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히틀러에 대한 평가와 나치, 히틀러에 대한 왜곡 (3편)
- (총 4편입니다.) (본 내용은 거짓이 없으며, 보다 사실적임을 앞서 말씀드립니다.)
(2편, 총 4부작)
1933년 1월 31일, 히틀러의 제3제국 출범
총선 승리로 집권에 성공한 히틀러는 서구 근대사에서 독점 자본주의와 맑스-레닌주의로 대변되는 유태인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권력에 국가적 차원의 제동을 가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집권 초기부터 NSDAP 정부의 일관된 목표는 일련의 차별적인
법적장치들을 통해 독일사회에 대한 유태인의 영향력을 점진적으로 감소시키는 한편 독일 유태인 인구의 국외이민을 최대한 유도하는 것이었다.
유태인에 대한 일부 폭행사건들과 1938년 유태인 청년에 의한 파리주재 독일 외교관의 암살로 촉발된 ‘Kristallnacht'
사건을 제외하고 1933년부터 2차대전 발발전까지 독일정부의 유태인 정책은 별무리 없이 진행되었다. 국가사회당 집권 직후 개설된 집단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은 바이마르 시대에 급증했던 공산주의자와 변태성욕자, 음란물제작자, 그리고 예외적인 중범죄자들로 국한되어 있었고 단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수용소에 감금되는 일은 2차대전 발발 후인 1942년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유태인의 팔레스타인 이민을 촉진하기
위해 독일정부는 일부 시온주의 단체들과 긴밀하게 협력하기도 했으며 1938년에는 유태인국가 건국을 위해 아프리카 동남부의 마다가스카르 섬을
세계시온주의의회에 공식제안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전쟁 발발 전 국가사회당 정부의 유태인 정책 주안점은 격리와 국외이민이었고 전쟁 발발 후에는
게토수용(1939-1943)과 1943년 이후로는 집단수용소에서 강제노동력으로 활용하는 것이었을 뿐 유태인의 인종적 말살이 아니었다. 공교롭게도
'600만' 희생자를 주장했던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는 이런 사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유태인 지식인들의 선전과는 달리 제3제국은
전체주의 국가(totalitarian state)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유신체제와 흡사한
권위주의-민족국가(authoritarian-national state)였다.
(세계최초의 고속도로 '아우토반'의 첫 삽을 뜨는 히틀러)
Rabbi Manfred Reifer 유대교 지도자 (獨)“혁명은 우리의 소행이었다.
우리는 영원한 신의 선민을 자처하며 항상 민중의 선봉에 서서 그들을 이끌어 왔다. 우리는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들에게 그들의 성경책인
‘자본론’을 선사했으며 민중의 열정을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독일에서 태어난 유태인 칼 맑스는 전 세계 자본주의*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고 또 다른
유태인 라쌀은 독일의 민중을 조직했다. 유태인 에두아르 번스타인은 공산주의 이념을 대중에게 유행시켰고 칼 리쁘끄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는 스팔타쿠스단의 폭력혁명을 주동했다. 유태인 쿠르트 아이스너는 바이에른에서 독일 최초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선포했고 그 정부의 처음이자
마지막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독일민족은 이 모든 것에 대항하여 떨쳐 일어났다. 독일인들은 단지 그들 민족과 후세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이는 비난의 대상이 될 이유가 없다.” - Czernowitz Allgemeine, September 2,
1933)
"유태인 상점에서 사지맙시다!"
