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각하

[스크랩] 프리존에서 전 전대통령님에 대한 글을 퍼왔습니다.

그리운 오공 2006. 10. 23. 23:45
작성자 : 비트겐슈타인    작성일 : 2006/10/20    조회 : 177    찬성/반대 : 13/1    점수 : 43
‘全斗煥’을 追憶하며......

 1980년대는 내게 가장 많은 추억이 있는 시대이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가장 먼저 돌아가 보고 싶은 때이다. 하지만 지금은, 한참 공부를 할 나이였고 또 그것에서 벗어나고 싶어 주위의 눈을 속이며 당장의 안락함을 좇으려 하기도 했던, 정말 10代다웠던,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지만 웃음이라는 도구만이 떠올려 줄 수 있는 머나 먼 시대가 되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김일성의 대남공작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 - 대표적으로 아웅산 테러, 칼(KAL)기 폭파 사건 - 과 최루탄이 난무하던 길거리라는, 생각해보면 상당히 모순이었던 - 북괴는 침략 야욕을 버리지 못하여 항상 그 기회를 보고 있는데도 팔자 좋은 대학생들은 데모를 하는 -, 어찌 보아야 하며 생각해야 할 지 모르는 세월이었다고도 말 할 수 있겠다.

 

反共에 대한 학교에서의 활동이나 대학생들의 데모 모두, 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그 양자가 정당성이 있는 것 같았고, 어쩔 때는 생각 없는 마음으로 그저 기존의 세력에 대한 왠지 모를 거부감으로 정권을 비난하는 쪽을 편든 적도 있었다. 반대로, 내가 다니던 학교 가까이 있는 어느 대학교에서 데모를 하는 것을 모르고 그 쪽 방면으로 가다가 한 2m 정도 앞에서 최루탄이 터져 눈도 못 뜨고 그 정신이 나갈 것 같은 매운 맛에 기침을 하면서, 데모질 좀 그만 하라고 대학생들을 욕한 적도 있었다.

 

김영삼의 ‘군정 종식(軍政 終熄)’이라는 선동에 넘어가 軍人들이 하는 정치는 ‘無條件’ 나쁜 것이라는 일종의 편협성으로 세상을 바라보기도 하였다. 그러다 또다시 ‘盧泰愚’라는 軍出身대통령이 탄생하면서 그 많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상한 것일까라는 알쏭달쏭한 생각을, 3金이라는 사람들의 선동에 세뇌된 생각으로 하면서 그 시절은 빠르게 지나갔다.

 

내가 고등학생들을 잠깐 가르칠 적이었다. 그들은 나를 ‘大魔王’이라 불렀다. 성격이 나빠서가 아니라 바로 시험문제를 내는 것에 대한 엄포 때문이었다. 나는 항상, 시험문제를 대단히 어렵게 낼 것이니 단단히 공부를 하라고 시험 전에 알렸다. 그러면서 항상 평소의 문제 푸는 트레이닝도 ‘하드(Hard)'하게 시켰다.

 

또 인터넷이라는 것이 발달한 후에는 엄포도 첨단이 되어, 그들 부모님들에게 모든 과정 내용 결과들을 직접 통보 할 수 있는 것도 그들에게는 그런 행동을 하는 내가 대단히 얄밉고 싫었겠으며 그로 인하여 그들의 안이한 생활은 최대한 제약 되었다. 그러니 ’대마왕‘이라 불릴 수밖에.....

 

그들이 벌써 대학생들이다. 가끔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들은 내가 그때 그렇게 행동했던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는 말들을 한다. E여대에 다녔던 한 아이는 ‘그 때 그렇게 하드 트레이닝을 시켜주셔서 수능시험장에 들어가서 문제를 받아보자마자 답이 눈에 보였다‘는 말을 한 적도 있다. 거기에 덧붙여 ’그것보다도 더 어렵게 나왔더라도 평소에 트레이닝을 난이도 있게 해 놓았어서 아무렇지도 않았을 것‘이란 말도 하였다.

 

아마 DJ정권이 들어서고 나서부터 ‘御用먹물들’에게서부터 나오던 말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 것이 있다.

