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수이트

예수회(제수이트)의 잔학행위와 세계지배- A.I.C (펌)

그리운 오공 2011. 12. 17. 18:05

바티칸의 폭군


[로마카톨릭]



바티칸의 폭군

-예수회(제수이트)의 잔학행위와 세계지배- A.I.C


종교 개혁을 박멸시키기 위해 원래 바티칸이 제정(포르투갈/스페인, 1534)


1773년 7월 21일 교황 클레먼트 4세 교단 억압(이 때문에 즉시 독살)


1814년 그 칙령을 수행할 목적으로 'Verona 비밀 조약'으로 개명


1822년 10월 이 칙령에 대해 계약 당사자 최종 비준. 이에 따라 제임스 몬로 대통령은 토마스 제퍼슨의 도움을 받아 그 존재를 확인하고 몬로 독트린 제정. (상원 의회 기록: 1916년 4월 25일 1차 회기 64차 의회 기록 Vol. 53, Part 7, Page 6781)


전 예수회(제수이트) 사제 알베르토 리베라 박사님(Dr. Alberto Romero Rivera)에게 이 글을 바친다(이 글은 그의 생애에서 영감을 받음).

*(알베르토 씨리즈 참조 - 생명의 서신 출판, 인터넷 참조)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마태복음 7:15)


필자는 몇 해 전에 어떤 책을 읽고 탐구를 시작해서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내가 얻은 정보를 심판에 부친다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너무나 확실해서 바티칸의 범죄자 자신들도 부정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전에는 과거 잔학 행위에 대한 말이 나오면 그 사람들은 "우리는 이제 그렇게 하지 않는다"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고 비웃거나 글쓴이에 대해 편협하고 관용스럽지 못하다고 몹시 비난하면서 그 추종자들에게 "우리는 그런 입장을 절대로 바꾸지 못하겠다"고 말했었다.

독자들이 필자를 '극단주의자'라고 생각하기 앞서 먼저 이 정보를 얻은 사람일 뿐이란 점을 말해 두겠다. 조금만 시간을 들여 조사해 보면 이 정보는 누구나 얻을 수 있다(인터넷에서 바로 손 끝에 수 있기 때문). 정부 부서가 수행하거나 범하고 있는 사건들은 대부분(전부는 아님) 미국 국민들의 권리와 자유에 전적으로 부정적이다. 정부는 전세계에서 수백만 인명을 대량 학살한 데 대해 책임이 있다. 이 미국이란 나라의 건국으로 이어지게 된 '암흑 시대(종교 재판)' 시기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

교황청과 영토확장


15세기는 새로운 영토 발견이란 열풍이 휩쓴 시기였다. 이를 처음 주도한 인물은 헨리(Henry) 왕자였다. 헨리는 1394년 포르투갈 국왕 요한 1세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1415년 아프리카의 쿼타(Ceuta) 도시를 포위 공격함으로써 용맹을 떨쳤으며, 그 이후 명성을 얻게 되었다. 따라서 그 시기 이후로는 미지의 나라를 찾아 해군 원정을 떠나는 일에 전념하게 된다. 헨리가 이끄는 군함들은 아프리카 연해와 인근 섬들을 정복하여 포르투갈 영토에 귀속시켰다. Bojadoy봉을 정복한 다음에는 자신이 발견한 땅과 발견 예정인 땅을 모두 부왕과 그 계승자들에게 바치고 교황 마틴(Martin) 5세에게 그 헌사를 비준해 달라고 했다. 또한 포르투갈은 원정할 때마다 로마 카톨릭과 교황 권위의 확장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교황 마틴(Martin) 5세는 헨리 왕자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따라서 1430년경의 교황 비준 교서에서는 'Bojadoy봉에서 인도 전역에 이르는 땅 가운데 앞으로 발견되는 영토는 모두 포르투갈 영토에 속한다'라고 기술해 놓았다. 1433년 요한 1세가 서거하자 헨리 왕자의 형 에드워드가 포르투갈 왕위를 계승했다. 교황 에우게네(Eugene) 4세는 1438년 에드워드에게 내린 교서에서 마틴 5세가 승인한 내용을 비준했다. 1454년 1월 8일 교황 니콜라스 5세는 전임 교황 마틴과 에우게네의 교서에 대해 언급하면서 헨리 왕자의 업적을 다음과 같이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25년 동안 매년 포르투갈 군대를 끊임없이 파병했다. 가장 신속히 이동하는 군함들을 이끌고 온갖 위험을 무릅쓰며 남반부와 남극 방향의 해양과 해상 영토를 찾기에 공을 들였다. 그 군함들은 마침내 기니아 지방에 이르러 일부 도서와 부속 영공 및 해양을 차지했다. 그 이후 그 지역 주민들과 몇 년 동안 전쟁을 수행하여 많은 도서를 정복하거나 평화적으로 소유함으로써 지금까지도 인근 해역으로 귀속되어 있다. 또한 기니아 인과 그 밖의 니그로족을 강제로 데려오기도 했으며, 일부는 교환 형식으로 데려오기도 했다."

이 교서에서는 헨리에 대해 '진정한 그리스도(교황권) 병사임과 동시에 가장 용기 있는 신앙 수호자이자 불굴의 챔피언으로서, 전세계에 공포되어 격찬과 존경을 받고 있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지니게 해 달라고 젊은 시절부터 온힘을 다해 열망했다'고 기술했다. 이 교서에서는 위에서 말한 영토의 획득과 소유에 대해 포르투갈의 독점권을 인정했는데, 이는 교황 Martin과 Eugene의 여러 서한 덕분이었다.

곧 그 서한들에서는 포르투갈 국왕과 헨리 왕자에 대해 '기독교(로마 카톨릭)의 적이나 이교도에 대해서는 언제라도 침략하고 색출하고 말살하고 정복할 수 있으며, 그 주민들을 영원한 노예 상태로 만들 수 있으며, 그 왕궁과 소유 재산을 모두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자유롭고 충분한 권리가 있다'고 인정해 주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교황 니콜라스(Nicholas)도 역시 서한을 통해 '이미 획득한 영토이거나 획득할 영토에 대해서 공포하는 바, 영토가 일단 획득되어 귀속되었다면 위에서 말한 국왕과 그 계승자에게 영원히 귀속되며 그 밖의 다른 사람에게는 귀속되지 않게 할 권한이 있다'고 했다. 또한 포르투갈이 발견한 영토에 기독교(로마 카톨릭) 국가가 정착하거나 포르투갈이 미지의 나라를 발견하고 정복하려는 데 방해를 한다면 가장 엄한 벌을 내린다고 했다. 이는 헨리 왕자의 계획과 실행이 '가장 경건하고 영원히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으며, 보편적 교회 공동체의 이해 관계가 관련된 하나님의 영광이 깃들어 있는 일'이었음을 말해 준다.


교황청 정복자와 노예들


이처럼 헨리 왕자의 계획과 작전은 당시 로마 카톨릭 왕국에서 최고로 인정받은 권위의 재가를 받고 있었다. 너무나 경건한 곳에서 받은 권리였기에 논란의 대상도 되지 않았다. 로마 교황은 왕자들을 마음대로 구속할 수 있었으며,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지상의 왕국을 마음대로 허용해 줄 수 있었다. 교황 니콜라스가 승인한 내용은 1458년 8월 그 후계자 셀릭투스(Calixtus) 3세가 뒤이어 확정하게 되었다.

에드워드가 사망하자 당시 미성년이었던 아들 알폰수스(Alphonsus)가 1438년 왕위를 계승했다가 1481년 사망했다. 헨리 왕자는 1460-63년에 사망했다. 헨리가 사망하자 영토 발견의 열기가 쇠퇴했지만 알폰수스의 아들 요한 2세가 즉위함과 함께 그 정신이 다시 살아났다. 헨리 2세는 즉위 다음 해(1482년) 영국의 에드워드 4세에게 대사를 파견하여 기니아 정복에 대해 교황의 교서에서 얻은 자격이 있음을 알리면서 당시 일부 영국 상인들이 기니아 무역(노예 무역)용으로 준비하고 있던 함대를 해체해 달라고 요구했다. 영국 국왕은 대사에게 존경을 표하면서 요청한 내용을 모두 받아들였다. 포르투갈 국왕과 영국 국왕은 아프리카 최대 해역 내의 포르투갈 지위(Portugalie et Algarbiorum citra at ultra mare in Africa)에 대해 인정했다. 교황 식스투스(Sixtus) 4세는 사망하기 얼마 전(1484년 8월 12일) 포르투갈 국왕과 그 계승 국왕들에 대해 전임 교황들이 인정한 내용을 모두 받아들였다.


1481년 요한 2세는 기술공 100명과 병사 500명을 기니아에 파견하고 필요한 물자를 모두 지원해 요새를 축조했다. 거대한 베닌(Benin) 및 콩고(Congo) 왕국은 1484-1485년에 발견되었고 희망봉은 1486년 발견되었다. 포르투갈은 아프리카에 요새를 축조하고 식민지로 만들었다. 또한 유력한 왕국들과 통상을 시작했으며 어린 왕자들을 무력으로 강압하여 자신들이 속국에 처해 있음을 인정하도록 했다.

아프리카 내 포르투갈의 권력과 통상권은 모두 이 시기에 확립된 것이다. 이 시기 5대에 걸친 로마 교황들의 칙령에서는 언제나 그 신앙이 가장 두터운 국왕에게 어느 곳에서라도 이교도(참된 그리스도인들)가 발견되면 그 왕국과 재산을 마음대로 다스릴 수 있으며 '그 백성들을 영원한 노예 상태에 두거나 지상에서 추방시킬'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주님의 어린 양들을 보편적 성직자(교황권) 한 명이 다스리는 주님(교황)의 요새에 두기 위함이었다. 그 이후의 포르투갈 국왕들은 주님께 불경스러운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 크나큰 은전을 몰수당하는 일이 없었다. 따라서 포르투갈은 유럽 열강들이 간섭하지 않는 상태에서 오랫동안 아프리카 및 동인도 제국과 통상을 계속할 수 있었다. 또한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수출하지 전에도 50년 이상 동안 본국에 노예들을 유지시킬 수 있었다.

포르투갈은 1508년 처음으로 히스파니올라(Hispaniola) 섬으로 노예를 수입했으며, 1517년에는 브라질 식민지로 수입했다. 1580년에는 처음으로 설탕 재배를 시작했다. 그 당시 스페인과 연합해야 했던 일은 가장 불행했다고 볼 수 있다. 네덜란드가 적국이 되어 동인도 및 브라질 식민지와 아프리카 식민지 일부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1640년에는 브라질 및 아프리가 영토를 되찾았지만, 동인도 제국의 식민지는 되찾지 못했다.

네덜란드가 브라질을 포기하고 황금 광산이 발견되자 포르투갈은 무역이 성행했으며, 노예의 대량 수입이 이루어져 해마다 2만 5천명씩 로안그로(Loangro)에서 브라질로 노예를 수입했으며 고앙고(Goango)와 케이프 로포스(Cape Lopos)에서 수천명씩 수입하기도 했다. 포르투갈 당국의 기록에 따르면 해마다 5만명 이상씩 모잠비크 연안의 멜린다(Melinda)에서 브라질로 수입했다고 한다. 브라질과 아프리카 식민지는 1세기 동안 이처럼 확장되었으므로 1700년 이전에는 해마다 영국과 교역함으로써 얻은 재화가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재화를 합친 것보다 더 많았다.

스페인령 아메리카는 제노바, 포르투갈, 프랑스, 영국에서 노예를 수입했다. 스페인이 구입한 영토는 처음으로 연방에서 탈퇴하게 되었다(1861년). 아프리카 노예 무역이 종료되기 전후에 걸쳐 스페인 및 포르투갈 주의 수장에 대해 다른 주의 수장들은 공식적으로 '카톨릭 폐하(His/Her Catholic Majesty)'란 칭호를 사용했다(미국 국무성 기록). 그 수장들만이 교황의 사자임을 인정한 것이다.


카톨릭 사제가 아프리카 노예 무역에 개입한 사실은 19세기의 유명한 시인 J. G. Whittier의 다음 시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뉴올리언스(New Orleans)의 흑인 거주지에 관한 시


크리스천 노예(The Christian Slave)


J. G. Whittier 지음


크리스천 한 명이 가고 있다. 가버렸다!

누가 하나님의 이미지를 갈구하는가? 하나님의 은혜를

이 시장 바닥의 불쌍한 희생자여

고통 속에서 참고 있는가?


아! 그런 일이?

그대는 어떤 일이 있어도 말하지 않았다

그대와 같이 가장 약하고 천한 자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 불쌍한 희생자 속에

그대가 동정하는 사랑의 아기가 있음이 서 있는 그대에게서 보이네

또 다시 조롱하는 무리의 희롱 소리

묶여서 팔리고 다시 학대당하네!


팔릴 운명의 크리스천!

