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의 테슬라...
테슬라...........그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그는 체코의 프라하 대학에서 본격적인 전기기술 교육을 받았다. 그 후에는 부다페스트의 전화회사에서 일하면서 자기감응모터를 착안하여 거의 완성할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파리로 직장을 잠시 옮겨 에디슨과 절친한 '베첼러'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 베첼러는 에디슨이 24세에 처음 회사를 차릴 때 고용되었던 기사였으며 에디슨이 프랑스에 파견하여 유럽 대륙에 세운 '대륙 에디슨사'(Continental Edison Company) 의 책임자로 일하고 있었다. 당시 에디슨 회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세계적인 회사였다. 테슬라는 주변에서 천재로 인정해 주는 기술자였을 뿐 아니라 여러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으므로 문제 해사로 여러 곳에 파견되었다.
1880년 대에는 새로운 과학의 이기인 전화를 가설하는 것이 각 국가의 커다란 과업이었다. 그가 일하던 파리의 회사는 에디슨 회사와 함께 독일에 전화시설을 설치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독일 알사스의 스트라스부르에서 전화 설치를 끝내고 개통식 행사를 하기 위하여 황제 빌헬름 1세가 참석한 자리에서, 전화선이 누전으로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독일은 이것을 고의적인 사로고 오해했고 프랑스와의 정치관계까지 악화시키고 말았다. 결국 테슬라가 일하던 프랑스 회사는 한푼도 건지지 못하고 계약을 파기당할 상태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때 해결사로 파견된 테슬라는 기존 시설을 자기가 고안한 감응모터의 원리을 이용한 교류전기로 바꾸어 송전하는 시설로 대치하여 모든 문제를 훌룡하게 해결했다. 당시 전기는 반 마일 이상을 송전하는 것이 불가능한 직류뿐이라고 여겨지던 때였다. 테슬라는 이러한 직류의 단점에 착안하여 거리에 관계없이 송전할 수 있는 교류방식을 착안하고 그 방법을 제시했으나 아무도 관심을 주는 사라이 없던 터에, 이러한 좋은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의 발명을 증명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에디슨만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낼수 있다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어 테슬라의 공은 에디슨에게로 돌아갔고, 임기웅변으로 위기를 건진 장본인은 결국 무시당했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교류문제는 사람들의 머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이러한 사정을 잘알고있는 베첼러는 테슬라에게 미국으로가서 에디슨 밑에서 일하면서 그를 통하여 교류전기를 상용화 하는 것이 낫겠다고 충고하면서에디슨에게 소개편지를 써주었다. 1884년 테슬라는 돈 몇 푼과 책 몇권, 반중력 비행기 설계도와 즐겨 쓴 시집, 자신의 학술논문집, 가장 중요한 베첼러의 소개편지를 들고 미국에 도착했다. 그 편지에 는 "나는 이 세상에서 두 사람의 위대한 사람을 압니다. 하나는 에디슨 당신이고, 다른 하나는 이 편지를 가져가는 테스라라는 젊은이 입니다. ..." 라 쓰여 있었다. 미국에 도착한 테슬라는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겨우 차비를 충당하여 에디슨이 있는 뉴저지로 가서 소개장을 그에게 보여주게 되었다. 에디슨은 편지를 읽고 곧 테슬라를 채용했다.
끝없는 노력가 에디슨, 불운한 천재 니콜라 테슬라.
유명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에디슨은 당시 직류발전기인 다이나모 발전기를 개량하여 효율을 높이고 고장 빈도를 줄여 발전단가를 낮추려고 고심하던 중이었다. 이를 본 테슬라는 그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말했다. 에디슨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만일 그 일을 성취하면 5만 달러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렇게 쉽게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욕심에 테슬라는 밤잠을 거르면서 여러 날 일한 끝에 에디슨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월등한 기계를 만들어 냈다. 에디슨은 물론 이에 대만족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약속한 5만 달러에 대한 기미는 없었다.
결국 돈 이야기를 꺼낸 테슬라에게 에디슨은 그것은 농담이었다고 하면서 테슬라가 아직 미국의 대화방법을 습득하지 못했다며 그의 어깨를 두두리며 깔깔대고 웃었다 한다.
테슬라는 이 때문에 대단히 실망하고 좌절감마저 갖게 되었다고 후에 술회했다. 그럼에도 테슬라는 계속 교류전기의 개발을 종용했다.그러나 끝까지 직류가 우월하다고 믿은 에디슨은 굳이 교류를 발전시킬 필요가 없다며 완고한 태로를 유지했다. 에디슨에 대한 많은 실망으로 그를 통한 교류전기의 발전계획을 단념하게 된 테슬라는 에디슨을 떠났다.
