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즈노 교수 사태의 진실

[스크랩] 미즈노 씨 사태의 이면에 숨져진 진실(4)

그리운 오공 2013. 2. 13. 10:16

 앞에서는 미즈노 씨 비판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장팔현 강사(충북대 정치외교학과 시간 강사)의 저서([한국인이 본 왜진전])를 검증했다. 이 책은 역사에 관한 전문 서적이라고 하기보다는 강도 높은 일본 비판서인데, 검증 결과 장팔현 강사의 저서에는 기초적인 오류가 많이 발견되며 기본적인 사실 파악조차 안 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장팔현 강사는 일본 대학 재학 중에 가명(필명)으로 이러한 책을 썼고 그 내용이 신빙성이 결여돼 있다는 점은 문제점으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장팔현 강사는 시종일관 미즈노 씨가 가명으로 한국인 몰래 한국 비방하는 책을 썼다고 비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도 사실과 상당히 거리가 있다. http://blog.daum.net/paedalbu/3049259 참조.)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몇 번이나 지적한 바가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문제삼지 않는다. 가명으로 쓰든 익명으로 쓰든 필명으로 쓰든 본명으로 쓰든 누가 쓰든 그 내용이 객관적이고 타당성을 갖추고 있으면 크게 문제 될 게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장팔현 강사가 가명으로 쓴 책 [한국인이 본 왜인전]에 대해 한 마디 지적하고자 한다. 장팔현 강사의 책에는 남이 쓴 논문을 자기가 쓴 것처럼 인용한 부분이 있다.

 

 장팔현 강사는 자신의 저서에서 중국 사서에 보이는 왜오왕(倭五王)은 한반도계 왕족이었으며 왜오왕 중 한 명인 무(武)가 무령왕(武寧王)과 동일인이었다는 주장하고 있다. 

 일반인에게는 조금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 조금 부연 설명을 하자면 ‘왜오왕’이란 5세기 무렵에 중국의 동진(東晋)이나 송나라 등에 조공을 바친 왜의 다섯 왕을 말한다. 이름은 각각 ‘讚’’, ‘珍’, ‘濟’, ‘興’, ‘武’라고 한다. 이 다섯 왕이 언제부터 언제까지 왜국을 통지했는지 분명하지 않다.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일본 학자들은 ‘濟’를 윤경천황(允恭天皇), ‘興’을 ‘안강천황(安康天皇)’, '武'를 ‘웅략천황(雄略天皇)’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일본서기』의 내용은 꾸며진 부분이 많기 때문에 확실하지 않다. 장팔현 강사는 이 정체 불명의 ‘왜오왕’ 중 ‘무(武)’를 무령왕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武)’가 중국에 조공을 바친 5세기 말이 바로 무령왕의 재위(在位) 시기와 일치하고 ‘무령왕(武寧王)’의 ‘무(武)’가 왜왕의 ‘武’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또한 송나라 순제(順帝)가 ‘武’를 “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으로 책봉했다는 기사를 근거로 무령왕이 왜를 식민지로 통치했던 근거로 삼았다. (이 주장에 대한 타당성 검증은 뒤에 밀기로 한다.)

 

 나는 장팔현 강사의 책을 읽었을 때 그의 주장이 상당히 독창적이라고 생각했다. 왜가 백제의 식민지라고 주장하는 재야학자들은 수두룩하지만 왜의 무왕(武王)이 무령왕이라고 주장하는 연구자는 (그 주장의 타당성을 떠나서) 전무후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다음과 같은 신문 기사를 접하게 되었다.

