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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차일드가의 화폐전쟁(펌)

그리운 오공 2011. 12. 21. 12:49

 

부자들은 자신의 재산이 정확히 얼마인지 알지 못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재산은 시시각각 가치가 변하는 데 거대 재산은 0.1%만 변해도 수백억이 왔다갔다 하기 때문이란다. 대충 재산이 15억대면 중산층, 100억대면 부자라고 하는 데 평균의식이 강한 우리 한국 서민들은 80%가 스스로를 중산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집있고 차있고 전화 TV 전축 냉장고 있으면 중산층이지 뭐 중산층이 대수 인가?  그러나 100억 이라면 그리 만만하게 썩 다가오지 않는다. 우리 서민들에게 100억은 꿈의 숫자인 것이다. 그러면 우리나라에는 100억 이상 財産家가 몇 명이나 될까?

* 대략 1~2만명 정도도 추산 - 1천가구당 1~2집

  삼성 이건희가의 재산을 합하면 대략 4~5조원 정도가 되며, 세계최대 갑부 빌게이츠의 재산은 주식 등락에 따라 오르내리기는 하지만 대략 100조 대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진짜 세계최고의 부자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전설의 가문 로스차일드家를 지목한다. 로스차일드家 전체의 재산은 설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1만조 즉 1경 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나 부자한테 너무 주눅들지는 마시라, 자살한 H 재벌 회장의 경우처럼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진정한 부자는 돈에 초연한 사람이다. 돈으로 살 수없는 것 까지 소유하기 위해서는 돈의 노예가 아닌 주인이 되어야 한다.

     18C 이후 250년간 유럽의 숨은 지배자 로스차일드 

                     (Rothschild= rot붉은색 + schild방패)독일어는 로트실트


로스차일드가의 시조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게토(유태인거주지역)출신인 마이어암셀(1744~1812-로스차일드1세)이다. 마이어암셀은 소년시절 유태교 랍비로부터 교육을 받았고 그의 아버지로부터 장사를 배웠다. 처음에는 오펜하임 은행에 견습사원으로 들어 갔으나, 나중에 독립하여 환전상“프랑크푸르트. 로스차일드상사”를 운영하였다. 古錢장사. 고리대금으로 기초를 닦으며 사업수완을 기르던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프랑크푸르트 영주인 헤센 후작(제후)家의 윌리엄황태자(훗날, 윌리엄9세)와 古錢 金貨 거래를 계기로 "어용상인”에 등록된 것이다. 그 후 헷센가의 재정. 국제적인 자금조달. 관리에 깊이 개입하였다. 즉 궁정의 유태인(호프 유우겐)이 되어 비밀자금을 관리하는 등 돈줄을 주무르게 된 것이다.

1785년 헤센 후작이 죽자  윌리엄 9세는 당시 유럽  최대 사유재산인 4천만 달러를 상속 받았으며, 마이어암셀은 1801년 헤센 후작가의 “은행사무변리인”에 임명되어 유럽최대 자본국의 금고관리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1806년 나폴레온1세 유럽원정으로 윌리엄9세는 망명을 가게 되는 데 재산을 안전하게 보관하도록 명을 받아, 안전지대인 런던의 셋째아들 네이선에게 보내 관리케 하였다.

 

헤센후작家의 재산이 로스차일드 富의 출발점

  그의 다섯 아들(둘째는 빈에, 넷째는 나폴리에, 다섯째는 파리에, 셋째는 런던에 , 그리고 장남은 랑크푸르트에)은 유럽 전역에 은행을 설립하여 아버지의 발판을 밑천으로 유럽전역의 금융을 주무르게 된다. 마이어암셀은 이 다섯아들을 어릴때부터 금융인으로 대성시키려는 목표를 가지고 키웠다. 아이들을 천대받는 게토의 유태인이 아니라 고관대작 집의 자제와 같이 때로는 왕국의 사관생도를 교육 시키듯이 귀족생활, 사교, 고객관리 등을 가르쳤다. 그러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파리의 5남(제임스, 나중에 3세가됨)과, 빈의 차남이 협력하여, 유럽전체를 커버하는 “통신과 마차 수송 네트워크”를 만들었으며 이 네트워크를 이용한 빠른 정보는 엄청난 이득으로 연결되었다. 당시의 수송 네트워크는 오늘날 인터넷에 의한 네트워크 만큼이나 획기적인 시스템이었다. 남보다 한발 빠른 정보를 이용하여 런던의 네이선은 금과 통화의 투기로 대박을 터트렸다. 이것은 형제들끼리만이 가능한 제휴플레이였다.