채찍에는 혹사당한 노예의 피가 묻어 있고

그대의 잘못과 체면 때문에 노예의 일생은 지겹게 되네

그러나 인내심은 그치지 않으리!


악덕한 튀니스의

두건을 두른 고관에게 갈채를!

어두운 노예 감방이 열리고

수감자들이 밖으로 나오네


그러나 이 불쌍한 노예는 부질없이

날카로운 눈빛을 크리스천 성당으로 돌리네

예배를 드릴수록 몸값은 높아지고

사슬에 박힌 못도 커져가네


오호라!

사제를 닮은 강도들은 타인 제단에 얼마나 서 있을까

기도를 하며 그대에게 피묻은 손을 올리고

거만하게 사악한 눈살을 찌푸린다!


오! 사탕수수 밭에서

아래쪽 논에서, 거래상들의 방에서

불결하고 역겨운 검은 노예선의 감방에서

거칠고 끔찍하며 튼튼한

노예들의 지쳐 있는 쇠사슬에서

하늘에 오르려고 절규하는 외침이

빈 하늘의 공간을 채운다

얼마 동안이나, 오 주여! 얼마 동안이나!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흑인에 대한 바티칸의 입장이 바뀌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1)미국 역사상 최대의 인종 폭동(1864년, 뉴욕시 부룩클린)은 휴게스(Hughes) 카톨릭 대주교가 선동했으며(북부군을 더 징집하려는 링컨 대통령에 대항해서) 방화뿐만 아니라 거주자 및 흑인 고아에 대한 유린 살해가 자행되었다.

(2)제이차 세계대전에서 미군이 로마를 점령하자 히틀러의 교황 피우스(Pius) 12세는 로마에 수감된 흑인 병사는 없게 될 것이라고 미군 사령관에게 분명히 약속했다.

(3)세인트루이스, 뉴욕시, 시카고 등의 경찰 가운데 95% 이상이 미국 카톨릭 비밀결사 컬러버스 기사단(the Knights of Columbus) 신도이다. 따라서 시카고 경찰이 저지른 맬콤 X 살인 사건을 검토할 때에는 이 점을 고려해 보아야 한다. 아파트에서 발사된 총기는 경찰의 완전 자동 소총이었다. 총탄 41발이 발사되어 17발이 아마도우 디알로(Amadou Diallo)의 몸에 맞았다. 당시 디알로는 총기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경찰은 사복 차림이었고 차량에는 경찰 마크가 없었으며 신원도 밝히지 않았다. 재판 뒤 경찰, 변호사, 배심원들은 파티를 열었다. 뉴욕 시에서 총기를 지니지 않은 채 살해되는(경찰에게) 흑인은 모두 이민 노동자이다. 특별 무장 그룹(저격수)은 흑인 지도자들에 관해 정보를 제공해 주는 대가로 앨라배마의 카톨릭 조직 KKK에게 무장 훈련을 시켰다(또한 불법으로 무기도 판매). 그 결과 마르틴 루터 킹 목사가 살해당했다. 그 조직은 또한 뉴올리언스 대부 Carlos Marcello(J. Edgar Hoover의 동료)의 재정 지원을 받고 있다. 포르투갈 인 라울 마오리(Raul Maori-마르틴 루터 킹의 실제 살해자)가 바로 마약과 무기를 밀수해 카를로스 마르셀로(Carlos Marcello)에게 제공해 주고 있다. 흑인들은 점차 복지 혜택에서 제외되는 반면에 카톨릭 이민자(적법 및 불법 모두 포함)는 끊임없이 복지 혜택을 받고 있다. 흑인들은 거리의 갱들보다 카톨릭 경찰을 더 무서워하고 있다. 어느 미국 도시든지 카톨릭의 영향력이 단연 우세하며, 마피아/카톨릭의 권력과 영향력의 비율 및 범죄율은 어느 도시에서나 마찬가지이다.


카톨릭 컬럼버스 학살


미국 서부의 인디언 부족은 갈색 옷을 입은 백정, 곧 1519-1540년대 스페인의 탐험가 코로나도(Coronado)와 스페인 정복자들에게 전멸당했다. 멕시코의 아즈텍 및 잉카 제국, 중앙 아메리카 및 남아메리카, 쿠바, 하이티, 그레나다, 괌, 필리핀 등도 마찬가지이다. 알마그로(Almagro), 코르테스(Cortez), 피자로(Pizarro), 발베르데(Valverde), 드 메자(de Meza), 그레고리(Gregory), 세풀베다(Sepulveda), 발레가(Valega)와 같은 사람들, 특히 크리스토퍼 콜롬버스(그레나다 원주민에 대해 잔학 행위를 저지른 죄로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에게 투옥당함)는 원주민들의 재산을 모두 몰수하고 주민들을 노예로 삼았다(이 내용은 학교 역사 교과서에도 찾아볼 수 있다). 중세 말기의 지리상의 발견에서 바티칸은 아메리카 원주민을 모두 '타고난 토착 노예'로 보았다. 1960년까지만 해도 어느 공공 도서관에서든지 바티칸의 폭군 제수이트가 유럽 중세 암흑기 내내 종교재판을 통해 잔학행위를 저질렀다는 기록을 읽어볼 수 있었다. 1960년 이후에는 그런 출판물이 모두 제거되었다(이와 같은 웹페이지가 알려지자 국회도서관의 도서 수백 권이 갑자기 사라졌다. 예를 들면 「음모자들의 고백(링컨 암살에 대해)」과 같은 책). 이는 조직적으로 교육 자료를 모두 차지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1933년 베를린의 '분서' 사건을 기억해 보라).

이는 또한 멀리 떨어져 있는 마츄 피츄(Machu Picchu, 페루 중앙부 안덱스 산맥 해발 2,100m에 있는 고대 잉카의 성곽 도시 유적)에서도 증명된다. 모두 '성모', 로마 카톨릭의 이름으로 되어 있다. 우리는 독립전쟁을 영적 자유의 전쟁이라고 한다. 영국 군인은 어느 도시에서나 개신교회 건물 등이 계획적으로 파괴된 것을 보고 난 뒤에 행진해 나아갔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 성당건물들만은 예외였다. 곧 '빛과 영광(Peter Marshall과 David Manuel 씀)'이란 기록이 이를 말해 준다. 이 글을 쓴 사람들은 카톨릭 제수이트 조직이 이 잔학 행위의 자행자라고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그 밖의 기록을 보면 이 사실이 명백히 드러난다("북아메리카 사령관이었던 영국계 캐나다인 헨리 클린턴(Henry Clinton) 경의 군대는 올리버 델라니(Oliver Delaney) 및 코트랜드 스키너(Cortlandt Skinner)의 여단, 뉴욕시의 자원자, 여왕 근위대(Queens Rangers), 오렌지 근위대(Orange Rangers), 로얄 아메리칸(Loyal Americans), 펜실베니아 충성자들(Pennsylvania Loyalists), 메리랜드 충성자들(Maryland Loyalists), 로마카톨릭 자원자, 서부 저지단(West Jersey)의 자원자, 추격병들(Chasseurs), 충성스런 미국 개혁자들(Royal Americans Reformees), 아일랜드(카톨릭)의 자원자, 영국 군단, 안내자 및 선구자들(Guides and Pioneers)로 구성되었다"(칼 반 도렌(Carl Van Doren)의 「미국 혁명의 비밀 역사」).

사실 그 글쓴이들은 로마 카톨릭 제수이트 조직을 면책시켜 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미국 표준판' 성경 번역팀의 일원이었던 사람의 정보를 수용하게 되었다. 그 팀 가운데 33%는 공산주의 전선 성원이었는데, 어떻게 그 팀의 성원과 교제를 하게 되었는지 필자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다(1964년, 존 스토머(John H. Stormer)의 「아무도 그것을 배신이라 할 수 없다」). 바티칸이 주도한 잔학 행위에 대해서는 「폭스(Foxe)의 순교자의 책」에 잘 요약되어 있다. 이 책에서는 또한 사제들이나 교황의 통달 회칙에 따라 종교재판 희생자들에게 강요된 복종 요구가 1995년 5월 25일 공표된 제2차 바티칸 회의(교황을 그리스도의 대리자(그리스도의 화신)로 인정)와 직접 관련이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 회의에서는 변화되지 않는 성찬용 빵을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의 육신과 피로 간주하는 미사예식에 참가함으로써 그리스도 육신의 중요한 부분이 되는 행사가 개최되었다. 이것이 로마카톨릭 도그마의 일부가 되고 있다는 점은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로마카톨릭이 하나님의 권위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지닌 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어느 종파의 어느 사람에게나 그것을 적용하려 하고 바티칸과 세계 교회주의 운동(W.C.C)이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만 목적을 두고 있다면 바티칸이 종교재판 시작 이후로 그 도그마, 입장, 목적, 수단 등을 변경시키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속임수의 연합


다음 글을 읽어보자.

"우리는 이제 완전한 신앙 통일이 달성된 그 축복 받은 날까지 얼마나 더 여행해야 할지 물어보아야 하며, 우리 모두 평화롭게 거룩한 주님의 미사성체식을 축복할 수 있다. 상호 이해가 깊어지고 이미 우리 사이에 교리상의 통일점이 마련되어 성체식이 영향력 있게 효율적으로 성장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교회라면 단연 신성한 카톨릭뿐이라고 기독교인들이 양심적으로 고백할 수 있게 될 정도까지는 되지 않았다. 세계교회주의 운동(W.C.C)의 최종 목적은 세례받은 사람들을 가시적으로 모두 완전히 통일하는 일이다"(앞의 글 35쪽).

"이제 진정한 신앙 합의를 이루기 앞서 더 연구해 볼 필요가 있는 영역을 다음과 같이 확인해 볼 수 있다.

1)신앙 문제에서 최고의 권위를 지니고 있는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신성한 전통(Sacred Tradition 카톨릭 전통) 사이의 관계

2)성체식(하나님 아버지께 찬사를 드리는 그리스도의 육신과 피의 성례), 성례 기념물과 그리스도의 실존, 성경에서 흘러나오는 거룩하게 하는 말씀

3)전교구, 장로, 부제라는 3중 성직에 대한 성례 의식인 서품식

4)신앙을 가르치고 수호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사되는 권위이자 책임으로 인식되는 교황과 주교의 교회 관리

5)그리스도의 사제와 온 인류를 위해 중재 역할을 하고 있는 영적 성모, 곧 교회의 우상인 동정녀 마리아"(앞의 글 36쪽).

"따라서 대화의 결과를 도출하려면 결과를 분석함과 동시에 그 결과가 사도들에게서 물려받고 주교, 곧 자신들의 '합법적' 목회자 주변에 있는 신도 공동체보다 오래된 신앙 전통과 일관성이 있는지 엄밀하게 검증할 수 있는 정밀한 비평 과정이 필요하다"(앞의 글 37쪽).


이 칙령이 함축하고 있는 바는 너무 커서 이처럼 미국인의 자유와 권리를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 범위의 광범위함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 의도에 부합하는 일이라고 간주된다고는 보기 어렵다. 이에 대해 의문점이 있으면 '그 사람들은(They) 하나일지어다'란 칙령을 읽어보면 된다. 교황이 '우리(we)' 대신에 '그 사람들은(they)'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명백히 자신을 배제한 것이다. 교황은 결국 그리스도의 대리자(화신)이므로 자신을 단순한 인간으로 간주할 수 없는 것이다(권력이란 마취 작용이 있어서 논리를 완전히 왜곡시키도록 만들기도 한다). 이 칙령은 스컬 본(Skull & Bones), 700 클럽의 팻 로버트슨(Pat Robertson)의 전폭적인 승인을 받았다. 또한 '예수회 창시자 이그나티우스 로올라의 영적 권능 발휘' 둘째 주에서 첫 번째 및 두 번째 점을 읽어보라. 이그나티우스 로올라(실제 이름은 이니고 로페즈 드 레칼데- Inigio Lopez De Recalde)는 1534년 스페인에 교황군대 제수이트 조직을 설립했으며, 일루미나이티(Illuminati -빛을 쥐고 있는 자란 뜻)도 설립했다.


일루미나이티와 카톨릭


일루미나이티(Illuminati)는 훗날 1776년 5월 1일 아담 바이스하우프트(Adam Weishaupt 독일 제수이트 회원으로서 그 사진은 1달러짜리 지폐상에 새겨 있다)가 잉겔슈타트(Ingelstadt) 대학에 정식으로 설립했다. 바이스하우프트는 그 대학의 교회법 교수로서 '검은 교황(유럽 메이슨 지부의 일원이며 로드챠일드(Rothschild) 가문에서 선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의 명령을 직접 받았으며 그 가문의 재정 지원을 받고 있었다. (1777년 바이스하우프트는 그 가문에 침투해 통제할 수 있도록 뮈니치 자선 위원회(Good Council) 지부의 프리메이슨 지부를 도입했으며, 1782년 7월 윌헴스배드(Wilhemsbad)에서 열린 프리메이슨 국제 회의에서는 프리메이슨 지도자들이 일루미나이티의 교리를 주입받았다) (일루미나이티의 미국 지부는 '외교관계 위원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로서 미국 대법원 판사 루스 배데르 진스버글(Ruth Bader ginsburg, 카톨릭), 스펜판 브래이어(Stephen Breyer, 카톨릭), 산드라 데이 오코너(Sandra Day O'Conner)가 그 멤버이며, 빌 클린턴(Bill Clinton), 죠지 부시(George Bush), 뉴트 깅그리치(Newt Gingrich) 등도 그 멤버이다). 그 밖의 일루미나이티(Illuminati) 조직은 예일 대학교의 삼극위원회(Trilateral Commission) 및 스컬본(Skull & Bones).


