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즈노 교수 사태의 진실

[스크랩] 미즈노 씨는 왕인 박사의 존재를 부인한 적이 없다(1)

그리운 오공 2013. 2. 13. 10:01

 항간에 떠도는 소문에 따르면 미즈노 씨는 저서에서 왕인 박사의 존재를 부인한 것처럼 알려져 있다. (특히 그를 비판한 [월간 동아] 05년 6월호의 기사는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 왕인 박사는 백제 사람으로 4세기 초에 일본에 건너가 일본(왜)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하고 일본의 왕세자의 스승이 되었다고 전해지는 인물이다.

 

 분명 미즈노 책에는 이러한 통설을 비판한 부분이 전재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과 달리 미즈노 씨는 왕인 박사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백제에 의한 문화 전수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았다.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왕인 박사의 생가가 전라남도 영암군이 아니라는 것과 왕인의 묘라고 알려져 있는 유적이 그 근거가 희박하다는 것이다.

 

 먼저 영암군의 왕인 박사 생가에 관한 부분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미즈노 씨의 주장은 왕인 박사가 영암 출신이라는 문헌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서 비로소 영암군이 왕인 박사의 유적지로 알려졌다는 것이다. 왜 영암군이 왕인 박사의 유적지로 알려졌냐면 일제 시대에 일본인 승려가 그렇게 주장하면서 왕인 박사의 동상을 세우려는 운동을 벌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 일제는 한국의 신민지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일본서기] 같은 일본 사서에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을 한국사에 억지로 연관시키는 짓을 많이 하고 있었다. 한국과 일본이 역사적으로 인연이 깊으니까 한일합방도 타당하다는 논리다. 한 마디로 역사를 날조해서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하고 한국 사람을 회유하는 수단으로 이용한 것이다. 왕인 박사도 거기에 동원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일제는 친일파들을 동원해서 동경 우에노 공원에 왕인 박사를 기리는 비석을 세우는가 하면 이등박문이 앞장서서 오사카의 왕인 묘 근처에 왕인 신사를 세우기도 했다. 왕인 박사를 이용해 [내선일체]라는 그들의 식민지 지배 논리를 선전한 것이다.

 이러한 내용들은 미즈노 씨가 독창적으로 생각해 낸 것이 아니고 모두 한국인 연구자의 저서에서 인용된 것이다.

 

 해방이 되고 한 때 왕인 박사는 잊혀진 것 같았으나 1970년대 들어 영암군의 향토 사학자가 다시 왕인 박사의 출생지가 영암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해 영암군 거액을 들어 생가 주변을 정비하고 왕인 축제라는 축제까지 벌이고 있다. 최근에는 월출산 자락에 있는 마애불을 왕인 박사를 세긴 거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그것도 모자라 오사카에 있는 왕인 묘에 사절단을 파견하기까지 했다.

 

 참고로 오사카의 왕인 묘라는 것도 17세기 들어서 만들어진 것으로 일본 학계조차 인정하지 않는 의심스러운 사적지다. 게다가 이등박문이 한일합방을 합리화하기 위해 왕인 신사를 세운 장소이기도 하다. 영암군은 한일합방을 정당화하기 위한 유적에 사절단을 파견한 꼴이 되었다. 

 

 미즈노 씨의 주장은 왕인 박사의 존재나 백제에 의한 문화 전수를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의 자장은 이러한 의심스러운 유적, 그것도 한일합방을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된 유적을 재활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왕인 박사의 출생지가 영암군이라는 사료가 전무한 지금 상황에서는 그의 주장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최근에 영암군은 그럴듯한 왕인 박사 전설을 내세우고 있으나 지리적 조건이나 전설의 내용을 보아서 왕인 박사의 생가가 영암군 월출산 자락에 있다고 믿기에는 역부족이다)

 

 여기에서 내가 쓴 내용은 미즈노 씨 책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 아니고 한국인 연구자에 의해 이미 논증된 사실들이다. 그 출처는 다음 기회에 밝히고자 한다.  

 

 결론적으로 영암군의 왕인 박사 출생지는 일제 시대의 잔재를 이용해서 역사 창조와 지역 개발을 하려 것과 같다. 조상의 친일 행각이 들통나면 개망신 당하는 이 시대에 이게 무슨 촌극인가?

출처 : 미즈노 교수 사태의 진상을 밝힌다
글쓴이 : 배달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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