 

    “다국적 금융 비즈니스”의 원형

  1810년 런던 증권거래소의 지배자 베어링이 죽자 네이선이 새로운 지배자로 부상 “세계 제일의 금융왕”이 되었다.

가 권력과 밀착 정치적 영향력 확대 - 政經癒着으로 부를 축적.

 런던로스차일드는 1815년 나폴레온 전쟁당시 1억파운드를 각국 왕실에 대부하는 한편, 영국에도 전폭적인 전비를 지원하였다. 즉 둘째아들 런던의 네이선이 워털루전쟁(나폴레온이 엘바섬에서 탈출하여 다시 제위에 올라, 워털루에서 웰링톤장군과 대결)에서 영국이 나폴레온을 꺽을 수 있도록 도왔던 것이다.

더구나 유럽의 통신망을 이용하여 워털루 전투의“나폴레온승리”라는 가짜 소스를 흘려, 대폭락한 주식을 긁어 모아, 그날 폐장 되었을 때는 거래소 상장 전체 주식의 62%를 소유한 다음, 다음날 나폴레온 패배라는 진짜 정보로 주식이 반등하자 300만 달러의 재산을 75억달러(2,500배)로 불렸다고 한다. 이날 영국의 명문 재산가 대부분이 파산하였다고 한다.

혹설은, 나단(네이선)이 영국과 프랑스의 세기의 대결이 돈벌이가 될 것으로 판단하고, 그 결과를 빨리 보기 위해 직접 전투현장을 가서 웰링턴의 승리를 목격하고는, 도버해협을 건너려 했으나 폭풍으로 아무도 배를 내주지 않자, 돈다발로 사공을 매수하여 목숨을 걸고 도버해협을 건너 아침에 태연히 런던증권거래소에 나타나서는 매각 사인을 (엄지 손가락을 아래로) 내었다고 한다.

전쟁 결과를 아는 사람은 네이션 뿐이기 때문에(영국왕실보다 빨리 전쟁 결과를 감지), 사람들은 네이션이 어떤 사인을 낼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네이선이 증권거래소에 항상 서있던 기둥을 로스차일드기둥이라고 불렀는데, 이윽고 로스차일드기둥에 나타난 네이션은 매각 사인을 냈고 이것은 곧 전쟁에서 영국이 패했다는 의미하였다. 동시에 매도주문이 쏟아졌고 주식은 폭락에 대폭락, 네이션도 한동안은 매각을 하다가, 저점이라고 판단되는 순간 철저히 사들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로스차일드가의 무자비한 이윤추구 방식, 정경유착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1835년 파리의 3세(다섯째 아들 제임스)는 당시  새로이 등장한 철도의 장래성에 주목 철도사업에 진출하여 유럽의 철도왕이 되었다.

 “프랑스 철도사업이 난관에 부딪치자, 노선이름에 황제 름을 붙여 아무도 반대하지 못하게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또 남아프리카의 다이아몬드 광산개발권을 획득하였고, 러시아의 바크유전이권획득, 석유회사“로열 더치 쉘”등 정보 .교통. 에너지. 귀금속 등 당시 첨단 산업중심으로 팽창하였다 .1814년 동인도회사의 인도무역 독점권이 폐지되자, 그 이권을 지배하였고, 1862년에는 나폴레온 3세와 금융제휴하였고, 1870년에는 바티칸에 융자하여 카톨릭을 금융으로 지배한다는 오해를 받았다.

1871에는 프랑스를 꺽은 비스마르크의 독일이 전쟁배상금 50만 프랑을 2년내 상환토록하는 불리한 조약을 강요하였으나, 제임스가 이 돈을 프랑스정부에 대부하여 독일군을  프랑스에서 몰아내게 하였다.

1875년에는 영국정부의 수에즈 운하 주식 매입에 개입, 매입자금을 공급하여 영국정부는 물론 유럽왕실과의 유착을 강화하였다.

