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의 침략에 저항한 인디언들. 맨위 좌측부터 오른쪽으로 크레이지 호스, 에밀리아노 자파타, 제로니모, 폰티악, 테쿰시, 투팍 아마루, 엔리킬로, 조셉 추장, 투팍 아마루 2세, 쿠아나 파커, 쿠아우테목, 시팅 불
독립전쟁이 끝나고 영국 군대가 물러간 뒤에도 북아메리카에서는 인디언 학살이 끝나지 않았다. 미국인들은 식민지 시절에 영국인들이 발전시켰던 보조금 지급 제도를 그대로 받아들여 모든 중에서 시행했다. 특히 텍사스에서는 살해해야 할 인디언이 단 한 명도 남지 않게 될 때까지 이 제도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보조금 지급 제도가 공식적으로 폐지된 이후에도, 재력을 갖춘 사람들이 인디언을 죽이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보조금을 지급했다. 그 여파로, 1850년에만 해도 30만 명을 넘었던 캘리포니아의 인디언 인구는 1885년에 3만 명 이하로 크게 줄어들었다.
미국 군대의 세미놀 인디언 학살
인디언을 절멸하기 위해 영국인들이 고안해낸 ‘생물학적 전쟁’의 방법도 독립전쟁 이후에 그대로 동원되었다. 생물학적 전쟁이 처음 도입된 것은 1763년이었다. 바로 이해에 애머스트(Jeffrey Amherst) 경은 ‘저주받은 인종’을 괴멸하기 위해 천연두에 감염된 물건들을 오타와 부족에게 나눠줄 것을 지시했다. 그 결과 오하이오 강을 따라 퍼진 전염병으로 최소한 10만 명 이상의 인디언들이 목숨을 잃었다. 독립전쟁이 끝난 뒤에도 미국인들은 영국인들이 남긴 이 잔인한 유산을 폐기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1836년에는 미주리 상부 지역에 살고 있던 10만 명의 만단 부족 인디언들이 생물학적 공격에 희생되었다. 피해 규모는 이보다 작았지만,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연이어 일어났다.
애머스트 경
천연두에 감염된 물건들을 오타와 부족에게 나눠주는 모습
1830년대 초 미국은 미시시피 강 동쪽 지역에 살고 있던 모든 인디언들을 다른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정책을 수립했다. 이 계획에 따라 구금되었던 인디언들은 백인들의 감시와 통제 속에 수천 마일에 이르는 행진에 나서야 했고, 이 과정에 많은 인디언이 희생되었다. 체로키 인디언들이 치러야 했던 ‘눈물의 행진(Trail of Tears)’은 그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이 계획에 따라, 1837년 봄부터 1838년 가을까지 1만 6천명의 체로키 인디언들이 정든 고향을 떠나 오클라호마까지 걸어가야 했다. 이 ‘행진’은 9개 주에 걸쳐 1,800마을을 걸어가야 하는 대장정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는 약 200일이 걸렸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 살을 에는 듯이 차가운 바람, 굶주림, 질병, 정신분열증 때문에 목숨을 잃은 사람만 4,000명이 넘었다. 날로 늘어나는 백인들에게 ‘생활 공간’을 마련해주기 위해 고향에서 추방된 체로키 인디언들에게 북아메리카 대륙은 ‘죽음의 공간’ 그 자체였다. 전직 노스캐롤라이나 주지사 마틴(James G. Martin)은 이 눈물의 행진을 ‘인간이 인간에게 행한 일들 가운데 가장 기념비적인 비인도적 처사’라고 평가하면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미국사의 오점이라고 비난한 바 있다.
눈물의 행진
제임스 마틴
40여 차례에 걸쳐 일어난 기묘한 성격의 ‘인디언 전쟁’도 아메리카 인디언이 절멸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814년부터 1870년까지 대규모로 이루어진 이 ‘전쟁들’은 이름과는 달리 일방적인 학살을 의미했다. 인디언 학살은 직접적인 방식뿐만 아니라 간접적인 방식에 의해서도 이루어졌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대대적인 버팔로 사냥이었다. 수천 년간 인디언들의 생존에 필수적이었던 버펄로를 절멸시킨 것은 인디언들의 삶의 기반을 붕괴시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868년 8월 아이다호에서 벌어진 인디언 학살
리틀 빅혼 전투
시팅 불 추장
아메리카 들소의 뼈
이렇게 다양한 방법이 동원된 절멸 전쟁을 통해, 최대치로 추산할 경우, 1500년경 1,500만 명에 이르렀던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은 1890년에는 25만 명 이하로 줄어들어 있었다. 97.5퍼센트가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최소치로 추산한다 해도 90퍼센트였다. 이 참사는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들어오기 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가해자인 백인들은 이 모든 것을 운명의 탓으로 돌렸지만, 이 비극은 천재(天災)가 아닌 인재(人災)였다. 이 비극 속에는 백인들의 의도와 목적과 계획이 내재되어 있었다. 백인들의 목적은 무엇보다도 백인만의 ‘생활 공간’을 확보하는 데 있었다.
미군과 인디언 사이의 최후의 전투로 불리는 운디드니 학살 현장. 사진은 운디드니 전투에서 죽임을 당한 수족의 추장 큰발의 모습이다. 운디드니 학살 사건은 1890년 12월 29일, 미군이 기관총으로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 200명 이상의 인디언을 학살한 사건이다.
운디드 니 학살에 희생된 인디언의 시신을 수습하는 제 7기병대
1890년경에 이미 백인들의 이런 꿈은 완전히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 이르러 전체 미국 영토에서 인디언들이 차지한 지역이 2.5% 이하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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