 

“지난 70년대 80년대 정권에서 反共을 했던 것은 국민들에게 공포감과 긴장감을 조성하여 자신들의 정당성과 정권유지를 하려고 한 순수하지 못했던 것 이었다”라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들었을 때 ‘아무 생각 없이’ ‘그럴 수도 있었겠구나’ 그랬다. 그러나 조금씩 저들의 反逆의 기질을 드러내면서 그것이 ‘아차!’하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나는 군사방면의 전문가가 아니라 몰랐었으나 주위의 그 방면의 사람들에게 말을 들어보면 그때 - 70년대 80년대 - 당시에는 충분히 反共을 하고도 남을 위협적인 군사력을 ‘북괴(北傀)’가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얘기를 들은 지가 10년이 다 되어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데, 1970년대 初였던가에, 美國의 공군인가 해군 정찰기가 東海를 정찰하고 있다가 북괴의 대공포에 격추 되었던 사건이 있었다. 정말 美國을 우습게 볼 정도로 괴수 김일성 집단의 파워는 엄청났던 것이었다. 美國이 그것에 대한 보복으로 함부로 무력을 사용하지 못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 이것 말고 여러 예들이 있었으나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저들과 우리나라 반역도들이 말하는 ‘친애하는 지도자 김일성 동지’의 그 무적파워가 70년대 후반 들어서부터 80년대 말, 우리가 88올림픽을 치를 적에는 완전히 꺾인 것이다 - 그리고 그 이후로는 한국에서도, 노태우 정권에서 반공이란 단어도, 아무리 그가 軍出身이었어도, 서서히 사멸되어가는 단어로, 잘 쓰여지지 않았으며 서서히 잊혀져가는 것으로 변신한 것을 기억하는데, 물론 북괴의 힘이 약해지면서 그에 비례하여 우리들의 반공의식 또한 필요성이 줄어들거나 안이해져서 그랬을 수도 있다 - .

 

이런 짧은 지식도 없이 들었을 때에는, 저 반역도당들의 말이 충분히 맞을 수 있다고 지레 짐작으로 생각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저들의 공작 - 슨상님과 그 일당 - 이 그만큼 치밀했었으니까...특히 권위의 오류에 약한 민족성(?)을 십분 활용하여 교수라는 ‘새끼들’ - 이런 것들은 ‘새끼’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라 생각하나 조금 자제하여 - 이 동원 - 된 것인지 스스로 나온 것인지 - 되어 설레발을 치면서 선동질을 해 댔다.

 

저 위의 상황과 같은 근거가 있음에도 절대 그런 것은 말하지 않은 채 그저 反逆 슨상의 치밀한 플랜에 발맞추어 국민들을 병신을 만들면서 함부로 씨부려댔다. 그것으로 우리는 드디어 ‘反共’이란 단어가 머릿속에서 사라지며 ‘民族’이란 단어로 ‘共助’를 만들어 내는 현대판 연금술이 탄생하게 된다.

 

핵장난이 터지고 나서 생각이 든 것이 있다. 최소한 지금 상황에서만 보더라도, 차라리 ‘反共’이라는 정신무장 - 그것이 사람들을 국민들을 긴장시키는 것이라도 - 을 계속 해 왔었던 것이 좋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거기에 全斗煥의 ‘反共政策’이 오버랩 되면서 또 그것이 근거가 충분했었다는 기억이 떠오르면서 그의 대한 생각과 그 시절에 대한 추억이 떠올랐다.

 

나는 그런 단순한 이유만으로 全斗煥씨를 비호하려, 모든 것을 다 잘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물론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비호하고 싶지만... - .솔직히 말하지만, 내게 그런 권좌에 오를 기회가 있었어도 그렇게 했을지 모른다고 말한다. 저 정신 나간 빨갱이들처럼 ‘나는 도덕적이며 깨끗하다’고 가식은 떨지 못하겠다. 또 군인들은 자신들이 민주화 세력이니 자주니 하는 가식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냥 통폐합한다면 했고 무엇을 장악했으면서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사람들을 敵으로 생각하고 ‘민주화 투쟁’을 했다는 사람들은 뭔가? 자신들은 민주화 자주세력 - 물론 주체사상을 바탕으로 출발한 것부터 ‘絶對’ 무식한 짓거리를 한 것을 깨닫지 못했고 또 못하고 있는 등신들이지만 - 이라면서 悖惡無道한 김일성과 김정일을 ‘위수김 친지김 -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하면서 불렀고 또 지금도 그 괴수 父子의 변태적인 사상에 물든 머리로 꼴값질 - 오늘도 어떤 미친놈이 개성을 갔다가 춤판까지 벌였고 - 들을 하고 있다.