수에즈운하는 (1859~1869 )  프랑스외교관  레셉스가  건설하였는데 운영권은 프랑스와 이집트가 공동소유하고 있었다. 이중 이집트의 몫(1/2)을 프랑스 몰래 사들여 아세아, 아프리카로의 진출 해상통로를 확보함으로서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 식민지 정책의 기반을 조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에즈운하 보호 명목으로 결국 이집트를 보호국화 하였던 것이다. 그 후 영국은 1918년 오일로드를 확보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을 점령하였고, 이후 벨푸어 선언으로 이스라엘이 독립하는 단초를 제공하였다. 수에즈운하를 비밀리에 매입하는 일을 추진한 영국 재상은 유태인 "벤자민 디즈레일리" 였다.

1880년에는 세계3대 니켈자본인 “르 니켈”를 창설하였고, 1881년에는 아연.납.석탄 발굴회사인 “페나로야”를 창설하는 등 스페인. 프랑스. 이태리. 유고슬라비아. 북부  아프리카. 남아프리카로 사업을 확대하였다.

1888년에는 세계최대 다이아몬드 신디케이트인 “데비아스”사를 창설하였다. 오늘날도 남아프리카 저개발국의 내전에는 전쟁자금 즉 다이아몬드를 둘러싼 잔혹한 살상이 끊이지 않는다. 이들 세계적인 다이아몬드 회사들은 독점을 통한 수급조절로 값이 하락하는 것을 막고 막대한 이윤을 추구하고 있다.1917년 벨푸어선언도 로스차일드가 출신 라이오넬이 제언하여 영국정부를 움직여 성사시켰다.

  * 벨푸어선언 : 영국이 팔레스타인 땅을 유대인에게

                      양도하여 유대국가를 건설키로 한 약속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건국시 파리가에서만 7천만 프랑을 건국자금으로 지원하였다.

돈으로 2천년 역사의 한을 풀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건국 자금은 주로 서유럽에 거주하던 스파라디계 유대인이 제공하였다. 당시에는 15% 정도인 스파라디계 유태인이 더 잘 살았고, 아슈케나지계는 러시아 폴란드에서 궁핍과 박해에 시달렸다. 유대인이 가나안으로 돌아가려는 시오니즘은 아슈케나지계가 주도하였다(벤구리온, 골다메이어 등). 그들은 팔레스타인에서 러시아혁명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이스라엘의 키부츠. 사회보장제도 등 사회주의 요소는 러시아혁명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스파라디계와 아슈게나지에 대해서는 뒤에 상술

로스차일드가는 20세기 들어와서도 비철금속 석유 금 우라늄 등 지하자원 확보에 치중 거대한 첨단기업연합체로 부동의 기반 을 조성하였다.


이스라엘 인구는 460만으로 세계인구의 1/1200 이지만 미국 대외원조의 1/5이 이스라엘에 간다.

미국의 중동정책은 워싱턴이 아닌 예루살렘에서 만들어  진다는 말은 유태인의 역량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만약 유태인이 유럽과 미국에 없었더라면 근대자본주의가 발생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그만큼 유태인의 이윤추구 방식은 자본주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는 말이며, 자본주의가 점령한 현 세계의 헤게모니 속에 녹아 있다. 돈벌이 자체가 善인 유태인에게 자본주의, 더구나 인종.종교의 장벽이 없는 미국은 놀고는 싶은데 마당이 없던 유태인에게 날개를 달아 준것과 같았다. 유태인에게 비즈니스는 돈벌이만이 목적이 아니다. 그들 민족과 종교가  살아남기 위한 전쟁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교가 금기시하는 고리대금, 징세인. 국왕 귀족의 재산관리인. 유통업 등 직업으로 세인의 반감과 원망을 받았다. 그러나 비밀리에 돈을 움직이는 기술로 실력자의 비밀을 장악함으로서 배후에서 국가를 조종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 정경유착

 탈무드는 유태인이 구약성서 보다 더 중시하는 경전이다.