 

 왜왕 무는 백제의 무령왕 / 소진철 교수 금석명문 논문 (94년 4월 4일자 조선일보 기사)
 개로왕 아들, 30년간 일 다스려 / 왜는 백제봉토 오왕이 칠지도 물려가며 통치
 일본 나라현 천리시의 석상신궁에서 발견된 칠지도의 명문에 나오는 왜왕 지는 백제 왕가의 일원이며 5세기 중국사서에 나오는 왜오왕은 지의 뒤를 이어 백제왕의 봉토인 왜를 다스린 열도의 통치자들이라는 연구가 나왔다. 원광대 소진철 교수(정치외교사)는 15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한일문화교류기금(이사장 이한기) 주최로 열리는 제30차 한일문화강좌에서 금석명문을 통해서 본 백제 무령왕의 세계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이 문제에 대해 계속 논문을 발표(본보 92년 5월7일, 93년 6월17일자 참조)해온 소 교수는 특히 왜오왕 중의 무는 백제의 무령왕이라고 밝혀 주목을 끌고 있다.

 소 교수에 따르면 왜왕 지 는 백제왕과 종친관계에 있는 골족으로 본명은 지이며 봉토인 왜로 떠나면서 백제왕으로부터 칠지도를 하사 받았다는 것이다. 소 교수는 칠지도 명문이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주는 하행문서 의 형식을 지니고 있으며 왜왕을 후왕 이라 부르고 있고 선세 후세 세세처럼 왕가종친에게나 쓰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증거로 들었다. 소 교수는 또 진서 송서 등에 나오는 왜왕 찬, 진, 제, 흥, 무 등은 왜왕 지의 후손으로 칠지도를 물려받아 가면서 5세기 왜국을 통치했다고 주장한다. 일본 학계가 왜오왕 을 천황가계에 편입시키고 특히 무를 웅략천황에 비정하는데 대해 소 교수는 양자의 즉위년과 사망년을 비교해 서로 일치하지 않음을 밝히고 "천황과 왜왕은 계보를 달리하며 한 명도 서로 중복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소 교수는 이어 왜왕 무가 서기 478년 송 순제에게 바친 상표문 의 분석을 통해 무가 백제 개로왕의 태자 사마군이라고 주장한다. 무(武)는 상표문 에서 고구려의 공격으로 위기에 빠진 백제를 지원해 줄 것을 호소하면서 부형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는데 이는 475년 고구려의 공격으로 사망한 개로왕과 그 왕자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소 교수는 이어 무는 10대에 왜왕이 됐다가 40대에 백제왕인 사마왕으로 환국해 백제중흥을 위해 노력했으며 사후 무령왕이란 시호를 추증받았다고 지적한다.

 소진철 교수는 “일본 학계가 백제가 일본의 봉토였다는 전제와 일본서기 등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바탕으로 이에 짜 맞추다 보니 무리한 해석을 하게 됐다”며 “아직도 일본에서 통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 같은 주장들을 벗어나야 한일 고대관계사는 올바로 파악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신문 기사에 나타난 소진철 교수의 주장과 [한국인이 본 왜인전]에 나타난 장팔현 강사의 주장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소 교수 기사 : 소 교수는 이어 무는 10대에 왜왕이 됐다가 40대에 백제왕인 사마왕으로 환국해 백제 중흥을 위해 노력했으며 사후 무령왕이란 시호를 추증받았다고 지적한다.

 

 장팔현 강사 주장 : ......475년에 20세로 이곳(왜)에 다시와 왜왕무(武)로 501년 10월 경까지 제후로 있다 501년 말에 환국, 523년까지 무령왕 사마대왕으로 즉위했음을 알 수 있다.(255쪽) 

 

 소 진철 교수 기사 : 왜왕 무가 서기 478년 송 순제에게 바친 상표문의 분석을 통해 무가 백제 개로왕의 태자 사마군이라고 주장한다. 무(武)는 상표문 에서 고구려의 공격으로 위기에 빠진 백제를 지원해 줄 것을 호소하면서 부형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는데 이는 475년 고구려의 공격으로 사망한 개로왕과 그 왕자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장팔현 강사 주장 : 왜왕 무는 477년과 478년 5월 송나라에 사신을 파견하는데 3년전 부왕과 형의 죽음(개로왕과 태자 흥)을 상세히 알리면서 3년상이 끝나는 대로 100만 대군으로  무도한 고구려를 칠 테니 송나라에서 도와달라고 상표문을 알린다.[257쪽]

