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각하

[스크랩] 전두환 각하의 리더쉽에 관한 논문...김 구님께서 올린 글입니다

그리운 오공 2006. 12. 27. 16:38
전두한 각하의 리더쉽에 관한 논문입니다..
전두환 각하의 리더쉽은 석,박사 과정 등 연구에
상당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가 고액의 댓가를 지불하고 직접 논문을 열람하였습니다.

상당히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입장의 자료인것으로 보입니다..
-원문을 가감없이 그대로 옮겼습니다..

순서

1.전두환의 성장과정 및 비젼빌딩
2.전두환의 대언론관
3.전두환의 대외정책
4.전두환의 인간관계
5.전두환의 정치리더쉽 분석
6.결 론



성장배경 및 비젼빌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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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린시절
과거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전두환도 어린 시절을 불우하고 빈한한 가운데 보냈다. 그는 일제치하인 1931년 경남 합천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부모는 살기가 어려워 전두환이 여덟살 때, 만주로 가서 잠시 살다가 거기서도 여의치 않아 1년만에 대구로 돌아왔다. 그의 집안은 아무런 사회적 배경이나 경제적 기반이 없었고, 너무 못 살아서 그의 식구들은 1주일에 보리밥을 두 번 먹으면 다행이었고 점심을 굶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어린 두환은 신물배달, 약배달, 음식배달, 등을하며 생계를 보태지 않을 수 없었고 국민학교도 겨우 두 학년 동안만 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소년 전두환은 운동을 아주 좋아했다. 대구 희도국민학교 시절부터 축구 골기퍼, 육상, 씨름선수였다. 거의 담임선생은 그가 “친절하고 모든 일에 열의가 있고, 주의력과 기억력이 풍부하며, 책임감이 왕성한” 소년이라고 평했다 대구공립공업중학에 다닐 때나 육사생도시절에도 그는 골기퍼로 축구부 주장이었다. 비록 가난하고 불우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그는 비교적 건강하고 적극적인 자세로 생활했던 것 같다.

2. 육사시절
특히 청년 두환이 1951년 12월 육사생도모집에 합격한 것은 그의 일생에 있어 큰 전환기였던 것 같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 지리웨이대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치러진 입학식을 마치면서 당당한 정규육사 11기 생도가 되었다. 그는 가난하고 아무 사회적 배경도 없는 시골소년에서 일약 육사라는 국립 군사교육기관의 일원이 되었고 또 여기서 평생을 함께 지낼 친구들을 많이 사귈수 있었다 그는 육사 재학시 맥아더와 같은 오성장군을 꿈꾸며 친한 동료들과 오성회(五星會)를 조직하여 친목을 도모했고, 5⋅16이후에는 일부육사 출신장교들의 군대 사조직인 하나회의 리더로서 특히 박정희 대통령이 뒤를 봐주는 장교였다. 또 전두환은 제1공수여단 특전대 교육장교시절 이규동 장군의 딸로 이화여대 의대 2년생인 이순자와 결혼함으로써 개인적으로는 일종의 ‘신분상승’도 경험했다. 이같은 그의 군대생활은 그로 하여금 자신에 대해 자부심 혹은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게 했다.