탈무드는 자기를 지키기 위한 방법은 오직 智力과 財力뿐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특히 기독교권 문화에서 예수를 박해한 유태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재력은 그들이 생존하기 위한 절대조건이었다.유태인이 세계를 정복하기 위한 5가지 전략

1. 세계최대의 정치력과 군사력을 가진 국가의 지배

   - 즉 미국의 지배

      미국은 세계를, 미국은 유태인이 지배한다.

2. 세계 에너지시장의 지배

   - 로얄 더치 셀(로스차일드)

   - 엑슨. 모빌. 스탠다드(록펠러)

   - 텍사코(노리스가)

   - 영국의 브리티시-페트로리엄(영국 유태자본)

3. 세계 식량시장의 지배

   - 정기적으로 곡물을 수출하는 나라는 미국,캐나다,아르헨티나,호주     이들 세계 식량공급 5개     메이저  대부분을 아슈케나지 유태인이 장악

    . 콘티넨탈-그레인. 카길. 루이-드레픽스는 확실한   유태계임

      콘티넨탈 그레인과 카길사에서 미국 곡물수출의 85%를 담당하고 있다.

4. 세계 금융시장의 지배

   - 미국 최대 5개 은행 중 체이스맨하탄, JP모건  유태인 직영

   - 뱅커 아메리카는 영국 로스차일드와 제휴

   - 그 외 메린린치,솔로몬-브러더스, 모건-스탄제이, 파스트-보스톤, 골드만사그 등 유태인이 경영

   - FRB, IBRD, IMF 등은 유태인이 배후에서 지배

   * FRB는 록펠러가 지배하고 있으나 그 배후에는 창설자인 로스차일드가문이 있다

   * 세계금융시장은 의문의 여지없이 유태자본이 장악

5. 세계 정보 통신망의 지배

   - AP, UPI통신, IBM(세계 컴퓨터시장 50%점유)

로스차일드가는 영화 패션 각종연구소 학술에 공헌 하였으나, 비즈니스가 국제정부기관. 각국의 왕실. 국제보도기관. 국제첩보기관 등과  밀접하게 결부되어(특히 군수기업과 유착) 비난을 받고 있다. 전 세계를 상대로 무기. 탄약을 판매하는 무기상(죽음의 상인)의 상당수는 로스차일드와 관계가 있다 - 전쟁있는 곳에 로스차일드가 숨어 있다. 나폴레온 전쟁이후 유태인은 전쟁을 비즈니스로 취급하고 있다.

함스브루크시대에 궁정유태인이 되어 유태인에게는 절대 주지 않는 “남작”작위 까지 얻은 로스차일드는 혼인으로 맺어진 족벌 체제를 구축하였다. 그러나 유태인이라고 하여도 궁핍한 유태인은 절대 페밀리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한다.

세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샤일록”은 근세 유태인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유태상인은 세계를 무대로 아무런 장애없이 장사를 하고 있다.

1940년 당시 로스차일드 일족은 약 5천억달러(당시 미국 전 자산의 2배, 전세계 부의 50%를 지배)를 보유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들의 자산에 접근자체가 불가능하다. 재산을 철저히 베일 속에 감출 수 있는 것은 세계유명금융기관(FRB미연방준비제도이사회. 영국. 프랑스의 중앙은행. 신용평가사 무디스 등)이 모두 그들의 손아귀에 있기 때문이다. 재산을 비밀관리하는 것은 마이어암셀의 유언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정치권력으로 부터 불필요한 공격을 받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들 재산은 쉽게 주인을 알 수 없는  

드나 채권등의 형태로 유지된다고 한다.
지금 전 세계 국가들은 부채에 시달리고 있고 그 빚의 주인이 미국이라고 하는 데, 정작 미국 역시 수조 달러의 부채를 떠안고 있다. 미국의 세금 모두를 몇년간 모아도 빚의 이자도 못 갚는다는 것이다.

세계가 안고 있는 부채의 주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꼭대기에는 로스차일드와 록펠러 등 유대가문이 있다.

    세계는 미국이 미국은 유태인이, 유태인 뒤에는 로스차일드가문이 있다

로스차일드는 오늘날에도 유럽과 미국은 물론 아시아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등 전 세계에서, 전쟁과 혁명, 경제공황, 내란을 이용하여 부를 팽창시키고 있다

입맛이 쓰지만, 로스차일드가의 존재를 무시하고  21C 지구의 평화와 전쟁을 말할 수 없다.