로욜라는 십자군(중세 암흑기 종교재판 시기에 이스라엘과 유럽 대부분 지역을 침습한 바티칸 군대)이기도 했다. 일루미나이티 연합 전선으로서는 UN(Unitied Nations), 빌더버거 그룹(Bilderberg Group), 로마 클럽(Club of Rome), 로얄 국제관계연구소(Royal Institute For International Affairs,영국), 삼극위원회(Tri-Lateral Commission), 외교위원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가 있다.


카톨릭 제수이트의 신비적 영성훈련 행사가 제수이트의 일일 의식 행사였다. 그 사본은 인터넷에서 쉽사리 구할 수 있다. 그 가운데 몇 구절을 인용해 보겠다.

"첫 번째 점은 주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인간의 국왕(교황)이 내 앞에 있다는 것인데, 기독교인들은 누구나 그를 존경하며 순종하고 있다. 두 번째는 이 국왕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지 보라는 것이다. 곧 '비신도 국가를 모두 정복하는 것이 내 의지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나를 따르려고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나처럼 먹고 마시고 옷 입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낮에는 나처럼 일하고 밤에는 지켜보아야 한다. 그래서 나중에는 노동 일에서 그랬던 것처럼 승리해서 나와 결별할지도 모른다. 다섯 번째 점은 신성이 어떻게 숨는지, 곧 적을 어떻게 파괴하고 파괴하지 않을 수 있는지, 또한 가장 신성한 인간성을 어쩌면 그토록 잔인하게 고통받도록 내버려 둘 수 있는지 고려해 보라는 것이다."

교서 우남 생텀(Unam Sanctam, 교황 보니파체(Boniface) 8세가 1302년 11월 공포)에서는 정부 부서를 활용해 그 목적을 달성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이 로마 카톨릭과 그 권력에는 두 가지 검, 곧 영적 검과 세속의 검이 있음을 복음서를 통해 알고 있다. 사도들이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마가복음 22:38)'라고 말한 곳은 교회(로마 카톨릭) 안이다. 사도들이 이렇게 말하자 주님은 너무 많다고 하지 않고 족하다고 하셨다. 분명히 세속의 검이 베드로의 권한 내에 있음을 부인하는 사람은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마태복음 22:52)'고 한 주님의 말씀을 잘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검이 모두 교회(로마 카톨릭)의 권한 내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적 검은 교회(로마 카톨릭)를 위해서 활용되지만, 세속의 검은 교회(로마 카톨릭)가 활용한다. 영적 검은 사제들의 수중에 있다. 세속의 검은 국왕과 병사들의 수중에 있지만 사제들은 이를 마음대로 활용할 수도 있고 묵인해 줄 수도 있다."


이런 사실만 보더라도 바티칸과 일루미나이티가 군사적 방법으로 통치했음을 알 수 있다(그렇다면 이제 미국 와코(Waco) 기습 사건(그 이상의 정책을 마련하려는 파이롯트 프로그램)의 배경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이는 발칸 지역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1964년 11월 24일 교황 6세가 공포한 '교회에 관한 교리상의 구성' 3단락 20째 줄을 보면 "주교들은 사제와 부제들의 도움을 받아 공동체의 책임을 맡고 대중을 관할하는 양치기이다. 주교들은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들이고 신성한 예배를 주재하는 목회자이며 정부의 관직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 정책의 전형적은 사례는 아일랜드에서 나타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카톨릭 예수회(제수이트)를 무서워하고 가장 혐오하는 사람들은 같은 카톨릭 신부들이다(제3제국 상층부의 서열과는 달리 로마카톨릭 서열에는 내부 경쟁이 있었다).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제수이트는 '검은 교황'에게만 응답할 뿐이기 때문이다. S.S., S.D., S.A., 게슈타포가 제3제국에게 충성했던 것처럼 제수이트는 바티칸에 충성을 다한다.


예수회 제자 히틀러


제수이트의 폰 파펜(Von Papen, 히틀러의 스승이자 독일의 수상(1932년 6월-1933년 3월))은 자신의 저서 「히틀러와 나눈 대화」에서 "히틀러는 교황권의 최고 이상을 실천에 옮겼다"고 기술했다. 이 기술 내용은 죽음의 캠프(아우슈비츠 수용소)와 관련이 있다. 수상 폰 파펜이 첫 번째로 수행한 업무는 독일 제국의 의회를 해체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 업무는 히틀러의 '갈색 셔츠(SA)'에 대한 금지 명령을 철회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카톨릭의 젊은이 그룹을 '히틀러의 젊은이(Hitler Youth)'로 통합하여 히틀러와 제3제국이 권력의 무대에 서도록 했다. 「나의 투쟁(Mein Kampf)」이란 저서는 카톨릭 제수이트 스템플(Staempfle)이 히틀러를 위해 저술한 것이다. 대주교 에우게니오 파첼리(Eugenio Pacelli)는 독일 주재 로마 교황 대사(1917-1929)로서 독일의 일루미나이티 은행가들 및 산업가들(I.G. Farbin)과 함께 히틀러의 제3제국이 권력을 장악하도록 준비 작업을 했다. 또한 히틀러가 전쟁에 패배할 수도 있음을 대비해서 예방책으로 유태인 수천 명을 바티칸에서 사라지도록 했다(히틀러의 실패 시를 대비한 것으로, 바티칸은 유태인을 보호해주었다는 명분을 세우기위해).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요한복음 16:2)


바티칸이 히틀러를 비롯해 무솔리니, 프랑코, 살라자르(Salazar)와 협약을 체결했다는 사실(1933년 7월 20일 폰 파펜과 국가 담당 추기경 에우게니오 파첼리(훗날의 교황 Pius 12세)이 서명)은 비밀이 아니다. 그러나 바티칸이 히틀러가 정복했던 국가가 모두 포함되도록 협약 조항을 확장시키려고 히틀러를 부추겼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는 히틀러의 저서 「히틀러의 비밀 대화」에 자신의 말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음을 보면 알 수 있다.

"제3제국이 새로 획득한 영토가 모두 포함되도록 협약 조항을 확장하려는 바티칸의 시도에 대해 나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사아르(Saar), 슈데텐랜드(Sudetenland), 보헤미아(Bohemia), 모라비아(Moravia), 라이츠가우 단스지금-동프러시아(Reichsgau Danszig-East Prussia), 와르테가우(Warthegau), 실레지아(Silesia) 및 알사스-로렌(Alsace-Lorraine)의 대부분 지역은 사실상 공식적인 국제 조약의 지원을 받고 있는 로마카톨릭과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516쪽).

"대주교 폰 파펜의 태도를 보면 전쟁 후 협약을 종료시키려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협약을 지역 규제법으로 대체하고 현재 그 협약에 따라 보장된 재정 지원을 교회에서 철회하려 하고 있다(520쪽).

파첼리(Pacelli, 협약 조약 협상자)는 협약 조항에 따라 독일 국가가 '종교 교사에 관한 지역 주교의 제안을 모두 받아들여야 하고, 주교가 요청하면 그 교사들을 사살할 의무가 있으며, 재정 의무를 모두 이행함과 동시에 교회법이 충실하게 적용되도록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빌 베네트(Bill Bennett 또한 제수이트 조직인 동생 밥(Bob 현재 유타 주 상원 의원)는 레이건 행정부 하의 교육성 성과 기초 교육(OBE)의 포교자가 '어린이는 모두 제수이트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말을 했다고 고백했다.

따라서 요한 코트니 머레이(John Courtney Murray, 로마카톨릭 사제)가 워싱턴에 제출한 '종교 자유에 관한 조정 문서'란 조약의 내용이 몹시 의심스럽다.


일련의 사건이 히틀러의 일생을 좌우했음은 분명하다. 레오폴드 포에치(Leopold Poetsch)는 히틀러의 카톨릭 교사였으며, 스템플(Staempfle)은 히틀러를 위해 「나의 투쟁(Mein Kampf)」을 저술했다. 1919년 툴레 위원회(Thule Society)의 징병 사건은 '일루미나이티 역사 개술'(웹페이지)에 기록되어 있다. 히틀러의 '내부 그룹' 성원은 히믈러(Himmler), 괴벨스와 회스(Geobbels & Hoess), 카톨릭 신자 등이었다. 나치와 유고슬라비아 우스타쉬(Ustasha) 파시스트 전범 가운데 수천 명(일만 명 이상)이 바티칸을 통해(바티칸 비자와 훔친 적십자 여행 카드에 바티칸 직인을 찍음으로써 문서를 위조해서)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파라구아이,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미국 등으로 도피 밀입국을 했다. 구출을 위한 대량 철수(Ratlines)는 지오반니 몬티니(Giovanni Montini, 훗날 교황 6세), 허발(Hubal), 드라고노비치(Dragonovic, 교황 Pius 12세(1945-1950)의 지시 하에 미군 정보기관(CIC)과 협조하여 게슈타포 수령과 전범 클라우스 바르비에(Klaus Barbie)가 남아메리카로 도주하도록 주선) 등과 같은 바티칸 직원의 비밀 조직이 주도했다.

"대량 학살자들을 정의의 심판대에서 구해준 사람들은 페론(Peron, 아르헨티나의 유명한 독재자)과 그의 비밀 경찰이 아니라 로마 카톨릭과 그 밀사들이었다. 사제, 교회, 수도원과 더불어 위조 바티칸 여권으로 대전 후 나치 전범들의 수색을 방해한 이는 바로 로마 카톨릭이었다. 이 구출 작전은 나치 시대에 계속 추구해 온 정책과도 일관된다. 제수이트 신학자 헨리 드 루박(Henri du Lubac)은 대전이 끝나기 훨씬 전에 로마 카톨릭과 친나치 비치(Vichy) 정권의 협조 관계에 관해 보고서를 제출한 적이 있다. 이 보고서는 이번 달에야 공개되었는데, 드 루박(du Lubac)은 나치 정권 하에서 그 임무를 포기한 로마 카톨릭 주교들을 비난하고 있다. 프랑스의 추기경과 성직자들은 수십 년 동안 프랑스 최악의 전범 폴 토이비에르(Paul Touvier)가 정의의 심판대에서 벗어나도록 도움을 주었다. 카톨릭은 획일적인 통치를 받으므로 최고 권위인 바티칸의 승인 없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오랜 기간 동안 어떻게 일사불란하게 행동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째서 바티칸이 이스라엘 국가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예루살렘 포스트 지는 '최대의 과실(Maxima Cupla)'이란 1992년 2월 14일자 사설을 통해 이탈리아 바티칸 사원의 프란체스코 성직자가 홀로코스트 학살자 아돌프 아이히만(Adlof Eichmann)에게 바티칸 비자와 여권(1950년 6월 14일 리카르도 클레멘트란 이름으로)을 발급해 줌으로써 아르헨티나로 무사 통과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모사드에의해 체포되어 예루살렘에서 열린 재판에서 오른 손을 들어 진실을 말하겠다고 맹세하고 나서 손으로 교황이란 표시를 만들어 보여주었다. 히틀러는 파벤(I.G. Farben)이 고용한 아이비 리(Ivy Lee, 아마도 John D. Rockefeller의 이미지를 계속 높여 주었기에 선발된 듯하다)의 승인을 받은 뒤 런던, 뉴욕, 베를린 등지에서 일루미나이티 은행가들의 지원(따라서 루돌프 헤스(Rudolph Hess)는 로드챠일드의 고향인 스코틀랜드로 망명할 수 있었다)을 받았다.


