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즈노 교수 사태의 진실

[스크랩] 미즈노 씨 사태의 이면에 숨져진 진실(2)

그리운 오공 2013. 2. 13. 10:17

 작년 9월에 글을 쓰고 나서 상당히 많은 시간이 흘렀다.

 

 나는 2년 전에 이 블로그를 쓰기 시작했다. 이제 일련의 사태의 내막을 모두 밝히고 블로그의 집필을 일단 마무리할 때가 왔던 것 같다. 앞에서 나는 미즈노 씨를 비판함으로써 모종의 이익을 쟁기는 자들이 있다고 밝혔다. 바로 그 중심 인물이 장팔현이라는 충북대 시간 강사(그는 인터넷 언론에 기고하는 기자이기도 하고 자칭 시민 운동가이기도 하고 일본 모 대학의 ‘박사’이기도 하지만 일단 여기에서는 강사라는 호칭을 사용하기로 한다)이다. 내가 면밀히 검토한 결과 그가 집요하게 미즈노 씨를 비판하는 이유는 순수한 학문적인 동기라고 하기보다 모종의 이익을 쟁기는 데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 이익이라는 게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개인적인 분풀이, 다시 말해 개인적 감정과 원망, 두 번째는 유명세 타기, 세 번째는 정치적인 이익 챙기기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여기에서는 첫 번째 이유인 “개인적 분풀이”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장팔현 강사는 미즈노 씨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러면 장팔현 강사는 무엇 때문에 미즈노 씨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을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장팔현 강사가 일본 유학 중인 1997년에 “한국인이 본 왜인전”이라는 책을 출간했다는 사실부터 알아야 한다.

 

 http://blog.daum.net/paedalbu/12539296

 

 장팔현 강사는 이 책을 한국에서, 그리고 일본인 몰래 가명으로 집필했다. 제목만 보면 일본 고대사에 관한 책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살은 그렇지 않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일본 비판서이다. 장팔현 강사는 이 책에서 일본이나 일본인, 일본 사회, 그리고 자기가 몸담고 있는 일본 대학, 자기를 지도하는 일본인 교수들을 상당히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다. 그 당시 장팔현 강사가 이 책을 장찬우라는 가명으로 낸 이유도 바로 그 내용 때문일 것이다. 만약 책의 내용이 대학 관계자의 눈에 띄게 되면 좋은 반응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며 아직 학위 과정에 있었던 그로서는 가명으로 책을 쓰는 게 상책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나는 장팔현 강사가 일본을 가명으로 비판했던 것 자체를 문제삼으려고 하는 게 아니다. 그 이유나 형식은 어떻든 자기 소견을 발표하는 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미즈노 씨에게 “일본에서 가명으로 한국을 비방하는 책을 냈다”는 비난을 퍼붓고 있는 인물이 한국에서 가명으로 일본을 비방(?)하는 책을 냈었다는 모순은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본다. 그리고 나는 앞에서 미즈노 씨가 가명으로 책을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힌 바가 있다. (http://blog.daum.net/paedalbu/3049259바로 그가 가명으로 냈다는 책에 미즈노 씨 본인의 사진과 본명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썼다는 가명(필명)도 이미 한국에서 낸 번역본에서 사용된 적이 있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지금 항간에 잘못 알려져 있는 것처럼 이 책은 한국인의 역사 인식 전체를 비판한 내용도 아니다. 미즈노 씨는 이 책의 머리말에서 “일본인의 역시 인식에 대한 한국인의 비판은 정론[正論]이다”라고 쓰고 있다. 그의 비판은 그러한 정론을 가장한 거짓된 일본 비방에 맞추어져 있으며 근거 있는 일본 비판은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팔현 강사가 낸 책에는 그의 경력은 나타나 있지만 책의 디를 보아도 본명도 사진도 실려 있지 않다. 그런데 미즈노 씨가 쓴 책에는 이 장찬우(장팔현 강사)가 출간한 “한국인이 쓴 왜인전”이 인용된 부분이 있다. 인용된 부분은 다음과 같다.
 
 2000년 이래 한일 관계는 인접국으로서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 우월과 콤플렉스의 상관 관계가 지속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2000년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구분해 볼 수 있다. (도표 생략) 한일 관계를 보면 상하 관계로 1승 1무 1패의 역사로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는 한국이 절대적인 우위를 가진 1,000년 이상 지속되어 오다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7년간이 무승부의 시대이고, 일본이 힘으로 지배했던 35년 10개월의 한일합방 때만 일본이 우위에 섰던 시기로, 역사 전체적으로 보면 극히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위 표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일본이 콤플렉스를 느낄 때는 한일간에 평화가 있고 한국이 문화와 기술이 일방적으로 일본에 흐르던 시기이다......그리고 우리가 문(文)의 국가라면 일본은 무(武)의 국가로서 우리가 강할 때는 일본이 감히 침략을 못하고 문화가 일방적으로 일본으로 흘러갔는데, 우리의 국력이 약해지고 문화의 힘으로 일본을 눌러 세력 균형을 이루지 못할 때는 일본으로부터 무(武)력만이 흘러들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일본에서 들어온 문화라야 고작 고구마(孝子麻→高貴麻), 고추(南草→南蕃草), 담배(南草) 뿐이었다. 한국에 줄 문화가 없었던 것이다. (“한국인이 쓴 왜인전” 204-206쪽)

 

 다만 미즈노 씨는 장팔현 강사의 주장을 한국인의 역사 인식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그대로 인용했을 뿐이며 거기에 반론이나 비판을 제기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책을 썼을 당시에는 미즈노 씨는 장찬우〓장팔현이라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미즈노 씨가 구체적으로 장팔현 강사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한 부분도 보이는데 그 부분은 다음과 같다.