후일에 그는 에디슨을 평하여 "에디슨은 볏짚 속에 바늘이 떨어지면 지체하지 않고 볏짚 하나하나를 뒤지기 시작해서 찾을 때까지 꿀벌처럼 일할 사람이다. 나는 약간의 이론과 계산법으로 그가 들이는 노력의 10% 만으로 원하는 것을 찾는 법을 알기에 그의 아둔함을 측은히 여겼다" 라고 말했다..............
본인는 불운한 천재들 의 이야기들 중에 모차르트 와 살리에르 의 관계가 꼭 저 두사람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지않을 수없다. 맹세코,에디슨은 테슬라 의 천재성을 누구보다잘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의 타코난 천재성은 쉬지않은 노력가 에디슨에게는 인정할수없는 열등의식을 낳았을테고 가난한 나라 의 태생인 테슬라를 특이한 시선으로 바라보았을 것이 분명하다.
일일이 손으로 만지며 더듬으며 보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에디슨과 보지않고도 그 이면의 모습까지 알수있는 천재는 한마디로 살리에르 와 모차르트 의 관계가 아니고 무었이겠는가............. 그리고 테슬라 의 불운 의 바탕에는 이러한 에디슨 의 "인간 의 노력은 천재성보다 우수하다"는 의지 의 작용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본인은 감히 해본다.
대중 의 시선을 사로잡지 못한 테슬라.
그당시는 에디슨의 유명한 백열전등이 각광을 받고 많은 돈을 벌어들이던 때라 백열전등 외 다른 방법을 통한 전등을 발명해 보려고 애쓰던 과학자들이 많았다. 테슬라는 이미 아크전등을 발명하여 특허를 낸 후라 몇 회사로부터 함께 사업하자는 제의를 받았으나 역시 실권과 이득은 모두 그 사람들이 갖고 자신에게는 아무 이득이 없다는 것을 알고 그만두게 되었다.
이때 에디슨과 같은 나이의 젊은 전기기술자이며 사업가적인 기질과 자본을 갖춘 '웨스팅하우스 전기회사'의 사주 '조지 웨스팅하우스'를 만나게 된다. 그는 테슬라의 교류전기 이론에 심취하였고 그 역시 교류전기만이 유일한 전기보급법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동안 가난에 시달렸던 테슬라는 조지 웨스팅하우스로부터 100만 달러의 제의를 받고 그 때까지 등록한 모든 특허들을 웨스팅하우스에게 팔았다. 이때부터 에디슨과 웨스팅하우스의 직류. 교류싸움이 시작되었다.
학계에서도 이미 익숙해진 직류의 장점을 고수하는 파와 새로운 교류의 장점을 이해하여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절반으로나뉘어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아주 중요한 일이 벌어지는데, 역사상 처음으로 시카고 '세계박람회'가 1893년 5월 1일에 열린 것이다. 박람회장에는 25만 개의 전등이 켜질 예정이었고, 당연히 각 전기회사들은 이 일을 따내기 위하여 안간힘을 쓰게 되었다.
결국 낙찰을 받은 회사는 테슬라의 기술을 사들인 '웨스팅하우스'였다. 당시 에디슨은 전등당 18.5달러에 입찰하였고 웨스팅하우스는 32달러에 입찰하였다.
이를 계기로 웨스팅하우스는 박람회장 내에 테슬라의 '다상자기감음' 원리를 이용한 발전기를 설치하고, 직류발전기로는 이런 싼값에 전기보급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여러 개의 직류발전기를 설치하지 않고도 장거리를 전기줄로 송전할 수 있다는 증거를 보여줌으로써, 교류를 실용적인 전기로 완전히 자리매김시켰던것이다. 이 일은 교류가 완전히 직류를 능가하는 역사적 계기가 되었고 에디슨의 직류를 향한 아집도 막을 내리는 사건이 되었다.
1880년 이후 전기분야 발전은 그야말로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 런 와중에 많은 과학자들이 '나이아가라' 폭포의 수력을 전기에너지로 변환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폭포 가까이에 있는 버팔로 시민들도 실현 가능한 일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버팔로까지의 거리가 22마일이나 되어 직류로는 송전이 불가능 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러던 중 시카고 박람회에 이어 독일에서도 삼상 교류발전기를 이용해 108마일 떨어진 곳까지 송전이 가능해지자, 점차 사람들은 버팔로뿐 아니라 뉴욕 시에까지도 송전할 수 있고 실상 거리에 제한이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미 시카고에서 그것을 증명한 웨스팅하우스 사기 공사를 맡아 1895년 4월 20일 버팔로 시 가정들은 전기등불을 켜게 되었고. 이후 값싼 에너지와 전기를 이용한 여러 산업이 버팔로 시에 몰려들게 되었다. 즉 일종의 산업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이리하여 1903년 에는 세계의 모든 발전소가 테슬라의 원리를 이용하여 교류전기를 만들게 되었다.