더구나 그는 특유의 친화력과 추진력, 그리고 처세술로 실제로 승승장구했던 장교였다. 그가 대위로 중앙정보부 제7국 인사과장에 보임될 때, 그의 추천인은 장인 이규동 장군과 박정희 대통령의 경호실장 박종규였다. 또, 그는 1969년 수경사 30대대 대대장 시절(중령)11기 이후의 장교들로 이루어진 육사동창회 북극성회의 회장에 선출되어 선두주자의 자리를 굳혔다. 더욱이 회장선거에서 실무파 장교였던 그는 학구파였던 김성진 중령을 누르고 만장일치로 회장에 추대되었다. 또 그는 동기들 중 첫 번째로 대령으로 진급하면서 곧장 참모총장실 수석부관에 기용됨으로써 명실공히 선두주자가 되었다. 그가 육사 재학시절 성적이 중간에도 못 미쳤던 축구선수에 불과했었지만, 동창회장 전두환은 단순히 편의상의 연락책이 아닌 “실제로 모든 회원의 존경을 받는 모범적인 리더”였다. 이로써 군인 전두환의 자신에 대한 자긍심과 자부심은 커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지극정성으로 챙기고 섬겨주는 아내 이순자를 두고 자신의 딸에게 “너도 커서 어머니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또 그 딸은 “어머니는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분이야”라고 말할수 있었던 가정환경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또한 한 사람의 군인엘리트로서 편안한 자신감을 갖게 하는 요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전두환은 외부활동 면에서 자신이 ‘어느 누구에게도 꿀릴 것이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했던 것 같다. 박정희는 전역식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으면서 다시는 나같은 불행한 군인이 없기를 바란다고 했지만, 전두환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시종 자신감있는 자세와 어조로 전 역사를 읽었다. 그는 30년간의 군 생활을 떠나는 것이 비록 섭섭하고 아쉽지만 군생활을 통해 체득한 애국충정과 희생정신으로 국운개척의 험한 길을 결연히 헤쳐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육사생도시절이후 군장교로서 사회정치적 혼란과 격변을 지켜보며 오직 정직과 성실로써 맡은 바 책무를 다하여 왔을 뿐 이라면서 앞으로는 국가지도자로서 새 역사, 새 질서 창조에 신명을 바치겠다고 선언했다. 또 전두환은 자신의 전 역사에서도 정규육사생도들은 완벽한 민주적 교육 제도하에서 우리나라 어느 계층보다 민주적 생활규범과 윤리를 체험을 통해 체득하였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렇게 저돌적이지만, 인간관계에 있어서 만큼은 주위사람들을 자신의 곁으로 끌어 모으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전두환은 훗날 대통령의 지위까지 오르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로 이용하게 된다.


대언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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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시대에도 언론에 자유가 통제되었으나 전두환 시기 초에는 더욱 언론통제가 강화되었다. 1980년 언론법은 문화공보부에 의해 모든 매스컴의 허가증을 발부할 수 있고 취소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이 법은 매스컴의 의무를 엄격히 규정했고 자유를 희생한 의무를 강조했다. 언론 기본법은 정부가 합동취재보고체제(Pool Report System)을 취하여 뉴스의내용과 타입을 선발 심사하였다. 또한 매년 기자들로 하여금 프레스카드(Press Card)의 갱신을 요구하였다. 언론 기본법을 통해 정부는 매스컴의 계층적인 구조를 강화하고 강제력을 사용하여 언론 통제를 강화하였다. 또한 사적 소유의 뉴스방송은 공영방송으로 합병되었고 모든 뉴스통신은 연합통신으로 합병되었다. 정부의 언론 통제로 인해 왜곡되고 편파적인 방송을 가능케 했다.

그럼 다음으로는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부터의 대언론관의 구체적인 사례들을 하나하나 짚어 보고자 한다. 시기적으로 가정먼저 이른바 신군부의 [K공작]을 뽑을 수 있는데 이는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의 정권장악 음모에 포함된 여론조작계획이다. 1980년 중순이전의 보안사 언론대책반에서 입안한 ‘K공작’은 신군부 쪽의 정권장악에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고 반대여론을 차단하기 위해 언론계 중진들과의 개별 접촉 등을 통해 언론을 조정.통제하겠다는 음모였는데 이 과정에서 신군부는 7대 중앙일간지와 5대방송사, 2대통신사의 사장, 논설위원, 편집국장등 94명을 1단계 회유대상으로 선정하고 이 가운데 회유정도가 양호한 이들을 2단계. 3단계로 넘겨 이들을 적극 활용한다는 계획이었다.

다음으로는 신군부가 1980년 7월30일 신문협회로 하여금 ‘자율정화 결의’를 하도록 강제하여 수 백명의 기자들을 해직시키고 일간지를 제외한 정기간행물(전체정기간행물의 12%에 해당) 172종을 폐간시켰던 이른바 언론대학살과 1980년 11월에 신문협회와 방송협회에 강요한 ‘건전 언론육성과 창달을 위한 결의문’을 빙자하여 단행하였던 언론의 통폐합이다. 여기서 전두환정권은 방송을 공영화하고 신문과 방송의 겸영을 금지시켰으며, 신문을 통폐합하고 중앙지의 지방주재 기자를 철수, 통신사의 통폐합으로 대형 단일 통신사를 설립하였다.