 

전두환의 ‘체육관 선거’나 그에 대한 민의를 무시한 것은 당연히 잘못한 것이다 - ‘사과상자’도 물론 잘못한 것이다 - . 그러나 권좌에 오른 이후, 그는, 상당히 이상적이며 관념적인 언사로 들리겠으나, 국민들이 권좌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현실적으로‘ 바라는 ‘배 채우기’를 실천한 사람 이였다 - 물론 굶어 뒈져도 도덕적이어야 했다는 가식적인 잡소리를 씨부리는 등신들에게는 아니겠지만 - . 또 지금과 같은 초위기 상황에 놓여 있으니 그런 정책 - 반공 - 을 펼쳤던 것이 더더욱 맞았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내가 학생들을 가르친 방식이 절대 옳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안이하고 해이한 정신보다는 최소한의 有備無患자세를 가지는 것은 앞날에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충분히 까지는 아니어도 그리 당황하지 않고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어찌 보면 인생이라는 기나긴 여정 가운데 잠깐 스쳐가는 하나의 간이역에 지나지 않는 入試조차도 그렇게 긴장감을 가지고 노력을 해야 함에, 그 대상이 국가의 통치라는 것에는 어떠할 것인가?

 

역사의 해석을 자기들의 세대에서 섣불리 - 그것도 정확한 객관적 해석이 아니며 편향되고 그 당시의, 긴 역사로 볼 때의 단 하나의 점에 불과한 부분을 세상을 모두 덮고 있는 것처럼 함부로 - 해석하려 했던 사람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불리어져 왔고 왜곡되어 왔던 제5공화국 전두환 정권에 대한 평가는, 최소한 2006년 10월 9일 부로 다시 평가되고 쓰여야 한다.

 

이 글은 주관적인 글이다. 왜냐? 나라를 말아 처먹는 빨갱이놈들도 제 놈들에게 맞추어 함부로 역사를 재단하는데, 나라를 말아 처먹는 짓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약간의 잘못 - 체육관 선거 - 은 있지만 나라 잘 되게 하고 국민들을 배불린 사람을 뭐 이 정도도 美化를 못시키라는 법은 없으니까. 사실 미화도 아니다. 그 정도 잘못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그가 박정희 대통령의 바톤을 이어받아 국가 경제를 흥기 시킨 것은 멀쩡한 사실이니......

 

또 이런 말 하면 사람을 죽였다니 뭐니 하는 좀비들 - 사람이 아님 - 도 있는데, 그가 직접 그렇게 하라고 했다는 정확한 근거와 그 죽거나 다친 사람들이 올바른 방법으로 스트라이크를 한 것이었는지 정확한 근거를 제시하고 씨부리시길 바란다.

 

동족을 죽이는 ‘변태 괴수’에게 셀 수도 없는 돈을 대주고 그 결과로 우리 머리 위로 核이 날아오도록 만든, 반성은커녕 여전히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면서 - 요즘은 똥줄이 타는지 더 돌아다니던데 - 궤변을 뿌리고 있는 펭귄 같은 늙은이하고는 비교가 안 되는 사람이다. 최소한 ‘百潭寺’에 다녀 온 것만으로도 그렇다.

 

80년대는 아름다운 시대였다. 내가 기억이 나는 것이, 70년대 말까지만 해도 당시의 10代들이 한참 뛰어놀 수 있는, 아파트단지건 주택단지건 축구도 하고 야구도 할 수 있던 공간이 많이 있었다. 그러다 80년대를 넘어서 어느 순간부터 동네에 자동차들이 한 대 두 대씩 늘어가면서, 우리의 ‘플레이그라운드’는 좁아져 갔지만 많은 사람들의 배부른 생활이 가시화 되어가던 ‘행복한 시절’이었다.

 

어쨌든 그런 단편적인 이유에서라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몰라도 최소한 나에게는, ‘全斗煥’이라는 인물은 멋있는 추억으로 남아있다. 특히 이런 시절에는 더욱 기억이 난다.....

출처 : 프리존에서 전 전대통령님에 대한 글을 퍼왔습니다.
글쓴이 : 바보 -k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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