한때 로스차일드가는 미국진출의 시기를 놓쳐, 1.2차 대전후 영향력이 감소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여전히 프랑스. 런던 스위스를 거점으로 미국에 안착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침공시 딕체니 부통령, 국제금융계 큰손 조지 소로스, 금융재벌 J.p모건도 로스차일드가문의 핵심人士이며, 세계적 소프라노 살롯 드 로스차일드는 런던가의 직계 손녀이다.


로스차일드가의 회사들

셀 석유, 로스차일드 은행(금 가격 결정),  골드만삭스 증권, 로이드보험 . 필립모리스 담배,  필립스 전기, 레슬러 식품, 프랑스 최고급 포도주의 하나인 “샤토 무통”의 제조사인 “베이론 필립페”. 파리안과 평원. 뉴욕타임즈, 워싱턴포스터,  윌스트리트저널, 로이터통신, ABC. CBS 그 외 삭슨 자딘 기네스 . 세계 첫 분자생물학연구소인 “제네바 아돌프 로스차일드 재단”.

유럽에는 로스차일드가의 저택 190여개가 있다 - 이 저택들은 최소 수만평에서 수십만평의 대지 위에, 古城 또는 현대식으로 축조되어 있다.

   마이어 암셀의 유언

1. 장남이 집안의 대권을 승계할 것

2. 사촌끼리 결혼으로 자본의 분산을 막아라.(가문의 결속력은 잦은 족내혼에서 나왔다)

3. 일족의 재산을 통합해 비밀로 관리하라

4. 딸과 사위는 경영에 관여치 않게 하라

우리에게는 농사지을 땅도, 사냥터도 없다. 5천년 영광의 역사와 머리가 있을 뿐이다. 장사는 유태인의 천직이 될 수 밖에 없다. 천을 한 조각이라도 살 돈이 모이면 천 한 조각을 사서 두 조각을 낸 다음 웃돈을 얹어 판다, 돈이 모이면 더 큰 천을 사서 3조각 다섯 조각, 이렇게 몇 백번 되풀이 하는 사이 돈이 불어나고 장사꾼의 피가 흐른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 외 유대인 회사

록펠러. 모건. 듀폰. 로열더치. GE. GM. ATT. IBM. 보잉

US스틸. 제록스. 해운왕 오나시스, 빌게이츠

AP UPI 통신,

IMF, IBRD 설립 및  영향권내 둠

석유 금 다이아몬드 우라늄 와인 백화점 국제금융 장악

사상계 : 예수. 스피노자. 칼 마르크스. 베르그송.아담스미스

예술계 : 바그너. 쇼팽. 멘델스존. 샤갈. 찰리채플린

학계 : 아인슈타인. 프로이드

 1997년 하반기 동남아와 한국의 외환위기시 말레시아 총리 마하티르는 말레시아 화폐인 링깃의 급격한 가치 하락이 국제유태자본의 음모라고 주장하고, 국제 환기업인 소로스(로스차일드 지배)가 IMF(유태인 지배)와 짜고 개혁에 미온적인 태국 경제에 악성 루머를 퍼트린 결과라고 주장, IMF구제금융을 거부한 바 있다.

2차 대전후(루스벨트 이후) 미국의 대통령도 유태인 압력단체에 의해 좌우되었다. 이들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한 케네디와 닉슨은 비참한 말로를 당했다. 대통령은 유태인편만 들 수 없다는 것을 유태인들이 인정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6.25전쟁 후 경제발전에 유태자본이 도움을 주었지만, 김영삼 정부시절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트려 유태인의 비위를 거슬린 것이 바로 IMF 구제금융 형태로 나타났다는 설도 있다.


“돈으로 열리지 않는 문은 없다”

“금화소리를 들으면 욕설은 조용해진다” 

                                    -  유대인의 격언 - 

돈은 유태인의 생존철학이다.



스파라디계와 아슈케나지계

로스차일드는 스파라디계라고 하는데 그러면 아슈케나지계는 무엇인가?

미국 유태인의 80%. 전 유태인구의 70%를 차지하는 아슈케나지계는 나치의 박해를 많이 받은 독일계 유태인으로 지금은 구미계라고도 한다.