마지막으로 정두환 정권의 보도지침인데 이것은 청와대 정무비서실의 언론담당1급 비서관이 전화로 문화공보부 홍보조정실장에게 지시하면 실장은 문화공보부 장관의 결제를 받아 이 내용을 각 매체담당자인 보도담당관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전두환 정권의 조작된 여론을 강제 발행하는 형식이었다. 이것과 더불어 각 언론사는 문화공보부 절대적인 권력으로부터 내려오는 ‘가’, ‘불가’, ‘절대불가’라는 형식의 보도통제지침인 사전심의제도에 의해 언론의 자율성를 구속받았다. 언제나 대외적으로는 언론의 자유를 부르짖으며, 박정희대통령 시절의 언론정책과 관련해 “비판과 자유를 무조건 억압하고 언론의 기능을 위축시킨 1970년대”라고 비판한 전두환의 대언론관에는 언론의 자유에는 책임이라는 것이 따른다는 인식과 언론의 국민 계도적인 기능을 중시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대외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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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출현 과정에서 정통성과 합법성의 문제를 가지고 출범한 제 5공화국은 국내문제의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대외적으로 적극적인 외교정책에 치중하였다. 제 5공화국은 외교정책의 목표를 안보평화체제 강화, 한미동맹관계 강화, 평화통일 외교기반 확충, 남북화해를 위한 국제환경 조성, 민주화합 통일방안 지지획득, 한일협력관계 개선, 무역확대, 경제 기술협력 증진, 국제지위 향상, 공산국가들과의 관계개선 등에 두었다.

1.통일외교에 있어서의 외교역량
통일은 국가의 진로를 결정할 수 있을 만큼의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으며, 정통성 확보 수단이었으며 가장 효과적인 국민동원 수단으로 사용되어 왔다. 1980녕대가 통일 외교적 측면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시기부터 남한이 실질적으로 남북대화를 주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이 시기부터 남한이 특정의제를 제의하고 북한이 회답하는 구도가 형성되어졌다는 것이다. 전두환 정부는 북한에 대해 적극적인 정책을 펼쳐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통일 방안을 제시하였고 북한측의 제의를 과감하게 받아들였다. 그 결과 이산가족 상봉과 예술공연단의 남북한 교환 방문등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전두환 정부의 통일정책은 위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그 내용이 과감하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박정희 정부가 인도적, 경제적 문제 등 쉬운 문제부터 해결해나가려는 비정치적이고, 점진적인 접근방법이었다면, 전두한 정부의 방식은 남북한 관계개선과 통일문제를 총괄하여 해결해나려는 절충식 접근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80년대 통일외교는 과거 어느 정부때보다 남한측이 주도적인 입장이었다고 함에 의의를 둘 수 있으나, 그것은 ‘정통성이 결여된 정권의 유지’라고 하는 정권의 논리로 이용하고, 대중을 동원하는데 사용했다는 한계가 있다.

2.안보적 외교역량
1)한ㆍ미 안보협력
전두환 대통령의 미국방문은 1970년대의 다소 불편하였던 양국관계를 해소하고 1980년대들어와 새로운 차원의 성숙한 동반자 관계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1983년 10월 전두환 대통령의 서남아 순방일정 도중 아웅산 폭탄테러로 17명의 고위 공직자가 사망하는 참사가 일어났는데 미국은 이에 즉각적인 외교적 지원과 강력한 한국 방위 결의를 천명하였다. 85년 4월에는 전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하여 재선된 레이건과 정상회담을 가졌고,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우호협력관계를 다졌다. 전두환 정권은 초기에 정통성확보를 위하여 미국의 안전보장을 얻어내기 위한 안보외교에 치중하였으나, 한미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양국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졌으며, 점차 수원국의 입장을 벗어나 동반자적인 입장으로 외교를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

2)한,일 협력
1980년대에 들어 소련과 북한의 군사력 증강이 동북아의 안보에 커다란 위협요인으로 나타나게 되자 동북아 안전을 위한 한,미,일간의 협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1983년 나카소네 야스히로 수상은 한국을 방문하여 정상회담을 갖고, 한,일 경제협력과 우호관계를 다짐하고 양국간 ‘핫라인’설치 등에 합의하였다. 전두환 정권은 외무회담과 정상회담을 통하여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할 총 40억 규모의 차관을 일본으로부터 얻어내어 경제개발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였으며, 일본의 대북접근을 견제함으로써 남북한 및 동북아 정세에 있어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자 하였다.

