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즈노 교수 사태의 진실

[스크랩] 미즈노 씨의 담진(曇徵) 비판

그리운 오공 2013. 2. 13. 10:00

  지금까지 보고 왔듯이 미즈노 씨의 한국 비판은 우리나라 사람의 역사 인식 자체를 문제삼는 게 아니라 일본인이 왜곡 날조한 역사를 한국인이 재활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자세는 고구려 승려 담징(曇徵)에 대한 비판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난다. 

 고구려 승려 담징은 6세기 초에 일본에 건너가 종이나 먹의 제조 방법을 전수한 사람이다. 그리고 일본의 사찰인 호류지(法隆寺)의 금당 벽화를 그린 인물로 전해진다. 우리나라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일본 나라 호류지(法隆寺)에 있는 금당 벽화는 고구려 승려 담징이 그렸다”는 내용이 나타난다.

 

 그런데 미즈노 씨의 주장에 따르면 이것은 사실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먼저 담징이 일본에 건너간 시기는 610년이다. 정신문화연구원이 펴낸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담진은 579년에 태어나 631년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어쨌든 610년에 일본에 건너갔을 때는 이미 성인이었던 것은 틀림없다. 그런데 호류지(法隆寺)는 7세기 말에 모두 불에 타 없어진 후에 재건된 것으로 알려졌다. 7세기 초에 성인 나이로 일본에 건너간 담징이 어떻게 7세기 말에 불에 탄 호류지의 금당에 벽화를 그릴 수 있다는 말인가? 당시의 수명을 생각하면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담징이 호류지 금당 벽화를 그렸다는 설은 의심스럽다는 것이 미즈노 씨의 주장이다.

 

 그러면 담징이 호류지의 금당 벽화를 그렸다고 주장하기 시작한 사람은 누구일까? 미즈노 씨에 따르면 역시 일본인이라는 것이다. 일본에는 호류지 금당 벽화를 ‘도리후시’라는 불사(佛師)가 그렸다는 전설이 전해 오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도리후시’하고 ‘담징’이 혼동되어 결국은 [당징이 후류지 금당 벽화를 그렸다]는 전설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전설은 일본 근세에는 이미 널리 퍼져 있었다고 하니까 당연히 일제 강점기에 한국에도 전해졌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나라 국사 교과서에 실린 [담징이 호류지 금당 벽화를 그렸다]는 구절은 일본인의 잘못된 주장을 그대로 실은 결과다. 담진이 호류지 금당 벽화를 그렸다고 기록한 사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일찍이 우리나라 원로 사학자인 이홍직 씨에 의해 지적된 바가 있다고 한다. 한반도 고대 삼국이 왜에 선진 문물을 전수해 준 것은 천하가 공인하는 역사적 사실인데 무엇이 부족하다고 일본인이 날조한 속설까지 동원할 필요가 있겠는가?

 

 임나일본부설이나 신공황후의 삼한정절 같은 일본의 역사 날조에는 분노의 목소리를 높이면서 자기 자존심에 맞는 담징 벽화 이야기는 그대로 교과서에 싣는 이중잣대는 도리에 맞지 않는다. 이러면서 어떻게 일본의 역사 왜곡을 비판할 수 있겠는가?

출처 : 미즈노 교수 사태의 진상을 밝힌다
글쓴이 : 배달부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