이들은 종족이 유태인이 아니라 종교가 유태교인 사람들이다. 8C경 북방 유럽계 유태인으로 옛날 카자르왕국을 세웠던 터키계 카자르인의 후손들이다. 이 무렵 카자르왕국(남러시아의 평원에 위치함)은 비잔틴의 기독교와 남쪽의 이슬람교로부터 강한 압력을 받고 있었다. 왕은 교묘하게 양교의 근본이랄 수 있는 유태교로 개종하고 전 국민을 강제 개종시켰다. 즉 인종적이 아닌 종교적 유태인이 된 것이다. 9C경 카자르가 망하고 11C몽고의 침략을 피해 북쪽으로 이동(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독일)한 후 카자르인이 아닌, 유태인으로 공동체(게토)를 구성하고 생활해 왔던 것이다.

19C초 유럽전역에는 330만명의 유태인이 동구 특히 폴란드에 살고 있었고, 러시아에 6백만명(전체 유태인의 60%)이 살고 있었다.

20C초 러시아에서 유태인 대박해가 있을 당시의 중- 동부 유럽의 아슈케나지는 650만명, 홀로코스트(대학살)직전 1939년에는 850만명이었다. 

제정러시아에서 유태인들은 심한 학대를 받고 있었다.

1904년 아슈케나지 유태인 시프는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군비부족에 허덕이던 일본의 국채를 인수 2억 달러를 빌려주므로서 일본이 러시아와 충돌토록 유도하였다. 즉 일본 군인들을 돈으로 사서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토록하여 결국은 러시아혁명이 일어나도록 간접 지원 하였던 것이다. 혁명은 러시아 유태인의 해방을 의미하였으니, 미국에 망명중인 트로츠키에게 혁명자금을 주고 독일황제 카이제르로 하여금 볼세비키 지도자 레닌을 러시아로 보내 혁명을 일으키도록 한 그 배후에는 유태인이 있었다.

러시아혁명 중추세력 50명 중 레닌. 트로츠키 등 44명이  유태인이었다. 마르크스가 그려낸 노동자 피지배 계급은 러시아의 유태인을 의미하며, 러시아혁명은 유태인노동자를 위한 것이었다.

레닌은 사회주의 시스템은 한 국가만으로는 성립되지 않고 세계적인 규모로 달성된다는 국제공산주의운동을 주창하였는데, 그 저의는 세계가 공산화 된 이후 유태인에 의한 세계 지배를 염두에 둔 것이라 한다. 그러나, 그루지아 출신 스탈린은 국가사회주의를 제창하였고 반대하는 유태인은 모두 처형 또는 억류하였다. 유태인에 의한 세계지배 야망은 레닌의 뜻대로는 되지 않았지만 다른 방법으로 실현되었다.

1차대전 후의 독일은 초인플레, 막대한 배상금, 방대한 차관의 일시불 독촉과 550만명의 실업자 문제로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그러나 나라 경제를 지배하던 유태인들은 자기 배만 늘릴 줄 알았지 애국심이라는 게 없었다.

1933년 위대한 게르만민족을  기치로 집권한 히틀러에게  유태인의 자본은 독일부흥에 꼭 필요한 것이었다. 즉  독일 국가주의 세력과 유태인 사이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방법은 홀로코스트(대학살)로 실현되었다.