3.문화적 외교역량
한국이 분단국과 개도국이라는 제약에도 80년대에 들어와 아시안게임과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전반적인 면모를 긍정적으로 또한 적극적으로 전세계에 알리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으며, 그 결과 우리 나라의 국제적 지위를 크게 격상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서울 올림픽은 아시아에 있어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개최되었고, 전세계적으로 식민지의 역사를 갖고 있으면서 올림픽을 개최한 최초의 국가라는 점에서 의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외교적으로 동서양 국가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어 세계의 긴장완화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과 무엇보다 중국, 소련 및 동구권 국가들과의 경제,문화교류와 협력을 증진하는 등 북방외교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크다 하겠다.

4.경제적 외교역량
세계경제는 1973년 제1차 석유파동에 이어 79년 또 한 차례의 석유파동과 경기침체로 인하여 보호주의 압력이 심화, 확산되는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세계시장에서의 경쟁을 통한 한국 산업의 체질 강화와 국제경쟁력 제고를 위하여 1980년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수입 자유화 ‘예시제’를 도입하여 매년 단계적으로 실시하였으며, 1986년 이후 국제 수지가 흑자로 전환되고 그 규모가 확대됨에 따라 수입자유화를 가속화하였다. 1980년대 후반 3저(저금리,저유가,저달러화)여건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적극적인 경제,통상외교를 벌인 결과, 정부수립 후 40년이 지난 1988년에 수출이 593억 달러로 세계10위로 1인당 국민소득이 4040달러로 GNP규모면에서 세계 18위로 부상하였으며, 경상수지도 138억 달러의 흑자를 기록하는 등 경제발전을 이룩하였다.

5.對 비동맹국 외교의 강화
전두환 대통령은 80년대에 들어 중요한 경제권으로 부상하는 아시아 태평양지역에 대한 적극적인 협력외교를 자신이 직접순방, 정상회담을 통한 방식으로 추지했다. 1981년 아세안 5개국순방과 82년 아프리카 4개국 방문이 그것이다. 전 대통령은 이 순방을 통해 아세안에 대해, 아시아직역에서의 안정과 평화, 그리고 번영에 공동관심을 표명하면서 상호 협력을 다짐했고, 아프리카 4개국들과는 관계개선과 함께 우호와 경제협력관계 증진에 힘썼다. 이같은 비동맹 외교의 적극적인 추진은 전통적으로 북한에 비해 열세에 놓여 있었던 비동맹권내에서 한반도의 실정을 이해시키고, 우리나라의 위상을 높이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정통성 결여라고 하는 국내적인 문제를 외교와 안보, 통일문제 등 국외적인 문제서 해결하기 위한 노력의 차원에서 비동맹외교가 추진되었다는 점에서 비판의 여지가 있지만 외교적 창구의 다변화와 對UN외교를 위한 지지 세력의 확보라는 차원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으며, 신 냉전 구조하에서도 비동맹외교 부분은 외교역량의 측면에서 어느 정도 자율성을 가지고 추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인간관계 및 리더쉽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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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은 1979년 12월 12일에 군사 쿠테타를 통해 정권을 잡는 과정에서도 그가 맺었던 인간관계의 이득을 톡톡히 챙기게 되는데, 이는 전두환이 육사생도였던 시절부터 군인으로 성장하고 활동하는 동안 동료들과 후배들 사이에서 의리있고 책임감있는 ‘맏형과 같은 존재’로 그의 가족환경보다는 그가 성장한 이후 접한 사회적으로 접했던 환경에 적극적으로 적응해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 형성된 인격으로 생각된다. 전두환은 자기와 인간적 인연을 맺은 선배, 동료, 후배, 부하들을 잘 챙기고 군지휘관으로서도 그는 “인간미 있는 맏형”과 같은 존재로 주위에 의해 평가되는데, 이는 언제나 동기중 선두주자로서 청와대 경호실, 수경사, 보안사, 특전사, 서부전선부대등과 같은 노른자위 보직을 끝내면 이를 동생과 같은 노태우, 정호용, 김복동 등 하나회 회원들에게 인계 시켰던 데서 알 수 있다. 이렇게 보스로서 잘 다져놓은 동료, 후배들과의 인간관계는 그가 12.12나 5.17과 같은 중대시기에 쿠테타를 계획하고 실천하는데 주요한 자원이었을 것이다.