아우슈비츠 대학살


파벤(I.G. Farben)은 그 악명 높은 파벤부나(Farben buna) 비누를 아우슈비츠(I.G. Auschwitz) 공장 직원들에게 먹였고(3개월 뒤에 아사하도록 특별 처방), 유태인(프란체스코 신부회의 던스 스코투스에 따르면 유태인은 신의 명령에 따라 노예일 수밖에 없었다고 함)과 집시 등을 가스로 학살할 때 사용하는 독 지클론(Zyklon) B를 발명했으며, 이제는 미국에서 제약 산업, A.M.A.(미국의약협회), F.D.A.(미국 식품의약품국)를 통제하고 있다. 따라서 레이어트릴(Laetrile)은 검사 받지도 않고 사용 금지가 되었으며 검사도 허용되고 있지 않다. 이 제품은 살구 씨 등에서 추출한 식품(비타민 B-17)이지 약이 아니지만 말기 암 환자 5명 가운데 3명을 치료할 수 있는 효능이 있다고 한다. 따라서 F.D.A.는 2억 1천만 달러를 들여 10년 동안 연구한 끝에 비타민을 시장에 내놓게 되었다(회사들의 비타민 제조를 효율적으로 금지시킬 수 있도록). 이 제약 회사들은 연방 정부의 승인 하에 연간 수백 만 달러씩 수입을 올리고 있는데(25년 동안 290억 달러), '암 산업'이 없다면 그 수입은 곧 줄어들 것이다. 따라서 텍사스 주에서 암 환자를 치료하고 있는 브레진스키(Burzynski) 박사가 어째서 박해를 받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박사를 제쳐놓는 이유는 그 거대한 산업에 방해물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1996년에는 마이애미 주 포틀랜드에서 캘리포니아 주 오크랜드에 이르는 19개 주에서 병원 600개소 이상이 카톨릭 기관들과 통합했다).


암 환자 케네스빌(Kernersville N.C.)은 암을 고치려면 턱을 절반쯤 제거해야 한다는 말을 의사에게서 들었다. 그러나 이 환자는 티와나(멕시코의 의사)에게 가서 라트릴(Laetrile) 치료를 받고 암을 고칠 수 있었다. 그리고 돌아가서 먼저 의사에게 그 치료받은 일을 말해 주었다. 의사가 그 사실을 미국 의학협회에 보고하자 연방 직원이 그 환자의 집에 와서 라트릴이 있는지 조사를 했다.


히틀러는 「제3제국의 흥망」44쪽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떤 종파에도 비난의 여지는 있지만 정당은 과거 역사에서 순수 정당이 종교 개혁에 성공한 사례는 없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이 말을 다음과 같은 486-487쪽의 말과 비교해 보라. "이 민족들은 자신들의 모국, 곧 헝가리, 러시아, 독일을 그려 왔다. 그러나 슈데텐 사람들은 독일 제국에 속했던 적이 없으며(느슨하게 형성된 신성로마제국의 일부분이 되었던 것 이외에는) 오스트리아에 속해 있을 뿐이다." 분명히 히틀러는 자신의 제3제국을 로마 카톨릭의 기업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카톨릭 정당인 독일의 중앙당(2차 대전 뒤 '기독교 민주당'으로 개명. 당수는 루드비히 카스(Ludwig Kaas) 주교로서 동일한 이름으로 동일한 목적을 수행하는 부하가 페루에 있다)은 히틀러 배후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던 파첼리(Pacelli) 추기경이 해체했다]. 히틀러는 린츠에서 영세를 받고 독일 주법에 따른 세금(Kirchensteuer)을 바티칸에 바쳤으며 사망할 때까지 교회법과 정책을 옹호하며 수행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본다면 히틀러가 어째서 협약 동맹자 프랑코와 무솔리니에게 끝까지 충실했었는지 알 수 있다. 프랑코는 카톨릭 경제조직 오푸스 데이(Opus Dei, Jose Maria Escriva 창단)의 지원을 받아 권력을 잡게 되었으며 통치 기간 내내 지원을 받았다. 또한 프랑코도 2차 대전 중에 크로아티아에 있는 우스타쉬(Ustasha)를 지원했으며 오늘날에도 보스니아와 코소보 내의 용병을 지원하고 있다(매년 마드리드에서 히틀러 추모 미사를 드리고 있으며, 오늘날의 아일랜드 카톨릭 언론에서는 스페인의 프랑코와 포르투갈의 살라자르(Salazar)를 찬양하고 있다). 무솔리니는 바티칸의 도움으로 권력을 장악했으며 그 밖의 국제 조약을 모두 파기시켰다. 21세기 현재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이 히틀러, 무솔리니, 프랑코 시대처럼(1933년 5월 22일의 '강철 조약') 서로 협조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1939년 3월 2일 국가 담당 추기경 에우게니오 파첼리가 로마 카톨릭 교황 12세로 취임했다. 4일 뒤(히틀러의 탱크 부대가 폴란드로 진격했을 때) 파첼리는 히틀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위대한 아돌프 히틀러 각하, 독일 제국의 총통이자 수상 각하. 교황직을 수행하기 앞서 우리는 독일 국민의 영적 안녕을 계속 귀하의 지도력에 맡겨 두려고 합니다. 우리는 독일에서 여러 해를 보내면서 전력을 다해 교회와 국가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를 확립하려고 했습니다. 이제 목회 책임을 맡아 기회가 많아졌는데, 그 목적을 달성하려면 얼마나 더 열심히 기도해야 하는지요? 어느 영토에서든지 독일 국민의 번영과 진보가 하나님의 도움으로 결실되기를 기원하나이다!"

파첼리는 제3제국 내내 베를린에 로마 교황 대사(대주교 오르세니고)를 두었다. 그래서 오르세니고는 파첼리의 강력한 뜻에 따라(1939년 4월 20일) 히틀러의 50회 생일을 맞아 축제를 열었다. 이는 제3제국 내내 전통이 되었으며, 이때 베트람(Bertram) 추기경은 '독일 내 주교와 주교 관구의 이름으로 총통께 진심 어린 축하를 보내 드립니다'란 메시지를 보내면서 '독일의 카톨릭이 천국에 보내는 열렬한 기도'란 말을 덧붙였다(존 콘웰 저 「히틀러의 교황: Pius 12세의 비밀 역사」)(이 책에 관한 연구는 모두 바티칸 도서관에서 수행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 온타리오에 있는 칙 출판사는 성경에 관한 서적이나 이야기 책 등 기독교 관련 도서를 출판하고 있다. 이 회사는 이 주제를 언급하는 데 아주 중요하다. 죠셉 맥카비(Joseph McCabe -전 프란체스코 성직자로서 국제적으로 유명한 무신론자이며 약 250권의 서적을 집필), 월터 몬타노(Walter M. Montano, 전 도미니카 성직자로서 「자줏빛 커튼의 배후」의 저자), 버나드 프레젠보그(Bernard Fresenborg, 전 사제로서 「지옥 속의 30년」, 「엉클 샘의 새 약혼녀」의 저자) 등이 이 출판사에 기고를 했다. 이 출판사는 바티칸에서 여러 해 동안 복무하다가 탈퇴해서 그 이야기를 위의 저자들처럼 책으로 출판한 전 제수이트 회원의 실화를 담아 책으로 출판했다. 이 전 제수이트 회원 알베르토 리베라(Alberto Rivera) 박사와 칙 출판사의 잭 칙은 다른 출판사의 저자들이나 마찬가지로 그 자료를 출판하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었다(리베라 박사는 치과의사가 감염된 주사기를 턱 속에 넣은 채 부러뜨리고 여러 해 동안 체계적으로 독약을 주입하는 바람에 1997년 6월 20일 사망했다). 바티칸은 그 관례나 비밀 서적들이 폭로됨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예컨대 「제수이트에 대한 비밀 지시서」라든지 「제수이트의 비밀 역사」(생명의 서신 출판, 검은교황)와 같은 도서. 이 두 책은 반드시 읽어보아야 한다). 이 책들은 미래에 대한 바티칸의 명명백백한 의도와 방법을 폭로하고 있다. 여러 기간에 걸쳐 위와 같은 저자들이 직접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증거가 확실하다고 말하면서 그런 사실에 관해 저술한 책은 충분히 있다. 이 사실을 외면하면 완전한 편협과 논리 부재에 빠져서 의도에 부합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전제 정치란 선량한 사람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을 때에만 성행한다고 본다.


「아브라함 링컨의 암살에 대한 로마 카톨릭의 책임」(Thomas M. Harris 저)

「아브라함 링컨의 암살」(Thomas M. Harris 저)

「자줏빛 커튼의 배후」

「대음모」

「아브라함 링컨의 암살에 관해 숨겨 있던 진실」(Burke Mccarty)

「로마 교회에서 지낸 50년」(전 카톨릭 사제 Charles Chiniquy 저)

「자유의 아들 교단의 배반의 역사」(Felix G. Stidger 저)

「로마 카톨릭 통제 하의 워싱턴」(Justin D. Fulton 저)

「미국의 자유를 파괴하려는 대음모 계획과 범행 역사」(John Smith Dye 저)

「John Surratt의 재판」(John Surratt 저) (John Surratt는 6주일 동안 캐나다 사원에, 4주일 동안 영국에 숨어 있었으며 Zuaves(바티칸 교황의 개인 보디가드 팀)의 성원이 되었다가 결국 워싱턴 D.C.로 인도되어 법정에 서게 되었지만 교수형을 면제받았다. 이때 재판이 휴정할 때마다 제수이트 회원들이 무더기로 존 슈라트(John Surratt)에게 퍼레이드를 해 가서 악수를 하면서 판사가 보호하고 있음을 확신시켰다)

「연방군 및 연합 해군에 관한 공식 기록」시리즈 Ⅱ Vol. Ⅲ(연방 보관 도서관)에서는 바티칸이 남부 연방군의 입장으로 개입해서 아브라함 링컨의 암살을 공모했으며 국무장관 윌리암 세워드(William H. Seward)의 암살을 시도했다고 했다. 바티칸은 당시 정치, 교육(빌 베넷과 현재 유타 주 상원 의원인 그의 동생 밥은 레이건 행정부(레이건은 빌 베넷을 교육성 장관으로 지명하길 꺼려해서 저격당할 뻔했다) 하의 교육성 OBE(성과 기반 교육국)의 홍보관이 '어린이는 누구나 제수이트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말을 했다고 제수이트에 고백했다), 이민(1828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창설된 바티칸 스파이 네트워크 Leopold 재단) 분야를 계획적으로 통제했을 뿐만 아니라 언론도 상당한 정도로 통제했다고 한다(그 뒤 점차 그 밖의 매스컴도 포함하여 통제). 교황 피우스(Pius)는 제퍼슨 데이비스(Jefferson Davis)에게 서한을 보내 북부 연방군 내의 아일랜드 카톨릭 교도들이 탈퇴할 수 있도록 리치몬드(Richmond) 신문에 기사를 게재하라고 구체적으로 지시했다. 그렇게 보도하자 아일랜드 카톨릭 교도들은 1주일 내에 144,000명이나 탈퇴했다. 링컨이 뉴욕시에서 북부 연방군을 위해 징병을 시작하자(1864년) 대주교 휴게스(Hughes)는 미국 역사상 최대의 인종 폭동을 선동하여 흑인 고아를 불태워 죽이는가 하면 거주자들을 유린 살해하기도 했다. 우리는 일루미나이티의 국제적 은행가들이 제프 데이비스(이때 국무장관 주다 벤자맨(Judah P. Benjamin)은 로드차일드 가문의 대리인이었다), 윌케스 부스(J. Wilkes Booth), 자유의 아들(Sons of Liberty), 황금 서클의 기사(Knights of the Golden Circle: 윌케스 부스는 엘라 터너라는 여인의 부추김을 받아 아브라함 링컨을 암살했으며, 그 지원을 받을 목적으로 '황금 서클의 기사'에 가입했다. 레온 촐고츠(Leon Czolgosz)는 '황금 독수리'에 가입했으며 엠마 골드만(Emma Goldman)이라는 여인의 부추김을 받아 윌리암 맥킨리(William Mckinley) 대통령을 암살했다), 미국 기사 조직(Order of American Knights: 코퍼헤드 조직) 등을 지원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때 자금은 제프 데이비스의 '캐나다파 내각'을 통해 몬트리올 지점인 온라리오 은행으로 공급되었다. 이는 바티칸이 세밀히 계획했던 바였으며, 이에 앞서 부르가드(Beauregard) 장군(카톨릭)은 섬터(Sumter) 요새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를 살해하도록 조직된 중대는 비르네(Byrne)이라는 열광적인 카톨릭 신도가 이끌고 있다. 그 중대는 전적으로 로마 카톨릭 교도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그 속에 신부 두 명이 병사로 가장하고 있으면서 군대를 고무하고 통제하고 있다. 전보를 발명한 유명한 모로스 교수는 최근 자신이 로마에 있을 때 이 나라와 국가 기관에 대해 가공할 만한 음모가 꾸며지고 있음을 확인했다고 나에게 말했다. 이 나라를 피로 물들이고 이처럼 끔찍하게 황폐화시키고 있는 시민전쟁은 로마 교황의 대사와 그 음모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기록은 모두 국회도서관에 있다. 미국 국무성 기록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1867년 6월 30일 바티칸과 국교를 단절했다가(로마 카톨릭 영역 내에서 비카톨릭 신도들(개신교도들)의 예배를 허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단절. 이를 보면 TBN이 어떻게 로마에서 국제적인 종교 TV 방송국이 되었는지 알 수 있다) 미국은 1984년 1월 10일 레이건 행정부 시기에 바티칸과 국교를 재개했다. 레이건은리비아의 가다피의 테러리즘과 기만 행위에 관해 여러 해 동안 잘 알고 있었지만, 가다피가 로마에 폭탄을 투하한 다음에야 그에 대한 공습을 승인했다.