 

 한 눈으로 아주 유사한 주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진철 교수가 논문에서 이 주장을 편 시기는 1994년이며 장팔현 강사가 책을 낸 시기는 1997년이다. 문제는 장팔현 강사가 책의 어디에도 논문 인용처를 밝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더 노골적인 부분도 있다. 장팔현 강사는 저서에는 백제가 왜왕에 보냈다고 전해지는 칠지도(七支刀)에 관한 주장이 나온다. 현재 이 칼은 일본의 이소노카미(石上) 신궁(神宮)이라는 신사에 보관되고 있는데 장 강사는 이 칼이 백제왕이 왜왕에게 하사(下賜)한 것이며 백제왕이 왜를 지배한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인들이 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칼에 새겨진 문구를 지웠다고 주장하고 있다. 먼저 장팔현 강사의 주장을 살펴보자.

 

 일본에서 질지도(七支刀)는 ‘일본서기’ 신공기를 근거로 하여 백제에서 369년에 만들어 백제 사신 구저(久氐) 등이 “왜”의 도움으로 고구려 침입을 막게 되어 감사하다는 표시로 야마토 조정에 372년(신공 52년이라 기록되어 있으나 2주갑 내려 실제는 372년이라 주장) 헌상한 것이라 주장한다. 일본서기에는 원래 육차(六叉)로 나온다. 일본인들이 백제왕이 왜왕지(旨)에게 보낸 신임장 성격의 칠지도에 대하여 얼마나 왜곡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칼을 처음 발견한 일본인 관학자 쿠다마사토모(管政友)는 칠지도의 첫 자인 태(泰)자를 근거로 이는 중국 진나라 태지(泰始) 4년(서기 268년)에 만들어 신공 52년(252년)에 헌상했다는 시간적으로 성립 불가능한 어리석고 우스운 주장까지 했다.
 이에 어거지임이 확연해지자 후쿠야마토시오(福山毎男)가 신공 초월 황후인 신공을 2주갑(60갑자가 두 번 순환한 햇수로 120년) 내려 372년에 태화(太和) 4년인 369년으로 해석함으로써 구색이 맞추어졌다고 생각되는지 이 주장이 오늘날 일본의 통설화되어 있다......우선 명문을 보자.

 

 泰□ 四年 □月 十六日丙午 正陽造百錬鋼七支刀 □辟百兵宜供供候王 □□□作 先世以來未有此刀 百濟王□世 奇生聖音 故爲倭王旨造傳□後世

 

 처음 이 칼을 발견한 쿠다마사토모가 태자로 시작하는 백제왕의 연호를 지우고 월도 지움으로써 구력 계산으로 백제왕이 누구인지 추적을 불가능하게 했음을 알 수 있다. 월만 있어도 백제왕이 누구인지 구력을 환산해 보면 금방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 후왕의 이름을 지운 점이다. 이는 후왕의 이름이 사아군(斯我君) 같이 무슨 무슨 군과 같이 나와 있으므로 일본서기나 백제 본기에 똑같은 이름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 백제왕 세세인데 세(世)자를 한 자 삭제함으로써 대신 자(子) 자를 집어넣어 백제왕과 왕세자로 왜곡하기 위함이다. 이처럼 왜곡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교묘히 삭제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삼국 시대에는 세자(世子)라는 단어가 없었다. 모두 태자였다. 아마 이 점은 몰았던 것 같다......이 칼이 하사된 시기는 4C 말에서 6C사이로 보인다. 백제계 제후에게 보낸 것으로 당시 왜 5왕 중 초기 찬(贊), 진(珍)은 가야계로 보인다. 410년에서 435년 사이로 이 때는 가야계가 백제를 압도했던 것으로 보인다......그러므로 이 때 백제계 제후였던 지(旨)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이 칠지도를 보낸 것으로 보인다. 