 

 일본어로 솜을 와타(綿)라 하고......일본인들이 이 목면을 와타라고 하는데도 이유가 있으며 이도 순수한 한국어이다. 일본을 통일했던 오다노부나가도 1560년경부터 나고야 남방의 최대 목면산지인 치다반도(知多半島)를 차지했으므로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최고의 산업을 손아귀에 넣음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어린 시절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이 최고라고 할 때 “내 것이 와타야, 와타”라고 와타라는 뜻도 모르고 그저 최고라는 의미로 쓰던 기억이 난다. 한국어가 일본에 갔다가 다시 역수입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일본어 와타는 말 그대로 “왔다”로 풀이된다. 좋은 최고급 물건이 “물 건너왔다” “조선에서 건너왔다”에서 왔다만 남아 와타로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왔어요, 왔어요가 왔쇼이, 왔쇼이로 불림과 같다.(“한국인이 쓴 왜인전” 245-226쪽)

 

 요컨대 일본어의 ‘와타(솜)’이라는 말이 한국어의 ‘왔다’에서 온 말이며 일본인들이 축제 때 외치는 고함 소리 ‘왔쇼이’도 ‘왔어요’에서 유래됐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미즈노 씨는 그 저서에서 과거를 나타내는 선어말어미 “-았/았-”은 19세기 말이 되어서야 나타난 것이며 그것보다 오래된 형태인 “-엇-”도 15세기 말 경에 나타났으며, 15세기 이전에는 “-어 잇-”이었다고 주장해 ‘왔다’가 ‘와타’나 ‘왔쇼이’가 된 가능성은 낮다고 주장했다. 즉 장팔현 강사의 주장에는 근거가 없다는 견해이다. 장팔현 강사의 주장에 대한 미즈노 씨의 이의 제기는 이 문제(“왔다→와타”)가 유일한 것이지만 장팔현 강사는 몹시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장팔현 강사의 주장에 미즈노 씨가 간접적으로 비판한 것으로 보이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한국인이 쓴 왜인전”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주장이다.

 

 최근 미 정부의 자료 공개에 의하면 패전 직전 일본이 자국도 아닌 북한지역과 만주 지역에서 비밀리에 핵 개발을 추진했었다고 공표했다. 이 자료가 소련군의 북한 진주로 소련측에 넘어갔고 이후 소련이 핵 강대국이 되는데 도움이 됐다고 한다.(198쪽)

 

 미즈노 씨는 일본이 2차 대전 말기에 핵개발에 착수했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일본이 북한이나 만주 지역에서 핵개발(미국 자료에는 핵실험까지 했다고 나온다)을 추진했다는 주장에는 여러 자료를 근거로 들어 부인하고 있다. (당시 일본이 북한 지역에서 개발한 것은 핵무기가 아니라 화학 로켓용 과산화수소였다는 게 미즈노 씨의 결론이다) 이러한 반박 역시 장팔현 강사의 심기를 상당히 편하게 만들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동안 장팔현 강사가 인터넷 상에서 벌인 언행을 보면 그는 자기의 주장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견이 있는 인물에는 심한 적개심을 품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는 미즈노 씨의 주장에 타당성을 갖춘 반박을 못하고 있으나 대신 그를 극우파니 이중 인격자니 하면서 몰아세우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게 하면 일단 구체적인 반박이나 반론을 제기하지 않아도 여론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다고 계산했을지도 모른다.

 

 (미즈노 씨가 저서에서 장팔현[장찬우] 강사의 책을 인용한 것은 2002년이었으며 이 시기는 장판현 강사가 일본의 대학에 박사 논문을 제출을 앞둔, 그로서는 중요한 시기였다. 그러한 중요한 시기에 일본이나 소속 대학의 교수를 강도 높게 비판한 책을 쓴 사실이 알려지면 곤란했을 것이다. 장팔현 강사도 설마 한국에서 가명으로 썼던 책이 일본에 알려질 가능성에 대해서는 예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장팔현 강사의 책에는 그의 본명이나 사진은 실려 있지 않으나 그의 경력은 실려 있다. 자칫 잘못하면 그 책의 저자라는 사실이 일본에 알려질 수도 있었고 일이 커지기 전에 미즈노 씨에게 비난을 퍼붓고 사회적으로 매장시킬 필요도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추측이다)

 

 장팔현 강사가 아주 집요하게 미즈노 씨를 비판하기 시작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그것을 “원한과 분풀이”라고 표현했는데 정확한 표현인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자기가 자신만만하게 내놓은 주장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비판자의 입을 막고 아울러 여론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일석이조의 방법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러면 미즈노 씨의 주장이나 문제 제기를 떠나서 장팔현 강사의 저서는 학문적으로 타당성과 신뢰성을 갖춘 일본 비판서일까? 다음은 그 내용을 상세히 검토하기로 한다. (계속)

출처 : 미즈노 교수 사태의 진상을 밝힌다
글쓴이 : 배달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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