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즈노 교수 사태의 진실

[스크랩] 미즈노 씨는 일구이언(一口二言)하지 않았다.

그리운 오공 2013. 2. 13. 10:00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미즈노 씨의 한국 비판 내용은 일본인이 왜곡 날조한 역사를 재활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어떤 이는 미즈노 씨가 한국에서 일체 그런 발언을 안 했다가 자기 나라에 가서 한국을 비판하는 책을 썼다는 식으로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것 또한 사실이 아니다.

 

 미즈노 씨는 여기 저기에서 일본인이 날조한 역사가 한국에서 재활용되는 현상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 본인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이 블로그에서 소개한 왕인이나 탐징에 관한 내용은 광주일보의 연재 칼럼에서 2001년에 그가 지적한 바가 있다.

 

 그리고 동해 표기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여기에서도 언급했듯이 1992년에 신문 투고를 통해 문제 제기한 바가 있다. 앞으로 밝히겠지만 제가 알아본 결과로는 그가 일본에서 낸 저서에서 지적한 문제들은 대부분 그가 한국에서도 언급했던 내용들이다. 물론 그는 방송에 출연하면서 그러한 문제에 언급한 적은 없었으나 (단 한번 KBS의 신간 도서 소개 프로에 나와 그가 이러한 문제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본 기억은 있다) 그것은 그가 출연한 프로가 대부분 교양 오락프로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학술 발표나 신문 잡지 칼럼 등을 통해 그는 꾸준히 자신의 견해를 밝혀 왔다. 따라서 그는 한국 사람 몰래 한국을 비방한 책은 쓴 것은 아니다. 
 
 아래 글은 2003년 9월말에 한국 정신문화연원에서 열린 학술심포지엄에서 그가 발표한 발표요지 내용이다. 여기에서도 그는 일관되게 왜곡된 역사의 재활용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

 

http://news.media.daum.net/society/labor/200309/30/khan/v5126569.html

 

 

 역사에 대한 자의적 해석의 위험성

 

 1. 들어가며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역사 교과서 문제가 외교 현안으로 거론되고 있다. 지난 4월에 일본의 일부 보수적 인사들이 편찬한 중학교 역사 교과서가 일본 문부과학성(文部科學省)의 검정을 통과 한 것이 그 발단이었다. “새로운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新しい敎科書を作る會)”이라는 단체가 만든 이 교과서에는 일본의 침략 행위나 식민지 통치를 정당화시키는 내용이 들어 있다고 한다. 한국의 여러 시민단체는 즉각 일본의 교과서 문제에 대해 강력 항의하고 나섰고 한국 정부는 일본에 교과서 수정안을 전달하는 사태에까지 일렀다.
 그러나 그동안의 일본 역사 교과서를 둘러싼 논의를 살펴보면 왜 일본인이 역사를 자의적(恣意的)으로 해석하려고 하는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본고에서는 한국의 국사 교과서 기술을 검토하면서 역사의 자의적(恣意的) 해석의 위험성과 그 후유증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2. ‘왕인’에 관한 기술(記述)

 

 백제의 아직기와 왕인은 일본에 건너가서 학문을 가르쳤는데, 이 때 한학은 일본인에게 문학의 필요성을 인식시켜 주었으며, 유교의 충요 사상도 보급시켜 주었다.(『國史』 p.80)

 『日本書紀』(應神天皇16年)에는 백제에서 일본에 건너간 王仁이 5세기 포에 각종 經典(『古事記』에서는 『論語』와 『千字文』)을 전해 주었다고 하는 기사가 있다. 현전(現存)하는 『千字文』이 5세기에 아직 성립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王仁이 『千字文』을 전했다는 시사는 의심스럽다. 『日本書紀』의 기록만을 무비판적으로 이용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다만 현존하는 『千字文』 이외에 魏(220~265年)이 鍾繇가 편찬한 『千字文』이 있었다고 하므로 王仁에 의한 『千字文』 전래를 전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다. 한국에서 王仁에 관한 기록이 처음으로 나온 것은 한치윤(韓致奫, 1765~1814年)이 펴낸 『海東繹史』인데 일본측 자료 『和漢三才圖書』의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아울러 현재 왕인이 전라남도 영암군에서 태어났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으나 이 주장도 1932년 전라남도 나주 영산포(榮山浦)에 있던 일본계 本願寺 주지인 아오키 게이쇼(靑木惠昇)이라는 일본인이 주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3. 호류지(法隆寺) 금당 벽화에 대한 기술(記述)