예수회가 장악한 미행정부


알베르토 리베가 박사(Alberto Rivera)에 따르면 1980년 이전에 미국 정부 행정직에는 예수회(제수이트) 회원이 2천 명이 넘게 차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은 미국 행정부 수도 워싱턴과 주 정부에서 얼마나 많이 차지하고 있는지, 얼마나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지 알 수가 있다. 제수이트는 CIA/MK-Ultra/Project Monarch 프로그램(극도의 외상 유발 다중 인성: 제수이트/바티칸의 마인드 컨트롤)을 통제하고 있다. 이렇게 로봇처럼 된 희생자들은 섹스 노예로 이용되어 주 정부의 고위층이나 전세계의 동료 마약 취급자들에게 마약/돈이나 비밀 메시지를 전해 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살인을 수행하는 데 이용되기도 한다(에릭 해리스(Eric Harris)와 딜랜드 크레볼드(Dyland Klebold): 앨 고어(Al Gore)와 그 부하들은 '트렌치 코트 마피아'임을 확인시킬 수 있도록 컬럼바인(Columbine) 고등학교 연설 당시 검은 트렌치 코트를 입었다).


프로젝트 모나크(Project Monarch) 프로그램의 참가자들은 다음과 같다.

제랄드 포드(Gerald Ford), 로날드 레이건(Ronald Reagan), 죠지 부시(George Bush), 죠지 부시 2세(George Bush Jr.), 빌과 힐러리 클린턴(Bill & Hillary Clinton), 로버트 버드(Robert C. Bird), 알랜 크랜스톤(Alan Cranston), 매들린 올브라이트(Madeleine Albright)...

ACHES-MC(인간 실험 생존자 옹호 위원회-마인드 컨트롤)이란 이 흉악한 제수이트/CIA 프로그램의 생존자/희생자들을 처리하기 위한 조직이다.


예수회와 돈, 돈, 돈


바티칸은 2천 6백 80만 달러를 들여 미국 지불준비금의 금을 구입했다. 시장 가격은 34달러/온스였지만 1달러/온스에 구입해서 시장 가격으로 미국 정부에 되팔았다(미국 월드 매거진, 1952년 12월호). 5,500개소가 넘는 학교와 대학교(클린턴은 예수회 죠지타운대학(Jesuit Georgetown)에서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공산주의 철학 교육을 받았으며, 제퍼슨 데이비스는 켄터키 주의 성 토마스 카톨릭 대학에서 공부했다)가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다. 플로리다 주 보카 레이톤(Boca Raton)에 있는 메리몬트(Marymount) 대학이 그 전형적인 사례이다. 이 대학은 1963년에 설립되어 1968년에는 학생 수가 350명이었으며 기숙사 보조금으로 2백만 달러, 이민자 자녀를 위한 빈민 구제 보조금으로 55,000 달러, 교육 보조금으로 10,000 달러를 정부에게서 보조받았다. 1965년 미시시피 주에서 실직자 재교육을 위해 7백만 달러가 지원되었던 프로그램은 로마 카톨릭 주교 관구가 운영했으며, 그 자금은 힐버톤(Hillburton) 법안(1954, 1964)을 통해 정부가 지원했다. 1947년부터 1964년까지 그런 프로젝트가 7,372건이나 승인받았다. HUD는 공유지에 대해 비난을 하면서 카톨릭 교회에 귀속시켰으며, 이와 함께 그 토지를 개발할 수 있도록 프로테스탄트의 세금도 카톨릭에 바쳤다(1961년부터 하루에 83,000 달러 이상씩 받아 카톨릭 학교와 병원을 건립 중). HEW는 CPA(카톨릭 재산 획득 기관)으로 명칭을 바꾸어야 했다. 제수이트 포드햄(Fordham) 대학교는 뉴욕 시의 링컨 광장 일부분을 획득한 다음 연방 정부의 도움으로 개발할 수 있었다. 와인과 브랜디로 유명한 맨하탄(Manhattan) 대학은 큰 공장을 획득한 뒤 뉴욕 기숙사 담당 당국의 재정 지원을 받았다. HEW는 시카고에서 하이네스(Hines) 재향군인회 병원 소속 6에이커의 땅(450만 달러)을 제수이트 로욜라(Loyola) 대학교에 헌사했다. 재향군인회 의장 프레드 로데스 2세(Fred B. Rhodes Jr.)는 그 헌사 행위를 주저하고 있었기에 독실한 카톨릭 교도에게 의장 자리가 넘어갔다. 뉴욕 주의 은행 기록을 보면 1962년 카톨릭 교회가 수백 개 기업의 주식과 채권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매사추세츠 주에서는 카톨릭 교회와 주 정부를 구별하기가 어렵다. 공립 학교가 문을 닫으면 카톨릭 교회가 헐값에 구입한다. 카톨릭 교회는 공유지 경매 '밀봉' 경쟁에서 낙찰되지 않는 적이 없다. 이는 미국 정부와 지방 정부 등에 숨어 있는 카톨릭 압력 단체가 미국 헌법을 공개적으로 신의 뜻에 따라 통과시킴으로써 이루어지기도 하고, 카톨릭 교회를 대신하여 입법부와 재정 및 부동산 분야 등에서 무자비하게 활동하고 있는 카톨릭 딜러들의 정치 경제 조작이나 법적 절차를 통해 이루어지기도 한다. 한 때는 카톨릭 교회가 소유한 토지가 코네티커트 주 전체의 영토보다 더 많았던 적도 있었다. 카톨릭 교회는 토지를 구입하여 뉴욕 시에서 매긴 등급보다 낮게 건물을 건축한다(세금 면제를 위해서. 미스터 코카인(Mr. Cocaine) 조지 부시가 백악관에 있는 동안 뉴욕 시가 어째서 두 차례나 파산했는지 생각해 보면 알 것이다). 교황의 은행가 마이클 시돈나(Michele Sindona)는 바쁘게 일을 하다가 결국 프랭클린 국립 은행을 파산시킨 혐의로 뉴욕 주 연방 교도소로 가게 되었다. 시돈나는 교황의 은행가였을 뿐만 아니라 IOR(바티칸 은행: Societa General Immobilaire)의 은행가이기도 했다. 이 밖에도 다음 기관 등에 개입했다. 이탈리아 프리메이슨 지부, P2(이탈리아 프리메이슨 지부의 런던 지부), 바티칸 정당, 시칠리아 마피아 및 코사 노스트라(Cosa Nostra)(Sindona는 시칠리아 마피아 및 코사 노스트라를 세워 스위스에 있는 바티칸 소유 은행에서 들어오는 돈을 세탁했다).

9억 달러에 이르는 위조 채권을 만들어 미국에 적용하려 한 사람은 시돈나일 가능성이 높다. 바티칸 은행(IOR)과 추기경 티세란트(Tisserant, 교황 다음 서열)가 주범임이 밝혀져 수사가 시작되자 티세란트는 자신의 일기를 모두 바티칸에서 제거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편안하게 죽어갔다. IRS(미국 국세청)은 세금 기록에 관해 자신이 평가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IRS 법령이나 법률은 없음을 알고 기록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분류해서 BATF(마약 담배 총기 담당국)에 넘겼다. BATF는 비밀에 준하는 T 코드 시스템에 따라 그 사람들을 마약 밀매자로 분류한 다음 법률상의 증거를 제시하며 재산을 몰수한다. 어째서인가? 이에 관해 '적법한' 사법권을 지닌 곳은 IRS와 BATF뿐이기 때문이다. IRS는 푸에르토리코 재무성 소속이다. IRS의 원래 명칭은 'Internal Revenue Service a Department of The Treasury(재무성 내국세 서비스 담당국)'이다. 어느 국가의 재무성인지 명시되어 있지 않다. 미국 재무성 USC 31조에서 재무성이 어떤 기관들에 권한을 위임하고 있는지 찾아 보라. 빠져 있는 기관이 있다. 바로 IRS와 BATF이다. 어째서 미국 재무성이 아닌 IRS에 세금을 내야 하는가? 그렇기 때문에 IRS는 자금을 국제 은행가(IMF)에게로 전환시킨다. 세금 사건에서도 IRS는 판사들에 관한 세금 파일을 사건 담당 변호사에게 넘긴다. IRS 편을 들어줄 수 있는 판사를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IRS에 관한 문제를 더 알고 싶으면 세금 전문가 벤 호우크(Ben Houck)에게 연락 바란다.


예수회 제수이트는 미국 은행의 51%를 소유하고 있으며, 바티칸은 전세계에 걸쳐 수백 개 은행의 주식을 소유하고 있다. 라보로(Lavoro) 국립은행(교황이 이해 관계를 좌우함)은 조지아 주 아틀란타 지점을 통해 미국 농무성에서 들어온 세금 50억 달러를 세탁하여 사담 후세인의 무기('슈퍼 건(Super Gun)' 포함)를 구입하는 데 지불했다. 판사 에드워드 로지(Edward Lodge)는 죠지 한센(George Hansen) 의원을 투옥시키고 고문을 가했다(이른바 '디젤 요법'. 그 결과 한센은 손목을 평생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그 이유는 한센이 사법부를 조사하여 「IRS와 정부가 우리 국민을 괴롭히기 위해 남용하는 권력」이란 책을 펴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한센은 소득세 탈세와 관련하여 교회를 선택적으로 고소하는 IRS의 관행에 대해 언급했다. 그렇다고 이 행위가 미국 재무성을 위해 징세하려는 열정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벌금 등을 포함한 세금 액수는 IRS가 문선명(통일교교주) 사건을 고소하는 데 소비한 금액의 일부도 되지 못한다. 뉴욕의 로마 카톨릭 대주교는 문선명이 기소된 법정에서 3마일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문선명보다 1천 배나 더 비싼 자산을 자신의 명의로 소유하고 있었다. 사실 카톨릭 교회법은 관할 교구장이 재산을 자신의 명의로 소유해야 한다고 규정해 놓았다. 법률상으로는 '법인의 독점'이라고 하며, 이 때문에 미국 내 추기경과 주교 수백 명은 단 한 차례도 IRS의 조사를 받지 않았다. 또한 아무 혐의도 받지 않았다.


예수회와 이민국 장악


죠셉 몬토야(Joseph Montoya) 의원은 IRS의 개혁을 추진했기에 1970년대 상원 청문회에서 과거 잘못한 사실에 대 추궁받았다. FDA, HRS 등 법원의 명령 없이 또한 권리장전 제5조에 구속받지 않고 사람을 체포하고 건강 식품점을 수색하며 재산을 몰수하고 동물을 죽이거나 재산을 파괴할 수 있는 당국들은 하비스 코르푸스(habeas corpus-유죄로 판결되기까지는 무죄라는 조항)을 파기한 셈이다. 그래서 보트를 통해(합법 또는 불법) 들어오는 히스패닉계(모두 카톨릭) 이민자들(모두 제수이트가 통제)은 미국의 복지 제도를 좀먹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경제를 파괴하며(그러므로 회사와 근로자를 카톨릭 우세 국가들에 보내려는 나프타와 가트(Nafta and Gat)는 바티칸이 멕시코를 통제함으로써 계획적으로 무산되었다), 연방 및 지방 의회와 선거에 영향을 주고 있다(비공식 개인 법인 NES(뉴스 선거 서비스)가 미국 선거에서 선전과 개표를 물리적으로 통제하고 있으며, 어떻게 진행되는지 대중에게 알리지도 않고 있다). 그 이민자들은 복지 제도가 공식적으로 종말을 고할 때까지 끊임없이 복지 혜택을 받을 것이다. 미국 내 이민 당국은 모두 카톨릭 법의 적용을 받는 회사인 셈이므로 미국으로 들어오는 어느 카톨릭 이민자에게나 법적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이 사실에 관해 의심이 난다면 빈센트 라 비스타(Vincent La Vista)의 「이탈리아 전역의 불법 이민 운동」(비밀 취급 해제 번호 No. NND 760050, 4-11-90, 국립 문서보관소 기록 그룹 No. 59). 미국은 어째서 로마와 멕시코 시티에 이민 당국을 두어야 하는가?

로날드 레이건과 리처드 닉슨은 이 나라로 들어오는 제2차대전 파시스트 전범들을 이용했다(뉴렌베르크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은 나치 전범 월터 도른벌거(Walter Dohrnberger)는 벨 에어로스페이스(Bell Aerospace) 회사 연구개발부장이다). 이는 바티칸의 '연줄'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이 때문에 두 대통령은 표를 많이 받아 백악관의 권좌에 앉을 수 있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캘리포니아 주지사 시절에 유고슬라비아 카톨릭군대 우스타쉬(Ustasha)에 대한 승인의 날을 제정했다. 그러자 유고슬라비아 정부의 항의에 부닥쳤다. 유럽의 군부대를 방문했을 때에는 S.S. 장교의 무덤에 화환을 바쳤다.