그는 또한 공명(共鳴)과 관련하여 지대한 발명을 하였다. 그는 여러형태로 시범을 보였지만 사람들은 보고도 믿지 못할 정도였다. 그중에 하나가 신문기자들 앞에서 보여준 시범이다. 그는 100톤을 견딜 수 있다는 두께 5센티미터, 길이 61센티미터 철판의 양끝을 고정시켜 놓고 그 위에 탁상시계 크기의 전기진동기를 올려 놓고 한참 조정을 했다.
잠시 후, 드디어 철판과 진동기의 주파가 서로 맞았을 때 철판이 떨기 시작하더니 점점 그 정도가 심해져 결국 철판은 부러지고 말았다. 이를 목격한 벤슨(A. L. Benson)기자는 아무리 큰망치로 두들겼어도 불가능한 일이 벌어졌다고 하였다.
테슬라는 이어뉴욕의 고층빌딩 건축장에 가서도 이 조그마한 진동기를 철근에 부착시켜 그 위에서일하던 인부들이 지진이난 줄 알고 혼비 백산하게 만든 일도 있다. 그는 이 원리를 원격지구 역학진동(telegeo dynamic oscillstion) 이라고 명명하였는데, 이 원리를 이용하면 적 잠수함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고, 지하 광맥을 찾을 수도 있으며 심지어는 지구도 쪼갤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그는 X-레이도 처음 만들었다. 1895년 12월 독일의 렌트겐(Wilhelm Roentgen) 교수가 X-레이의 벌견과 그의 유용함을 발표하였을 때 테슬라는 자기가 이미 X-레이를 이용하여 머리를 찍은 사진을 렌트겐에게 보냈다.
렌트겐
렌트겐은 이를 숨기지 않고 큰 관심을 표명하면서 일반에 공개하였다. 이 때문에 테슬라는 유명해져서 잡지사에 기고도 여러 번 하게 되고 강연도 하게 되었다. 테슬라는 렌트겐 박사에게 영광을 돌리면서도, 그 위험성도 함께 경고하였다.
테슬라 밑에서 지도를 받으며 잠시 공부한 마르코니(Guglielmo Marconi) 는 1900년 12월 12일 영국의 콘월에서 캐나다 뉴파운드랜드로 짧은 파장을 이용하여"S" 라는 글자 하나를 송신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 인하여 '마르코니'는 무선통신의 선구자와 영웅이 되어 라디오의 발명가로 판정이 되었고, 대단한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보다 2년 전인 1898년 테슬라가 이미 무선통신 라디오의 원리를 특허낸 일이 있었다.
마르코니
테슬라는 고소하여 승소했으나, 일단 유명해진 마르코니의 인상이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 있고 재벌을 배경으로 한 얼론 덕에 마르코니가 테슬라의 기술을 슬쩍 가져갔다는 사실은 세상에서 빛을 보지 못했고, 테슬라도 이를 별로 중요치 않게 생각했다. 테슬라는 자기가 그때 실현시키려고 했던 방법이 잘 설비된 철로에서 달리는 호화여객차라 한다면, 대기를 매체로 짧은 파장을 이용한 마르코니의 방법 으로 알려진 그 방법은 마치 촌길을 가는 두 바퀴 마차에 비유할 수 있다고 신문기자들에게 설명하였다.
이 마르코니의 방법이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통신방법이며, 100여 년 전인 그때 테슬라가 말한 방법은 아직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소개 되지 않았다. 그때 테슬라는 계속하여 설명하기를 , 마르코니의 대기를 통한 송전방법은 대기 상태에 너무 의존하기 때문에 거리를 고려해야 하며 전파는 대기의 상태 여하에 따라 많은 제한을 받을수밖에 없지만. 자신의 방법은 긴 파장을 이용한 저주파로 지표면을 사용하므로 거리의 제한이나 기후에 의한 제약이 전혀 없다고 했다.
워든 클리프 타워
마르코니가 짧은 파장으로무선통신과라디오를 개발하고 있을 때 테슬라는롱아일랜드 '워든클리프 타워'를 세우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이는 자기가 말한 방법을 증명하려고 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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