즉 그는 12.12나 5.17에 대해 국가적인 차원에서 나름대로 정당화 할수 있겠지만, 실제의 내용을 보면, 그것은 전두환이 동료와 후배들의 보스로서 혼란한 시기에 ‘군개혁’과 ‘국가안정’을 명분으로 권력을 잡아 그들의 기득권을 철저하게 챙겨준다는 형제애적 1차적 인간관계의 연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것은 당시 비육사출신 장성들로 이루어진 계엄군계통을 무시하고, 맏형격이던 보스 전두환이 보안사령관으로서 서울에서 실질적으로 정국을 장악하고 엄호하는 가운데 정호용, 노태우, 그리고 박병준과 같은 그의 육사출신 동료집단(이른 바 12.12세력그룹)이 기민하게 협조하고, 행동한 것만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 같은 전두환의 보스기질로 형성된 인간관계의 한계점은 적어도 다음의 두 가지 특성을 지녔던 것으로 생각된다. 첫째 ‘박정희세력’의 범위가 군내외를 막론하고 상당히 광범위했던 것과 비교해서 ‘전두환 세력’은 그 범위가 육사동문이라는 지극히 1차적인 범주에 제한되어 있었다는것과 둘째, 물론 의리와 끈끈한 정으로 연결되었겠지만 내용적으로 볼 때는 후에 “물질적인 시혜”가 뒷받침 되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그는 박정희대통령 주변의 차지철, 박종규와 같은 선배들로부터 받은 막대한 용돈을 통크게쓰고 자신의 주변을 조직적으로 관리하면서 형성된 인간관계는 한국적 인간관계의 한 예라 할수 있다. 이러한 인간관계에 익숙한 그의 리더쉽의 특징은 유사시의 의리와 정을 바탕으로 “소단위 집단행동”을 기동력있게 유도해 내거나 권력을 잡고난 후 통치를 하는데 효율성을 발휘했을 것이나, 이러한 그의 보스기질은 엄격한 기율과 상명하복의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권위주의적 군사문화가 우리의 정치사회에 그대로 잔존케 하는 불행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의 보스기질과 그와 관련된 소집단주의와 권위주의적 군사문화는 특히, 민주발전에 긴요한 ‘공과 사를 구분하는 책임윤리’를 희박하게 만들었고, 일종의 네퍼티즘(동족중용)의 형태로 아주 원시적인 ‘부패현상’을 초래했다. 요컨대 전두환의 한국적인 인간관계에 충실한 보스기질이 유사시 군대를 동원하고 정권을 잡는데는 유리했을지 몰라도, 적어도 민주주의의 안정된 제도화에 필수불가결한 건강한 공공시민문화의 형성에는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전두환의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생각되는 전두환의 정치 리더쉽적인 특성은 그의 태생에서부터 형성되었다기 보다 타고 난 천성을 바탕으로 전두환이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짐작 하는것에도 무리가 없다고 본다. 단지 가난한 집안의 중간자식으로 태어나서 학업에서도 그다지 우수한 면을 보이지 못하지만, 육사에 11기로 합격하는 순간부터 그 특유의 친화력과 추진력 처세술을 바탕으로 언제나 주위사람들의 리더로써 보직과 진급에서도 동기생들보다 앞섰기 때문에 그로부터 나오는 자신감은 나중에 그가 지니고 있던 자아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가 자기수준에서 다른 민주적 가치관이나 도덕률에 의해 적절하게 통제되지 못했고, 또 그 스스로 민주주의적 가치관을 체화할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가지지 못했던 ‘투박한 군인’에 불과했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음은 비젼적인 측면에서의 고찰이라면 전두환은 “근대화의 혁명가”라고 불리는 박정희와 비교해 볼 때 확실히 말 그대로 “운도 좋았던” 출세지향적인 군인으로 박정희만큼의 고뇌와 문제의식을 지녔던 지도자는 아니라고 평가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전두환이 대통령으로서 아무런 가치관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군인으로서 단지 깨끗하게 죽고자 하는 사생관을 지녔고, 강한 승부욕과 함께 정치와 권력에 있어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경제를 최우선으로 생각했던 나름대로의 주견은 확실한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저돌적인 사생관은 정치발전에 긴요한 사회정치적 부조리와 부정부패의 예방에는 별다른 의미있는 공헌을 하지 못했다. 그가 주요 정치적인 고비마다 국민들의 비판과 요구와 기대에 부응하여 보다 겸손한 자세로 행동에 옮길 수 있는 경륜을 많이 갖추었더라면 그의 사생관은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건전한 발전과 정치에 있어서 도덕성의 회복에 기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두환은 그런 도덕성을 충분히 갖춘 대통령이 아니였다.