F.X.Schouppe(제수이트)의 저서 「대학과 학교 활용에 관한 종교적 가르침 축약본」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카톨릭 교회는 약속한 맹세에서 면제될 수 있다. 이 권한은 교황과 주교에게 속하며, 자신이 또는 위임자를 통해 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203쪽).

"시민법은 카톨릭 교회의 권리에 순응할 때에만 양심의 구속을 받는다."(278쪽).

법정을 관할하는 판사들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피고에 대해 자신의 판단을 내려 주권을 빼앗는다. 텍사스 주 와코(Waco)의 왈터 스미스 2세(Walter Smith Jr.)(판사 Roy Bean)의 예를 보라. 연방 정부가 '시민권'을 유린한 사례는 너무 많다. IRS의 특수 요원은 필자의 책상에 권총을 내려놓고 위협한 일도 있다. 이는 수집상 존 예웰(John T. Yewell)이 직접 목격한 사실이다.


와코(Waco) 사건에서는 필로폰(마약) 실험실 혐의를 날조하여 미국 변호사 빌 존슨(Bill Johnson)에게 BATF 깡패들에 대한 보장을 얻어내려 했다. 이때 BATF 직원 로버트 로드리게스(Robert Rodriguez)가 마운트 카멜에 있었으므로(조사원들이 닥치기 전날) 무기를 모두 조사해 본 상태여서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는지 잘 알고 있었다. 데이빗 코레쉬(David Koresh)가 BATF에게 무기 조사를 더 해 보라고 요청하자 BATF는 거절했다(그러므로 살인과 폭력에 대한 이유는 없는 셈이다). 또한 조사가 시작된 뒤 어째서 슬릭 윌리(Slick Willy)가 검찰총장을 자넷 레노(Janet Reno)로 교체했는지 알 수 있다. 빌 존슨(Bill Johnston)은 사격장에서처럼 사격하고 싶어했으며, 그 이전부터 조작된 언론의 지원을 100% 받고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1994년 1월 28일, 캐롤 무어(Carol Moore)의 「데이비디언 지점의 대학살」)


또한 언론에서는 정부 정책에 대해 언급한 목사들에 대해 '교회와 국가의 분리인가?'라고 외치며 공격을 퍼부었다. 또한 교황이 미국에 와서 바로 이 문제에 대해 연설을 하자 모두 침묵을 지켰다. 교황의 낙태에 대한 언급에 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은 매들린 머레이 오헤어(Madelin Murrey O'Hair)뿐이었는데, 그 언급 내용은 그 이후로 공개되지 않았다. 오헤어와 그 가족은 뉴욕에 가서 교황에게 항의하기 직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래도 매스미디어는 침묵을 지켰다. 교회와 국가의 분리에 대해서는 난리를 치던 ACLU도 정부의 돈(프로테스탄트 납세자들이 낸 세금)이 카톨릭 학교에 지원되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켰다(제수이트 대학교와 그 프로그램에 지원되고 있는 연방 보조금과 대출금은 수십 억 달러에 이른다). 20세기 말엽 교황 레오(Leo) 13세가 매년 150만 달러 이상씩 갈취한 곳은 다음과 같다.

(1)피터(Peter)의 기부금($415,000 이상)

(2)로마 교황의 대사관 사무국($520,000)

(3)교황 피우스(Pius) 9세가 교황청 재산으로 남겨 두었으며 주로 영국의 콘솔 공채에 투자된 방대한 금액의 이자($625,000)

교황은 프랑스, 스페인, 멕시코와 같이 카톨릭 국가가 아닌 프로테스탄트 국가의 증권을 맡고 있었다는 점에도 유의해야 한다. 이 수치는 오늘날의 금액과 비교해 보면 아무 것도 아니다.


제수이트는 해마다 2억 8천만 달러 이상씩 거두어들이고 있다. 그 대상이 되는 성직자는 539명이다. 이 금액은 모두 면세이다! 또한 IRS의 조사를 받지도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스탠리 로웰(Stanley Lowell)과 마틴 라르손(Martin Larson)의 「면세해 주신 데 대해 주님께 찬양하라」란 책을 읽어 보라.


필자의 논점을 긍정하지 않는다면 필자의 잘못이 무엇인지 증거를 들어 보라. 개인 파일을 열어 보기만 해도 어느 제수이트 학교가 지원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있다(컬럼버스 기사단(Knights of Columbus), 말타 기사단(Knights of Malta) 등). 판사 랭크(Rank)와 제임스 맥클루(James F. Mcclure)는 펜실베니아 주 민사 법정에서 스티븐(Steven)과 던 아메스(Dawn Ames)의 자녀 유괴 사건을 호의적으로 처리했다(법정에서는 혐의가 있다고 해도 그 어린이들의 부모에 대해서는 통지도 없이 출석하지도 않은 채 진행되었다). 혐의가 있다면 자녀들에게 성경과 미국 헌법을 가르쳤다는 것뿐이다. 또한 BATF나 일루미나이티 회원들이 사용하고 있는 이미지나 심벌이라든지 교리(이름은 바뀌었어도) 등은 나치의 것과 동일하며, 독일의 나치 조직과 직접 관련이 있다.


예일 대학교를 졸업한 미국 정부 관료는 누구나(특히 CIA) 스콜본(Skull & Bones) 회원이 되어야 한다(이는 베를린 대학교에서 유래되었으며, 예일의 알폰소 태프트(Alphonso Taft)와 윌리암 러셀(William H. Russell)이 창설하여 예일 대학교에만 존재한다). 일부 회원들은 오클라호마의 제로니모(Geronimo) 무덤에서 시체를 파내 예일 캠퍼스 묘지에 옮겨 놓기도 했다.


교황은 자신의 의도를 문서로 분명히 정해 놓았으므로 로버트 슘너(Robert L. Sumner, 근본주의 목회자들에 대해 거짓말을 유포하는 사람)의 배경을 조사하는 일은 현명하다고 볼 수 있다.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 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딤전 5:19). 짐 발러(Jim Baller), 팻 로버트슨(Pat Robertson), 폴 크로우치(Paul Crouch), 베니 힌(Benny Hinn),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잭 반 임프(Jack Van Impe)와 같은 사람들은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요한계시록 17:5)"를 은폐하기 위해 세계교회주의 운동을 벌이는 TV 설교자들이다.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고린도후서 11:13-15)


제수이트는 30년 이상 동안 카톨릭 교회의 국가 회의와 세계 회의를 통제했다.


악령의 처소 바티칸


바티칸(Vatican)의 고전 라틴어 어원은 바티카누스(Vaticanus)로서 '악마의 거주지'란 뜻이다.(악령의 처소-알베르토 씨리즈 참조) 로마 베드로 광장 중앙에 서 있는 오벨리스크(obelisk)는 사탄 숭배에서 남성의 성기를 상징하며 이집트에서 유래되었다. 바티칸은 자체적으로 도그마와 같은 헌법을 지니고 있는 독립 국가라고도 할 수 있다. 교황이 그 국가의 수장이다. 따라서 교황이나 교황의 회칙을 따르지 않는 행위는 하나님에 반하는 것이다. 스쿠페(F.X. Schouppe) 경(제수이트)이 저술한 「대학과 학교 활용에 관한 종교적 가르침 축약본」을 통해 로마 카톨릭의 법률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카톨릭 교회는 약속한 맹세에서 면제될 수 있다. 이 권한은 교황과 주교에게 속하며, 자신이 또는 위임자를 통해 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203쪽).

"시민법은 카톨릭 교회의 권리에 순응할 때에만 양심의 구속을 받는다."(278쪽).

미국 대법원의 판사 가운데 적어도 4명은 카톨릭 교도로서 성경을 따라야 하는데도 추악한 책 두 종을 어느 고등학교의 학생들이나 읽어보아야 한다고 하고 태아 살인을 허용하며 포르노를 '표현의 자유'로 규정하고 있다.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시편 2:2-5).

또한 베트남 전쟁 동안과 그 전쟁이 일어나기까지 발생한 사건들, 곧 1950년대 초 민주당 상원 의원들(케네디 포함)의 베트남에 관한 비밀 회동을 검토해 보는 일도 중요하다. 이에 따라 유엔의 감시와 승인 하에 적법하게 치루어질 선거를 고의로 어기고 로마 카톨릭 교도 고 딘 디엠(Ngo Dihn Diem)이 대통령에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고 딘 디엠은 카톨릭으로 개종하려 하지 않거나 카톨릭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체계적으로 '인종 청소'를 단행했다. 또한 세금 과도하게 징수하여 비카톨릭 신도들은 아사하게 되었다. 카톨릭에 대해서는 너무나 호의적이었기에 북베트남 카톨릭 교도들은 남쪽으로 대거 탈출했고 남베트남의 불교 신도들은 북쪽으로 탈출했다. 사태는 미국 케네디 대통령이 보아 넘길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케네디는 월남대통령 '디엠'을 살해했다(1963년 11월 2일). 그리고 20일 뒤 케네디는 제수이트의 분노를 사서 저격당했다. 그 배후 인물들은 대부분 1945-1950년 바티칸 비자를 통해 미국으로 잠입한 제2차대전 유대인 학살 나치 전범들이었다. FBI의 최고 보스와 페르민덱스(Permindex) 부대(FBI와 DISC 공작원들을 위한 자금 세탁 부대)의 대장은 데일리 플라자(Deily Plaza)의 '우산 맨(umbrella man)'이었다. 사격 시작을 알릴 때에는 맑은 날에도 우산을 펴고 사격 종료를 알릴 때에는 우산을 접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월남전쟁과 예수회


1967년 베트남의 '인종 학살'은 윌리암 케이시(William Casey)가 구상한 CIA '봉황 작전'에서 다시 확인된다. 윌리암 케이시는 MK-Ultra/Project Monarch의 멤버이자 CIA의 라오스 및 베트남 지부장이었다. 웨스트모어랜드(Westmoreland) 장군은 베트남에서 작전을 펼치던 중 카톨릭 신자가 되었다. 로스 페로(Ross Perot)는 POW나 MIA에 연락을 할 수 없었다. CIA가 '황금의 삼각 지대'에서 아편을 밀수하는 작전을 펼치고 있어서 계속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아편의 대량 구입자는 CIA와 국방성(DOD)의 고위 관료들이었다. 테오도르 색클리(Theodore Shackley)는 조지 부시 정권 아래서 CIA의 제2인자이다. 부시는 앨리 릴리(Eli Lilly)의 이사이다. 이 회사는 코카인용 화학 선구물질을 생산하며, CIA에게 처음으로 LSD를 합성해 주었다. 미국 정부는 미국 내 마약 불법 반입의 절반 이상을 수송하고 있다. 대부분 군용 수송을 통하며 세관의 검사도 받지 않고 한 번에 여러 톤씩 반입한 다음, 민간 항공기나 화물 컨테이너에 실어 거리의 깡패 조직, 반군, 오토바이 갱들에게 유통시킨다.


닉슨은 베트남 전쟁에서 승리하지도 않은 채 철수했으며, 바티칸이 남베트남 정부를 통제했다. 닉슨은 그래서 워터게이트 사건을 맞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아브로 맨하탄(Avro Manhatan)의 「우리는 왜 베트남에 갔나?」를 읽어 보라. 케네디 대통령은 암살당하기 10일 전 콜롬비아 대학교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대통령이라는 고위직이 미국인의 자유 파괴용 음모를 조장하는 데 악용되었다. 그러므로 퇴임하기 전에 그 고통을 시민들에게 알려야 하겠다." 음모에는 피델 카스트로가 개입했다는 증거가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그러나 알베르토 리베라(Alberto Rivera) 박사는 자신과 악명 높은 짐 죤스(Jim Jones)가 바티칸 학교에서 교회 파괴 교육을 받고 있을 때 카스트로가 바티칸에 나타난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또한 '솔더 오브 포츈(Soldier of Fortune)' 잡지 기사에 따르면 제수이트 2명이 온두라스 농부들을 납치해 쿠바로 데려간 다음 게릴라 전투 훈련을 시켰으며, 존 케네디는 생사가 걸린 피그스만 공격 당시 자유의 전투사들을 지원하기 위해 B-26 폭격기가 이륙하는 것을 저지했다고 한다. 따라서 카스트로의 전투 비행대가 상륙자들에게 맹폭격을 퍼부었다. 그 상륙 작전은 실패하게 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모두 CIA가 조종했기 때문이다. 군대 수송 데크의 기관총은 작동되지 않았고, 대포는 녹이 슬었으며, 상륙용 탱크 6대 가운데 4대가 짐을 싣기도 전에 침몰했다.

