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뽕 등소평

[스크랩] 학살의 역사 4. 아메리카 인디언(4) - 1890년 이후의 학살 : 물리적 절멸에서 문화적 제노사이드로

그리운 오공 2014. 11. 15. 13:58

이렇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후, 미국 정부의 정책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이제 물리적 방식이 아니라 문화적 방식의 제노사이드가 전면적으로 도입되었다. 인디언들의 삶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종교적 의례가 가장 먼저 금지되었다. 곧이어 인디언 어린이들은 부모의 품을 떠나 정부가 지정한 기숙 학교에 입학해서 철저하게 백인식 교육을 받아야 했다. 이렇게 해서 어린이들은 인디언의 전통에서 격리되어 철저하게 백인 사회에 동화되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부모의 동의는 전혀 필요 없었다. 모든 것이 강제로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인디언들을 위해 마련된 보호 구역에 남는다고 해도 부족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미국 정부가 보호 구역에 수용된 인디언들에게도 전면적으로 백인의 통치 방식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1879년 인디언 학교의 교장 리차드 헨리 프랫. 이 학교의 교장과 교사들은 군복과 무기를 착용하고 수업을 했다.

 

펜실바니아 주의 카리슬 인디언 학교. 1879년부터 1918년까지 140개 부족에서 1만명 이상의 어린이가 입학했으나 오직 158명만이 졸업했다.

 

학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인디언들이 겪은 고난을 학살로 정의하는데 상당히 주저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디언이 절멸되었다는 결과만큼은 분명하지만, 그들이 절멸되는데 걸린 시간이 무척 길었기 때문에 그 책임을 미국이라는 국가나 특정 대리인에게 곧바로 귀속시키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미국을 이끌었던 연방 지도자들 가운데 인디언의 절멸을 원한다고 공개적으로 표명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 인디언들의 집단적 죽음을 학살이라고 부르기 어렵게 한다. 또한 1948년의 유엔 협약이 규정한 것처럼 “전체나 부분을 절멸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평화적 입장을 고수하는 인디언들’을 국가가 조직적으로 학살한 경우가 드물다는 점도 이를 학살로 정의하는데 걸림돌이 된다. 이 때문에 제노사이드 연구에서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는 학자인 초크(Frank Chalk)와 조너선(Kurt Jonassohn)은 북아메리카 인디언이 겪어야 했던 고난의 의미를 규정하는 작업이 학살 역사 연구에서 가장 까다로운 일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시종일관 신중한 태도를 견지하는 초크와 조너선도 19세기에 미국 정부가 인디언을 상대로 추진했던 강제적 동화와 ‘문명화’ 정책을 제노사이드라고 이름붙이는 데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초크와 조너선은 ‘문화적 제노사이드(Ethnocide)라는 개념을 통해 미국 연방 정부가 취했던 입장을 설명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인디언들이 문화적 제노사이드에 저항하거나 무장 투쟁을 도모할 경우에는 언제라도 물리적 방식의 제노사이드를 실행에 옮길 준비가 되어 있었다.

프랭크 초크(오른쪽)와 커트 조나선 위스콘신 대학 교수

 

그렇지만 1890년 이후의 미국 정부의 인디언 정책을 ‘문화적 제노사이드’라는 개념만으로 설명한다면 이는 사태의 진상을 왜곡할 위험을 안고 있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미국 정부는 인디언들에게 보장된 최후의 경제적 근거마저 체계적으로 파괴했기 때문이다.

1887년에 통과된 도스 단독토지보유법안(Dawes Act)은 보호구역 내의 토지에 대해 인디언 부족 공동체가 가지고 있던 소유권을 박탈하기 위한 시도였다. 이 법에 따라, 부족 공동체의 소유로 남아있던 토지 가운데 일부는 각 부족 가정의 대표자에게 분배되었지만, 대부분의 알짜배기 땅은 몰수되어 자유 경쟁에 의해 매각되거나 백인들에게 무상으로 분배되었다.

1889년 오클라호마에서 백인 이주자들이 체로키족의 땅을 먼저 차지하기 위해 몰려들고 있다.

 

인디언들의 토지를 판다는 포스터

출처 : 푸른 장미!!!
글쓴이 : 푸른 장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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