DAILY EXPRESS 영국 일간지"유대는 독일에 전쟁을 선포한다 - 전 세계의 유태인이
단결하다"
(우드로 윌슨과 하우스: 돈과 협박으로 '민주주의' 국가의 정치인들을 부리는 청사진 'Philip Dru: The
Administrator'의 저자 유태인 에드워드 만델 하우스; Council on Foreign Relations 창설)
유태인 금융재벌 버나드 바룩
“월스트릿 투자은행가 버나드 바룩은 1차대전 당시 미국의 산업계를 조율하고 통제할 목적으로 윌슨 행정부 산하에 설치된 전시산업위원회의
총수였다... 바룩은 단 한 번도 선거에 의해 임용되는 공직에 선출된 바가 없었음에도 거의 반세기 동안 미국의 대통령들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행사했다. 바룩은 여섯 명의 미국 대통령 뿐만 아니라, 정부각료, 상하원의원, 군장성, 외교관, 정당인사들에 대한 ‘고문’의 역할로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다... 전시산업위원회 위원장으로서 그는 미국의 산업계를 사실상 통치했다.” (Margaret L. Coit, Mr.
Baruch, 1957)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의 건강상태는 사우스 캐롤라이나 호브카우에 있는 버니 바룩의 농장에서 휴식을 취해야 할
만큼 좋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바룩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도로시(Dorothy Schiff, 야콥 쉬프의 손녀로 뉴욕포스트 사주)는
루즈벨트와 그의 아내 엘레노어는 바룩이 너무 보수적이라고 여겼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룩은 루즈벨트가 치른 선거전들에
대한 든든한 자금줄이었다... 도로시 쉬프 역시 루즈벨트의 영향력있는 측근이었다... 그녀는 1938년 크리스마스를 몇 주 앞두고 조지아주
웜스프링스에서 휴양중이던 루즈벨트를 방문했다... 도로시 쉬프의 회상에 의하면, 루즈벨트는 바룩이 자신을 불렀을 때만 그와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주변에서 알게될까봐 매우 두려워 했다고 한다.” (Jeffrey Potter, Biography of Dorothy Schiff,
1976)
(미국의 국익보다는 국제유태인을 위해 일했던 FDR;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날짜와 시간까지 알고 있었으나 현지 군 책임자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 (1933-1945)루즈벨트 행정부는 시작부터 유태인
용공세력의 온상이었다. 1950년, 조셉 맥카시 상원의원의 '맥카시선풍'으로 비화된 공산주의자들의 미국 연방정부 침투는 루즈벨트 재임시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의회의 비미국적행위 조사위원회를 이끌었던 텍사스의 마틴 다이스(Martin Dies) 민주당
하원의원은 1940년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고위직급을 포함하여 정부공직에 수천명에 달하는 공산주의자들과 용공분자들이 채용되어 있음을 알리고 문제의
심각성을 경고했다. 그러나 루즈벨트는 사석에서 이렇게 대꾸하며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공산주의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당신이나 나나 마찬가지오. 허나 이 나라에 공산주의자들이 있다는 것은 문제될 것이 없소. 사실 나와 가장 가까운 친구들
중에는 공산주의자들도 있어요... 나는 공산주의자들이 지금이나 향후 이 나라에 위험한 존재가 될 거라고는 믿지 않아요. 사실 난 소련이 앞으로
이 나라의 훌륭한 맹방이 될 것으로 믿고있소. 전에도 얘기했지만, 공산주의자들을 쫓아다닐 시간이 있으면 이 나라에 있는 나치주의자들이나
파시스트들을 조사하시오. 세계평화는 짜르정권 보다 지금의 소련 치하에서 더욱 안전해졌소. 그리고 러시아 사람들은 짜르시대보다 지금 공산주의
밑에서 더 잘 살고 있어요.” - U. S. Congressional Record, September 22, 1950, pg. A6832
“사무엘 로센만, 벤자민 코헨, 필릭스 프랑크푸터, 데이빗 릴리엔탈, 버나드 버룩, 앤 로센버그, 시드니 힐먼, 데이빗 나일스, 루이스
브랜다이스와 헨리 모겐소 2세(미국 재무장관, 1933-1945), 그리고 허버트 리먼(뉴욕주지사) 등 루즈벨트는 누가봐도 유태인임이 분명한
인사와 참모들로 스스로를 둘러쌓다. 이 때문에 미국의 보수우익은 루즈벨트가 주창한 ‘뉴딜' 정책을 ’쥬딜(Jew Deal, 유태인의 책략)'로
공격했다.” - Barbara Matusow, Washingtonian, May 2000
(운터마이어의 윌슨 대통령 협박으로 유태인 최초 미국 연방대법원 판사가 된 시온주의자 루이스 뎀니츠 브랜다이스; 브랜다이스는 한국전쟁
발발시 미국 국무장관이었으며 맥카시선풍 당시 용공주의자로 지목되었던 딘 애치슨의 후원자였다.)