또 다음으로는 전두환의 권력에 대한 패권주의적인 태도로써 어렸을 때부터의 전두환의 강한 승부근성은 군인출신 대통령답게 정치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는 또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는 등의 표현으로 민주화를 요구하거나 자신의 정견에 비판, 저항하는 세력들을 적으로 간주하는 등 정치를 민주주의라는 시대적인 이념에 따라 파악하지 않고 군인시절과 다름없이 여전히 패권적 투쟁과 대립이라는 입장에서 정치란 권력을 가진자가 마음대로 하는 것이며, 오로지 승리만이 가치가 있음을 강하게 인식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그가 친위부대와 공수부대를 동원하여 12.12쿠테타와 5.18광주학살을 감행하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설치와 같은 무리한 조치로 정국주도의 기선을 잡았던 것도 이 같은 그의 승부욕과 정치권력에 대한 패권주의적인 집착이 다른 민주적 가치관들이나 도덕율에 의해 제어되지 못하고 그대로 표출된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또 그의 패권적인 정치관은 그가 재임하는 동안 갖가지 부정부패사건과 대형 사고들이 연이어 터지는 상황에서 흔들리고 이반하는 민심과 비판세력들에 대항하여 그로 하여금 ‘전쟁하듯 버티며 대적하게’만들었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각종문제들을 전향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아무런 근본적 대책도 처방하지 못하게 했다. 그의 패권주의적인 태도는 임기말에 제기된 개헌문제와 관련하여 민주화운동이 고세게 일어났을 때에도 ‘4.13호헌’과 같은 강경조치를 취하게 했던 것이다.

전두환 정권은 박정희에 이어 군사정권이 출현시킨 대통령으로써 독재정권의 특혜를 받은 집단에서 성장한 전형적인 군부 엘리트 출신으로서의 것이다. 흔히들 전두환은 여러 가지 점에서 박정희를 닮은 점도 있고 차이점도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상 그는 적어도 지도자로서의 박정희를 통치의 모델로 삼았던 흔적이 짙다. 양인은 모두 가난을 경험했던 정치군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냉혹한 현실주의자 였으며 강력한 추진력을 지닌 지도자 들이었다. 그러나 전두환은 적어도 두 가지 면에서는 박정희와 뚜렷하게 구별되는 군인이었고 대통령이었다.
그 특성을 살펴보면 과감성과 친화력을 꼽을 수 있다. 이 같은 특성은 군대 및 ‘하나회’라는 특혜 받는 집단의 보스가 되었을 때 매우 효율적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또 그 같은 성격은 18년 군사독재의 몰락이 초래한 힘의 공백기에 주도적으로 정권을 담당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 외에도 전두환은 경제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저돌적 특성은 박정희 정부의 경제적 과제를 물려받아 중화학 공업, 반도체 산업을 추진하고 때마침 불어닥친 엔고를 기회로 사상 최초로 무역 흑자를 기록하게 된다. 다음에서는 이러한 전두환 개인의 통치 역량을 6가지 관점에서 살펴본다.

