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워서 골짜기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많은 여인들이 울면서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이 여인들과 소녀들, 그리고 어린 여자 아이들이 올라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고, 계곡 양쪽에서 이들이 모두 죽을 때까지 사격하는 군인들이 보였다.”
이것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증언이다. 그러나 이것은 유태인들의 홀로코스트가 아닌 또 다른 홀로코스트에 대한 보고다. 이것은 미국의 군대가 부상당한 수족 인디언들에게 저지른 학살에 관한 증언이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지 채 몇십 년도 지나지 않아서 카리브 해 일대의 인디언들이 절멸되기 시작했다. 유럽인들의 탐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파괴의 물결은 북아메리카 대륙 전체를 휩쓸었다. 많은 사람들은 신세계의 발견을 이야기하고, 그곳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의 ‘문명화’에 관해 말하지만, 유럽의 탐험가들과 식민지 개척가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가지고 온 문명의 보따리 속에는 절대로 넣어 오지 말았어야 할 구세계의 유산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인간에 대한 편견과 증오, 악마와 같은 잔인함, 왜곡된 인간성, 살인의 쾌락이 바로 그것이었다. 유럽 출신의 개척민들이 탐사와 정착이라는 이름으로 행한 많은 일들은 훗날 유럽 대륙의 한복판에서 일어난 ‘최종 해결’의 선구적인 모델이었다.
신대륙에 상륙한 콜럼버스. 그의 신대륙 발견은 우연한 행운에 불과했지만 원주민 인디언들에게는 재앙의 시작이었다.
인디언 학살. 멕시코 북부 지역에 살던 1천만 명의 인디언들은 유럽인의 이주 이후, 백만 명 이하로 감소했다.
1992년, 전 세계인들의 관심 속에 신대륙 발견 500주년 기념 행사가 미국 각지에서 성대하게 치러지고 있을 때, 그곳에는 전혀 기뻐할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소수의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그들은 바로 인디언들의 후예들이었다. 행사를 알리는 축포에 침묵해야만 했던 그들의 울분은 바로 그 다음 해에 미국의 수도 워싱턴 한복판에 유럽 유태인들의 학살을 추모하는 홀로코스트 기념관(The U. S. Holocaust Memorial Museum)이 완공되었을 때 마침내 폭발하고야 말았다. 미국 땅이 아닌 곳에서 미국인도 아닌 사람들이 학살당한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 막대한 국고를 투입하고,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미국 국민 모두에게 기억의 의무를 요구하는 것을, 선조들의 학살에 대한 공통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인디언들이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대통령의 연설처럼 생명의 고귀함, 인권의 소중함, 인종주의의 해악을 널리 교육하는 것이 홀로코스트 기념관 건립의 목적이었다면, 왜 미국의 백인들은 미국 땅에서 일어났던 토착 미국인들의 비극을 이야기하지 않고 대서양 건너 유럽의 역사를 이야기하는가?
1992년 10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인디언들이 항의행진을 하고 있다.
스태너드(David Stannard)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죽음을 연구한 것은 바로 이런 현실적 배경과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이들은 지난 수백년 동안 백인들이 미국 땅에서 인디언에게 저지른 만행을 ‘잊혀진 홀로코스트’, 혹은 ‘또 다른 홀로코스트’라고 불렀다. 이와 관련해 많은 유태인 학자들은 이들이 유태인만의 비극인 홀로코스트를 도둑질하고 있다고 비난했지만, 문제의 본질은 홀로코스트라는 명칭 자체에 있지 않았다. 인디언 문제 연구자들이 이렇게 도발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그만큼 미국에서 인디언 절멸에 관한 기억이 사회적으로 강력하게 억압되어왔기 때문이었다. 인디언 인권 운동 전문가들은 오늘날 미국인들이 유럽 유태인의 죽음에 대해 보이는 지나친 관심의 배후에는, 도덕적 채무 의식을 가질 필요가 전혀 없는 타자의 경험(유태인의 홀로코스트)을 가지고 들추어내기 부담스러운 자신들의 경험을 덮어버리려는 계산이 자리잡고 있다고 비난한다. 사실, 이런 비난은 일리가 있다. 그렇지만 백인들이 홀로코스트를 지나치게 부각시키는 동기가 도덕적인 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경제적인 동기 때문에 인디언 학살의 과거를 더욱 외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도 인디언들의 후예들이 정부를 상대로 진행하고 있는 여러 건의 대규모 토지 소송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미국인들에게 인디언 문제는 과거사인 동시에 현재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스테너드 교수
인디언 절멸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도발적인 문제 제기에 대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사람들은 유태인들, 혹은 유태인의 입장에서 홀로코스트를 연구하는 학자들이다. 이 두 진영은 치열한 논쟁을 전개해 왔다. 홀로코스트 기념관의 관장으로서 이 논쟁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카츠(Steven T. Katz)는 방대한 분량의 연구를 통해, 인디언들의 불행을 유태인의 고난에 비교하는 것은 무리라고 역설했다.
홀로코스트 기념관
홀로코스트 기념관의 관장 스티븐 카츠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인디언들의 집단적 죽음이 숫적으로는 홀로코스트보다 대단해보일지 모르지만, 그 죽음은 의도적인 학살의 결과가 아니라 전염병의 결과였다는 것이 카츠의 핵심적인 논지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인디언들은 살해된 것이 아니라 죽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주장 속에는 인디언의 비극이 홀로코스트와 비견될 수 없음은 물론이고(상당수의 유태인들은 홀로코스트를 학살의 한 사례로 보는 것에 대해서도 불쾌해한다), 학살의 구성 요건조차도 완전하게 충족시킬 수 없다는 암시가 담겨 있다.
유태인 학자들의 이러한 공세에 맞서 스태너드는, 홀로코스트가 다른 집단 학살과 비교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사건이라고 주장하는 태도는 유태인들의 죽음을 마치 순교자의 죽음인 것처럼 신비화하는 가운데 다른 집단 구성원들의 죽음을 사소한 것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다른 집단 학살들의 의미를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비판했다. 그는 유태인들이 어느덧 사람들의 죽음을 ‘가치있는 죽음’과 ‘무가치한 죽음’으로 양분하는 오만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토착 미국인들이 겪어야 했던 학살의 무게와 의미를 규명하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죽은 사람의 숫자와 비율로만 본다면 아메리카 인디언의 학살, 즉 ‘미국인의 홀로코스트’가 유태인의 홀로코스보다 더 극심했다고 그는 주장했다. 또한 그는, 숫자로는 5,000만 내지 1억 명, 비율로는 전체 인구의 90내지 95퍼센트에 달하는 인디언들이 지금의 미국 땅에서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죽음을 당했으며, 인디언 학살에 동원된 방법도 유태인 학살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역설했다.
운디드니 학살의 사진
우리는 여기서 “한 집단의 구성원 전체에 대한 살해를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한 사례(유태인 학살)와 가해자의 입장에서 볼 때 절멸의 이데올로기는 없었지만 궁극적으로 집단 전체를 절멸하는데 성공한 사례(인디언 학살)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참혹한가?”라는 스태너드의 항변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어떤 집단이 겪은 비극을 그 후손들의 목소리의 크기에 따라서가 아니라 사건 자체의 크기와 무게에 따라서 파악하고 그 의미를 가늠하는 것이 공정한 태도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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