(허버트 리먼, 유태인 금융재벌 리먼가문(리먼브라더스) 일족, 뉴욕주지사, 상원의원, 1950년대초 '맥카시선풍' 당시 용공세력 비호로
유명)
“확실한 출처에 의하면 72인의 루즈벨트 대통령의 고문들 가운데 52명이 유태인이며,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들의 대다수가 외국에서 태어난
자들이란 사실이다. 통계에 의하면 유태인들은 현재 미합중국 부동산과 천연자원의 80퍼센트를 점유하고 있으며 워싱턴 관료층의 85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 William Dudley Pelley, The Hidden Empire, 1937
(영국 언론재벌, 로더미어 卿과 히틀러; 그의 동생 노스클립 卿은 '시온의정서'를 영국에서 최초로 출간한 뒤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죽음을
맞았다)
Lord Rothemere “나는 영국의 모든 젊은이들에게 독일의 나치정권이 지금까지 이룩한
성과를 주의깊게 연구할 것을 권한다. 이에 있어 나치독일을 증오하는 자들의 거짓말과 흑색선전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될 것이다. 독일의 나치정권을
가장 격렬하게 공격하는 일부 언론은 실제로 러시아의 소비에트정권에 대해서는 침이 마르도록 찬사를 아끼지 않는 집단임을 알아야 한다.
그들이 떠들썩하게 시작한 “나치스의 만행” 선전캠페인을 통해 알려진 사례들이 허무맹랑한 날조극이라는 것은 독일을 방문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아는 사실이다. 우리 나라의 배가 더 되는 독일과 같은 나라에서 유태인에 대한 그러한 폭력사건은 몇차례 일어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선동가들은 고립된 몇몇 사건을 일반적인 것으로 침소봉대하여 마치 나치정권이 피비린내나는 폭정을 자행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퍼뜨리려 한다. 나치스가 집권하기 전까지 독일민족은 빠른 속도로 그들 국가내부에 존재하는 이질적인 요소에게 종속되어 가고 있었다.
바이마르 정권 말기 독일의 관료층에는 1차대전 전보다 20배나 많은 유태인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독일에 대한 애국심과 책임감보다는 국제적으로
다른 국가의 유태인들과 더욱 공고하게 연대되어 있었던 이들 유태인은 독일정부의 모든 요직에 파고들었다. 장관은 독일인이었는지 모르나 그들 뒤에서
정책을 결정하고 국민에게 뉴스를 전달했던 사람들은 모두 유태인이었다.” - The Daily Mail, London, July 10,
1933
Samuel Untermeyer 유태인 월스트릿 변호사, 정계 거물“유태인과 비유태인을
떠나 여러분 모두는 對 독일 聖戰에 지금 당장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 Radio Broadcast, New York City, August
6, 1933
(루즈벨트 주변의 유...
출처 : Daum 지식
글쓴이 : 선악의 사도님 원글보기
메모 :
'히틀러와 나찌에 대한 왜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나치독일 이전부터 유태인들은 두부류로 나뉘어 서로 물고 뜯는중 (0) | 2011.11.22 |
---|---|
[스크랩] 히틀러에 대한 평가와 나치, 히틀러에 대한 왜곡 (4편) (0) | 2011.11.21 |
[스크랩] 히틀러에 대한 평가와 나치, 히틀러에 대한 왜곡 (2편) (0) | 2011.11.21 |
[스크랩] 히틀러에 대한 평가와 나치, 히틀러에 대한 왜곡 (1편) (0) | 2011.11.21 |
[스크랩] 유대인들, 계네는 대체 왜그런대[1] (0) | 2011.1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