첫째, ‘비전 제시’의 측면이다. 역대 대통령들이 제시한 통치이념, 국정과제 등 국가비전에는 가 시대의 서로 다른 사회적 요구와 통치자의 철학이 어우러져 있다. 하지만 이러한 역대 대통령들과 비교했을 때 전두환은 낮게 평가 될 수 있다.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 복지국가 건설, 정의사회 구현, 교육개혁 및 문화 창달 등의 국가 목표를 내놓았으나 내실 있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2․12 쿠데타로 집권한 데 따른 정통성의 공백을 물가 잡기 등
경제안정으로 만회하려 했을 뿐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둘째, ‘민주적 리더십’의 측면이다. 이 분야에 있어서도 그의 역량은 낮게 평가되어 지고 있다. 군부통치의 맥을 잇는 지도자로 분류할 수 있는데 비록 최초로 단임제를 실시하기는 했지만 통치스타일은 ‘지시적 위임형’, ‘저돌적 해결사형’으로 민주적 리더십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또한 언론에 대해서도 강제 지도형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통제술은 침묵만이 아닌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여론조작을 주도하였다. 이를 위해 전두환은 채찍과 당근의 방법으로 통제하였는데 이를 위해 공익자금지원을 제도적으로 정착시켜 이루어졌다. 한편 전두환의 군대식 관리기법의 체제운영원리는 경제성장의 실적을 나타내었고, 산업화 정책을 주도해 온 군부체제의 기능적인 효율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셋째, ‘도덕성’의 측면이다. 정권창출의 정통성까지 포함하는 도덕성에 있어서는 높게 평가할 수 없다. 전두환 대통령은 12․12와 5.18광주 민중항쟁 등 피바람을 일으키며 권좌에 올라 취임부터 퇴임까지 내내 정통성 시비에 시달려야 했다. 집권자체가 5․16에 비해 훨씬 음모적이었고 ‘궁정 쿠데타’의 냄새가 짙게 풍겼다.

넷째, ‘용인술(用人術)’의 측면이다. 전두환은 믿을 만한 군 출신이나 동향출신을 핵심요직에 발탁했다. 하지만 김재익씨 등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발탁하고 자신이 모르는 분야는 그들에게 전적으로 위임하고 신뢰해 일정부분 외교와 경제적 성공을 거두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 듯이 대부분의 전두환의 인간관계가 가지는 한계성에 비추어 볼때 전두환 개인적인 측면에서나 국가적인 측면에서 고려해 볼때 이것이 진정으로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 생긴다.

다섯째, ‘위기 관리 능력’의 측면이다. 정치, 경제, 외교 분야에 있어 위기설이 나오지 않은 해가 없었을 정도로 국가적 위급 상황으로 점철돼 온 현대사에서 대통령의 위기관리 능력은 국운을 좌우하는 방향타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전두환은 박정희의 후반기의 강압식 관리방식을 그대로 답습했다. 국민여론을 철저히 배제시켰고 위기국면을 저돌적으로 돌파하는데 만 치중했다는 평가다. 하지만 앞서 말한 용인술에 있어서 한 분야를 전적으로 위임함으로써 외교분야에 있어 통일된 목소리를 제시할 수 있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여섯째, ‘지적 수준’의 측면이다. 이 부분에 있어 대부분의 군부 정권의 경우는 대통령을 수행하기 위한 행정, 경제지식이 미흡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전두환의 경우 “경제 제일주의”를 제창하며 취임하자마자 밤새워 국정현안과 전문 분야를 공부하면서 지적능력향상에 노력한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 예로 전두환대통령은 국가경영차원에서 정치와 경제와의 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이는 곧 정치인이 훌륭해서 경제와 사회를 이끌어 가면 이상적이지만, 그렇게 안되는 나라가 어차피 자본주의를 유지하려면 기업가들이 경제성장을 통해 국민의 복지를 증진시키면서 정치를 끌고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재직중에 다른 무엇보다도 경제에 최우선 순위를 두고 이를 일관되고 강력하게 추진했다. 그가 대통령으로서 물려받은 지난 시대의 유산은 마이너스 4.8%의 경제성장, 42.3%의 도매물가 상승률, 44억$의 무역적자, 부도직전의 경제사정과 침체된 사회분위기, 그리고 집권과정의 정통성 논란, 등으로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매우 어려운 시기였으나 그는 경제를 인기 혹은 정치논리와 연계시키지 않고 민간인 경제전문가들을 중용하는 등의 노력으로 경제발전을 위해 총력을 다했다. 비록 전두환은 국가경영자로서 복잡한 국가의 경제를 단순히 가정살림에 비유해 처리하려는 단순함을 보이긴 했지만, 정치분야에서 처럼 자신의 독단적인 의견으로 뿐만아니라 두루 걸쳐서 여러 민간 경제각료들의 의견을 수렴하려 위기를 극복했다는 점에서는 다른 부분보다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그 결과 1982년부터 물가는 한자리 숫자로 잡히기 시작했고, 3저현상이 왔을때 한국의 경제는 안정기조에서 성장하기 시작했다. 1987년말 경제성장률 12%, 도매물가상승률 0.5% 무역흑자 114억$, 1인당 GNP 3098$, 국민총생산 1284억$, 등 주요 경제지표가 고의 두배씩 증가했다.

