, 노태우를 중심으로 하는 군장성들이 군사쿠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습니다. (12.12사태)

이 신군부의 쿠테타에 대해 반대하여 일어났던 것이 광주민주화운동, 광주민중항쟁입니다.

신군부는 공수부대의 투입등으로  민주주의 수호를 주장하는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탄압, 진압합니다. 그 과정에서 시위대를 향한 발포가 이루어지면서, 죽는 사람들이 발생하게 되고,  참다참다 참지못한 시민들은 자위수단으로 무장을 하게 됩니다. 인근 지역, 주변의 경찰서를 통해 무기를 획득하고, 시민군으로 무장하여, 진압측은 공수부대와 대치하게 됩니다. 군측은 광주접근을 모두 차단하고, 완전 고립시킵니다. 또한 보도통제를 통해 광주에서의 시민들의 항쟁을 빨갱이, 좌경분자들에 의한 소요사태라고 호도하며, 진실을 감추려 합니다. 이러한 진실을 전체 국민들에게 알리고, 결국에는 정권의 위협이 될 소지가 있는 재야인사들은 모두 사전에 검거하기도 합니다.

 

고립된 광주에서 시민들은 자체적으로 규율을 세워 지킴으로써, 난삽하거나, 무질서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이를 가리켜, 우리민족 공동체문화의 우수성, 탁월성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군의 철저한 통제와 진입작전으로 결국에는 마지막항전지인 도청에서 5.18광주민주화운동은 진압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유명한 말이

"우리는 오늘 패배하지만,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기억할 것이다(? 맞나?? ㅡ.ㅡ;)" 라는 말입니다.

 

결과, 엄청난 사망자, 행불자를 만들어낸 사건이지만, 5.18로 인해서, 미국이라는 나라의 본질이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밝혀지게 됩니다. 이전에는 혈맹의 나라, 우방국으로 좋은 이미지로서의 미국을 생각하고 있던 사람들이, 광주민주화 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군을 투입한 것과 관련, 미국의 허락이나, 묵인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군 작전권은 미국에게 있다는거~~) 더불어, 항공모함을 인근해상에 배치시킴 역시도, 민주화를 위해 항쟁하는 시민들을 위함이 아니라, 혹시나 모를 사태에 대비하게 위함이었다는 것까지 밝혀지게되면서, 미국을 좋게만 바라볼수는 없겠다. 하는 생각이 자리잡게 됩니다.

 


(출처 : '5.18광주민주화운동에대해 알기쉽게 설명해주세요' - 네이버 지식iN)

 

 

나의 의견

 

 나는 광주민주화운동을 서민의 입장에서 보는 사람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주범은 정신적으로 즐거운 민주화를 찾는 학생들이고, 그에 응하여 대결 양상을 보인 전두환 전대통령은 두번쨰로 잘못한 사람이다. 그리고 가장큰 피해자는 그 당시 학생들의 어머니 아버지 동생들 이다. 학생들을 제외한 서민들이 민주화를 원해서 나가서 싸웠겠는가? 학생들이야 자신의 신념에 자신의 목숨을 던진 것이지만, 그들의 어머니 아버지 형제 자매들은 자식이 죽고 형이 죽고 동생이 죽고 하는데 어느 누가 가만히, 보고만 있겠는가. 결국 동기 유발자들은 학생들의 무모한 투쟁 의식 때문이다.

한마디로 지식인들이 주동하여 서민들을 죽인것이다......

서민들한테 있어서 민주화냐 독재냐가 중요한게 아니다. 결국 자신이 먹고 살기 좋은 나라가 좋은 것이지.. 정치의 자유란 결국 지식인들의 배고픔을 달래 주는 것일 뿐이라 생각한다.

 분명 직접적으로 총칼을 들이댄 전두환 정부 한테도 잘못이 없는게 아니다.  하지만 군사적인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찬 자에게 투쟁으로써 맞서려 했다는 것은, 지식인으로써 이성적이지 못한 본성에 치우쳐 버린 아둔한 짓이다.

 지식인이란 무엇인가? 단지 자신의 사상을 세상에 인식시켜야만 만족하는 자기 만족으로써만의 집단인가? 아니면 다른자들보다 더 배우고 깨우쳐 그로써 민중들을 계몽하기위한 집단인가? 

난 전자 보다는 후자가 지식인에 맞다고 보고, 과거 우리가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로 세계가 나뉘어

6.25 한국전쟁이라는, 민족의 비극을 낳게 되었던 원인 역시도 지식인들의 민중앞에 나서고자 하는 열혈 의지와 자신의 지식을 세상에 관철시키고자한 자기만족적인 행동이 어우러져서 생긴 비극 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광주 민주화 운동의 첫번째 범인은 지식인이요, 두번째 범인은 정권이요, 마지막으로 피해자는 지식인들의 부모 형제 자식 친구들 이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전두환 이란 인물에 대한 평가는 Not bad다. 우리나라에 그나마 박정희 대통령때부터 경제 발전의 기틀을 완성시킨 시절이라는 평가를 받고 또한 국가 내부의 치안에 있어서 불안요소를 제거 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도 서민들의 인식에 살기 좋은 세상이였어라는 생각을 갖게 한것 자체 만으로도 인정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독재시도와, 비리금 때문에 크게 망가졌지만, 현재까지 우리나라 대통령 업적과 궤보를 살펴보면 그나마 낳은것 같다. 분명 지식인들한테는 최악의 사회였겠지만......

 마지막으로 요점과 다른 궁금증인데, 언제나 지식인들이 말한는  "그때는 당연히 그렇게 경제가 발전 할 수 밖에 없었어"라는 말은 어떠한 근거에서 그런말을 하는지 모르겠고, 왜 지금은 않되는지도 알고 싶다. 

출처 : 어느 대학생의 각하에 대한 분석....인터넷 발췌
글쓴이 : 박문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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