이 피그스만 사건으로 상륙이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카스트로를 제거하려는 조직적인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쿠바 혁명 위원회는 이 피그스만 상륙을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으로 보았다. 암초가 많은데다 사방이 늪으로 둘러 쌓여 있고 근처에 라디오 방송국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케네디는 군대를 Opa-Locka Fla.에 있는 캄캄한 비행장으로 이동시키는 척했다. 그러다가 본의 아니게 고립되어 수비병에게 포위당했다. 다만 AM 라디오를 통해 공습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B-26 폭격기 14대 전부가 아닌 6대가 처음 공격을 했지만 최소한도의 피해만 주었고 카스트로에게 공격이 임박했음을 충분히 알려줄 뿐이었다). 그러다가 유엔 회의에서 미국의 행위가 비난을 받자, 케네디는 이를 구실로 폭격기들을 착륙시켰다(니카라구아 비행장의 낙하산 부대는 이륙도 하지 않았다). 합동 참모부 의장 렘니체르(Lemnitzer) 장군은 "그렇게 때문에 일이 처음부터 잘못되었다"고 했다(Peter Wyden 「피그스만,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이는 카스트로가 제수이트이며 케네디 암살에 관여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해 준다. 우리가 알기로 카스트로는 일루미나이티 회원이며 제수이트 조지타운 대학교(빌 클린턴도 이 대학을 다님)에서 공산주의 이념을 습득했다. 케네디는 IMF의 차관을 중단시키고 재무성을 통해 화폐를 발행했다(그 화폐에는 붉은 색 번호가 인쇄되어 있다). 그러므로 일루미나이티는 암살을 계획했다. 케네디는 CIA를 해체헤서 스콜본(Skull & Bones) 조직의 협조를 얻어내려 했다. 또한 고 딘 디엠을 살해하고 베트남을 통제하지 않는 채 미군을 철수시키려는 계획을 세웠으므로 제수이트와 바티칸은 협조를 하게 되었다.

암살 계획을 확정한 사람은 에드거 후버(J. Edgar Hoover)였지만, 암살 계획 자체는 하워드 헌트(E. Howard Hunt), 윌리암 세이모아(William Seymour), 클레이 쇼우(Clay Shaw), 데이빗 페리(David Ferrie, 카톨릭 사제)가 수립했다. 재정 지원은 바티칸 계통 은행인 드 파마코 아스탈드 바두즈(De Famaco Astalde Vaduz, 스위스), 리히텐슈타인(Leichtenstein, 스위스), 셀리그만 은행(Seligman, 스위스), 방카 나지오날레 드 라보로(Banca Nazionale de Lavoro, 로마)가 맡았다. 방카 나치오날레 드 라보로는 교황이 소유하고 있으며, 조지아 주의 지점을 통해 미국 농무성에서 받은 돈 50억 달러를 세탁해서 사담 후세인의 무기를 구입하는 데 사용하도록 했다. 린든 존슨은 USS Maddox 및 USS C. Turner Joy를 북베트남 영해로 보내 북베트남의 공격을 유도했다(USS Maddox는 라디오를 통해 명령을 받았고, USS C. Turner Joy는 백악관의 명령을 직접 받고 출동했다). 이 계획이 바라는 결과를 낳지 못하자(두 군함은 야간에 서로 대포를 쏘았다), 존슨은 북베트남이 국제 해역에서 미국 군함에 발사를 했다고 의회와 국민에게 거짓말을 함으로써 미군이 북베트남과 무장 충돌을 할 수 있는 구실을 마련했다. 나중에 존슨은 '자신이 일으킨' 전쟁에 승리자가 없으며 폭격이 항의와 반발을 불러일으켜서 다음 번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닫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그 후 언론뿐만 아니라 입법, 사법, 행정부의 어느 부서에서나 강력히 항의함으로써 존 F. 케네디, 마르틴 루터 킹, 로버트 F. 케네디의 살인에 대한 수사가 확대되어 미국 대통령과 대법원도 조사를 받게 되었다. 수사가 절정에 달하자 그 잔학 행위를 공모한 사람들과 숨겨진 이야기들이 증거로 나타나게 되었다(William F. Pepper 「마르틴 루터 킹 암살 배후의 진실, 살인 명령」). 위 세 사람 암살 사건의 공통점은 암살 직전에 베트남 군대 철수 작업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FBI는 추기경 프란시스 스펠맨(Francis Spellman, 남베트남 불교도들의 학살자인 고 딘 디엠 대통령의 교사)와 상의해서 교황이 마르틴 루터 킹 Jr.과 면담을 하지 못하도록 설득하라고 했으며, 추기경은 동의했다고 했다. 의회의 조사 위원회 위원 가운데 리 할베이 오스왈드(Lee Harvey Oswald)가 단독으로 존 케네디를 암살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마나크 프로젝트(Manarch Project)의 제랄드 포드(Gerald Ford)뿐이다.


LAPD 자체의 SUS 파일에 따르면, 산타아나(Santa Anna)의 마굿간에서 마취제와 고문(CIA의 마인드 컨트롤 전문가 제리 오웬(Jerry Owen), 윌리암 브랸(William Bryan) 등 DISC 팀이 추진)을 사용한 마취 프로그램에 따라 샤린샤린(Sirhan Sirhan)이 탄생했으며, 이에 따라 MPD(다중 인격 부조화 마인트 컨트롤제: CIA의 MK-Ultra-Project Manarch 제품)가 제조되었다고 한다. 이 작업은 Sirhan Sirhan은 LAPD에 고용된 CIA의 태인 유진 케자르(Thane Eugene Cesar)가 로버트 F. 케네디를 오른쪽 귀 뒤에서 저격할 때 주의를 분산시키는 데 사용되었다. 로널드 레이건을 저격하려고 했던 죤 힌클리 2세(John Hinckley Jr.)의 동생은 조지 부시의 골프 파트너였다. 반더빌트(Vanderbilt) 석유 회사 사장 존 힌클리 1세(John Hinckley Sr.)는 텍사스에서 여러 해 동안 조지 부시의 이웃집에 살았으며, 부시가 의회에 처음으로 진출할 때 선거 운동을 해 주었다.


필리핀 주재 미국 외교관이었던 존 마이스토(John Maisto)는 파나마로 가서 CIA 공작 부대 '시민 십자군'을 훈련시켰으며, 가두 시위를 주도하고 타이어 등을 불사르면서 항의 시위를 벌였다. 대주교 마르코스 맥그래스(Marcos Mcgrath), 몬시그뇰 조세(Monsignor Jose), 세바스쳔 라보아(Sebastion Laboa), 사제 쟈비에르 빌라누에바(Javier Villanueva) 등은 선거 교란 작전을 펼쳤다. 이는 마닐라, 구아테말라, 니카라구아, 그레나다, 하이티에 이어서 진행된 것이었다. 대주교 맥그래스와 사제들은 파나마 법률을 고의로 어기면서 선거함을 빼앗고 개표에 개입했다. NES(뉴스 선거 서비스)는 국가 선거에서 개표와 보도를 완전 통제한 채 국민에게는 알리지 않는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리처드 닉슨이 선거에서 승리했는데도 존 케네디가 당선될 수 있었다. 대주교 맥그래스는 나중에 파나마 군사 정권을 민간 정부로 이양시키겠다고 보장했다(이를 위해 바티칸은 파나마 기업들에게 14억 달러를 투자했다). 그 이전에 맥그래스는 라보아 및 발라누에바와 함께 노리에가를 바티칸 대사관으로 불러들여 외교상의 면책을 약속했으며, 미군에게 항복할 것인지 군대에게 포로가 되어 사살될 것인지를 선택하라고 했다. 파나마 기습은 상원 의원 알란 심슨(Alan Simpson, 워밍 주)가 계획한 것이었다. 이는 대리 정부를 모두 제거하려는 '베로나(Verona) 비밀 조약' 정책의 직접 결과로 이루어졌다. 이에 대한 기록은 미국 의회 기록(64회 상원 의회 제 1기 Vol. 53, part 7, 6781쪽, 1916, 4, 25)과 미국 외교 기록(1778-1884, vol. 2)에 나와 있다.


파나마 노리에가의 운명은 바티칸 대사관에 들어감과 동시에 결정되었다(이와 같은 법적 절차로는 케네디가 오스왈드를 살해했다고 살인죄로 몰아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윌리엄 쿤슬러(William Kunstler)가 마이애미 연방 법정에서 노리에가를 변호하려 했지만 노리에가가 사망함으로써 그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제 파나마 국가 수호대는 없어졌으므로(대부분 손을 뒤로 묶인 채 미국 해병대에게 사살당했으며, 그 사진을 찍던 저널리스트 쥴리오 구에라(Julio Guerra)도 살해되었다) 파나마는 남아메리카 및 중앙 아메리카에서 미국으로 운반되는 아편의 주요 통과 지점이 되었다. 현재 조지 부시의 '파나마 마약 민주주의' 하에서는 코카인이 판을 치고 있다. 그 돈은 파나마 은행들, 곧 인터방코(Interbanko), 퍼스트 인터어메리카 은행(First Interamerica's Bank) 등에서 세탁되고 있다. 또한 현재 하이티에서는 로마 카톨릭 신부 쟝-버트랜드 아리스티드(Jean-Bertrand Aristide)가 권력에 복귀했으므로 코카인 운반 경로가 완성된 셈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바티칸은 유고슬라비아에 엄청난 군사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전쟁 기록을 보면 우스타쉬(Ustasha, 일어나다라는 동사 'ustati'에서 유래)라는 바티칸 조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우스타쉬가 S.S., S.D., 게슈타포 등을 합친 것보다도 더 악명 높았다. 이는 크로아티아 우스타쉬 주의 수장 안테 파벨릭(Ante Pavelic)이 조직했다. 파벨릭은 이를 위해 크로아티아의 대주교와 주교들을 비롯해 교황 피우스(Pius) 12세와 자주 회동했다. 히틀러가 유럽에서 악명을 떨친 것처럼 파벨릭은 유고슬라비아에서 악명을 떨쳤다. 그런데도 교황 피우스(Pius) 12세는 크로아티아 인들에게 바티칸 순례(대주교 알로지예 스테피낙(Aljzije Stepinac)이 주도)를 하라고 성명을 발표했다. 1941-1945년과 1991-1995년에 걸친 바티칸에 잔학 행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 그대에게 미소짓고 있다. 그 미래에서는 그대 나라의 교회와 국가가 서로 이익이 되도록 조화롭게 조절될 것이다." 스테판 쿠카비카(Stane Kukavica, 프란체스코 신부)와 같은 카톨릭 신부들은 예복을 공포의 대상인 우스타쉬 살인 부대의 제복으로 갈아입고 그 사람들을 잔인하게 기습해서 금세기에는 보기 어려운 무시무시한 고문을 자행했다. 이 인종 학살 작전은 모두 군사 임무를 담당했던 대주교 알로지예 스태피낙(Alojzije Stepinac)이 감독했다(2차 대전 군사 주둔지 가운데 세 번째로 크며 세르비아인, 유태인, 집시 등이 80만 명 이상이나 살해된 야세노박(Jasenovac)이 그 중심지였다). 알로지예 스테피낙은 나치와 직접 협조하여 크로아티아 국가를 탄생시켰다. 보스니아에서는 우스타쉬 부활 운동을 HSP(크로아티아 국민당)이라고 하며, 그 군대를 HOS(크로아티아 방위군)이라고 한다. 도브로슬라브 파라가(Dobroslav Paraga)가 HSP를 이끌고 있다. HOS 부대(검은 군단)에는 벨기에, 오스트리아, 영국, 캐나다 용병뿐만 아니라 프랑스 용병 부대 '누벨 레지스탕스(Nouvelle Resistance)'도 포함되어 있다. HOS가 1993년 해체되자(너무 정치색이 짙으며 바티칸과 연결되어 있음이 폭로될 것이 두려워) 구성원들은 다른 부대에 흡수되었다가 108 보스니아 여단이나 국제 여단으로 통합되었다. '국가 전선', '자유 크로아티아', '자유 슬라브'도 바티칸 조직이며 '인도주의 원조(Humanitarian Aid)'가 그 앞장을 서고 있다. MPRI(버지니아에 본부를 둔 예비 용병 조직)은 펜타곤과 계약을 맺고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에 있는 우스타쉬를 훈련시켰으며, 지금은 코소보에서 훈련을 시키고 있다. 수천 명이 단번에 살해될 수 있는 군사 충돌에서 양쪽을 조정할 수 있는 권한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곳은 바티칸뿐이다. 곧 미군을 활용해서 이른바 휴전 지대에서 세르비아인을 조절할 수 있다. 미군이 세르비아를 무방비 상태로 유지시키는 동안 파시시트 크로아티아는 살해를 할 수 있다. 이 정책은 발칸 전역에서 계속될 것이다.