* 3대 학살사건

  - 1915 오스만 - 터키의 아르메니아대학살

  - 1939~1945 나치의 유태인 학살

  - 1975~80캄보디아의 킬링필드


나치의 유태인 학살은 유태인의 생활방식. 탈무드가 원인

모세가 이집트에서 동포들을 이끌고 나와 광야에서 40년을 보내는 중 시나이 산에서 미디안族의 神인 야훼에게서 10계명을 받고,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계약의 중개자가 되었다. 이때(대략 BC 13C)부터 유일신 사상이 유태인의 생활을 지배하게 되었다. 모세는 이집트에서 박해받는 동포를 구출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지금 동남아 출신 노동자들처럼 척박한 사막보다는 물산이 풍부한 이집트로 스스로 몰려 들어갔을 것이다. 성경에도 그렇게 기술되어 있다. 모세는 동포들이 당장의 안락한 생활에 빠져 영원히 이집트인들의 하층민으로 전락하여 살아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모세는 민족정체성을 확립한 이스라엘민족 최초의 지도자다. 40년동안 무리를 이끌고 광야를 배회하였다는 것은 처음부터 정착할 땅이 있었던 것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모세는 십계명을 통한 신앙의 힘을 빌려 가나안에 민족의 터전을 마련한다. 다신교가 일반적인 당시에 신은 여호와 하나님 하나뿐이라는 유일신사상은 특별한 것이었다. 그들만이 유일신으로부터 선택받았다는 선민의식은 다른 민족과의 공존을 어렵게 하였다. 로마제국 당시의 반란도 종교적인 것들이었다. 그로인해 예루살렘이 폐허가 되고 민족이 흩어졌다. 유대교에서 파생한 기독교가 AD 3세기 로마의 국교가 된 후 기독교도로부터의 탄압은 다신교인 로마시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가혹한 것이었다. 자기 나라도 아닌 타국에서, 그것도 기독교국가에서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 유태인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돈을 모으는 방법뿐이었다. 그러다 이번에는 그 돈 때문에 나치로부터 대학살이라는 박해를 받았으니, 5년동안 약 400만명의 유태인이 나치에 의해 학살 당하였다.

 

-구약성서와 탈무드는 하늘 땅 만큼 거리가 멀다. 유대인은 구약보다 탈무드를 더 소중히 여긴다.

  구약은 스파라디계의 민족이야기이다. 유대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아슈케나지는 카자르 인이니  구약에 대하여 관심이 적을 수 밖에 없다.

 - 탈무드에 따른 유태인의 선민의식이 문제

    *  탈무적이기 때문에 성공한다.  그로인해 박해도 당 한다


미국의 유태인 역사는 320년 전부터지만, 19세기 중엽에  크게 증가하였고 특히 1890~1924 까지 35년 동안 러시아와 동구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아슈케나지가 200만명이었다. 초기에는 게딱지 집에 두 세가구가 몰려 살며, 한개 뿐인 화장실을 이용하는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 그 후 2차대전 당시 (1939~1945) 나치를 피하여 폴란드와 소련에서 많이 유입되었다. 그들 대부분은 뉴욕에 자리를 잡았으며 하나같이 3D업종에 종사하였다. 당시 유태인 봉급자의 2/3가 봉제업에 종사하였는데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고 남자는 6달러, 여자는 3~5달러 받았다. 장사를 하는 사람도 자본이 없어 잡화나 인조보석 등 저가품위주였다.

지금은 1,300만 유태인중 6백만명이 미국에 거주하며   미국을 주무르고 있다. 미국의 신문. 잡지. TV에서는 이스라엘 또는 유태인문제가 미국 국내문제와 비슷한 비중으로 다루어지고 있으며, 이를 미국 국민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닉슨. 카터. 부시. 클린턴 등은 모두 유태계의 지원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당선된 이후 유태인 또는 이스라엘에 대한 지지를 미온적으로 하다가 임기 중 시련을 겪거나 재선에 실패하였다.

유럽은 물론 미국내에서도 유태인문제는 taboo이다

 * 무지와 달리  taboo는 알고 있으면서 입을 열지 않는 것


최근 10년 사이 미국에서 Merry chritmas(축 성탄)라는 말이 사라지고 대신, Happy Hollyday(즐거운 휴일) 로 대체되고 있다고 한다. (2004년 부시대통령의 대국민 연설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X-Mas가 유대인 명절과 겹치면서, 유대인들의 종교     편향 항의에 굴복한 결과이다.


미국에서는 “유태인이 미국의 정치와 경제를 장악하고 있다”는 말 만해도 아슈케나지 유태인 그룹은 그 사람을 재판소에 고소할 수 있다.

그러면 스파라디계는 누구인가?

사라센제국 당시 이베리아반도 주로 스페인에 살든 유태인으로  아담과 이브로부터 내려온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후손(바리새인도 야곱의 후손이다 - 샘족)을 말한다. 즉 유태민족이며 유태교를 믿는 사람들이다.