위에서 살펴본 통치 역량을 통해 외교적 역량을 유추해보면, 전두환은 군부출신이라는 점을 감안해 때 저돌적이면 과감한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또한 외교에 있어 이러한 그의 역량은 전방위 외교와 순방외교로 특징지어지며 그의 용병술은 전적으로 신임하는 사람에게 위임함으로써 많은 부분성과를 보았다고 할 수 있다.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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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두환 대통령의 정치리더쉽에 관한 분석을 하는 과정에서 그 동안 지울 수 없었던 ‘한국정치의 민주사 저발전을 초래한 가장 1등 공신으로써의 무식한 군출신의 정치가‘라는 이미지에, 12.12사태나, 5.18광주 민주화 항쟁으로 대표되는 전두환 대통령의 권력을 장악, 유지하기위해서 수많은 인명을 학살하고, 감옥에 가두는 등의 폭력과 억압으로 약자를 억압하는 기득권층의 우두머리였다는 100%의 부정적인 생각으로부터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초월해 대통령이라는 국민의 리더로써의 전두환을 분석하면서 그 안에 어느 정도 긍정적인 부분의 싹이 트는 우리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제까지의 지배적인 전두환이라는 이름이 갖는 거부감이 그의 부실란 정통성에 대한 돌파구로써의 적극적인 외교정책이나 경제제일주의 노선이 이제까지의 결코 용서 될수 없는 죄목들의 절대적인 면죄부는 될 수 없을지라도, 정권을 쥔 국가의 리더로써 운영했던 정치와는 조금 다른 측면인 경제안정과 국가의 안보부분에서는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생각을 돌리게 만드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다시 과연 그가 아닌 다른 어느 누구였던들 그만큼도 못해냈겠는가 라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전두환 정권이후에 들어섰었던 노태우, 김영삼 대통령의 집권당시에 우리들이 TV뉴스나 여타 언론을 통해 경험했던 것에 비추어 볼때, 어느 누구였던 들이라는 설정이 말처럼 쉽지 않은 것임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전두환정권에서 상대적으로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외교정책이나 경제정책등의 효과들이 전두환 혼자서 해내기에는 불가능한 일이였을 것이나, 아랫사람을 적절한 위치에 배치하고, 관리하는 用人術도 분명히 리더의 자질중에 하나임을 고려해 볼때 리더쉽에서의 절대악은 윤리적으로‘나쁜리더’가 아니라 ‘바보같은 리더’라는 생각을 들게 만들었다.

그리고 전두환의 업적을 떠나 리더쉽측면의 연구에서 단지 육사시절의 자료만으로 평가할 수 있는 리더로써 주변에 사람을 끌어 모으고, 그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필요에 이용하는 처세술에서의 전두환은 현대에 사는 우리들에게 요구되는 리더쉽에서 한수 배울 점으로 작용했다.
물론, 단지 이것들로 전두환의 어두운 과거가 덮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적어도 이번 연구분석으로 정치학자들의 역대 대통령에 대한 평가부분에서 전두환이 갖는 정치리더로써의 순위에 대한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1.인터넷
월간조선 [전두환 대통령에 관한 기사 발췌]
월간중앙 [전두환으로 검색기사 발췌]
그 외 여타 인터넷 신문자료들.
2.논문
정윤재, 「전두환 대통령의 정치리더쉽 분석」한국정치정보학회.2000
염재호, 「대통령의 경제 리더쉽 - 박정희,전두환,노태우정부의 경제정책관리」
한국행정연구원.1995
장성호,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의 정치권력획득에 관한 비교연구」
상명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2000
김병문, 「한국 대통령의 리더쉽과 민주화」한국정치학회.96년연례학술 논문집.1996
출처 : 전두환 각하의 리더쉽에 관한 논문...김 구님께서 올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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