우스타쉬 카톨릭 군대


1941년 4월 10일 히틀러는 크로아티아 독립 주(NDH)를 파벨릭에게 증정했다. 그 독립 주는 '대 크로아티아'로서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존속했다. 원래 계획은 인구의 3분의 1을 학살하고, 3분의 1은 국외로 이주시키며, 3분의 1은 카톨릭으로 개종시키는 것이었다. 이 과정은 10년이 걸렸다. 그 계획의 나머지 절반은 1991-1995년에 완성되었다. 이제 미군은 그 크로아티아 국가를 강요하여 대신 들어선 정교회 세르비아에게 저항하도록 하고 있다. 오늘날 프란죠 투지만(Franjo Tudjman)은 독일이 헌사했으며, 미국과 바티칸이 보스니아와 세르비아 영토에서 재구성한 그 대 크로아티아를 얻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 바티칸 나치 협약에 대해 독일 언론에 보도한다면 그 나라에게 박해받을 것이다. 이제 '대 세르비아'라는 유령으로 발칸의 약소 국가들에게 위협을 주는 선전 운동이 전개되고 있으며, 이는 이슬람교가 대다수인 대 크로아티아를 탄생시킨 1994년 워싱턴 협약의 보호를 받고 있다. 한편 1995년 스플릿(Split) 협약에서는 투지만(Tudjman)과 이제트베고비(Izetbegovi) 사이의 군사 동맹을 공고화했으며, 이는 자그레브(Zagreb) 미국 대사 피터 갈브라이스(Peter Galbraith)의 찬사를 받았다. 그래서 미군 전문가와 기획팀이 지원되었으며 군사 지원뿐만 아니라 재정 지원도 받고 있다. 미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무기 수출 금지 결의를 어기고 이슬람과 크로아티아에 대한 무기 수출 금지 통제를 일방적으로 단절시켰다. 바티칸이 유고슬라비아 전역에서 정교회 신도들인 세르비아 인종 학살을 계속하려 한다는 점은 너무나 명백하다. 다만 현재는 미군의 군사 지원을 받으며 진행될 뿐이다. 또한 국가 및 국제 언론에서는 이슬람교도를 살해하는 세르비아 정교도들에 대해 거짓말을 할 것이다. 바티칸은 로마에 국제 법정을 설치하고 어느 국가의 통치자가 누구의 권한을 행사했건 그 국가의 주권이나 자치를 무시한 채 심판을 단행할 것이다.


이제 말하려는 주제는 통합이다. 그런 통합의 대표적인 예는 카톨릭 교도 고 딘 디엠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디엠은 CIA의 보호 아래 캐나다의 트루디(Trudeau, 제수이트)가 지은 캠프와 유사하게 민간인 수용 캠프를 짓고 남베트남을 무자비하게 통치했다(1982년 3월 4일자 토론토지의 '민간인 수용 캠프' 참조). 또한 1995년 5월 5일자로 발표된 교황의 '통합'에 관한 회칙 '하나가 될지어다'를 보면, 바티칸이 예수회의 일루미나이티와 협조하여 미국에 무엇을 숨겨 두었는지 알 수 있다. 미국의 문맹률은 1986년 50% 이하였고 해마다 더 줄어들고 있다. 그러므로 이처럼 교육받은 사람들을 통제할 수는 없다. 미국인들이 어린애인줄 아는가?


어린이 성폭행과 카톨릭


성 문제: 로마 카톨릭이 전례 없이 어린이에 대한 성폭행을 하고 있다는 증거는 얼마든지 있다. 이는 전세계에서 발생하고 있다. 소돔과 고모라도 로마 카톨릭에게 배워야 할 것이다. 그 희생자를 모두 기록한 자료가 있는지 의심스럽다(1984-1992년 동안 보도된 건 수만 하더라도 북아메리카의 신부가 400명이 넘는다). 카톨릭과 그들의 고아에게 책임 보험을 들어 주고 있는 보험 회사에게 어째서 보험료가 그렇게 높은지 물어보라. 카톨릭 신부에게 '축복받은 짐승'이 무엇인지 물어보고 그 얼굴 표정을 살펴보라. 이에 대한 기록은 져스틴 풀톤(Justin D. Fulton)의 「사제들은 왜 결혼해야 하는가」에 나와 있다. 어느 지역에서나 카톨릭 신도와 범죄율은 상관관계에 있다. 그 전형적인 사례는 사제 제임스 포터(James Porter)이다. 이 신부는 소년 소녀 수백 명을 괴롭혔다. 카톨릭 교회에서는 그저 그 신부를 다른 관구로 이동시키기만 했다. 카톨릭에서도 언론에 돈을 주고 있기 때문에 공식 비난은 받지 않았지만, 어느 언론이 그 사실을 폭로했다. 그래서 그 저널리스트는 교구 관할 추기경에게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그 추기경은 나중에 승진되었다. 카톨릭 교회는 이제 혐의의 정확성에 관계없이 카톨릭의 어린이 성폭행을 폭로하는 사람들에 대해 고소를 하고 있다.


크라이스트 레지오나리(Legionaries of Christ)라는 조직의 창설자이자 이상 성욕자인 마샬 매시엘 데골라도(Marcial Maciel Degollado) 신부는 교황 피우스(Pius) 12세의 승인 하에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 학생들을 괴롭혔다. 곧 카톨릭 고아원을 이상 성욕자인 사제들이 운영하고 있으며, 이 새디즘적 관행은 지역 정부의 보호를 받고 있다. 뉴파운드랜드(Newfoundland)의 카셀(Mt. Cashel) 고아원에서는 15년 이상 동안 사제 20명이 어린 소년들을 괴롭혔다(이 사실은 책과 영화로 기록되었다). 네브라스카의 보이즈 타운(Boys Town)에서는 어린이들을 매춘하도록 팔아 넘기고 신비한 비밀의식 행사의 희생물이 되도록 한다. 그 주요 인물은 래리 킹(Larry King)으로서 1984년과 1988년 공화당 전국 대회에서 미국 국가를 불렀다. 킹(King)은 마약 수입액을 프랭클린 커뮤니키 연방 크레팃 유니언(Franklin Community Federal Credit Union - 네브라스카 상원 의원 밥 케리(Bob Kerry)가 가능하게 만든 은행 시스템)을 통해 세탁했으며, 어린이와 마약을 정당 요원들에게 판매했다(조지 부시는 정규 고객이었다). 또한 워싱턴 D.C.에서 한 달에 5천 달러씩 전세를 놓고 자신이 보이즈 타운 카톨릭 고아원에서 데려온 소년들과 정치인들이 성행위를 벌이는 장면을 비밀리에 비디오로 촬영한 다음 등치기하는 수법을 사용했다.


이 사실은 상원 의원 존 드캠프(John DeCamp)의 「Franklin Cover-Up: 네브라스카의 어린이 성폭행, 사탄주의, 살인」에 기록되어 있다. 보이즈 타운(Boys Town)의 원장 로버트 후프(Robert Hupp) 경은 Franklin Cover-up 조사의 세부 사항을 모두 인정했으며, 네브라스카에서 소년을 납치해 성폭행하고 살해한 다음 곧바로 다른 관구(아마도 국외)로 발령났던 사제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해 주었다. 또한 이 나라 부유층과 권력 있는 자들이 어린이를 학대한 증거를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도 알려 주었다. 곧 어느 인사는 파라구아이의 어느 어린이를 양자로 삼은 뒤 미국으로 데려와 사탄의 제물로 삼았다고 한다. 후프 경은 나중에 공식적인 퇴임식도 없이 보이즈 타운 원장직을 사퇴했다. 유엔은 어린이에 대한 이상 성욕자 그룹인 북아메리카 맨-보이(Man-Boy) 러브 협회(그 회원들은 네바다 라스 베가스 교외 농장에 납치해 놓은 어린이들을 경매로 산다)에게 공식 지위를 주었다. CIA 국장 윌리암 콜베이(William Colbey)는 상원 의원 드캠프(DeCamp)에게 수사에 도움이 되도록 정보를 제공해 주겠다고 말한 뒤 강에서 사망된 채 발견되었다.


수녀원 사제들의 노리개


카톨릭 교회의 또 한 가지 끔찍한 악마적인 관행은 수녀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수녀원에는 그리스도에 봉사하면서 성스럽고 순결하게 일생을 보내려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젊은 여성들이 수천 명이나 있다. 그 어린 소녀들이 알지 못하는 것은 자신들이 오로지 사제(신부)들의 성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그곳에 있다는 사실이다. 이 소녀들은 1년 내내 아침에는 빵 한 조각과 커피 한 잔, 저녁에는 수프 한 그릇을 마신다(점심은 없음). 또한 하루 종일 고된 일을 한다. 자신의 딸을 그 새디즘적인 건달들에게 넘겨준 카톨릭 교도들이 어째서 딸을 찾아오지 않는지는 명백하다. 야윈 몸을 보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수녀원마다 지하실에 웅덩이가 있어서 수녀가 죽으면 그곳에 던져 넣는다. 사제나 감독이 보기에 악한 죄를 지었다고 판단할 때는 산 채로 결박당한 채 던져 넣는다. 죄가 가벼우면 사슬에 묶인 채 감옥에 넣어 놓는다. 고문 방법은 그 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이 사실을 믿기 어려우면 멕시코에서는 어째서 수녀원을 없앴는지 멕시코 정부에게 물어 보라.

윌리암 케세이(William Casey)는 조지 부시의 선거 담당관으로서 클린턴의 배경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이란/반군용 무기/코카인 밀수 및 돈 세탁(한 달에 1억 달러)을 하기 위해 코카인을 한 달에 한 상자씩 받았다. CIA와 미국 법무성은 1980년대의 코카인 유행과 그 결과로 나타난 도시 내부의 사회경제적 황폐화에 대해 책임이 있다.


세계의 암살단 예수회

예수회(제수이트)는 전세계 여러 나라에서 대통령과 주지사 등의 암살 음모를 수립했다. 곧 프랑스 국왕 헨리 4세는 '낭트 칙령'을 발표해 프랑스 국민에게 종교의 자유를 준 죄로 암살당했다(1610년 5월 14일). 또한 제임스 A. 가필드 대통령(1881년 6월 2일), 윌리엄 맥킨리(1901년 9월 6일), 아브라함 링컨(1865년 4월 14일), 존 F. 케네디(1993년 11월 22일) 등도 예수회조직에 의해 암살당했다. 1857년 2월에는 워싱턴 D.C. 국립 호텔에서 찻잔에 독약을 넣음으로써 제임스 부캐넌을 독살시키려 했다. 이 사건으로 38명이 사망하고 50명이 부상을 입었다. 앙드류 잭슨은 국제 은행의 차관을 거부했기에 살해되었다. 제수이트는 1534년 스페인에서 로욜라에의해 조직되었다. 그 목적은 개신교 종교개혁을 말살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 뒤 프랑스에서 성장했고 1540년 교황 바오로 3세의 승인을 받아 발전하게 되었다. 그들의 폭력행위 때문에 제수이트가 추방된 국가는 영국(1581), 프랑스(1594), 포르투갈(1598), 영국(2차: 1604), 프랑스(2차: 1606), 러시아(1717), 포르투갈(2차: 1759), 프랑스(3차: 1762-3), 스페인·베니스·시칠리(1767), 네팔·말타(1768) 등이였다. 영국과 러시아를 제외하고는 모두 엄격한 카톨릭 국가들이였다. 예수회 조직은 1773년 6월 21일 교황 클레멘트(Clement) 4세의 억압을 받았다(교황은 즉시 독살됨). 그랬지만 다른 이름으로 계속 존재했다. 아브라함 링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포교하겠다는 미명 하에 날마다 우리 영토로 상륙한 로마 카톨릭 사제와 성직자들이 학교와 병원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남북의 프로테스탄트들이 안다면 힘을 합쳐 그들의 손아귀에서 권력을 박탈할 것이다. 그들은 교황이나 유럽 전제 군주의 대사로서 질서를 해치고 우리 국민의 마음을 헌법과 법률에서 멀어지게 하며, 아일랜드·멕시코·스페인 등 자유를 사랑하는 국민들이 있는 곳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곳에서도 무정부 상태를 도모하고 있다."


필리스 스칼라플라이(Phyllis Schlafly), 리드 어빈(Reed Irvine), 더스티 로데스(Dusty Rhodes) 등은 거짓 보수주의자들로서 제수이트, 스콜본(Skull & Bones), 외교 관계 위원회의 조종을 받거나 일루미나이티의 직접 통제를 받는다.


"나는 제수이트의 부활을 기뻐하지 않는다. 대다수는 더욱 가장을 하게 될 것이므로 인쇄업자, 작가, 출판업자, 학교 교사 등과 마찬가지로 보헤미아의 수장도 받아들일 것이다. 영원한 저주를 받아야 할 사람들의 모임이 있다면 바로 이 로올라 협회이다." (John Adams, 1816)


이 글만으로는 카톨릭 예수회(제수이트)와 교황청을 전면적으로 살펴보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글의 기록을 믿지 않는다면 그 나머지도 믿지 못할 것이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누가복음 16: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