* 유태인은 어머니가 유태인인 사람이다. 교육을 중시 하는 유태인은 아버지가 유태인이라도 어머니가 유태인이 아니면 유태인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신약성서에 바리새인은 예수파와 정면 대결한 집단이다.  신약 곳곳에서 예수는 바리새인을 “살무사의 새끼들”“위선자 바리새인”이라고 했다. 끝내는 “당신들은 악마 아버지로부터 나온 사람들이며, 그 아버지의 욕망을 채우려 하고 있다. 악마는 처음부터 살인자이다” - 요한 전서 8장)라고 했다.

원한이 깊었다는 이야기다. 기독교의 유태교 박해가 예견된 것 같은 대목이다.

예수 사후 40년 AD70년 로마에 반기를 든 유태는 로마장군 타이티스에 의해 철저히 유린되었다.  마치 제3차 포에니 전쟁후 로마에 망한 카르타고의 운명과 같이 예루살렘은 유태교신전뿐만 아니라 모든건물이 파괴당하고 가래로 고른다음 소금이 뿌려졌다. 당연히 주민들은 추방되었다. AD135년 발-코호바 반란(제2 유태전쟁)이 다시 일어나자 그나마 이스라엘에 남아있던 소수마저 모든 다른나라(120개국)로 흩어졌다. 로마가 아닌 주로 북아프리카로 많이 이주했다. 시대는 흘러 476년 로마제국이 망하고 622년 사라센제국(왕조가 존재한 것은 아니며, 7C~13C 인도서부에서 이베리아반도까지의 이슬람왕국을 총칭함)당시의 아랍인은 유태민족에 관대했고 또  존경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살던 많은 유태인들이 같은 사라센제국인 스페인으로 이주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630년 마호메트가 메카를 정복하고 아라비아반도를 통일하자 이슬람과 유태인의 우호적인 관계는 끝이 났다.  그 후로는 한동안 스페인이 유태공동체의 중심이 되었다. 이렇듯 스파라디계는 스페인. 포루투갈에 거주했던 유태인들로서 중세에는 세계유태인의 절반을 점했다.

스페인에 1474년 이사벨라1세가 즉위하여, 국가의 독립 및  에스파냐를 통일하고 이슬람세력을 축출하면서 동시에 유태인에게도 시련이 닥쳐왔다. 1492년부터 카톨릭 으로 개종하지 않으면 스페인을 떠나라는 박해가 가해졌다.  이때 25만명이 북아프리카. 이태리. 오스만제국으로 이주하였다.


로마가 망하고 고국으로 돌아간 유태인이 지금의 팔레스타인人이다. 그러니까 스파라디계 유태인과 팔레스타인은 인종적으로 같다.

그러나 현재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스파라디계는 경제적으로 가난하여 하층을 형성하고 있다. 인종이 다른 미국계 아슈케나지가 이스라엘을 건국하였을 뿐만 아니라 현재  모든 분야를 요리하고 있으므로, 팔레스타인 문제가 강경하고 해결이 안 되고 있다는 설도 있다. 다시 말해서 스파라디계가 정권을 장악하면 인종적으로 같은 팔레스타인과 전쟁보다는 평화적으로 해결될 여지가 많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유태인은 대부분 아슈케나지고 이스라엘은 미국의 우산아래 거대 이슬람 국가들과 대치하고 있으니, 아슈케나지가 정권을 잡는 것이 국가 존립에는 더 유리할 것 같기도 하다.

  

    맺는 소리

 

동네 인심 다 얻으면서 부자되기란 어렵다.생존을 보장해 주는 것이 재력뿐이라면

부자로 가는 길이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죽지 않으려면 그 길로 갈 수 밖에 없다.조상이 물려준 내 땅에 사는 우리야 부자가 아니라도 살아가는데 큰 불편이 없다.

유태인들은 타민족과 융화하기 어려운 독특한 선민사상, 배타적인 민족주의성향 탓에 마에 반기를 들었고 그 죄로  2천년간 타국을 유랑했다.

남의 나라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굴복하던지, 타협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들은 굴복과 타협대신
누구도 넘보지 못할 거대한 재력을 쌓아 은밀히 세계를 지배하는 승리자가 되었다.

그 신화의 중심에 로스차일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