 고대사에 관한 지식이 있어도 이해하기 어려운 난해한 문장이지만 요컨대 쿠다 마사토모라는 일본인이 칠지도에 새겨진 문구를 날조해 이 칼이 백제왕이 내린 하사품이라는 사실을 은폐하려 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1993년 6월 17일자 조선일보 기사를 보자.

 

 소진철교수 일 나라 유물 명문연구 논문 / 日 학자 헌상 주장 年代해석 착오서 비롯 / 제후 권력부여 상징하는 ‘信標’
 한-일고대사의 베일을 벗길 열쇠의 하나인 奈良현 天理시 石上神宮의 칠지도는 백제의 대왕이 제후국인 왜 열도의 왕에게 하사한 것이라는 연구가 나왔다. 원광대 소진철 교수(외교사)가 최근 이 대학 마한-백제문화연구소에 제출한 논문 “칠지도 명문의 새로운 해석-왜왕 지는 백제의 골족”.

 소 교수는 이 논문에서 고대 한-일관계사 연구의 키를 쥐고 있는 칠지도가 일본 학계에 의해 자의적으로 왜곡-해석돼 온 현실을 통렬히 비판, “칠지도는 백제대왕이 封土(왜)로 떠나는 그의 제후에게 신임의 증표로 하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石上神宮의 칠지도는 오랫동안 비장돼 전해오다 1874년 세상에 공개된 것으로 曲玉, 銅鏡과 함께 일본 고대의 세가지 보물(三種神器)로 꼽히는 것이다. 이 칼이 고대 한-일관계사의 베일을 벗길 보물로 주목되는 것은 앞뒤 표면에 정교하게 금상감한 61자의 정교한 명문 때문. 명문 속에는 칠지도의 제작연대와 제작 주체, 동기 등이 담겨있어 고대 정치제도와 국가간 역학 관계를 실증적으로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소 교수는 그러나 일본 학계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근거로 삼기 위해 칠지도의 명문을 멋대로 일본서기의 허위 기사에 견강부회하는가 하면 있지도 않은 사실을 날조했다고 주장했다. 명문 중 칼의 제작연대와 관련된 부분(泰○)은 발견자인 管政友에 의해 고의적으로 훼손됐다는 것이 재일 사학자 이진희 씨의 주장. 이를 기화로 후대의 학자들은 칠지도가 泰始 4년(서기 268년)에 만들어져 신공 52년(서기 252년) 일본왕에 헌상됐다는, 시기적으로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우스꽝스런 주장을 펴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또 최근까지 칠지도에 관한 통설로 군림하고 있는 금석문 대가 福山敏男의 학설에 따르면 “생을 왜왕에게 의탁하고 있는 백제왕과 왕세자가 공동으로 제작, 헌상한 것”으로 돼 있다고 소 교수는 밝혔다.

 소 교수는 일본 학계가 이처럼 무리한 해석을 하는 것은 칠지도의 연대를 중국 연호로만 인식하려는 태도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무령왕릉 지석에서도 보듯, 백제의 왕들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고 지적, “명문중의 백자왕이 중국의 연호나 사용하는 제후와 같은 존재였다면 어떻게 왜왕을 후왕이라고 지칭했겠는가”고 반문했다.

 백제 독자연호 사용 / 이에 따라 소 교수는 칠지도는 백제의 대왕이 정벌권이나 통치권과 같은 권력을 부여하는 상징적 의식의 신표로 왜왕에게 하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이름이 ‘旨’인 왜왕의 정체에 대해서는 찬 진 제 흥 무 등의 이름으로 5세기 중국사서에 등장하는 왜 오왕과 같은 신분의 당시 왜의 지배층으로서 백제 왕실과는 인척관계에 있는 골족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태익 기자)

 

 한 눈에 밑줄 진 부분이 너무 닮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장 강사는 논문 인용처를 밝히지 않았다. 장팔현 강사의 칠지도 명문 해석은 다음과 같다.