 

 한편 고구려도 일본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고구려의 승려 혜자는 일본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고, 담징은 유교의 5경과 그림을 가르쳤으며, 종이와 먹의 제조 방법까지 전해 주었다. 일본의 자랑거리인 호류 사의 금당 벽화도 담징의 그림으로 전해진다. (『國史』 p.80)

 『日本書紀』(推古天皇 18年)에는 고구려 승려 담징(曇徵)이 일본에 건너가 염료와 종이 제조 기술 등을 전수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그런데 『國史』에는 이 담징이 일본 나라(奈良)에 있는 법륭사(法隆寺) 금당(金堂) 벽화를 그렸다고 기술하고 있다. 고구려 승려 담징은 579년부터 631년까지 생존했는데 문제의 법륭사 금당 벽화는 670년에 모두 소실되었다가 재건된 건물에 그려져 있다. 따라서 631년에 죽은 담징이 670년에 지어진 건물에 벽화를 그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실 담징이 법륭사 벽화를 그렸다는 기록이 나오는 사료(史料)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오류도 원래 일본 학자의 역사 왜곡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본측 사료인 『七大寺日記』나 『太子傳私記』는 이 벽화의 제작자가 ‘지리불사(止利佛師)’라는 사람이라고 전하고 있다. 이 ‘지리불사’는 법륭사 금당에 안치되고 있는 석가상의 제작자로 전해져 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후대에 와서 일본에서는 이 ‘지리불사’와 담징이 혼동되어 “법륭사 벽화는 담징이 그렸다”는 속설이 만들어졌다. 이 속설이 언제부터 전해져 온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19세기에는 이미 널리 유포되고 있었던 것 같다. 다카야마 죠규(高山樗牛)라는 일본 학자는 그 저서에서 “법륭사 금당 벽화의 작자는 지리불사보다 담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의 국사 교과서의 기술은 이 속설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4. 맺는 말

 

 지금까지 살펴본 두 가지 사례는 일본인이 왜곡한 역사를 한국인 그대로 인용하고 국사 교과서에까지 반영시킨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무심코 또는 긍정적인 뜻으로 윤색한 역사가 후세에 엉뚱한 결과를 빚은 전형적인 예라고도 할 수 있다. 동시에 일본에 의한 역사왜곡을 비판하는 한국 연구자들도 자기에 기호(嗜好)에 맞는 역사 왜곡이라면 적극 수용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日本書紀』에 나타난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나 神功皇后의 ‘삼한정벌(三韓征伐)’에 대해 역사적 근거가 없다고 비판하면서 王仁이나 曇徵에 대한에 대한 『日本書紀』의 기사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자세를 설명할 수 없다.  
 일본 역사 학자인 나가야마 야스오(長山靖夫)는 역사의 자의적(恣意的) 해석에 대해 “조작된 역사는 결국 역사를 날조한 자도 통제(統制)할 수 없게 된다”, “감동적으로 윤색된 역사는 그것을 믿는 자(者)를 하여금 일정한 방향에 이끌어 간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아름다운 역사와 상반된 파국적인 결과를 낳는다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다시 말해 역사 왜곡은 대부분 역사를 아름답게 윤색하고 싶다고 하는 긍정적인 발상에서 비롯된다는 것, 한국인이나 일본인을 막론하고 누구나 그러한 발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 그리고 일단 윤색되고 날조된 역사는 그 날조자의 뜻과 관계없이 결국은 부정적 파급 효과를 미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역사 교과서 문제는 결코 정치적인 맥락에서 풀 수 없으며 최종적으로는 양국 연구자들이 참여한 자리에서 역사의 윤색이나 자의적인 해석이 최대한 배제된 조건 아래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5. 참고 자료

  (참고문헌과 각주는 생략했다)

 

 

 그는 발표요지에서 [역사 교과서 문제는 결코 정치적인 맥락에서 풀 수 없으며 최종적으로는 양국 연구자들이 참여한 자리에서 역사의 윤색이나 자의적인 해석이 최대한 배제된 조건 아래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해 일본의 역사 왜곡 교과서를 편들지 않았다.

출처 : 미즈노 교수 사태의 진상을 밝힌다
글쓴이 : 배달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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