 

 태□ 4년 □월 16일 병오날 정오 무쇠를 백 번이나 두들겨서 칠지도를 만든다. 이 칼은 백병(적군)을 물리칠 수 있다. 후왕 □□□이 만든 것으로 선사 이래 이런 칼을 가진 이가 없는데 백자왕(백제왕의 미칭)은 대대로 성스러운 소리에 생을 의지하여 안전하니 고로 이와 같은 칼을 왜왕 지를 위해서도 만들어 주니 후세에 잘 전할 지어다.

 

 소진철 교구의 칠지도 명문 해석은 다음과 같다.

 

 태□ 4년 □월 16일 병오일 정오에 무쇠를 백 번이나 두들겨서 칠지도를 만든다. 이 칼은 백병(재앙)을 피할 수 있다. 마땅히 후왕(旨)에게 줄 만하다......先世 이래 이런 칼을 가진 일이 없는데 백자왕(백제왕의 미칭)은 세세로 寄生聖音(길상어)하므로 왜왕 지를 위해 만든다. 후세에 잘 전할 것이다.

 

 두 사람의 해석이 거의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부 ‘기생성음(寄生聖音)’에 대한 해석이 다르기는 하지만 장팔현 강사는 “우리나라 학자들도 이 ‘기생성음(寄生聖音)’ 부분을 좋은 뜻으로 고대에 쓰이던 말로 길상어(吉祥語) 정도로만 해석해 놓아 제대로 대응을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칠지도 명문의 해석을 볼 때 이 “우리나라 학자”란 소진철 교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소진철 교수의 학설을 출처를 밝히지 않은 채 거의 그대로 인용하면서 세부 사항에 대해서는 소진철 교수의 주장을 비판하고 있는 셈이다. 

 

 참고로 장팔현 강사는 칠지도에 관한 부분에서 언급한 일본인 관학자의 이름은 “쿠다마사토모”가 아니라 “간마사토모[管政友]”이다. 장팔현 강사는 칠지도의 명문이 간마사토모에 의해 훼손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것은 소진철 교수가 밝힌 것처럼 재일 사학자 이진희 교수의 주장이다. (그리고 지난 2005년 일본의 가시하라(樫原) 고고학 연구소가 이 칠지도에 대해 정밀 조사를 벌였으나 명문을 날조한 흔적은 찾을 수 없었고 이진희 교수의 주장은 현재로는 일단 부정된 상태다.) 또한 장팔현 강사는 “삼국시대에는 ‘세자(世子)’라는 단어가 없었다”고 주장하며 명문이 날조된 근거로 보고 있으나, (명문을 ‘世子’로 보는 일본 학계의 손을 들어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면 광개토왕비에 “世子儒留王”라고 새겨져 있는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소진철 교수의 논문을 무단으로 인용한 것도 문제지만 장 강사 본인에 주장에도 역시 기본적인 사실 확인이 안 된 부분이 많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남이 쓴 논문을 인용할 때는 반드시 그 출처를 밝히는 것이 연구자의 기본 자세이다. 출처를 밝히지 않은 채 주지 주장인 것처럼 인용하고 더욱이 인용된 논문을 자기에 주장에 맞게 여기저기 손질한 다음, 원래 논문을 비판하는 방법은 올바른 연구 자세라고 할 수 없다. 

 물론 왜오왕이나 칠지도에 관한 일본 학자들의 주장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 그러나 그 문제를 지적하려고 할 때 한국 연구자의 논저를 인용하면서 비판을 해야지 아무리 동기가 순수하다 하더라도 남의 논문을 무단으로 인용하면서 자기의 주장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장 강사도 자기 제자 지도하면서 논문 쓸 때 남의 글을 그냥 베껴 써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장팔현 강사는 최근에 와서 본명으로 쓴 책에서는 소진철 교수 논문 인용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을 밝혀 둔다.)

출처 : 미즈노 교수 사태의 진상을 밝힌다
글쓴이 : 배달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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